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Ordinary People - John Leg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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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 하고 소리 나게 차 문을 닫고 운전석에 앉으며 남준이 매듭에 검지를 넣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낸다. 학창 시절에 입었던 교복도 차이나카라 식이어서 넥타이를 맬 일이 거의 없었던 데다가, 늘 편한 힙합스타일의 옷만 입었던 탓에 목을 죄는 이 느낌은 아무래도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셔츠에, 딱 떨어지는 재킷에, 까만 코가 반들거리는 구두까지. 얼마 전 퇴근하고 가던 길에 레이블은 다르지만 두어 번 합동공연을 한 적 있었던 다른 팀 녀석 하나를 만났는데, 남준을 위 아래로 훑더니 수트 차림이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며 웃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입고 다녔던 사람 같다고. 그 말이 꼭 "이제 너는 돌아오지 않겠구나, 넌 이제 완벽하게 다른 세상 사람이 됐으니까." 하는 것처럼 들려서 괜히 씁쓸해지기도 했었다. 남준이 음악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이 된 것을 꼭 나라를 버린 변절자 정도로 느끼는 놈도 있었고, 혹은 시련을 이기지 못해서 나가떨어진 낙오자로 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그건 크게 남준의 마음을 흔들지 않았다. 다만 길거리를 걸으며 들리는 익숙한 비트나, 혹은 거리공연을 하는 낯익은 얼굴들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여전히 조금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이었다.

  휴, 괜히 한숨을 내쉰 남준이 블루투스로 음악부터 재생시킨다. 금요일 저녁, 작년 이맘때쯤이었다면 한창 공연 리허설 중이었으려나. 땡글땡글 여문 햇빛 아래 오래 세워둔 차는 열기로 달궈져서, 에어컨 버튼을 누른 남준이 버릇처럼 팔뚝을 매만진다. 단추를 풀고 셔츠를 동동 걷으면 남준의 팔뚝엔  타투가 있다. 음악을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그길로 친하게 지내던 타투이스트 형을 찾아가 새긴 거였다. 잊지 말자는, 그리고 언젠가는 돌아가자는 스스로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지금 새하얀 셔츠소매로 덮여져 있었다. 유치한 은유처럼 보이네. 남준이 픽, 자조적으로 웃으며 시동을 걸고 부드럽게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데, 크로스백을 옆으로 메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지민이 보였다. 왜인지 모르지만 지민은 늘 저렇게 바쁜 것 같았다. 제 사수이다 보니 거의 종일을 붙어있는데 작은 키로 종종거리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에 나오는 토끼 같아 보일 때도 있었다. 늦었어! 하며 품에서 회중시계 같은 것을 꺼내서 시간을 보며 총총총 뛰어선 깊은 굴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괜히 종종거리고 뛰어가는 지민의 뒤통수에 삐죽 귀가 튀어나오는 게 보이는 것 같아 남준이 포옥 보조개가 들어가도록 웃는다.


  처음 저보다 한 살 어린 지민이 자신의 사수가 된 것을 알았을 땐 사회생활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것인지를 알려주려는 신의 유치한 장난 같은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늦은 나이에 꿈을 버리고 신입사원이 된 것도 아직 완전히 소화하기 힘든 일인데, 하물며 저보다 어린 상사라니. 남준에게 회사생활이니 사회생활이니 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예상할 수 있는 전개는 상하관계를 확고히 하려는 기싸움, 상명하복 종용, 유치한 괴롭힘과 따돌림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저보다 어린 상사인 지민은 자신을 괴롭히기는커녕 어떻게든 남준을 챙겨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남준씨 아침밥은 먹었어요? 남준씨 커피 한 잔 할래요? 남준씨 어제 잘 못 잤어요? 남준씨? 김남준씨-

  남준은 박지민이라는 사람 덕분에 김남준이라는 이름이 어떤 입모양에서 파생되는 단어인지를 처음으로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지민이 남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는 입술이 길게 가로로 늘어졌다가 꾹 다물어 지며, 준이라는 단어는 뚜 하게 입술이 부리처럼 튀어나온다. 그렇게 지민은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남준의 이름을 불러가며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그게 회사란 걸 처음 다녀본 남준의 눈에도 "내 첫 부사수니까 내가 완전 잘 챙겨줄 거야!"하는 걸로 보여 솔직히 약간 웃기긴 했다. 뭐 좀 귀엽기도 하고. 종종거리고 걷느라 정수리에 머리가 새싹처럼 삐죽 돋은 것도 모르고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는 지민을 보고 남준이 핸들을 돌린다. 지하철 타고 다닌다는 걸 알았으니 역까지라도 태워줄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때 새하얀 SUV 한 대가 그런 남준보다 먼저 앞으로 끼어드나 싶더니 지민의 옆으로 가서 빵 하고 경적을 울렸다.

  "불금인데 누가 기다린다고 그렇게 날아가? 애인도 없는 게."
  "아 과장님. 이제 퇴근하세요?"
  "타. 역까지 태워줄게."
  "오. 캄사합니당."

