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期一會 (일기일회) :

         평생(平生)에 단 한 번의 만남





1.


 

시간이 흘러 문덕이 즙요사의 수장이 된지도 다섯 해가 지났다. 황궁은 최근 황제의 스물다섯 번째 성절을 맞아 연회 준비로 분주했다. 즙요사의 법사들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각국의 사신과 비빈 그리고 초대받은 귀빈들이 들여오는 진상품 때문이었다. 물론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았지만, 종종 물건들 사이에 요상한 게 깃들어있는 경우가 있곤 했다.

 

그것이 의도 된 것이든, 의도 되지 않은 것이든 그를 검수해야 하는 건 즙요사의 일이었다. 만에 하나 요기가 깃든 물건이 황제나 비빈들의 손에 들어가 만지거나 먹게 되기라도 한다면, 요기에 씌어 환각을 보거나 이상행동을 하는 건 약과였고,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즙요사는 그런 변고가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방비해야 했다.

 

그 외에도 사람의 출입이 많아지는 시기이다 보니 사람이 아닌 무언가의 출입을 막기 위한 결계나 진법을 고치고, 보강해야 하는 등 수장인 문덕은 특히 할 일이 많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 황제의 성절 연회를 하루 남긴 날이었다. 연회 준비도 어느 정도 끝난 시점이라 할일을 다한 것인지, 농땡이를 피우는 것인지, 어린 법사하나가 문덕의 옆에서 내내 힘들다 투덜거렸다. 문덕은 그런 사매를 토닥여가며 부적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 문덕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사형은 좋겠다.”

 

“응? 무엇이?”

 

문덕이 붓끝에 붉은 주사를 찍으며 물었다.

 

“폐하께서 사형을 좋아하시니까…”

 

찌익-. 거침없이 써 내려가던 붓끝이 순간 종이 위에서 춤을 추었다.

 

노란 종이의 한가운데 그어진 붉은색의 거친 선을 힐끔 본 사매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불쏘시개로나 써야겠네…”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

 

민망함에 눈을 흘긴 문덕이 새로 종이를 주워들며 핀잔을 주었다.

 

“이상한 소리는… 폐하께서 배 사형을 대할 때 보면 얼마나 눈빛이 부드러워지시는데….”

 

“…….”

 

“몇 년 전에 폐하께서 병에 걸리셨을 때, 아곤 형이 배 사형 대신 폐하를 보필하면서 밤마다 술 마시며 운거 모르지? 어찌나 차갑고 냉랭하신지. 그 후로 사형 자리 비울 때면 아무도 나서서 한다는 사람이 없잖아-.”

 

사매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문덕이 한숨을 내쉬며 붓끝에 한 번 더 주사를 묻혔다.

 

“설령 그렇다한들 너희 잘못까지 내가 매를 맞는 건 어찌 설명할 테냐?”

 

“음… 하긴, 그럴 때 보면 폐하께서 너무하실 때가 있어… 사형한테 잘해주실 때는 정말 잘해주시면서…….”

 

그리 중얼거리며 망친 부적을 팔랑거리는 사매에게 그만 놀고 가서 일하라 문덕이 엄히 말하고는 공연히 뜨거워진 귓가를 문질렀다. 폐하께서 저를 좋아한다는 말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나마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다음날, 황제의 성절 연회가 시작되었다.

 

문덕은 황제의 곁에서 열 보 가량 떨어진 곳에 서서 그가 만나는 사람과 만지는 물건들을 예의주시하며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성절 연회에 참석한, 고운 비단 옷으로 잘 차려입은 비빈들과 귀빈들에 둘러싸인 황제의 모습을 지켜보던 문덕이 문득 제 차림을 한번 보았다. 특별한 날 입으려고 아껴두었던 새 법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시커멓고 초라한 법복을 입은 제 모습이 어쩐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성절 연회는 그전에도 여러 번 치러봤건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왠지 민망한 기분에 괜스레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고 고개를 들자 황제가 황후의 머리에 꽂은 화려한 꽃 비녀를 칭찬하는 것이 보였다.

