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꽁폽은 눈 앞, 커다란 벽면에 붙은 ‘산업공학과 Department of Industrial Engineering’라는 표지를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옳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하아...”


 다시 한 번 꽁폽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이, 농. 아직 어린 학생이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아서 한숨이야?”


 그리고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꽁폽은 누군가가 이렇게 바로 옆에까지 다가올 동안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원서 접수하러 왔어?”


 옷을 보아하니 SSU 학생임에 틀림없었다. 꽁폽은 손에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향해 턱짓을 하는 그를 보며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엔 다 인터넷이나 아니면 우편으로 접수하던데, 굳이 직접 와서?”


 “..앞으로 다니게 될 학교가 어떤지 한 번 보고 싶었거든요.”


 “자신감 넘치네.”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구나,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는 꽁폽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불합격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의 성적이라면 태국 최고의 대학인 쭐랄롱꼰에서도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을 정도니까. 그저 집안 대대로 SSU 출신이기 때문에 꽁폽도 이곳으로 학교를 정한 것 뿐이었다. 더군다나 수틸락 가문이 SSU에 내는 기부금이라면 4년 내내 F만 받아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 테다. 놀랍게도.


 “그래서 어때? 앞으로 4년 간 다니게 될 이 곳이?”

 “끔찍하네요.”


 어쩌면 그런 비뚤어진 생각 때문에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연하다시피 남자는 잔뜩 놀란 눈으로 꽁폽을 쳐다봤다.


 “어, 그게- 사실..”


 아무리 그래도 이 근처에서 만난 학생이라면 역시 공대생일 텐데 말이 좀 심했다 싶어 꽁폽이 당황해하는 사이 남자가 입술을 모으고 눈을 굳히더니 물어왔다.


 “따로 공부하고 싶은 게 있는 거야?”


 무어라 변명 거리를 떠올리려던 꽁폽의 머리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근데 집에서는 엔지니어링 전공하길 원하는 거고?”


 그리고 그의 말에 꽁폽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흠, 확실히 공대 쪽이 나중에 취직하기도 쉽고 뭘 해도 먹고 살기는 하지.”


 남자도 끄덕끄덕, 무언가 한참을 생각하는 듯 하다가도 결국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꽁폽에게로 다시 시선을 준다.


 “근데 과연 그게 지금 이 순간, 가장 찬란해야 할 이 시절을 포기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네?” 


 “글쎄, 요즘 우리 동기들이랑 후배들이 집단 탈주를 해서 그런가, 난 좀 그러네.” 


 “네?”


 “나처럼 별 생각 없이 들어온 애들은 그래도 그럭저럭 버티는데,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있는 애들은 결국 그만두더라고. 우리 동기 중에 캠퍼스 문까지 한 애가 있는데 걔도 결국 이번에 방콕대로 편입 했어. 대중예술 전공한다고.”


 꽁폽은 멍하니 남자의 말을 들었다. 이런 얘기들,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미 다 이야기를 나눴고 싸우기도 했고 결국 체념하고 여기까지 온 게 바로 오늘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 남자의 이야기는 그동안 해왔던 것과 조금 다른 느낌이다. 집에서 내세웠던 지독히도 현실적인 이유들과는 다른, 찬란한 시절이 어쩌고 하는 낭만 가득한 이야기라 그럴까 아니면 이미 늦었기 때문이라 그럴까.


 “그러니까, 아직 접수 안 한 것 같은데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해. 아직 접수 마감까지 시간 좀 남았잖아? 그렇지?”


 한참을 뭐라뭐라 이야기하다가 빙긋 웃으며 결론을 내려버린 남자가 무책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라서 쉽게 한 말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나마 정말 진심으로 같이 고민해준 느낌이라서. 꽁폽은 어쩌면 이런 선배가 있는 곳이라면 영 끔찍하기만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벌써 접수 했어요.”


 “어?”


 “접수 하고 여기 온 거예요. 어떤가 보려고요.”


 꽁폽의 말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는 저와 제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번갈아 쳐다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마지막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한 번 써 본 경제학부 입학 원서요. 근데 결국 산업공학과에 냈어요.”


