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스가] 주고받기 1-1
written by 휘엔

*모브 등장이 있습니다.*




"스가. 같이 살지 않을래?"

졸업식이 끝나고 단추가 죄다 뜯겨진 다이치의 말에, 분명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를 보고 있었을 테지.

"아니, 너 아직 집 못 구했다며. 너도 도쿄 가고 나도 가고, 뭐, 학교도 꽤 가깝고 그러니까. 그게...아니, 너무 갑작스러운가?"

놀란 내 표정에 당황했던지 천방지축 개성 강한 부원들을 훌륭히 이끌었던 주장은, 답지 않게 말을 더듬다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멋쩍은지 한 손으로 뒤통수만 매만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기쁘면서도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마치 프러포즈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에,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오로지 절친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요동치던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눈앞에서 눈치 없게 웃고 있는 그가 미웠다. 졸업하고는 지우려고 했던 마음이기에. 오늘 졸업식 뒤에는, 고등학교 때의 어린 치기로 만들어 묻으려던 마음이기에. 세상에 둘만 남아도 없을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품게 하는 그가, 그리고 미련스레 희망을 갖는 나 자신이 싫었다.

그런데도 그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조금만 더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욕심과 고2 때부터 시작한 마음을 조금만 더 간직하고 싶은, 아니 놓고 싶지 않은 미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은 마음은, 도쿄에 가서 생활패턴이 달라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해서도 사라지기는커녕 더더욱 커져만 갔다.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학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나, 집을 나설 때는 ‘다녀오겠습니다’를, 집에 돌아오면 ‘다녀왔습니다’를 꼭 외치는 모습, 자신이 아플 때는 약속을 취소하고 옆에서 간호해주는 다정한 모습에 헛된 희망만 부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평생의 친우라고 타인에게 소개할 때에는, 그 옆에서 기쁨과 슬픔, 죄책감으로 범벅이 된 복잡한 감정에 침식당한 채 나락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처참하게 터져 바닥으로 떨어진 희망을 생글생글 웃으며 흘려보냈다.

그 과정이 반복되고 이어지는 사이에 상처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고통은 익숙한 것이 되어, 어느새 그의 가장 최근 여자친구를 소개받을 즈음엔 무뎌진 가슴으로 그와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둔감해진 가슴으로도 그 날은 조금 견디기 힘들었다.

“다이치. 정말로 괜찮겠어?”

나 진짜로 면접 안 보러 가도 돼. 나의 말에 다이치는 오랜만에 주장의 얼굴을 하고는 헛소리 말고 얼른 가. 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불 안에서 이마에 해열 패치를 붙인 채로 말했기에 그다지 박력은 없었지만.

“약도 먹었고 열도 어제보단 떨어졌으니까 자고 있으면 나을 거야. 너 없으면 조용히 잘 수 있으니까 더 좋을걸?”

“이봐요, 주장님. 누가 들으면 제가 무슨 집에서 깽판 치고 돌아다니는 줄 알겠어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만한 언동은 삼가 주시죠.”

“하하하.”

나 걱정하지 말라고 일부러 하는 말인 줄 뻔히 아는데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면접장까지 향하는 전철 안에서도, 면접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걱정 말고 다녀오라며 이불 안에서 배웅하던 그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런 상태에서 면접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감기약이 남아있던가? 해열 패치는 한 장 밖에 안 남았던 것 같은데. 감기엔 뭐가 좋지? 목도 부었고, 소화 잘 되게 죽 끓이는 게 좋겠지?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날뛰는 질문들로 인해 어떻게 면접을 봤는지 기억조차 못 한 채, 부랴부랴 장을 본 뒤 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설마 거기서, 그 타이밍에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다.

“다녀오셨어요, 스가와라 씨. 실례하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했기에 준비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 타격이 더 컸다.

“......아, 치카 씨, 와 계셨구나.”

비참함이 스멀스멀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멋대로 부엌 사용해서 죄송해요. 전화했는데 다이치 군이 아프다길래 걱정돼서 와 버렸어요...”

부엌 쪽에서는 무언가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고 있었다.

“뭘요. 오히려 치카 씨가 와 주시니까 다행이네요. 제가 뭐 어설프게 만드는 것보다야 치카 씨의 요리가 저 녀석한테 훨씬 좋죠.”

