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추억 

 

 

인형 

 

사진 

 

작별 

 

인연 

 

 


有緣千里來相會

 

유연천리래상회

인연이 있다면 1000리를 떨어져 있어도

반드시 만나게 된다

-중국 속담-


 

 

추억

 

 

 

 

어느덧 날이 포근히 풀리고, 더는 찬바람이 불지 않을 시기가 되었다. 창문을 열면 서늘한 공기 대신 따스한 햇볕이 제일 먼저 느껴졌다. 오늘은 또 오랜만에 유독 화창한 날씨였기에, 봄맞이 대청소를 하기 딱 좋았다. 

"히로. 히로 방도 어서 정리해놔. 나 거실 바닥만 청소하면 다 끝나서 곧 들어갈 거야."

"조금만! 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

평소에 히로 방은 알아서 치우라고 손을 대지 않았더니, 어제 언뜻 보니 엉망진창이었다. 마침 오늘의 날씨가 맑다기에 대청소를 하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였다. 그저 문틈 사이로 본 것만으로도 물건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분명 잘 쓰지 않는 책장 위는 먼지투성이겠지. 하루 쯤 날 잡고 제대로 청소하지 않는다면 아마 저대로 1년은 그냥 둘 것이다. 

거실의 카펫 먼지를 탈탈 털고, 청소기를 가볍게 돌렸다. 사실, 거실은 주말마다 청소하니까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먼지까지 다 닦아내고 말끔해진 거실을 뒤로 한 채, 히로의 방 문을 두드렸다. 

똑똑

"다 됐어? 나 들어간다?"

"뭐? 벌써? 잠깐...!"

히로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를 않은 모양이었지만, 이대로 기다리다간 저녁이 되어도 정리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벌써 3시간 째였다. 다른 곳을 전부 청소 할 동안 전혀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둘이서 함께 정리하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었다. 

코우지는 히로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앞에는 꽤나 참혹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엉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물건들이 너저분하였다.

"히로...... 정리를 하라니까 어지럽힌 거야?"

"그게 아니라! 구석 구석 정리하려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그리고 어지럽힌 게 아니라 저 안 쪽에 옛날 물건들도 많아서 버려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어."

히로는 한 쪽의 물건더미를 가리키며 항변하였다. 그 더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확실히 지금은 쓰지 않을 법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릴 적 입었을 낡은 옷, 초등학교 교과서, 동화책 따위가 한 데 뭉쳐 있었다.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어?"

"예전에는 버리기 아깝다고 생각해서 가지고 있었거든. 그 뒤로 바쁘다보니 완전 잊고 있었네."

"그래도 그렇지, 이 인형은 너무 낡지 않았어?"

코우지가 물건 더미 중 제일 보잘 것 없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들어 올린 것은 상당히 꼬질꼬질한 토끼인형이었다. 원래는 흰 색이었을 테지만, 이미 회색으로 변하다 못해 살짝 누렇게 변색되어 회갈색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다만 군데 군데 덜 더러워진 부분들이 원래의 색을 보여줄 뿐이었다. 

"아, 그건 안 돼. 절대 못 버려."

히로가 코우지의 손에서 인형을 앗아갔다. 

"어디 있었나 했더니 이런 상자에 다 들어 있을 줄은 몰랐지."

"왜? 선물 받은 인형이야?"

"응.“

"누구한테?"

"음.. 내 첫사랑?"

장난스럽게 웃으며 히로는 대꾸하였다. 코우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곤 반문하였다.

"첫사랑? 히로 첫사랑은 나 아니었어?"

"으음...... 난 그렇다고 확답한 적은 없는데? 코우지 첫사랑이 나라고, 꼭 내 첫사랑이 코우지라는 법은 없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조금 서운하였다. 당연히 히로도 자신이 첫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물론 혼자서 생각한 거니 그런 말을 들어도 당연스레 받아들여야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히로 첫사랑은 누구인데?"

“음. 내 어린 시절의 전부였던 사람.”

"히로한테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가까운 사람이 있었어? 왜 난 전혀 못 들어봤지?"

"그건...... 비밀!"

히로는 베시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꼬질꼬질한 토끼 인형을 꼬옥 품에 껴안았다. 세월의 때가 잔뜩 묻었음에도 마치 귀한 보물마냥 다루는 히로를 보니, 어째선지 질투가 났다. 

코우지의 속내도 모르고, 히로는 인형을 잠시 품에 안고 있다 마저 상자를 뒤지기 시작하였다, 상자 안에서는 두 가지 물건이 더 튀어나왔다. 하나는 폴라로이드 사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벨벳 반지 케이스였다. 약간 낡기는 했지만.

"전혀 공통점이 없는데? 그리고 이 반지 케이스는 뭐야? 안에 반지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코우지 눈에는 쓸모 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엄청 중요한 물건이야. 아저씨랑의 소중한 추억인걸!"

"아저씨? 그 사람이 아저씨야?"

코우지는 단숨에 얼굴을 구겼다. 어린아이에게 접근해서 수상하게 무언가를 주는 사람이라니. 절대 좋은 사람일 리가 없었다. 히로가 어릴 적부터 썩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들으니 더 불쾌하였다. 

"코우지 지금 무슨 생각 하는 지 다 보이는데, 코우지가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히로는 입을 비죽 내밀며 코우지의 미간을 검지로 꾹 눌렀다. 코우지는 더 찡그리며 살짝 뒤로 밀려났다. 

"코우지가 하도 의심하니까 뭐 조금은 말해줄게. 아저씨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음...... 우리 또래쯤 될걸? 얼굴이 기억이 나질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처음 만난 게 5살 때였는데 그때는 학생 아니면 다 아저씨로 보였으니까, 그렇게 불렀어."

"그래서 왜 이런 것들을 히로한테 줬는데?"

코우지는 이리저리 살피다 사진을 들어 올렸다. 그 사진 속에는 수줍은 표정으로 몸을 경직시키고 있는 어린 히로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폴라로이드의 화질도 썩 좋지 않았겠지만, 그보다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오래토록 들여다 봤는지 여기저기 종이가 일어나 있고, 코팅은 벗겨진 곳도 있었다. 그나마 머리 색과, 밝은 얼굴의 생김새로 히로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옷도 낡아 있었고, 머리는 제대로 자르지 않아 이리저리 뻗친 채 자라 있었다. 아마도 이 시기는 히로가 어머니와 함께 가장 어렵게 살던 즈음이 아닐까 싶었다.