 “왜 그랬어!”


 “네?”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공부가 있는데 왜 포기를 한 거야? 너처럼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건데!”


 “하지만 이미 늦은 걸요.”


 제 귀에도 미련이 가득한 목소리에 남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제 팔을 잡아끈다.


 “일단 가 보자. 아직 처리 안 됐을 수도 있으니까. 취소하고 다시 받아줄지도 몰라.”


 “네?”


 “내가 너한테 왜 말 걸었는지 알아?”


 “어...”


 “당장이라도 죽고 싶다는 얼굴로 앉아 있어서 그랬어. 너 지금 포기하면 분명 후회해.”


 꽁폽의 목젖이 크게 울렁였다. 후회는 이미 접수증을 받아든 순간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 제 표정을 읽었는지 남자는 조금 더 힘을 줘 꽁폽의 팔을 잡아 당겼다.


 “어이, 아이운! 어디 가? P' 툼 올 시간 다 됐는데!”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산업공학과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자ㅡ아이운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러다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목소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금방 다녀올게! 10분이면 돼!”


 그러고는 답을 듣지도 않은 채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꽁폽의 손을 잡고 접수처가 있는 본부 건물을 향해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저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돌아본 아이운이, 활짝 웃고 있었다.
















 “이사님.”


 꽁폽의 비서인 린의 목소리에 앉은 채 깜박 들었던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오랜만이었다, 아이운의 꿈은. 벌써 8년도 더 전의 일. 아이운의 닦달에 귀찮아하던 접수처의 사람들도 꽁폽 ‘수틸락’이라는 이름을 듣고서는 뺨이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분주히 쌓아뒀던 서류들을 뒤져 제 원서를 찾아냈었다. 그리고 그럴 수도 있다는 태도로 공대 입학 지원서를 폐기하고 경제학부 지원서를 새로 접수해갔다.


 꽁폽은 지금도 가끔 궁금했다. 그때 아이운이 나서서 저를 접수처까지 끌고 가지 않았더라면 저의 대학 생활은 조금 달라졌을까. 아니면 공대에서도 별다를 바 없이 별종 취급을 받았을까. 그리고 항상 그 생각의 끝은 그 아이운이, 제 뒷배경이 무엇인지 알게 된 후 태도가 바뀌는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어서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아이운은 꽁폽의 대학 생활에 대한 기억 중 유일한 순수였다. 새로 접수를 마친 후에 잘됐다며, 입학하면 공부 열심히 해서 그 누구도 이 선택을 잘못됐다 말할 수 없도록 자랑스럽게 경제학부의 졸업장을 따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아이운의 웃는 얼굴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저 하얗고 까맣고 붉은 이미지로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건 꽁폽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환상이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P'야말로 무리시키면 안 되는데 나 때문에 또 늦게까지 남아서 미안하네.”


 얼마 전에 임신 소식을 알려온 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히 방콕 트래픽 잼에 갇히느니 이사님 얼굴 조금이라도 오래 보는 게 태교에 더 도움 돼요.”


 꽁폽이 불편해하지 않게 이런 농담을 할 수 있는 것도 린이 유일할 것이었다. 여자 친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고는 싶은데, 직업이 스턴트우먼인 여자 친구는 도저히 임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린이 그 역할을 맡게 됐다고 했다. 이 커플도 앞날이 평탄하지만은 않겠지만 꽁폽은 자신이라도 그런 린을 도울 수 있는 입장이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P' 린, 로비 카페에서 뭐 사다 줄까요?”


 대학을 졸업하고, 경영학으로 석사를 따고 시암 폴리머 그룹에 입사하자마자 단번에 재무이사 자리를 차지한 지 2년쯤 된 것 같다. 다들 회사의 후계자니까 그러려니 하기는 해도 낙하산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는 없어서 더 열심히 일을 하는 꽁폽의 비서로 그를 도운 지도 역시 2년. 린은 오늘도 이른 퇴근은 무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는 얼마 전 꽁폽이 바꿔준 편안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꽁폽의 옆에 다른 사람을 붙이는 것도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아 그냥 마지막까지 그녀가 꽁폽을 보좌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비서를 한 명 더 들이는 게 피차간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레모네이드,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꽁폽은 린에게 미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사무실을 나와 회사 건물 1층 로비에 있는 카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일종의 데자뷰 같은 일이, 아니, 사실 비슷한 거라고는 카페테리아를 목적지로 하고 있던 자신과 그런 자신의 앞에 보이던 뒤통수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한 번 겪어봤던 그런 일이 또 제 앞에 펼쳐졌다.