  일부러 그러는 건지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대답을 한 지민이 차에 올라탄다. 조수석으로 지민이 올라앉고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 후에도 차는 잠시 그대로 정차해 있었다. 빨리 좀 가지 입구에 저러고 있냐. 남준이 경적을 울리려다 참는다. 왠지 이 상황 또한 값싼 은유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상하게도 민윤기란 사람이 계속 이렇게 제 앞을 막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더란 얘기였다. 같은 부서도 아닐 뿐더러 딱히 자신이 사적으로라도 부딪힐 것 같은  포인트 하나 없는 사람인데, 왠지 모르게 박지민이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묘하게 얽히는 느낌이었다. 아마 자신이 이성애자고 지민이 여자였다면, 아침드라마에 나올 법한 치정의 삼각관계로 얽힐 것 같은 예감이랄까. 어쨌든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민이 남자라는 이유로 전혀 말 안 되는 얘기라 치부할 수 없으니 더 찝찝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아직은 웃어넘길 수 있는 건 지민이 딱히 자신의 타입은 아니라는 거였지만, 단순히 어수룩하고 세상 물정 몰라서 당하기만 하는 사람 같다 생각했던 지민이 의외로 똑 부러진 면도 있고 사람들 관계도 부드럽게 잘 대처한다는 걸 안 이후는 지민이 조금 달리 보이는 중이기도 했다. 게다가 뭐든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늘 신경을 쓰고 맨날 저를 보면서 생글거리는 얼굴을 종일 마주 하고 있는데, 어쨌든 아예 아무 생각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꼭 지민을 연애대상으로 본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혹시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보여도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닐 정도라는 얘기였다. 민윤기란 사람과 박지민 사이의 그 묘한 친밀감이 한 번씩 신경을 건드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만 봐도 그랬다. 뭐, 연애를 너무 오래 쉬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연애란 게 그렇다. 한번 찐한 연애를 해 본 사람은 다음 연애까지의 텀을 견디기 힘들어 다른 상대를 찾게 된다. 마지막 연애가 끝난 후엔 취업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지만, 입사도 했고 이제 일도 조금은 익숙해지기 시작하니 그런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자신이 조금 웃겼다.

  형은 자신이 고고하게 혼자 독고다이로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외롭고 고독한 게 익숙하다고 생각할 거야. 근데 아니야, 진짜 고독에 익숙한 사람은 오히려 애초에 고독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형이 스스로 외로움이 익숙하다 생각하는 건 단순히 자기 최면이지. 사실 형은 옆에 누가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야. 형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깨닫기 때문에 아마 옆에 누가 없으면 형이 누구였는지도 까먹어버릴걸.

  음악을 그만두며 헤어졌던 그 아이가 그런 말을 했었지. 그땐 얘도 참 날 잘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저 자신보다 더 저를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뭘 하는지 빨리 주차장을 빠져 나가지 않는 윤기의 차 뒤꽁무니를 보다가 클락션을 누르려는데 그제야 차바퀴가 움직인다. 깜빡이를 두어 번 반짝이는 게 지체해서 미안하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마저도 괜히 좀 약이 올랐다. 남준이 버릇처럼 턱을 내밀며 검지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다가 이내 차를 출발한다. 윤기를 쳐다보던 지민의 동경 어린 시선, 그리고 그런 지민을 마냥 귀엽다는 듯이 대하는 윤기. 그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과연 그냥 동료애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또 문득 스스로가 우스워진다. 동료애가 아니라 다른 뭐가 됐든지 간에 그래서 그게 뭐.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딱히 지민에게 그럴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민윤기 과장과는 뭔가 있는 게 아니면 좋겠다 생각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유치했다. 나랑 사귀길 바라진 않지만 그래도 다른 남자랑 사귀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며 국민 여동생을 보는 삼촌 팬의 얄팍한 심리처럼. 괜히 입 안이 쓴 느낌이 들어 남준이 통에서 껌 하나를 꺼내 입에 넣는다. 하필이면 방향이 같은지 윤기의 차는 계속 남준의 시야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5분쯤 더 갔을까. 드디어 교차로에서 방향이 나뉘고 윤기의 차가 우회전을 해서 다른 길로 접어든다. 회중시계를 꺼내보며 총총거리던 토끼가, 고고하고 기세등등한 여왕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


  "박대리. 올해로 몇 년 차지?"

  과장의 물음에 지민이 2년차 입니다, 하고 대답하며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상사가 올해로 몇 년 차인지 물었을 때 "그런데 벌써 이렇게 일을 잘 한단 말이야?" 로 귀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저 물음 안에는 대부분 "근데 아직도 이 정도 밖에 안 돼?" 하는 비아냥이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민이 눈만 땡글땡글 굴리고 있는데 과장이 그런 지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입 꼬리를 씨익 올려 웃더니 서류 하나를 내민다.

  "여기 SG캐스트 쪽 쿼테이션 박대리가 받았지? 한 카피에 2천 달러?"
  "네. 혹시 뭐가 잘못된 게..."
  "아냐. 일단 이대로 진행은 하는데, 네고는 한번 들어가 봐야지."
  "네."
  "일단 가격 네고 한번 해보고, 안되면 기한이라도 조정 해 봐. 13개월에 2카피 4천 달러로."
  "아... 제가 직접?"
  "박 대리도 이제 2년 차면 네고 정도는 직접 할 때 안 됐나?"