"그건 나 9살 때. 아저씨가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찍어줬어. 한 번도 혼자 사진 찍어본 적이 없었거든. 아저씨도 찍어주려고 했는데...... 나를 찍고 나니까 사진 필름을 전부 썼다고 하더라구. 너무 아쉽지?"

"전혀? 그런 이름도 정체도 불분명한, 엄청 수상한 사람의 얼굴 따위는 알 필요 없어."

"오늘 청소한 덕분에 전부 찾았네. 고마워."

"......"

코우지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일어나 방을 나왔다. 이 기분 나쁨은 어쩌면, 치졸한 자신에게 느끼는 죄책감이기도 하였다. 고작 5살 때 처음 만난 사람을 질투하는 것이 우스웠다. 첫사랑이라고는 하지만 5살짜리의 감정이 지금의 것과 같을 리도 없었고, 이야기를 들어서는 아마 지나가던 동네 꼬마에게 잘 해주던 사람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에, 스스로가 옹졸해보였다. 굳이 그것을 캐물어 알아낸 것도, 알아내고서도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도. 평소라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상황을 굳이 되새겨가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조차도. 전부 다 마음 한 구석에 기분 나쁜 무언가를 남겨 둔 느낌이었다. 

이제 청소를 마무리하기만 하면 되는데. 어째서인지 별로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불에 가만히 옆으로 누워있으면, 슬그머니 뒤에서 손이 감겨온다. 히로였다. 등에 꼭 달라붙어 코우지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말랑한 뱃살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덧 단단한 근육이 되어 있었다. 탄탄한 배근육의 감촉을 느끼며 히로는 더 달라붙어 왔다. 

"간지러워."

"그러라고 만지는 거야. 간지러우면 좀 웃지 않겠어?"

히로는 볼멘 목소리로 말하고는 더 손을 힘차게 움직였다. 조금 전에는 그냥 쓰다듬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아예 간지럽히기를 작정한 움직임이었다. 코우지는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발버둥 치며 히로에게서 빠져나온다. 

"항복! 항복!"

웃음을 터트리며 히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코우지 품에 들어가자 단숨에 얌전해진 히로는 살짝 고개를 들어 코우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제 기분 좀 괜찮아?'

"알고 있었어?"

"아까 청소 끝나고도 저녁 먹는 동안 입꼬리가 축 쳐져 있었잖아. 코우지의 표정이라면 사소한 거라도 전부 알 수 있어."

히로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코우지의 입가를 꾹 눌러 올렸다. 삐에로처럼 초승달 모양으로 휜 입가는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히로는 키득거리며 코우지의 입가를 잠시 제멋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지고 놀았다. 

"정말 별 거 아니야. 몇 번 만나 본 적도 없고, 너무 옛날에 본 사람이라 얼굴을 기억도 못 하는 걸."

"그래도 그 물건들은 정말 소중하다며."

"그 당시에는 그랬지. 그래도 지금은 코우지랑 하고 있는 이 커플링이 더 소중해."

히로는 공중에 손가락을 쫙 펼쳐 올렸다. 왼손 약지에는 1주년을 기념해서 맞추었던 가운데 작은 보석이 박힌 심플한 실버링이 끼워져 있었다. 골드링은 결혼식 때 끼워달라며 실버링으로 고르던 히로의 웃는 모습이 생생하였다. 이 반지를 낀 지도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었다.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무언가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야. 그래서 너무 좋았어.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나는 사랑 받을 수 있는 아이라고 말해 줬어. 그래서 그 사람이 주는 건 뭐든지 좋았어."

히로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 시절의 추억이 여전히 손에 쥐일 듯 남아 있는 지, 손을 뻗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목소리는 살짝 메어 있었다. 코우지는 그런 히로를 품에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히로는 늘 사랑 받을 수 있는 아이였어. 그리고, 이제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고."

머릿결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달콤한 말을 건넸다. 히로는 그 달달함에 푹 빠져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사랑 받을 수 있고,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행복의 용사, 하야미 히로야."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고?"

마지막에 꼭 자신을 덧붙여 상기시킨다. 히로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호응하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연인이 생긴 지금, 

“아, 하지만 아직도 반지 케이스는 왜 줬는지 모르겠다. 뭐라고 했더라. 마지막으로 봤을 때 받았는데. 잠결에 만난 거라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래도 다음날 일어나보니 케이스가 손에 있어서 꿈은 아니구나, 했지."

히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조금씩 질투심은 물러간다. 사람은 누구나 그 시절의 소중한 것이 있다. 5살짜리 아이에게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인형이 소중한 것이 당연하였다. 누군가가 해주는 좋은 말이 기쁜 것도 당연하였다. 결국 그런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히로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덧 기분 나쁜 생각도 전부 달아나 버렸다. 

“속 좁게 굴어서 미안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우리는 미성숙한 만큼 많이 배워가는 존재잖아? 코우지가 질투하는 거 충분히 이해 가. 우리가 서로 몰랐던 시기만큼 여백이 있으니까. 나도 코우지가 나를 모르던 시절에 소중히 여겼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분명 질투했을 거야.”

히로가 다정히 입을 맞춰 왔다. 부드러운 살결이 잠시 닿았다 떨어진다. 코우지는 떨어져가는 그의 입술을 향해 쫓아 가 따라잡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입맞춤이 늘어졌다.

 

 

◇◇◇◇◇◇◇◇◇◇◇◇◇◇◇◇◇◇◇◇◇

 

“나 오늘 과자 3개 사도 괜찮아?”

“아니, 하나만 돼.”

히로가 카트에 담은 3개 중 2개는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히로의 입술이 대발처럼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카트에 다시 하나를 담으며 잔뜩 애교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지 말고~ 딱 하나만 더 응? 나 이 과자는 이번 주에 나온 신상품이라 꼭 먹고 싶단 말이야.”

“그럼 이걸 담고, 저걸 빼면 되겠네?”

코우지는 히로가 담은 것 대신 다른 것을 빼서 제자리에 두었다. 히로가 눈을 크게 뜨고 곧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이 울먹이는 눈빛을 보냈지만, 코우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애교도, 애원도 통하지 않자 히로는 씩씩거리며 혼자 저 멀리 가버렸다.

“됐어! 코우지 혼자 쇼핑해.”

