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한 번 밖으로 나가자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걸음이 바빠졌다. 이 아까운 시간을 일 분 일 초라도 더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다. 계단을 바삐 내려가며 후시구로는 문득 자신이 요 근래 그 어느 때보다도 산뜻한 기분임을 깨달았다. 노트북과 전공서적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음에도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신칸센을 탈 작정이었다. 하지만 곧 최근 들어 오랫동안 버스를 타본 적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차피 목적지는 먼 곳이 아니어도 좋았으므로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렇다면 꼭 도쿄역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휴대폰으로 가장 가까운 버스 센터를 검색했다. 중요한 건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차편의 여부였다.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안에 출발하는 버스의 목록을 죽 훑어보다 후시구로는 문득 스크롤을 내리는 손을 멈췄다. 연고라곤 없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친숙한 지명이 보여서였다.

그 녀석들에게서 잠시나마 해방되고자 집을 나섰는데, 어째서 그곳에 눈이 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일단 눈에 들어오자 그리로 가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후시구로는 스스로도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하며 창가 바로 옆의 좌석을 예약했다. 신주쿠에서 센다이로 가는 고속버스였다.

 

지정된 좌석에 앉자마자 후시구로는 휴대폰을 껐다. 돌아갈 때까지는 정말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켜지 않을 작정이었다. 노트북이 있으니까 웬만한 건 그쪽을 쓰면 된다. 좌우간 이번 주말만은 오롯하게 혼자 지내고 싶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편의점에서 급하게 산 두유가 아직 차가웠다. 식욕은 없었지만, 일어난 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버스에서 섭취해도 무난할 법한 음료를 골라 온 것이다. 미지근해진 것을 마시고 싶진 않아서 차가 출발하기 전 빨대를 꽂았다. 한 모금 넘기자, 직전까지 식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게 거짓말처럼 달고 부드럽고 맛이 있었다.

후시구로는 단숨에 두유를 비우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다소 찌뿌드드한 하늘 아래로 주말을 맞이해 분주한 도심의 정경이 보였다. 그가 도쿄를 떠나는 데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펼쳐진 그 화려한 삭막함이, 어째선지 되레 조금 위안이 되었다.

 

고속도로로 들어서기도 전에, 후시구로는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일어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고, 평소 같으면 한창 활동할 시간대였는데도 놀랄 만큼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중간에 버스가 두 차례 휴게소에 들어섰을 때와, 선행 하차지에 도착했을 때에만 잠깐 잠이 깼다. 귀중한 휴식 시간에 장거리 이동으로 뻐근해진 몸을 풀거나 허기를 달랠 법도 했는데, 버스에 탄 직후부터 후시구로를 사로잡은 수마는 기이할 정도로 그를 붙잡은 채 놓아 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리고 또 올라타며 차내가 적이 어수선해져도, 후시구로는 몇 번 눈만 끔벅이다가 수면제 기운에 취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도로 잠들었다.

마침내 외부의 자극 없이도 스스로 눈을 떴을 때에는 창밖이 진즉 어두워진 뒤였다. 겨울 해는 짧았고, 머지않은 도심에서 비치는 광원과 규칙적으로 스치는 가로등의 불빛만이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후시구로는 조용히 눈꺼풀을 여닫으며 빠르게 지나가는 표지판을 읽었다. 버스가 나토리 시의 경계를 지나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종착지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근 여섯 시간 반의 이동 끝에 드디어, 센다이였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완전히 저녁이었다. 차 안의 온기에 익숙해진 몸이 바깥 공기와 접촉하자 진저리가 쳐졌다. 아무리 바다가 가깝다 한들 도쿄보다 훨씬 북쪽인 탓인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찬바람이 뺨을 때리는 듯했다. 직전까지만 해도 이상하리만큼 온몸을 짓누르던 잠기운이 가시며 비로소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온종일 두유 한 팩만 들어간 위장이 허기를 호소했으나, 후시구로는 식사보다도 숙소를 먼저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정에 없던 외출에,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충동적으로 정한 목적지. 당연히 잘 곳을 염두에 두었을 리 없었다. 비즈니스 호텔 같은 곳이 없진 않겠지만, 당장 오늘 밤 묵을 곳을 찾으려면 얼마나 발품을 팔아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비상금이 있으니 역 근방의 그럴듯한 호텔에 갈 수도 있긴 할 터이나…… 하룻밤의 외출에 그렇게까지 지출을 늘리는 것도 내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후시구로는 코트 주머니 안쪽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오늘 온종일 침묵을 지킴으로써 후시구로의 숙면에 기여한 휴대폰에 후시구로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

