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프라이 키친






“왜. 이상해?”


그야말로 핑크였다. 완전 솜사탕이네. 얼마 들었냐? 찬열은 가격을 궁금해 했고 경수는 화가 났다. 이유는 몰랐다. 뾰로통해진 마음을 들킬까봐 먼 곳을 응시했다. 그래도 열은 뻗쳤다. 이게 어딜 봐서 가을이야. 더워 죽겠네. 아니 근데 쟤는 무슨 저런 현란한 머리를. 잠깐. 나 왜 짜증내지. 남자애가 무슨 핑크색, 그런 건가. 아닌데. 내가 검은색을 고수하는 건 고수하는 거고 남이 핑크색을 하든 핑크색 할아버지를 하든 나라면 저런 과감한 시도는 못할텐데, 하고 마는 정도지 비난하고 싶은 건 아닌데.


야, 개비싸. 백현은 실실 웃었다. 재수 없었다.


“경수는 별론가봐. 내 머리.”

“경수는 원래 너 맘에 안 들어해.”

“또 자기 소개 하네.”

“점심 내기 콜? 경수가 둘 중 누굴 더 성가셔하는지.”


실없는 싸움이었다. 그래도 둘 다 매번 전력으로 임했다. 경수만 빼고 다 알았다. 경수를 건드리는 건 좀 재밌었다. 뒤틀린 성미였다. 툭툭. 얻어맞아도 즐겁기만 했다. 경수는 둘을 좀 다른 방향으로 귀찮아했는데, 그건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와중에 찬열의 핸드폰이 울렸다. 헐시발오세훈이나잡으러온대. 왜? 여섯시에단톡방에서보기로했는데씹었거든. 찬열이 래퍼처럼 말했다. 플로우가 엉망이었다. 나 잠깐 전화 좀. 찬열이 긴 다리로 앞서 나갔다. 순간 둘이 됐다. 백현이 그렇게 판을 짠건지 아님 경수가 유독 그런 타이밍을 의식하고 있는건지, 둘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백현이 싸구려 쫀드기 같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경수까지 세트로 묶였다. 경수는 사양이었고 백현은 환영해 마지 않는 그 조합. 보드라운 살갗을 비볐다.


“다 쳐다보잖아.”

“그니까, 왜 쳐다보기만 해.”

“야.”

“소문 좀 내주지. 쟤네 수상하다고.”


헛소리가 과했다.


“머리는 별로인거 알았고. 그럼 난?”

“빵점.”

“너무해, 빵 먹고 싶게.”

“(경멸)”

“들이댄 세월이 있는데 쩜오는 줘.”

“마이너스로 내려간다.”

“그럼 박찬열은?”

“걔가 여기서 왜 나와. 걔도 너랑 똑같애.”

“박찬열이 나랑 같아?”

“다를 건 또 뭐야.”

“박찬열이 염색하고 와도 그렇게 얼굴 구길거야?”

“뭐?”

“박찬열이 앵무새 머리 하고 와서 에타에 앵무새남으로 박제되어도 그렇게 예민하게 나올 거냐고.”

“또 헛소리.”

“내가 봐도 이 머리 나랑 존나 잘 어울리는데. 넌 아니라며. 싫다며.”

“싫다고 한 적 없어.”

“나 너무 튀어서 약간 불안하잖아.”

“아니라니까.”

“왜 아니야. 나 섭섭하게.”


경수가 미간을 좁혔다.


백현은 치고 빠지는 데 능했다. 치기만 하면 경수가 달아날 테고 빠지기만 하면 경수가 모를 테니까. 찬열과 함께 있을 때 그러듯 그냥 건드리고 말았다. 흔들바위를 장난삼아 밀어보는 어린애처럼 굴었다. 꼬리가 길어지면 대뜸 잘라냈다. 아님 말고.


섭섭하다니. 처음 들어보는 대답이었다.


일년 하고도 반년 전, 그들은 모두 갓 스물이었다. 연고없이 각자 잘 먹고 잘 살다가 동기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였다.


