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밍 타임 5




지민은 사흘 동안 집에서 푹 쉬었다. 그동안 정국은 학교에 다녔는데, 공강이 있을 때는 한 시간이라도 집에 들렀다 갔다. 지민은 낮에 갑자기 집에 들르는 정국 때문에 몇 번 놀란 전적이 있었다. 모처럼 지민이 집에만 있다 보니 정국과 야식이 아니라 저녁을 같이 먹었다. 아무 일 없었던 척 행동하는 건 어려웠지만 오히려 어색하게 굴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지민은 최대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지민이 느끼기에 정국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태연하게 밥을 먹고, 멀쩡하게 빨래를 했다. 오늘도 섬유유연제 냄새를 잔뜩 풍기며 다용도실에서 나오는 정국을 보던 지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안 바꿔. 바꾼다며.”

“아직 남았는데 아깝잖아요. 다 쓸 때까지 참아요.”


정국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지민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다우니 어도러블을 다 쓸 때까지 지민은 이 민망한 시간을 견뎌야 할 듯했다. 빨래를 자주 하는데도 대용량이라 왠지 엄청 많이 남았을 것 같았다.


“형은 어도러블 냄새 왜 싫어해요?”

“싫은 게 아니고, 그게, 아... 좀 그래.”

“형 페로몬이랑 비슷해서요?”


정곡을 찔린 지민이 어색하게 입술에 힘을 줬다. 정국은 지민이 늘 필사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되나. 정국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날 섹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에는 한 번도 제 이름을 안 불러 줘서 기억 못 할까 봐 염려했는데 그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정국아. 앉아 봐.”


식탁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지민이 손짓했다. 정국이 마주 보고 앉았다.


“혼자 자는 게 싫다고 했지.”

“네.”

“그러니까,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은 거야?”


어차피 잠은 따로 자는 거고, 다 큰 애가 집에서도 부모님과 같이 자지는 않았을 테니, 결론은 혼자 집에 있기 싫어서 지민의 집으로 들어왔다는 게 되었다. 지민도 저 나이 때는 혼자 지내는 게 너무 싫었는데 오메가가 된 이후 어쩔 수 없이 적응하게 됐다. 정국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슬슬 지민이 또 나가라고 할 낌새를 보이자 정국이 저도 모르게 검지로 식탁을 톡톡 두들겼다. 


“집은 좀 알아보고 있어? 대학가는 룸메이트 구하기 쉬워.”

“모르는 사람이랑 한집에 살기 싫어요.”

“그럼 친구 중에서 같이 살만한 애는 없어?”

“없어요.”

“아니.. 네가 언제까지 여기서 계속 지낼 수는 없으니까. 물론 아저씨가 한 달 생활비를 보내주긴 하셨지만...”

“그럼 됐네요. 한 달은 있을래요.”

“아, 물론 네가 나간다면 언제든 돈은 돌려줄 수 있어.”

“새 학기에 집 구하기 어렵잖아요.”


지민은 왠지 시도도 안 해보고 말로만 저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에게 정국이 해를 끼친 건 없지만 최소한 다음 히트사이클이 오기 전까지는 내보내야 할 것 같았다. 뭐 다음 달에 또 불규칙하게 터지지만 않는다면 미리 지민이 호텔로 피신하면 될 듯은 했다. 오메가인 저보다 알파인 정국이 불편한 점이 적은 게 당연했다. 지민은 정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저번 같은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내보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사건만 없었다면 꽤 지낼 만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듯했다. 처음엔 다른 사람이 제집에 있다는 게 어색했지만 며칠 만에 적응한 것처럼, 정국도 모르는 사람과 며칠만 지내면 금방 적응될 것이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그래서 어른스럽게 이야기해 볼까 싶기도 했는데 정국이 도통 새집을 구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할 말이 없어졌다.


지민이 머그잔을 들고 일어섰다. 별수 없이 한 달을 채울 때까지는 같이 지내야 할 듯했다. 가끔 어색해져서 그렇지 서로 잊기로 합의 본 사항이었으므로 그냥 룸메이트처럼 지내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이제 공연 준비에 들어가면 집에 늦게 올 거였다. 대강 자신이 피하는 것으로 타협한 지민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방으로 사라졌다. 굳이 손을 흔드는 게 더 어색함을 증가시킬 뿐이라는 걸 지민은 몰랐다.