 “아니, 글쎄, 지금 시간을 좀 보라고요. 다들 퇴근하고 없다니까?”


 “그래도 한 번 내선 연결이라도 해 봐 주세요. 제가 정말 급해서 그래요.”


 “회사일 어떤지 알만한 분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오면 곤란하지.”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근데 딱 한 번만요. 저희랑 거래 계속 해오던 담당자님이어서 자리에 있으면 바로 만나주실 거예요.”


 “담당자면 번호 더 잘 알겠네. 전화 안 받으니까 회사까지 찾아온 거 아닙니까.”


 정곡을 찌른 듯한 경비의 말에 아팃의 입이 몇 번 뻐끔거리다가 다물리는 것이 보였다. 엠의 결혼식 이후 3년.. 만에 보는 아팃은 여전히 하얗고, 여전히 까맣고, 여전히 붉었다. 오늘 아이운의 꿈을 꿔서일까. 꽁폽은 그런 아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이사님.”


 저를 향해 모자를 벗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경비의 시선을 따라온 아팃의 눈이 잔뜩 커져있었다. 아팃은 매번 저만 보면 놀라는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도, 두 번째 만났을 때도, 엠의 결혼식에서도, 그리고 오늘도.


 “이 사람이 다짜고짜 이 시간에 찾아와서 생산전략팀 연결해 달라고 생떼를 부리지 뭡니까, 이사님.”


 “생산전략팀?”


 로비의 데스크도 한 명만 남고 다 퇴근한 상황. 데스크 뒤에서 잔뜩 눈치를 보고 있는 직원을 보니 아무래도 자기 선에서 아팃을 처리하지 못하고 경비까지 부른 게 혹시 큰일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원래라면 미팅 약속도 없이 찾아온 거래처가 문제라는 걸 잘 알지만 한편으로는 아팃이 어지간하면 이랬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버렸다. 역시 자신은 이상하게도 약하다, 아팃에게는.


 “따라 와요.”


 “이사님?”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때까지 말 한 마디 없이 잔뜩 굳어 있던 아팃이 그제야 걸음을 옮기는 제 뒤를 급히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5년 전의 그 일 이후로 딱 한 번 마주쳤던 엠의 결혼식에서도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아팃이 이러는 걸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어도 크게 있는 게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흰 티에 청색 셔츠를 걸친 옷차림을 보면 아팃 역시도 어디 다른 데서 쉬다가 불려온 모양새라.


 “아이스커피, 레모네이드, 그리고 놈옌 하나씩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본론으로 들어갈 만큼 꽁폽은 너그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아직도 저와의 기억을 완전히 들어내고 싶다고 했던 그 때 아팃의 그 말이 한 번씩 뭉근히 꽁폽의 심장을 눌러왔기 때문에.


 “자요.”


 아팃이 초조해하는 걸 알면서도 음료가 준비될 때까지 핸드폰만 내려다보면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나온 세 잔의 음료 중 놈옌을 먼저 들어 아팃에게 건넸다.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음료를 받으면서도 바로 빨대를 입에 물고 쭉 들이키는 아팃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 사실에 또 기분이 상해버렸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죠?”


 아이스커피와 레모네이드를 각각 한 손에 들고 다시 한 번 앞장 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마침 1층에 있던 엘리베이터에 바로 올라 타 새끼손가락으로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층수를 누르자 아팃의 눈이 빠르게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아팃이 원하던 생산전략팀보다 한참은 더 위에 있는 사무실이어서 그런 걸 테다.


 “어, 공장에 먼저 갔는데 본사 생산전략팀 컨펌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해서-”


 “그러니까 뭐를요?”


