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기억을 잃었는데 오직 한유진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는 성현제의 이야기입니다. 상, 하편으로 나눠질 것 같아요. 개연성 그런 거 없습니다. 한참 전부터 쓰고 싶었던 글인데 이제야 보여드리네요. 지난 번 현제유진 글에 주신 마음과 애정 전부 꼭꼭 씹어 마음에 잘 담았습니다. 이번 글도 즐겁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











“ 정말입니까? ”

“ 그걸 왜 여기 와서 말하지? ”


답지 않게 창백한 얼굴을 한 강소영의 앞에서 한유진과 한유현이 동시에 물었다.


“ 네, 정말이에요. ”


강소영은 먼저 한유진의 물음에 대답했고, 그 다음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한유현에게 대답한다.


“ 길드장님이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 한유진 씨라서요. ”


성현제가 기억을 잃었다. 한유진은 곧바로 이게 정신 나가버린 장난질은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과 기억의 상관관계

성 현제 x 한 유진

 

 

 




 

 

유진은 아무 방해 없이 들어선 거실에서 홀로 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성현제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오는 내내 정신이 산란해서 강소영의 운전이 어땠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성현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천지가 개벽할 일인데 그 와중에 제 이름 하나만 기억하고 있다는 건 또 뭔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아 형이 꼭 가야하냐고 강아지 같은 눈을 하는 유현이를 좀 더 섬세하게 달래주지도 못했다. 답지 않게 긴장이 되어서,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한유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성 현제 씨. ”


세성 길드장님이라고 부르려다가 한 번 멈추고, 이름을 불렀다. 한 유진. 기억하는 건 오로지 그뿐이라고. 자신의 이름조차도 떠올리지 못한 사람이 유일하게 부른 이름이 저의 이름이었다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성현제의 얼굴에 너울지는 빛과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유진은 생각했다. 장난이라면. 이것처럼 질 나쁜 장난이라면 그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말 죽여 버리고 말 것이다.


“ …한 유진 군이로군. ”


마침내 유진을 똑바로 보고 선 기억을 잃은 남자가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한유진은 입술을 깨문다. 부드럽고 다정한, 그리고 따스한 미소였다. 우습게도 그 미소를 본 순간 이것은 절대로 장난일 수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유진이 아는 성현제는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소중하고 소중한 자신의 아이템의 앞이라고 하더라도.


“ 기억을 잃었다면서 나인 줄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


그러면서도 한유진은 다시 한 번 의심을 담아 물었다. 어떤 마음인지는 스스로도 알기 어려웠다. 이게 장난이라면 정말로 죽이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난이길 바라는 마음은 모순이다. 유진의 질문에 성현제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 한유진 군의 이름을 떠올릴 때도 그랬지만… ”

“ ……. ”

“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고 하면 유진 군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

“ 또 개소ㄹ…! ”


성현제의 말에 유진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황급히 두 손으로 막았다. 그러나 한 번 튀어나간 말들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는 법이라서, 이미 유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다 들어버린 성현제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유진에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 또, 라고 하는 걸 보니 이전에도 이런 말들을 자주 했었나보지. ”

“ 아니, 저, 그게… ”


거리가 가까워지자 유진은 조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순하게 늘어지는 눈꼬리. 특유의 자신만만함을 넘어선 오만함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얼굴은 낯설다 못해 두려울 지경이다. 어느 쪽이 더 두려운지는 솔직히 유진으로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가 기억을 잃어버린 게 두려운 건지, 아니면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만큼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두려운 건지. 성현제는 망설이는 유진을 향해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고는, 아주 조금 더 진지한 얼굴을 한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 한 유진 군. 먼저 가장 급한 질문 하나만 하겠네. ”

“ 네? 아, 네… ”

“ 우리가, 연인 사이였나? ”


갑작스러운 직구에 숨이 턱 하고 막혀와 유진은 기침을 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뭐지? 놀리는 건가? 하고 다시 얼굴을 살펴보아도 진지한 얼굴에서는 그 어떤 장난기도 찾아볼 수가 없다. 성현제는 정말로 인생에 중차대한 질문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냥 언제나 여유롭게 빙글거리던 사람과는 정말로 달랐다.