잘 곳을 찾으려면 우선은 휴대폰을 켜는 게 급선무다. 허나 지금 휴대폰을 켰다간 얼마나 많은 전화와 메시지가 폭탄처럼 날아들지 후시구로는 가늠할 수도 없었다.

쌍둥이가 자는 틈을 타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메모만 남기고 냉큼 버스에 몸을 실었으니, 스쿠나는 진작에 눈이 뒤집혀 저를 찾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이타도리라고 태평히 있겠는가. 그 녀석을 걱정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유일한 연락 수단을 꺼 놓고 걱정하지 않길 바라는 건 과한 이기심일 테다. 오늘도 야간 근무라고 했는데, 저 때문에 일 나가는 데 지장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집을 나왔을 때 전부 뒤로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금 슬금슬금 목덜미를 옥죄기 시작했다. 후시구로는 꺼진 휴대폰을 꼭 쥔 채 한동안 번민했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약 삼백오십 킬로미터의 물리적 거리를 사이에 둔 채로 이제 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같은 자리를 스무 번쯤 맴돈 끝에, 결국 후시구로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지금에 와서는 도로 돌아가는 버스를 잡아탈 수도 없었다. 그야 심야 버스편을 찾으면 나오긴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는 버스에 엉덩이를 붙이고 싶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애당초 그토록 싱겁게 돌아갈 거라면 교통비를 들여가며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집을 나오지 않는 게 나았다. 돌이켜 보면 온종일 한 거라곤 아직 버스를 탄 것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돌아갈 수 없었다.

결심을 굳히고, 후시구로는 우선 잘 곳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휴대폰을 켜는 대신 노트북으로 숙소를 검색해 예약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못 가 그러려면 일단 전원을 충전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노트북 전원을 충전할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면, 결국 휴대폰을 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찌 됐건 한 번은 켜는 걸 피할 수 없나. 혀를 찬 후시구로는 에잇, 하고 휴대폰의 전원을 눌렀다. 일단 행동을 개시하고 나자 근원을 알 수 없는 배짱이 후시구로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쌓인 메시지는 모른 척 내버려 두고, 전화가 오면 안 받으면 되지. 지금까지도 그랬는데 몇 시간 더 그렇게 한다고 별일이야 생길까. 기껏해야 내일이면 돌아갈 텐데.

휴대폰의 액정이 환해졌고, 곧 밀린 부재중 전화의 기록이 줄줄이 뜨기 시작했다. 후시구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화면을 휙휙 넘겼다. 그렇게 하면 직시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메시지의 대부분을 거의 읽지 않은 채로 넘길 수 있었으니까.

부재중 전화가 두 자릿수가 아닌 세 자릿수인 건 예상 밖이었고, 쌓인 메시지 중 ‘실종 신고’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을 때는 심장이 철렁하기도 하였으나…… 후시구로는 끝내 초연함을 잃지 않는 데 성공했다. 어차피 받지 않을 전화라면 몇 번이 걸려 오든 수는 중요하지 않을 터. 실종 신고가 다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경찰이라면 냄새만 맡아도 질색하는 스쿠나가 설마하니 그쪽에 도움을 청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킨 뒤, 후시구로는 재빨리 숙소 검색 앱을 켰다.

하기는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당장 오늘 아침의 저만 해도 자신이 애먼 타지에서 밤바람을 맞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가 가까운 비즈니스 호텔의 1인실 – 다행스럽게도 하나 남은 금연 룸을 잡을 수 있었다 – 을 예약한 후시구로는, 근방의 지도를 머릿속에 넣어둔 뒤 미련 없이 휴대폰을 도로 껐다. 유일한 연락 수단이 다시 침묵 상태에 놓이자, 그것만으로도 놀랄 만큼 마음이 편해졌다.

