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송성배 준비하면서 소색님이랑 트윈지 작업하던 건데 날리기 아까워서 비밀글 풉니당



제1장

길들이는 것에서부터




“태원아. 나 아파.”


그 말을 내뱉었던건, 지극히 고의적인 일이었다. 그 뜻은 소꿉친구의 약속 따위를 무산시키기만을 위해 내뱉은 말은 아니란 소리였다. 성현제는 송태원의 와이셔츠 끝을 쥐었다. 반듯하게 잘 다려진 셔츠의 끝이 성현제의 손 안에서 우그러졌다. 송태원이 성현제를 내려다봤다. 야자가 시작하기까지 30분 전이었다. 여름의 해가 늬엿늬엿 저물어 조용한 교실 창에 드리웠다. 성현제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파. 태원아.”


성현제의 하얀 얼굴이 노을빛에 비춰선지 혈색이 도는 것 같았다. 송태원의 손에는 반듯한 모양의 편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성현제는 저 편지의 수신인을 알고 있다. 빌어먹게도 그것이 성현제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성현제는 송태원을 잡았다. 그가 3반의 강희선보단,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성현제에게 약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현제가 잠시 숨을 멎었다. 양 가슴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갑갑했다.


지이잉. 지잉. 짧은 진동이 울렸다. 송태원의 검은 눈동자가 잠시 숨을 참은 성현제의 얼굴을 건조하게 지나쳤다. 번쩍거리는 핸드폰 액정을 읽어내리던 송태원의 표정이 초초하게 변했다. 벽에 걸어놓은 시계의 초침소리가 지나치게 컸다. 성현제는 여전히 송태원의 뒤에 서서 그의 옷깃을 잡고 있었고, 송태원은 그런 성현제의 손등을 감싸잡았다.


“세 번째야. 성현제.”


송태원이 성현제의 예상과 어긋나는 선택을 했다. 그는 성현제의 손목에 힘을 주어 제 옷깃을 잡은 손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며 송태원을 재촉하고 있었다. 성현제는 입술을 달싹였다. 태원아.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송태원은 성현제에게서 몸을 돌렸다.


“너 지금 안 아프잖아.”


성현제의 손끝이 굳었다. 온몸의 근육이 수축하는 감각. 성현제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처음이었다. 송태원이 성현제에게 제 뒷모습을 보인 것이. 송태원의 몸은 쉽사리 성현제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후로 훌쩍 자란 송태원은, 그가 자란 만큼 빠르게 성현제에게서 멀어졌다. 성현제는 가슴 근육이 심하게 수축하는 감각을 느꼈다. 휘청거리던 몸이 근처에 있던 책상을 잡고 간신히 기댔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끔찍이도 고통스러운 감각이 온 몸을 뒤덮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가 함께였다. 성현제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송, 태원, 가쁘게 숨을 들이키는 와중에도 그 이름을 불렀다. 눈 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가 흐렸다. 불빛이 번져나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나 진짜 아픈데.


성현제는 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는 것을 들었지만 눈이 감기는 것이 먼저였으며, 누군가 연못 안으로 무거운 돌을 던져버린 것처럼 빠르게 의식이 가라앉았다. 어떻게든 산소를 들이마시기 위해 발악하는 감각이 끔찍함과 동시에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아득함이 아가리를 벌리고 성현제의 몸을 삼켰다. 모든 것이 꺼졌다.


*


성현제는 아주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는 어린 성현제를 귀찮아 하는 두 부모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영화를 보듯 떠밀려오는 화면에도 성현제는 무감했다. 그러나 송태원의 굳은 표정과 뒷모습이 부모와 겹쳐지자 성현제의 얼굴이 반쯤 일그러졌다. 지겹도록 성현제를 괴롭히던 심장의 질환도, 호흡도 아닌 순수한 지끈거림. 심장의 근육이 아닌, 무형의 무언가가 부셔져 내리는 감각. 성현제는 새삼스럽게 제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대었다. 따끈한 온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성현제는 이 온기의 주인이 자신이 아님을 직감했다. 살아있다는 단순한 행위에서 오는 온기가 아니었다. 이건 …, 지독히 다정한 누군가의 나눔에 의해 간직된 온기다. 성현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릴 때부터 병처럼 다정하게 굴던 송태원이었다. 부모도 외면한 어린 성현제의 손을 잡고 ‘내가 옆에 있을게’ 따위의 약속을 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단 한번도 제 손을 뿌리친 적 없었던 송태원. 쓰러지는 제 몸을 안고 병원으로 뛰어가던 송태원. 제 이름을 부르던 그 다정함이, 성현제는 탐이 났다. 성현제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온기가 식어 싸늘하게 변한 손끝이 서서히 바스라져 가고 있었다. 성현제는 그 모습이 제가 간절하게 바랐던 몇 없는 것들이 모래 알갱이로 변해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손을 훑어내리던 금빛 눈동자가 눈을 내리감았다. 감각이 사라져가는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고요한 발악이었다.