  그 말에 "아직 그럴 때가 안 됐습니다."하고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울며 겨자 먹기로 네..하고 거의 땅에 떨어질 듯 늘어지는 대답을 하고 자리에 돌아온 지민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글이라고는 불고기, 킴치 밖에 모를 것 같은 외국인과 단순히 친목도모를 위해 펜팔을 해도 의사소통을 위해서 구글 번역기를 한참 돌려야 할 텐데. 하물며 회사 계약을 위해 직접 담당자와 메일을 주고받아야 하는 건 때로 위가 아플 만큼 스트레스였다. 자신의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계약에 차질이 생기거나 회사에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는 왜 미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는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에까지 도달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그저 정해진 루트대로 견적을 요청하고, 외국 회사 쪽 담당자가 견적서를 보내오면 과장이나 차장 선에서 검토 후 직접 네고를 했었는데 이번엔 그 일이 지민에게 떨어진 것이었다. 그나마 통화를 해서 직접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메일을 주고받으며 진행하는 일이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협상을 위해 제대로 된 영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한국의 영어 교육은 아직도 "하와유? 아임파인 땡큐 앤듀?"에 머물러있는데 입사를 위해 아무리 토익 점수를 올려놓으면 뭘 하겠는가. 직접 이렇게 소통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눈앞이 캄캄해지기부터 하는데.

  자리로 돌아온 지민이 일단 저번 계약 때 담당자와 주고받은 메일을 찾아 읽는다. 아무래도 전문용어들이 오가다보니 전부 쉽게 읽히진 않지만 그래도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는 명확하게 이해가 갔다. 문제는 독해는 쉽지만 영작은 그렇지 않다는 거였다. 지민이 히잉 하고 쳐진 눈을 하고 일단 메모장을 켜서 담당자에게 보낼 내용을 한국말로 쓰는 것을, 남준이 옆자리에서 힐끔 쳐다본다. 높은 토익 점수는 물론이고 프리토킹이 되는 남준에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부하직원도 아니고 상사에게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하고 묻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괜한 오지랖을 떤다고 윤기에게 이미 한번 잔소리를 들은 후였고. 미간에 주름까지 딱 잡힌 채 안 쓰던 안경까지 쓰고 진지하게 모니터를 주시하는 지민의 얼굴은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 장수의 모습 같았다. 나중에 슬쩍 지나가는 말로 얘기해봐야겠다 생각하며 남준이 관리부에 다녀왔더니 한껏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지민은 이미 어딘가 나가고 없었다. 탕비실에 갔나해서 가봤지만 없고, 혹시 부장님께 깨지고 있나해서 봐도 없었다. 시계를 봤더니 곧 점심시간이라, 그 전까진 돌아오겠지 싶어 남준이 정리해야 할 서류로 눈을 돌린다.


  그 시간 지민은 복도에서 윤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단 한국말로 메일 내용을 써서 나름 영어로 번역을 하긴 했는데, 혹시라도 그 얼마 안 되는 짧은 문장 속에 문맥에 안 맞다든지 써서는 안 되는 표현이 있을까봐 윤기에게 한번 체크를 부탁해보려는 심산이었다. 당연하지만 윤기는 호락호락 그런 걸 해 줄 위인이 아니었고.

  "야. 니네 부서 사람들 놔두고 왜 나한테 이걸 가져와?"
  "과장님 영어 잘 하시잖아요. 한번 읽어만 봐 주시면 안 돼요?"
  "싫은데? 우리 부서 일도 바빠 죽겠는데 내가 왜 남의 부서 일까지 신경 써야 되냐? 너도 영어 아주 못 하진 않잖아. 니가 알아서 해."
  "혹시라도 뭔가 이상한 단어를 쓰거나 해서 계약이 잘못되고 그래서 회사에 불이익 생기면 어떡해요."
  "내가 알게 뭐야. 간단한 네고 메일에 그럴 게 뭐가 있다고. 그리고 그런 거 하나 알아서 제대로 처리 못 하는 니가 앞으로 받아갈 월급이야말로 이 회사에 불이익이라고 생각 안 하냐?"

  그 말에 지민이 입을 다문다. 사실 안 봐줄 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수이던 시절에도 엉망으로 깨지는 일이 생겨도 뭐든지 지민이 직접 하게 했지 옆에서 알려주거나 대신 뭔가를 해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저렇게 팩트 폭력을 당할 것도 알고 있었고. 윤기 입장에서야 지민이 그냥 자신이 없어서 저렇게 앓는 소리를 내는 거지, 딱히 저 정도도 혼자 알아서 못할 것 같지 않아서였지만.

  "야, 아니면 니 부사수한테 한번 봐 달라 그래. 걘 영어 잘할 거 아냐."
  "아 어떻게 그래요."
  "왜. 꼴에 존심 상하냐? 모르는 게 있으면 부사수 아니라 지나가는 개라도 붙잡고 물어봐야지."

