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얼마만에 쓰는 글인지ㅠ

짧습니다;


알게 모르게 썸타는 중인 꽈장님과 이사님:)








 아침엔 거짓말처럼 맑았던 하늘이 오후부터 꾸물꾸물 흐려지더니 기어이 추적추적 물줄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끝물에 느지막히 회사로 돌아오던 율은 난데없이 쏟아지는 비에 급한 대로 근처 편의점으로 피했다. 물 빠진 생쥐꼴이 되는 것은 면했지만 깔끔하게 올려져 있던 머리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흐트러져 이마 위로 볼썽사납게 늘어졌다. 하필 밝은 색의 코트를 입고 온 것에 율은 허, 바람 빠진 한숨을 쉬었다. 어제 찾아온 건데 딱 하루만에 도로 맡기게 생겼다. 소나기로 끝날 것 같지 않다.

 휴대폰 화면을 켜자 큼지막하게 쓰인 시간보다 귀퉁이의 날짜가 눈에 박힌다. 꼭 3년. 무의식적으로 그 숫자를 떠올리고 율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었다. 진짜 배알도 없지. 그 개새끼가 뭐라고. 저 좋다고 졸졸 따라다닐 땐 언제고, 결국은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린 그 새끼가 대체 뭐라고. 흔히 말하는 첫사랑을 29살이 되고서야 해본 게 잘못인 걸까. 율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툴렀던 것도, 머뭇거렸던 것도, 솔직하지 못했던 것도 있겠지만 정말 그것뿐일까. 편의점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우울했다. 율은 코트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비닐을 뜯었다. 연수원 시절에도 검찰에 있을 때도 주변에 줄담배 피우는 사람 천지였는데, 왜 새삼 지금 이러고 있는지 참 웃긴 일이었다. 담뱃감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망설이던 율은 심호흡을 하고는 담배 하나를 꺼내물었다.


“.....!!? 콜록, 콜록......콜록, 켁......”


한 숨 빨아들이자마자 대번에 거센 기침이 튀어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맵고, 독했다. 지검장이 피우던 담배 브랜드를 말했더니 독한 거였던 모양이다. 담배 연기라면 눈살부터 찌푸리며 피해다녔으니 애초에 맞을 리가 없었지만. 율은 연거푸 나오는 기침에 입을 막으며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꿋꿋이 두 번째 숨을 들이마신다. 계속 잔기침이 났지만 혀가 마비된 듯 그런대로 물고 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힘이 빠진 건지 손가락 사이에 있던 담배 꽁초가 젖은 바닥으로 떨어져 구른다. 연기로 가득 찬 머리가 띵했다. 질리게 보기 싫은 얼굴이 흐릿해지는 것 같아 율은 조금 만족했다. 하지만 왜인지 가슴은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게 싫어 율은 더럽게 맛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담뱃갑에서 두 번째 필터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옆에서 불쑥 뻗어온 손이 율의 손에서 담배를 채어간다.


“어우 티나 티나 티나~ 담배 안 피워본 티가 이렇게 잘 날 수가 없어 그냥.”


어느새 담뱃갑까지 뺏어든 손의 주인이 놀리듯 말한다. 율은 어이가 없었다.


“안 내놔?”

“싫은데 싫은데~”

“지랄하네 이게 진짜. 빨리 안 내놔?”


어디서 친한 척이야 이 새끼가.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눈이 웃기지도 않았다.


“아이 사람 섭하게 왜 그래요? 이거 다 이사님 생각해서 그러는 건데. 나랑 이사님, 나름 애증의 관계 아니예요?”


