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의 일상은 언제나 비슷하게 흘러갔다. 새벽 늦게 잠에 든 탓에 피로를 모두 없애지 못한 채로 출근 시간 아슬아슬하게 눈을 떴다. 아침은 꼭 먹어야 한다는 연구원의 제안을 부드럽게 거절하며 세수와 양치질만 간단히 했다. 비슷한 취향의 옷들로 가득 찬 옷장을 뒤적거릴 때마다 속을 채우지 못한 배가 아우성을 질렀으나 억지로 가라앉혔다. 정신 없이 시간에 쫓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여유롭게 밥을 먹을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다. 10분 정도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출근하겠다며 매일 밤 잠들기 전 다짐했으나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 읽는 걸 그만두지 않는 이상 이 다짐이 성공할 날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출근을 하고 나면 아침 첫 강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이든 오후든 강의를 진행할 시간대를 원하는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이 교수의 특권이었으나 벤이 진행하는 강의들은 모두 오전 시간에 몰려있었다. 교수님 수업은 너무 아침 일찍이라 힘들어요. 하는 강의 평가들을 자주 받는 편이었지만 강의 시간을 바꾼 적도, 바꿀 생각을 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후에는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면 오전의 일보다 오후의 일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벤이 조금 더 좋아하는 일은 오전의 것이었다. 교수의 일은 원해서 하는 것이라면 오후의 일, 즉 연구원의 일은 아버지의 압박이 컸다. 사람을 유리벽 안에 가두고 하루에 한 번씩 상태를 보러 가는 일이라니. 비도덕적이고, 잔인한 일이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연구원의 일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물론 인체 실험 그 자체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무서운 일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실험 대상이 파이브였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보다는 이미 서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파이브가 훨씬 더 나았다. 무엇보다 얼굴이 잘났잖아!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미모의 실험대상은 연구원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교수와 학생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연구원이고 파이브가 실험체네.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정반대가 되어버린 지금 상황이 우스웠다. 어차피 연구실 안에는 자신뿐이었음으로 소리내서 웃어도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입가를 가리고 숨을 죽이며 킥킥거렸다. 

"벤. …너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진심으로."

오랜만에 만난 파이브가 했던 말이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입가에 가득 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빈 자리를 의문 하나가 대신 채웠다. 먼 나라로 출장 갔다가 16주만에 돌아온 파이브가 한 말이 자꾸만 신경쓰였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니. 그건 자신이 아니라 파이브가 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었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파이브였으니까. 오랫동안 고민해봤지만 마땅한 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약 4달이라는 긴 시간의 임무가 파이브에게 가족의 정을 선물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외국에 나간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병은 바로 향수병이라는 말을 어딘가의 책에서 본 것 같았다. 감정이라곤 갖고 있지 않은 이성의 파이브마저 그 불치병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벤은 들고 있던 펜을 움직여 문장 하나를 적어내려갔다. 향수병을 극복하는 법. 벤의 새로운 연구 주제였다.




학교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진행된 여러 실험에 대한 보고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레지널드의 지하 연구실이 넓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때만큼 그 크기를 실감할 때가 없었다. 동시에 진행되는 실험 및 연구만큼이나 가득 쌓인 보고서들이 책상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 보고서들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일을 먼저 한다고 해서 벤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었지만 벤은 언제나 식당에 가서 한 사람 분량의 음식을 주문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보통은 점심 특선 메뉴였고, 가끔씩 특별 주문을 받아 땅콩마시멜로 샌드위치라는 전용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벤은 요리를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파이브의 부탁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더 자주 시켜주길 바랐다.

벤이 파이브의 음식을 직접 가져다 주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랑하는 형제를 자신의 손으로 돌봐준다는 뿌듯함과 자신이 아니면 그를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측은함. 그리고 무엇보다 파이브는 현재 유리벽 안에 갇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파이브를 가둔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버지!"

16주만에 파이브를 만났던 그때, 레지널드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스스로 발전할 기회를 줬음에도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훈련을 진행해야 되지 않겠나."

"유리벽 안에 가두는 건 훈련이 아니라 고문이에요! 굳이 가두지 않아도 충분히…."