  윤기의 말에 지민이 히잉 하고 비 맞은 강아지 얼굴을 한다. 잠깐은 그런 생각도 하긴 했었다. 남준은 토익 점수는 물론이고 외국 생활을 한 경험도 있다고 하니 이 정도 메일의 문장을 체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터였다. 하지만 왠지 안 그래도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다가 스펙까지 좋은 부사수에게 괜히 좀 위축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런 부탁까지 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남준이 저를 시시한 선배로 생각하게 되는 게 싫었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좀 쪽팔린 감이 있었다. 자신이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 윤기가 그랬던 것처럼, 남준에게 뭔가 믿음직한 선배가 되고 싶었는데 영어 문장 좀 봐달라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지민이 축 쳐진 어깨를 하고선 인쇄해왔던 종이를 들고 쓸쓸히 부서로 돌아가려다 아련한 얼굴을 한 채 과장님, 하고 윤기를 부른다.

  "왜. 뭐."
  "대머리."
  "야, 저게. 너 이리 안 와?"

  후다닥 뛰어 들어가는 지민을 보며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서른 다 돼가는 놈이 뭐 저렇게 철딱서니가 없냐. 저건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지민이 입사하고 얼마 안됐을 때였던가. 그때도 윤기한테 엄청 혼이 난 뒤에 파트 회식 때 잔뜩 술에 취해 저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팀장니므으은- 징쨔 말을 너어-무 못때게 해요. 팀장밈 징쨔 대머리예여. 틴쟝님 타코야끼 머리라구여!!! 덕분에 한동안 윤기는 다른 파트 사람들에게까지 암암리에 타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다음 날 술 깨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선 죄송하다며 거의 석고대죄를 할 기세였는데, 이젠 술 한 잔 안 먹고도 맨 정신에 저 소리를 한다. 아직도 철이 없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젠 간이 좀 컸다고 해야 할지. 윤기가 쯧, 혀를 차고 돌아오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선 앞머리를 스윽 쓸어 올려 본다. 원래 탈모는 한 대를 걸러서 나타난다는데, 친할아버지가 대머리여서 안 그래도 사실 약간 신경 쓰이는 감이 있었다. 하여튼 박지민, 똥강아지 새끼. 죽일 거야 내가.


  자리로 돌아온 지민이 메일을 열어놓고 고민을 하고 있는데 책상 위로 커피 한잔이 사뿐히 내려앉는다. 고개를 돌리니 남준이었다. 지민이 "아 고마워요."하며 웃는다. 박지민이란 사람의 얼굴의 디폴트값은 아무래도 저 웃는 얼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이가 제법 있는 부장님이나 관리부 사람들도 지민을 동생처럼 아들처럼 귀여워하는 거겠지. 한 번씩 만약 자신이 선배고 지민이 후배였다면 자신도 지민을 그렇게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니 취향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지. 남준의 타입이라고 한다면 연상이든 연하든 섹시한 쪽이었지 애처럼 마냥 귀여운 쪽은 아니었으니까. 입사 전 헤어진 애도 굳이 따지자면 외형적으로는 섹시한 타입이었다. 쌍꺼풀이 없이 기다란 눈과 남자치고는 가느다란 목선, 얇은 입술 같은 게 꼭 중국 무희 같은 느낌.  그래서 고등학교 때 내내 별명이 이준기였다는 얘기도 들은 적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눈앞의 박지민도 쌍꺼풀 없이 기다란 눈은 비슷하구나. 뭔가 여러 가지로 Ctrl+T 를 눌러서 사이즈를 줄인 느낌이긴 하지만.  

  "저기 남준씨."
  "네? 아 네."
  "저... 남준씨 영어 잘하죠."
  "음...잘한 다기보단."
  "혹시 이 메일에 문장이 이상하다거나 문법이 좀 그렇다거나 그런 거 없는지... 좀 봐 줄 수 있어요?"
  "네 그럼 제가 좀 봐도 될까요?"

  남준이 의자를 당겨와서 옆에 앉는다. 워낙에 남준의 다리가 길어서 무릎이 닿을 것만 같다. 바로 옆에 앉아 마우스를 움직이며 모니터를 보는 남준의 옆모습을 보며, 지민은 자신이 되고 싶었던 남성상이란 게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했다. 이미 사이즈에서 실패하긴 했지만. 윤기와는 또 다르게 멋진 성인 남성의 표본 같은 느낌이랄까. 가까이에 앉은 남준에게서 나는 과하지 않은 향수 냄새도 왠지 멋있게 느껴졌다. 향수 뭐 쓰냐고 물어볼까. 그래도 같은 걸로 따라 사는 건 좀 기분 나쁘게 느낄 수도 있겠지? 지민이 남준의 옆모습을 힐끗거리는데 남준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고, 괜히 뭔가 이상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지민이 헛기침을 한다.

  "음 이대로 보내셔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도 영어로는 일상적인 대화만 해서 업무메일을 주고받을 땐 뉘앙스가 보통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표현상에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요? 다행이다. 사실 저 영어가 좀 약하거든요. 아 창피하네."