 

저리 다정한 얼굴도 하시는구나. 괜스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늘 그렇듯 황제의 성절 연회는 2박 3일 동안 지속되었다. 다행히도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조용히 마지막 날이 되었다.

 

문덕은 성절 연회 때면 얼굴도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황제가 바빠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자신이 봐도 스스로의 상태가 넋이라도 나간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황제를 대할 낯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연회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중이었다.

 

황후의 동생인 단 공자가 마음에 든 것을 발견한 듯 걸어가 귀빈들을 위한 진상품 중 야명주로 보이는 것에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순간 요사스러운 기운이 뻗어 나오는 것을 포착한 문덕이 다급히 단 공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꼼꼼하게 검수한다 했는데 하나 놓친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송구하오나 이것은 요기가 깃든 물건이오니 부디 만지지 마십시오.”

 

“여기 있는 물건들은 모두 귀빈들을 위해 법사들의 검수가 끝난 물건 아닌가? 어찌하여 그대는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간혹 저희가 놓치는 경우도 있사오니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문덕이 정중히 아뢰었으나 단 공자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펴지 못했다. 그가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오호라. 네놈이 내가 어리다 하여 무시를 하는 모양인 게지? 그리 위험한 물건이면 어디 증명해 보거라. 네놈이 만져보란 말이다.”

 

손끝으로 야명주를 가리키는 단 공자를 문덕이 난감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 사이, 떠들썩했던 연회의 분위기가 차게 식고, 이쪽으로 이목이 쏠린 것이 느껴졌다. 황제 또한 입으로 가져가려던 술잔을 손에 든 채 문덕과 단 공자가 있는 곳을 보고 있었다. 문덕이 차마 그 물건에 손을 댈 엄두도 못 내고 있자 단 공자가 좀 더 큰소리로 외쳤다.

 

“어서 만져보래도!”

 

주후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마음 같아서는 저 건방진 녀석을 당장 이 자리에서 물고를 내고 싶단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는 황후의 동생이었다. 이렇게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문덕의 편을 들었다간 황후의 체면을 생각지 않은 무정한 황제라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황후의 동생 편을 들었다간 목숨을 걸고 군주의 병을 고친 충신을 저버린 후안무치한 군주란 이야기가 나올 것이 뻔했다. 한마디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평소 단영의 행실과 평판을 생각해선 그나마 전자가 여러모로 더 듣기 나쁘지 않을 듯 했지만, 어찌 되었던 황후의 동생이었다. 황후의 체면을 봐서라도 박대할 수만은 없었다.

 

주후조가 상황을 주시하는 동안 단 공자의 손이 문덕의 얼굴 위로 거침없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주후조의 찌푸린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때 마침 황후가 나섰다.

 

“단영! 자중하세요.”

 

“황후마마… 하지만 이놈이….”

 

“압니다. 허나 지금은 폐하의 성절 연회 중 입니다.”

 

“흥!”

 

황후의 냉정하고 단호한 말투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단 공자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시비를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가버렸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황후가 눈을 내리뜨며 덧붙였다.

 

“이 일은 그대의 잘못도 크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혹여 이곳에 모인 비빈들이나 귀빈들이 무심코 만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는가? 내 생각에 그대가 속죄하려면 태형 50대가 적당할 듯한데… 폐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사실 태형에서 가장 최고 단계인 오십 대는 과한 처사였다.

 

허나 여기서 황후의 의견을 번복하면 황후의 체면도 깎이고 자칫 황후를 두둔하는 이들의 반발로 더 과한 벌이 내려질 수 있었기에 주후조는 허락의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옮겼다.

 

 

 

그날 밤, 오십 대의 태형을 받은 문덕은 고통스럽게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엎드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는 그래도 태형 오십 대로 요기가 깃든 물건을 처리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혹여, 그 물건을 단 공자가 만지고 봉변이라도 당했다면 저는 물론이고 즙요사의 법사들에게 더 큰 화가 미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

 

그보다 아까 연회에서 자신에게 보내던 폐하의 싸늘한 눈빛을 떠올리자, 가슴께가 서늘해졌다. 어쩐지 태형을 맞는 동안에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나이 먹고 참 저가 주책맞다 생각하며 눈가를 비비고 있는데, 방문 앞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배 수장, 계시오?”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겨우 문을 열자 그곳에 태감이 서 있었다.