가장 큰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다음엔 역사 근처에서 적당히 끼니를 때우고, 푹 잔 뒤 내일 어디라도 들렀다가 돌아가면 될 것이다. 계획이랄 것도 없는 설렁설렁한 일정을 머릿속으로 짚어 보며, 후시구로는 몸을 돌려 역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쌀쌀했던 밤공기가 언제부턴가 기분 좋게 느껴지고 있었다.

 

역 근방의 조그만 라멘집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 후시구로는 사소한 고민에 빠졌다. 낮에 버스를 타고서 그렇게 잤는데 또다시 잠들 수 있을까? 밤새 뒤척이느니 드럭스토어에서 적당한 수면유도제라도 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이 결코 공연한 걱정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후시구로는 고민한 게 무색하게 침대에 눕자마자 노곤한 졸음기를 느꼈다. 평소에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십 분쯤은 지나야 잠에 들었고, 그나마도 낮잠을 오래 자면 얕은 잠에서 헤매곤 했는데, 낮잠을 평균적인 수면 시간만큼 자 놓고서도 이토록 잠이 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나. 그동안 모자랐던 잠을 몰아 자는 건지도 모르지. 버스를 오래 타는 것 자체가 피곤하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후시구로는 인상적인 것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방안을 멍하니 응시했다. 고요한 가운데 창밖 조명의 빛만이 어두운 방안에 말없이 가로눕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후시구로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 창에 블라인드를 치는 걸 깜빡했구나. 하지만 몸을 일으켜 블라인드를 내리기에는 이미 전신이 침대에 잠겨든 듯, 의식이 점차 가물거리고 있었다.

모르겠다, 어차피 알람도 안 울릴 텐데 방이 환해지면 잠이라도 깨겠지……. 그게 후시구로가 멀쩡한 의식으로 떠올릴 수 있었던 마지막 문장이었다.

 


 

이튿날 아침, 후시구로는 놀랍도록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잠들기 전에 예상했던 대로 방안은 햇빛이 들어 환한 상태였다. 눈꺼풀 안쪽을 붉게 물들이는 태양광에 후시구로는 어젯밤과는 달리 가뿐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내렸다. 방안이 적당히 어슴푸레해졌고, 크림색 벽에 덩그러니 걸린 벽시계는 체크아웃까지 아직 서너 시간 가량이 남아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빨리 일어나지 않아도 좋은 아침. 방해할 사람도 없는 만큼 이대로 조금 더 눈을 붙여도 나쁠 건 없을 터였다. 하지만 후시구로는 이 이상 누워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는 오늘 돌아가기 전에 서둘러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센다이 하면 3대 비경으로 유명한 마츠시마 해안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후시구로가 보고 싶었던 건 그처럼 사람이 몰리는 관광지가 아니었다.

아침은 대강 컵라면으로 때우고 – 평소 같으면 질색하는 행위지만, 오늘은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 체크아웃을 마친 뒤 후시구로는 곧장 센다이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제외해도 일곱 개 노선이 지나가는 역이라 역사에서 잠시 헤맸다. 한참 이리저리 돌아다닌 끝에 겨우 센세키선의 승강장을 찾았다. 승강장이 다른 JR 계열 철도처럼 지상에 있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에 후시구로는 약간 배신감을 느꼈다.

이십 분쯤 기다려, 후시구로는 이시노마키로 향하는 열차를 탔다. 일요일 오전인 탓인지 열차는 그렇게 붐비지 않았다. 센다이 근처의 역은 대부분 도심이거나 주택이 밀집된 지역이라 더욱 그랬다. 누가 봐도 관광객인 듯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타지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한 무리의 관광객이 마츠시마에 내린 뒤로 차내는 더욱 조용해졌다. 열차가 내는 규칙적인 소음만이 귀를 울렸다. 후시구로는 줄곧 창밖만 바라보았다. 시가지의 모습은 이제 뜸해졌고, 역무원 한둘이 간신히 보이는 역이나 무인 간이역이 점점 늘었다. 때로는 회백색 콘크리트로 지어진 방조제가 창밖 풍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열차가 바다 바로 옆을 달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대지진이 아니었다면 바다가 바로 보였을까. 호젓한 규모에 비해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듯 깔끔하기 그지없는 역사를 또 하나 지나치며 후시구로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이타도리가 이 근방을 달리는 철도는 대부분 쓰나미의 피해를 입었다고 했었다. 그쪽은 완전히 직격타였으니까 말야, 하고 녀석이 담담하게 말했던 게 떠올랐다.