 성룡이 오른쪽 눈을 애교스럽게 찡끗해보인다. 저 윙크 윙크. 율은 당장 그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저 새끼는 나이트에서 조폭 뒤 봐주면서 호스트 겸업이라도 한 게 틀림없다. 시도때도 없이 주변에 끼부리고 다니는 걸 보면 확신범이다. 필터를 문 채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손길은 오래된 습관처럼 능숙해 보였다. 출신부터 답없는 양아치 새끼니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율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일어서기도 전에 손목을 붙잡혔다. 있어 봐요, 좀. 비 좀만 있음 그칠 텐데. 제법 굵어진 빗줄기를 보고도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소릴 하는 건지 궁금했다. 왜 그랬는지 저도 알 수 없었지만, 율은 일단 자리에 앉았다. 담배 연기를 후 내뱉는 성룡의 얼굴은 답지 않게 무표정했다. 손목을 붙든 손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율은 가만히 있었다. 팔을 흔들면 가볍게 떨어져 나갈 손인데도 선뜻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조금씩 빨라지는 박동은 떨어지는 빗소리에 감춰졌다. 성룡은 담뱃갑에서 새 필터를 꺼냈다. 소리없이 떨어진 손에 무심코 아쉬움을 느꼈다. 안주머니에서 나온 은색 라이터는 기스가 여기 저기 났지만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보일 듯 말 듯 새겨진 용문양은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문득 머릿속에 라이터를 선물하는 것이 첫사랑을 뜻한다는 말이 스쳐지나갔다. 첫사랑. 답지 않게 감상적인 생각이 든다. 이 또라이 새끼한테도 첫사랑이 있었을까. 어쩌면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불현듯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는 손길에 율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생각보다 많이 젖으셨네. 성룡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아니, 맑은 날에도 가방에 우산 꼭꼭 챙겨 다닐 거 같은 사람이 왜 비를 이렇게 맞고 그랬대. 설마 차였어요?”


씨발, 율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고 말았다. 한없이 가볍기만 했던 목소리가 한 톤 내려갔기 때문인지, 양복 앞쪽의 손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아주는 손길이 묘하게 상냥했기 때문인지, 다른 손으로 담배를 피우면서도 제게 연기가 가지 않도록 슬쩍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섹시해 보여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전부 다인지도 모르지만, 얼굴값도 못하는 그 날렵한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이 짜증났다. 미쳤지, 미쳤어. 내가 사람이 없어서 저 티큐 또라이 새끼를. 평소와는 달리 멀끔해 보이는 옷차림도 괜스레 달갑잖게 보게 된다. 새끼가 군산 촌놈 아니랄까봐 수트를 입어도 어딘가 한 군데는 꼭 촌스러운 데가 있었는데 오늘은 왜인지 깔끔해서 더 짜증났다. 하지만 가장 짜증나는 건, 빗소리에 묻힐세라 쿵쾅거리며 뛰는 제 심장이다.


“담배 피지 마요. 애초에 시작 안하는 게 딱 좋아. 건강에도 안 좋고 맛도 드럽게 없어.”

“새끼가, 너 지금 나한테 꼰대질하냐?”

“이사님이 잊으셨나 본데 나 낼 모레 마흔이에요? 꼰대질 할만한 나이지 뭐. 근데 듣기 좀 그르네. 내가 뭐, 이사님 사생활 고나리질한 것도 아니잖아요?”

“관두고, 그거나 이리 내놔.”


 아차 싶어 율은 이를 악물었다. 성룡은 쿡쿡 웃으며 짧아진 담배 꽁초를 떨어뜨렸다.


“설마 나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렸다는 얘기 하는 거 아니죠? 세상에 우리 이사님이 그런 배려심도 있었어요? 진짜면 나 좀 감동받을 거 같은데.”


 늘 한 마디를 던지면 칼같이 맞받아치는 사람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좀 많이 귀여웠다. 명품 수트로 온몸을 감싼 사람이 몇 폭 되지도 않는 편의점 천막 아래 가출한 고등학생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어찌나 언밸런스하던지. 담배는 손에 댄 적도 없었을 사람이 콜록거리면서 고집스럽게 담배를 물려 하는 건 또 왜 그렇게 눈에 밟혔던지.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었던 것 같다. 성룡은 율을 빤히 바라보았다. 늘 차갑게 빛나기만 하던 검은 눈이 이렇게 물기를 머금고 일렁이는 것도 참 눈 못 떼게 예쁘더라고, 성룡은 남몰래 생각했다.


“-마음의 구멍이란 거는 이런 게 아니라 사랑으로 채워야 되는 거예요. 사랑.”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에 율이 주먹을 쥘 새도 없이, 성룡은 잽싸게 회사 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한 발 늦게 욕설을 퍼붓던 율은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시끄럽게 뛰는 가슴을 패서라도 멈추게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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