 

태감은 조용히 소매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주며 말을 전했다. 


“폐하께서 그대의 몸이 낫기 전엔 황궁에 오지 말라 하시었소.”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태감께 예를 올려 인사를 한 문덕은 손안의 언젠가 폐하께 받은 것과 같은 약병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소리 없이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얼마 후, 조금 움직임이 편해진 문덕이 입궁했을 때, 무슨 이유에선지 단 공자가 변방으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문덕은 그저 고개를 한번 갸웃할 뿐이었다.

 

 

2.

 


한 달에 하루, 요기가 강해지는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문덕은 한시도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 있을 요괴의 습격으로부터 황제를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그것은 즙요사 수장들이 늘 하는 관례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평소 황제가 침전에 머무를 때는 상관없었지만 종종 밤에 후궁의 처소로 들 때가 조금 곤욕스러웠다.

 

후궁의 처소로 들어가기 전, 황제는 어째선지 그를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다 들어가곤 했는데, 문덕은 괜한 마음에 폐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문이 닫히고, 황제가 보이지 않게 되면, 문덕은 태감과 환관, 궁녀들보다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자리를 지켰다. 허나 깊은 밤, 정적을 뚫고 들리는 낯 뜨거운 소리는 어찌 할 수 없었다.

 

그저 애써 듣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황제의 성절 연회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주후조가 침전으로 문덕을 불렀다. 황제의 손짓에 문덕이 정갈하게 차려진 다과 중 월병 하나를 집어 들어 한입 물었다.

 

“문덕이 네 나이도 이제 혼기가 이미 차고 넘치지 않았더냐.”  


주후조의 목소리에 순간 컥 하고 목이 막힌 문덕이 그만 폐하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기침을 해대었다.

 

주후조의 손이 문덕의 등을 문질러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움찔거렸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는지 모르는 문덕은 겨우 진정된 숨을 골랐다.

 

“송구하오나, 신 아직 가정을 이룰 여력이 되지 못하옵니다.”

 

주후조의 눈빛이 미묘하게 누그러졌다.

 

문덕은 들고 있는 월병의 정교한 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리며 뜬금없이 혼담을 꺼내는 폐하의 어심을 알 수 없다 생각했다.

 

“일전에 황후가 너를 치하하며 좋은 혼처를 알아 놨다 하였다. 허니 한번 만나보기나 하겠느냐?”

 

문덕은 이제는 혼란스럽기까지 한 기분이었다. 저는 진심으로 단 한 번도 혼인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거니와 자신에겐… 자신에겐? 문덕은 순간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겐, 그 다음엔 뭘 생각하려 했는지 당혹스러웠다.

 

그러는 사이, 주후조가 다시 물었다.

 

“어디 안 좋은 것이냐? 안색이 좋질 않구나.”

 

“아니… 옵니다. 심려 하지 마시옵소서.”

 

“그래, 그럼 다시 물으마, 병부상서의 여식을 만나보겠느냐…?”

 

“소신……. 신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 같습니다….”

 

망설이던 문덕이 무심결에 손에 힘을 주자 손에 든 월병이 부스러졌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주후조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리 부담스러워할 것 없다. 너는 세상을 뜨긴 했으나 전 재상의 아들이 아니냐… 아님, 혹여 마음에 둔 정인이라도 따로 있는 것이냐?”

 

어째선지 주후조의 입에서 나온 정인이라는 말에 문덕의 심장이 쿵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으면서 어지럼증이 일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있던 문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이시라면 만나보겠습니다.” 

 

주후조의 눈빛이 기대감에서 실망감으로 변했지만 문덕의 시선은 계속해서 손에 쥔 월병에만 머물러있었다.

 

“…그래. 잘 생각하였다. 네게도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것이다.”

 

알았으니 가보라는 황제의 손짓에 문덕이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왔다.