“어른이 되면 뭘 해야 할지 아마 그때 알았던 것 같아.”

왜 소방관이 되려 하냐고 물었을 때, 이타도리가 해준 얘기였다.

“대피소에서 지내는 동안 구조대원 아저씨랑 누나들을 엄청 봤으니까. 따라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맨날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 당연한 소릴, 이라고 후시구로는 대꾸했었다 – . 나도 저 사람들처럼 큰일이 났을 때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어. 그땐 대피소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으니까, 나랑 다르게 대피소 밖을 돌아다니던 구조대원들이 부러웠던 것도 있었지만 말야.”

그땐 밖이 어떤 상황인지 잘 몰랐으니까, 라고 이타도리는 말했다. 거기서만 지내는 게 답답해서 줄곧 나가고 싶었다고. 할아버지가 계속 라디오로 뉴스를 듣고는 있었으나 상황이 어떤지 저희들에겐 잘 말해주지 않았다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스쿠나는 밤중에 몰래 나갔다 오곤 했는데, 그 뒤를 따라가는 건 내키지 않아서 꾹 참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는, 하고 이타도리는 덧붙였다.

“어차피 나중이 되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우리한테 입 다물고 있었던 것 같아. 어떻게 보면 현명했지. 물이 덜 빠졌을 때, 스쿠나 녀석이 몰래 나갔다 돌아오더니 물속에 엎어진 시체가 둥둥 떠 있는 걸 봤다고 한 적이 있거든. 난 안 믿었었지만 그게 사실이란 걸 알았다고 해도 딱히 좋을 건 없었을 거 아냐.”

둘이서 즐겨 찾곤 했던 고등학교 뒤쪽의 후미진 산책로에서, 후시구로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이타도리를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이타도리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쳐다볼 거 없어, 민망하잖아. 사실 그런 일이 없었어도 난 소방관이 되고 싶어했을 것 같아. 아무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건 좋은 일이잖아.”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던 것이다.

“뭐, 똑같은 일을 겪어놓고도 더 망나니가 된 녀석도 있고 말이야.”

 

종착역인 이시노마키역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거기서 후시구로는 이시노마키선으로 갈아타 두 정거장을 더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와타노하渡波역이었다. ‘와타나미’라고 읽는 게 아니었구나, 라고 후시구로는 열차에서 내리며 생각했다.

잘 아는 곳은 아니었다. 물론 전에 와본 적도 없었다. 단지 해수욕장이 가깝다기에 해안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내린 것뿐이다.

조그마한 역사를 나서자마자 공기에서 바다 냄새가 났다. 하아,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후시구로는 잠시 갈 곳을 생각했다. 그러나 정해진 목적지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 그만이다.

 

표지판은 그저 참고로만 삼아 걸음을 옮겼다. 마침 ‘만고쿠우라万石浦 호’와 ‘만고쿠万石다리’라는 지명이 나란히 보이기에 우선은 그곳에 가 보기로 했다. 분명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도시인데 웬 호수일까, 조금 의아하게 여기면서.

만고쿠다리는 역에서 일 킬로미터도 가지 않아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이백 미터쯤 될까 싶은 긴 다리가 좁은 물길을 가로질러 이편과 건너편의 육지를 연결하고 있었다. 옆에 보이는 건 만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쪽이 호수라고 했다. 바닷물이 고도가 낮은 곳 사이에 갇힌 모양이다.

호수도 충분히 넓기는 했지만 그것을 보러 여기 온 건 아니었으므로, 후시구로는 해안가를 따라 호수와 반대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어야 해변이 나올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걸었다. 왼편에는 바닷가를 끼고, 오른편에는 스산한 풍경을 두른 채.