“아녜요. 스가와라 씨도 요리 잘하신다고 다이치 군이 언제나 말하는걸요. 스가와라 씨 밥, 진짜 맛있다고.”

“으아-저 녀석. 대세 요리연구가인 치카 씨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최대한 과장되고 익살스럽게 말하자, 눈앞의 여자가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한 손으로 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 행동에서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이 절로 묻어났다. 여전히 착하고 좋은 여자였다. 다이치만 없었다면 나도 한 번쯤은 사귀어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볼 때마다 자신의 위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맘을 졸이고 난리를 쳐도, 결국 나는 그의 절친일 뿐이고, 그가 아플 때 의지하는 것은 그녀라는 사실을.

사 온 약과 식재료를 재빠르게 정리한 뒤, 옷을 갈아입겠다는 핑계로 방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밖에선 음식 준비로 분주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돼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에 가슴을 주먹으로 세게 쳐봤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냈다. 숨쉬기가 조금 수월해진 느낌이었다. 간만에 양복을 입어서 그런가. 그래. 익숙지 않은 옷을 입어서 그럴 거야. 애써 자위를 하며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방 밖으로 나가자 요리에 전념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치카 씨."

“아, 스가와라 씨. 아직 저녁 안 드셨죠?”

자신의 부름에 앞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그녀가 상냥하게 웃으며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라고 물어왔다.

“죄송해요, 치카 씨. 옷 갈아입는데 갑자기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마 오늘 못 들어올 것 같은데, 치카 씨만 괜찮으시다면 저 녀석 옆에 계셔주실래요?”

불편하시겠지만 부탁드릴게요. 라고 덧붙이자 여자의 눈동자가 크게 열린 뒤 곧 미안함으로 물들었다.

"스가와라 씨. 혹시 저 때문에 나가시는 거라면..."

"아녜요. 치카 씨 때문이긴요. 친구 녀석이 여친에게 차였는지 메시지가 장난 아니게 왔어요. 아마 밤새 위로해주고 올 것 같으니, 누추하지만 편하게 있다가 가세요. 치카 씨가 함께 있어 주시는 편이 다이치도 안심할 거에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더 이상 보기 힘들어서,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린다고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집 밖으로 나왔다. 다이치와 사귄 지 2년이 넘어가는 2살 연상의 여자는 요리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요리연구가였다. 동네에 있는 작은 규모의 스튜디오였지만, 쉽고 잘 가르친다며 알음알음 주부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뒤, 함께 운영하고 있던 그녀의 블로그도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해, 얼마 전 인기 여성 잡지의 인터뷰까지 했다고 다이치는 웃으며 말했다. 너무 유명해져서 나 버림받으면 어떡하지? 라며 취한 채 널브러져서 불안해하던 다이치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어 그 잔상을 애써 털어냈다.

든든함과 성실함, 자상함의 대명사인 다이치는 고등학교 때에도 인기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미팅도 많이 들어오고 고백도 늘어났으니 오히려 인기가 높아졌다고 해야 하나. 도쿄에 와서 몇 명의 여자친구와 함께했던 다이치는 2년 전에 현재의 그녀를 만났다. 전 여자친구들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똑똑하고 능력 있으며, 상냥하고 고운 심성을 가진 여자였다. 만남부터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간질간질하고 로맨틱한 상황에서 만난 둘을 금방 사랑에 빠졌고, 그 뒤로 예쁘게 만남을 이어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렴풋이 그들이 결혼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고,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그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만큼 둘의 모습은 천생연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만큼 잘 어울렸고,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비교할 필요도 없이, 나의 완전한 참패였기 때문에 차마 분하단 기분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그렇기에, 평소에는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다이치가 오늘 그녀가 너무 귀여웠다는 이야기를 해도, 그녀가 연인의 절친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며 집에 초대해 진수성찬을 차려준 날, 내 앞에 앉은 둘이 서로를 챙겨주며 행복하게 웃고 있어도, 괜찮았다. 웃는 얼굴을 하며 버틸 수 있었다. 대부분은 꾸며낸 웃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들과 웃은 적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나는 그녀를 다이치의 상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녀가 나와 다이치의 부엌에 서서 요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둘이 산 앞치마를 입고, 우리 둘이 산 도구로 조리를 하는 모습을 웃는 얼굴로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존재가 우리의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러니까 결국 도망 나왔다. 나도 살아야 하잖아. 오늘은 이 이상 무리였다.

