16.





희고 검은 풍경. 그 가운데 유일하게 색채가 스민 것은 오로지 오빠의 웃는 얼굴뿐이었다. 


얼굴, 머리카락, 눈동자까지. 전부 나와 너무나도 닮은 사람. 


이제는,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사람. 


진짜 죽었구나. 


현실은 그렇게 순식간에 나를 덮친다. 치솟는 울렁거림에 속이 저며진다. 미친 듯 감정이 소용돌이치는데, 그 이유가 쏙 빠지고 그저 감정만 남아 있다. 그 공백 사이로, 차가운 이성이 비집고 들어와 의문한다. 


왜, 이런 감정을 느끼지?

그 근원을 알 수가 없다. 


이제야 나아질 뻔한 관계가, 이렇게 갑자기 끊어진 것에 대한 상실감과 허무감. 내가 아는 이유는 그것밖에 이유가 없는데,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감정이다. 


게다가 군데군데 구멍난 기억. 


어쩐지, 거기에 모든 해답이 있을 것도 같은데.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장면은 새까만 암흑이요, 소리는 시끄러운 이명이다. 


"...내가 뭔가 잊어선 안 될 걸 잊고 있는 거야?" 


죽은 사람은 대답이 없으니, 의문은 허공에 흩어질 뿐이다. 


문득 여기 올 때부터 내내 손에 쥐고 있던 수첩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왜 가져왔는지 모르겠는데, 가져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품에 지니고 왔던 물건. 


이 수첩에 글자를 적어내리던 순간의 감정도 꼭 지금 이 순간만큼 강렬했다. 통증이 무서워 죽기 싫다고 생각하는 내가, 난생 처음으로 그냥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울었다. 


그리고 기억의 퍼즐은 또 빠져 있다. 차 안, 내 옆에 타고 있던 사람, 그 사람을 향한 내 감정. 그런 장면은 선명한데 또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는 죄 빠져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내 기억 속에 침범한 사람.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하던 나. 얼굴을 마주하던 순간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인 듯한데, 말도 안 될 정도로 깊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얼 공유하고 있었는지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뭘까. 난 대체 뭘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수첩을 펼쳤다. 기억처럼, 눈물자국이 남은 종이 위에 꾹꾹 눌러 쓴 글씨들을 읽어내렸다. 


마치, 현재의 내가 이렇게 될 것이란 걸 아는 양 적힌 내용들. 이상해. 내가 썼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쓴 기억이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썼는지 모르겠다. 


<알려고 하지 마.>

<잊어 버려.> 


유독 눈에 박히는 단어들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번에 떠오르는 건 또 다른 것. 


<그게 무책임한 행동이든, 그저 회피하는 것이든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그 순간의 감정도 선명하다. 그리고 여전히 상황은 빠져있다. 


그와의 기억은 유독 더 많은 게 빠져 있다. 나는 몇 번이나 그의 앞에서 무너졌고, 그는 나를 일으켜세웠다. 그러나 내가 무엇에 무너졌는지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드문드문 했던 말들을 떠올려 봐도, 무슨 말인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가득했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내가 살아있는 이유가 그 덕이라는 건 알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다른 글씨와 다르게 유독 흐리게 적힌 짧은 마지막 문장이 보인다. 


나는 도대체 뭘 잊어버린 걸까.


머리고 가슴이고 구멍이 난 것 같았다. 그 사이로 찬바람이 사무친다.


공허하고 추웠다.


그의 사진 앞에서, 수첩을 품에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17.



그의 잠든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잠이 더 달아나는 듯했다.


상처가 난 자리는 아프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 크기가 크면 시간이 지나도 짙은 흉으로 남아, 고통을 상기하게 되기도 한다. 불행이란 그런 상처이다. 나는 말할 것도 없었고,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너조차도 이따금씩 그 상처를 들춰보고 있지 않나.


이게 보통일 텐데.


나는 바로 며칠 전에, 가족을 잃고도 지나치리만치 평온하다. 통각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처럼 무감각했다. 그것에 아무리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해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든다는 것이다.


상황의 호오와는 별개로, 서늘한 위화감이 있다.


더 우스운 것은 지금 마음이 평온하다 하여, 이전에 아팠던 기억까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페어리를 만나기 이전, 악령이 된 오빠를 목도했을 때, 죽음을 직시했을 때, 기억을 잃고 난 후 이유가 뻥뻥 구멍 난 감정을 느꼈을 때의 모든 순간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그저 남의 것인 양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왜 스스로를 좀먹는 그런 감정을 사서 느끼지, 하는 그런.