히로는 심통을 부리며 아예 식품 코너를 떠나버렸다. 예전이었다면 다급히 쫓아가 달랬겠지만, 이제는 어차피 저대로 내버려두면 게임 코너를 둘러보다 신나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이 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3년 째. 처음에는 낯설고 당황스러웠던 부분도 이제는 익숙한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히로를 찾으러 가려면 한 2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 동안 장을 보는 편이 좋았다. 히로가 곁에 있으면 싫어하는 것은 쏙쏙 빼버리는 통에 일이 길어지지만, 혼자서 본다면 충분히 남는 시간이었다.

과자 코너를 떠나기 전, 잠시 고민하다 결국 히로가 고른 과자 두 개를 전부 카트에 담았다. 아직 집에 과자가 많이 남아 있기에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결국 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히로는 늘 ‘코우지에게는 못 당하겠어.’라고 투덜대었지만, 사실은 정 반대였다. 코우지가 히로에게 휘둘리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오늘도 이렇게 져버리고 만다.

“오늘 야채가 싱싱합니다! 무랑 배추는 50퍼센트 할인! 당근은 하나에 800원이라는 파격적 가격입니다!”

“지금부터 단 10분간 삼겹살 20퍼센트 할인! 목살 30퍼센트 할인! 수량 얼마 없으니 빨리 오세요!”

여기저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퍼졌다. 수많은 소리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만 골라 듣고 세심히 장을 봤다. 싸다고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품질이었다. 조금 비싸도 싱싱하고, 좋은 품질의 재료를 쓰는 것이 요리의 중요한 포인트니까.

익숙한 시선으로 장을 보다보면 어느 새 카트 안이 수북이 쌓였다. 어제 청소를 하며 냉장고 정리도 하다 오래된 것들이 보여 전부 버렸더니, 오늘 장은 꽤나 무겁게 보게 생겼다. 약간은 과소비를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만, 차도 있고 건장한 성인 둘이서 이 정도면 한 두 번 왔다 갔다 하면 충분히 옮길 수 있는 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누군가가 코우지 앞에 불쑥 나타나 말을 걸었다. 혹시 팬인가? 급히 모자를 눌러 써 아닌 척 하려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평범한 호객행위였다.

“지금 경품 추첨 이벤트를 하고 있어요! 시음하고 간단한 설문조사만 해주시면 추첨 기회를 드립니다. 1등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예요!”

귀찮은 것은 별로였지만 막상 눈앞에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보이니 구미가 당겼다. 어제 청소를 하다 발견한 낡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생각났기에 더더욱 끌렸다.

어차피 이런 것을 해도 1등에 당첨 될 확률은 희박하였다. 그저 하나라도 더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한 홍보였지만, 그렇다고 크게 시간 낭비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손목의 시계를 보면 아직 5분 정도는 더 여유가 있을 법 하였다.

결국 건네주는 음료수를 시음하였다. 그저 평범한 오렌지 주스에 망고 주스를 더해놓은 맛이었다. 합성 착향료의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시중에 판매되는 음료수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 둘을 섞어서 팔 생각을 한 점은 나름 기발하였다.

그런 생각들을 담아 설문지에 짤막하게 기재하였다. 설문지를 받아든 직원은 추첨 상자로 코우지를 안내하였다.

“여기 잘 섞인 당첨용지가 상자에 들어 있습니다. 상자에 손 넣고 집히는 거 하나 뽑아주세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상자에 손을 넣으면, 수북한 종이가 쌓여 있었다. 손에 집히는 것만 해도 아마 몇 십 개는 될 것 같다. 이 중에 1등이 나오기란 꽤 어려운 확률이었다. 그래도 손에 착 감기는 종이가 있었다.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지만, 무언가 꼭 제 손에 빨려 들어오듯 다른 종이들을 제치고 손바닥 정중앙을 차지하였다.

그 종이를 상자에서 꺼내 펼쳤다. 하얀 종이에는 화려한 그림과 함께 1등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1등 당첨되셨어요!”

직원이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코우지의 당첨을 알렸다. 혹여나 누가 알아볼까, 급히 마스크를 더 바짝 올려 썼다. 다들 잠시 신기해하곤 다시 자기 갈 길을 가버렸다. 당첨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코우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축하드려요. 여기 폴라로이드 카메라입니다. 기본 필름 10장이 들어 있어요. 추가 필름 구매는 인터넷에서 가능하시니까 자세한 건 설명서를 봐주세요.”

“네. 참고할게요. 수고하세요.”

직원이 꺼낸 사진기는 박스 채였다. 뜯지 않은 새 카메라가 코우지의 손에 안겼다. 살면서 이런 추첨에 당첨된 것은 처음이라 얼떨떨하면서도, 이 카메라로 히로의 모습을 많이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빙긋 웃음이 지어졌다.

카메라를 카트에 담고 다시 갈 길을 향해 움직였다. 두 층 위에 게임기와 장난감 코너가 있었다. 히로라면 아마 지금 쯤 게임 칩 둘 중 무엇을 살지 세심하게 고민하다 결국 둘 다 사지말자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 올라오면 바로 게임기 코너가 보였다. 역시나 히로는 두 개를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코우지는 바짝 다가가 히로의 옆에서 살며시 속삭였다.

“뭐 살 건데?”

“깜짝아!”

히로는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이내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안도한 표정을, 그리고 곧 심통 난 표정으로 코우지를 바라보았다.

“뭐야, 갑자기. 나 갈 때는 찾지도 않더니.”

“히로가 어차피 여기 있을 거 아니까. 일부러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라고 놔둔 거지. 그래서 두 개 중에 뭐 살 건데?”

“그게..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임 후속작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제일 믿는 회사 신작인데...... 어느 쪽이 좋을까?”

히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게임팩들을 쳐다보았다. 둘 다 사도된다는 선택지도 있는데. 과자같이 사소한 것은 욕심내지만, 정작 금액이 조금 나가면 히로는 곧잘 포기해버리곤 하였다. 코우지는 어께를 으쓱하며 둘 다 담았다.

“둘 다 사. 대신 다음에 덜 사면되잖아?”

“그, 그래도 괜찮아? 둘 다 비싼데?”

“대신 우리는 그만큼 많이 벌잖아. 히로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이 정도는 써도 돼.”

“하지만 과자는 안 된다며?”

더 싼 것은 여러 개 사면 안 된다고 해놓고.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거리는 것이 뻔히 보였다. 코우지는 그런 히로의 모자위에 손을 얹고 꾹 눌러 장난을 쳤다.

“과자는 몸에 안 좋으니까. 물론 게임도 해롭긴 하지만.. 그런 건 하루에 몇 시간씩이라고 정해두면 괜찮지?”

“코우지는 가끔 못된 것 같으면서도 결국 다정해.”

