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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 데 하마이카(http://posty.pe/111elw)에서 이어짐/



잠시 뒤 스노우가 권태 섞인 미소를 되찾았다. 그제야 제헌은 조금 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스노우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제헌이 손을 빼내려 했지만 단주에게 잡힌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프게 쥐고 있지는 않은데 그대로 돌덩이처럼 굳어진 듯 옴짝달싹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딱 그 정도로 유지하도록 힘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상황만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제헌도 이 기이한 악력 사용에 호기심을 느꼈겠지만, 어쨌든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제헌이 그러는 사이에도 분위기 좋은 테라스에서 혓바닥으로 하는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스노우가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말했다.

"당신이 결정할 일은 아니죠."

"그럼 네가 결정할 사안인가? 그것도 아닐 텐데."

"…단주 님, 당신 시대는 이미 지났어요. 왜 스스로 뛰쳐나간 사람이 이제 와 어깃장을 놓는 거죠?"

"한국말을 꽤 잘하네. 열심히 배웠나 봐. 아, 그리고 난 너랑 빌어먹을 영감탱이랑 나머지 떨거지들이 무슨 헛짓거릴 저지르고 다니든 관심 없어. 나만 안 건드린다면 무슨 대단하신 음모론의 핵심이 되어서 돈이니 권력이니 완장질을 해대도 내버려 둘 작정이야. 그런 의미의 휴전이니까."

단주는 그렇게 말하며 제헌의 손을 살짝 자신 쪽으로 당기며 싱긋 웃었다. 젊을 때 여자 꽤나 울렸을 것 같은-그리고 현재도 실시간으로 홀릴 것 같은 미소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서늘한 기운이 있었다. 단순히 차가운 것과는 다른 어떤 감정이 이상하게 제헌의 신경을 건드렸다. 단주는 제헌을 똑바로 보며 스노우에게 계속 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을 끌어들이진 말아야지."

"그를 데려온 건 안전을 위한 조치였어요."

스노우의 목소리에선 억눌린 분노 비슷한 것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단주는 거기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느긋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없어도 인간이 양심은 있어야지. 본인 의사를 무시하고 사람을 묶어두는 게 잔인한 짓이라는 것 정도는 배워서라도 이해를 할 수 있잖아."

"단주 님이 상관하실 바는 아니에요."

"내가 하기로 한 걸 네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번 더 잘 생각해보라고 충고하겠어. 연장자로서 그 정도는 해주마."

"제헌 씨는 못 데려가요. 제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저기요."

눈빛으로 용호상박을 찍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제헌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제헌이 물론 몸 둘 바를 모르 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헌은 자기 할 말만 했다.

"손 좀 놔주실래요? 제 힘으론 안 빠져서요."

단주가 무어라 설득의 말을 꺼내거나 스노우가 감동의 눈빛을 보내기 전에 제헌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화장실이 급해서 그런데 저 빼놓고 두 분이서 하던 거 계속하면 될 것 같거든요. 저는 둘이서 뭘 하는지 모르겠고, 별로 관심도 안 가니까 설명은 지금까지 그런 것처럼 안 하면 되겠고요. 아니면 제가 없는 사이에 어색하게 침묵하면서 각자 머리라도 좀 식히시든가요."

제헌의 말에 화려하고 우아하게 단장한 미인이 눈앞에서 간식을 뺏긴 것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헌의 손을 잡고 있던 깔끔한 미중년은 그보단 훨씬 격한 반응을 보였다. 단주가 워낙 호탕 격렬하게 웃어젖히는 통에 제헌은 등이라도 두드려줘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푸하하하! 

"아, 이 친구 생각 외로 걸작이네."

다행히 제헌이 등을 두드리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전에 웃음이 잦아들었다. 오히려 단주가 제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몸이 두꺼워 보이진 않는데 무슨 쇠망치로 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초면인데 갑자기 손을 덥석 잡질 않나 웃긴다고 어깨를 두드리질 않나 참으로 퍼스널 스페이스가 없는 사람이었다. 제헌은 은근슬쩍 단주로부터 몸을 멀리 떼어놓으며 얼얼한 어깨를 잡고 말했다.

"그래서, 인근에서 카페를 운영하시는 단주 사장님?"

"그냥 편하게 불러요. 호칭 길면 불편하니까."

"아, 네. 형님."

제헌의 급격히 친밀해진 호칭에 단주의 입꼬리가 씰룩였으나 어디 용건을 말해 보라는 듯 아까처럼 웃음을 터트리진 않고 참는 모양새였다. 

"저한테 거부권이 있기는 합니까?"

제헌의 질문에 그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오늘처럼 맑은 날에 잘 어울리는 소년 같은 미소였다.

