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였다.

세상에서 가장 기분 더러운 이별이 뭘까 고민해봤는데, 모든 이별이 나보단 덜 할 거라 섣불리 단정했다. 끝장나게 잘생긴 내 애인은, 참 오랫동안 내 휴대폰에서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내 속만 바짝바짝 태웠던 그 놈은, 정확히 12일하고 8시간 만에 내 앞에 나타났다. 울며불며 걔의 가슴팍에 주먹질을 하는 날, 아주 달콤하게도 차버렸다.

형,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형도 더 좋은 사람 만나.

 

“나한테 너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

 

이런 어긋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첫 연애였고, 걔는 남자가 처음이었다. 나 이전에 수많은 사람을 거친 걔가 느즈막히 다가와 내 귓가를 간질였을 때, 난 두근거리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예쁜 여자가, 걔한텐 항상 위에 있었다는 걸, 너무 뒤늦게 알았다.

 

참 조용하기도 한 휴대폰을 눌러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 신데렐라도 아니고 자정 넘겨 들어오면 불같이 화를 내는 룸메이트 때문에 밍기적밍기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끼, 초반엔 같이 술도 먹어주고, 중반엔 내가 혼자 술 마신다면 데리러도 와주고 그랬는데, 벌써 내 이별에 후반부가 온 걸까, 내가 술 먹는다고만 하면 역정이나 내고. 내가 차인 이후로 취해 들어가 진상 짓을 한 게 한 두 번은 아니니 딱히 할 말은 없다.

 

[23분 남았다.]

 

아, 간다고. 가.

 

“학생, 오늘 많이 마셨네. 집 갈 수 있겠어?”

“갈 수 있어요, 금방인데. 안녕히 계세요.”

“돈은 내고 가야지.”

“아.”

 

카드를 내민 내 왼쪽 손, 약지에 하얗게 남은 반지자국이 부끄러워 손을 움츠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넉넉하게 낄 걸, 나쁜 새끼. 꽉 낀다는데도 잃어버리면 안 된다며, 쉽게 빠질 수 없는 사이즈가 좋다며 기어코 작은 반지를 내 약지에 끼워줬었다. 그게 나한테는 족쇄였을지 모르지만, 걔는 나 만날 때가 아니면 반지를 끼지 않았다. 주머니 위를 더듬거렸고, 손끝에 동그란 형체의 물건이 만져졌다. 아직도 못 버린 이게, 내 손가락에 끼워진 순간부터 나는 걔의 물고기가 됐다. 심지어 결코 도망갈 생각조차 않는 멍청한 물고기였다.

 

에이 씨, 너무 비참하고 화가 나는데 딱히 풀 데가 없을 때, 나는 꼭 눈물이 터졌다.

그렇게 울컥 했다가 그 울컥한 내 자신이 불쌍해서 더 눈물이 나고,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가 생각하다가 걔 생각이 나서 더 울고, 그게 그냥 반복됐다. 그 것이 내 요즘 일상이었다.

 

“으아악!”

 

몇 개 되지도 않는 계단을 잘 내려가다가, 마지막에 내 무릎이 땅바닥과 강하게 맞부딪혔다. 이 개새끼, 소새끼, 각종 동물은 다 찾다보니 그제서야 엄청난 아픔이 몰려와 그대로 드러누운 채 엉엉 울어버렸다. 보고싶어, 나쁜 놈아! 그렇게 외쳤던 것도 같다.

 

 

 

 

내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뭐야?”

“일어났어요?”

“…….”

“나 곧 출근해야 하는데.”

 

누가 망치로 내 후두부를 갈긴 것 마냥,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원치 않게 눈을 떴는데 내 등과 맞닿은 침대가 무지하게 푹신했다. 내 싸구려 침대가 아닌 걸 눈치 챈 순간, 앞에 웬 남자가 웃통을 깐 채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초면에 쓸데없이 달콤한 목소리는 덤.

 

“으어억! 당신 뭐야!”

 

당황스러운 순간에 내 몸을 더듬으니 나도 웃통이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이불자락으로 내 몸을 가렸다. 그 남자가 날 보고 피식 웃더니 본인 셔츠 단추를 채웠다. 내 옷은 주변을 아무리 봐도 없고, 내가 아무리 취했다 한 들 남의 집에서 옷을 어디 벗어던지고 잘 사람도 아니었다.