어선이 몇 척 떠 있기는 해도 전반적으로 사람이 많지 않은 동네였다. 아직도 곳곳에 재해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둣가를 따라 집으로 쓰이는지 창고로 쓰이는지 모를 건물 몇 채가 서 있긴 했으나, 그보다는 해일에 밀려 쓸려간 이후 다시 세우지 않은 게 분명한 집터가 더 흔히 보였다. 쓸쓸한 잔해만 굴러다니는 터 곳곳에는 민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이 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걷는데 건물이 있었다는 흔적만 남은 곳을 어찌나 많이 봤는지, 후시구로는 해안의 풍경 대신 사람의 손으로 세운 게 분명한 방조제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차라리 안도했다. 제아무리 콘크리트뿐인 방조제라 하더라도 기울어지고 무너진 건물들에 비하면 훨씬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조금 더 걸어 간간이 공사 차량이 지나다니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후시구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방조제 위로 넘어가는 길을 발견했다. 이 역 가까이에 있다는 해수욕장은 아마 저 너머일 것이었다.

그리고 후시구로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얼마나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을까.

와타노하역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하늘을 엷게 덮고 있던 구름이 걷혀, 바다는 깜짝 놀랄 만큼 새파란 빛깔로 일렁이고 있었다. 바다뿐만이 아니라 조개껍데기와 거친 모래가 섞인 흰빛의 모래사장이 햇빛을 유감없이 반사하는 덕분에,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하염없이 해변을 거닐다 발견한 주차장에 자판기가 있어, 후시구로는 따뜻한 녹차를 샀다. 병을 코트 주머니에 넣자 좋은 손난로가 되었다. 아까부터 터틀넥 스웨터의 옷깃을 가능한 끌어당겨 목 아래를 빈틈없이 덮고 있었지만, 한참 바람을 쐰 탓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라는 걸 후시구로는 알았다. 그렇지만 별다른 구실 없이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성큼 발걸음을 돌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녀석들, 지금쯤 날 엄청 기다리고 있겠지.’

을씨년스런 잔해 사이를 걸어, 인적 드문 바닷가를 정처 없이 돌아다닌 탓일까. 후시구로는 불현듯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다.

아니 정확히는, 매일 부대끼며 사는 쌍둥이들의 소란스러움이 그리웠다.

이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녀석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이타도리는 오늘 쉬는 날일 테고, 스쿠나는 어쩌면 만사 다 팽개치고 날 찾으러 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고……. 후자의 가능성을 떠올리자 어깻죽지에 비단 추위 때문만은 아닌 소름이 살짝 돋긴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으면 아무리 적적한 길을 걸어도 외로운 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후시구로는 갑자기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시끄럽고 피곤하긴 해도 어쨌든 쌍둥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이 제 집이다. 설령 집이 무너지거나 쓸려가거나 영영 타지에 자리잡게 되더라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곳이 돌아가야 할 곳인 것이다.

그 점을 상기하자, 후시구로는 비로소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집으로 돌아갈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녹차가 들어 있지 않은 쪽 주머니에는 아직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휴대폰이 있었다. 여행 중 처음으로, 후시구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이쯤에서 적당히 근황 보고를 할까.”

전원을 켜자마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후시구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메시지 몇 개를 훑어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단은 답장을 미뤄 놓았다. 지금이 어디고 언제 돌아갈 예정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가고 있다는 얘기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걱정을 끼친 것에 대해서는 집에 돌아가서 제대로 사과해야지.

그보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 후시구로는 티켓 예매 앱을 켰다. 돌아갈 땐 버스가 아니라 신칸센을 탈 작정이었다. 그편이 훨씬 빨리 도착할 테니까.

여기서 역으로 걸어가는 데 삼십 분쯤 걸리고, 거기서 센다이에 도착할 때쯤이면 두 시간은 지날 테니까…… 센다이역에서 늦은 점심을 먹을 시간도 감안하면……. 언제 돌아가기를 주저했냐는 듯, 후시구로의 머릿속 타임라인이 바쁘게 돌아갔다. 시간을 촉박하게 잡기보단 차라리 좀 넉넉한 시간대로 예매하는 게 나을까? 좌석도 이쪽이 더 많으니까, 가능한 창가 자리로 잡아서…….