오티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었다. 오티에 참여하지 않으면 대학생활이 어려워 질거라는 조언이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경수는 그냥 오라길래 갔다. 별 기대는 없었다. 좀 질린 상태기도 했다. 새내기 단톡방은 이제 막 주둥이 단 애들만 모아놨는지 쉬지않고 응애응애, 난리를 피웠다. 얼굴도 안 본 사이에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경수는 끼지 않았다. 모두가 네!해야 하는 타이밍에만 불쑥 등장했다. 인간 에프엠은 에프엠인데 좀 삐딱한 에프엠이었다.


찬열은 그때도 말이 많았다. 프사엔 자신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브이로 입을 가린 투박한 포즈였는데도 얼굴이 잘나니 있어 보였다. 게다가 이름도 박찬열. 떠들어도 나댄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런 애가 우리 잘지내 보자고 다들 뭐하냐고 오티 전에 한번 만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포석을 까니 다들 들러붙었다. 경수는 찬열이 그럴 때마다 꼭 군소 정당의 청년 정치인이 선거 유세를 나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입학 전 특수를 노려 작정한 모습이 아니라는 건 가까워진 후에야 알았다.


경수는 가방을 고쳐맸다. 대기하라며 세워둔 운동장에 흙먼지가 나부꼈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대충보니 찬열이었다. 똑같이 생겼네. 똑같이 시끄럽고. 경수의 감상은 그게 다였다. 출발이 지연됐는지 학회장이란 사람이 나와서 시간을 끌었다. 무료했다.


아, 따분해.


남이 한 말인데 꼭 제 말 같아서, 경수가 뒤돌았다. 볼캡을 눌러쓴 백현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다 말고 경수를 봤다. 백현의 입이 빠르게 벌어졌다.


너도?


경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이 그걸 계기로 이런 저런 말을 걸까봐 걱정 했는데 의외로 덧붙이는 말이 없었다. 경수만 괜히 백현의 눈치를 봤다. 어쩐지 잊히지 않는 얼굴이었다. 단박에 그 선이 뚜렷해서 의지와 상관없이 각인되기보다는, 더 자세히 기억하고 싶어서 자꾸만 곱씹게 만드는 얼굴. 쟤도 낯 가리나? 속으로만 넘겨 짚었다.


그때의 백현은 모든 것에 시큰둥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그냥 공인데 가까이서 보면 아주 작은 돌기로 빽빽하게 뒤덮여있는 공 같다고 할까. 대충 상대했다간 뒤통수 맞을 게 뻔한 관상이었다. 사람들과 섞이기 어려울 것이라 짐작했는데 웬걸. 과에서 백현과 친한 사람을 꼽으라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랐다. 웃고 떠들며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말 한번 해보지 않은 교수님들까지 포함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수는 잊지 못했다. 잠깐이지만 또렷했던 백현의 선을, 그 뾰족함을 기억했다. 지금 당장 누군가 백현에게 진지하게 과에서 친한 사람이 있냐고 물으면, 코웃음치며 없는데? 라고 말할 듯한 백현의 일면을.


*


교수는 반장한다는 사람이 없자 멀찍이 앉은 백현을 골랐다. 거기 분홍색 머리. 네가 해. 파격적인 헤어스타일 덕에 반장 자리까지 꿰찼다. 졸다가 깬 찬열이 소리없이 웃었다. 백현은 별 생각이 없었다. 오른 쪽에 앉은 경수의 표정엔 날이 서있었다. 이 상황이 그닥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월요일 1교시야. 할 수 있어?”

“나 전공수업엔 지각안해.”

“저번 학기 에프 맞았잖아.”

“지각 안 하고 결석해.”

“변백현.”

“장난, 장난. 반장인데 열심히 해야지.”

“말로만.”

“경수가 부반장해주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

“아님 미화부장? 경수 잘생겼잖아.”

“…”

“아니면, 또 뭐있더라. 그새 다 까먹었네.”