이건 확실히 원나잇이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쳐갔다.

김재환, 드디어 미쳤구나.

 

머리를 스스로 쾅쾅 두드리던 차에, 언제 방을 나갔는지 그 남자가 내 옷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깔끔하게도 개켜진 내 옷에서 담배 쩌든내가 아니라, 방금까지 맑은 햇빛에 곱게 마른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날 내려다보는 그를 쳐다보았다. 더럽게 잘생겼네. 순간적으로 내가 첫 원나잇을 한 상대가 저렇게 잘생긴 놈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미친놈이었다. 얼른 옷을 입으라는 듯이, 그가 고개를 한번 까딱였다.

 

고맙게도, 그는 단 한 마디가 없었다. 배터리가 바닥인 휴대폰을 집어 확인을 해보니 아침 아홉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눈알을 열심히 굴리며 혼자 살기엔 참 넓은 집을 스캔하던 순간에 다급히 넥타이를 매는 걸 봐서 그는 출근 시간에 늦은 것 같고, 나는…… 이제 꼼짝없이 F였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데,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나갈까요, 우리?”

 

그는 ‘우리’라고 말했고,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내려가는 내내 한 쪽 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그 남자의 발끝 언저리만 쭈뼛거리며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1층에만 도착하면 무작정 튀려고 했는데, 그가 내 팔을 잡았다. 타요, 데려다줄게.

 

그래서 그 남자의 삐까뻔쩍한 외제차에까지 올라탔다. 그것도 조수석에 나란히. 안전벨트, 짧게 뱉은 그의 말에 착실히 안전벨트까지 매고서. 원나잇이란 거, 들어만 봤는데 나는 이렇게 민망하고 어색한 건 줄 몰랐다. 쿨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쿨하게 헤어지는 건 줄 알았다. 아까 침대 위에서 내 발가벗겨진 윗몸을 자각한 순간부터, 빨갛게 열이 오른 귀가 식을 생각을 안 했다. 그렇게 식은땀이 다 나는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물었다.

 

“집이 어디라고 했죠?”

“합정동…….”

“회사 가는 길이네. 가다가 내려줄게요.”

“감사합니다…….”

“아, 잠깐만 기다려요.”

 

조수석 창 밖을 내다보더니, 갑자기 갓길에 차를 세웠다.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나온 그가,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 걸음을 빨리 해 돌아왔다. 왼 손엔 커피, 오른 손엔 헛개나무 차. 예상한 대로 나에게 오른 손을 내밀었다.

 

“마셔요, 속 쓰릴텐데.”

“감사합니다아…….”

 

쪽팔려 죽겠다. 그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인 나를 보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봐도 선수였다. 초면에 같이 잠을 자고서도 이렇게 의연한 태도와, 저 하얗고 콧대 높은 얼굴, 슬쩍 봤지만 살짝 올라간 눈매까지. 분명했다. 도대체 이런 사람을 어디서 만난거지, 바닥에 무릎을 부딪힌 이후론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릎이 아니라 머리를 박았나.

 

“저기.”

“네?”

“회사, 안 늦으셨어요?”

 

아홉시 반도 넘었는데, 여유롭게 갓길에 차를 대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그 남자가 걱정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지금 상황에서, 딴 건 생각할 겨를이 없고 그냥 집에 빨리 가고 싶었다.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입을 열었는데, 그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 대답 없이, 그는 세상 따뜻한 미소를 머금더니 다시 시동을 걸었다. 답답해서 창문이라도 열고 싶은데, 마음대로 행동하기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물어보기는 더 뭐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눈치는 빨라가지고, 그 남자가 창밖만 뚫어져라 보는 나를 위해, 창문을 반쯤 열어주었다.

 

“그, 저기요.”

“말해요.”

“어제, 참,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먹었나.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그게 궁금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드릴까, 그 쪽이 우리 집 변기 붙들고 토한 거?”

“여, 여기! 여기서 세워주시면 돼요!”

