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소년이 첫 출정을 명받는 것을, 왕자가 처음으로 제 아버지에게 크게 화내는 것을, 공주가 소년을 끌어안고 한참을 우는 것을, 소년이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것을 모두 지켜봤다. 그리다 어느 무렵에 멈췄다.

 

전쟁터에 나간 소년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전까지 접한 사람이 많지 않았던 소년은 많은 이들을 겪으며 조금 더 자주 웃게 되었으며, 조금 더 예민해졌으며, 조금 더 포용력을 가졌으며, 조금 더 무감해졌으며, 조금 더 세상을 알게 됐다.

 

왕의 버려진 아들을 만난 병사들은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점점 소년이 백지와 같다는 것을 알고 곧잘 장난을 쳤다. 그러다 하루는 길을 잃은 마을 소녀를 데려와 소년의 막사로 집어넣었고, 소년은 그 의미를 모두 알지는 못했으나 크게 화를 냈다. 소년은 직접 소녀를 마을로 데려다주었고 그다음 날 들꽃을 들고 가 사과했다.

 

이미 전투는 막바지였고 병사들은 주로 병영에서 귀환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조달하며 지냈기에 시간은 많았다. 소년과 소녀는 자주 만났다. 용은 소년의 반짝이는 눈을 지켜봤다. 그 속에는 어떤 영혼의 그을림도 찾을 수 없었다. 고행자가 미리 말했던, 어쩌면 영혼을 상하게 했을 순간에 이 시점은 없었다. 그러니 다른 가능성 있는 시간대를 찾아봐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용은 머물렀다.

 

소년은 소녀에게 편지를 보내는 법을 몇 번이고 설명했고, 소녀는 한밤중 몰래 개울가로 나와 소년에게 제 동생들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서툴게 손을 잡았고, 어리숙하게 입을 맞췄고, 미래를 모른다는 듯 웃었다.

 

용은 옆을 돌아봤다. 이번 육체는 마음과 기억이 모두 없었다. 생명력 역시 출중하지는 않아 끝을 보이고 있었다.

 

*

 

소년의 출정과 귀환은 반복되었고 소년은 몇 번 더 사랑에 빠졌다. 왕자는 신분에 맞지 않는 이들과 어울리는 소년을 걱정스러워했으나, 반복되는 출정과 귀환에 길게 이어질 수 없는 관계였기에 한순간의 흥미라 여겨 용인했다.

 

소년이 돌아올 때마다 공주는 변해 있었다. 왕자는 여성을 대하는 법을 배웠고, 공주를 볼 때마다 아름답다고 칭송했다. 그 말에 따라 공주의 옷은 색이 빠지기도, 화려해지기도, 천이 늘어나기도, 더 무거워지기도, 반짝이기도, 차분해지기도 했다. 왕자는 공주에게 여러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공주는 다음에 왕자를 만날 때면 꼬박꼬박 선물을 착용하거나 감사 인사를 했다.

 

소년이 돌아오면 늘 공주를 찾았기에 일간에서는 수군거릴 기미가 있었으나, 왕자의 굳건한 태도에 소문이 떠오르지는 못했다. 왕자는 소년을 사랑했으며 공주 역시 사랑했다. 사랑하는 이들끼리 잘 지내는 것은 왕자의 바람이기도 했다.

 

소년은 가끔 공주를 몰래 저택에서 빠져나오게 도와줬는데, 공주의 답답함을 점점 은연중 느끼던 왕자는 묵인했다. 제게는 그린 듯한 미소만을 보여주는 공주가 가끔 저도 모르게 소년에게 무언가를 말하며 웃음을 터뜨릴 때면 절로 시선이 가기는 했으나, 왕자는 그 웃음이 제게로 향할 날을 기다렸다.

 

소년이 어린 티를 다 벗지 못한 채 청년이 되어갈 즈음 처음으로 지휘관의 지위를 얻었다. 다시 떠나는 그를 왕자는 한참이나 껴안았고 공주는 짧은 입맞춤을 전했다.

