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고 보니 방 안은 이미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전화벨은 끊기지도 않고 끈덕지게 울려대었다. 하지만 집 안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고요했다. 외삼촌이 짜증을 내는 소리도, 누나가 몰래 달려 나가 전화를 받는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혼자서 맞는 주말 아침이었다. 허리가 뻐근하게 저려왔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운 머리를 달래며 잠시 방을 둘러보았다. 어제 아침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의자 위에 걸쳐놓은 셔츠 한 장만이 어제의 파티를 되새기게 했다. 침대에서 몸을 끌어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든,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전화기는 부엌에 한 대가 있었다. 걸려오는 전화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주로 외삼촌에게 무언가를 독촉하는 전화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내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디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다음에 전화주세요. 상대방이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가 정비소에서 일을 한다는 것 외에는, 내가 외삼촌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자면, 내가 지금 이 전화를 놓쳐서 문제가 생길 경우엔 그가 그다지 기뻐하지 않으리란 것도 알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제임스 커크를 찾고 있는데요.”

“어... 저에요. 말씀하세요.”

“아, 다행이다. 네가 잊어버린 줄 알았어.”

“...뭐를?”

“수학 과제 말이야. 지금 시간 돼?”

                                                                               

과제라고? 급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수학 시간은 화요일 오후에 있었다. 화요일이라면 체육 시간이 있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심을 먹고 오후쯤이 되면 금방 피곤해지곤 했는데, 이 날도 반쯤 졸면서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과제에 대한 이야기가 얼핏 나왔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혼자 해야 하는 과제인 줄로만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던 것이다. 교과서조차도 락커에 넣어두고 온 게 떠올랐다. 레너드도 아침 일찍 나가야 한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빌릴 방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전화 너머의 누군가에게 집 주소를 불러주었다. 어쩌면 그리 중요한 과제는 아닐 지도 몰랐다. 그가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어야 할 텐데. 그제야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모르는 사람일 리는 없었다. 전교생 수도 많지 않은 편이었던 데다가, 대부분의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같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인사 한 마디 나눠본 적 없다 해도 서로에 대해서는 알 만큼은 알았던 것이다. 목소리로 봐서는 여자애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이 과제를 하게 됐으니 얼굴이라도 확인을 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방은 좀 치워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너드가 아닌 누군가가 집에 오는 건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던 것이다. 


냉장고는 언제나처럼 텅텅 비어있었다. 컵에 차가운 물을 가득 따랐다. 뱃속이 차갑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시계는 벌써 오전 11시가 지났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직도 몸이 찌뿌둥했다. 몇 달 만에 방청소를 하느라 진이 빠진 탓이기도 했지만, 어젯밤을 떠올려보면 이 정도는 운동도 아니었다. 몇 시간씩 길바닥을 헤매느라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그 긴 시간이 비로소 체감이 됐다. 출발을 한 건 10시 경이었지만,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또, 집 안의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느라 한참을 근처에서 서성여야 했다. 일부러 집에 들어가는 척 하며 레너드를 먼저 돌려보낸 다음이라 정확히 몇 시까지 기다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그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시, 2시 혹은 그보다 늦은 시간이더라도, 꽤 늦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몰래 내 방으로 올라온 후에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곧바로 침대에서 뻗어버렸던 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게 어젯밤의 마지막 기억이기도 했다. 누나는 그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고, 거실 소파에서 크게 코를 고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어제는 그 소리조차도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방해하진 못했다.