식탁에 앉아 있던 정국이 한숨을 쉬었다. 지민의 말대로 룸메이트쯤이야 금방 구하겠지만 그럴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저도 이렇게 불청객 취급받으며 사는 것이 마냥 편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과 사느니 혼자 사는 것을 택할 정국이었다. 혼자가 편하지만 굳이 서울에서 혼자 살고 싶지는 않다. 박지민이 없다면 또 모를까.


정국은 며칠 전 병원에 같이 갔던 날을 떠올렸다. 카페에 가 있으라며 카드를 건네던 지민은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어른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는 지민이 한없이 커 보였던 정국이지만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지민이 커 보이지 않았다. 제 키가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생 때는 지민의 키를 추월했다. 하지만 지민이 저보다 크든 작든 항상 변하지 않은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지민이 상당히 귀엽다는 것이었다. 동그라미 시절엔 귀여워하지는 않았지만 중학생이 된 정국은 지민을 귀엽게 여겼다. 그냥 귀여웠다. 박지민은 베타인 척하는 작고 귀여운 오메가였다. 귀여워하는 것과 별개로 미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불성설이지만 미워서 왔다. 서울에서 뭐 하고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지민이 저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매년 마일리지 적립하듯 축적해 온 정국이었다.


정국은 그날 지민이 카드를 줘서 괜히 기분 나빴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아니지만 꼭 대가를 받는 기분이었다. 지민이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정국도 아는데 순간 치기 어린 감정으로 카드는 됐다고 말했다. 벌어진 9년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언제쯤 제대로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국이 건조대에 있던 빨래를 걷었다. 어제 널었던 거라 보송보송하게 다 말라 있었다. 옷을 걷어 제 방으로 들어간 정국은 셔츠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민을 닮은 향기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지민은 정국이 다우니 어도러블을 쓰는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었다. 물론 정국이 이 섬유유연제를 찾은 것은 우연이었지만 계속 이것만 써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처음 이 향기를 맡았을 때 누군가가 떠올라서 애용하게 됐다.


옷에 배인 오렌지 향이 좋아서 정국이 킥킥 웃었다. 그러다가 옷가지를 그대로 껴안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잠시 누워서 뒹굴뒹굴하던 정국은 곧 머리를 털면서 일어났다. 나는 박지민이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이 향이 좋은 거야. 매우 바보 같은 문장을 바보처럼 되뇐 정국이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대학에 출근한 지민이 교정을 걸어가고 있었다. 며칠 집에서 푹 쉬면서 컨디션을 회복했다. 정국이 온몸 여기저기에 남겨 놓았던 키스 마크도 옅어졌고, 지민의 몸에 남았던 알파의 페로몬도 사라지고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어 주는 척하며 일부러 묻혔던 페로몬은 이미 정국이 거두어들였다. 히트사이클 때 저절로 페로몬 범벅이 되었던 것은 시간이 지나며 없어지고 말았다. 정국이 작정하고 영역 표시를 하거나 또는 각인하지 않는 이상 며칠이면 다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학교에는 지민이 베타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정국도 당연히 일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박지민 교수님?”


낯선 목소리에 길을 걷던 지민이 멈춰 섰다.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였다. 낯이 익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지민은 그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안녕하세요. 김남준 교수님.”


지민이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올해 교육학 교수로 임용된 남준을 지민은 개강 전 회식 자리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젊은 나이 같은데 강사도 아니고 교수로 발령되었다기에 약간 신기한 듯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회식 때 앉은 자리가 워낙 멀어서 인사 한번 제대로 나눈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각자 자기 소개하듯 인사를 했었으니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상대가 인사를 먼저 해주었기에 이번엔 지민이 먼저 살갑게 말을 붙였다.


“수업 가시는 길이세요?”

“네. 교수님은요?”

“저는 수업 마치고 가는 길이에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걷게 됐다.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데면데면하게 떨어져 걷기도 멋쩍은 일이었다. 제대로 대화하는 것은 처음인데 남준이 이것저것 물어봐서 계속 말이 이어졌다. 남준은 지민이 교양 과목으로 강의하는 실용 무용의 이해를 신기해했다.


“그럼 몸치여도 박교수님이 알려준 대로 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는 거네요?”

“네. 교양에서 단기간에 잘하는 건 무리여서, 동작을 정확히 따라 하고 얼마나 성실하게 연습하고 발전했는지 위주로 평가하니까요.”

“저 춤 한 번도 안 춰봤는데 궁금해요. 박교수님 강의.”

