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실험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고어 주의.


*갑자기 추가된 설정들로 인해 앞 내용과 어색하게 이어지는 느낌이 있지만 최대한 오류가 나지 않는 방향으로 설정을 잡았습니다. 

..노력했습니다.







레지널드는 전세계의 별의 별 미친 실험자들을 모아놓은 커미션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미친 놈이었다. 다른 미친놈들은 그래도 기본적인 상식은 지키는 편이었지만 이 미친놈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해부 실험에 마취제를 사용해 본 적 없으며, (생생한 고통 소리가 실험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돈이 궁한 가난한 사람들을 낚는 것은 기본이었다. (커미션의 실험은 극비 사항이었기에 정보를 구해다 준 자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처형.) 그 중에서도 레지널드가 미친 놈들 사이에서 미친 놈 소리를 듣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실험에 쓸 아이들을 43명이나 납치해왔기 때문이다.

납치라니! 그런 부도덕적인 일을! 언제나 밝은 미소로 미친 실험자들을 격려해주던 핸들러가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인간 생체 실험을 전문적으로, 비공식적으로 행하는 커미션의 수장이 할 말은 아니었기에 레지널드는 대놓고 그녀를 비웃었다. 입양은 공식적인 정보가 남아버려서 안돼, 실험에 쓸 아이를 직접 낳아줄 43명의 여성 인력은 없어. 그러면 남은 방법은 이거 하나뿐이지 않나. 핸들러는 자신의 말에 조목조목 말 대답하는 레지널드가 정말 싫었다. 언제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핸들러에겐 최악의 상대였다. 저 녀석을 누가 실험에 미쳐 사는 공대생이라 생각하겠어. 말 존나 잘하네, 시발. 할 말이 없을 때마다 지어보이는 우아하고 어색한 미소를 띠며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레지널드는 43명의 갓난아기들을 손에 넣었다. 전 세계 곳곳에 심어놓은 현장요원들이 레지널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을 병원에서 납치해온 덕에 이 아이들 모두 같은 날에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사실 이 실험에 있어 생일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1989년 10월 1일에 태어난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 이유는 간단했다. 귀찮아서. 나중에 자아가 생긴 녀석들이 생일이라며 난리치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물론 챙겨줄 생각도 없었지만.




레지널드의 이번 실험은 장기 프로젝트였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초 장기 프로젝트. 돈도, 시간도 천문학적으로 많이 투여될 이 실험이 시작된 계기는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영감 때문이었다.

'만약에 인간이 한 분야에서만 특출나게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림을 잘 그려서 화가가 되고, 노래를 잘 불러서 가수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레지널드의 아이디어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말을 할 언어능력도, 걸을 수 있는 신체능력도 없는 아이가 지능만은 뛰어나다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또는 지능과 학습력은 짐승보다 낮지만 신체 능력만큼은 짐승을 능가할 정도라면 전쟁에 전투요원으로서 이용할 수 있을까. 레지널드는 후자의 경우를 강조해 윗분들에게서 실험에 필요한 자본들을 얻어냈다.

초반 실험은 43명 중에서 5명으로 진행했다. 아직 말도 못하는 갓난아이들은 실험에 투입되기 어려웠으나 두개골을 열어 뇌를 개조하기엔 딱 좋은 시기였다. 선례가 없어 아직 성공률이 낮은 실험이었다. 중요한 자원을 낭비할 수 없어 가장 먼저 커미션에 도착한 순서대로 다섯 명만 골라내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회복력이 너무 약한 탓이었다. 한 번 톱질을 한 두개골은 다시 붙지 않아 작은 충격에도 다시 열리기 일쑤였다. 실험을 하려 해봐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릴 때마다 뇌수들이 흘러나왔다. 실험을 하는 시간보다 뒷처리를 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싫증이 났다. 레지널드는 그대로 다섯 명의 아이를 폐기시켰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실험을 하기 위해선 아이들을 성장시켜야 되는 모양이었다. 레지널드는 가장 만만한 연구원들에게 아이들의 사육을 명령했다. 삼시세끼 밥을 먹이고 똥 싼 거 치워주고.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는 일절 주지마.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성장시키는거야. 몸집만 키워. 말 그대로 양육이 아닌 사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습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규칙적인 시간에 들어와 밥과 청결만을 챙기고 나가는 연구원들에게 적응해나갔다. 그들이 오는 시간에 맞춰 잠에서 깨고, 스스로 밥을 먹고, 용변을 봤다는 사실을 알렸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치고는 매우 뛰어난 행동이었으나 레지널드는 그 아이들을 특별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실패작이라 칭하며 폐기를 명했다. 그렇게 남은 아이들 중 절반이 사라졌다.