 “이번 저희 신제품 부품 중 하나를 시암 폴리머에서 20% 가량 생산하기로 계약이 돼 있어요. 그런데 저희 공급자들 중에 한 곳이 문제가 생겨서, 혹시 여기서 생산량을 좀 늘려줄 수 있을지 알아보려고요.”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꽤 급한 모양이네요?”


 “..네, 데드라인이 얼마 안 남은 상태에서 일이 터져서요.”


 꽁폽은 머릿속으로 회사의 전반적인 생산 상황을 가늠해보았다. 일단 지금은 재무 담당이라고는 해도 결국 언젠가는 이 회사를 이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회사가 돌아가는 건 다 파악을 하고 있었고,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오션 일렉트릭에서 발주가 들어왔을 때 생산량의 50%를 요청한 것을 20%까지 줄인 것도 자신이었다. 오션과는 최대한 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그랬기 때문인지, 아니면 결국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팃이 저를 찾아왔다. 다신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던 그 아팃이.


 “이사님?”


 나갈 때와는 달리 손님을 달고 온 꽁폽을 보고 편안히 의자에 눕듯이 앉아 있던 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린을 보고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꽁폽이 린에게 다가가 레모네이드를 린의 책상 위에 얹으며 손수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갑자기 움직이고 그러지 말아요.”


 아기 놀라, 린에게만 들리도록 귓가에 속삭이는 꽁폽의 뒤로 딱딱하게 입술을 굳힌 아팃의 표정을 본 린의 얼굴에 더욱 경계심이 차올랐다. 꽁폽을 보좌한 지 2년째다. 꽁폽의 취향 정도야 눈 감고도 맞힌다.


 “오션 일렉트릭에서 급하게 발주할 건이 있나 봐요. 일단 내가 먼저 얘기해볼 테니까 P'는 우리 생산 현황 정리한 거 좀 찾아 줘요.”


 “네, 이사님.”


 아무리 봐도 일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 차림새에, 누가 봐도 꽁폽의 취향에, 꽁폽이 사 준 것이 틀림없는 음료에, 더군다나 제게 다정하게 구는 꽁폽에게 얼굴을 굳히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일 핑계로 꽁폽을 꼬시러 온 모양이라-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린은 이 순간만큼은 아직도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가벼운 연애만을 이어가는 꽁폽이 조금 야속하다. 결국 그 뒤처리는 다 제 몫이라.


 “앉아요. 서류는 나 주고.”


 “네, 여기.”


 린에게 현황을 파악하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건 확인에 불과할 뿐 대충 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상태라 꽁폽은 아팃이 준비해 온 서류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며 오션 일렉트릭의 제안이 제 회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번 일로 꽤 큰 이익을 남길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거절하면 중장기적으로 피차가 손해인 상황. 꽁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너머로 잔뜩 굳어 있는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아팃을 흘깃 넘겨봤다. 긴장한 탓인지 더욱 하얗게 질린 얼굴, 여기 오기 전에도 한참을 뛰어다녔는지 이마에 달라 붙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무의식적인 듯 계속해서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붉은 입술. 저 얼굴 한 번만 울려보고 싶은데, 생각을 하자마자 똑똑 린이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미심쩍은 눈으로 저와 아팃을 번갈아보며 들어와 꽁폽이 부탁한 자료를 건네는 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안다. 꽁폽은 린에게서 서류철을 건네 받으며 웃었다.


 “이제 됐어요. 오늘은 그만 들어가요.”


 “하지만 이사님,”


 “저도 이 건만 처리하고 들어갈 거예요.”


 제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린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작은 한숨에 꽁폽은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린에게마저 이렇게 신의가 없었나 하며 씁쓸해해야 하는데 그냥 웃음이 났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린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서류를 펼쳤다. 역시 제가 생각한 대로였다.


 “흠...”


 시암 폴리머의 생산 현황 자료를 읽고 미간을 찌푸리는 저 때문에 아팃의 등이 곧게 서는 것이 보였다. 저에게 유리한 것이 있다면 이용할 것, 사업의 기본이었다.


 “제안서는 잘 읽어봤습니다.”


 “네.”


 “솔직히 말해 우리로서는 도울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건 아니에요.”