“그럼 언제 시간 나실 때 구경..”


갑자기 몸이 조여드는 느낌에 지민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남준과 대화가 잘 통해서 농담 삼아 구경 오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훅 끼쳐오는 여름과 가을의 중간 향에 지민이 주먹을 꽉 쥐었다. 페로몬만으로도 누군지 알았다. 지민이 힐끔 뒤를 돌아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정국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지민이 말하다 말고 뒤를 돌자 남준도 따라서 돌아봤다. 지민은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박교수님? 남준이 멀쩡한 것으로 보아 남준은 베타인 것 같다고 지민이 생각했다. 대부분 베타여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알파나 오메가는 정국의 기에 눌려 피하기 바빴다. 대낮에 학교 한복판에서 우성 알파가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알파는 상대를 유혹하는 페로몬뿐만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기운만으로도 상대방을 누를 수가 있었다. 극우성은 조금 더 조절하면 베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모두가 극우성 알파를 두려워하고 동경하는 것이었다. 


지민이 비틀거렸다. 남준이 잡아 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지민은 남준의 품에 반쯤 안긴 셈이 되어 버렸다. 볼사탕을 문 정국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지민이 마른 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동그라미가 미친 게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제가 왜 부정한 짓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심장이 조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동료 교수와 대화 좀 했을 뿐이고, 정국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전정국! 다행히 정국의 친구가 등장하면서 팽팽했던 기세가 꺾였다. 정국과 같이 지민의 강의를 듣는 상만이었다. 베타인 상만이 정국의 등을 툭 치면서 등장하자 당황한 정국이 분노하던 것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지민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상만이 왜 그러냐는 듯이 급하게 정국을 쫓아 뛰었다. 


정국이 다가오자 움찔할 뻔했던 지민이었지만 다행히 페로몬의 위협이 없어서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남준의 물음과 동시에 정국이 제 곁을 지나쳐 갔다. 지민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정국의 뒷모습을 쫓아갔다. 남준이 한 번 더 괜찮냐고 물은 후에야 지민은 자신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다고 대답한 지민이 시계를 확인했다. 남준에게 인사한 지민은 서둘러 강의실로 걸어갔다. 오늘부터는 실기 수업이라 체대 건물의 무용실에서 강의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교수용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지민이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쳤다. 수업 시간에 맞춰 무용실로 들어간 지민은 정국이 맨 앞에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나마 구석이어서 지민과 실제 거리는 멀었지만 저번에는 맨 끝에 있더니 의외였다. 정국의 옆에서 상만이 멋쩍어하며 운동복을 쫙쫙 펴는 게 보였다. 정국은 거의 창문 쪽에 붙어 서 있었다. 지민은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심지어 출석 부를 때도 안 쳐다봤다. 


얼굴도 안 보고 출석 체크를 하는 지민을 보며 정국이 또 볼사탕을 굴렸다. 지난주에는 이름도 부르기 전에 미리 보더니, 오늘은 얼굴도 안 보고 체크했다. 아까 체대 가는 길에 마주치긴 했지만, 일부러 안 본다는 건 이미 들어오면서부터 어디 있는지 봤다는 뜻이었다. 지민은 이제 지난주에 빠졌던 학생들을 위해 간단한 복장 설명을 하고 있었다. 굳이 편한 옷차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가급적이면 팔다리를 움직이기 쉬운 옷을 준비해서 체대 탈의실을 이용하면 된다고 했다. 체육교육과 수업의 절반 이상이 실기인 덕분에 정국은 늘 편한 추리닝이나 시보리가 있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정국은 본인도 모르게 지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늘하늘한 셔츠와 바지를 입은 지민은 맨발이었다. 지민이 몸풀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언뜻언뜻 얇은 발목이 드러났다. 다리를 앞으로 뻗던 상만이 정국을 툭 쳤다. 뭐해 인마. 그제야 정국은 자신이 스트레칭을 따라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국이 멈칫하는 사이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금방 피한 지민이 다음 동작을 이어 갔다.









수업이 끝났다. 샤워실에서 말끔하게 땀을 씻어낸 정국은 복슬복슬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헤어드라이어로 말렸다. 갈아입을 옷은 항상 사물함에 두고 다녀서 미리 가방에 챙겨 왔다. 검은색 맨투맨과 카고 조거팬츠를 입은 정국이 백팩을 멨다. 같이 나가던 상만이 썸 타는 상대에게 연락이 왔다며 혼자 쌩 달아나 버렸다.