“ 아니요… ”


그래서 한유진은 진지하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뭔 개소리를 하냐느니, 기억만 잃은 게 아니라 이성도 잃으셨어요? 라고 반박하는 대신. 혀끝이 이상하게 썼다.


“ 흠, 연인일 줄 알았는데. ”

“ 네? ”

“ 유진 군 이름을 말하는데 묘하게 마음 한 구석 어떤 확신이 들어와서, 나는 우리가 연인 사이일 거라고 짐작했네. 그래서 오직 유진 군 이름만큼은 기억을 하고 있는 거라고… ”


확신이라니. 미친 성현제는 도대체 저를 두고 혼자 무슨 확신을 하고 있었던 걸까. 순간 그런 의문이 들어왔지만 달리 물어볼 사람은 여기에 존재하지를 않았으니 한유진은 그저 아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성현제를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 그러면… 설마 내가 한유진 군을 좋아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나? ”


성현제가 금방 또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묻는다. 설마… 하고 되뇌는 모습이 자못 심각해 보인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한유진은 고민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맞는 대답인지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설마 내가 고백조차 하지 않았던 건가? ”


유진의 침묵에 성현제가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재차 묻는다. 그랬을 리가 없는데, 하고 덧붙이는 말은 이번에도 저만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확신에 근거한 말인 것 같았다. 여전히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한 유진이 제 코끝을 살짝 긁적이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 그게… 여러번 이야기를 하시긴 하셨는데… ”


습관처럼 제 앞에 쏟아지던 수많은 고백들이 떠올랐다.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저에게로 올곧게 쏟아지던 성현제의 수없이 많은 낯간지러운 고백들. 하지만 숱하게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한유진은 정말로. 단 한 번도.


“ ……진심인 줄 몰랐거든요. ”


그 말들이 진심일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 * *

 

 

오직 저에게만 통용되는 고약한 장난인 줄로 알았다. 말끝마다 소유격을 붙이며 되도 않는 플러팅을 하는 것도. 한유진의 곁에 있는 이들을 도발이라도 하듯 보란 듯이 소유욕을 보이고 저를 특별대우 하는 것도. 제가 때때로 무례하게 굴고 멋대로 구는 것을 천연덕스럽게 다 받아주고 들어주는 것도 전부 조금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짧은 호기심과 제게로 돌아올 이득을 생각한 일종의 거래, 그 정도인 마음을 다소 짓궂게 표현하는 것이라고만 생각을 했다. 정말로, 단 한 순간, 한유진은 저에게로 쏟아지는 성현제의 그 모든 표현들이 진심일 거라고는 조금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눈앞의 남자가. 성현제의 얼굴을 하고, 성현제인 것 역시 분명한 낯선 남자가. 제 자신이 누군지도 잊어 본인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표정과 말을 하고 있는 주제에 오로지 한유진의 이름과 그 이름을 부를 때 저의 감정만큼은 선명하게도 기억하고 있는 그 이상한 남자가. 다시 말해 성현제가. 이제와 유진에게 그렇게 말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성현제는.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고. 그것을 정말 모르고 있었느냐고.

 

 

* * *

 

 

“ 그게… 그러니까 성현제 씨 성격이 좀… ”


재수 없었거든요. 사랑 같은 건 취급도 안 하는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너무 오만하고 고고하셔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짧은 순간 여러 가지 말들이 머릿속에 나타났으나 유진은 쉬이 설명을 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봤자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어쨌든 ‘그’ 성현제가 아니고. 아니 물론 성현제가 맞지만 어쨌든 ‘그’ 성현제와는 다른데 그런 말을 굳이 하는 건 엄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유진은 성현제 탓을 하는 대신 조금 더 원론적인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 아니, 제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