 

우리, 잤어요? 그 질문을 꺼낼 용기도 없었지만, 그런 마음을 먹기도 전에 서둘러 그 남자의 말을 끊었다. 모르는 사람 집까지 따라간 것도 모자라서, 그 깨끗한 집에다가. 미쳤어, 진짜. 사실 여기서 버스 타고 몇 정거장은 더 가야하는데, 눈에 익은 간판이 보이자마자 안전벨트를 풀었다. 나는 여기서 나가야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차를 세웠다. 허둥지둥 그 차에서 내렸다. 우린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렇게 헤어졌다.

그런 줄 알았다.

 

진짜 민폐였던 것 같은데, 죄송하단 말도 못했다. 부재중 전화 더럽게 많이 찍혔네, 다니엘한테 뭐라고 말하지.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기에, 급하게 담배를 물었다. 날 내려주고 곧바로 출발한 그 차가, 이상하게 다시 내 쪽으로 오는 듯 했다. 모른 척 도망가야하나 싶었는데, 불을 붙이려던 행동 그대로 몸이 얼어버렸다. 창문을 내린 그가, 나에게로 손을 뻗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황민현, 그 남자가 건넨 명함을 이름만 확인하고 곧바로 손바닥에 쥐어 구겼다. 그래봤자 하룻밤 상대일 뿐이었다. 그냥, 잊어버리면 됐다.

 

 

 

다니엘한테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집에 돌아와 죽은 듯 자고 일어나서, 뭐만 하나 빨리 주워 먹고 외출할 생각이었다. 그냥 룸메이트 주제에 무진장 집착하면서도, 또 은근히 단순한 인간이라 며칠만 그렇게 피해 다니면 금세 잊어버리니까. 급하게 라면 하나를 끓여 한 젓가락 무는 순간, 소름 돋게도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미친……! 몸을 숨길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쿵쾅쿵쾅 바닥을 구르며 다니엘이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야, 이 미친놈아!”

“컥, 니, 니에라.”

“뒤질래, 숨질래. 둘 중에 하나만 정해라.”

“진정해, 진정!”

 

내 머리통을 그 묵직한 팔뚝으로 죄고 흔드는 다니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열 번 정도 하고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결국 딱 한 입 먹은 라면까지 통째로 뺏기고 다시 물을 올렸다. 니 어젯밤에 뭐했는데, 그래서. 걔 다시 만났을 리는 없고. 대답할 때까지 물어볼 성격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말해야 했다. 식탁에 새 라면을 하나 더 올리고, 다니엘 맞은편에 앉아서야 내 입이 겨우 열렸다.

 

“야, 있잖아.”

“어.”

“너…… 원나잇 해봤냐?”

“애인 있는데 그딴 걸 왜 하노. 아니, 니 설마!”

“아니야. 아니, 딴 남자 집에서 자기는 했는데 그걸 했는지는 모르겠어, 기억 하나도 안나. 아침에 민망해서 물어보지도 못했어. 아, 이걸 어떻게 알아내야 하지?”

“뭔가 느껴지는 게 있겠지. 허리가 쑤신다거나, 무릎이 쓸렸다거나.”

 

허리는 이리저리 돌려봐도 멀쩡하고, 무릎? 무릎에 손을 댔다. 아악!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이거 나 어제 계단에서 넘어져서 그런 거 아닌가, 다른 이유가 또 있나. 라면을 먹다 말고 머리를 싸매는데 다니엘의 표정이 울긋불긋해졌다.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파. 하하! 멀쩡한 거 봐! 눈치 보느라고 아파 죽겠는데 주먹으로 무릎 두 짝을 퍽퍽 때리며 어필했다. 내가 끓인 라면을 단숨에 집어삼킨 다니엘이 날 미친놈 보듯 흘기며 일어났다.

 

“어디 가. 수업 끝나서 온 거 아냐?”

“어제 니 땜에 설친 잠 보충하러 간다. 아무튼 또 잠수 타고 집 안 들어오면 기필코 죽일테니까 니 알아서 해라.”

 

분위기를 봤을 때, 난 이제 며칠간은 꼼짝없이 집에 박혀있어야 했다. 한숨을 뱉으며 아직 많이 남은 라면을 뒤적거렸다. 몰라, 잤으면 어쩌고 안 잤으면 또 어쩔거야. 아, 또 술이 땡겼다.