기다리는 동안 샤워를 하고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동네에 사는 애는 아닌 모양이었다. 배가 고파서 의미 없이 냉장고를 몇 번 열었다 닫아 보기도 했다. 결국 빈 손으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만. 다행히 식탁 아래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사과 한 알을 찾았다. 사과에서는 미지근한 과즙이 나왔다. 썩 달지도 않은 맛이었지만, 당장 허기진 배를 달래줄 정도는 되었다. 그 수학 과제를 끝내고 나서는 마트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삼촌이 돈을 두는 곳을 알았다. 몇 번 돈을 조금씩 꺼내다 쓴 적도 있는데, 아직까지 장소가 바뀌지 않은 걸 보면 들키진 않은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지폐 한두 장 쯤을 빼서 쓴다고 해도 그가 화낼 일은 아니었다. 누나 말로는 엄마가 매달 외삼촌에게 적지 않은 돈을 보내주고 있다고 했다. 편지를 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누나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외삼촌이 돈이 부족하지 않게 생활한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생각이 난 김에 그 애가 오기 전에 미리 돈을 챙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식료품을 사두어야 하기도 하고, 따로 돈이 필요할 일도 있었다. 내일은 레너드와 누나와 함께 시내에 나가기로 한 날이었다. 누나가 대신 돈을 내줄 리는 없고, 또 레너드에게 도움을 받자니 지금껏 진 빚도 충분히 많았다. 안 그래도 고민해야 할 문제가 한 가지 더 있는데 돈 걱정까지 하며 잠들고 싶진 않았다. 어제 얼떨결에 친구를 한 명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신경을 쓸 만큼 중요한 약속은 아니었다. 누나는 내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고 쳐도, 적어도 레너드는 내가 따로 친하게 지내는 또래 애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 누나도 어젯밤에 던졌던 한 마디 쯤은 금방 잊어버렸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황이 예전과는 달라졌다. 누나는 레너드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이미 털어놓았고, 레너드의 마음도 그리 달라 보이진 않았다. 변하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는 내 위치를 점점 우습게 만들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일 외출의 주인공은 뻔했다. 레너드는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그의 옆자리에는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 사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데려가는 건 꽤 좋은 해답이었다. 언제까지나 모른 척 옛날의 습관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레너드는 내가 그를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여전히 나를 가까운 친구 정도로는 생각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 내 마음을 깨달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각오하지 않았던가. 레너드가 아니더라도, 연애를 관심을 갖지 않는 상급생들은 거의 없었다. 또, 두 사람이 생각보다 제법 잘 어울린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았고, 레너드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쾅쾅 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인종이 또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사과 심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현관문 앞에는 낯선 여자애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애는 무표정으로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았다. 수학 시간에 내 자리에서도 세 줄 앞에 앉는 애였다. 초등학교 때도 같은 반이었던 적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사는 동네가 달라서 거의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이름을 기억해내느라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러다가 그가 들고 있는 공책에 적혀 있는 ‘니요타 우후라’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름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니요타.’ 이름을 듣자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썩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우후라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았던 것 같았다. 서로 어색한 사이이기도 했던 데다가, 학교 애라면 나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때로는 아이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게 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거실로 안내를 한 후에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 위해 내 방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책상에는 그리 쓸 만한 물건은 없었다. 책장 사이를 뒤져서 부러진 연필 한 자루를 찾아냈다. 다행히 예전에 쓰던 공책도 한 권 있었다. 그러다 작년에 쓰던 수학 책도 발견했다. 책에는 누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누나가 딱히 돌려받고 싶어 할 것 같진 않았다. 작년 책이 큰 도움은 되진 않더라도, 적어도 빈 손으로 내려가는 곳보다는 나을 것 같아 그것도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교과서는?”

“학교에 있어.”

“오늘도 잘하면 들여보내 주시긴 할 텐데... 일단 네가 이걸로 봐.”

“.....”

“선생님이 이번 건 꼭 같이 하라고 하셨어. 읽어보기라도 해.”

“알았어.”

“그리고 이거.”

“그게 뭔데?”

“네 거잖아. 이번엔 네가 직접 써.”


우후라는 처음 보는 책을 건넸다. 스프링으로 제본이 되어 있는 책이었다. 슬쩍 안을 펼쳐 보았다. 안에는 수학 문제가 빼곡히 들어가 있었고, 심지어 몇 개는 낯선 글씨체로 해답이 적혀 있기도 했다. 표지에는 워크북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 밑에 연필로 적어 놓은 이름은 분명 내 이름이었다. 그것만큼은 내가 직접 적은 것 같이 보였다. 우후라의 말로는 학기 초부터 줄곧 수학 시간에는 매주 짝을 바꿔가며 숙제를 내줬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와 짝이 됐던 아이들은 전부 나와 함께 하느니 혼자서 두 명 몫을 하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내가 공격적이라고 생각했던 데다가, 나와 실제로 싸움이 붙었던 그 패거리들은 아직도 누군가 내게 말을 걸 때면 따가운 시선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종종 공부 이상의 것을 의미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제아무리 공부로 전교 1등을 하는 애라고 해도 굳이 그 규칙을 깨려 들진 않았다. 주말에 영화관에 데려갈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면 나도 처음부터 그 규칙을 따랐으면 좋았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의미 없는 후회였다. 나는 이미 그 규칙에서 예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네가 여기부터 하면 돼.”