 

*

 

지휘관은 전쟁의 양상이 점점 소모전으로 변해가며 협상과 결렬을 반복할 때쯤 도착했다. 주변 병력을 끌어온지라 적군과 아군 일부의 친밀감이 깊다는 것을 파악한 지휘관은 그간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버릴 것을 명하며 가장 먼저 물길을 돌렸다. 그 후에는 주변에 불을 질러 가축들의 여물을 구하지 못하도록 했다.

 

아군의 여물도 지휘관과 함께 도착한 얼마간의 양이 전부였다. 병사들은 그것이 다 떨어지기 전 전쟁을 끝낼 것을 명 받았다.

 

몇 번의 전투를 거치며 지휘관은 명성을 얻었다. 성정이 잔인하며 가차 없다는 평을 받았으나, 일단 항복하면 약탈을 허용치 않고 주변에서 연약한 상황을 이용해 침입하지 못하도록 수비를 세워주는 덕에 자비롭다는 평 역시 받았다. 왕자는 자랑스러워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해줄 수는 없었다.

 

전쟁을 끝낸 지휘관은 개선식도 없이 은밀히 돌아왔고, 왕자와 밤을 새워 이야기 했다.

 

귀환과 함께 또다른 출정을 명받은 지휘관은 전보다 더 자주 공주를 찾았다. 공주는 지휘관을 반겼으나 말수가 적었다. 공주는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기는 했으나, 지휘관에게는 곧잘 이야기를 풀어놓고는 했다. 또 공작이 결혼을 빨리하라고 압박했을까. 양측 부모는 하루빨리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기를 바랐으나, 왕자는 공주의 허락을 기다렸다. 왕자라면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 공작은 공주를 점점 더 압박했다.

 

“밖에 나갈래?”

 

지휘관의 제안에 공주의 얼굴에 언뜻 웃음이 떠올랐으나 금세 사그라들었다. 공주는 왕자와 소공자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지휘관이 명성을 얻은 후로 공작가는 지휘관을 의식했다. 하지만 함께 산책하겠느냐는 말을 할 정도는 되었으나, 재차 권유할 정도는 아니라 한 번의 거절에 선선히 공주와 뒤에 남도록 했다.

 

여상스러운 시간이었으나 침묵은 드물었다. 그럼에도 지휘관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말아 올려 보석으로 장식한 머리는 공주의 목을 아프게 했으며, 등 뒤에 달린 화려한 리본은 공주가 의자에 기대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공주는 아름다운 꼿꼿함을 유지한 채 한참을 가만히 눈만을 깜빡였다.

 

“임신했어.”

 

무료히 부유하던 지휘관의 시선이 공주에게 닿았다. 그 시선은 이내 왕자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일순간 팽팽히 당겨진 몸이 일어나려 했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만류했다. 지휘관은 다시 공주를 바라봤다. 공주의 눈동자는 건조하고 단단했다.

 

“내가 원했어.”

 

“거부하지 않았을 수는 있겠지만 네가 원했을 리는 없어.”

 

“나는 여자를 사랑하니까?”

 

그동안 지휘관은 공주가 마음이 있는 여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해주었으며,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애초에 같이 밖에 나가는 이유가 그랬다.

 

“그렇다 한들 얼마든지 남자와 잠자리에 들 수는 있어.”

 

지휘관은 바짝 당겨졌던 몸을 겨우 의자에 기대며 물었다.

 

“누가 또 알아?”

 

“아무도.”

 

짧게 답한 공주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어쩌면, 시녀 하나가.”

 

공주와 지휘관이 바깥나들이를 갈 때 늘 모른척해 준 그 시녀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나 이제 곧 떠나.”

 

“알아.”

 

“내가 뭔가 해야 할 게 있으면 그 전에 말해.”

 

“뭘 해줄 건데?”

 

공주의 목소리는 우아하게 이어졌다.

 

“넌 나보다 왕자를 더 사랑하잖아.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매끄러운 목소리에 진저리가 묻어났다.

