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화면 속 파란색의 날씨 어플을 누른다. 오늘부터 9일간, 노란색의 해는 구름 뒤로 자취를 감췄거나 보이질 않는다. 6월의 막바지. 올해도 장마가 왔다. 회색 구름이 머리 위로 드리운다. 꾸물꾸물 잘도 하늘에 퍼져있다. 폭우처럼 쏟아지다가도 이따금씩 약해진다. 언제부턴가 우산을 늘 챙긴다. 비가 거세든 조금이든 항상 들고다니게 되었다. 10년 전부터 끊임없이 생각나는 얼굴 때문에.



비, 빗속, 빗방울 그리고

w. 앳



“야, 너 집에 안 가?”


오늘 야자도 없는데 아직도 안 가냐. 놀토 즐겨야지! 토요일 오후, 종례가 끝난 지 한 시간이 훌쩍 넘은 때 였다. 경수의 같은 반 친구가 자습실에 들러서 놓고 온 물건을 챙기다가 흠칫 놀란다. 자신의 자리 근처에서 요지부동인 경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얼씨구, 저기도 한 마리있네. 토요일인데도 공부에 열중인 녀석들이다. 


“시험 기간이잖아, 먼저 가라.”

“어.”


귀찮은 듯이 손을 훠이- 저으며 경수가 답한다. 미련없이 자습실을 나서는 친구를 흘깃 본다. 실은 친구를 보는게 아니라 옆옆자리에 앉은 누군가를 본다. 둘이 대화하고 있거나말거나 묵묵히 문제지를 보고 있는 사람. 우리 반 부반장.


어차피 집에가면 피곤에 쩔어 밥만 먹고 잘테고 오늘 하루는 날아간 셈일테니 저녁 전에라도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못다한 공부를 마저 한다. 고2라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거기에 1년이 더해졌다는 부담감만 늘어났을 뿐이다. 그래, 다른 생각보단 내신에 집중해야지. 내년, 내후년을 생각해야지. 그것 뿐이다. 그것 뿐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 씨ㅂ,”

우산을 챙기는 걸 깜빡했다. 다행히 빗줄기는 약했지만 왜 하필 지금이야. 아깐 좀 맑더니만. 공부를 마치고 자습실을 나와 가장 빠른 길로 가려했지만 집에 일찍가긴 글렀다 싶었다. 정류장까진 몇 미터를 뛰어야 했고 다른 옷도 없는데 하복을 입었으니.. 아, 비 맞기 싫은데. 경수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같이 쓰고 갈래?”


발만 동동 구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참동안이나 입을 열지 않아 들을 수 없던 목소리. 한 학기가 다 지나가는 동안 말 한 번 제대로 섞지 못했던 그 목소리. 단지 반장과 부반장 사이일 뿐인 우리.


“……”

“반장 너도 저 정류장 가지?”


대답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으니 또 말을 꺼낸다. 이렇게 친근한 애였나,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다정하다. 


“…어어.. 가.”

“자습실에 가디건이 있어서.. 비 맞기 싫으면..”

“..응, 가자 같이.”


내가 영화를 찍고 있나. 속마음이 들린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자, 됐어. 뛰자.”


하나, 둘, 셋! 살짝 고여있는 빗물을 뛰어넘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가디건을 우산삼아 좁은 틈에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 그 빗속을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뛴다. 둘만의 공간이다. 짧은 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앞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너에게 눈길이 간다. 흩어지는 숨결이 가깝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서로를 보며 말간 웃음을 짓는다.



“후... 가까운 줄 알았는데 되게 멀구나 정류장까지.”

“그, 그치. 와.. 숨찬다. 무지 힘들어.”


종인의 가디건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준다. 옷이 많이 젖진 않았네. 가서 말리면 되겠다,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무사히 정류장에 왔다며 고마움을 표한다.


“어.. 너 어깨가..”

“아, 그러네.”

“어깨까지 덮지 그랬어.”

“뛰다가 흘려내렸나봐.”


조심스레 종인의 젖은 어깨를 툭툭 턴다. 이미 투명해진 교복을 턴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미안한 마음에 손길이라도 살며시 올려본다.


“…”

“…”


그러다 눈이 마주친다. 등 위에 작은 온기가 느껴진다. 아주 살짝 올려진 종인의 손이 온기를 뿜는다. 따뜻하다.


“……”

“……”


문제지 위에 풀었던 수학 문제처럼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팔 위에 있던 빗방울이 또르르 떨어진다. 손의 온기보다 따뜻한, 오히려 뜨겁게 엉킨다. 가벼운 입맞춤으로 끝날 줄 알았던 키스가 끝을 모르고 뛴다. 엉키는 혀의 온도가 뜨거워지듯 깊어진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는 기쁨을 누릴 찰나도 없이 온 정신을 집중한다. 섞이는 타액이, 도톰한 입술 사이로 내뱉는 숨결이 거세지는 빗줄기를 잊게한다. 시야엔 너뿐이다. 


“…하..”

“하아…”


떨어진 입술 밖으로 조그맣게 입김이 서린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 멀리서 버스가 오고 있다.


“반장, 경수야. 난..”

“연락, 연락 할게. 조심히.. 가.”

“으응..”


무슨 말을 둘러대야할지, 꺼내야할지 몰랐던 18살. 멋없게 너를 보냈다.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멀뚱히 서있는 너를 서툴게 보냈던 난. 그게 우리의 마지막일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그 버스를 그냥 떠나보낼걸.





[회사 일이 다 그렇죠, 이제 집에 들어가서 씻고 눈 붙이려구요.] 

걱정하시는 부모님의 문자에 팔팔한 척 답장했다. 실상 화면 위에선 힘없이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죽을 것 같으니 택시나 타야겠다. 경수는 야근 후 우산을 드는 것도 힘들어 남은 힘을 쥐어짜서 빗속을 걸었다.


“…어…?”


졸려서 헛것이 보이나.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나가는 빈 택시에 마구 손을 흔들었다. 지금 당장가서 눈을 붙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데 그런데.


“종인.. 종인아.”


맞은 편에 서있는 니가 보인다. 교복이 아닌 하얀 셔츠를 입고선.


“저기요, 안 타요?”


택시 기사가 짜증을 내며 묻는다.


“아.. 네.. 네. 그냥 가세요. 죄송합니다.”


열었던 문을 닫고 만다. 떠나보냈다.


“……”

“……”


비를 피해 우두커니 서있다. 건물 아래에서 날 보고있다. 


10년이다. 10년이 걸렸다. 

이제는 널 위해 비를 막아줄 우산을 들고선 나는 너를 본다.


비가 내리는 길가에서, 빗속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우산 그리고 김종인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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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예전에 썼던 썰로 조각글을 써보았습니다,,ㅋㅋ 학원물 넘 좋아요 흐규규



엉엉엉 도피님이 글의 한 장면 그려주셨어요ㅠㅠㅠ 사랑해요 도피님 최고시다!! (감동으로 줄줄 흐르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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