썸은 뭐 어떻게 타는 건데. 정국이 머리를 헤집었다. 약간 간질간질한 분위기를 타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자신은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아침에 보는 지민은 대개 산발을 한 채 퉁퉁 부은 얼굴로 거실을 느릿느릿 걸어 다니며 정국을 본체만체했다. 저녁에는 정국과 신나게 밥을 먹고는 다소 쾌남처럼 깔깔거리다 자러 갔다. 중간에 히트사이클이라는 거대한 변수 또는 사건이 있었지만 그건 없던 일로 하기로 했으니, 그 외에는 2주 넘게 반복된 일상이었다. 같은 집에 사는 것부터 잘못된 건가...? 정국이 뺨을 긁었다.


정국은 아까 남준과 지민이 대화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듯 미묘한 긴장감이 있어 보였다. 그야 처음 대화하는 사이였으니 당연한 거였지만 질투에 사로잡힌 정국의 눈에는 꼭 서로를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더랬다. 저에게는 보여준 적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짝 우울해진 정국이 힘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백팩이 잡아 당겨졌다. 쑥 팔을 뻗어 정국의 백팩을 당긴 사람은 교수용 샤워실에 있던 지민이었다.


얼결에 안으로 들어간 정국이 지민을 쳐다봤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리는 공간인 탈의실을 비롯해 샤워부스 쪽에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학생을 여기로 끌어들이다니 정국은 조금 황당했다. 싫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민의 표정을 보니 정국은 금방 싫어질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정국을 잡아당겼다는 건 할 말이 있다는 뜻이고, 그건 별로 좋은 내용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민은 아까 겪었던 당황스러운 일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아까 왜 그랬어?”

“.......”

“아까 페로몬 왜 풀었냐고.”

“그냥요.”


변명을 만들어내는 것도 서투른 정국이 딴청을 피웠다. 지민이 앞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일부러 진지하지 않은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나도 내가 이런 착각을 하는 게 부끄러운데, 혹시 내가 다른 남자하고 있는 게 보기 싫었다거나...”


이걸 진지하게 물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분위기로 가버릴 것이 뻔했다. 말하면서도 지민은 어이없고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그때 정국이 딱히 화낼 이유가 없어 보였던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둔하다 해도 그 순간만큼은 지민도 모를 수가 없었다. 대답하지 않는 정국을 보던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 나 싫어했잖아.”

“제가요?”

“나만 보면 울었잖아. 싫어해서 그런 거 아니었어? 아저씨가 자꾸 나랑 결혼하라고 장난치니까 싫어서 우는 줄 알았는데.”

“뭐... 좋아서 운 건 아니에요.”


그때는 그랬다. 지민보다 자신이 더 커질 줄은 상상도 못 하고, 나중에 저보다 훨씬 큰 색시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줄 알았던 정국이었다. 어린 동그라미의 눈에 지민은 무척 예뻤지만 아무리 봐도 키가 너무 컸다. 자신이 많이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면 지민보다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딱히 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자신은 지민보다 커졌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그것보다 더 이후였다.


“내가 만약, 아까 그거 보기 싫어서 그랬다고 하면 형 어떡할 건데요.”

“으엥..?”


지민이 놀라서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마치 그럴 리가 없다는 투였다.


“나 좋아해?”

“아니요.”

“난 또.. 깜짝 놀랐네.”


아홉 살 어린 동생이 저를 좋아한다고 하면 지민은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섹스 후 정국이 우성 알파라는 것은 몸으로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어린 시절에 봤던 울보 동그라미의 잔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사랑해서 한 섹스가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의 본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사고였다. 자신은 정국에게 마음이 없었고, 정국도 당연히 없다고 생각했던 지민이었다. 그런데 만약 정국이 저를 좋아한다면 곤란할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좋아할 리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좋아하는 건 아닌데 보기는 싫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지민은 이해할 수 없는 정국의 사고방식이었다. 알파는 본능적으로 오메가에 대한 소유욕을 가진다더니 뭐 그런 감정인가 싶다가도, 지민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난 형 좋아할 생각 없어요.”

“아.. 그래.”

“형이 다 기억해 낼..”