진지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한마디 더 하려는데 수업이 시작됐다. 첫날이라 간단한 오티나 하고 해산일줄 알았는데 오판이었다. 수업을 도와줄 반장 어쩌고 하며 깐깐하게 굴 때부터 느낌이 싸했다. 판서를 따라가기가 벅찼다. 다들 노트북으로 타자 치기 바쁠 때 경수는 손으로 하는 필기를 고집했다. 컴퓨터로 적은 내용은 왠지 남의 것 같고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백현은 녹음기를 켜두고 딴짓을 했고 찬열은 워드를 킨 채로 졸았다.


“월요일에 전공 수업 두 개는 죽으라는 거지.”


학식을 기다리며 찬열이 불평했다. 안녕하심꽈! 우렁찬 소리였다. 각잡힌 애들이 찬열에게 굽신거렸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어서 찬열도 대충 장단을 맞췄다. 엉 그래. 다들 밥 잘먹고.


회색 후드티를 걸친 찬열은 종종 체대생으로 오해 받았다. 새내기일때도 그랬는데 이제 캠퍼스 짬밥 1년 먹었다고 학식 기다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은지 최근 들어선 그 빈도가 더 잦아졌다. 굳이 해명할 의지도 없었다. 원래 잘생긴 얼굴엔 이런 저런 오해가 따라 붙는 법이라고, 찬열은 주장했다. 백현과 경수에겐 익숙한 논리였다.


마음이 맞아 함께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도경수. 박찬열. 변백현. 이름 순으로 늘어놓아도 빈 구멍이 많았다. (어디에나 그렇듯 박씨는 찬열 말고도 많았다. 찬열은 종종 박으로 된 이름중에 제 것이 가장 멋드러진 것 같다며 으스대곤 했다. 그럼 백현이 그쪽 방면으로 나랑 도경수 앞에서 나대면 안된다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런데도 세 명이 쪼르르 한 조가 됐다. 일 학년 첫 학기 첫 필수 교양이었다. 많은 걸 요구하는 수업은 아니었는데, 바꿔 말하면 그 정도도 못하는 애들이 수두룩 하다는 소리였다. 세 명을 포함한 조원 여섯 명 중 반이 프리 라이더였다. 일학년 땐 학고도 맞아보는 거라며 시종일관 남의 일처럼 무신경했다.

경수는 장학금을 노리는 것도 성적에 뚜렷한 욕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말엔 야마가 돌았다. 너 학고 맞는 건 상관없는데. 내 성적 부어다 만드는 거면 곤란하지. 백현은 경수가 재미있었다. 붓을 든 선비인 줄 알았더니 단도를 숨겨둔 자객이었다. 그러면서 붓을 든 선비였다. 느리게 말했고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차분하다는 단어로 사람을 빚으면 도경수일테지. 샤프를 천천히 움직였다. 몰래 훔쳐보니 교수가 헛소리를 할때마다 ‘왈왈’ 이라고 공책에 적고 있었다. 정말 재밌었다. 다른 수업은 나이롱으로 때우면서 그 수업만큼은 열심히 참여했다. 찬열은 애초에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혐오하는 부류였다.


결국 세 명이서 여섯 명 몫을 했다. 두 당 두 배의 몫을 하려니 상대적으로 자료가 부실했다. 백현의 발표빨로 겨우 카바했다. 아쉽게도 프리 라이더를 조지지는 못했다. 일 학년 이니 만큼 조원 모두의 ‘협동’을 가장 중점적으로 본다는 기준 때문이었다. 세 명의 녀석들은 각각 다른 무리에 속해있었다. 경수는 자연히 아무데도 들어가지 않았다. 혼자가 됐다. 경수가 혼자 다니는 꼴이 거슬리던 백현이 붙었다. 찬열이 보기에 백현은 인기 좋은데 능력도 좋았고 경수는 잘생겼는데 능력도 좋았다. 어쨌든 본인만큼이나 잘난 친구들이었다. 안 붙을 이유가 없었다. 멋 모르는 애들이 보기엔 백현이나 찬열이 주축이었지만 까놓고 보면 경수가 구심점이었다.


“어제 세븐일레븐에서 봤는데 분홍색 머리에 파란색 후드티 입으신…이거 너 맞지.”

“어.”

“삼거리 부대찌개 집에서 뵌 분홍색…”

“그것도.”