“응.”

“열심히 좀 해줘. 다른 애들처럼 네 거까지 대신 해줄 생각은 없거든.”

“나는 해달라고 한 적 없어.”

“어쨌든. 하고 나서 바꿔보자. 다하면 말해.”

“알았어.”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종이 위에 글씨를 끼적였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우후라도 앞에 놓인 과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연필을 잡는 건 지루한 일이었다. 학교 공부는 한 번도 내 관심사였던 적이 없었다. 누구도 내게 좋은 성적을 받기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외삼촌은 내 성적표를 열어보지도 않았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항상 나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대부분의 동급생들은 쉬는 시간에 난리를 피울 생각이나 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레너드는 대학에 갈 준비를 한다고 벌써 분주했지만, 나는 아직 그런 고민을 하기엔 일렀다. 숙제도 가끔은 해갈 때도 있었지만, 혼자 해야 하는 숙제라면 안 해도 그만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이 끼어 있으면 마음대로 무시해버리기가 어려운 것뿐이었다. 비슷한 문장을 계속 읽고 있다 보니 머릿속으로는 자연히 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벌써 마음은 내일로 넘어가 있었다. 누군가를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어쩌면 건너편에 사는 톰에게 얘기를 하면 가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그 애는 나보다도 한 살이 어렸는데, 나와 친하진 않아도 한 때 누나를 잘 따랐던 것이다. 아니면 레너드의 친구들 중 한 명은 어떨까. 레너드의 친구들은 모두 나를 싫어했지만, 그래도 누나와 함께 외출을 나가는 거라면 거절할 상급생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책상을 두드리며 계속 고민에 빠져 있느라 내가 한숨을 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다 했어?”

“어... 거의.”

“그럼 줘봐. 확인해보고 줄게. 너도 내 거 봐.”

“알았어. 자.”


우후라는 우리 앞에 놓인 책을 바꾸었다. 그의 책에 담겨 있는 글씨는 한결 정갈했다. 대충 훑어만 보기는 했지만 내가 고칠만한 부분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종이를 뒤적이는 척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고민을 계속 했다. 레너드와 누나 사이를 훼방 놓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금 더 선택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두 사람과는 잘 알지 못하면서 나와는 안면은 있는 정도라면 딱 좋았다. 한 가지 문제는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전부 나보다는 누나나 레너드와 더 잘 아는 사이였고, 학교에서 날 조금이라도 날 좋아하는 건 누나 친구들 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나와 가장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레너드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나는 레너드를 좋아했지만, 레너드는 내게 단순히 짝사랑하는 상대 이상이었다. 어디를 가든 나는 레너드와 함께 걷는 게 가장 익숙했고, 내 모든 이야깃거리는 모두 그에게만 터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레너드가 나와 거리를 둔 채로, 다른 누군가와 같이 걸어간다는 건 상상만 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얼빠진 채로 레너드의 등만 바라보고 있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 왜 하필 레너드였을까.


“다시 줄래?”

“응?”

“너도 다 본 것 같아서.”

“아, 미안.”

“아니야. 자, 네 거.”

“이제 뭘 하면 되는데?”

“음... 3번이랑, 그... 아니야. 다음 장부터 해도 될 거 같아. 다시 줘 볼래?”

“여기.”

“네가 수학을 잘한단 말은 못 들어봤는데.”


나 말이야? 반문 하려다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그만두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칭찬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굴었지만, 한 마디라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괜히 종잇장을 소리 나게 넘겼다. 누나는 날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 취급이나 해댔고, 레너드의 앞에서도 기가 죽긴 마찬가지였다. 레너드는 누나와 비교하기는 민망할 정도로 내게 잘해주긴 했지만, 때로는 감정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는 학교에서도 누구나 다 인정할만한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를 보고 있자면 내가 썩 근사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정원 쪽으로 난 창문을 내다보면서 창에 희미하게 비친 내 얼굴을 훑어보았다. 귀엽게 생겼네. 누나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그런가. 특별히 흠잡을 곳은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옆에서 우후라가 뒤척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계속 잡념에 사로잡혀 있느라 연필은 같은 부분에 밑줄만 그어대고 있었다. 다시 눈길을 종이 위로 가져왔다. 그를 보고 있지 않은 단 몇 시간조차도 레너드에 대한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없었다. 내일 또 괜히 그의 곁에서 미적대고 있을 내 모습이 선히 그려지는 것도 같았다. 혹은 영화가 끝나자마자 급한 일이 생각났다며 먼저 자리를 떠버리는 게 그나마 나은 대안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어떤 시나리오에서도 레너드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결론은 없었다. 나는 다만 그와 멀어지지 않기를, 또 이 마음이 언젠가는 자연스레 사그라지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내게는, 그에게서 떨어져 있을 시간이 잠시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예를 들어서...