"넘버 5의 능력은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는 거란다. 비록 지금은 원하는대로 다룰 수 없다 하더라도 위험성이 높은 건 바뀌지 않아. 만약 훈련 도중 넘버 5가 시공간을 넘어 그대로 도망가버리면 어쩔 셈이지? 너가 책임질건가, 넘버 6?"

음식이 나왔다는 알림이 벤을 과거에서부터 끌어내주었다. 지금도 잠들기 전 그때의 일을 생각하곤 했다. 이렇게 말했다면, 저런 식으로 말했다면 아버지를 설득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파이브를 수조 안 물고기로 만들어버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죄책감 또한 강해졌지만 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다 마주친 모든 사람들에게 밝은 인사를 건냈다. 고생하는 연구원들을 치하하는 의미보다는 파이브에게 가기 전 행하는 준비운동 같은 것이었다. 형제들 중에 가장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그는 벤의 감정 변화를 정확히 짚어내곤 했다. 그리곤 벤이 느끼는 것보다 더 큰 감정을 느꼈다. 벤이 미소 지으면 파이브는 웃었고 벤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가라앉는 날에는 과도할 정도로 우울해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가족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벤은 자신으로 인해 형제의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파이브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입술을 푸는 아나운서들처럼 과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웃어라, 벤! 파이브에게 괜한 걱정 안겨주지말고!





아버지에게 납치된 벤을 구하겠다며 능력을 사용한 것이 실수였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파이브는 생각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과거따위는 잊어버리자 다짐하면서도 막상 하얀 벽과 투명한 유리벽을 마주하게 되면 머릿속으로만 반복한 다짐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파이브가 있는 방은 방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색할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파이브와 같은 성인 남성 세 명이 누우면 꽉 찰 공간은 바닥과 천장을 제외한 사방이 모두 유리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파이브는 신경질적으로 유리벽을 세게 찼다. 퍽 소리와 함께 유리가 아닌 파이브 본인이 뒤로 밀려났다. 유리벽은 개뿔, 거의 투명한 콘크리트였다.

말 그대로 수조 안 물고기처럼 갇혀버린 파이브의 일상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간단했다. 연습, 연습, 연습, 그리고 연습. 레지널드가 만족할 정도로 능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야만 하는 일상이었다. 사방이 뻥 뚫린 유리벽 안에서, 하얀 바닥과 보호색을 이루는 하얀 환자복을 입은 채로.

단순히 연습만 하는 것이라면 두 팔 벌리고 환영했을지도 몰랐다. 능력을 제대로 다루고 싶은 것은 파이브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이 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회복되면 그 즉시 연습에 들어갔다. 1989년 3월 22일, 대한민국, 서울. 투명한 벽 너머로 보이는 목표에 정확히 도착하면 성공, 아주 약간의 오차라도 발생하면 실패였다. 자면서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실험이었다. 벤의 손에 이끌려 처음 이 유리벽 안으로 들어왔을 때 파이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었다. 실험에 협조하는 척 하다가 기회를 엿보자. 내가 어느 시대에 어디로 갔는지 저들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 레지널드가 시키는대로 옷까지 갈아입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때까지만해도 파이브는 자신보다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실험의 첫 시도는 긴장감 없이 진행되었고 파이브는 온 몸의 세포들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

"핸들러!!!"

강한 고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기 전 외친 한 마디는 고통의 비명이 아닌 이 고통을 만들어냈을 사람의 이름이었다.

인체 실험을 주로 행하는 연구소의 수장, 직위만 놓고 보면 레지널드의 상관. 그녀를 지칭하는 수 많은 문장들 중에서 파이브가 택한 것은 바로 다음의 문장이었다. 자신이 가장 잘난 줄 아는 늙은 여우 같은 여자. 언뜻 듣기에도 적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공간 이동 능력을 활용한 시간 이동 능력은 본래 레지널드의 연구가 아니었다. 그가 인간이 한계를 뛰어넘었을 때 손에 넣을 수 있는 초능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특정한 능력 하나만을 바라진 않았다. 쉽게 말하자면 레지널드는 질보단 양을 원했고 핸들러는 시공간의 이동 그 자체를 원했다. 때문에 파이브가 처음 능력에 눈을 떴을 때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핸들러였다. 파이브에게 있어 핸들러의 첫인상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처음 마주하자마자 손을 낚아챈 것도 모자라 눈물까지 흘린 사람. 사실 핸들러의 이미지는 그때 이후로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파이브에게 있어 핸들러는 여전히 미친 사람이었다.