다 기억해 낼 때까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려던 정국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탈의실 바깥에서 들리는 신교수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통화 중인 것 같은데 내용이 다 들릴 정도로 컸다. 음성이 워낙 독특하고 큰 사람이라 정국과 지민은 듣자마자 그가 육상 담당 교수임을 알았다. 이쪽으로 들어오려는 것 같아서 당황한 정국이 지민을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샤워실로 들어간 두 사람이 안쪽에 몸을 숨기자마자 신교수가 탈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샤워부스 칸막이가 불투명하고 실루엣도 비치지 않을 정도여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몸이 바깥으로 비집고 나오면 보일 염려가 있어서 딱 붙어 서 있어야만 했다. 지민은 이렇게 들어오는 바람에 들키면 더 이상해질 거라는 듯이 쳐다봤지만 정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전공 교수가 봤을 때 신입생이 무용과 교수와 교수 전용 탈의실에 있는 건 의아하게 여길만한 일이었다. 


정국은 지민이 있는 쪽으로 더 바짝 붙었다. 백팩을 탈의실에 두고 온 게 살짝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지민과 이렇게 숨어 있는 것에 더 신경이 곤두섰다. 몸이 자꾸만 붙자 안쪽에 있던 지민이 살짝살짝 몸을 비틀었다. 혼자 샤워하기 넉넉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정국과 같이 들어와 있으니 굉장히 좁게 느껴졌다. 새로 신었던 양말이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신교수는 탈의실에서 계속 시끄럽게 통화했다. 만약 샤워까지 한다면 이대로 한참을 더 오래 숨어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몸이 붙을수록 앞섶이 닿을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얼굴도 너무 가까웠다. 저도 모르게 정국의 입술에 시선이 닿은 지민이 얼굴을 붉혔다. 히트사이클을 겪은 날이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차라리 정국을 두고 저 혼자라도 탈출할까 싶기도 했지만 미안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애초에 여기로 불러들인 건 저였다. 마침 정국이 지나가는 게 보여서 순간적으로 했던 짓인데 생각이 짧았다 싶었다. 정국으로서는 전공 교수를 이런 곳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숨는 바람에 상황이 더 이상해져 버렸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다른 변명을 해도 됐을 것 같은데 이미 이렇게 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시끄럽게 통화하던 신교수는 그럼 지금 가겠다고 말하더니 허무하게도 탈의실을 나가 버렸다.


휴우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민이 몸을 움직이는 찰나였다. 저도 모르게 팔을 뒤로 뻗으며 어깨를 움직이다가 그만 수도꼭지를 건드렸다. 지민의 몸에 부딪힌 수도꼭지가 위로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졌다. 쏴아아... 정통으로 물을 맞은 정국이 멈칫하자 지민도 당황해서 팔을 뻗다가 얼결에 샤워기 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니 물을 꺼야지 왜 들어와..!”


무심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던 정국은 지민이 수도꼭지를 끄기는커녕 저를 따라 앞으로 나오는 바람에 아예 사워기 바로 아래로 들어온 것을 보곤 황당해했다. 약간 구시렁거린 정국이 팔을 뻗었다. 지민의 몸을 한쪽 팔로 감싸듯이 안은 정국은 손으로 수도꼭지를 내렸다.


두 사람의 젖은 몸이 잠시 착 달라붙었다. 지민은 괜히 눈을 위로 치켜떴고 정국의 귀 끝도 빨개졌다. 이미 둘 다 쫄딱 젖은 상태였다. 지민이 조그맣게 말했다.


“미안...”


정국이 몸을 홱 돌렸다. 성큼성큼 나가는 정국을 본 지민이 안절부절못했다. 동그라미 화났나 봐...! 쫓아가려던 지민은 발이 미끄러워서 저렇게 빨리 나가지도 못했다. 무용수라서 부상을 항상 경계해 왔던 터라 조심하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양말을 벗어야 할 것 같아서 벗고 있는데 정국이 커다란 샤워타월을 들고 들어왔다. 탈의실에 있는 새 수건을 들고 온 모양이었다. 지민의 몸을 감싼 정국이 그대로 안아 들었다.


“야..!”

“내가 안고 가는 게 더 빨라요. 우리 둘 다 빨리 나가야 할 거 아냐.”

“나 이러고 어떻게 나가?”

“내 옷 입어요.”


탈의실에 지민을 데려다 앉힌 정국이 백팩을 열었다. 갈아입은 거 아니고 새 옷이라며 정국이 옷을 건넸다. 땀 흘릴 일이 많은 전공이다 보니 주로 사물함에 새 옷을 많이 가져다 두려고 하는 편이어서 다행이었다. 얌전히 받아든 지민은 뭐든 나올 것 같은 백팩을 보며 요술 주머니 같다고 생각했다.