  창피하다며 버릇처럼 코를 슥슥 문지르는데 진짜 귓바퀴가 살짝 붉어져 있다. 영어가 약해서 창피하다는 선배이자 상사에게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도, 혹은 이 정도면 잘 하는 거라 대답하는 것도 이상해서 남준이 입을 꾹 다물며 슬며시 고개만 젓는다.

  "아 참. 남준씨 혹시 초밥 좋아해요?"
  "네? 아 네. 딱히 가리는 건 없습니다."
  "그럼 우리 오늘 점심 회사밥 먹지 말고 초밥 먹으러 가요. 도와줬으니까 내가 한턱 쏠게요. 이 앞에 일식집 괜찮은 데 있거든요."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에이- 그래도 그런 게 아니죠. 우리 초밥 먹으러 가요. 네?"

  네? 하고 물으며 까만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묻는 얼굴이 꼭 마트에서 "엄마 나 이거 하나만 사 주세요 네?" 하고 묻는 꼬마 아이 같았다. 남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아무라 남자를 상대로 그런 감정을 느끼는 쪽이라고는 하지만 섹시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것도 어쨌든 자기보다 상사인 사람에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 남준이 의자를 끌고 제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지민이 다시 한 번 메일을 읽으면서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힐끔힐끔 점심시간이 얼마나 남았나를 확인하는 것을 보자 남준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진짜 내 타입은 아닌데, 보고 있으면 뭔가 웃음 나고 귀엽긴 해.  이리저리 다 당하고 살 것 같았는데 의외로 깡도 있고, 고집이 센 것 같은데 또 어떤 부분에선 놀랄 만큼 솔직하기도 하고. 외국 생활을 하면서도, 언더에서 만났던 크루 사람들 중에서도 보지 못했던 타입이었다. 남준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제 컴퓨터로 시선을 돌린다. 아마도 남준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을 것이다. 섹시한 쪽이 타입이라는 것은 그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는 크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때문에 그만큼 면역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돼서 함께 일식집에 와서도 지민은 남준의 앞에 종이를 깔고 젓가락을 반듯하게 놔주거나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음식을 서빙 하는 분께도 매번 감사합니다, 하며 쌩긋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좋은 교육을 받고 잘 자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이는 어리더라도 어쨌든 선배니까 "참 잘 자랐네요." 같은 칭찬을 할 수 없어서 대신에 "대리님은 이것저것 잘 챙기시는 것 같습니다." 하고 얘기했더니 지민이 또 긴 눈을 접어 웃었다.

  "그거 오지랖 넓다는 얘기 돌려서 얘기하는 거죠."
  "아뇨 정말 뭐랄까. 사소한 것도 잘 배려하시는 것 같아서요. "
  "그럼 칭찬이에요?"
  "네."
  "남준씨도 좋은 사람 같아요. 솔직히 저보다 나이도 많고 스펙도 빵빵하다고 해서 나 처음에 무지 쫄았었거든요. 여담이지만 남준씨 안 웃는 얼굴 좀 무섭게 생기기도 했고."
  "그런가요. 음... 잘 안 웃고 표정이 좀 뚱해 보이기도 한다는 얘기 많이 듣긴 합니다. 그래서 대리님과는 달리 저보다 연장자인 분들에게 예쁨 받는 타입은 아니에요."
  "그럼 남준씨는 본인보다 연하인 사람을 예뻐 해주는 쪽인가요?"

  그렇게 말하며 지민이 짤퉁한 손으로 간신히 잡은 젓가락을 장난스럽게 탁탁 소리 나게 맞추는 것을 보며, 남준은 처음으로 혹시 지민도 이쪽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 보통 남자가 남자를 보고 저렇게 웃기도 하는 건가. 보통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 그저 박지민이란 사람은 원래 생글생글 잘 웃고 타인에게 친절한 편인가보다 라고만 생각했는데 방금 지민의 말에서 처음으로 다른 뉘앙스를 느꼈다. 게이더라고 하던가. 그런 촉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지민의 말투나 태도 같은 것이 보통 남자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잠깐이지만 직구로 물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주 잠깐. 맞다고 해도 아니라고 해도 남준 자신의 입장 또한 애매해지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오늘 고마웠어요. 사실 남준씨 그래도 내 첫 부사수인데. 이런 거 물어보기 좀 창피했었거든요."
  "아뇨. 저도 배우는 입장이니까 네고 과정을 먼저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도 원래 사수가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주기도 하고 그래야 되는 건데. 다음에 나도 남준씨한테 뭔가 도움 되는 일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지민은 어서 먹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말투가 사근사근하다. 바깥은 땅이 땡글땡글 여물 정도로 더운데 안은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해서인지 어깨가 조금 눅눅한 느낌이 들었다. 남준이 버릇처럼 셔츠 밑의 문신을 매만진다. 바른 젓가락질로 초밥을 하나씩 집어먹으면서도 남준의 머릿속은 박지민 대리는 이쪽 사람인가 하는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다.