 

“넌 왕자를 위해서는 죽기도 할 거야.”

 

공주에게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에서 입술만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왕자가 널 살렸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왕자가 널 발견하지 않았으면 넌 사지로 나갈 일도 없었어. 그게 어떻게 은혜야.”

 

결혼에 사랑은 필요치 않다. 조건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 공주는 왕자의 눈에 들지 않았더라면 시골 수도원에라도 박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자는 사랑을 논했다. 사람들은 행운이라 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고 싶지?”

 

공주는 몇 번이고 저 자신을 설득했고, 실패했고, 타협했고, 경멸했던 논리를 읊었다.

 

“의도만 있어도 되는 거야. 결과는 상관 쓸 필요 없는 사람이라서.”

 

공주는 가만히 지휘관을 바라봤다. 지휘관은 무표정했다.

 

“왜 너는 아닌지 궁금한 적 없어? 네가 첫째잖아.”

 

그간 지휘관은 제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그랬다. 하지만 지휘관은 전쟁에 나가며 생살여탈권을 손에 쥐었다. 제 판단 하나에 마을 하나가 불태워졌고, 전쟁이 지나간 지도 모르도록 무탈했고, 약탈당했고, 보호됐다. 자발적으로 볼모를 요구해 적당한 희생자를 고를 수 있게 했고, 가장 아끼는 게 분명한 자식을 직접 요구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떨었고, 은혜에 감복하며 열렬히 칭송했다.

 

생과 사는 신의 일이 아니다. 모두 사람의 일이다. 그들이 생각하듯 운명의 신에게 버림받은 것도, 자비의 신이 보호해 준 것도, 전쟁의 신이 등을 돌린 것도, 매혹의 신이 눈을 가린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의 일이었다.

 

그럴 때면 어쩐지 점점 왕자가 사람의 모습이 되어갔다. 저를 발견하고, 구해주고, 세상을 만들어 준 신의 모습은 때때로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다. 어차피 그 또한 사람일 뿐이라면, 무엇이 다른가. 오래전, 어쩌면 지휘관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박혀 있던 씨앗에서 싹이 움텄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혼 후에 태어난 사생아니까.”

 

공주는 이런 질문을 많이 했었다. 왜 너는 전술을, 외국어를 정식으로 배우지 못하는지. 왜 전투에서 이긴 건 너인데 칭찬을 듣는 건 왕자인지. 왜 아무도 네게 왕자님이라고 하지 않는지.

 

그때마다 지휘관은 여러 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공부를 싫어해서, 왕자가 더 똑똑하니까, 멀리서 군량을 보내준 덕분에 이겼으니, 다들 타고난 군주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서.

 

지휘관은 한 번도 본질을 건드리지 않았다. 멍청해서, 게을러서, 생각이 얕아서, 타고난 것이 고작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다. 본질은 제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하나였다. 웅장한 집무실과 남루한 막사를 가르는 것은. 반질거리는 사과와 꺼끌한 귀리를 가르는 것은. 화려한 정문과 숨겨진 옆문을 가르는 것은. 왕자와 지휘관을 가르는 것은.

 

공주는 그렇기에 가만히 지휘관을 바라봤다. 직시의 의미를 쉬이 알 수는 없었으나, 공주는 알았다. 지휘관이 왕자를 더는 그만큼이나 사랑하지는 않음을. 여전히 그만큼이나 사랑하더라도, 무언가 싹텄음을.

 

“네가 날 도우면, 나도 널 도울게.”

 

지휘관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성공한다면.”

 

공주는 제 배 위로 손을 올렸다.

 

“이걸 줄게.”

 

지휘관의 시선이 그 배에 잠시간 닿았다.

 

“나는 아마 이번 출정에서 죽을 거야.”

 

지휘관은 저번 출정에서 이미 죽어야 했다. 어쩌면 훨씬 전에. 하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이전 출정에서는 드디어 자객이라는 것을 만났다. 지휘관은 적군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죽는다면 아군의 손일 것을 확신했다.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릴 테고. 그러니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네가 날 돕는다면, 난 이걸 갖고 있을 거야.”

