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 다짐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졌다. 죽기 전에 싸워는 봐야하는데 그런 힘이 남아있을까. 그 정도로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사실 믿을 수 없어서 이 사람이 하는 얘기가 모두 거짓이길 바랬다. 차라리 날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이, 다른 이이길 바랬다.

“거짓말 하지 말아요. 그 사람이 왜 날.”

“제이는 그 아이가 지금 당신인 줄 몰라요.”

“도대체 왜‥.”

“당신이 류회장을 괴롭게 할 걸 알았으니까. 심하면 죽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전 그때 고작 어린애일 뿐이었어요. 제가 어떻게 류회장을, 성인 여자를 죽인다고.”

“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대부분 당신을.”

남자는 내 눈치를 보았다. 어설픈 시선이 날 천천히 지나간다.

“유소람의 소생, 불길한 애새끼. 류회장을 다시 악몽으로 돌려놓을 씨앗. 특히 16살이었던 제이에겐 더할 나위 없는 위험이었겠죠. 제이는 류회장이 그때 당시 꽤 아꼈던 아이였어요. 불난 고아원에서 도망쳐 쓰레기 통 옆에서 자고 있는 남자아이를 거둬 먹이고, 재우고, 애정을 주고, 회사에서 자길 지키게 했죠. 제이는 당신이 나가자마자 따라 나갔고 그 걸 수상하게 본 이소연 이사는 뒤따라 나갔고, 어리숙한 운전 실력으로 당신을 친 제이를 봤고. 다른 선택이 있었을 리가 없죠. 당신은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고 제이도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요. 당신은 꼬박 한 달을 잠들었고 깨어났을 땐 모든 기억과 모든 혈육을 잃은 채였죠.”

“그래서 이소연 이사가 절.”

“네. 하지만 동정이나 연민, 애정 같은 건 아니었어요.”

“그럼.”

“류회장 앞에 다신 나타나지 말라는 경고, 협박 그리고 감시.”

“….”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운명은 지독하게, 당신과 제이를 다시 만나게 했죠. 류회장은 아무것도 몰라요.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이 전부 맞다면, 최대 피해자는 류혜진 회장. 본인이니까.”

“그걸 지금 내 앞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굳이 내 앞에서 말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럼 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정도 되는 거냐고. 그렇게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피가 차갑게 식은 것처럼, 다 식어버린 홍차만 본다. 피해자든 뭐든 지금 내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다. 남자를 올려다본다. 이 새끼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다 알면서도. 내가 빤히 바다에 뛰어들고 있는 걸 봤음에도.

“그렇게 다 알고 있으면서 속이니까 기분 좋았어요?”

“속인 게 아니라 배려를 해준 거예요. 행복한 시간이 있어야 불행한 시간도 견딜 수 있는 거니까.”

“아니요. 틀렸어요. 행복한 시간을 맛봤으니까 지금 이 불행을 죽어야겠다, 부셔야겠다. 벗어나야겠다. 이런 생각밖엔 안 나요.”

“지금을 벗어나고 싶어요?”

지금뿐일까. 난 세상을 벗어나고 싶어졌는걸. 이렇게 큰 비밀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스포를 해주든가. 갑자기 이렇게 많은 걸 알게 되니까. 죽고 싶잖아. 지금 우리 뒤에 있는 장식용 장총, 난 저게 그저 장식용 일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저걸 들고 당신의 대가리를 뒤져서라도 총알을 찾아내서, 날 속인, 날 감시한 널 죽이고 여길 벗어나서 날 이렇게 만든 제이를 만날 거야. 그리고 이소연 이사도. 만나서 죽일 거야. 처참하고 비참하게 날 보면서 벌벌 떨게, 고작 네 사랑 하나 지키겠다고 시궁창 속에 날 집어 넣어버린 당신을 죽여 버릴 거야. 근데 그렇게 생각하는 나도, 고작 내 사랑, 내 사람, 내 기억을 지키겠다고 이러는 거라 그렇게 떳떳하진 않네.

“아니요. 그저 자고 싶네요.”

오늘은 거짓말이 더 편할 것 같아. 그래서 대신 했어. 불안 해 하지 마, 유슬. 사람이 앞에 있을 때 나타나는 건 또 처음이네. 깽판은 안칠게. 네 감정을 알겠으니까.


-


“아 미친 골 울려. 물, 물.”

눈 뜨고 말해. 옆에 있으니까.

“네가 아침부터 웬일이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네가 아침부터 웬일이야, 날 다 부르고.

“알면서, 그렇게 묻지 말아줄래.”

너도 알면서 그렇게 시치미 떼지 말아줄래. 어제 나한테 그 감정을 고스란히 다 주고 도망간 주제에.

“도망이 아니라 피신이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잠시 쉬러 간 거야.”

그래서 생겼나, 네가 할 수 있는 일.

“어.”

….

“근데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지.”

똑똑.

“유슬씨 일어났어요?”