“저기, 우후라.”

“왜? 아, 그 8b는 풀지 말라고ㅡ”

“내일 시간 있어?”

“...뭐?”



*



“우후라? 사탕 하나 먹을래?”

“아니야. 괜찮아.”

“그래? 그럼 말고.”


누나는 뒷좌석으로 뻗었던 손을 치웠다. 차 안에는 정체 모를 록 음악이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의 신나는 분위기와 달리 실제로 다섯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기만 했다. 지금 마음이 편한 사람은 운전대를 잡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누나 친구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레너드와 우후라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다. 누나가 자연스레 조수석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소개를 하고 인사를 하며 몇 마디를 나누었지만, 이름을 다 익히고 나자 할 말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제의 충동적인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다. 레너드가 누나와 가까워지려 하는 게 짜증이 나서 홧김에 당장 눈앞에 있는 우후라에게 제안을 했던 건데, 정말로 가겠다고 대답을 할 줄은 물어본 나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되레 질문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니 대신 반가운 체 입 꼬리를 올려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라면 오늘 겨우 인사 한 마디를 나눈 사람 한 명과 얼굴도 모르는 세 명의 상급생 틈 사이에 껴서 가야 한다면, 시내를 가는 게 아니라 뉴욕에 간다고 해도 거절했을 텐데. 그도 보통은 아닌 게 분명했다. 명목상으로는 내 친구라고 소개하며 데려왔지만, 기껏해야 어제 같이 앉아서 수학 문제를 조금 푼 게 다인 사이였으니 나도 우후라의 옆자리가 썩 편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레너드도 오늘따라 침묵을 지킨 채로 앞만 보고 앉아 있었다.


“도착하면 사라는 주차를 하고 올라올 거고, 내가 맥코이랑 같이 표를 사러 갈게. 짐, 너는 팝콘이나 좀 사고 있든지 해. 나는 아마 누구랑 같이 나눠먹으면 될 것 같은데... 아무튼 알아서 사둬. 아, 콜라도.”

“둘이 간다고?”

“표는 맥코이가 산다고 했거든. 아, 잠깐만. 돈 줄게. 내 가방 좀 줘봐.”

“됐어. 나도 있어.”

“그래? 그럼 네가 사든지. 사라, 우리는 저 앞에서 내리면 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좀 늦게 와서 표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마크가 몇 자리 정도 남겨 주겠다고는 했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누나는 이미 정해온대로 조를 나누어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우후라와 둘이 팝콘을 사러 가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 또 한 번 괜히 오기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쯤은 누나 때문에, 반쯤은 혹하는 마음에 오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차 안에 올라타고 보니 상황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나빴다. 누나는 저번보다 훨씬 노골적이었고, 우후라까지 데려오고 보니 내 목소리는 오히려 더 작아지게 되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처져 있다 보니, 레너드 앞에서 또 어린애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부러 내 돈으로 사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정말 챙겨온 돈이 충분할 지는 확신도 없었다. 지폐를 몇 장 챙겨오기는 했지만, 외삼촌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빼내야 했기 때문에 금액은 그리 크지 않았다. 돈이 모자라면 나는 팝콘을 안 좋아해서 네 명 몫만 사왔다고 둘러대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차가 멈추어서고, 레너드는 내게서 누나 가방을 받아 누나와 함께 먼저 영화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만 나란히 걷는 모습을 뒤에서 쳐다보기는 처음이었다. 온몸이 울렁이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백미러로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누나 친구의 눈길이 느껴지지만 않았더라도, 영영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네 개만?”

“아, 나는 괜찮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 그건 내가 들고 있을게. 줘.”