 

지휘관의 말을 끊어낸 공주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난 너랑 자지 않을 거고, 애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쫓겨날 생각도 없어.”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도 필요해.”

 

“내가 죽으면?”

 

“넌 안 죽어. 적어도 이번 출정에서는.”

 

공주는 다짐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지휘관은 공주의 얼굴을 살폈다.

 

“나를 믿어?”

 

꼭 다른 사람의 시선처럼 공주의 아름다움을 가늠했다.

 

“손에 쥔 게 생기면 나도 결국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될 텐데.”

 

공주는 겁을 먹었다. 지휘관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지휘관은 더 갖고 싶었으나, 그것이 목숨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휘관에게는 죽음의 감각이 부족했다. 하지만 공주는 살고자 했다. 그 삶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도 모르면서. 그 용감한 야망이 빛났다.

 

지휘관은 손을 뻗어 공주의 손을 잡았다.

 

“내가 널 돕는 게 아니라 네가 날 돕는 거야. 결국은 네 희생이 되겠지.”

 

빳빳하게 굳은 공주의 손이 미지근한 온도로 물들었다.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지휘관이 언젠가에 만난 전연인은 약초방에서 일했다. 여자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공주에게도 익숙했다.

 

“죽지 않더라도.”

 

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과 공주는 계속해서 손을 잡고 있었다. 멀리서 왕자와 소공자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떨어지는 손은 말없이 자연스러웠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

 

왕자는 반대하는 왕을 이제 자신도 실전에 나가야 할 때라고 설득했다. 당연히 지휘관과 같은 곳으로 가는 것이 경험에 좋을 것이라 고집을 부렸다. 왕자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싶었던 왕은 지휘관 역시 다른 곳으로 배치했다. 공주는 만날 수 없었다. 공작저에서는 늘 공주가 아프다는 말로 지휘관뿐만 아니라 왕자까지도 돌려보냈다.

 

날이 다가오자 왕자와 지휘관은 떠났다. 그곳은 전쟁터라기에는 이상한 곳이었다. 귀족 출신의 기병이 많아 왕자는 어려움 없이 병사들과 어울릴 수 있었으며, 막사에는 푸릇한 잔디가 깔려있었고, 식사 때에는 은식기 위에 정갈한 음식이 담겨 나왔다. 보병에 익숙했으며 습격을 피하고자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막사를 쓰고 똑같은 음식을 먹어 왔던 지휘관에게는 그 모든 것이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상황이 허락한다면 사치를 부리는 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할 것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간헐적으로 전투가 벌어진다고는 하지만, 지지부진하게 늘어진지가 오래된 탓에 양측 다 먼저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애초에 구체적 합의가 진행되는 중 원하는 조건을 하나라도 더 넣기 위한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지휘관은 왕자와 주변을 살피러 다녔고, 함께 강을 건넜고, 혼자 걸어 나왔다. 왕자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지휘관은 수도로 불려 갔고, 공주와 결혼했다.

 

하나밖에 없는 왕자를 잃은 왕은 기력을 잃었다. 귀족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으며, 공작은 후계자 지정을 미루는 왕을 끈질기게 압박했다. 잘 때조차도 속살거리는 환청을 듣던 왕은 죽는 날에야 겨우 지휘관을 후계자로 지정했다.

 

그는 왕자라는 대우를 받아본 적은 없었으나, 왕이 되었다. 그 뒤로는 모두 용이 직접 본 이야기였다. 하지만 용은 도저히 어디서 영혼이 깨졌는지를 알 수 없었다. 아직도 왕은 반짝거리기만 했다. 그리하여 용은 계속해서 시간을 따라갔다. 이미 아는 시간이었으나, 그 모든 순간 반짝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용은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다. 혹시 도외시 된 것이라도 있을까 이미 지나온 시간을 다시 찾기도 했다. 그동안 영혼은 계속해서 육체를 바꿨다. 육체에는 기억이 있거나, 없거나 했다. 감정이 있거나, 없거나 했다. 생명력이 있거나, 없거나 했다. 때로는 모든 것이 없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있던 적은 없다.