“나는 원래 다정하거든?”

히로는 안다고 대충 둘러대고는 카트에 담긴 게임기를 향해 미소 지었다. 둘 다 포기했더라면, 분명 집에 가서도 생각이 나 하루 종일 쳐진 채 시간을 보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 근데 이 건 뭐야? 폴라로이드 사진기? 이것도 사게?”

히로는 카트를 바라보다 뜬금없이 들어있는 박스를 보고 코우지에게 물었다. 코우지가 미처 설명을 하기도 전에 히로는 잠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아’하고 작게 입을 열었다.

“설마 아직도 질투 나서 그래?”

“그런 거 아니야. 상품으로 받았어. 아까 저쪽에서 설문조사하면 준다는 추첨권에서 1등이 걸렸거든.”

“뭐? 그런 게 있었어? 뭐야. 나도 같이 데리고 가지. 코우지가 1등 뽑는 거 보고 싶은데.”

히로는 박스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벌써부터 뜯어서 사용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리 빨리 집 가자. 장 다 봤지?”

“응. 이제 계산만 하면 돼.”

히로의 빠른 걸음에 이끌려 코우지 역시 조금 속도를 올려 카트를 밀었다. 게임 코너에서 내려가려면 장난감 코너를 지나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로 내려 갸야 했다. 다행히 사람이 많은 시간대가 아니라 맞부딪힐 일 없이 쭉 걸을 수 있었다. 꽤 큰 마트의 끝에서 끝까지 걷다 보면 진열대의 상품들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그리고 거의 끝에 이르렀을 즈음, 두 사람 모두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끌렸다.

“어, 저 인형......”

“히로가 어제 갖고 있던 인형 맞지?”

확실히 어제 상자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모양의 토끼인형이 진열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이 쪽은 새 상품이니 회갈색이 아닌 새하얀 빛이었다. 두 사람이 관심을 가지며 다가오자 직원이 쪼르르 달려와 둘을 붙잡고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이 인형은 이번 달에 나온 신상품이에요. 원래 저희 회사는 곰 인형만 만들어왔다가 이번에는 토끼 인형도 출시했답니다. 혹시 동생 분 드리려는 건가요? 아, 자녀분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잠시 보려고.”

이번 달? 고개를 돌려 히로를 가만히 바라보면, 히로도 똑같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 이 기묘한 상황에 멍을 때리는 동안, 직원은 끊임없이 인형의 장점에 대하여 어필하였다. 솜의 질, 인형의 천의 재질, 디자인까지 달달 외운 모양인지 열심히 두 사람에게 홍보를 하였다.

“하나 주세요.”

긴 설명을 끊은 것은 코우지였다. 코우지는 인형 하나를 카트에 담았다. 직원은 판촉에 성공한 것이 기쁜 지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하였다. 히로는 멀뚱멀뚱 코우지를 바라 볼 뿐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히로한테 인형을 선물해줄게.”

“이 나이에 무슨 인형이야.”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앞으로 히로의 인생에서 기억될 추억을 선물하는 거야. 집에 낡은 인형이랑 나란히 세워두면 좋을 것 같지 않아? 하나는 히로의 과거, 하나는 히로의 미래.”

코우지가 빙긋 웃었다. 히로는 어느 새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코우지를 바라보다,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빠르게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쳐냈다.

 

장을 봐왔던 것을 전부 냉장고에 넣는 데만 30분 쯤 걸렸다. 오랜만에 냉장고를 치우고 다시 채우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코우지가 냉장고를 정리하는 동안, 히로는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는 식품류를 부엌 찬장에 넣고 그 외의 생필품을 다 정리하였다. 물론 그래도 코우지의 정리는 끝나지를 않아 소파에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냉장고 정리는 자신이 도우면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릴 뿐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냉장고에 둘이나 붙어 있으면 너무 좁기도 하였다.

히로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다 아까 어디 둬야할지 몰라 그대로 거실 탁자에 내려 둔 폴라로이드 사진기 박스를 보았다.

히로는 처음 직접 보는 폴라로이드 사진기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사진기와 필름 10장 정도가 들어 있었다. 히로는 이리저리 만지다 사진기 안에 필름을 장착하고, 카메라를 들어 셀카를 찍어 보았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에서는 사진이 나왔다. 그러나 까맣게 보일 뿐 아무것도 찍히지를 않았다.

“뭐지? 카메라 앞에 뭐가 묻었나?”

렌즈에 보호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확인하곤,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무언가 묻은 것인가 싶어 소매로 렌즈를 닦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찰칵, 하고 사진이 찍혔다. 이번에도 아무 것도 나오지를 않았다. 오기가 난 히로는 그렇게 찰칵 소리를 7번을 더 냈다. 마지막 한 장이 남아도 사진은 전부다 까맣게 나올 뿐이었다.

때마침 코우지가 냉장고 정리를 끝내고 히로에게 다가왔다. 탁자에 널부러진 폴라로이드 9장을 보고 코우지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었어? 필름 하나도 안 남아 있겠다.”

“코우지. 이거 이상해. 사진이 하나도 안 찍혀. 다 검게 나오던데?”

히로는 투덜거리며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코우지는 탁자에 널린 사진들을 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히로 설마 검게 나와서 이렇게 많이 찍은 거야?”

“응. 사진이 안 찍히니까. 이거 불량품 아니야? 경품이라고 이런 걸로 주다니. 교환 요청하기도 조금 그렇잖아.”

완전 사기라며 씩씩거리는 히로를 보며 코우지는 탁자 위에 있는 사진들 중 제일 처음 찍은 것으로 보이는 하나를 들어 올려 흔들었다.

“조금만 기다려봐.”

그렇게 한 1~2분을 더 기다리니 슬슬 히로의 형상이 폴라로이드 사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히로는 눈을 크게 뜨고 사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

“히로, 폴라로이드 사진기 한 번도 안 써봤구나? 폴라로이드는 원래 시간이 지나야 조금씩 사진이 나타나. 이렇게 흔들어주면 더 빨리 나타나기도 하고.”

“말했잖아. 옛날에 아저씨가 한 장 찍어준 게 전부라고.”

“그 때도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 기억 안 나. 그 날은...... 어쨌든 기억 안 나.”

히로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비죽거리며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자신이 찍은 사진이 뚜렷한 형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여러 번 흔들었다.

“완전 필름 낭비 했네. 이제 그 카메라 한 장 밖에 안 남았어.”

