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있다. 스무 살 생일에 나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사실 나 여자친구 생겼다. 술을 약간 마신 상태였다. 나는 왠지 그녀가 그럴 것 같았으므로 짓궂게 놀려주고, 말해주어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그 친구와 나는 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터라, 이 사실을 또 누구에게 이야기했는지 물어보았다. 누구는 알고 있고, 누구는 모른다 했다. 왜, 걔한테는 얘기를 안 하려고? 응, 왠지 잘, 못 받아들일 것 같아서.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짜식 그래도 넌 커플이네. 오래 예쁘게 사귀어라.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걔'는 그녀가 많은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것은 모를 일이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그렇듯, 오랜 시간 떨어져 자주 보지 못하면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사실 그 친구와도 연락을 안 하고 지낸 지 꽤 되었는데, 이렇게 글에 등장시키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다) 굳이 그녀는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일 년에 몇 번 있던 작은 만남을 까끌까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세상을 살아가는데 모든 것을 알리거나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면 더더욱.


<금테 안경>의 파디가티와 '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길 수 없다. 파디가티가 '그거'라는 것도, '나'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페라라의 모두가 알고 있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소수자들이 느끼는 동질감은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짙어지고, 정말이지 담백하게 끝을 맺는다. 큰 사건도 없고 야단법석함 없이 흘러가는 페라라의 일상. 그저 등장인물 모두와 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읽어나갔다. 약간 겉도는 듯한 미묘한 공기, 보이지 않는 서열 다툼. 이 피곤함!


"신고를 하라니!" 놀라서 더듬대는 말투였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경멸로 가득한 불꽃이 번뜩거렸다.

"신고를 하라니!" 그는 한 번 더 말하더니 다소 어처구니없는 이방인을 보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가능할 것 같니?" (p.99)


그의 멋진 금테 안경에 금이 가도 파디가티는 그의 젊은 연인을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 단순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전부였을까. 사회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분명히 있었으리라. 그는 더이상 세련되고 기품있는 페라라의 인기 의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떠나 그저 '볼썽사나운 우정'을 나누는 추잡한 늙은이가 되었다.

 '나'의 상황도 그리 좋지만은 않다. 무솔리니가 집권하고, 독일의 인종 우월주의의 바람이 이탈리아에도 불어왔다. 시작은 미미했다. 그럴 것이다, 카더라로 시작해서, 점점 사회는 '나'를 옥죄어왔다. 무슨 사건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나'를 둘러싼 분위기가 변해갔다. '너희 민족'이라는 말로, '우리 이탈리아인'이라는 말로 서로를 나누었다. 그래도 페라라에서 '이스라엘인들'은 거의 모두 부르주아니까, 그들도 파시스트당에 속해있으니까, 인종 정책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세상은 그들의 바람처럼 되지 않았다.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소수자의 삶은 (당연히) 힘들다. 그들은 정체가 밝혀지기를 두려워하고, 자신이 다수에 속해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영화 <모리스>에서는 다른 선택을 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케임브리지를 다니던 모리스와 클라이브는 서로의 우정이 사랑으로 변해감을 느낀다.

그러나 소수가 곧 죽음이었던 사회에서, 클라이브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길을 택한다. 그리스 여행을 떠난 그는 모리스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무너져내린 그리스 신전에 앉아 편지를 읽던 클라이브는 자신의 사랑도 언젠가 그렇게 무너지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찬란했던 과거가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렸다. 미래를 위해서 자신은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모리스에게 결별을 고하고,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공직에서 일하는, 영국 신사의 정석 코스를 밟는다.

하지만 모리스는 달랐다. 그도 동성애를 '치료'해보려고 최면 상담까지 받아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에게 새로 찾아온 사랑 알렉. 알렉은 노동자 계급의 거친 사람이지만,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있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모리스는 얘기한다.


"돈이나 남들 없이도 우린 살 수 있어. 지위도 필요 없고. 우린 바보가 아냐. 둘 다 건강하고. 갈 곳이 있을 거야."


결국 알렉은 예정되어있던 이민 길에 오르지 않고 보트 창고로 돌아왔다. 이윽고 모리스가 클라이브에게 알렉은 나를 위해 미래를 희생하고 배를 타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면, 그때의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모리스는 연인 곁으로 가고, 클라이브는 조용히 창문을 닫는다. 그가 다시는 나가지 못할 창문 밖을 바라본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모리스의 앞길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뻔한 사실이지만 굳이 그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쨌든 누군가는 행복하게 끝났다는 것이, 자신의 무늬를 숨기지 않고 생긴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좋았다. 시간이 흘러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랑을 지향한다는 고귀한 요소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분류하고, 소수자로 만드는 항목들은 너무나 많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못 하는지….


때론 다수에 속하기 위해 내가 가진 다른 점을 감출 수 있다. 그러나 가끔 감출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나를 슬프게 하고, 그것을 숨기고 싶은 마음에 괜히 마음을 곤두서게 만든다. (그게 무어라고 이야기하기는 부끄럽지만) <금테 안경>의 파디가티와 <모리스>의 클라이브의 마음을 이해한다. 사실 모리스가 판타지적인 캐릭터지. 그래서 그의 당당한 선택에 나는 클라이브처럼 창문에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회와 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그저 한 인간으로 사는 것. (갑자기 <월든>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의 시선에서 벗어나 그냥 '나'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밤이다.




+ 글을 쓰면서 계속 다른 생각이 떠올라서, 아마 계속 깁고 더할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계속 다듬다 보면 지금보다 나은 글이 되겠지요 ㅠ.ㅠ 

꾸준히 읽고 열심히 살고 싶은 게으름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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