“…”


그 순간 눈을 떴다. 익숙한 풍경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성현제는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초점을 바로잡았다.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꺼끌거렸다. 그는 천천히 쓰러지기 전의 상황을 되짚었다. 송태원을 붙잡았고, 송태원이 제 손을 밀어냈다. 성현제는 흐리게 웃었다. 송태원의 말대로 세 번째였다. 송태원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걸 알고, 그가 열심히 준비한 고백을 파토내게 만든 횟수. 애써 준비한 영화표를 못쓰게 만들고, 그가 알아두었던 식당을 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핑계. 성현제는 바스라지던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은 차게 식어있었다. 진득하게 피어오른 감정들이 성현제의 뇌를 천천히 잠식시켰다. 성현제가 그 감정에서 빠져나온 것은 제 방문 밖에서 들리는 발소리였다. 성현제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방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잔음과 함께 방문이 열렸다. 성현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송태원이 죽과 물을 놓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성현제가 일어나 있을 줄 몰랐는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원아.”


필사적으로 삶을 갈구했던 흔적으로 성현제의 목이 반쯤 쉬어있었다. 송태원의 새카만 두 눈이 크게 요동쳤다. 송태원의 눈이 당황을 담았음에도 성현제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차근차근 훑어냈다. 성현제는 이상하게도 그 시선이 퍽 유쾌했다. 그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휘어올렸다.


“고백은, 잘했어?”

성현제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볼품 없이 갈라져 거슬렸지만, 지금에 있어선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송태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성현제의 옆에 서서 그에게 물을 내밀었다. 성현제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노을에 비춰 생생해 보였던 어제의 얼굴과는 달랐다. 성현제는 송태원이 주는 물을 받아들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물이 성현제의 머리를 환기 시켰다. 송태원은 그런 성현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성현제가 송태원에게 물컵을 내밀었다. 송태원이 머뭇거리며 물컵을 받아들었다. 성현제가 고개를 들어 검은 눈을 마주했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성현제의 눈을 끝까지 맞추지 못하고 떨어졌다.


“축하해.”


성현제가 선악과를 내미는 뱀이라도 된 듯 느릿하게 내뱉었다. 그 말은 그가 기어이 송태원을 무너트리겠다고 선언함과 같았다. 송태원의 무감한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 가기 시작했다. 반쯤 상해 진물을 흘리던 살을 끝까지 긁어내 자신을 새겨넣겠다는 의지 어린 말. 송태원의 검은 눈동자에 서서히 물기가 맺혔다. 그의 입술이 일자로 꽉 다물리다가, 금방이라도 말을 뱉어낼 것처럼 달싹이길 반복했다. 성현제는 송태원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어 그의 손을 잡았다.


“말하지마. 태원아.”


송태원에게 발언의 기회를 뺏음으로써 성현제는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비췄다. 송태원은 성현제에게 사과의 말조차 꺼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성현제는 자신을 너무 잘 알았으며, 또한 송태원을 너무 잘 알았다. 송태원이 사과의 말을 내뱉으며 다신 그러지 않겠노라 속삭인다면 성현제는 송태원을 용서하고 그 말을 지키길 기다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자율적 의지’가 아닌, 단순히 손에 수갑을 채우고 목줄을 멘다면 그는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다.


“…”


검은 눈동자 위에 옅은 물기가 비췄다. 성현제가 송태원의 손을 놓고 얼굴로 손을 뻗자 송태원이 고개를 숙였다. 굵은 선의 눈가를 성현제가 느릿하게 매만졌다. 손끝에 축축한 물기가 스며들었다. 송태원의 다정은 독이다. 그 독이 너무도 미미하고, 달아서 처음엔 모르지만 그것이 없어진다면 목을 메게되는, 그런. 성현제는 그런 다정을 포기할 생각도, 송태원 자체를 놓을 생각도 없었다. 성현제가 뚝뚝 눈물이 떨어지는 송태원의 검은 눈을 응시했다. 왜 울고 그래 태원아. 네가 먼저 내 손 놨잖아. 나직히 중얼거린 목소리에 송태원의 고개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성현제의 손바닥에 눈을 덮어 가렸다. 마치 사슴이 제 머리만 수풀에 처박고 세상이 저를 모른척 해주길 바라듯 미련한 움직임이었다.


“현제야…,”


성현제가 그의 팔을 느긋이 토닥이며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성현제는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제 이름을 애달프게 부르는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성현제는 그의 눈가를 쓸고, 떨리는 어깨를 문질렀다.


고등학교 2학년 봄. 송태원이 처음으로 성현제의 손을 내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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