“뭐? 혼자서 다 써버렸네. 우리 이번 주말에 봄소풍 가기로 했잖아. 그 때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들이랑 폴라로이드 사진은 궁합이 잘 맞는 아이템이지 않아? 모처럼 세워둔 계획이었는데...... 하는 수 없지. 인터넷으로 주문 가능하니까 데이트 날은 들고 갈 수 있게 오늘 주문 해둘게.”

대충 주문하고 사나흘이면 올 터이니 시간은 충분하였다.

“미안해. 코우지한테 물어보고 쓸걸.”

“아니야. 대신 히로의 귀여운 모습이 9장이나 생겼잖아?”

하나 둘 씩 나타나는 사진들에는 다양한 표정의 히로 얼굴이 찍혀 있었다. 초반에 마음먹고 찍은 귀여운 셀카 포즈. 사진이 나오지 않자 눈썹을 찡그리며 찍은 사진, 마지막 즈음에는 나오기만 해라며 아무렇게나 대충 찍어 흔들린 것조차 있었다.

“나 이거는 가지고 다닐래.”

코우지는 그 중 흔들려서 이상하게 나온 사진을 하나 집었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사진을 넣는 칸에 넣어두곤 뿌듯하게 웃었다. 하지만 히로의 반응은 정 반대였다.

“뭐? 그렇게 이상하게 나온 걸? 형상만 알아보겠다. 그런 것 보다는 초반에 찍은 이런 귀여운 사진이 낫지 않아?”

히로는 자신이 찍은 사진들 중 가장 예쁘고 사랑스럽게 나온 사진을 골라 코우지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하지만 코우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진을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이 쪽 사진이 더 마음에 들어. 히로의 잘 나온 사진은 SNS에도 많잖아? 하지만 히로의 이런 엉성한 사진은 절대 남겨지지 않는 편이니까. 오히려 레어한 사진이지. 히로랑 일상을 함께할 수 있는 나에 대한 작은 보상으로 생각해줘.”

코우지는 그 흔들린 사진이 더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히로는 고개를 저었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뭐 코우지가 그 쪽이 좋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그래도 어차피 이 사진은 코우지 다 가져. 내 사진을 내가 가져서 어디 쓰겠어.”

“그래도 히로가 하나는 가져. 이것도 나의 질투라고 생각하고.”

“뭐야. 정말 어제 일 신경 쓰고 있어?”

“솔직히 안 쓴다면 거짓말이지. 그래도 이제는 막 치졸한 감정은 아니다? 그냥, 히로의 인생에 나를 덧칠하고 싶어서 그래.”

코우지는 남은 8장의 사진 중 제일 귀엽게 나온 사진을 골라 히로의 손에 쥐여 주었다. 히로는 실소를 지으며 어제 찾아둔 낡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방에서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탁자 위에 두 사진을 나란히 올려 두었다. 두 사진의 상태가 너무도 확연히 차이나 보였다.

“이 사진도 히로 옛날 사진이랑 같이 앨범에 넣어두자. 우리 폴라로이드로 추억 앨범 만들어도 재밌겠다. 맨 첫 장에 이거 걸어두고. 나도 어릴 때 아버지가 찍어 준 사진 본가에서 들고 올게.”

“좋은 생각인데? 첫 장은 그럼 과거의 나와 코우지, 그리고 현재의 나와 코우지를 같이 놔두는 거야. 그리고 그 뒤로 데이트 때마다 하나 이상은 찍어서 넣어 두자. 이상하게 나와도 그것도 나름 추억이니까.”

히로는 코우지의 제안이 맘에 들었는지 환히 웃었다.

남은 일곱장은 적당한 작은 박스에 담아 서랍에 넣어두었다. 카메라는 거실의 티비 아래 잘 놓아두었다. 청소하다 발견한 인형과, 반지케이스도 함께였다.

아직 남은 박스의 뒷면에 그려진 QR코드를 찍으면, 바로 부속품을 살 수 있는 쇼핑몰로 이동하였다. 코우지는 카메라에 맞는 필름을 선택하여 50장 정도를 주문하였다. 결제까지 마치는 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앞으로 많이 찍으려면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편이 좋으니까. 그래도 너무 많이 사두면 또 못 쓰게 되는 경우가 생길 지도 모르니까 이 정도만 사두자.”

“응. 좋아. 오늘 주문하면 아마 사흘 후쯤에는 도착하겠지?”

“우리가 이번 주 토요일에 데이트갈 거니까 금요일에 도착하면 딱 맞긴 하겠다.”

“그래도 빨리 오면 좋겠다. 데이트 가기 전에 둘이 집에서 같이 찍고 싶어. 잠옷 입고 찍어도 돼?”

“당연하지. 히로가 찍고 싶은 만큼 찍어.”


 

 

 

인형

 

 

 

 

눈을 깜빡였다.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았다.

‘꿈인가?’

코우지는 눈 한 쪽을 찌푸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가로등이 보였다. 빛이 보이자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타닥, 타닥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다 이내 뛰기 시작한다. 코우지의 발이 멈춘 것은 손이 가로등 기둥에 닿았을 때였다.

분명 캄캄한 어둠 속이었는데 갑자기 평범한 골목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코우지가 걸어온 어두운 곳은 온 데 간 데 없이 주택가가 보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였다. 손에 닿는 담벼락의 거친 시멘트 촉감도,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이 차가운 공기도, 눈에 들어오는 뚜렷한 풍경도. 하지만 어째서 자신이 여기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전혀 모르는 동네였다. 이런 동네를 와 본 적이 있나 고민해봤지만, 역시 없었다. 고개를 좀 더 들어 주변을 둘러보면,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이 보였다. 그렇게 크지 않은 성당의 지붕이 주택가들 사이에 우뚝 솟아 보였다.

코우지는 천천히 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여기서 가만히 있어도 갈 곳이 없었고, 어디론가 가더라도 목표 의식이 없었다. 그나마 저 성당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어째서인지 그 곳에 가면 꼭 무언가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길을 걷다보면 어느덧 성당 앞에 도착해 있었다. 성당 앞에는 쇼핑백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평소라면 남의 건물 앞에 버려진 쇼핑백 따위를 들어볼 일이 없었겠지만, 익숙한 포장지에 코우지는 손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번 토끼 인형의 한정 쇼핑백입니다. 마침 딱 하나 남았어요. 저희 브랜드는 쇼핑백도 은근 사람들이 수집하는 편이거든요. 옛날 한정 쇼핑백은 지금도 인터넷에 꽤 비싼 값에 올라오기도 해요.’