실험에 실패한 대가로 강한 충격을 얻어맞고 기절한 후 눈을 떴을 때는 다시 유리벽 안으로 돌아온 후였다. 목표로 지정된 장소와 다른 곳에 도착하면 고통을 주고 강제 귀환이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악질의 장치를 만들 사람은 핸들러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널 위해 만든 것이 있어, 파이브. 이것이 너의 능력을 강화시켜줄거야. 아, 그리고 내가 시간 이동에 도움이 될만한 공식들을 몇 개 적어봤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능력을 제대로 다루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파이브는 핸들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말투로 대답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곤 했다. 뒤늦게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면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으니 신경쓰지 말라는 쓸데 없는 자존심들을 모두 버려버리고 제발 공식 하나만이라도 던져달라며 무릎을 꿇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릴 정도로 끔직했지만 정말 그 정도로 간절했다.




오늘도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목표가 주어지고, 능력을 사용하고, 실패하고, 다시 돌아오고. 시공간을 뛰어넘을 때마다 줄어드는 체력이 온 몸을 관통하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사실 휴식 시간이라기보단 정신을 잃은 파이브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파이브! 나 왔어!"

파이브의 진정한 휴식시간은 벤과 함께 찾아왔다. 좁은 유리벽 안에는 침대를 포함한 기본적인 가구들조차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음식을 챙겨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가 파이브에게 음식을 조달해야만 했고 그 역할은 보통 벤이 맡았다. 파이브의 강력한 요구사항이었다. 거지 같은 나날들 속에서 혀를 깨물고 자살하지 않기 위함이라며 레지널드를 설득 (협박) 하였다.

"오늘은 식당에서 사가지고 왔어. 샌드위치를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학교 일이 생각보다 늦게 끝나서 시간이 없었어, 미안해."

벤은 자연스럽게 유리벽에 가까이 다가간 후 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바로 옆에 연구원들을 위한 책상과 의자가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있는 파이브와 눈을 마주하기에는 책상보단 바닥이 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벤은 파이브를 내려다보고 싶지 않았다. 고통에 지친 파이브가 앉을 힘조차 없어 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는 더더욱. 비록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파이브를 연구하고 있었지만 벤은 언제나 실험체와 연구원이 아닌 형제로서 행동하고 싶어했다. 실험체에게 정을 주지 말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따윈 듣지 않았다. 언제나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르는 넘버 6의 유일한 반항이었다.

"…배 안 고픈데."

이마에 가득한 식은땀들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려 파이브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환자복은 딱봐도 축축해보였다. 어제보다 짙어진 것 같은 다크서클과 함께 어우러져 안쓰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벤은 순간 표정관리에 실패하였다.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재빨리 집어삼켰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이 아닌 파이브였다. 당사자도 아닌 자신이 울면 안된다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밥을 먹어야 힘이 나지!"

"맛없어."

"…요리하시는 분들에게 실례야, 파이브."

총알도 막아버리는 유리벽 중 유일하게 열리는 작은 구멍을 통해 식당에서부터 갖고 온 음식을 넣어주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는 말을 증명하듯 파이브는 음식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향이 강한 음식이라 유리벽 안이 순식간에 음식 냄새로 가득 찼을 텐데도 용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배가 안 고픈가? 부모에게 반항하는 사춘기 아이처럼 괜히 주린 배를 붙잡고 억지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던 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 훈련이 쉽지 않았을텐데… 배가 안 고플 리가 없는데…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듯 파이브가 벤을 쳐다보았다. 하루종일 훈련을 하고 고문을 당한 것은 자신이었는데 표정만 놓고 보면 벤이 더 심각해보였다. 형제가 식음을 전폐하는 모습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파이브는 살짝 고개를 돌려 벤을 바라보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아무래도 늦은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투명한 유리벽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눈 앞에 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파이브는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언제나 벤에게 약했다.

"…너가 먹여준다면 한 번 생각해볼게."