비록 동생의 생명을 갉아 얻은 두 번째 기회의 환경이 조금 좋기는 하였으나 단지 그 뿐. 본래의 한유진은 여전히 누군가의 애정을 받을 만큼 그렇게 사랑스럽거나 대단하거나, 좋은 사람은 결코 아니어서. 그걸 성현제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한유진은 성현제의 마음을 정말로 조금도 무겁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 …원래의 내 말버릇이 적잖이 안 좋았나 보군. ”


하지만 성현제는 마치 한유진의 뒷말을 듣지도 않은 사람처럼 말을 돌려주었다. 갑자기 제 처지가 자각이 되어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 있던 유진이 그 말에 다소 놀라 시선을 들어 다시 성현제를 바라본다.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다정하고도 따스한 눈동자가 거기에서 올곧게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렇게나… 격렬하게 반응을 하고 있는데… ”


그런 말을 하며 성현제는 제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 위를 가만히 짚는다. 기억을 잃었어도 퍼포머적인 그 성격은 어디 안 가는 모양이라고, 찰나의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성현제는 말을 이었다.


“ 그런데도 한 유진 군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니. ”

“ 아… ”

“ 짝사랑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정말 최악인데. ”


언제나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던 눈동자가 이번에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빛을 띤 채 유진을 바라보았다. 아름답다고 말을 하여도 부족할 수려한 눈매가 느긋하게 침울하여지는 것을 보는 건 매우 이상하고도 기묘한 감각이었다. 서글픔을 담은 목소리로 성현제가 말했다.


“ …안 그런가? ”


그러니 자신의 입으로 과거의 자신이 최악이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사내를 앞에 두고 한유진이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 아니, 뭐…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말하는 건 조금 재수 없었어도… 매번 저를 지켜주고 도와주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


거기에 서서 지금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를 변호해줄 수밖에.

한유진의 대답을 들은 성현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유진 군이었는지 알만하군. 혼잣말처럼 쏟아낸 그 말은 모른 척 하기엔 너무 선명하고 아는 척을 하기엔 너무 작았다.

 

 

* * *

 

 

성현제의 그 수많은 고백들을 어째서 진심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까. 손님을 맞아놓고 차도 한 잔 내놓지 않았다며 사과를 하더니 그런데 주방이 어디인지 혹시 아나? 라고 되도 않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던지고 성현제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한유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돌이켜 떠올려보면 사실 이보다 더 솔직할 수는 없을 정도로 성현제는 언제나 올곧게, 직접적인 말로 유진에게 애정을 표현해왔다. 말과 행동이 달랐던 적도 없고, 때로는 말보다 행동으로 더 과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매번. 매 순간. 질색하고 도망을 쳤을 정도로 열렬하고도 뜨겁게. 성현제는 늘 그랬다. 그러면 자신은 왜 그 많은 말과 행동들을 앞에 놓고도 그의 마음 하나를 믿을 수가 없었을까.

성현제가 재수 없어서? 믿을 만한 성격이 되지 못해서? 언제든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사람이라서?

아니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라서?

유진은 씁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그럴 듯한 핑계를 대보아도 그것이 오로지 본인의 마음인 관계로 한유진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를 완벽히 속일 수가 없었다.

사실은 성현제가 문제가 아니라 한유진이 문제였다. 성현제가 나쁜 사람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한유진이 좋은 사람이지를 못해서. 성현제가 진심을 다 걸고 좋아할 만큼, 한유진이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무능력하고, 열등감은 심하고, 하찮고, 멍청하고. 그런 주제에 동생의 목숨까지 빼앗아서 호사를 누리고 있는. 성현제가 아니라 한유진이 그런 사람이라서. 그래서 유진은 성현제의 진심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이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알게 되면 반드시 실망하고 돌아설 테니까. 성현제라면 결국 한유진의 본모습을 언젠가 꿰뚫어보고 말 테니까. 한유진은 차라리 그 마음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이다.