팝콘을 우후라에게 넘겨주고 주문한 콜라를 마저 집어 들었다. 다행히 돈이 심하게 부족하진 않았지만, 내 몫의 팝콘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썩 기발한 변명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후라는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두 사람이 전부 들기에는 벅차서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팝콘과 콜라를 내려놓았다. 아직 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표를 사는 곳의 줄도 길어 보이지 않던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우후라와 나는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 있었다. 왁자지껄한 영화관 안에서,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공기만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런다고 해서 할 말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지만. 우후라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색한 시간이었다. 어색함을 견디는 건 학교에서 이미 수도 없이 연습했다고 생각했지만, 나 때문에 이 자리에 와 있는 누군가와 단둘이 앉아 있다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누나와 레너드가 나타날 때까지 한 번도 입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난 게 조금이라도 반갑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콜라를 한 손에 들고 자리에 앉았다. 영화관 안은 거의 꽉 차 있었다. 요즘 인기 있는 영화라더니, 학교에서 아이들끼리 이야기하던 게 허풍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와중에도 누나는 다섯 명이 연달아 앉을 수 있는 표를 구해왔다. 누나 말로는 매표소에서 일하는 사람을 알아서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화관에 들어간 순서대로 앉게 되었다. 제일 오른쪽에 누나 친구인 사라가 앉았고, 그리고 차례로 누나와 레너드가 앉았다.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우후라와 나는 서로의 눈치를 잠깐 보았지만, 결국 레너드의 왼쪽에는 내가 앉게 되었다. 레너드는 차에 타서부터 줄곧 말이 없었다. 지금껏 한 말이라고는 표를 사왔다고 알려주던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는 빤히 스크린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레너드는 결코 말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후라나 사라가 껴 있어서 어색해 한다기엔, 그는 그리 낯을 가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웃긴 광고가 나올 때마다 영화관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옆에서도 누나가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들며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곁눈질로 계속 레너드를 훔쳐보느라 스크린에 나오는 게 샴푸인지, 맥주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영화관 안의 불이 더 어두워지고, 영화사 로고가 나오고 나서야 나는 눈길을 돌렸다. 그가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신경 쓰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는 웃고 있는 누나의 표정이 겹쳐 보였다. 속이 또다시 울렁이는 것 같았다.


기대했던 것만큼 영화는 재미있었다. 전작을 보지 않아서 내용을 일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2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이 길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손에 줄곧 들고 있던 콜라를 한 모금 더 빨았다. 벌써 콜라가 바닥을 드러냈는지, 빨대에서는 공기 소리가 났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팝콘을 사지 못했던 게 아쉽긴 했지만, 콜라도 그럭저럭 시원하긴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팝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팝콘을 싫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시내까지 나오지 않으면 거의 먹어보기도 힘들 뿐더러, 이곳에서 먹는 팝콘은 유난히 달달했다. 저번에 왔을 때는 큰 통을 거의 혼자 비워버렸던 기억도 났다. 그 때는 영화가 지루했던 탓도 있었지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컵을 팔걸이에 내려놓았다. 화면에서는 막 악당이 주인공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참이었다. 그 때 오른쪽에서 무언가를 내미는 느낌이 났다. 손에 닿은 감촉에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을 포기하고 레너드를 돌아보았다. 내 손에 부딪힌 그의 팝콘 통이 보였다. 하지만 레너드의 시선은 여전히 영화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티를 내지 않고 팝콘을 받아들었다. 거의 손도 대지 않았는지, 팝콘은 처음 받았을 때처럼 꽉 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가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저번에 몇 번 내가 대신 그의 몫까지 먹었던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습관처럼 내게 건넨 모양이었다. 팝콘을 한 움큼 집어서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영화가 끝나자 출구 쪽에 사람들이 전부 줄을 지어 섰다. 영화는 언제나처럼 주인공의 승리로 끝이 났다. 주인공이 악당을 무찌르는 순간 박수를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앞에서 누나는 레너드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이 심해서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밝아보였다. 들고 있던 빈 통을 쓰레기통 안에 던져 넣었다. 누나 친구는 미리 얘기했던 것처럼 따로 약속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영화관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해가 쨍하게 떠 있었는데, 몇 시간 만에 길거리가 조금 어둑해졌다. 하늘의 색깔도 조금은 탁해졌다. 영화관 안의 스피커에 익숙해졌는지 아래층으로 내려오고 나서도 머리가 계속 웅웅대었다. 몽롱한 기분으로 앞서 가는 두 사람을 따라 걷는 동안, 누나는 근처의 햄버거 가게에 가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특별히 상의가 필요한 결론은 아니었다. 시내에 나올 때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곳에서 햄버거를 사먹고는 했던 것이다. 누나는 계속 레너드와 함께 앞서 걷고 있었다. 나는 또 자연스럽게 우후라와 둘이 남았다. 먼저 방금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화가 끊이지 않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던 탓이었다.


