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독자님들에게>

오래간만이네요. 보고싶었어요!

2

세훈은 종인이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현관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 안일했던 것 같았다.

"종인아. 사실은 나 너 좋아해."

"종인아. 나랑 사귈래?"

"사랑해. 종인아."

뭐라고 말해야 최대한 부담을 최대한 덜 가질까.

"종인아, 종인아."

조금 전부터 입속에서 구르는 '종인'이라는 말의 형태가 예뻐서 괜스레 이름만 부르기를 수 번. 곧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세훈은 우연히 지나가는 주민이 있어 같이 들어왔다.

'종인이 놀라려나.'

엘리베이터를 따라 올라가는 세훈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는 아직도 정하지 못한 말들을 머릿속으로 훑으면서 하나씩 커지는 숫자를 응시했다.


세훈이 초인종을 눌렀다. 심장이 손끝에 달리기라도 한 건지, 초인종을 누르는 그 순간 심장이 저렸다. 안은 잠잠했다. 답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세훈은 종인이 듣지 못했나 싶어 검지손가락을 들어 초인종 가까이 가져갔다. 세훈이 다시 초인종을 누르기 직전, 맑은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와."

세훈은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열어주냐고 잔소리를 하려다가 종인의 머리를 보고는 그냥 들어갔다. 종인의 뒷머리가 살짝 눌려있었다.

'그새 또 잔 건가.'

아니, 어쩌면 조금 전에 통화할 때부터 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집 한가운데에 극세사 이불이 잔뜩 구겨진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지, 종인의 베개 옆에는 처음 보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 연필도 몇 자루 굴러다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처참한 광경에 세훈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슨 일이야? 크흠."

아직 낮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 탓에 종인은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잠깐 사이에 세훈의 눈에 띈 집의 정경이 썩 좋지 않았다. 종인이 아무리 집돌이라지만 이건 좀 심했다.

"나가자."

"응?"

"나가서 얘기하자."

세훈이 종인의 팔을 힘주어 당겼다.

"밖에 추운데……."

볼멘소리를 하던 종인은 세훈과 눈이 마주쳤다. 종인은 그 순간 곧바로 결말을 직감했다. 어찌 됐건 나갈 거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나가는 게 답이었다. 종인은 벽에 걸려있는 패딩을 주워서 대충 걸쳤다. 그리고 주머니를 한 번 토닥였다. 손가락으로 네모난 담뱃갑을 더듬어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담배가 당기기도 했으니까.'

종인은 자신을 괜히 합리화하며 문을 열었다. 세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종인의 뒤를 따라 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밖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물론 이건 종인의 개인적인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의 입에 물린 담배의 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 한 달 후에 죽는대."

적막한 가운데 세훈의 갑작스러운 발언이 끼어들었다. 종인이 아주 잠깐 눈을 흘겼다.

"너 또 어디서 그런 장난 배워왔냐."

세훈은 종인이 정색을 하며 바라보는 눈빛이 아프지 않았다. 종인의 손이 세훈의 머리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다음 행동이 무엇일지 알면서도 그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종인은 김이 팍 샜는지 도중에 손을 거뒀다. 세훈은 종인이 믿지 않을 것을 예상했었다. 세훈이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어 종인에게 건넸다.

"뭔데?"

종인이 세훈에게서 건네받은 봉투 안에서 고이 접혀있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인의 손가락이 종이의 양 끝을 잡아 펼쳤다. 진단서였다.

"이제 믿겠어?"

"......진짜야?"

종인은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눈치였다. 그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세훈을 빤히 쳐다봤다.

"설마 장난 한번 치자고 진단서 조작이라도 했으려고."

"당연하지."

"어?"

세훈은 종인의 당연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한 달인 이유는?"

"이미 말기래."

세훈은 자신의 말에 표정을 굳히고서는 양손을 모아 첨탑 모양을 만드는 종인의 자그마한 손을 응시했다. 평균에 견주어보면 작지 않은 종인의 손은 세훈에게만큼은 작아 보였다. 세훈은 이 손 모양이, 그가 집중하고 있다는 표지 같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좀 일찍 부르시는 이유가 있겠지."