“너... 뒤돌아.”


바로 갈아입으려고 했던 지민은 왠지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옷을 들고 있던 지민이 그러자 정국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잠시 깜박했다. 지민이 뒤에서 옷을 벗었다. 사락거리는 소리에 정국은 아래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젖은 지민의 얼굴과 몸이 너무 야해서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애쓰던 중이었다.


“정국아.”

“네.”

“팬티는.. 없겠지?”

“아.”


속옷까지 다 젖은 게 당연했다. 뒤돌아서 동그란 눈동자만 우왕좌왕하고 있던 정국이 잠시 고민했다. 샤워 후 입으려고 준비해 두는 거라 당연히 여벌의 속옷도 있었다. 완전히 새것은 아니고 평소에 빨아 입는 것이어서 새 속옷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당황해서 거기까지 생각 못 했다. 정국의 대답이 없자 지민이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됐어. 그냥 속옷 안 입고 가면 돼.”

“속옷을 안 입는다구요?”

“바지 입는데 뭐 어때. 나 속옷 안 입었는지 아무도 모를걸? 아, 너만 안다.”

“이 형 진짜 겁 없는 오메가네.”


정국이 너무 진심으로 어이없어해서 지민은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정국은 정말 말도 안 될 소리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오메가가 팬티도 안 입고 다니겠다는 건지 몰랐다. 그건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다려요. 편의점에서 사 올게요.”


지민은 문득 콘돔을 사 오겠다며 기다리라고 하던 정국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진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가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민망해졌다.


“아니야. 나 다 입었어.”


다 입었다는 지민의 말에 정국이 몸을 돌렸다. 가지고 있던 여벌도 지금 정국이 입고 있는 것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검은색 맨투맨에 조거팬츠를 입게 된 지민이 멋쩍은지 팔을 벌렸다. 아동복 모델 포즈 같은 행동을 하는 지민을 보던 정국이 웃음을 참았다. 옷이 너무 커서 지민의 손가락을 다 덮고 있었다. 지민이 헐렁한 허리춤을 잡았다.


“근데 바지가 좀 많이 크다.”

“핫씌 바지 내려갈 것 같잖아요.”

“어.. 나도 그래서 지금 잡았어.”


정국도 슬림한 체형이었지만 지민과는 사이즈가 달랐다. 평소 지민은 엉덩이와 허벅지에 맞춰서 바지를 사는 편이라 허리는 늘 컸지만 정국의 옷은 훨씬 컸다. 지민의 시선이 정국의 가슴에 닿았다. 물에 젖어서 가슴 근육의 윤곽이 도드라졌다. 제 위에서 거친 숨을 내쉬며 허리를 움직이던 정국이 떠오른 지민이 고개를 흔들며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때 보았던 가슴이 자꾸 생각났다.


다녀오겠다고 말한 정국이 탈의실을 나갔다. 별수 없이 꼼짝 않고 기다리게 된 지민이 다리를 쭉 뻗었다. 머리를 대강 말렸었는데 다시 젖어서 조금 으슬으슬했다. 지민은 아까 신교수가 들어오기 전 정국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하필 정확히 못 들었다. 좋아할 생각 없다는 정국의 말에 머쓱해져서 어색하게 대답했었다. 그러고 나서 정국이 뭐라고 말했는데 잘 모르겠다. 지민이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무용 연습을 하고 단원들과 회식을 하기로 해서 집에 들렀다 옷을 갈아입고 가야 할 듯했다.


평소에 입던 스타일이 아니라서 낯선데 낯설지가 않았다. 정국의 옷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어도러블 향 때문이었다. 묘하게 익숙한 향기에 지민이 셔츠 앞부분을 들어 올려서 향을 맡았다. 제 페로몬 향과 비슷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신기하게도 정국의 향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빨래한 옷이라 그럴 리가 없는데 기분이 그랬다. 머리가 돌아버린 건지 아니면 코가 제 기능을 못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지민이 계속 셔츠 앞자락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정국의 가방에서 나온 탓인지 분명 정국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뛰어갔다가 금세 돌아온 정국이 멈칫했다. 지민도 냄새를 맡고 있던 채로 굳었다. 심지어 지금은 킁킁대던 중이었다. 약간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아니 많이 이상해 보일지도 몰랐다. 하얀 배를 드러내고 있던 지민이 화들짝 셔츠를 놓았다. 정국이 헛기침하며 괜히 눈을 돌리곤 속옷만 내밀었다. 파란색 편의점 팬티를 받아든 지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정국은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옷을 다 입은 지민이 탈의실을 나왔다. 너무 늦은 물음 같았지만 젖은 정국의 옷을 보고 지민이 물었다.