 

 

 

라이터를 어디다 뒀더라. 담배를 문 채로 주머니를 뒤졌다. 잡동사니가 가득한 점퍼 주머니를 한참을 뒤져서야 라이터 모양의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불을 붙이려는데, 라이터를 꺼낼 때 딸려 나온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남자, 황민현의 명함이었다. 이 사람은 무슨 명함도 이렇게 번쩍거려. 한 모금 담배를 빨아들이고, 명함을 잘 펴냈다. 다니엘만 단순한 줄 알았더니, 근묵자흑이라고, 나도 어느 샌가 닮아간 것 같았다. 룸메이트 눈치 보느라 저녁엔 집에 박혀 있다가, 착실히 잠을 자고, 착실히 학교에 가서 교수님께 앞으론 출석 잘 하겠다며 빌은 것이 요 며칠의 전부였다. 황민현이고 뭐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잘생기긴 진짜 끝장나게 잘생겼었는데, 그 인간. 내 전 애인 걔보다 잘생긴 애는 난생 처음 봤다. 그날 딱 하루, 자꾸만 그 남자와 내가 몸을 섞는 장면이 떠올라서 하루 종일 잠만 청했다. 얼마나 신경이 쓰였던지 꿈에서조차 그가 나왔다. 깨고 나서 잠깐은, 그와의 만남이 꿈은 아니었을지 생각했다. 그래도 고마워해야 하나, 이별 후에 하루도 안 빼고 울었었는데, 그 날 이후로는 나름 덜했다.

 

다 태워진 담배를 비벼 끄는 손가락 위,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반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반지. 항상 이 바지 주머니 속 깊숙이 넣어두고 생각나면 꺼내봤던 것이기에, 분명 여기 있어야했다.

 

“없어.”

 

없다. 각종 영수증이며, 쓸데없이 오랜 시간 주머니 무게를 채우고 있던 10원짜리 동전들, 꼬깃꼬깃 접힌 지폐까지,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모든 물건을 쏟아내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다 둔거야, 김재환! 생각해 내! 마지막으로 만진 건, ‘그 날’이며, 그 후의 기억은 암흑이었다. 그 건, 언젠가 걔의 전부를 잊는 순간, 높은 곳에서 던지든 물속으로 빠뜨리든 내 손으로 버려내고 싶었던 거였다. 초조함에 손톱을 물었다. 내 손바닥에 놓인 그 남자의 명함에서, 11자리 숫자가 반짝거렸다.

 

 

 

 

“많이 기다렸어요?”

 

그 날이 결코 꿈은 아니었던 지, 그는 그 날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생각보다 늦게 연락했네요, 재환 씨. 내가 수십 번 고민 끝에 걸은 통화에서, 그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렇게 대답했다. 용건만 짧게 한 전화를 끊고 난 후에야 어떻게 그가 내 이름을 아는지를 고민했다. 나는 수 시간동안 발만 동동거렸고, 전화상에서나 현실에서나 태연하고 침착한 그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금방 퇴근할 것 같다는 그의 문자가 있던 후 몇 십분 간, 난 쾌쾌한 지하 주차장에서 그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고, 그가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반가움 반 초조함 반으로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켜 달려갔다. 내 마음을 모를 수밖에 없는 그는, 또 다시 태연히 날 지나쳐 삑, 차문을 열었다.

 

“그, 그게 사실 제가요.”

“할 말은 식사 하면서 하죠. 배고픈데, 그래도 되죠?”

“아…….”

“뭐해, 타요.”

 