마니아들과 부모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 쇼핑백을 누가 성당 앞에 버린다는 것은 조금 이질적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수상한 상황 속에서 저 쇼핑백은 유일한 단서 일지도 몰랐다.

쇼핑백을 열어보면, 역시나 오늘 샀던 그 토끼 인형이 들어 있었다. 누가 토끼 인형을 이런 곳에 두고 간 것일까? 성당에 선물로 주려던 것이면 수녀님께 직접 전달하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안에는 영수증도 같이 들어 있었다. 영수증을 펼쳐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카드 번호, 자신이 오늘 샀던 마트의 영로고가 찍힌, 그리고 고기 500g 샐러리, 양상추, 간장... 쭉 내려다보면 그것은 오늘 코우지가 샀던 품목과 똑같았다. 이 쇼핑백은 부정할 수 없이 코우지의 것이었다.

“왜 여기에?”

집에 있어야 할 쇼핑백이 어째서 이런 낯선 성당 앞에 있는 것일까. 정말로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마치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 이런 것일 터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개나리 노오란 꽃그늘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희미하고 작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흔히 알려진 동요를 부르고 있었다. 코우지는 정신을 차리고 왼손에 쇼핑백을 쥔 채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 앞뜰까지 들어가면, 작은 꼬마 하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 5살배기쯤 되어 보였다.

“아기는 살짝 신 벗어 놓고......”

그냥 가까이 가면 아이가 혹시는 놀랄까 싶어, 코우지는 다가가기 전 작게 꼬마를 불렀다.

“아가.”

“맨 발로... 아!”

꼬마는 깜짝 놀란 듯 뒤돌아보았다. 낯선 어른에 흠칫 놀라 보이는 아무 나무 뒤로 얼굴만 숨겼다. 그래봤자 너무 작은 나무는 아이의 몸까지 가려주지 못하였다.

코우지는 피식 웃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였다. 분명 자신은 잘 숨었다고 생각하겠지. 어쩔까 고민하다 결국 모른 척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디 있지? 분명 여기서 사람을 봤는데...... 순식간에 없어져서 모르겠네. 길을 잃어서 곤란한 참인데.”

코우지의 큰 외침에 아이는 잠시 얼굴을 슬쩍 옮겨 살짝 코우지를 엿보다,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저씨, 길 잃어버렸어요?”

“네. 잃어버렸어요.”

키가 작은 아이에게 자신의 얼굴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목이 아플까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마주하였다.

“......”

눈을 깜빡였다. 아니 의심하였다. 아이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히로가 태어나서 처음 찍은 사진이라고 보여주었던 성당의 단체 사진에 담겨있던 작은 얼굴. 흐릿해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는 있던 그 사진 속의 얼굴과 똑 닮아 있었다.

“그럼 수녀님을 불러 드릴까요? 저도 길은 몰라요.”

아이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자세히 보면 히로의 얼굴이 곳곳에 묻어나 있었다. 눈매도, 머릿결도. 이목구비가 확실히 히로의 어린 모습이라면 이렇게 생겼을 것이 분명하였다.

아무런 답도 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코우지의 시선에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아!’하고 크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자기소개를 먼저 해야 하는데.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하야미 히로입니다. 5살입니다.”

아이는 또박또박 바른 발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였다. 하야미 히로 5살.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이름이, 히로?”

“네. 하야미 히로 입니다!”

분명 저 긴장이 잔뜩 담긴 자기소개는 예절시간에 배운 듯 어색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녀님께서 성당을 찾는 어른들께는 인사랑 자기소개를 먼저 하라고 하셨는데, 까먹었어요. 죄송합니다.”

“...... 괜찮습니다.~”

코우지는 아이의, 히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히로는 눈치를 보다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아, 그런데 수녀님은 잠시 외출하셨어요. 장 보러 다녀온다고 하셔서. 기다리셔야 해요.”

“그럼 조금 더 기다리죠.”

코우지는 일어나 근처의 나무에 잠시 기대어 히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꿈을 꾸는 것일까? 어떻게 자신의 눈앞에 5살짜리 히로가 있는 것일까. 너무 보고 싶어서 상상을 하는 것일까? 온갖 의문을 품은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히로는 다시 노래를 시작하였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하지만 곧 코우지의 뚫어질 것 같은 시선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이내 다시 쪼르르 다가와 코우지에게 묻는다.

“혹시 제가 노래를 너무 못 불러서 방해가 되세요?”

전혀 자신감 없는 목소리는 잔뜩 겁을 먹은 채였다. 코우지는 그런 히로를 보며 물었다.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해요?”

“모르겠어요. 수녀님들은 잘 한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못 부른다고 해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찬송가를 부르기에는 실력이 안 된다고...... 접견실에서 이야기 하시는 거 우연히 들었어요.”

히로는 잔뜩 풀이 죽은 채 어느 새 코우지에게 전부 털어 놓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경계는 어느 새 풀어져 있었다. 작은 아기 토끼가 딱 이런 이미지였다.

“아마 수녀님들도 제가 잘 부른다고 그냥 말만 해 주시는 거겠죠? 제가 풀죽지 않게 하려고.”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거야...... 저는 여기 얹혀살거든요. 친구들은 잠시 놀러왔다 돌아가는데 저는 여기서 그냥 살아요. 부모님이 없으면 성당에서 사는 거래요. 부모님이 없으면 불쌍한 거래요.”

나는 하나도 안 불쌍한데. 히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이 꿈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불현 듯 코우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절대 이 시절의 히로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다. 아니 상상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히로를 생각하면, 한 없이 자신감 없고 풀 죽어 있고, 또 어딘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늘 당당하던 14살의 히로는 5살의 히로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아저씨가 봤을 때는 수녀님들이 거짓말 하는 것 같지 않은데요? 히로는 엄청 노래를 잘 불러요.”

“......”

히로가 코우지를 올려다봤다. 코우지는 또 다시 히로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자그마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진심이라는 듯 눈을 마주하고 말을 이었다.

“히로는 정말 노래를 잘 불러요. 아까 히로가 부르는 노래 소리가 너무 예뻐서, 성당 안까지 들어 왔는걸요? 이렇게 예쁘고 구슬이 굴러가듯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누굴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지만 다른 어른들은 못 부른다고 했는데.”