문 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부스스한 머리를 헝클린다. 아직 대화 안 끝났는데 찾아오고 난리야. 이불을 걷어내고 문을 연다. 남자가 쟁반에 우유와 빵을 담아 가져온다. 어제 그렇게 나한테 폭탄을 줘놓고 지금 와서 뭐하겠다는 거야. 불만스러운 표정을 그대로 들어 낸 채 남자를 보니 남자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그렇게 보니까 무섭네. 좀 들어가도 돼요?”

“왜요. 또 할 말이 남았어요?”

“왜 이렇게 날이 서있어요. 아직도 못 믿겠나, 제이가 그 쪽을 죽이려고 했던 걸.”
“믿어요.”
남자에게 쟁반을 받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말하자마자 본 남자의 표정이 꽤 웃기다. 놀랐나보다. 하긴 사랑하는 사람이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면 깊은 고뇌라도 빠져야 할 것 같은데 난 꽤 담담하다. 뭔가,

“뭔가. 그런 게 있을 줄 알았어요. 있어야 운명이라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날 죽이려는 건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그렇게 담담하면 좀 찔리는데.”

“네?”

남자의 혼잣말이 의심스러워 다시 되묻자 남자는 평소처럼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대답은 회피 같았다.

“그런 건 운명이 아니라, 악연이라고 하죠, 보통.”

“악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사랑했는데, 그 쪽도 다 봤으면서.”

“맞아요. 그래서 질투 좀 났죠.”

우유를 한 모금을 먹다 남자의 말을 듣고 그대로 뿜을 뻔 했다. 간신히 목구멍 뒤로 넘기고 남자를 본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째려본다. 근데 마주친 남자의 표정이 꽤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표정이 서서히 변하는 걸 느낀다. 결국 무표정으로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내가 먼저 시선을 끊었다. 그 감정은 사랑인가, 그저 연민인가. 날 여기로 데리고 올 때부터 예상했던 전개다. 굳이 좋은 패를 버리고 날 선택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확신이 생긴다. 별로 좋지 않은 확신이다. 그래도 남자가 조금은 불쌍해 보이는 이유가 뭘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동경해서, 겨우 그 이유일까.

“나 있으면 밥도 잘 안 넘어간다. 뭐 이런 말 하려고 했죠. 알았어요, 나 갈 테니까 다 먹으면 가지고 내려와요.”

남자가 뒤를 돌아 나간다. 난 그 뒷모습을 본다. 문을 닫고 나가는 남자는 끝까지 날 조심스럽게 대했다. 발소리나 문소리나 숨소리조차 전부. 끝까지 날 위하는 척 한다. 유슬 정신 차려, 저 사람은 널 감시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고 시선은 찰랑거리는 우유에 가있다. 우유가 차다. 꼭 눈을 녹인 것처럼.


-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와 전은 별다른 변화는 없다. 그냥 하루에 멍 때리는 일이 많아지고 가끔 나갔던 산책도 끊어버렸고 침대 위에서 엉덩이가 무를 때까지 있는 것 말고는 모두 괜찮다. 시도 때도 없이 나이긴 하지만 내가 아닌 내가 나와서 나와 대화를 하다가도 요즘은 내 몸을 잠식한다. 그 아이 말 대로면 내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그럼 이 정도면 양반이네, 난 지금 도망치고 싶은 수준이 아니니까. 내 방에 있는 작은 창문을 보고 멍을 때리는 일이 많아졌다. 온통 나무뿐인 작은 네모를 눈에 담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가 누군 인지, 어떤 사람의 동생이며 또는 애인이고 내 기억이 뭐고, 누가 날 죽이려고 했고 지금 누가 날 죽이려고 오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두 눈 가득 초록을 담으면서 내가 잡초가 된 것처럼 가만히 있는다. 그럼 박중혁이 온다. 내가 자고 있으면 조용히 책상 위에 두고 가고 내가 깨어 있으면 조심스럽게 묻는다.

“같이 먹을래요?”

그럼 난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그럼 남자는 짧은 한숨을 쉬면서 책상 위에 쟁반을 두고 간다. 오늘 점심은 호박죽인가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박죽을 본다. 그래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박중혁이 들려준 그 이야기 덕분에 난 제정신이 아니다. 이기우가 날 죽이려고 했다. 물론 어렸고 그의 머릿속엔 내가 아니라 류혜진이 가득 했을 테니까, 이해도 된다. 그럼 날 이렇게 시궁으로 내몬 사람도 기우인가. 결국 이소연의 손에 길러진 이유도, 내가 기억을 잃게 만든 사람도 기우니까. 전부 네가 한 짓인가. 또 여기까지 생각하고 멍을 때린다. 여기서 더 나가면 안 된다. 날 위해서라도 기우를 위해서라도. 그만해야한다. 내가 죽으면 모두 끝날 일이란 걸 안다. 사실 누군가 내 귀에다가 죽이라고 한 마디만 한다면 난 지금이라도 창문을 깨 뛰쳐나갈 용기가 있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본다. 다시 호박죽을 본다. 기우를 생각한다. 날 보고 웃던 그 아이를 생각한다. 밝은 웃음, 너의 목도리, 나의 웃음, 나의 목도리. 우리의 노란색. 아무래도 안 되겠다. 기우를 만나야겠다.


세계를 만들기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제가 만들어 낸 인물들을 사랑합니다. 현재 권총을들고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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