 “아,”


 “근데 그러기엔 우리 직원들이 너무 힘들어지거든요.”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표정이 밝아졌다 가라앉았다 하는 아팃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이쯤 되면 자신을 숨길 줄도 좀 알아야 할 텐데, 이 사람은 도무지 약아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역시 못 할 일은 아니긴 하니까 딜을 하나 하죠.”


 “어..”


 “왜요? 싫어요?”


 “조건을 추가하는 건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그럼 선배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걸로 하죠, 뭐.”


 제 말에 아팃의 한 쪽 눈썹이 쑥 올라갔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선배라는 단어도, 그의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딜을 하자는 말도 분명 그에게는 경계경보처럼 느껴졌을 거다. 그리고 어쩐지 그런 아팃의 반응이 꽁폽은 피곤했다. 어차피 가지지 못할 것을 사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랄까. 5년 전 그 날의 저처럼.


 “정보 하나만 줘요.”


 아마도 아팃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쳤을 수많은 예상 답안 가운데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 테다. 반사적으로 아니, 라는 입모양을 만들어내던 아팃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선배가 SSU에 다니던 시절의 정보 하나만요.”


 어쩌면 꽁폽이 아까 잠깐 졸았을 때 아이운의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꽁폽도 아팃에게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정보가 아닌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팃이 치를 떨며 이 방을 박차고 나갔을 그런 것을. 하지만 꽁폽도 이제는 그만 궁금해 하고 싶었다. 그 날 제 운명을 바꾼 사람의 정체를, 그리고 제게 최고의 환상과도 같은 그 사람의 정체를.


 “...뭔데요?”


 “동기나 후배, 아니면 선배 중에 혹시 아이운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무엇이 궁금하냐고 묻던 때의 미심쩍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팃의 얼굴에는 그저 놀람이 가득 담겼다. 혹시나 하던 꽁폽의 마음에 희망이 생겼다. 신입생 시절의 엠은 전혀 모르던 인물, 조금 지나고 나서는 이 지옥에 몰아넣은 것이 그라는 어린 마음에 일부러 잊으려고 했던 사람,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는 제 속의 단 하나의 좋은 기억을 깨고 싶지 않아 억지로 눌러 담기만 했던 그 아이운. 아팃은 분명히 그를 안다.


 “갑자기 아이운은 왜?”


 라고 묻자마자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듯이 아팃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는 가만히 저를 살피는 아팃을 마주하고서야 꽁폽의 퍼즐 조각들도 절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꽁폽의 입에서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당신이었구나..!”


 꽁폽의 반응에 확신을 얻었는지 잘게 고개를 흔들며 혀를 내두르는 아팃의 얼굴이 이제야 조금 밝아졌다.


 “설마 네가 그때 걔였다고?”


 꽁폽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며 빙긋이 웃었다. 오랫동안 꽁폽을 괴롭히던 두 개의 답이 한 번에 풀렸다. 아이운의 정체와, 아팃을 볼 때마다 계속 눈길이 갔던 이유.


 솔직히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었다. 아이운이 누구인지 알고는 싶었지만 그와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저를 알게 되면, 저가 그를 알게 되면- 꽁폽이 8년 동안 차근차근 덧칠을 했던 그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릴까 봐 무서워서. 그리고 아팃에게 자꾸 눈길이 가던 이유가 아이운이라는 환상의 여운ㅡ꽁폽의 이상형을 정립시킨 아이운이라는 환상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자꾸 아팃에게서 아이운만을 찾게 될까 봐, 그래서 정작 아팃이라는 진짜 그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될까 봐.


 하지만 후련한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애써 찾지는 않았다 해도 그간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아이운이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지난 5년 간 한 번씩 문득문득 떠오르던 아팃이 사실은 제게 그 자체만으로는 그리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치부해버리면, 편하니까.


 “가시죠.”


 “응?”


 “오늘 안에 아버지께 최종 결재를 받아야 내일부터 생산 들어가니까요.”


 그래도 제 말에 저렇게 기쁜 얼굴을 하는 아팃을 보는 건 좋다. 그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제 인생에 있어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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