 

영혼은 점점 뭉개졌고 표면이 닳은 듯 까칠해졌다. 점점 영혼을 밀어 넣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용은 황제의 친족을 찾았다. 첫 육체와 핏줄이 이어져 있다면 조금이라도 거부를 줄일지도 몰랐다.

 

황제의 아들은 아이를 딱 하나 낳았다. 그 아이의 몸을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기다렸다. 아이는 자라 황제가 되었지만, 선황은 제 아버지가 제게 아이를 강요하고 억지로 결혼을 시킨 것을 평생 기억하고 제 아이에게는 자유를 주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황제가 된 아이는 늦은 결혼을 했고, 아이 둘을 낳았으나 하나는 성인이 될 무렵 죽었다.

 

겨우 그 시체가 못쓰게 되기 전 가져와 영혼을 넣었다. 그 뒤로 어떤 이는 많은 아이를 낳았고, 어떤 이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 결국은 방계만이 이어졌으나 어차피 처음부터 본육체의 적자는 없었다. 그러니 적당한 육체를 가져왔다. 얼마간 피가 이어진 육체를 쓴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었으나, 그렇게 했다.

 

그동안 제국은 몇몇 영토를 잃었고, 몇몇은 독립을 했고, 몇몇은 반란을 일으켰고, 점점 쪼개져 겨우 이름만을 남겼다. 그리고 용은 시간 안을 배회했다.

 

시간을 헤집고 다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신 몇이 찾아왔다. 시간을 오갈 수 있는 매개를 뺏어가면 되기는 했으나, 어차피 균열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기 마련이었다. 그 시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길든 신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고작 그 정도로 용과의 전쟁을 불사할 수는 없으니 영혼을 강제로 앗아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영혼이 곧 깨질 것을 모두 알기도 했다.

 

회복할 시간을 갖지 못한 영혼은 인위적 조작을 견디지 못해 깨져가고 있었다. 용은 갓난아이의 뜨거운 육체를 가슴팍에 안고 가만히 그 숨소리를 들었다.

 

시간 안의 황제는 어스름한 새벽 혼자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용은 황제가 막사 안에서 나눴던 그 대화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용은 유일의 존재였다. 육체와 영혼이 구분되지 않도록 서로 흡수되어 있으니 다른 육체를 써 중복을 막는 방법조차 쓸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용은 제 앞에 마지막으로 있던 황제의 모습을 되돌려 볼 수 없었다. 다만 그저 떠올렸다.

 

얼마 전 바깥으로 잠시 나갔을 때 요정이 찾아왔었다. 요정은 가장 처음 시간 안으로 가기 전, 왕에게 했던 말을 알려줬다. 왕은 조각을 찾으려 할수록 영혼은 더욱 깨질 뿐임을 알고 있었다. 다시 완벽해질 방법 따위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영혼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기 전에는 용이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뒤로 다시 영혼의 모습을 갖기까지 영겁의 시간을 보내야만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왕은 그럼에도 용과 함께 떠났다.

 

용은 황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황제는 제 아이들에게 그랬듯 용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고는 손을 잡았다. 산책을 나갈 것이라 했다. 마음을 모두 정리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테니 오래 걸릴 것이라 했다. 따라가려는 용을 저지하며 이번만큼은 혼자만의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돌아오겠다고 했다.

 

황제는 가만히 용의 얼굴을 손으로 섬세하게 덧그렸다. 모든 신체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제대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하듯 머리칼을, 목을, 손을, 무릎을, 몇몇 다른 부위를 확인했다. 그리고 막사를 나섰다. 그게 끝이었다.

 

고통스럽게 뛰던 아기의 심장은 어느덧 멈췄지만, 용은 그 육체를 계속해서 안고 있었다. 알 속에 있던 저를 따스하게 감싸던 그 온기를 조금이라도 흉내 내듯.