아이들이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됐을 쯤부터 레지널드는 본격적인 실험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 가장 먼저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실험체와의 원할한 소통이 되지 않으면 실험은 불가능했음으로. 그가 내린 결정들은 모두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받아쓰기를 모두 맞춘 아이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쥐어주는 것도 그들의 노력을 치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면 달콤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조건반사를 형성하여 적극적인 실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19명의 아이들은 또래보다 뛰어났지만 레지널드의 의도를 알아차릴 정도로 성숙하진 못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서서히 사탕의 맛에 중독되어 갔다.

아이들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이 행동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아이들이 수술 후 상처를 통한 세균 감염으로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둘째, 자잘한 질병으로 인해 실험이 늦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셋째, 아이들의 자가치유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 작은 실험의 결과는 레지널드를 만족시켰다. 아이들은 이제 수술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아이들이 준비되는 동안 레지널드는 자신의 실험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전면 수정하였다. 이성과 지성을 없애고 신체 능력만을 강화시킨 좀비형 전쟁 도구는 이미 여러 번 출시된 적이 있었다. 물론 제대로 된 성과를 낸 것은 단 하나도 없었기에 만약 레지널드가 이 실험에 성공한다면 엄청난 명예와 보상을 얻게 될 테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재미와 성취감만을 원했다. 그래서 레지널드는 처음과는 살짝 다른 실험을 구상해냈다. 이름하여 '감정 증폭'이었다.

아이들의 두개골을 깨고 뇌를 만지는 것은 동일했다. 다만 전 실험에서는 이성과 관련된 부분은 모두 도려냈다면 이번 실험에는 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약물과 주사기가 투입됐다. 아이들마다 특정한 감정들을 정해주고, 그 감정들을 관장하는 뇌의 일부분에 약물을 투입한다. 그 약물은 본래 동물의 성장을 촉진시켜 도축 시기를 앞당기는 용도로 사용되던 것인데, 사실 이 약물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미지수였다. 앞서 말했듯이 선례가 없던 탓이었다. 레지널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하며 그 약의 적정량을 찾아내기로 했다. 사람의 뇌는 매우 민감한 장기였기에 그 적정량을 찾아내는 데에는 많은 실패를 겪어야만 했다. 살아남은 아이는 오직 7명뿐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간 탓에 레지널드는 7명의 아이들은 절대 죽게 놔두지 않겠다 다짐했다. 부성애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윗분들에게 '실험체들이 모두 죽어 실험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이 건네준 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라는 식의 보고를 올리기 싫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이들을 죽게 놔둘 수 없었기에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자 했다. 살아있는 생명체든, 생명이 없는 무생물체든 이름을 지어주면 애정과 애착이 생긴다고들 하지 않는가. 물론 레지널드는 그러한 단어들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주 작은 망설임이었다. 쉽게 폐기 명령을 내리지 않게 할 망설임. 쓰레기를 쓰레기 통에 버리기 전에 이것을 재활용할 수 있진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러한 망설임이 더 이상 실험체를 잃지 않도록 해줄 지도 몰랐다. 레지널드는 어울리지 않게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아이들에게 달아줄 꼬리표는 간단하면서도 쉽게 구별이 가능한 것이어야 했다. 생명체에게 이름 짓기는 레지널드의 분야가 아니었다.




"넘버 1!! 오늘 할당량을 다 채울 때까지 쉬지 말라고 했을텐데!"