"하아...어디가지..."

친구 이야기는 물론 거짓말이었다. 집은 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아 멍하니 맨션 현관에 서 있다가 일단 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적당히 그 근처나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밤에는 24시간 오픈인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넷 카페에서 가서 자면 되겠지.

여름답게 내리쬐는 태양 빛은 강렬했고, 등 뒤로 주륵 흐르는 땀은 불쾌감을 배가시켰다. 터벅터벅.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역으로 향하자, 길목에 있는 작은 부동산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지나다니면서 아직은 갈 곳이 아니라고 일부러 걸음을 빠르게 했던 곳인데, 오늘은 발걸음이 느려졌다. 4년 동안 미뤄뒀던 새집 찾기를 슬슬 시작할 때가 된 듯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만, 딱 도쿄에 익숙해질 때까지만 같이 살려고 했다. 함께 살면서 누군가 내 숨통을 막는 것처럼 숨쉬기조차 힘들 때마다 나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직 버틸 수 있으니까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하면서 결국 와버린 게 지금이었고, 이제 졸업이 다가오는 동시에 더는 미룰 수 없는 최종 타임리밋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요즘 월세는 이 정도구나..."

도쿄에 올라와 운 좋게 좋은 집주인을 만나 시세보다 싼 가격으로 지금까지 살았기에 요즘 시세가 어떤지 몰랐는데, 생각보다 많이 비쌌다. 그래도 방은 하나만 있으면 되니, 열심히 발품 팔고 그러면 괜찮은 곳 찾을 수 있겠지.

"들어오실래요?"

그렇게 한참을 유리에 걸려있는 부동산 물건들을 보고 있으려니, 딸랑-하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낡은 부동산의 문이 열렸다. 영업종료인 줄 알고 본 건데 인자한 인상의 아저씨가 나와서 살짝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들어오라는 듯 아저씨가 문을 활짝 열어 무언가에 홀리듯 그대로 부동산에 들어갔다.

"새집을 찾고 계신가요?"

"...네. 근데 아직 확실히 정해진 게 없어서요."

"괜찮아요. 앞에 표 편하게 작성해주시면 조건에 맞는 곳 몇 군데 뽑아드릴게요."

편하게 하라고 해도 뚜렷하게 생각해 놓은 것이 없다 보니 표를 봐도 뭘 써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적당히 예산과 몇몇 조건을 써서 아저씨에게 내밀자, 그는 그런 부실한 조건으로도 여러 곳을 찾아 프린트한 파일을 건네주었다.

"일단 써주신 조건으로 찾아본 곳은 이런 곳인데, 나중에 조건을 조금만 더 추가해주시면 더 괜찮은 곳들이 나올 테니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다음에 다시 와주세요."

다른 부동산처럼 조급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닌 점이 맘에 들었다. 다음에 집을 구하게 된다면 여기서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꽤 두꺼운 파일을 가방에 잘 넣은 뒤 부동산을 나섰다. 어깨에 멘 무거워진 가방처럼 마음도 함께 무거워졌다.

"하아..."

나도 모르게 나온 한숨이 생각보다 컸는지 스쳐 지나가던 여고생이 움찔하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도망갔다. 어디 가서 꿀리는 마스크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이젠 옛말인가보다. 우울함이 배가 되었다.

딱히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없어 적당히 역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제일 싼 버거 세트를 시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런지 창밖의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역 앞 시계탑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성. 지친 표정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며 빠른 걸음으로 개찰구로 향하는 회사원. 서로가 좋아 죽겠다는 티를 팍팍 내고 걸어 다니는 팔짱 낀 커플. 모두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데 나 혼자만 멍청하게 패스트푸드점에 앉아있는 느낌이 들어,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이 와중에 배는 또 고프다고 요란하게 뱃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방치되어 식어가던 버거를 입에 물었다. 맛은 그냥 밍밍했다.

질겅질겅. 분명 전에 먹었을 땐 나쁘지 않은 맛이었는데. 오늘따라 고무를 씹는 느낌의 버거를 열심히 입안에서 아작내며 아까 받은 부동산 프린트를 꺼내려고 고개를 든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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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길어 한번 끊습니다. 애매한 곳에서 끊어서 죄송해요;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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