생긴 대로 노는 사람이라는 말이 꼭 어울렸다. 그에게도 역시 하룻밤 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내가, 갑자기 급한 용무가 있다며 자신 회사 앞에까지 찾아왔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라도 대충 허기만 때울 줄 알았더니 웬. 저녁 드셨나 보네요, 만나서 같이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다시 내 앞에 놓인 티본스테이크 접시에 코를 박았다. 저녁 안했다. 식사는커녕, 그의 회사 앞 카페에서 마신 아메리카노가 전부였다. 그래도 마음이 초조하니 내가 평소 환장하는 소고기에도 손이 안 갔다. 이 상황에서 하필 웬 스테이크야, 진짜. 그것도 전 애인 걔가 아는 누나와 다녀왔다던 그 더럽게 비싼 레스토랑이었다. 나한텐 돈 없어서 데이트 못한다고 해 놓고, sns에는 ‘아는 누나’를 태그 해두고 보란 듯이 사진을 올렸던 그 곳. 그 사실마저 눈치 보며 여쭤보듯 따졌던 나에겐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아는 누나가 사줘서 처음 가봤다고 말하던 그 곳. 신경질적으로 가니쉬를 뒤적였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그는 손목시계를 자꾸만 확인했다. 뭔들 빨리 먹고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찾을 물건이 있으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도 시계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중요한 약속이 있는 듯한 행동을 해놓고선 고기를 참 천천히 씹었다. 뜨겁게 달궈져 나온 스톤 위의 스테이크를 한참이나 안 먹고 바라만 보기에, 그 모습이 이상해서 좀 쳐다봤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웰 던만 먹어서. 그럼 주문할 때부터 웰 던으로 익혀달라고 했으면 되잖아. 포크를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님, 마감 10분 남았습니다.

정각 열시에 문을 닫는 레스토랑의 빈 좌석이 하나하나 늘어가고, 결국 우리 둘만 남게 된 뒤에야 그가 태연히 입을 닦고 일어섰다. 평소엔 느끼지도 못하던 금단 현상이 겨우 두 시간 못 피웠다고 손이 떨렸다. 또 그 광나는 외제차에 올라타서, 얌전히 안전벨트까지 매고 떨리는 손을 보고 있던 나에게 그가 따뜻한 커피를 쥐어주었다.

 

“이제 말해요, 무슨 일인지.”

“반지를 잃어버렸어요. 우리 잤던 그 날에.”

“반지요.”

“헤어진 애인이랑 맞췄던 반지인데, 아, 아직 완전히 헤어진 건 아니고. 그 날 그러고서 또 연락하는 거 창피한 일인 줄 아는데요, 진짜 소중한 거라서.”

“아.”

“죄송해요.”

“내가 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딱히 나한테 할 말이 있던 것도 아니라. 반지 찾으려고요.”

“그게…….”

“어제 세차했어요, 여긴 아무것도 없던데. 소중한 거니까, 집에서 얼른 찾아봐야겠네. 그쵸?”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전 애인이랑 맞춘 반지라는 말 괜히 했다. 곧바로 시동을 거는 그의 입술 끝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다. 이런 내가 한심해서, 한가득 열이 올랐다. 갑작스런 밤비가 오는가, 간간히 맺혀가는 창문의 물방울만 숨죽여 바라보았다. 그의 집까진 금방이었다. 능숙하게 주차장에 차를 대며, 그가 혼잣말 하듯 말했다.

 

“우리 안 잤는데.”

“에?”

“섹스 안했다고, 우리.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해요.”

“그, 그럼 제가 그 날 왜 이 집에서 잤어요?”

“택신 줄 알았는지, 내 차에 올라타서는 주소도 다 안 알려주고서 곯아떨어지는데 내가 뭘 어떡해. 그래서 집 데려왔더니 한참 토하다가, 더 듣고 싶어요?”

“아뇨. 아니, 그럼 신고를 하지! 아, 이 개진상…….”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어이없는 도중에도 덜컥.”

 

가슴 깊숙이서부터, 미묘한 감정이 퍼졌다. 퍼짐의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금세 발가락 끝까지 저릿했다. 주차를 다 마쳤다는 신호로, 그가 기어를 당기자, 차의 전조등이 꺼지며 주변이 확 어두워졌다. 쥐죽은 듯 조용함까지 감돌았다. 그 남자가, 멍하니 자신만 보고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주먹을 꼭 쥔 손목에서 내가 느껴질 만큼 맥이 쾅쾅 뛰어댔다.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얼른 찾으러 가요, 반지.”

 

후 하, 참았던 숨을 내 뱉었다. 씨발, 저거 진짜 선수 맞다니까. 약이 바짝 올랐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을이었다. 그 남자가 앞장 서 걷는 길을 뒤쫓아 걸었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내 난 애꿎은 신발 밑창만 바닥에 부볐다. 문이 열리고서, 그가 타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웃었다. 저 이상한 놈이, 적어도 지금은 나에게 있어 갑이었다.

 

 


 - 계간년짼 봄호 

초보 짼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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