헌데 그 마음이 이제와 이마만큼 진심이었다고 하니. 자신의 이름은 잃어도 제 이름을 잃지 못할 만큼 무거웠다고 하고. 얼굴도 기억 못하는 주제에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격렬하게 뛰어서 알아보았다고 할 만큼 그토록 애틋하였다고 하니. 한유진은 갑자기 제가 디디고 선 세계가 전부 뒤집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막히고 어지러운 것이다. 애써 밀어두었던 성현제의 그 진심들이 해일처럼 자신을 덮쳐서.

왜 하필, 나 같은 걸 진짜로 좋아한다고 해서. 왜.


“ 안 좋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군. ”


지금 성현제가 느끼고 있는 저 확신이 틀릴 가망성에 대해 생각해보며 유진이 점점 더 깊은 상념으로 빠져들 때, 불쑥 눈앞에 아이스크림이 내밀어짐과 함께 순간적으로 깊어진 우울감의 주인이 나타났다. 다시 놀란 얼굴로 뜬금없는 아이스크림과 성현제를 번갈아 바라보려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 아이스크림이 있길래. ”

“ 아… ”

“ 보자마자 왠지 유진 군에게 줘야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

“ …… ”

“ 아마도 유진 군 때문에 사다놓은 것 같네만. ”


기억을 잃어도 그 자신조차 거부해버린 예민함은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분명 그럴 계획은 없었으나 이런저런 핑계 같은 이유들로 유진이 성현제의 집에 이따금 드나들기 시작하였을 때. ‘ 가만 보면 내 공주님은 마음이 심란할 때 나를 찾는 것 같군. 역시 내가 유진 군의 쉼터 같은 존재인가. ’ 하는 눈치 빠른 개소리와 함께 성현제가 오로지 한유진을 위해 준비해둔 간식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생기면 곧잘 거래를 하자고 성현제를 찾아왔던 것도 사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띠면 과하게 걱정을 해올 것이 분명해 쉽게 아닌 척 할 수가 없는 우울이 찾아올 때면 괜히 들려 이것저것 핑계김의 일을 떠맡긴 것도 사실. 이제와 돌이켜보니 그런 자신의 행동들이 성현제에게는 많은 여지가 되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가 만약 정말 진심이었다고 한다면 말이다.


“ …진짜 기억 안 나는 거 맞죠? ”


아이스크림을 받아들며 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표정에도 다른 농담 없이 한 번 부드럽게 웃어주기만 하는 성현제는 또 낯설어서. 유진은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어 입에 크게 한 입 물었다.

 

 

* * *

 

 

“ 유진 군. ”

소유격을 쓰지 않는 성현제는 이제와 조금 어색하다고. 한유진은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에게 여러 가지 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둘의 일들을 대충 설명해주는 그 사이사이에 말이다. 성현제와의 일이라고 하여봤자 모르는 사람들에게 얘기하기엔 다소간 민망한 일들뿐이라 별로 하고 싶진 않았지만 혹시나 성현제의 기억이 돌아오는 데에 도움이 될까 하여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유일하게 그의 기억의 남은 끈이 되어주고 있는 건 오로지 자신의 이름뿐이었으니.

그리고 지금. 내 소중한 공주님, 따위의 호칭이 아닌 정직하고도 정중한 호칭으로 다시 한 번 유진을 부른 성현제가 문득 대단한 결심이나 한 얼굴로 말했다.


“ …하루…… 자고 가지 않겠나? ”


유진은 저도 모르게 허? 하고 입을 벌렸다. 지금의 성현제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다. 물론 원래의 성현제야 유진이 올 때마다 입버릇처럼 제안하곤 했던 말이지만 그것과도 같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그 성현제도 이렇게 진지하게 말을 해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진은 미치셨어요? 라고 말하려고 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정말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마주친 시선이 왜, 그런 얼굴 있지 않은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망망대해에 혼자 헤매이고 있는 사람의 두려움을 담은 얼굴. 여유 있는 척, 괜찮은 척을 해보았지만 사실은 불안하고 초조하였을 것이 분명한 그런 사람의 얼굴. 늘 보았던 자신만만한, 오만한, 그런 얼굴이 아니라. 그래서 유진은 그것이 과연 연기일지 무엇일지 미처 따져보기도 전에 대답부터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사실 한유진은 늘,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으니까.