꼬리에 꼬리를 문 검색 끝에, 결국 후시구로는 신칸센 예매는 물론이고 점심을 해결할 만한 적당하고 맛있는 가게를 물색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완벽하게 세워진 계획은 언제나 그를 뿌듯하게 했다. 흡족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끄려다가, 후시구로는 곧 더 이상 휴대폰을 끌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전화를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휴대폰을 끄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쌓여 있던 전화가 한 통도 오지 않은 게 조금 기묘하게 느껴졌다. 그새 전화하기에 지쳐 버렸나? 어차피 안 받을 걸 아니까 그만둔 건가……. 새삼스런 죄책감을 느끼며 후시구로는 부재중 전화 기록을 살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이쪽에서 전화를 해 볼까 망설이는데―.

―후시구로!!

라고, 등 뒤에서 느닷없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

막 키패드를 누르다 말고, 후시구로는 아무래도 그게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등 뒤에서…….

후시구로!!!

목이 터져라 외치며 달려오고 있는 이타도리 유지를 발견했다.

“……!?!??”

당황한 후시구로가 그대로 휴대폰을 떨어뜨리는데, 저 뒤편 주차장에 익숙한 검정 승용차가 세워진 게 보였다. 이윽고 그 안에서 잔뜩 열받은 기색의 스쿠나가 나와 이타도리를 향해 뭐라고 외치더니, 포기한 듯 뒤따라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저 녀석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도망쳐야 하나? 찰나의 순간, 수십 가지의 의문이 후시구로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 어떤 의문에도 답을 찾을 수는 없었고, 이렇다 할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저 쌍둥이들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이건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피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경황없이 서 있는 후시구로 메구미에게 먼저 도달한 건 이타도리 유지였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끝에 와락 끌어안는 바람에 후시구로는 하마터면 백사장 위로 쓰러질 뻔했다. 그 직후 스쿠나가 뛰어와 이타도리를 거칠게 밀어내고 저를 끌어당겼다. 후시구로 메구미, 라고 반은 성난 듯 반은 안도한 듯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후시구로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이타도리가 즉각 스쿠나에게 반격하는 꼴만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지금까지 적어도 마흔 번은 반복했지만, 아무래도 앞으로 이백 번은 더 되풀이하게 될 것만 같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후시구로가 대꾸했다.

“무슨 나쁜 생각을 하고 그리로 간 게 아니라니까. 난 정말로 마침 거기 가는 차편이 있길래…….”

“‘마침’? 마침 차가 있어서 도쿄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바다를 사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까지 와서 봐야 했다고?”

스쿠나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면서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운전을 하는지, 차선을 바꿀 때마다 몸이 반대쪽으로 홱홱 쏠렸다. 이러다 정초부터 경찰차에 쫓기는 경험도 해보겠군.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후시구로는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었다.

“이젠 됐어. 후시구로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 그래도…… 전화 정도는 해 주면 좋았잖아. 아니면 메시지 한 통이라도. 그것도 무리일 만큼 우리가 꼴도 보기 싫었어?”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이타도리가 풀 죽은 강아지처럼 중얼거렸다. 스쿠나의 추궁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이타도리의 말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에 후시구로는 한숨을 쉬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평상시의 스쿠나 같으면, 이타도리를 조수석에 앉힐지언정 결코 제 옆에 앉게 두지 않았을 텐데…… 웬일인지 이번만은 자신이 이타도리와 나란히 앉는 걸 보고도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그가 아량을 베푸는 속내를 짐작하고도 남는 후시구로로서는 그저 입맛이 썼다. 자신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 이타도리를 옆에 둔 게 분명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 너희도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해보지 그래.”

약 이백오십 통 가량이 찍힌 부재중 전화 기록을 지우며 후시구로가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백미러로 뒷좌석을 살피던 스쿠나가 재빨리 시선을 앞으로 돌리는 게 보였다.