이 상태가 어쩌면, 정상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이미 내 온몸을 잠식한 이 안식이 너무 달아서. 잃고 싶지가 않았다. 너와 공유하는 이 평온한 행복은, 지금 이 상태가 아니면 결코 누릴 수 없을 종류의 것임을 알기에.


그러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 이것을 놓치지 않기로 발버둥쳐볼 작정이었다.


선악. 그런 건 내게 하등 의미 없다. 어디에도 완전한 선악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설령 페어리가 정말 순수한 악의 결정체인 악마라 하더라도 딱히 상관없었다. 그녀가 무엇이든 그녀가 내게 가져다준 것은 나를 해방시켜주었으니까. 그와 함께 웃을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잠든 그의 얼굴을 다시금 빤히 쳐다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잘 자."


그 이마에 살짝 입술을 내리누르고,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18.



선이란 무엇이고, 정의란 무엇이고, 옳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사실, 그런 말들이 결국 허울은 좋지만 누군가 개인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말들일 뿐이라 생각한다. 단지 그 '선'으로써 지킬 수 있는 '개인'의 숫자가 '악'이 지킬 수 있는 '개인'의 수보다 많다는 것뿐.


그렇지 않은가. 세상은, 결국 다수가 이끄는 방향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 그 다수에 속하지 못하는 자들의 선과, 정의와, 옳음은 어디에 버려지나.


나는 페어리의 생각 자체가 딱히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틀리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이다. 그저 그녀의 가치가 다수보다 소수에 맞춰져 있기에, 그를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결말이 그려지기에, 그렇기에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그 말이 딱히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세상을 이끄는 힘은 다수에서 나오는 게 맞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내 안위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페어리는 그런 나에게 안식과 평온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나에게' 페어리는 옳은 길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가능하지 않기에 문제이지.


세상은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며, 그렇기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한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세상이 가능했다면 이런 충돌이란 것이 생길 리 없다.


나는 내가 망가져있음을, 여기서 벗어나면 완전히 무너져내릴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상처가 너무 커서 도저히 극복할 수조차 없어 회피했다. 그럼에도 공허감과 슬픔 등을 온전히 지워낼 수 없었다. 기억을 지우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회의적이다. 그 상태로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페어리는 그 모든 것들을 그냥 내게서 도려내 버렸다. 그럼으로써 생에 처음으로 완전한 해방감을 주었다.


잘못된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발을 들였고, 그 단맛을 알았고,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끔찍하게 두려워졌다. 그러면 어쩌겠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수밖에.


단지, 그 방법이 충돌이어야만 하는 점은 안타깝다. 늘 무슨 일이 있을 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지녀야만 하니까.


"다 쉽게, 잘 풀렸으면 좋겠어."


그러나 결국 모두가 행복할 결말 따위, 있을 수 없을 테니.


누군가는 그 안에서 희생되겠지.



19.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아직도 벌벌 떨리는 차가운 몸을 끌어안고 조금 전에 벌어진 일을 반추했다.


은율 씨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은율 씨는 오늘 잡힌 멜로니였고, 나에게 인간의 치유를 부탁했다.


이런 상황은 단언컨대 처음이었을 테다.


다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냥 지나쳤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병원에 가겠지. 운이 더럽게 나쁘면 불구가 될 수는 있겠네. 치명상은 애초에 치료할 수 없으므로, 죽으면 운이 나쁜 것. 살면 운이 좋은 것. 그런 식으로 넘겼다.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는 상황에만 놓여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케이지 속 인간의 선택지는 나밖에 없었다.


당장 죽지는 않을 만한, 그러나 착실히 죽어가고 있으며, 방치된다면 언젠가는 이곳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릴 인간.


나는 쉽게 할 수 있는 일, 그러나 나 말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


내가 그런 상황에 나서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나는 어쨌거나 세상을 보는 눈이 이전보다 훨씬 관대한 상태이니까.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에게 그럴 만한 아량을 준 이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의 힘으로 안식을, 행복을 찾았기에, 나는 그녀를 위해 움직일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아냐, 그렇지 않아. 다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그녀를 위해 어떻게 나서겠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기껏해야 단순히 악마전의 수를 늘려서 이 상태를 유지하자, 정도?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회의가 생기고 있는데. 그럼, 나는.


그녀를 위해 움직이는 게 맞나?