“ …개수작하면 진짜 가만 안 둬요. 기억이 없어도 안 봐줘. ”


자고 가겠다는 말을 그리도 살벌하게 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못 알아차릴 리가 없는 지금의 성현제가 그제야 다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런 말을 들을 정도였다니 참담하군. ”

“ 알면 알수록 더 참담하시게 될 겁니다만. ”

“ 정말 안하무인이었나 보군. ”


그리곤 추욱 눈꼬리가 쳐지길래 아니 뭐,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닌데… 하고 한유진이 습관처럼 또 마음 약한 소리를 막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다시 오롯이 시선을 맞춘 성현제가 말했다.


“ 나한테 희망이 있긴 한 건가? ”


그 눈동자가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절박해서. 기억이 없으니 혹시 감정도 착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도망칠 구석을 생각해보고 있던 한유진의 길을 전부 무너트리고 막아버릴 정도로 성현제가 그토록 절절한 눈빛을 해서. 어떤 가면도, 연기도, 다 집어치운 것처럼. 이게 마치 늘 한유진을 대하고 있던 본연의 얼굴인 것처럼.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해와서.


“ ……저 어디서 자면 됩니까. ”


한유진은 그 말에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망 절대 없으니 포기하시죠, 이전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할 수 있었을 그 말을. 하지 못했다.



* * *



한유진은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온통 최고급으로 가득 차있는 성현제의 ‘특별한 손님의 방’의 ‘특별한 손님의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언젠가 성현제가 말한 적이 있었다.


' 유진 군을 위해 특별한 내 공주님의 방을 마련해두었으니 자고 갈 생각이 든다면 언제든 말하게. 물론 내 방에서 함께 자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


그리고 지금 유진은 지금의 성현제는 분명 모르고 내줬을 것이 분명한 이 방이 바로 그 특별한 방인 것을 확신하고 있던 참이었고 말이다. 아마 이것 역시, 기억은 못해도 하여간에 어떤 감각은 남아있는 성현제의 무의식이 해낸 일일 것이리라.

몸을 크게 한 번 돌려 반대편을 보고 누웠다. 낯선 풍경에 눈도 어지럽고, 머리도 어지럽고, 마음도 어지러운 기분이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기억에 문제가 없던 ‘그’ 성현제의 숱한 말들과 행동들이 연신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일들. 자신에게 주었던 것들. 

거래라고 말을 하지만 공평하지 않았음은 알고 있다. 어느 때에는 스스로도 다소간 민망할 정도로 생떼를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성현제에게 많은 것을 지우고 의지하면서도 그다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건 불공평 하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것을 거래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언젠가 버려질, 기간 한정의 관대함이라고 생각한 탓도 있었고. 그래서 모두가 놀라는 성현제의 과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것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질까봐 조금 걱정이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모든 시간들 동안 저에게 주었던 성현제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신은 성현제의 힘과 지위와 능력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이용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러니 더 많이 지라고 종용한 꼴이었다. 당연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 …아니야. 자기 이름도 기억 못했던 사람이 그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한다고.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 ”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해 유진이 다시 또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가, 또 아아아-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진심이 아니길 바라고 싶은 건지, 정말 진심이 아닐까봐 걱정이 되는 건지. 만약에 진심이라고 한다면 그의 기억이 돌아온 후에는 또 제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 건지. 시선을 마주치가만 하면 제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지금의 ‘이’ 성현제는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은 갈수록 복잡해지기만 했다.

그러니까, 만약에 성현제의 진심이 그것이라면. 저의 진심은 또 무엇인 건지.

제 마음을 저도 알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며 눈을 감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보는 성현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애달프고 서러운 눈빛이 누구의 것인지는 차마 짐작할 수가 없음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씁니다. 판소 덕질 중. 트위터 @blanket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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