“너희야말로 내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았냐고.”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심지어 방금까지만 해도 시무룩한 기색이던 이타도리조차 부자연스러운 딴청을 부리며 침묵에 일조했다. 웬만해선 죽이 맞는 일이라곤 없는 이 쌍둥이의 약속된 묵비권 행사에 후시구로는 아까부터 속이 부글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아까 바다에서 느꼈던 그리움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곤 해도 짚이는 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뭔가 불법적인 수단을 썼으리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드라마나 영화처럼 발신기 따윌 붙여둔 건 아니더라도, 휴대폰이 버스 출발 직전까지 켜져 있었던 점, 그리고 센다이역과 와타노하의 바닷가에서 두 차례 더 켜졌던 걸 고려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쿠나라면 그 정도만으로도 대략적인 위치를 추산해 낼 수 있었을지 몰랐다.

다음번엔 그냥 휴대폰을 박살내고 나올까……. 언제 떠들었냐는 듯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은 차 안에서, 후시구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는 이모티콘이 잔뜩 찍힌 이타도리의 메시지를 확인하면서도 더는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역시 아무런 방침도 없이 충동적으로 집을 나온 게 문제였다. 다음에는 철저한 사전 준비 하에 계획적으로 집을 나서야…….

그때 문득, 후시구로는 허벅지에 슬그머니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

“?”

무심결에 옆을 돌아보니, 잔뜩 주눅이 든 이타도리가 이쪽은 돌아보지도 못한 채로 손을 뻗고 있었다.

“……뭔데.”

“……부탁이니까 이번은 그냥 넘어가 주면 안돼? 후시구로 탓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이타도리가 중얼거렸다. 도로 냉정해진 줄 알았던 심장이 그 순간만은 도리 없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스쿠나도 그때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정적이 흘렀다. 뻔뻔스럽게까지 느껴지던 적막이 먹먹한 침묵으로 바뀌는 데에는 불과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만 서른 시간의 실종. 그간의 애타는 심정을 대변하듯 지금 후시구로의 어깨에는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입혀 준 외투가 겹겹이 얹혀 있었다. 고작 하루 가량 연락이 끊긴 것으로 이 정도니, 두 사람이 얼마나 피가 말랐을지 후시구로라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설령 저 둘이 원인 제공자라고 해도 그랬다. 따질 건 따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보냈을 지옥 같은 시간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여기서 봐주면 안 된다. 후시구로의 머릿속에서 이성이 외쳤다. 하지만 심장은 그런 이성의 판결에 은근슬쩍 반기를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 녀석들이 계속 시무룩한 걸 보고 싶은 건 아니잖아. 마음이 솔직하게 선처를 요구했다.

안 돼. 안 되는데. 이성이 안타깝게 부르짖는데도, 기어이 또 한 번 후시구로의 ‘될 대로 돼라’에 시동이 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 ‘될 대로 돼라’에 당했으면서도, 왜 이 쌍둥이들 앞에서는 말도 안 되게 마음이 약해지는지 후시구로 자신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대로 넘어가면 분명 후회할 테지만…… 그러나 후시구로는 후시구로였다. 언뜻 냉정해 보여도 그는 머뭇거리며 뻗어온 손을 매정하게 내칠 수 있는 사람은 못 되었다. 쌍둥이들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후시구로가 못 이기는 척 이타도리의 손을 맞잡으려던 찰나였다.

―어이.”

그 순간, 얼음장처럼 매서운 목소리가 차 안을 갈랐다.

“다 좋은데…… 왜 둘이 손을 잡고 있어야 하는 거지?”

흠칫하여 백미러를 바라보니, 스쿠나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금방이라도 유리를 깨뜨릴 듯 번득이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러자 언제 낙심하고 있었냐는 듯 이타도리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다음 순간, 차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거의 멈추다시피 속력을 줄였다. 몸이 냅다 앞으로 쏠렸고, 후시구로는 재빨리 저를 끌어안는 이타도리의 팔을 느꼈다.

차가 아슬아슬하게 갓길에 멈춰 서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뒤에 따라오던 차 몇 대가 연이어 클랙션을 울리며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후시구로는 간신히 멀미감을 억눌렀다.

“너…… 여기서부터 걸어가고 싶냐?”

“너야말로 적당히 못 해!? 후시구로가 다칠 뻔했잖아!!”

“그러니까 네가 쓸데없는 짓을 안 했으면……!!”