"아니. 없습니다, 제헌 동생."

"왜요?"

"그야 제헌 동생은 지금부터 저 괴물들의 진창에서 급박하게 탈출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제헌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지 않고 순간 입을 다무는 것을 본 단주의 시선이 좀 변했다. 그건 씁쓸함이었고 이 첨가물로 인해 소년 같던 단주의 얼굴에 어렴풋이 세월의 흐름이 비쳐 보였다. 제헌이 단주가 말하는 게 오글거린다고 생각한 것과는 별개의 감상이었다.

그가 말하는 의도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제헌을 바라보는 서늘했으나 냉막하지 않은 눈빛의 의미는 단주라는 사람의 제헌을 보는 시선 그 자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이 그저 제헌을 어쩌다 휘말린 일반인이니 자신이라도 나서서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라면, 그렇다면 그가 내미는 손은 제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틀림없었다. 제헌이 손발이 닳고 내장이 녹아내릴 정도로 간절하게 그토록 바라던 그런 기회 말이다. 

둘의 대화를 미루어 보건대 단주는 그럴 힘도 의지도 충분하다고 볼 여지가 있었다. 제헌의 시선이 눈앞의 이를 유심히 살폈다. 비록 몇 초에 이르지도 못할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는 타고나길 그렇게 된 사람인 듯 제헌의 시선을 당당하게 받았다. 그러나 제헌의 명부에 기록된 음험한 모사가 중 한 명이 입을 연 탓에 시선은 금방 끊어졌다.

"단주 님은 그럴 수 없어요."

"네가 막기라도 할 거니? 그럴 능력은 되고? 나한테 꼬리 밟힌 거 보면 그 음흉한 영감은 우리 제헌 동생네 머리카락 개수도 알고 있을 텐데……. 혹시 성실한 후계자답게 잘 키워서 미카엘에게 번제물로 바치기라도 하겠단 소린가? 너라면 그럴 거라는 거, 그 망할 영감탱이도 아니까 이쪽 동생 목숨을 노리는 거 아냐."

어찌 됐든 제헌은 스노우의 무해함을 가장한 가면을 벗기는 건 언제나 자신이라고 생각해왔다. 제헌 앞에선 도리어 더 짙은 가장을 하려고 하는 건 알았지만 그들이 글자 그대로 살 비비며 지내온 시간이 얼만데, 당연한 일 아닌가? 어디 가서 말할 일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내심 제헌은 자신에게 그럴 권리 정도는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스노우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단주 님이 상관하실 바가 아니에요. 가세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서로 건드리지 않고 각자의 영역에서 끝없이 경계하며 노려보기나 하세요."

스노우가 그렇게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제헌은 지금 처음 알았다. 물론 단주에겐 이빨도 박히지 않았다.

"기억력에 문제 있니? 네가 먼저 외부인을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아무 문제 없었다니까. 나는 너희 같은 종류가 있는 쪽으론 잘 때 머리도 안 둬. 기분 더러워서. 어디까지나 너 때문에 무관한 일반인이 신원불명 변사체 되게 생겼으니 내가 여기까지 온 거야. 사람 살리려고."

"단주 님."

"하룻강아지가 노려본다고 무섭겠니? 나는 할 말 끝났다. 너도 정리해."

"저도 모르게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데 왜 제 의사는 무시하는 거죠?"

"제헌 씨……."

"목숨이 먼저지. 나는 동생에게 긴급탈출 버튼이거든."

"그 버튼 꼭 눌러야 해요?"

스노우가 테이블 위로 은근슬쩍 제헌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따뜻하고 단단하고 어느새 익숙해진 손이었다. 실험적으로 증명해낸 일은 없었지만 제헌은 자신이 눈을 감고도 스노우의 손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까진 구별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건 착각이 아닐 거였다.

"갈 필요 없어요. 듣지 말아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제 곁에 있기만 해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다른 사람의 말은 필요 없잖아요."

구구절절 간곡한 소리에 하마터면 제헌은 앞뒤 안 가리고 맞장구를 칠뻔했다. 습관이 참 무서웠다. 하지만 수려한 미인이 속눈썹을 차르르 내리깔며 애원하는 것에 마음이 말랑해져 결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건 제헌이 아니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되돌릴 수 없는 선택도 있게 마련이고 지금 제헌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너무 늦은 것이다. 아마 지금이 아니어도 제헌이 마음을 돌이킬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미 늦었다.

스노우가 은근한 미소를 보내며 잡은 손을 아주 은근슬쩍 대놓고 쓰다듬으며 신호를 보내고 있고 옆에선 "가지가지 하네."같은 단주의 날 선 평가가 날아들고 있는 와중에 제헌은 상황을 경계하고 있지만 목소리가 안 들릴 만큼은 떨어져 있는 경호원들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제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노우의 얼굴이 황망해졌다. 제헌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일부러 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화장실 간댔잖아. 일일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굴지 마라. 기분 이상하니까."