***


  지민이 남준에게 사수로서의 역할을 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물론 지민의 입장에선 기회였지만 남준의 입장에선 직장인이자 신입사원으로서의 비애이자, 더러운 회사 생활의 일면에 대한 첫 경험이었다.

  팀장이 남준에게 오타나 문구 수정을 지시했던 쿼테이션을 포함한 영문서류에 금액 오류가 있었고, 다행히 최종 결제와 입금 전에 발견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할 상황이었다. 남준은 견적 금액에는 자신이 손을 댄 적이 없다 말했지만 어쨌든 최종적으로 그 문서파일에 접속한 기록이 김남준으로 되어있어서 이제 겨우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남준이 시말서를 써야할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팀 내 사람들도 겨우 오타나 문장 정도를 검토하는 임무를 맡았던 신입사원 남준이 금액에 손을 대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일이 커지는 게 번거로우니 그냥 그런 채로 무마됐으면 하는 눈치였다. 때문에 지민이 로그파일을 일일이 확인해서 이미 오류가 난 파일이 남준에게 넘겨졌다는 것을 알아내지 않았다면 그대로 덮어썼을 것이다.

  결국 팀장이 시말서를 쓰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긴 했어도 편치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저가 잘못한 게 아닌데, 그래서 그저 오해를 풀고 잘잘못을 가린 것뿐인데도 오히려 뒤집어 쓸 뻔 한 남준보다 다들 팀장을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고과반영 될 텐데 팀장님 어떡해. 내년 승진에 문제 생기는 거 아냐? 다른 팀의 누군가는 지나가는 말로 지민에게 "박대리, 오늘 유팀장 저격했다며?" 같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자신이 처할 뻔 했던 억울함도 억울함이지만 어쨌든 괜히 자기 때문에 지민까지 입장이 난처해진 것도 꽤 속이 쓰렸다. 이제와 회사 생활에 환상이 있다거나, 혹은 꼭 이루고 말리라 하는 원대한 꿈을 안고 들어왔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막상 이렇게 당하고보니 뭐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탕비실에서 마주친 지민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자 지민은 "남준씨가 왜요?" 하고 반문했다.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고도 했고, 남준이 시말서 써야하는 줄 알고 걱정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인 게 너무 느껴져서 더 미안했다.

  퇴근시간까지 팀 내의 묘한 분위기를 겨우 견디고 있을 때 메신저로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면 저랑 같이 술 한 잔 하실래요?] 하며 말을 걸어온 것도 지민이었다. 아마도 남준이 속상할 것 같아 선배로서, 혹은 상사로서 다독여줄 생각일 것이다. 솔직히 그냥 이대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긴 했지만 어쨌든 지민이 자신을 생각해서 한 제인인데다가, 지민 또한 농담처럼 툭툭 던져지는 말들에 기분이 상했을 거라 생각해 알겠다고 대답했다. 대신 술을 많이 마시진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겹경사가 아니면 줄초상이라고, 이런 날 이런 기분으로 술을 마시다보면 꼭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니까.


  퇴근 후 남준의 차를 타고 함께 회사를 나왔다. 옆 자석에 누군가를 태우는 게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은 당연히 헤어진 아이였고, 어둑하게 인적이 없는 곳에 차를 세워놓고 꽤 진한 스킨십도 했었지. 남준이 룸미러로 슬쩍 옆자리의 지민을 쳐다본다. 가까이 앉은 지민에게서 약간의 살 냄새와 풋풋한 비누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서른을 앞둔 남자에게서 나는 비누 냄새라니. 남준이 부드럽게 핸들을 움직이는데 차 안을 두리번거리던 지민이 "차에서 남준씨 냄새나요." 그런다. 아까 누명 아닌 누명을 쓰며 꽤 진땀을 흘렸던 터라 혹시 땀 냄새가 나는 건가 해서 물었더니, 고개를 가까이 가져와 킁킁거리더니 "아뇨. 뭐랄까. 어른 남자 냄새" 하고 대답했다. 그러는 당신도 어른 남자가 아니냐 말하려다 말았다. 어떻게 봐도 어른의 향이라 할 수 없는 풋내가 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지민에게선 작정하고 끼를 부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 엉켜드는 느낌이 있었다. 그럴 생각 전혀 없으면서 늘 이런 느낌이라면 그동안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하긴 오히려 이런 느낌이라 인생이 더 쉬웠을지도 모르지.

  남준이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지민과 함께 들어온 곳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술집이었다. 전체적으로 모노톤의 가게는 꽤 세련된 느낌이었는데 지민이 들어가며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단골집이었던 듯 했다. 콧수염에 포실포실한 파마머리를 한 남자도 기껏해야 30대 초반에서 중반 남짓의 나이로 보였는데, 그냥 단골술집 사장과 단골손님 사이라기엔 꽤 친근해 보였다. 아무래도 남준의 사수는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사람들 다 만나 친구가 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철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금요일인 것치고는 한산했다. 창문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남준에게 좋아하는 안주가 있냐 물으며 메뉴판을 내밀길래, 안주는 뭐든 상관없다며 다시 지민에게 메뉴판을 밀었다. 그러자 눈알 튀어나오게 맛있는 걸 먹자며 한참을 머리를 박고 메뉴판을 보다가 결국 시킨 것은 소시지 야채볶음에 얼큰한 탕이 하나, 그리고 소주였다.