 

문밖으로 나온 문덕은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월병이 모조리 부서져 제 손 안에서 가루가 된 것을 알았다. 어쩐지 제 마음도 이렇게 부서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느낌에 단 것을 먹었음에도 입안이 쓰디썼다.

 

 

 

며칠 후, 연극이 열리고 있는 저잣거리 2층으로 된 누각에서 만난 병부상서의 여식은 입고 있는 붉은 옷이 매우 잘 어울리는, 쾌활하며 똑부러진 여인이었다. 특히 웃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호선을 그리며 접어지는 눈매가 폐하와 닮은 듯도 했다.

 

무의식중에 그녀의 모습에서 주후조와 닮은 구석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문덕이 당혹스러워 하는 사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혹 다른 이를 생각하고 계셨나요?”

 

“예? 아,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제가 요즘 생각이 많아져서….”

 

문덕이 겸연쩍게 사과 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미소 짓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실은 저도 다른 이를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다시금 당혹스러워진 문덕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찻잔을 들고 누각의 아래, 무대에 선 연극 배우 한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흰옷의 훤칠한 분이 보이십니까?”

 

“……예.”

 

“그분이 제가 연모하는 분이랍니다.”

 

문덕은 저도 모르게 그녀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제 처지도 딱히 좋지는 않았지만-. 저 사람은… 그녀에겐 안 된 일이지만 두 사람의 격차가 커도 너무 컸다.

 

그녀는 고관대작의 여식이었고 그녀가 가리킨 자는 일개… 광대에 불과했으니까. 문덕의 생각을 눈치 챈, 그녀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안 될 거라 생각하셨나요?”

 

“…….”

 

문덕이 또다시 할 말을 고르는 사이,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사실 저 혼자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그리 말하며 처연히 미소 짓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강단 있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속이 여린 사람 같았다. 또다시 황제를 머릿속에 떠올린 문덕이 짐짓 아닌척하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음… 실은 잘 모르겠어요. 설령, 저 사람하고 잘되지 않더라도 계속 좋아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부탁드리려고 나온 거랍니다.”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부디 이 혼사를 없던 일로 해주세요.”

 

그녀의 부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은 기분에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무대 쪽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어째선지 그녀가 말한 사내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곤란한 표정의 두 사람이 어색하게 허공에서 눈인사를 나눴다. 문덕이 다시 차를 따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서로의 마음만 통한다면 두 사람의 신분 차이 따위 어떻게든 될 수 있지 않을까…?

 

문덕은 여인임에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고 용감한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결심한 그는 황제에게 나아가 조용히 아뢰었다. 자신은 아직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는 마음이 갖춰지지 않았으니 부디 없던 일로 해 달라 청했다.

 

그리하여 문덕의 혼담은 없던 일이 되었다.

 


3.

 

 

그러는 사이, 또 보름달이 뜨는 날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문덕은 이른 아침부터 채비를 해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요 근래 들어 황제의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틀 전에 있었던 황궁의 큰 경사 때문이었는데, 바로 황제의 후궁인 현비의 회임으로 인한 것이었다. 아직 달포 밖에 되지 않아 맥이 미약하게 잡히지만 회임이 확실하다는 태의의 말에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그가 제위한 지 10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여색을 밝히는 황제임에도 후사가 생기지 않아 대소신료와 주후조 자신 스스로도 걱정이 되던 터였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문덕 또한, 기뻐하는 황제의 모습에 자신의 일처럼 기뻤다. 하지만 문덕은 황제가 기분 좋게 현비의 처소로 향하는 동안 그녀에게 다정히 대하는 황제를 떠올리곤 어째선지 울적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요즘들어 넋 놓고 있은 시간이 늘은 것도 곤란하건만, 생각의 끝을 짚어보면 항상 황제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곤혹스러웠다.

 

그렇게 또 상념에 잠겨있는 문덕이 제게 하문하는 황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옆에서 태감의 우려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 수장, 폐하께서 하문하시었소.”

 

“어… 예? 소, 송구 하옵니다 신, 잠시 딴 곳에 신경 쓰느라….”

 

“괜찮다. 덕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자신이 또 못 알아듣자 태감이 폐하께서 몇 달 후, 나올 아기씨께서 황자일지, 공주일지 궁금해 하셨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문덕이 그제야 머뭇거리며 답했다.