그 말도 맞았다. 히로는 못 불렀을 것이 분명하다. 정확히는 실력이 모자랐던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 모자랐던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불렀고 기어 들어가듯 작은 목소리에 그의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 작은 아이는 한없이 소심한 탓에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어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당장 자신이 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목소리를 내다 멈추고 달려왔을 정도니, 분명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면 발음이 들리지도 않게, 조그맣게 불렀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목소리가 작아지지 않아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히로는 깜짝 놀라 코우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점쟁이를 본 것처럼 코우지를 약간 무섭다는 듯 쳐다봤다. 코우지는 그런 히로를 위해,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 앞에서 용기를 낸다는 것은 엄청 힘든 일이니까요. 내 노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내가 지금 크게 불러도 괜찮을까? 무서워서 목소리가 안 나와. 그런 생각 해 봤죠?”

“네......”

히로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엄청 무서웠다. 노래를 못 부른다고 눈앞에서 듣는다면 분명 마음이 아플 것만 같았다. 물론 뒤에서 들어도 아팠지만. 하지만 적어도 모른 척은 할 수 있었다. 앞에서 듣는다면 그런 척도 할 수 없다.

“사실 히로는 세상에서 제일 노래를 잘 불러요.”

“...... 장난치지 마세요.”

“정말인데? 히로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잘 불러요.”

히로는 코우지의 재차 하는 말에 정말인가 싶어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럼 왜 못 부른다는 소리를 들은 거지? 역시 전부 다 거짓말을 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눈빛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 히로를 위해 코우지는 설명을 덧붙였다.

“다만, 히로는 연습이 필요해요. 노래를 잘 부르는 연습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연습.”

“다른 사람 앞에서요?”

“히로는 혼자 있을 때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이 있으면 소리가 엄청 작아져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들이 히로의 목소리가 작으니까, ‘아, 히로는 노래를 못하는구나.’ 하고 멋대로 생각해버려요.”

“하지만, 목소리가 안 나와요.”

“그러니까 우리 연습해요.”

코우지는 손에 쥐고 있던 쇼핑백을 열어 인형을 바라보았다. 인형은 오늘 산 것이라 깔끔하였다. 잠시 바라보다 코우지는 히로를 향해 살짝 이야기를 섞어 자신의 정체를 말하였다.

“사실 저는 토끼나라에서 온 토끼아저씨랍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인간 세상에 와서 길을 잃었어요.”

“토끼 아저씨요? 앨리스에 나오는 그 토끼아저씨인가요?”

히로는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코우지는 ‘쉿.’하고 비밀이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 토끼는 제 친구랍니다? 아저씨는 다른 토끼예요.”

“우와. 토끼 아저씨구나.”

히로는 눈을 반짝거렸다. 동화 속 존재가 현실에 있다는 사실에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코우지의 뺨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댔다. 착, 하고 작은 손이 뺨에 달라붙으면 조금 간지러웠다.

코우지는 히로의 손길에 기분 좋게 웃으며 쇼핑백에서 인형을 꺼냈다. 히로의 눈이 커다랗게 떠져 인형을 향하였다.

“이 토끼 친구는 저의 분신이랍니다. 원래는 인간 세상에 올 때 분신을 쓰는데, 그만 움직이지 못하는 저주에 걸려버렸어요.”

“저주요? 그럼 풀어야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히로는 진심으로 코우지를 돕고 싶다는 듯 외쳤다. 코우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히로의 품에 인형을 안겨주었다.

“어차피 분신은 또 만들면 되요. 그래도 움직일 수만 없지 언제든 제가 토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답니다? 아저씨는 이제 곧 돌아가야 하지만, 앞으로 토끼한테 들어와서 히로를 만나러 올게요.”

“정말요?”

“대신 히로는 토끼를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노래를 연습해요. 언제 내가 찾아와서 히로 노래를 듣고 있을지 모르니까 매일 매일 연습해야 해요. 할 수 있어요?”

“그건....... 하지만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아저씨는 히로 노래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히로의 노래를 사랑하면 좋겠어요.”

“정말....... 정말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네. 히로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니까요.”

코우지의 확신에 찬 말은 히로의 양 뺨을 상기시켰다. 그저 지나가는 칭찬이 아닌, 확신에 찬 단단한 신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사실 만으로 히로는 어째선지 조금 용기가 나는 기분이었다.

품에 토끼 인형을 꼭 안은 채, 히로는 코우지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제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제일 좋은 사람 같아요. 아, 물론 수녀님도 좋은 분들이지만요!”

히로는 무심코 뱉은 말에 급히 말을 얹었다. 코우지는 괜찮다는 듯 웃어주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코우지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코우지의 귀로 다가가 속삭였다.

“사실 정말 아저씨가 제일 좋아요. 수녀님들보다, 친구들보다. 아저씨가 제일 좋아요.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에요?”

“아저씨는 토끼나라에서 와서 히로 말고는 이 세상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요?”

“다행이다.”

히로는 베시시 웃으며 토끼를 소중하게 껴안았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에 볼을 부비고 있다 문득 물었다.

“그럼 아저씨. 저 이 토끼, 밤마다 껴안고 자도 돼요?”

“네. 돼요.”

“그럼 소꿉놀이도 해도 돼요?”

“네. 숨바꼭질도 하고 소꿉놀이도 하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도 돼요. 가끔 시간 날 때마다 아저씨가 토끼한테 들어와서 히로가 보는 거, 듣는 거, 또 말 하는 것까지 전부 볼게요.”

“고마워요.”

히로의 빵빵한 볼이, 작은 입술이 해맑게 미소를 머금었다. 코우지는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상황이라도, 일단 히로의 이 예쁘고 순수한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비어버린 쇼핑백, 어째선지 무척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인형의 무게가 그렇게 무거울 리가 없는데. 그리고 인형이 히로의 품에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처음부터 저 손에 인형을 들려주기 위해 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이 인형을 히로에게 주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텅 빈 감각에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왔던 검은 길이 보였다. 히로에게는 보이지 않는 지, 그저 빤히 코우지를 바라만 보았다.

아마도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히로~ 또 밖에 있니?”

때마침 성당의 안쪽에서 나이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수녀님일 터였다. 이대로 히로가 성당에 들어간다면 자연스럽게 짧은 만남을 마칠 수 있겠지. 마치 무언가가 짜여진 느낌이었다.

코우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히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들어가 봐요. 수녀님이 기다리시겠다.”

“아, 아저씨 길을 잃었다고 하셨죠? 수녀님께 말씀드리면 아마 길을 찾아 주실 거예요. 같이 들어가요.”

“괜찮아요. 이제 토끼나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정말요? 안에 들어가서 저녁 먹고 가면 안 돼요?”