익숙하다 못해 신물이 나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들으며, 후시구로는 그저 눈을 감았다. 집에 가고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는 바람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둘은 알아서 집으로 가라고 하고 혼자 신칸센을 탈걸.

조만간 휴대폰을 물에 빠뜨려 버리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후시구로는 두 사람이 싸움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안전벨트를 해제하고 문의 잠금을 풀었다.

“……그냥 내가 여기서부터 걸어갈 테니까, 너희는 알아서 마무리하고 와.”

“지금 말 다 했…… 응?”

“뭐라고, 후시구로 메구미?”

두 사람이 상황을 파악할 틈을 주지 않고, 후시구로는 차 문을 열었다. 고속도로를 쌩쌩 지나는 차들에게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라리 상쾌했다. 두 사람이 총알같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저를 쫓아올 때까지, 후시구로는 잠시 동안 덧없는 자유를 만끽했다. 아아, 역시 가출은 주기적으로 해 줘야만 할 모양이다.


/ fin.




*웹공개한 김에 새로 쓰는 후기

<가출 홀리데이>는 여기서 마무리입니다. 하지만 이 쌍둥이들과 함께 투닥거리며 지내는 후시구로라는 설정은 아주 맘에 들기 때문에, 비슷한 세계선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낼지도 모르겠어요. 이전에 낸 <통제불능적 일상> 역시 <가출 홀리데이>와 같은 세계선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봐주셔도 무방합니다.

에전에 쓴 후기를 보니 이번 원고는 제목 짓기가 까다로웠다는 얘기가 적혀 있군요. ㅋㅋㅋㅋ 실물 회지에서도 밝혔듯이, <가출 홀리데이>란 제목은 일본의 소설가 오츠이치의 <실종 홀리데이>라는 작품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츠이치가 말하길, <실종 홀리데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질주 홀리데이>라는 다른 작품의 제목을 변형한 것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가출 홀리데이>라는 제목은 결국 패러디의 패러디인 셈입니다. 어쨌든 '홀리데이'라는 단어를 꼭 넣고 싶었기에 저쯤에서 타협했다고 일 년 반 전의 제가 적어두었군요. 마침 그즈음에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을 보기도 했거든요(아실 분은 아시겠지만 <로마의 휴일>역시 앤 공주의 하룻밤 가출기입니다).

페이지의 제한이 없어진 김에 몇 자 더 적어보자면, 이 원고에서는 유지의 출신지에 대해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센다이시가 포함된 산리쿠 지역은 예로부터 태평양과 접해 지진과 쓰나미가 잦은 지역이었다고 해요. 원작에서 언급되진 않지만 02년생인 유지라면 11년도의 동일본대지진 역시 당연히 직격으로 겪었을 것이고요. 당시 센다이시는 상당한 피해를 입어서 쓰나미가 몰아치는 영상이 유튜브 등에 업로드 된 것도 여러 편인데… 그 영상 몇 개를 보면서 재해와 재건을 반복하는 도시에서 자라온 것이 유지의 타인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고 그 점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힘이라곤 미치지 않는 참상을 목격했기에 내일이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요(스쿠나). 아무튼 이런 지역적 특성이 제게 상당히 인상깊게 남았기에, 센다이는 지난달 디페에 발매했던 <끝나지 않을 자장가>에도 막바지에 언급되는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아무튼, 그래서 센다이에 대해 다뤄보는 김에 사전 답사…를 해 봤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까진 없어서요. ㅋㅋㅋㅋㅠㅠ 대신 구글 지도와 거리뷰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습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본편에서 메구미가 탄 버스나, 하룻밤 숙박한 비즈니스 호텔, 열차를 타고 들른 역, 만고쿠우라 호수와 다리, 한참을 걸어간 해안가 등은 모두 실제로 있는 차편과 장소를 염두에 두고 묘사한 것입니다. 한없이 이어지는 쓰나미 방조제나 집터만 남아있는 부둣가 등등 실상 관광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지만, 메구미도 유지도 스쿠나도 실제로 그 어딘가를 거닐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썼습니다. 여러분도 글로나마 센다이의 풍경을 떠올려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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