“내가 주문하고 올게. 그냥 일반 햄버거 네 개로 하면 되겠지?”

“샘, 내가 할게. 셋이 앉아 있어.”

“꼭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야, 그냥 그게 나을 거 같아서.”


누나가 먼저 주문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레너드가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가방을 걸쳐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레너드와 나를 번갈아 눈짓하는 걸로 봐서는, 그가 얼마나 내게 빠져 있는지 봤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나도 누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너드는 참견이 심하고, 또 때때로 다정하기는 했지만,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진 않았다. 누나의 바람대로 오늘은 그와 누나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나는 계속 내게 말을 붙이더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별 대답을 하지 않자 우후라로 대상을 바꾸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사람은 대화가 꽤 통하는 것 같았다. 누나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몸을 젖혔다. 나는 그 소리가 모두 내 주변에서 웅웅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레너드가 자리로 돌아와 영수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걸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장면이 전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지나친 장난 같기도 했다. 내 앞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누나와 레너드라니. 고작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해보지 못할 장면이지 않던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내 바람을 되뇐다고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까딱거리고 있던 발이 차가운 의자 다리에 와 닿았다. 그제야 시야가 조금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주문했던 햄버거가 나오고, 레너드는 먼저 내 앞에 하나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모두의 앞에 햄버거가 하나씩 놓이고 나서야 내 것만 포장에 스티커가 하나 붙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따로 질문을 하기도 전에 우후라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서 레너드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버렸다. 스티커를 천천히 보니 몇 가지 재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내가 알레르기가 있는 재료들일 것이다. 레너드는 나보다 내 알레르기 증상을 더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장래희망은 의사이고, 또 그는 생물 과목에 특별히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기억력이 특출한 탓이기도 했다. 그는 때로는 사소한 것들을 놀랄 정도로 잘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레너드와 함께 외출을 나올 때면, 밤새 팔을 긁으며 잠을 청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곳에 올 때도 그가 거의 주문을 도맡아 했기는 마찬가지였다.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영화관에서 팝콘을 다 비웠는데도 아직 배가 고팠다. 언제나 이곳의 햄버거는 맛있었다. 정말 ‘일반 햄버거’라는 게 무슨 맛일지는 영영 알 수 없겠지만, 몇 가지 재료를 덜어낸 것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레너드는 누나의 말을 듣고는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가게 안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영화관에서 봤던 것보다는 훨씬 좋아 보였다. 아까는 잠시 착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평소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가 막 내뱉은 농담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이따 살 게 있어서 쇼핑몰 쪽에 가보려고. 레니, 너도 갈래?”

“그래? 나는ㅡ”

“짐, 너는 우후라를 바래다 줘야 하잖아. 그렇지?”

“응?”

“내 말은, 지금은 차도 없고 시간도 늦어지고 있잖아.”

“응? 아, 아, 그렇지.”


누나는 테이블 밑으로 내 발을 툭 건드렸다. 그제야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는 따로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치로 봐서는 누나와 함께 가는데 동의한 것 같았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바깥은 어느새 붉은 색이 건물을 물들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먹다 남은 감자튀김 몇 개나, 햄버거 포장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괜히 콜라를 한 모금 더 빨았다. 얼음이 녹은 물과 섞인 밍밍한 맛이 났다. 처음 차를 타고 올 때처럼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던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우후라는 오히려 나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다가 문득 감자튀김을 하나 입에 집어넣고 세 사람을 돌아 볼 때면, 그 자리에서 정말로 즐겁지 않은 건 나밖에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좋은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서 맛있는 햄버거를 먹는 건 매 주말마다 즐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이 어떤 날로 기억되게 될까, 하는 걱정을 하느라 마음이 내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욕심조차 내지 않았던 것이, 급박한 상황이 되자 오히려 더 절박하게 느껴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일주일 전에는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걸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야 했겠지만, 그렇다고 누나가 있는 자리에 내가 서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본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난 잠시 화장실 좀 갔다 갈게. 먼저 앞에 나가 있어.”

