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아시, 나 남자친구 생겼다?”


조용히 책장을 넘기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들었다. 제 어깨 위를 짚은 두 손이 조그마했다. 고개를 젖히니 저와 똑 닮은 청록색 눈동자가 저를 향해 반짝인다. 위에서 저를 내려다본 탓에 흑 빛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볼 가를 간질였다. 윤기가 흐르는 흑색을 띠는 머리는 그녀의 흰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바람과 함께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반짝일 때면 넋을 잃게 만들곤 했다.

아카아시 아이리(赤葦愛李). 누구 말에 따라 같은 한 배에서 태어났지만, 똑 닮은 생김새를 제외하면 저와는 참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저와는 달리 밝고 통통 튀어 천방지축인 구석이 있었다. 가끔은 동생인 저도 받아내기 힘든 기운에 그녀를 상대하다 보면 진땀을 빼곤 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케이지한테도 소개시켜 줄게!”


어쩐지 요즘 얼굴이 밝아졌다 싶었다. 온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웃음을 멈출 줄 모르길래,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나 했지. 말간 얼굴이 해맑게 웃어 보인다. 부쩍 들어 발랄해진 모습들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아카아시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를 향해 밝게 웃어 보이는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수줍음이 묻어 나왔다.





시간 속의 공백空白

w. 헤더

00 袖触れ合うも他生の縁





케이지, 오늘은 언제 들어올 거야? 저에게 재차 묻는 제 누나의 모습에 한참을 고민했다. 눈빛에서부터 느껴지는 강한 시선에 원하는 대답을 해줄까 싶다가도, 되려 오기가 생겨버렸다. 응? 하지만 저를 재촉하는 물음에 결국은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알겠어, 늦게 들어올게.

하교 후 동네를 다섯 바퀴째 도는 중인데도 시간이 흐르질 않았다. 여전히 느릿하게 제자리걸음 하고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쥐고 있던 핸드폰을 교복 주머니 안으로 푹 찔러 넣었다.

집 근처 놀이터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던 아카아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가방끈을 고쳐 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더는 안되겠다. 이대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책이라도 들고 올걸. 급하게 등교하느라 책상 위에 두고 미처 챙기지 못한 책이 생각났다.

그래도 이만하면 되겠지. 언제까지 오라고 정확한 시간도 언급 없이 저를 내쫓은 제 누나가 괘씸하기까지 했다. ‘이제 들어가도 돼?’ 제 메신저 메시지에도 답장 하나 없이 감감무소식이다. 대답 안 해준 사람 잘못이다, 뭐.

하지만 이런 상황일 줄 알았다면 절대 집으로 오지 않았을 테다. 그녀 역시 제게 언질쯤은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는 말을 잘 듣는 남동생이었기에 약간의 눈치만 줘도 바로 시간이 남아도는 제 친구들을 물색할 수 있었으니까. 시간을 때울 방법은 어디까지나 많았단 말이다. 이렇게 필사적인 상황일수록 더더욱.


“…….”


툭. 제 발치에 닿는 낯선 신발은 한눈에 봐도 제 것이 아니었다. 최근 출시된 신상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모 브랜드의 광고가 떠올랐다. 더더군다나 이런 거대한 발 사이즈는 더더욱 제 집안의 것일 리 없었다. 저 역시 남자치고는 손발이 큰 편이었지만, 저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괜스레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퉁명스러운 발길질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신발 한 켤레가 삐뚤어졌다.


“아이리!”


갑자기 부엌에서부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 흐르던 정적을 깨고 등장한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아카아시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끈을 그러쥐었다. 이 낯선 신발의 주인공일 테다. 꼴깍.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목울대 너머로 침을 삼켜냈다.


“아이리이-! 네가 말한 주스가 뭔지 모르겠어!”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인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계단 위에서부터 토도독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가볍게 통통 튀어 오르듯 복도를 거닐어오는 발소리의 주인공은 단 한 명뿐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몸짓이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듯 가벼웠다. 가녀린 팔을 팔랑거리며 내려오던 걸음이 일순간 굳었다. 잔뜩 굳어진 표정의 아카아시를 발견한 그녀가 계단 위에서 동작을 멈췄다.


“아…카아시?”


흔하디흔한 삼류드라마 같은 전개였다. 아이리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주말 드라마건 일일 연속극이건, 평이 좋기만 하면 전부 챙겨보는 편이었다. 평소 거실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카아시는 제 취미 생활이 방해받는가 싶어도 꿋꿋이 옆에 앉아 책을 봤다. 드라마 장면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는 아이리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케이지, 저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우연히 주인공의 불륜을 목격한 여주인공이 쓸쓸히 돌아서는 장면이었다. 책장을 넘기던 아카아시가 힐끔 브라운관으로 시선을 던졌다. 웅장한 음악이 한참 동안 깔리며 급박한 장면 전환의 연속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분명 일어나겠네. 글자를 읽어 내리던 아카아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머, 어머. 아이리의 추임새는 덤이었다.

하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허탈한 상황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이리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휙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저 상황을 알고, 하필 저 시간, 저 타이밍에 저곳을 찾아갈 수 있어? 무당도 아니고서야.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목소리가 격양되었다. 몸을 둥글게 말은 채 소파 구석에 콕 박혀 집중해서 보던 얼굴은 흥미를 잃은 지 모래였다. 진짜 말도 안 돼. 저러니까 드라마지.