농담 삼아 한 말이었지만 벤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만화적으로 표현하자면 벤의 얼굴 주위에 꽃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장난이었다고 말하려던 입이 천천히 닫혔다. 이미 두 팔을 걷어붙이고 바닥에 누울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것을 차마 막을 순 없었다. 그릇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겠다며 낑낑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표정관리를 하겠다며 손으로 입가를 가려보았지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거리는 숨소리가 입 밖으로 흘어나왔다. 다행히 생각보다 손을 움직이기 힘들다며 찡얼거리고 있는 벤은 듣지 못한 듯 했다.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두 손을 파이브의 입까지 올리기 위해 고개마저 바닥에 푹 박아버린 벤은 언뜻 보면 머리가 무거운 아이들이 절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앞을 보고 있지 않으니 음식을 담고 있는 숟가락이 파이브의 입까지 정확히 도달할 리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숟가락 위에 올려져 있는 음식의 양이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새하얗던 바닥에 얼룩이 생겼다. 보다 못한 파이브가 벤의 손을 잡고 숟가락의 위치를 조정해주었다. 이러면 벤이 먹여준다기보단 내가 스스로 먹는 거 아닌가? 아이러니 했지만 살짝 고개를 든 벤과 눈이 마주치자 뭐, 어찌 됐든 좋았다. 벤도 기뻐보였고 자신 또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일상이라면 실험체로서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벌써 나흘 전이었다. 그 이후로 벤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벤이 찾아오지 않으니 파이브의 휴식시간도 저절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는 훈련이 이어졌다. 덕분에 능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듯 했다. 뿌듯하긴 했으나 크게 기쁘진 않았다. 벤을 대가로 얻은 기분이라 오히려 더 찝찝했다. 학교 일로 바쁜 탓에 오지 못하는 것이라면 안심이었지만 벤이 오지 않는 이유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실험체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한 대가로 벤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약속이 있었으니 큰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지만 삶은 예측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고 특히 레지널드의 밑에서 일하는 삶은 더욱 그러했다. 벤에게 능력이 생겨버린걸까? 그 능력이 레지널드의 마음에 들어서 벤 또한 실험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건 아니겠지? 현재 자신의 상황처럼 벤이 좁은 유리벽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뇌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손과 발을 이용해 유리벽을 부수려도 해보고, 능력을 이용해 빠져나가려도 해봤지만 무엇 하나 성공한 계획이 없었다. 실험체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제재들만 잔뜩 받았다. 이 과정에서 파이브는 자신을 가둬놓은 유리벽 천장에 달린 이상한 모양의 장치의 용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장치의 입구에서 안개와 같은 하얀 연기가 흘러나와 좁은 유리벽을 순식간에 채웠다. 본능적으로 유리벽을 뚫고 지나가려다 이마를 세게 부딪혔다. 꽤 큰 소리가 났지만 고통보다는 졸음이 먼저 찾아왔다. 서 있을 힘마저 빼앗겨버린 파이브는 유리벽을 타고 천천히 미끄러졌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두 눈이 감기는 것을 느끼며 실험체에게 썼던 수면가스를 직접 맞아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중얼거렸다.




약에 의해 억지로 눈을 감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이 더러웠고, 긴 수면 시간과는 다르게 피로는 오히려 더욱 쌓인다는 이상한 부작용을 가지고 왔다. 술을 잔뜩 마신 다음 날의 아침처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훈련에 실패했을 때 찾아오는 전기 충격을 맞았을 때도 흘리지 않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괜찮아? 기분이 어때?"

"…더러워."

"물 좀 마시면 괜찮아질거야."

본능적으로 누군가가 건네준 물잔을 잡으려던 파이브는 단단한 유리벽에 손을 부딪히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전히 몸이 무거웠지만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유리벽 너머로 물잔을 들고 있는 벤과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거리가 가까웠기에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음에도 본능적으로 몸이 뒤로 빠졌다.

"벤?"

나흘동안 보지 못했던 탓인지 눈 앞에 있는 벤의 모습이 묘하게 현실성이 없었다. 그가 실존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벤의 움직임에 맞춰 고개를 움직였다. 벤은 나흘 전에 했던 것과 비슷한 자세로 물잔을 유리벽 안으로 밀어넣었다. 컵 표면에 물방울들이 가득한 모습이 언뜻 보아도 시원해보였다.