  지민이 생각보다 술을 잘 마신다는 것은 의외였다. 왠지 맥주 한 잔에도 볼에 발그랗게 열이 올라 비틀거릴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덕분에 남준도 원래 예상보다 좀 더 많이 마셨다. 두 시간도 안 돼서 빈 소주병이 세 병. 지민이 호쾌하게 벨을 눌러 한 병을 더 주문하며 남준에게 더 마셔도 괜찮냐 묻는다. 약간 취기가 오르긴 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에게 주량은 언제나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대리님 생각보다 술 잘 드시네요."
  "아. 저 술되게 못 마실 것처럼 생겼죠. 다들 그래요."
  "네. 굉장히 잘 취할 것 같은 사람의 표본처럼 생기셨는데."
  "하하. 그게 뭐예요. 그냥 남들 마시는 만큼은 마셔요. 근데 저 여기 입사하고 얼마 안돼서 완전 취해서 민 과장님한테 엄청 주정한 적 있어요. 막 대머리라 그러고. 술 깨서 창피해 죽는 줄 알았어요."

  지민의 말에 남준이 보조개가 폭 들어가도록 웃는다. 왠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가는 광경이었다. 웃으며 술잔을 매만지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더니 지민이 젖은 눈을 하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저처럼 조금씩 술이 올라 그런 거겠지만 눈이 마주치자 괜히 입 안이 마른 느낌이 들어 남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게에서 나오는 음악도 뭔가 끈적거리고, 작은 손 가득 쥐고 있는 소주잔을 뱅글뱅글 돌리는 지민의 손짓도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남준씨."
  "네."
  "유팀장님 너무 미워하지 마요."
  "......"
  "아마 정말 본인 선에서 금액 오류가 있었던 거 몰랐을 거예요. 알고서 남준씨한테 뒤집어 씌울 만큼,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네. 괜히 오늘 저 때문에 대리님께서 곤욕 치르시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남준씨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나한테 사과를 해요. 그리고 진짜 솔직히는, 나 오늘 그래도 좀 선배같이 굴 수 있어서 약간 기분 좋았어요. 남준씨는 입사하고 처음 겪는 일에 최악이었을 건데 나 좀 치사하죠."
  "대리님은, 언제나 그렇게 솔직한 편이신가요?"
  "그러려고 노력은 해요. 어릴 때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고함쳐도 아무도 안 믿어주는 거 너무 무서웠거든요."
  "누구에게든 솔직할 수 있다는 거 뭔가 부럽네요. 전 그렇지를 못해서."

  그 말에 지민이 묘하게 웃는다. 말 그대로 묘한 미소였다. 남준은 또 한 번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성향이 아니냐는 물음이 나올 뻔 한 걸 겨우 참았다. 나이에 비해 어린 얼굴과 작은 키, 싹싹하면서도 친절하고 솔직한 자신의 상사는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면 꺼내드는 또 다른 얼굴이 있는 듯 했다.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어다닐 것 같던 사람이 조금 나른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취기 때문에 말투나 행동도 눅눅해지자 왠지 분위기가 달라진 듯 느껴진다. 천천히 깜빡이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왠지 등 뒤가 뜨끈해졌다.

  "저는 김남준씨가 부러운데요."
  "뭐가 부럽습니까?"
  "그냥. 남준씨는 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처럼 보여요. 전 그렇지 못하니까 부럽죠."
  "뭐 저라고 늘 이성적 이기야 하겠습니까."
  "그런가요? 남준씨도 이성적이지 못한 때가 있어요? 될 대로 되라 하는 그런 기분 뜨는 때."
  "...있죠."
  "음... 남준씨가 이성을 잃은 모습이라. 왠지 상상이 안 가는데. 한번쯤 그런 모습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저 되게 웃긴 거겠죠?"

  남준은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보여줄 용의가 있었다. 물론 자기 앞에 앉은 사람이 전혀 상상조차 하고 있지 않은 방식으로. 주량에 아슬아슬할 만큼 술이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지민이 예상치 못했던 축축한 분위기를 내고 있어서인지 머릿속이 소란스럽다.

  결국 소주 한 병 반을 더 나눠 마시고 나왔을 땐 자정이 넘어 있었다. 지민도 이제야 취기가 제대로 오르는지 계산을 하고 나오려다 문턱에 걸려 넘어지려는 걸 남준이 겨우 허리를 껴안듯 잡았다. 아 나 취한 건 아닌데. 나 안 취했어요. 남준씨.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리는 건 남준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취하도록 마시지 말자 다짐을 했었는데. 손에 감긴 지민의 허리가 생각보다 너무 얄쌍해서 그것도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대리님 집이 어디십니까?"
  "여기서 많이 안 멀어요. XX마트에서 5분 거리. 남준씨는요?"
  "저는 XX동입니다."
  "아 그럼 되게 멀지 않아요?"
  "네 전 대리 불러서 가면 되는데. 가는 길에 태워드릴게요."
  "아니에요. 사실 지금 차타면 속이 울렁거릴 것 같아요. 저 되게 오랜만에 이렇게 마셨거든요. 그냥 천천히 걸어가죠 뭐."
 