“염색하니까 솜사탕 같아요…우욱.”

“아마 그것도?”

“무슨 사람이 사람보고 솜사탕. 그냥 처먹겠단 소리아냐?”

“왜. 너도 한입 먹을래?”


백현이 장난스레 웃었다. 찬열은 진저리치면서도 계속 대나무숲을 탐방했다. 솜사탕은 약과였다. 핑크하면 떠오를만한 그럴듯한 수식어는 죄다 백현의 차지였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표현이야 어딘가 격양되어있기 마련이라지만 그래도 과장이 지나쳤다. 찬열이 못 읽겠다며 핸드폰을 끄자 백현이 그 다음게 제일 대박인데, 하며 눈꼬리를 휘었다. 너 이거 다 읽었어? 찬열이 감탄했다. 다시 핸드폰에 코를 박고 집중하던 찬열은 별안간 고개를 꺾으며 군대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짝. 변백현. 별이 다섯 개다, 다섯 개야. 솜사탕이라는 말 지금까지 다섯 번 나왔어.


경수는 카레 라이스를 뒤적였다. 이런 건 카레 라이스가 아니라 하이 라이스, 뭐 그런 거 아닌가. 고등학교 급식으로 나오면 다들 맛없어하는.


“경수야. 학식에 불만있어?”

“…없는데.”

“그래, 사람한테 화내는 것 보단 음식에 투정부리는 게 낫지.”

“…악! 왜 때려.”

“너 음식이잖아.”

“…”

“솜사탕이라며.”


경수는 솜사탕의 싫은 점을 마구 떠올렸다. 갖가지 색소가 들어가 몸에 안 좋을 게 분명할뿐더러 그렇게 낸 색은 가까이서 보건 멀리서 보건 짝퉁같았다. 파란색이 아니라 파란색 짝퉁. 분홍색이 아니라 분홍색 짝퉁. 맛은 또 어떤가. 한 입 크게 베어 물어도 입안에 남는 건 별로 없고 그마저도 입에 달라붙어서 금세 처치가 곤란해졌다. 먹기 불편한 점도 역시 단점이겠지. 조금만 덜렁거려도 손에 묻어서 끈적거리니까. 생김새도 맛도 별로인데다 편의성도 현저히 떨어지는 솜사탕 따위로 전락한 변백현보다 역시 경수 자신이, 배로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작점을 알 수 없이 빙빙 돌아가며 형체를 만드는 솜사탕처럼, 까닭 모를 패배감이 경수의 마음속에 부풀어 올랐다.


“…악! 두 대나 때린다고?”

“단 거 별로야. 딱 질색.”

“짠 건?”

“짠 건 괜찮아. 너무 짜지만 않으면.”

“잠깐만.”


백현이 숟가락을 들다 말고 가방에서 수첩을 하나 꺼냈다. 상단에 뚱뚱한 영어 글씨체로 BANANA라고 적혀 있는 노란색 수첩이었다. 하단엔 껍질을 반만 깐 바나나 모양의 길쭉한 캐릭터가 손을 흔들며 힘내! 라고 외치고 있었다. 정직한 디자인이었다. 내킬 때마다 뜯어 썼는지 두께가 얇았다.


“…뭐하냐?”

“오늘 알게 된 사실”

“…”

“도경수는 단것보단 짠 것. 설빙보단 죠스 떡볶이를 사줘야 함.”


글씨가 동글동글했다. 경수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솜사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최근 들어 백현은 솜사탕 따위의 흔한 무엇이 아닌, 이름도 맛도 유추가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도경수 노트를 작성한답시고 시도 때도 없이 멈춰서 펜을 꺼내는…기이한 습관도 갖추게 됐다. 처음엔 경악했다. 너 뭐해? 물으니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내가 널 잘 모르는 것 같아, 도경수로 시험치면 에이쁠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 하고 대꾸했다. 백현의 수첩을 뺏지도 그렇다고 자신의 일상을 수집하는 걸 말리지도 못한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경수야. 저 새끼 진짜 조심하라니까.”

“야, 볼거면 한 장에 5억원.”

“됐거든.”