"뭐라는 거야."

종인의 발언은 절대 세훈의 하나님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이유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종인은 세훈이 개신교 신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긍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에는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반응이었다. '그러시겠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 할 말 하나 더 있는데."

"뭔데."

종인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세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기적이라서 할 수밖에 없는 말. 종인을 아프게 할 말인 걸 알면서도 결국 하게 될 말.

"나 남자 좋아해."

"......어?"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종인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담뱃불은 쉽게 힘을 잃었다. 그가 채 가시지 않은 연기를 뻐끔거리며 뱉어냈다. 세훈은 차마 종인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멍하니 그 연기를 응시했다.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인데.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괜히 가슴이 아팠다.

"너, 좋아한다고."

"어?"

세훈은 탄식 비슷한 종인의 반응에 괜한 말을 꺼냈다 싶었다.

'차라리 죽기 직전까지 친구로라도 곁에 머무를걸.'

그러다가 곧, 말하고 나니 후련하지 않냐며 세훈은 자신에게 얼토당토않은 위로를 했다.

"그냥, 그렇다고."

종인은 아직도 멍하니 세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려 노력했다. 그리고 종인의 눈빛을 피해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탁 트인 하늘과 마주했다.

"......그것도 거짓말 아닌 거지?"

"죽기 한 달 전에 이런 거짓말을 뭐 하려고 해."

세훈은 조금 전부터 종인에게 의심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종인은 세훈의 대답에 무언가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 턱을 문질렀다. 그의 손가락에 문대지는 옅은 수염 자국. 세훈이 아니었으면 또 한동안 집구석에서만 있었을 게 뻔했다.

"......플라토닉이지?"

"어?"

종인의 뜬금없는 질문에 세훈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사실 종인을 상대로라면 뭐든지 하고 싶지만.

"응."

결국, 세훈은 조금 찝찝한 대답을 해 버렸다.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세훈은 그저 종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세훈의 마음 한구석에는 돌이 박힌 듯 답답함이 들어앉았다.

"지금 시간 있지?"

"있……는데 왜?"

종인이 갑자기 단정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 질문에 답하는 세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니, 물론 세훈은 종인과 함께한다면 뭐든 좋을 거였다.

"따라서 와."

"어?"

종인은 세훈의 엉성한 대답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종인은 자신보다 더 큰 세훈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종인은 빠르게 잰걸음으로 걸었다.

"잠깐만!"

세훈이 종인이 들어가려는 가게의 입구를 보고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여전히 세훈의 손목은 종인에게 잡혀 있었다. 따라서 세훈은 얌전히 종인을 따라 문방구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왜?"

"아니, 여긴 왜……."

종인은 문방구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세훈을 돌아봤다. 세훈은 이미 문방구의 광경에 한 눈이 팔려있었다. 펼쳐진 채로 천장에 붙어있는 우산. 계산대 바로 앞에 놓여있는, 칩을 꺾어 사용하는 핫팩. 벽 한쪽에 무더기로 달린 형형색색의 돼지 저금통. 바로 그 옆에 있는 착카니와 볼라포 등의 불량식품. 그의 눈높이에 자리한 칸의 분홍색과 파란색의 실내화. 종인은 그런 세훈을 보고 살포시 웃었다. 종인은 플래너 한 권과 펜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는 계산을 마치고는 곧바로 문방구에서 나와 세훈의 손에 쥐여주었다. 세훈은 뜬금없는 상황에 펜을 쥔 채로 종인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계획 짜 와."

"무슨 계획?"

"그, 나랑…… 할 계획."

종인은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세상에.'

세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이런 때까지도 종인의 이런 점이 좋아서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종인의 '……'에는 무엇이 들어갔었어야 했을까. 세훈의 머릿속은 한동안 그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동시에 플라토닉하지 않은 단어가 생각났다. 잠자기엔 글렀다.

반갑습니다! 상풀에서 활동하다가 시크릿 러브로 넘어갔었습니다. 그러다가 인연이 닿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제 글 읽어주시고, 좋아해주시고, 댓글 남겨 주시는 한 분, 한 분께 너무 감사드립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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