  지민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나른하게 웃는다. 왠지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일단 제 차로 가죠. 차가운 거 천천히 한잔 마시고  속 좀 가라앉으면 그때 데려다 드릴게요."
  "에이. 내가 무슨 여자도 아니고 그렇게 까진 안 해도 돼요."
  "대리님이 오늘 멋있는 사수 역할 하셨으니 저도 싹싹한 부사수 노릇 좀 해보려구요."

  그 말에 지민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웃는다. 아이 같았다가 또 순식간에 짙어졌다가, 빤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예상치 못한 얼굴을 보인다. 지민과 차로 돌아와 지민이 조수석에 거의 쓰러지듯 앉는 것을 보고 에어컨을 틀어준 후 남준이 근처 편의점에서 커피와 숙취 해소제를 산다. 알바생이 바코드를 찍는 동안 잠깐 계산대 옆 콘돔에 시선이 가긴 했지만 다른 의미는 없었다. 큰 손에 커피와 숙취제거제를 한 번에 쥐고 차로 돌아왔더니 지민은 멍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는 긴 눈을 접어서 나른하게 웃던 사람이, 지금은 자다 깨서 엄마가 어디 갔을까를 생각하는 아이 같다. 남준이 운전석에 타서 커피와 숙취 해소제 두 개를 다 내밀자 커피만 받아든다. 난 이거면 돼요.

  에어컨 때문에 창문을 모두 올려놔서인지 차 안이 유독 더 조용했다. 남준이 라디오라도 켤까 싶어 손을 뻗자 얇은 셔츠 밑에 검은 문신이 언뜻 보이는 것을 보고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남준씨 혹시 이거 문신이에요??"
  "네? 아 네."
  "와. 진짜요? 봐도 돼요?"
  "네 뭐 별 건 아닌데."

  남준이 채워져 있던 단추를 풀고 셔츠를 걷자 팔목 가운데서부터 올라가는 까만 음표그림과 레터링이 보인다. 차 안이 조금 어두워서인지 지민이 어느새 채우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더니 남준 쪽으로 몸을 기울여 팔목을 빤히 쳐다본다. 만져봐도 돼요? 하고 묻길래 얼떨결에 그러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막상 지민이 손을 펴서 천천히 팔목 위를 만지자 아랫배가 슬쩍 간지러워진다.

  "남준씨 근데 이거,"
  "......"
  "남준씨?"
  "아니라면 죄송합니다만 박대리님 혹시, 이 쪽 사람입니까?"
  "이 쪽? 이 쪽.... 아... 맞아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준도 습관처럼 맸던 벨트를 풀었다. 그때까지도 자신의 팔목을 매만지고 있던 지민의 손을 잡으며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코앞에서 쌍꺼풀 없는 기다란 눈이 저를 올려다본다.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한 남준이 말없이 지민의 코끝을 쳐다보다가 눈을 맞췄다.

  "해도 됩니까?"
  "네...?"
  "키스. 해도 됩니까?"

  1, 2, 3. 그리고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선과 정적. 그것이 대답이라 생각하고 남준이 지민의 뒷목을 끌어당겨 그대로 입을 맞춘다. 보기에도 말랑해보이던 입술은 빈틈없이 맞아떨어졌다. 남준이 고개를 틀며 좀 더 깊게 턱을 움직였다. 손에 감긴 지민의 뒷목이 뜨끈하게 느껴졌다. 남준이 혀를 내밀자 잠시 움츠러들었던 입술이 다시 열리고 혀가 맞닿았다. 라디오에서는 이름 모를 팝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고도 계속 눈을 감고 있던 지민이 천천히 눈을 뜬다. 울고 있는 게 아닌데도 젖어 있다. 한번 짧게 입술을 쪽 하고 맞춘 남준이 귓가에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다. 방금 한 키스가 괜찮았냐는 뜻임과 동시에 더 해도 괜찮냐는 물음이었다. 남준이 귓가에 속삭이며 볼과 볼이 닿아 서로의 열기 때문에 한 번 더 몸이 중력을 거스르는 듯 한 느낌이 든다. 잠시 어깨를 움츠렸던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남준이 다시 지민의 턱을 끌어당겼다.

  남준이 말한 "이 쪽 사람" 을 지민이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 물음에 긍정했다는 것을 안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진한 키스가 끝난 후 긴 숨을 내쉰 지민은 갑자기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더니 "미안해요." 하고 말하고는 차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미안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멍하게 있던 남준이 뛰쳐나갔을 때, 지민은 이미 도로에 세워져 있던 택시에 올라타고 있었다. 쫓아가려고 다시 차로 돌아온 남준은 자신이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런 날, 이런 기분, 의도치 않은 실수.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저질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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