그렇게 아이들은 넘버 1부터 7까지의 숫자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개개인마다 다른 실험과 훈련들을 겪어야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아이들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굴러야 했다. 생명체를 기르는 데에 관심이 없는 레지널드가 아이들의 영양을 신경 쓸 리 없었다. 결국 그의 부족한 지식은 넘버 6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넘버 6는 영양실조로 뼈와 가죽만 남은 채 숨을 거두었다.

넘버 6의 죽음은 아이들에게보단 레지널드에게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까운 실험체를 또 잃어버리다니!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살면서 몇 번 경험해보지 못한 자책의 시간을 가졌다. 이름까지 지어놓고 죽게 놔둔 것에 대한 충격은 컸다. 레지널드가 아이들에게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게 시키며 그 단어에 걸맞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쯤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실험 범위가 넓어지고 그에 따라 장소도 바뀌어야 했다. 처음에는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에서 벗어나 외진 곳에 있는 커다란 저택에서 살게 되었고, 또래의 정상적인 아이들과 사회화를 진행해야 실험의 효과가 더욱 강하게 발생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 다음은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빌딩으로 이사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는 자유로운 조건 아래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봐야 한다며 그들을 억지로 독립시켰다. 16년 후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불러모은 것은 새로운 실험을 시작해야겠으니 도와줘야겠다는 명분에서였다.

레지널드의 새로운 실험은 다음과 같았다.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통제된 공간 안에 가둬놓고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땐 자유롭게 키우고 성인이 되었을 쯤에 수술과 실험을 진행한다.

한 마디로 너희들과 비교할 실험체들이라는 얘기지. 레지널드는 여전히 아이들을 실험체로 여기고 있었다. 집안에서부터 독립해 나간 아이들은 그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쌓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레지널드의 실험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었다. 현실을 부정하며 레지널드의 새로운 실험의 도우미 역할을 거부했다. 결국은 참여하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쉽게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레지널드의 명령을 곧바로 수락한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아이들 중 유일하게 새로운 이름을 만들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숫자였다.




"…그러니까 사실 이 학교는 거대한 실험장이었고 교수들은 모두 실험을 집도하는 연구원이다?"

"정확히는 교수들 중, 우리 형제들만이지."

말문이 막혀 입을 벌린 채로 굳어버린 벤의 모습을 본 파이브는 뒤늦게 한 마디 덧붙였다. 생각보다 이해가 빠르네. 벤의 기분을 풀기 위한 칭찬이었으나 효과가 그리 좋진 못한 듯 했다. 벤은 여전히 입을 벌린 그 상태 그대로였다.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충격적인 이야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파이브는 벤이 다시 정신을 차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재촉하지마라. 실험은 언제나 인내심으로 이루어진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파이브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었다. 당신 목소리 듣겠다고 기다리는 거 아니야. 이건 벤을 위한 행동이라고! 그러나 귓가에 남은 잔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그럼."

여전히 웅얼거리는 잔음을 없애준 것은 벤이었다. 여전히 표정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 표정이었으나 그의 입에서는 분명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소리가 문장으로 만들어지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럼… 저도 실험체 중 한 명이에요?"

하! 그래, 벤. 역시 넌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파이브가 가장 대답하기 꺼려했고 두려워했던 질문에 헤매지 않고 도착했다. 남들보다 빠른 상황 파악력과 눈치를 가진 것이 벤의 매력들 중 하나였지만 이럴 땐 정말 미치도록 얄미웠다. 툭 건들면 울 것 같은,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핵심만을 쏙쏙 뽑아내냐. 파이브는 차마 벤의 얼굴 마주하곤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기에 고개를 핸들을 잡고 있는 두 팔 사이에 집어넣었다.

"…그래."

이 여린 아이가 울면서 뛰쳐나가면 어쩌나 걱정됐지만 벤이 과거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틈에 차 문을 잠겨놓은 상태였다. 벤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파이브는 차라리 벤이 울면서 자신을 원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자기냐며, 어째서 실험에 강제적으로 참여된 것이냐며, 자신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냐며. 묻는 말에는 다 대답해줄 생각이었고 눈물은 닦아줄 생각이었다. 벤을 이 레스토랑에 초대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벤의 우는 얼굴을 실제로 눈 앞에 두고 그런 '이성적인' 행동이 가능할까? 글쎄. 아버지로 인해 강화된 감정이 이성임에도 파이브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 벤은 그러한 존재였다.