“경수는 공짜. 추가로 적어주면 한 장에 5억원 줄게.”

“…돈은 있고?”

“박찬열 방금 세 장이나 훔쳐봤어. 도합 15억원이야.”

“내가 언제?”

“…경수가 좋아하는 투썸 원두는?”

“…블랙그라운드?”

“오억원 추가네. 박찬열 미안하다. 창창한 나이에 20억원이나 빚지게 해서.”


그동안의 백현은 첫날 본 서늘한 기운을 감추고 있는 건 모두 경수 너 때문이라는 식으로 나왔다. 경수는 스스로가 자의식 과잉처럼 느껴지고 지나친 망상같아서 생각을 피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백현은 제 주인이 경수라는 양 굴었다. 경수의 주변을 부지런히 쏘다니되 조용히 움직였다. 애쓰지 않아도 아이콘인 제 위치를 알아서 몸을 사렸다. 시시각각 기분을 확인할 수 있는 육성게임의 캐릭터를 달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경수가 기분 좋으면 나도 좋아. 경수가 기분 나쁘면 나도 나빠. 경수 옆자리는 내 거. 맘대로 등호를 붙였다. 


응답하라 1988 성보라의 명대사. 어후, 넌 이해를 하지 말고 그냥 외워. 맘에 들지 않는 등식이어도 자꾸 들으니 암기가 됐다. 경수는 주입식 교육과 꽤 죽이 잘 맞았다. 도경수 껌딱지 변백현. 어느새 경수도 은연중에 그 수식을 인정했다.


요즈음은 달랐다. 부쩍 장난이 늘었다. 주접 섞인 농담을 자주 던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보기 힘든 분홍색 머리에 온 시선이 모였다. 벌써 몇 명이 변백현을 빤히 쳐다본건지. 세다가 관뒀다. 너무 튀는 거 아니냐고 빈정댈 순 있어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양심상 안 나왔다. 사람 눈은 거기서 거기였다. 특별한 존재임을 곳곳에 광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싫었다.

“변백현 너는 무슨 친구한테 그런 장난을 쳐.”

“…”

“말을 가려서 해야지. 20억원을 어떻게 모아. 너 그거 엄연한 학교 폭력이야.”

“…”

“가끔 보면 너는 진짜, 어? 생각이 없어.”

“맞아.”

“뭐?”

“나 생각 없어. 도경수는 있고.”

“…”

“변백현도 지금은 변백현 별로래. 도경수 데리고 오면 받아주겠대. 완전 깐깐해.”


어떡할래? 올래?


“뭐냐 변백현. 오글거리게.”


찬열이 질색했다. 변백현 여자친구 사귀면 장난 아닐 듯, 하며 고개를 저었다. 경수는 웃지도 찬열의 말에 대답하지도 못했다.


“일단 머리부터 바꿀까?”


맞아. 난 네 머리가 분홍색인 게 싫어. 다들 널 보고 수군거리고 눈독 들이고 관심 가지고 그러는 게 싫어. 허락 못 해. 원래대로 돌려놓고 와. 독하기로 자자한 오징어 먹물 염색이 좋겠다. 그런데 내 이런 속마음을.


왜 변백현이 알고 있는거야?


“너 검은색 좋아하잖아.”


성큼 다가온 백현의 얼굴이 1년 전과 비슷했다. 말이 많은 백현이지만 깊은 말은 꼭 눈으로 했다. 읽히는 말이 적나라했다.


사실 줄곧 기다리고 있었어. 몸을 납작하게 엎드린 채로, 지나가던 경수 네가 나를 꾹 밟기를. 밟아도 밟은 걸 모를만큼 세게 누르기를. 그래서 나중에 알아채도, 절대로 떼어낼 수 없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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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십 분들을 위해 뭐라도 올리고 싶어서!  

예전에 끄적여둔 글에 조금 살을 붙였어요.

가볍고 귀여운 글이 (너무) 오랜만이라 읽는 분들도 가볍게 읽어주셨음 좋겠어요.

아마 상, 하 두편으로 끝나지 않을까요? ㅎㅎ

날이 점점 차지고 있는데 다들 감기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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