"너가 문제를 일으켰다가 제압당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거야. 대체 왜 그랬어!"

벤과 파이브 사이에 유리벽이 없었더라면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았을 기세였다. 유리벽을 부수고 탈출하려 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었기에 파이브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억울함이 치밀어올랐다. 유리벽 건너편에서 자신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척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 얄미웠다.

"너는 왜 그랬는데? 뭘 했길래 나흘동안 농땡이친건데?!"

"노, 농땡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논 줄 알겠어!"

"아니야? 실험 대상이 굶어죽지 않도록 밥 멕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딨어!"

파이브의 말에 벤이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길을 피하는 것이 분명 찔리는 것이 있는 듯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작정 찔러본 것이 급소였다는 사실에 파이브는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크게 눈을 뜨며 소리쳤다.

"뭐야, 진짜야? 진짜 농땜이 친거야?! 나는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미안!! 진짜 미안해!!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너무 재밌어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어..!!"

두 손을 눈 앞에 모아둔 것도 모자라 허리까지 깊게 숙이며 사과하는 벤을 바라보는 파이브의 눈빛이 더러워졌다.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내뱉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고작 책에게 밀렸다는 허탈함이 빠른 속도로 밀려들었다. 고함이 아닌 한숨을 튀어나왔다. 그것이 오히려 벤을 압박하는 데에 더욱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방금 전보다 더욱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벤이 허리를 숙였다. 인사보다는 절에 가까운 각도였다.

"그, 근데 나도 나흘동안 밥 못 먹었으니까 쌤쌤으로 퉁치면 안될까?"

여러 번의 사과로도 파이브의 기분을 풀어줄 순 없다 판단한 모양이었는지 노선을 변경했다. 안쓰러워보이는 표정을 만들기 위해 눈썹을 늘어뜨리던 것을 그만두고 대신 윙크를 하며 깜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벤은 요망하게도 자신의 외모를 이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파이브에겐 잘 통하지 않았다. 아니, 통하긴 했는데 윙크보다 충격적인 것을 들은 후였기에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나흘동안 밥을 못 먹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새끼들이 밥도 안줘? 너 굶겨?!"

두 손바닥으로 유리벽을 세게 내려치는 파이브의 모습을 보고서야 벤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차! 하며 황급히 입을 닫아봤으나 파이브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 벤은 입을 달싹거리며 말을 아꼈다. 이대로 도망가도 문제였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벤은 자신의 대답이 파이브를 더욱 화나게 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지옥과 불지옥 사이에서 고민하던 벤은 그나마 덜 뜨거운 지옥을 택하기로 했다. 더운 날씨는 딱 질색이었다.

"…책 읽느라 밥 먹는 것도 까먹어버렸어."

본인의 말을 끝내자마자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며 충격에 대비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작 책 따위를 읽느라 밥을 굶는 거냐며 길길히 날뛸 줄 알았던 파이브는 오히려 점점 입을 다물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얼굴 또한 점점 하얗게 질리는 듯 보였다. 붉은 태양을 넘어서 백색 태양이 되어가는건가 싶었으나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벤이 잘못본 것이 아니라면 파이브는 화가 났다기보단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파이브도 무서워하는 게 있구나. 신기했으나 언급하진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길 꺼려했고 파이브는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자존심이 강한 편이었다. 괜히 그의 치부를 건드려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벤이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에도 파이브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선은 벤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단 한 가지로 가득했다.

"원하던 결과와 반대로 흘러가는 것만이 부작용이라곤 할 수 없지. 예상했던 것과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모든 것들이 부작용이야. 예상보다 결과가 잘 나오는 것도, 못 나오는 것도."

가장 먼저 스쳐지나간 것은 핸들러의 밑에서 연구를 진행했을 당시 들었던 문장이었다. 연구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말을 돌려 까는 것이라 생각하며 흘려들었던 것이 이제와서 생각난 이유는 분명했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말이 벤을 가리키고 있었다. 파이브처럼 얻어서는 안되는 것을 손에 넣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양상이 다른 것일 뿐이었다. 밥을 먹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무려 나흘 간 책만 읽었다는 것은 언뜻 들어도 정상의 범주 안에 들지 못했다. 분명히, 벤은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을 레지널드가 알게 된다면….

파이브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문장만이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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