“그래. 다녀와.”

“짐, 잠시만.”


가게 안의 자리가 슬슬 비기 시작할 때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누나는 내일이 월요일이 아니냐며 핑계를 대었다. 나는 그 핑계에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가 학교에 가는 날을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슬슬 레너드와 둘이 자리를 만들려고 하는 게 뻔히 보였다. 화장실에 가겠다며 먼저 일어난 누나는 나를 작게 부르더니 슬쩍 눈짓을 했다. 따라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 사이 레너드와 우후라는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갔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나.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누나의 뒤를 따랐다. 누나는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화장실 쪽으로 걸어가다가, 두 사람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벽으로 붙어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불안한 마음에 누나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레너드에 대한 말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 걸까. 아니면 레너드에게 고백을 할 거라고 미리 말을 하려고? 머릿속에서는 이미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장면까지 펼쳐지고 있었다. 몸서리가 처지는 상상이었다. 누나가 연애를 하는 건 많이 봤지만, 그 상대는 항상 내가 모르는 어느 상급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운이 좋게도, 한 번도 레너드가 누군가를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네 여자 친구 괜찮던데.”

“뭐?”

“뭘 아무것도 모르는 척이야.”

“그런 거 아니야.”

“퍽이나.”

“아니, 정말... 별로 친하지도 않단 말이야.”

“그래. 그렇겠지.”


맥이 탁 풀렸다. 여자 친구라니. 제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 해도 오늘 우후라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긴장감도 없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가 헛다리를 짚었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억울한 마음에 반박을 해봐도 누나는 들을 생각도 없는 것 같이 보였다. 내가 부끄러운 마음에 발끈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계속 나와 우후라를 붙여두려고 하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줄은 몰랐다. 지금 무슨 말을 하더라도 누나는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할 게 뻔했다. 굳이 더 말을 덧붙이진 않기로 했다. 목소리를 높여 봤자 누나는 나를 비웃기나 할 테고, 당분간은 멋대로 착각하게 둬도 해로울 것도 없었다. 누나는 가끔씩 엉뚱한 말들을 하곤 했는데, 며칠만 지나면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잊어버린 듯이 굴었던 것이다. 내가 더 이상 누나의 관심사가 되지 않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었다. 단지 누나가 우리 넷을 완벽한 더블데이트쯤으로 여기고 있었을 게 씁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두 명씩 짝을 지으면 되니, 얼마나 깔끔하고 간편한 관계라고 생각했을까.


“아무튼 좋은 시간 돼.”

“아니라고 말했잖아.”

“아까 맥코이 봤어? 귀엽지 않아?”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있는 거야?”

“음... 아니. 그럼 나가봐. 우후라 데리고 먼저 가도 돼.”

“...너는 둘이 뭐할 건데?”

“뭐야. 꼬맹아, 네가 신경 쓸 건 아니거든.”


진짜. 날선 눈빛을 보내봤지만, 누나는 곧바로 손을 들어서 작별 인사를 하고는 화장실로 뒤돌아 들어가 버렸다.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났다. 누나는 내 나이보다 어렸을 때도 나를 똑같이 취급했다. 단순히 나이만 차이나는 게 아니더라도, 누나는 동네에서도 손꼽히게 어른스러운 애들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누나는 또래 애들은 대부분 유치하다고 생각했고, 대체로 상급생들과 어울려 다녔다. 누나보다 나이도 어렸던 내가 어떻게 보였을 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누나와의 기억들은 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엄마에게 보여줘야 한다며 찰흙을 만지고 있을 때면, 누나는 엄마는 오지 않는다고 소리를 치며 그걸 빼앗아 뭉개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 때는 누나가 괜히 심통이 나서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결국 누나가 맞았던 셈이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누나는 거의 동급생들과 놀기는 해도, 가끔씩 대학생들과도 어울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진실 여부는 몰라도 꽤 그럴 듯한 소문이었다. 누나는 레너드와는 다른 의미로, 꼭 어른 같은 사람이었다. 외삼촌에게 따로 받는 게 없기는 누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누나는 굳이 그에게 허리를 숙일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학교생활에도 충실하지 않고, 집에 며칠씩 들어오지 않아도, 한 번도 누나를 걱정해본 적은 없었다. 누나는 이미 세상을 사는 방법은 혼자서 다 터득한 것 같이 보였던 것이다. 사실 가끔씩은 내가 상대적으로 너무 어리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누나 못지않게 내가 사는 이 집을, 이 동네를 싫어했지만, 내게는 이곳을 박차고 나갈 무모함이 없었다. 누나가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건 그래서 더 내 신경을 긁어 놓았다.