"그럼 저는 무슨 감정이에요?"

"…무슨 뜻이야?"

"아니…. 얘기를 들어보니까 실험 내용이 각 사람마다 특정한 감정들을 강화했다면서요…. 제가 잘못 이해했나요?"

"…아냐. 네 말이 맞아. 제대로 이해했어. 너는 '지성'이야.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하루종일 책을 읽기 시작했지? 지성이 강화되서 이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흡수하고자하는 마음이 강해져서 그래."

파이브의 말을 들은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언제부턴가 책 읽는 게 급격히 재밌어지더라. 나는 그게 대학생병?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수험생 시절에 하지 못했던 게 한이 돼서 대학생 때 미친듯이 하는 거. 감정을 강화하기 위해 행해졌던 수술의 내용을 듣고도 벤은 해맑았다. 다른 실험체들에 비해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벤의 특징이긴 했지만 이 정도였나? 하는 생각이 마음 속 어딘가 찝찝하게 만들었다.

"그럼 교수님은요? 어떤 감정이 강화됐어요?"

"이성."

벤은 크게 웃음을 터뜨린 후 말했다.

"와, 진짜 잘 어울리네요!"

그 후로도 벤의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지성의 아이인만큼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파이브의 예상과는 다른 질문들만 해댔다는 점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가장 먼저 파이브의 형제들에 대해 물었다. 처음에 그들이 부여받은 감정은 무엇인지 물어본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호구조사 수준의 질문들이었다. 형제들과 사이는 어때요? 자주 만나요? 저 사실 앨리슨 교수님 팬이에요. 마지막 문장에는 조금 움찔했지만 (앨리슨의 전세계적인 인기는 레지널드의 입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앨리슨에게 주어진 감정은 '명예'. 할리우드라는 배경은 그 감정을 강화시키는데에 꼭 필요했다) 사실만을 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벤의 질문들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참고로 너한테 계속 술 마시자고 찡얼거렸던 녀석 있지? 걔는 '쾌락'이야. 설마 그 미친놈이 쾌락을 알코올에서 찾을 지는 몰랐지만. 벤이 물어보지 않은 내용들도 친절히 알려줬다.

자신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벤의 모습이 사랑스럽게도 느껴졌으나 이것 또한 레지널드의 실험으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눈 앞에 있는 벤의 모습은 과연 본인 그대로의 모습일까? 아니면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였다.

"…너한테 이 얘기를 해준 데에는 이유가 있어."

머릿속에 떠오른 대부분의 궁금증을 해결했기에 벤의 표정은 조금 개운해보였다. 손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안전벨트를 잡고 있던 것도 그만두었다. 자신에게 경계를 풀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으나 곧 이성의 목소리가 찾아왔다. 남을 너무 쉽게 믿는 것은 위험해. 파이브는 언제나 그렇듯 이성의 말에 손을 들어줬다. 그래, 나중에 제대로 교육시켜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파이브는 최근 들어 이성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벤 하그리브스. 그를 만난 후부터의 일이었다.

"잠깐만요!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고 싶어요."

벤에게보다는 자신에게 충격적인 제안을 하기 위해 심호흡하던 파이브는 자신의 입을 막는 벤의 손바닥을 느끼곤 미간을 찌푸렸다. 말로만 해도 알아듣는데 굳이 폭력을 (까지는 아니었지만) 사용했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중요한 얘기 중에 말을 끊었다는 점도 마음에 안 들었고. 벤의 손목을 잡고 상냥하게 힘을 줘봤지만 그 정도론 떼어내지 못했다. 물어볼 게 있다면서 입을 막으면 어떡하냐.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는 거에 만족하기로 하고 억지로 벤의 손을 떼어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벤의 손목에 무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저를 스토킹 했던 거…. 그것도 아버지가 시켜서였어요?"

체념한 채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뜨이는 질문이었다. 입이 막힌 채로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온 힘을 다해 벤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벤 또한 필사적이었다. 한 번 열린 입은 쉽게 닫히지 않았다.