 

“신은… 공주마마셨으면 좋겠사옵니다.”

 

문덕이 말을 마치자 일순간 침묵이 흘렀다.

 

이상한 기분에 태감을 보니, 저를 책망하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던 그가 서둘러 변명을 하려는데 황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덕이 네가 보는 눈이 있구나. 날 닮은 공주면 어여쁠 테지.” 

 

“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폐하를 닮으신다면 황자 마마는 늠름할 것이고, 공주마마는 봄날의 꽃처럼 아름다울 것 이옵니다.”

 

태감이 비위를 맞추자 황제가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웃었다. 몰래 가슴을 쓸어내린 문덕이 태어날 공주를 상상하고 미소를 지었다. 폐하를 닮은 아이라니 벌써부터 사랑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렇게 담소를 나누다 보니 금세 황제의 가마가 현비의 처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황제가 현비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 보게 된 건 배를 움켜쥐고 하혈을 하고 있는 현비의 모습이었다.

 

혼비백산해 달려온 태의가 현비의 상태를 살피고 나서 아룄다. 누군가 안태약을 낙태약으로 바꿔치기한 것 같다고. 황제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가 다시 노기를 띠었다. 당장 범인을 색출해내지 않으면 관련된 자 전부 물고를 내겠다는 황제의 엄명에 어약방을 비롯한 황궁 전체가 뒤집어졌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잡아낸 범인은 어약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단 의원 중 하나로 밝혀졌다. 그는 자신은 그저 누군가의 사주로 저지른 것이라며 심문도 하기 전에 목숨을 구걸했다.

 

의원의 발고로 잡혀온 자는 놀랍게도 주후조의 몇 안 되는 숙부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영왕이었다.

 

후사도, 형제도 없는 황제에게 끝내 후사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가 황위 계승 1순위였다. 뜻밖에도 영왕은 잡혀온 순간부터 결국에는 이리 될 줄 알았다는 듯 의연하게 굴더니, 황제의 성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없었다면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것이란 헛소리와 함께 저주를 퍼부었다.

 

“내 너의 씨를 모조리 말려 버릴 수 있었는데 아쉽구나!”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한 발언에 신료들을 비롯한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런수런 장내가 소란스러워진 사이, 황제는 조용히 일어나 가까이있는 호위의 검을 뽑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영왕의 허벅지에 찔러 넣었다. 그의 얼굴엔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채였다.

 

영왕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황제를 저주하는 말들을 지껄여댔다. 감히 황제의 용종에 손을 댄 데다 황제를 모욕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해대는 그의 행태는 대역죄에 해당했으니, 그가 종친이라 한들 그 자리의 누구도 황제의 행동에 토를 달지 못했다.

 

한동안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와 서슬이 시퍼런 저주의 말들이 오갔다.

 

그런 식으로 주후조가 친히 고문을 시작한지 수분이 지나 그제야 영왕이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졌다. 그를 지켜보는 황제의 손과 얼굴은 피로 젖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온통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모두가 두려움에 질려있을 때 주후조가 손을 들어올렸다. 태감이 기민하게 움직여 준비한 물수건으로 황제의 얼굴과 손을 닦았다.

 

“영왕의 혀를 뽑고 사지를 잘라, 누구의 도움도 없이 평생 영왕부에서 썩게끔 해.”

 

어떤 억양의 고조 없이 말을 내뱉은 그가 그대로 돌아서 침전으로 향했다. 황제가 저렇게까지 분노에 사로잡힌 모습은 처음인 문덕은 사색이 되어 뒤따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언제나 넓고 든든해보였던 황제의 어깨가 오늘따라 천근만근 무거워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침전에 도착하고도, 한참을 말이 없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곤하니 모두 물러가.”

 

그가 덧붙여 명했다.

 

“짐의 침전 근처로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하게 하라.”

 

썰 물 빠지듯 태감을 비롯해 모두가 물러가자 침전에 황제와 문덕만 남았다. 밖은 어느덧 어둑어둑해져 둥근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문덕이 차마 나가지 못하고 어찌해야 될지 고민하는 중 황제가 말했다.