 

*

 

어쩌면 용은 조각을 찾아내지 못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소년은, 청년은, 왕은, 황제는, 언제나 한결같이 반짝였다. 모든 게 충만했다. 결핍 따위를 찾아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런 흠집을 찾기에는 너무 눈부셨으니.

 

용은 조각나 떨어지려는 영혼을 어떻게든 뭉쳤다. 이번에는 어느 노인의 육체를 썼다. 그동안 노인의 육체는 쓴 적이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노인은 가만히 천장만을 바라봤다. 언제부턴가 육체는 기억도, 감정도, 생명력도, 그 무엇하나 갖지 못했다.

 

용은 노인을 바라봤다. 이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주 늙은 모습을. 저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더는 제 육체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도록 살아간 모습을. 인간의 생이란 너무도 짧지만, 그 짧은 생명이라도 늘리고 늘려 어떻게든 남아 있는 모습을.

 

“네 이야기를 언제까지나 들려주겠다고 했잖아.”

 

용은 숨을 쉬는 것만이 전부인 그 육체를 끈질기게 바라봤다. 바란 것은 그 하나였다.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손에 닿는 따스한 온기를, 눈이 마주치면 몰래 짓는 웃음을, 조금 잠긴 목소리를, 공포를 이용하면서도 잠식되지는 균형을, 비가 오면 모자를 직접 씌워주던 손을, 죽음에 유독 무딘 태도를, 가끔 하염없이 창밖을 보던 시간을, 음유시인이 근처를 지나간다는 소리가 들리면 꼬박꼬박 불러 용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번거로움을, 그런 것들을 조금 더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약속을 그처럼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약속이라는 것은 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무엇을…”

 

용은 어쩌면 원망이라는 것을, 어쩌면 증오라는 것을, 어쩌면 서러움이라는 것을, 어쩌면 슬픔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닌 것을,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느꼈다.

 

“잘못했어.”

 

용의 눈동자라는 곳에서 축축한 무엇인가가 흘러내렸다.

 

“돌아와.”

 

여전히 어찌하여 스스로 부서지기를 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부서지기를 택했음은 안다.

 

용은 마른 가지처럼 버석한 노인의 손을 붙잡았다. 아주 잠시간, 그러나 인간에게는 오래도록.

 

영혼은 더는 억지로 그려 모을 수도 없을 정도로 바스러져 순식간에 흩어졌다. 용은 더는 그 무엇도 아닌 육체를 놓았다.

 

*

 

“그 아이는?”

 

동굴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한 요정의 물음에 용은 답하지 않았다. 요정은 무언가를 잔뜩 꺼내더니, 머뭇거렸다. 용은 지나치려 했으나, 요정이 어느덧 반짝이는 물이 잔뜩 묻은 얼굴을 하고서 용에게 그것들을 떠넘겼다.

 

“그 아이가 부탁했어.”

 

요정의 눈동자에는 질투심이라 부르는 분노가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용에게 떠넘긴 것들을 뺏어오고 싶다는 듯이. 그 갈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네가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테니, 그동안 내가 지내며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네게 전해달라고.”

 

용은 잠시간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은 다시 동굴로 향했다.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찾아올 수 있는 자리에서 기다리기 위해.

 

*

 

동굴에 도착한 용은 번거로운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아주 오래 잠에 들었다. 요정은 가끔씩 찾아와 이야기들을 잔뜩 내려놓고 갔다. 용은 점점 더 드물게 깨어났다. 용이 깊은 잠이 드는 동안 문명은 발전하고, 파괴되고, 회복하고, 사그라들고, 다시 시작되고, 발전하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용의 비늘이 벗겨지고, 발톱이 빠지고, 이가 새로 나고, 세포 하나하나가 천천히, 끈질기게 모두 바뀌어 더는 원래의 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남아 있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 어느 날 용은 비늘 끝이 간질 거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

소년은 어느 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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