"저한테 관심을 가졌던 것도? 묘하게 잘해줬던 것도? 다 아버지가 시킨 거였던 거예요?"

침착했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벅차올랐다.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치우려는 파이브의 손길을 거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 몸싸움을 하면서도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위치 상으로나 신체 능력 상으로나 벤의 저항은 파이브에 의해 제압되고 있었다. 마침내 벤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파이브는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으나

"아니야!"

"수업 시간에 교수의 얼굴을 평가한 특이한 놈이니 면밀히 관찰해서 결과를 보고하라고 하던가요? 애정이나 관심을 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실험해보라고 했냐구요!!"

물이 가득 찬 수조에 금이 생기면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깨지는 법이었다. 그 크기를 줄이기 위해 용기내어 표현해본 작은 섭섭함은 오히려 반대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말하면 말할수록 감정은 격해지고 통제가 되지 않았다.

"젠장, 벤! 닥치고 내 말 좀 들어봐!!"

"난 우리가 서로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결국 감정에 휩쓸려 절대 말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속마음을 내질러버렸다. 뇌에 명령을 받지 않고 움직이던 입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으며 겨우 멈췄다. 쉬지 않고 소리치느라 부족했던 산소들을 뒤늦게 보충하며 헐떡거렸다. 조용해진 차 안은 벤의 거친 숨소리만 가득 했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뭐라고 한거야. 뒤늦게 후회해봤자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것이 더 웃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갈때까지 가보자. 사람들은 보통 한계에 몰리면 평소와는 다른 성향의 결정을 내리곤 했다. 지금의 벤이 딱 그러했다. 평소 같았으면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디 변명이란 걸 해보라는 듯 원망과 수분으로 가득 찬 눈으로 파이브를 노려보았다. 하…. 벤의 눈빛을 발견한 파이브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부림을 막느라 지친 한숨인 듯 했다.

"…잘 들어, 벤 하그리브스. 딱 한 번만 말한다. …맞아. 네 말이 맞아. 너를 관찰하기 시작한 건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였어.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도록 뇌를 개조시켜놨는데 갑자기 수업 중에 내 외모에 감탄하는 미친 행동을 보였으니까."

"나는..!"

"조용.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근데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상황이 바꼈어."

파이브는 벤의 양 손목을 잡고 있던 것을 놓고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깊어진 눈동자에는 수 많은 감정들이 담겨져 있었다. 고민과 망설임, 두려움. 일단 벤이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뿐이었다. 아무래도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듯 했다. 처음 이 차에 올라탔을 때 느꼈던 두려움들이 다시 밀려들어왔다. 아니, 그때보다 어둡고 끈적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빨리 말 좀 해보라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파이브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웠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이성을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언제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도록 뇌를 개조당한 상태고 또,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요받아왔어. 그런데… 그런데, 벤 하그리브스, 널 만나고 나서부터… 감정이 생겨버린 것 같아."

"그거야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생기는 거 아닌가요?"

"아니야! 나는… 그래선 안되는 존재야. 감정이라는 것자체를 만들어낼 수 없었어야 했다고!"

그제서야 벤은 그 심각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파이브의 손을 잡았다. 그는 살짝 움찔거리진 했지만 손을 빼거나 마주잡진 않았다. 처음으로 겹쳐진 파이브의 손은 생각보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만약에, 만약에 당신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아버지라는 사람이 알게 된다면…."

"곧바로 폐기처리 되겠지."

"폐기처리라면… 주, 죽는다는 뜻인가요..?"

"…나 뿐만이 아니야. 불량품을 만들어냈다며 너까지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

벤은 에이, 설마 지금까지 힘들게 키워온 아이들인데 죽이기까지 하겠어요. 라고 말하려다 도로 입을 닫았다. 파이브로부터 들은 과거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레지널드의 반응을 유추해보건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며 보다 더 심한 벌이 내려질가능성도 컸다. 상상을 마친 벤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파이브를 바라보았다. 우리 이제 어떡하죠? 말하지 않았지만 파이비는 이미 벤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순식간에 평소와 같은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온 파이브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가자.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을 먼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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