 

“너도 가거라.”

 

주후조의 차가운 목소리가 문덕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불현듯 문덕의 눈앞에 며칠 전, 회임 소식으로 기뻐하던 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입술을 지그시 한번 깨문 문덕리 생각했다. 자신만큼은 황제의 곁에 있어야만 될 것 같았다. 한순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그를 이대로 두고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오늘은… 보름이옵니다. 저는 이곳에 남아 폐하를 지켜드릴 것이옵니다.”

 

돌연 주후조의 눈빛이 흐려지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무서우리만치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켜?”

 

“폐하?”

 

문덕이 놀라 황제를 부르자, 돌아선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피를 뚝뚝 흘릴 것처럼 붉었다. 그가 소리를 질렀다.

 

“네까짓 것이 나를 지킨다? 지킬 수 있을 것 같더냐? 무슨 수로 지키겠다고? 모두가 짐이 죽기만을 바란다. 짐의 숙부마저도 짐이 죽기를 바라는데!! 짐의 아이를 죽이고, 짐을 죽이고! 그런 그들에게서 지켜줄 것이냐?!네가? 진심은 너도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느냐?! 너도! 너도!!!”

 

이성을 잃은 듯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던 주후조가 갑자기 문덕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문덕은 커다란 두손이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걸 느꼈다. 너무 급작스러운 상황에 저도 모르게 황제의 손목을 부여잡은 문덕이 힘겹게 그를 불렀다.

 

“폐, 하…….”

 

하지만 점점 목을 조여 오는 손아귀의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와중에 찡그리고 있는 문덕의 시야에 황제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두 눈은 분노와 두려움으로 얼룩져 흐려져 있었지만, 왜인지 문덕은 그 안에 깃든 깊은 슬픔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감히 제가 가늠할 수 있는 크기의 슬픔은 아니었지만 문덕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보듬어주고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의 목숨으로 그가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편해질 수 있다면, 제 목숨 따위 기꺼이 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문덕이 황제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몽롱하게 정신을 잃어가는 시야 속, 어쩐지 황제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만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문덕은 저는 괜찮으니 슬퍼 말라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

.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을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문덕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자신이 폐하의 침상 위에 누워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보다 또 한 번 폐하의 침상에 눕게 된 것에 더 놀란 그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침전의 내부가 깨진 화병과 도자기들의 파편과 쓰러져 뒹구는 가구들로 난장판이었다. 그 참혹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린 문덕이 좀 더 시선을 옮기자 침전의 문들이 모두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매우 밝았다.


허리 아래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를 늘어트린 채 고개를 하늘을 향하고 있는 황제가 요요히 흐르는 달빛 속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꿈결 같다 생각되는 순간, 바람에 황제의 소매가 흔들렸다.

 

 

 

두근.

 

문덕의 심장이 한번 크게 뛰었다. 한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계속해서 세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아아……. 내가 폐하를, 연모하는 구나…….’

 

세상엔 마음만으로 넘을 수 없는 신분 차이가 존재했다. 하물며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문덕의 얼굴이 끝없는 슬픔으로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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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했던 일기일회 시리즈가 3편으로 끝났습니다.

다음이 궁금하시면 선망부터 보셔용(죄송)

원래 선망->심애->연 시리즈의 두사람이 어떻게, 왜 사랑에 빠졌는지 쓰고 싶어서 썼는데..음..어쩌다 보니 설정에 구멍이 많네요..ㅠㅠㅠㅠㅠㅠㅠ엉엉 뭐 생각나면 외전도..번외도...웅앵웅..

일기일회를 먼저 게재했어야했나 싶고...하..이미 결말 내고나서 쓴거라.....개연성도 없고..휴


둔탱이 문덕이는 후조가 좋아한지 5년만에 후조를 좋아하는데 후조가 저를 장가보낼라고하고 죽일라고 하고..이래저래 오해하는 상황이에요..서로 저러고 삽질만 하다가 해피엔딩!


애정을 담아 쓴거라..사족이 기네요...죄송..

엉성하고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룡백에 과몰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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