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주의 뒤를 지나가며 스노우에겐 보이지 않게 그의 등에 손으로 신호를 남겼다. 

"아, 나도 잠깐 화장실을……."

그렇게 말하며 단주가 몸을 일으키자 스노우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이 나란히 서니 스노우가 확실히 단주보다 덩치가 큰 게 눈에 들어왔다. 어지간한 운동선수급을 넘지 않으면 스노우보다 크긴 어려울 테니 제헌과 같은 동양인인 단주가 그보다 크기도 어려울 일이긴 했다. 

제헌은 저 단주란 사람이 깡다구나 힘은 좋을지 몰라도 연기력이나 눈치는 좀 떨어진다는 평을 내렸다. 물론 스노우가 좀 예민한 상태이기도 했지만, 제헌이 자리를 뜨자마자 이렇게 바로 일어나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길 거 아닌가. 

똑같이 일어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만약 시선이 물질화할 수 있다면 지금 이 한가로운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번개나 불꽃이 번쩍이고 있었겠지만 눈빛만 번뜩였을 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그들의 모습은 NGC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으나 거기에 자신이 끼어있다는 점 때문에 제헌은 마음 편히 즐길 수도 없었다.

"날 막으려고? 네가?"

단주의 목소리는 호승심은 하나도 없고 진한 어이없음만 담겨있었다. 덩치 차이가 선명한데도 그 태도는 오히려 맹수에게 발톱도 없는 소동물이 덤벼드는 꼴을 이상하게 여기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자존심 상할 수도 있는 반응인데 스노우의 반응은 오히려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단주 님이라도 1,000피트 거리에서 날아온 총알이 머리에 박히는 건 못 막으실 테니까요."

"뭐라는 거야? 국제화 시댄데 미터법 좀 써."

"300미터요."

"아, 내가 아만타디움 인간도 아닌데 저격은 못 막지. 그거 때문에 영감한테 진짜로 죽을 뻔도 했는데……는 다 옛날얘기고. 후환 때문에 미카엘도 그걸 포기 했는데 아무튼 젊은 게 참 좋단 말이야. 싱싱한 피가 너무 돌아서 돌아버리기도 하고."

뭘 그런 걸 지적하고 그걸 또 고쳐주고 뭔데 또 산뜻하게 인정하고 아재 개그까지 치는지 제헌의 상식에선 소화하기 힘든 대화였다. 게다가 지금 제헌은 갑작스러운 만담을 편히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다. 여유가 없으니 그냥 대놓고 말하기로 했다.

"스노우 넌 앉아있어. 형님께선 저랑 얘기 좀 합시다."

"동생께서 불러주면 또 나야 환영이지."

"하지만……."

"너도 참 징하다. 실시간으로 위치추적 중이고 직장 상사도 감시 꾼에 오가는 길목마다 경호원이 지키고 있고 경찰도 매수 해놓고 근처에 사는 한인들까지 포섭해 놓았으면서 내가 어디 가는 게 불안하냐? 내가 어디 갈 수 있기는 해? 거짓말을 너무 하다가 본인도 그게 진짠가 싶은가? 아, 몰라. 됐어. 지긋지긋해서 더 말하기도 싫다."

제헌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그만큼 말을 했으면 말할 거리가 떨어져서라도 어차피 더 말하지도 못할 테지만 제헌은 당당했다. 그는 자신의 죄업은 모른척해도 타인의- 개중에서도 자신에게 향한 부도덕과 부당함에 대해 질타하고 호소하는 것에는 아주 엄격한 편이었다. 

그렇게 짜증스레 화를 쏟아낸 제헌은 입에 모터 달린 듯 쏟아내던 중에도 지속적으로 경호원들의 동태를 확인하고 있었으므로 경호원들이 조금 전과 달리 한번에 달려오기 시작한 걸 제일 먼저 발견했다. 이번에야말로 제헌이 쭉 기다리던 일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제헌은 자신이 좀 늦게 움직였다는 걸 이르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순간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는 그냥 스노우에게 이렇게 이죽댔다.

"그리고 왜 내 목숨만 위험할 거라고 생각해?"

제헌의 말꼬리에 급하게 속도를 올리는 자동차 엔진음이 끼어들었다. 스노우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제헌의 등 뒤, 스노우의 시야 바깥에서 달려온 차의 창문이 열리며 총부리가 그들을 겨누는 것이 스노우의 초점 안으로 들어왔다. 스노우가 제헌에게 달려든 것과 총구가 불을 뿜은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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