“넌 안 갈아입어도 돼?”

“다녀오는 동안 다 말랐어요.”

“그래. 나 오늘 늦어.”

“어디 가는데요.”

“연습 끝나고 회식.”

“네.”


일단은 얌전하게 대답한 정국이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민은 그새 다시 안으로 들어가 정국의 백팩을 가져 나왔다. 정국에게 가방을 건넨 지민이 먼저 간다고 인사했다.


정국은 지민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옷이 커서 꼭 옷에게 잡아먹힌 것 같았다. 지민의 귀여운 모습에 잠시 웃던 정국은 지민이 제 옷을 입고 가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아까 왜 그렇게 옷 냄새를 심하게 맡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섬유유연제 향이 오메가 페로몬과 비슷했던 게 새삼 신기했던 건가 싶었다. 아니면 혹시 내 옷에서 땀 냄새라도 났던 건가? 정국이 백팩 지퍼를 열고 안에 코를 처박았다. 매일 뿌리는 섬유 향수 덕분에 깔끔하기만 했다.


아직 덜 마른 셔츠가 자꾸 가슴팍에 들러붙었다. 손가락으로 가슴에 붙은 셔츠를 털면서 정국이 걸어갔다. 오늘 지민이 늦는다는 게 별로였지만, 한편으로는 오늘 늦는다고 먼저 말해 주는 것이 정국은 싫지 않았다.









잠을 설쳤다. 정국이 부스스한 머리를 털며 눈을 겨우 떴다. 어제 지민이 새벽 두 시에 들어오는 바람에 기다리다가 못 잤는데, 그 후로도 계속 잠이 들지 않아서 숙면을 못 했다. 주말이니 물이나 한잔 마시고 다시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정국이 방문을 열었다. 때마침 지민의 방문도 열렸다.


문은 열렸는데 사람이 없었다. 대신 오렌지 향기가 정국을 가득 덮쳐 왔다. 정국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정국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민이 방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술 안 깼어요? 조절 못..”


취해서 페로몬 조절 못 하는 거냐고 따지려던 정국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기에는 페로몬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결코 숙취가 아니었다. 지난주에 겪었던 상황과 똑같았다.


“아.. 정국아, 나 또...”


지민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는 괴로운 소리를 냈다. 원래 오늘이 지민의 진짜 히트사이클 날짜였지만 당연히 지난주에 미리 해서 이번 달에는 안 할 줄 알았다. 달아오르는 몸의 열기를 견딜 수 없었던 지민이 몸을 비틀었다. 이번에는 정국도 조금 침착하게 대처했다. 알파 페로몬을 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곧 무너질 것 같기는 했다. 지민의 페로몬에 정국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고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하면 나 죽는 거 아니야?”

“왜 죽어요. 내가 죽게 안 해.”

“병원 가야 하나...”


월요일에 강한 억제제를 처방해 왔으니 일단 그것부터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여기서 정국이 알파 페로몬을 풀어 버린다면 지민은 지난주와 똑같은 상황을 겪게 될 것이었다. 정국은 아무래도 지민이 형질 검사를 다시 받아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정국이 알아본 바로는 간혹 형질 변화가 있는 경우에는 억제제가 잘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알파와의 성관계로 푸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지민도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자꾸만 정국이 눈에 밟혔다. 이제는 히트사이클을 약이 아니라 몸으로 푸는 법을 알게 된 지민이었다. 지난주처럼 우선은 억제제를 먹고 버텨볼까 싶기도 한데, 이미 고통을 겪어봐서 그런지 약효가 돌 때까지 그 고통을 또 겪을 생각을 하자 겁이 났다. 저도 모르게 덜 고통스러운 방법을 떠올린 지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정국은 찰나에 지민의 눈에 담겼던 의미를 읽었다.


“도와줘요?”


지민이 대답하지 않았다. 정국이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도와줘요, 말아요?”


이러면 안 되는데... 지민은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입에서는 제멋대로 말이 나가고 있었다.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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