그녀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게 맞나?



너희가 이렇게 이기적이니까. 제대로 일도 안하고 농땡이 피우고. 계속 이렇게 질질 지저분하게 끌고 있고. 대체 하는 게 뭐야 너는? 인간 치유해주기?


차갑고 섬뜩했던 단조로운 어조가 다시금 귓가를 울린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페어리의 물음 아닌 물음에서 틀린 말은 딱 하나뿐이었다.


인간을 치유해준다는 것.


그 외에는 전부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20. (궁예질하구 실패함 ㅋ)



어차피 곧 다 죽을 거야.

이 모든 건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서야.


처음에는 죽는다는 말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단어 의미 그대로의 죽음. 정말로 이 세상에 종말이라도 도래한다는 의미인 것인지. 곧 죽을 것이라면, 더더욱 이런 짓에 의미가 없지 않나?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녀의 방식에 더욱 회의가 들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 말을 계속 되뇌어 보니, 조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잘 이해하긴 힘들어도, 어쨌든 나름의 방식으로 마법전사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페어리.


다 죽을 것이라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친구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페어리의 친구에 평범한 인간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는 '죽음'의 의미는, 단어 그대로의 죽음이라기보다는 '마법전사'들의 죽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혹은, 마법전사의 '힘'의 소멸.


아는 것은 그다지 없지만, 마법전사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마법전사는 원래 순환하듯 사라지면 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한다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마법전사의 수는 줄어들기만 하고, 늘어나지는 않는 듯했고. 이건 그 마법전사의 힘의 근원이 되는 미지의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녀는 그 고갈을 막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녀가, 악령의 힘을 받아들여서. 악령 그 자체가 되어서.


페어리가 나타난 후부터는 인간이 악령이 되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을 무가치하게 여기므로,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를 비롯한, 그녀의 힘을 받은 마법전사들이 이전과는 달라졌다.


거기에, 어제 블랙체리 씨가 했던 말이 얹힌다. 10년 전 페어리에게는 괴변이 온 것이고, 지금의 우리는 그 때의 페어리와 비슷한 상태라고.


그녀가 악령의 힘을 부여하는 무언가가 됐다는 게 가망 있는 가설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악령의 힘이나, 마법전사의 힘이나. 결국 인간의 욕망의 틈을 파고들어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게 해주는 힘이라는 건 비슷하지 않나? 이상할 것도 없지.


이게 정말이라면 페어리의 사랑의 형태가 어떤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다 망상이지. 뭐."


페어리는 대답해주지 않고.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크리스탈에게 문자를 보내봤지만 그도 답이 없다.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아무것도 오지 않는 휴대폰 액정을 잠시 노려보다가 그냥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입술에 물고있던 담배는 그냥 손으로 짓이겨버렸다.


어차피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것보단 다른 것이니까.


몰라, 신경 안 쓸래.



21. Rest





이젠 내 몸같은 피로감을 덕지덕지 매달고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하필 내 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눈부셔. 생각하고는 아, 소리를 냈다.


"해 떴구나."


잘 뜨이지 않는 눈을 꾹꾹 누르고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걷자 새하얗고 따스한 햇빛이 온몸으로 쏟아졌다.


"와."


분명 일주일 전만 해도 당연했던 풍경인데, 무슨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치르는 양 경이롭게 느껴졌다. 분명 많은 감정에 심란하기 짝이 없는 채로 어김없이 악몽을 꾸고 눈을 떴는데. 찬란한 태양빛에 전부 씻겨 내리는 듯했다. 태양이란 게 이렇게나 눈부시게 사랑스런 존재였던가?


그리고.


"끝났구나."


뒤늦게 실감이 난다. 어제는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이제서야 밀려든다.


해방감.


낮과 밤을 구분할 수조차 없던 싸늘했던 보랏빛 거리는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불안했던 공기에서 싱그러운 활기가 느껴진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의 아래에서 그것을 만끽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북적임이 보인다.


네가 깨어나면, 우리도 그래야겠다. 비록 아직 화는 안 풀렸지만, 그럼에도 내 세상의 중심은 너라서. 너와 함께하고 싶은 건 어떻게 할 수 없나보다. 되찾은 세상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너와 함께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차치하고 어쨌든, 지금 이 풍경은 퍽 좋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종식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엔 악령이 있고, 그들을 무찌를 마법전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


그 출발선 위에서, 전력을 다한 모든 전사들에게 휴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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