그나마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기에 다행히도 조금 어긋난 타이밍에 감사했다. 하마터면 제 인생 가장 부끄럽고 말 못 할 일들을 기억 속에 담아둘 뻔했다. 상황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제 품보다 훨씬 큰 새하얀 와이셔츠를 걸친 아이리는 아래에 아무것도 입지 않아, 매끈한 다리를 내놓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가려지는 아랫도리가 순간 휑했는지 급하게 다리를 모은다. 계단 난간을 붙잡고는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망부석이 되어버린 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 정적을 깨고 등장한 것은 낯선 이였다.


“아이리, 어서 내려오지 않고 뭐…,”


반나체로 등장하는 한 남자의 모습에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휘적휘적 긴 팔다리를 저으며 등장하던 그 역시 아카아시를 발견하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제집마냥 익숙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런 말 없이 미간을 구긴 채 두 인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카아시…, 빨리 왔네?”


평소 뻔뻔하다 못해 능글맞기까지 한 아이리가 당황하는 모습은 흔치 않다. 어색한 웃음을 짓는 탓에 억지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제 이마를 짚은 아카아시가 중얼거렸다.


“…당장 갈아입고 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며 휙 몸을 돌린다. 쏜살같이 계단 위로 제 모습을 감추는 것이 어지간히 창피하긴 했나 보다. 남은 문제는 이 사람인데. 제 맞은편에서 어색한 웃음을 띠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한껏 왁스로 고정된 회색 머리는 결코 낯설지 않다. 아. 뒤늦게야 생각난 탓에 아카아시가 낮은 탄성을 뱉었다.

아침 등굣길이 유난히 평소보다 시끌벅적했다. 교문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소란스러운 탓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교문에 다다르고 나서야 이 모든 소음이 이해가 갔다. 서로 제 동아리를 홍보하기 바쁜 모습들에 교문 앞으로 늘어선 행렬들은 정신이 없었다. 그 사이를 뚫고 가야 하니 막막함이 앞섰다.

평소 저가 동아리를 선택하는 기준은 제시간을 많이 뺏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참여만 하면 되는 동아리를 선호했다. 워낙 자기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지라 아카아시는 귀찮고 불필요한 체력 소모를 요구하는 동아리는 딱 질색이었다. 그렇기에 운동 동아리는 더더욱. 다른 동아리들에 비해 유달리 눈에 띄는 동아리들이 몇 있었다. 범상치 않은 덩치들과 고등학생답지 않은 체격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저곳만큼은 피해야겠다.


“하하, 너가 케이지구나? 아이리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거기 너, 피지컬 좋은데 배구부 안 들어올래? 제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지며 낯익은 형상을 만들어냈다. 여차여차 제게 뻗어져 오는 손길들을 뿌리치던 찰나, 뒤에서 저를 붙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에이, 저는 아니겠지.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하려던 순간, 쐐기를 박아버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 수밖에 없었다. 어이, 거기 까만 머리 1학년!

배구부 부주장이라고 소개하더니 거짓말은 아닌 듯 움직이는 상체가 탄탄했다. 근육이 여기저기 잘 붙어 있는 몸이 새삼 교복 아래 근육 하나 없이 삐쩍 마른 제 몸과 비교되었다. 그런데도 눈에 들어온 것은 낯익은 트레이닝복 바지였다. 그에게는 조금 짧은지 발목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길이에, 저에겐 꼭 맞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아카아시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휘적휘적 제게 다가온다.


“미안, 여벌 옷이 없어서 빌려 입었는데 괜찮지?”


괜찮으면 어떻고, 안 괜찮으면 어떠하리. 이미 착용하고 있는 사람이 물을 질문은 아니었다. 언제 봤다고 툭툭 벌써 말까지 놓은 모습은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강렬한 햇빛을 머금어 빛나던 황금빛 눈동자는 실내에서도 여전했다. 저를 향해 빛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아카아시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문득 가방 안에 고이 접어져 있던 배구 동아리 홍보 전단지가 생각났다. 관심 없다고 거절하면 그만이었지만, 이 신비롭기까지 한 금빛 눈동자에 모든 시선을 빼앗겨버려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어느새 제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제 손에 쥐여주던 전단지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삐뚤빼뚤 쓰여 있던 필체가 상당히 악필이었다. 동아리를 홍보할 마음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전단지의 모습에 아카아시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정해둔 동아리 없으면 꼭 들어와, 초심자라도 괜찮아.


“난 보쿠토 코타로. 아이리 남자친구야.”

“아, 네….”

“같은 학교라고 들었는데, 앞으로 잘 부탁해.”


반면에 그는 저가 전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밀며 지어 보이는 쾌활한 모습에 아카아시는 머뭇거리다, 이내 손을 맞잡았다. 가볍게 맞물리는 손이 뜨거웠다. 꼭 태양을 등지고 있던 그와 어울리는 손이라고 생각했다. 꽉 맞잡는 악력이 상당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은 차마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뻔한 상황임에도 제대로 말 한마디 꺼낼 수 없는 저 자신이 초라했다. 그것이 바로 제 누나의 남자친구, 보쿠토 코타로와의 첫 만남이었다.



袖触れ合うも他生の縁

(옷깃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





***

헤더입니다. 종이 달 이후로 너무 오랜만에 돌아와서 어색하지만, 꼭 한번 써보고 싶었던 분위기의 글이라 가져왔습니다.

아카아시에게 누나가 있다는 저만의 설정으로 그들 사이의 삼각관계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원래 실제로 준비하려던 글은 다른 글이라, 이 글은 제가 시간이 나면 연재가 될 것 같습니다. 천천히 느리게 굴러갈 예정이니 생각이 나시면 한번씩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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