“본즈, 난 먼저 갈게.”

“길은 알겠어?”

“대충 알아. 그리고 우후라도 걸어가 본 적 있대.”

“그래? 만나서 반가웠어. 잘 들어가.”

“나도. 잘 가, 맥코이.”


“저기, 짐. 혹시 샘이...”

“응?”

“아니야. 내일 말할게. 잘 들어가.”

“왜, 뭔데.”

“진짜 별 거 아니야. 가봐. 늦었다.”

“알았어. 잘 가.”

“응, 내일 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누나의 이름을 듣자 순간적으로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레너드는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한 번 끌어당기더니 손을 흔들었다. 애써 웃는 척 하며 마주 인사를 했다. 뭐가 그리 설레고 떨리는 걸까. 레너드의 얼굴은 꼭 그를 대할 때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괜히 발걸음을 떼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 등 뒤에서 누나가 레너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여전히 시선은 돌리지 않았다. 이미 최악인 상황을 더 나쁘게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레너드의 흔적은 이제 귀에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우후라는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나를 슬쩍 보더니 뒤를 돌아보았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마 오늘 수십 번째로, 굳이 외출에 따라 나오기로 했던 게 후회가 되었다. 그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 길은 항상 레너드와 함께 시내에 놀러 나온 후에 이 먼 곳을 괜히 왔다며 투덜대면서 걸어가던 길이었다. 그의 그 투덜대는 목소리가 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텅 빈 기분이었다. 그와 함께 보냈던 내 평생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와의 관계가 다시 예전 같을 순 있을까.


“내 집은 학교에서 안 멀어.”

“응.”

“지금 근처에 부모님이 계시다고 해서 같이 갈 건데, 너도 거기까지 타고 갈래?”

“아... 괜찮아. 고마워.”

“그래, 그럼. 그리고 혹시 너 오늘 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던 거...”

“네가, 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샘이 뭐라고 말했는진 몰라도 괜히 놀리려고 그러는 거야.”

“다행이네. 뭐라고 해야 하나 싶었는데.”

“아, 미안해. 나는 그냥 따로ㅡ”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돼. 네가 정말 모르는 거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나 남자친구 있거든.”

“응?”

“넌 정말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도 없구나.”


이미 우후라는 잘 알려진 남자친구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벌써 1년이나 만난. 누나가 멋대로 착각을 해댄 것도 이해가 가긴 했다. 학년이 다른 아이들의 소문은 잘 전해지지도 않을 뿐더러, 누나는 본인이 관심이 있는 소문이 아니면 오히려 나보다도 더 둔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우후라는 오늘 즐거웠다고 인사를 건넸다. 잘 가라고 인사를 하고 나니 묘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루 종일 직접적으로 눈을 몇 번 마주친 적도 없었지만, 동급생들 중에서 따로 휴일에 만나 놀러나간 건 우후라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우후라에게 인사를 하고 나니 길에는 오롯이 나 혼자만이 남았다. 그제야 내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실감이 났다. 누나야 친동생인 나보다도 친구들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레너드도 몇 년씩이나 함께 해온 친한 친구들이 꽤 많았다. 우후라에게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도 있었고, 또 아마 학교에 가면 어디서나 떳떳하게 소개할 수 있는 친구들도 많이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오늘 만난 그 세 사람이 전부였다. 고작 어제 처음 만난 우후라를 그 안에 끼워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기준을 낮춰 보아도, 단 한 사람도 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나는 항상 이 동네에 싫증이 나 있었다. 외삼촌에게도 화가 났고, 그를 싫어하면서도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고, 학교에서 늘 무언가를 수군거리는 아이들에게도 전부 화가 났다. 오히려 나보다도 더 무모하게 구는 누나에겐 친구들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나를 더 꺼렸다. 길을 가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났더니,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길거리에는 나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처음으로 외로움이 느껴졌다. 뼛속 깊이 파고들 정도로. 나는 레너드를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내 세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왜 그를 붙잡지 못했을까. 뒤늦은 후회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게는 그럴 만한 힘도 남아있질 않았다.



스타트렉 / 본즈커크 / 크리스 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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