“토끼 아저씨랑 토끼나라 이야기는 히로와 아저씨만의 비밀로 남겨 줘요. 히로, 할 수 있죠?”

“알겠습니다아......”

히로는 아쉬운 듯 코우지를 쳐다보았다. 코우지는 그런 히로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밥 잘 먹고, 건강하게 지내요.”

“네. 토끼 아저씨도 잘 지내요. 저 노래 크게 부를 수 있게 많이 연습할게요!”

“응. 히로는 꼭 할 수 있을 거야.”

마지막 소리는 듣지 못 했는지, 히로는 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 너머로 언뜻 수녀님의 품으로 뛰어드는 작은 히로가 보였다.

히로가 잘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뒤를 돌아 왔던 길로 돌아갔다. 빈 쇼핑 백을 손에 들고서, 그렇게 잠시 걸으며 눈을 깜빡이다보면.

아침이었다.

 

◇◇◇◇◇◇◇◇◇◇◇◇◇◇◇◇◇◇◇◇◇

 

“히로, 일어나서 아침 먹어.”

“5분만 더 잘게. 응? 우리 어차피 요즘 휴식기인데 활동 시작 전까지는 조금 느긋하게 살자.”

히로의 늦장에 코우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식이라면 비상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었다.

“벌써 9시가 훨씬 넘었어. 여기서 더 늦으면 아침이 아니라 브런치가 된다? 그렇게 나오면 점심으로 준비한 어린이 런치 정식은 없던 걸로 할까......?”

“나 일어났어!”

히로는 눈이 아직 떠지지도 않는 상태로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히로가 좋아하는 어린이 런치 세트라면 확실히 깨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코우지는 만족스레 웃으며 느적느적거리는 히로의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그런데 왜 갑자기 어린이 런치 세트야?”

“응? 그냥, 안 해준 지 꽤 됐잖아?”

어린 시절의 히로에 대한 꿈을 꿔서 생각났던 것이지만, 굳이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분명 그런 꿈을 꿨다고 하면 엄청 캐물을 것이 뻔하였다. 그러니 대충 둘러대기로 하였다.

“왜? 별로야?”

“아니! 엄청 좋아. 코우지가 굳이 해준다면야 나는 당연히 좋지!”

평소에는 해달라고 해도 잘 해주지 않는 편이었다. 워낙 육류가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손도 꽤 많이 가는 편이라 가끔 해주었다. 히로는 매일 먹어도 좋다고 하였지만....... 영양소를 골고루 챙기는 코우지 입장에서는 자주 해줄 수 없는 식단이었다.

“어서 씻고 나와. 아침은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준비했으니까.”

“응. 코우지는 좀 쉬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

“천천히 나와도 괜찮아.”

히로가 대화를 하는 동안 꽤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비비며 침실에 붙어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히로가 씻으러 들어가는 것을 보고 코우지는 거실로 나와 잠시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고요함을 지우기 위하여 틀어놓은 TV에서는 한창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코우지는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어젯밤의 꿈을 떠올렸다.

대체 무슨 꿈이었을까? 어린 시절의 히로에게 인형을 주고 오는 꿈이라니. 토끼 아저씨라는 지어낸 이야기도 깨서 보면 너무 어설퍼 우습기만 하였다. 너무도 생생해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깨서 보면 어떻게 꿈인지 몰랐지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어젯밤의 꿈도 그런 종류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닌데.

그래도 꿈속의 다섯 살짜리 하야미 히로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 히로가 그런 느낌이었을까? 무의식 속에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 신기하였다. 교양으로 무의식에 관련된 심리학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어설프게나마 남아 있었다. 사람의 무의식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던가. 바빠서 제대로 듣지 못하던 수업에서 언뜻 들었던 내용이 기억난다.

“코우지. 큰일 났어.”

히로가 세수를 마치고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한 손에는 어제 산 인형 쇼핑백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코우지를 보았다. 코우지는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히로를 쳐다보았다.

“뭔데?”

“우리 어제 샀던 토끼 인형 없어졌어.”

히로의 말에 코우지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히로를 쳐다보았다. 히로는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 수건을 내려놓고 쇼핑백을 열어 보여주었다.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물론 영수증은 남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인형이 전혀 보이지를 않았다.

“히로 어디 다른 곳에 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나 어제 저 쇼핑백은 뜯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럼 인형이 어딜 가?”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지. 나오면서 쇼핑백이 보이기에 원래 내가 갖고 있던 인형이랑 같이 놔두려고 열었는데 없잖아.”

“나도 히로도 손 안 댔는데? 어딜 간 거야?”

히로는 자신이 어떻게 알겠냐며 어께를 으쓱하였다. 혹시나 싶어 자신의 방에 가 봐도 있는 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낡은 인형뿐이었다.

히로는 인형을 품에 안고 나와 중얼거렸다.

“토끼 아저씨, 저희 인형 못 봤어요? 어서 와서 말 좀 해보세요.”

히로는 인형의 팔을 몇 번 흔들고 말을 걸다 피식 웃으며 소파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뭐, 말 할 리가 없지.”

“토끼 아저씨?”

익숙한 단어에 코우지는 히로를 바라보았다. 토끼 아저씨라면 분명 꿈에서 자신이 히로에게 꺼낸 이야기였는데.

히로는 아, 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아 사실 아저씨가 날 처음 만난 날 자기를 토끼나라에서 온 토끼 아저씨라고 소개했거든. 진짜 이상한 아저씨지? 그런데 나는 정말 믿고 있었지 뭐야. 저 토끼는 아저씨 분신이라서 나를 보고 싶을 때마다 인형 안에 들어와서 지켜봐주겠다고 했어.”

“토끼 아저씨, 혹시 어떻게 생겼어?”

“기억 안나. 분명 눈을 마주치고 대화한 것은 분명한데, 얼굴이 마치 기억 속에서 흩뿌옇게 무언가를 뿌려 놓은 것처럼 지워져 있어. 엄청 잘생기고 착하게 생긴 아저씨였는데.”

코우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이하게도 자신이 꿈속에서 한 행동과, 히로의 기억이 일치하였다. 히로에게 들은 적도 없는 일을, 자신이 전혀 모르는 일을 그대로 꿈으로 옮길 수 있을까? 애당초 그 일은 정말 꿈이었을까?

“아저씨가 나한테 처음으로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주셨는데.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래서 정말 소중한 추억이야. 아, 미안해. 코우지 신경 쓰는 거 알면서 너무 눈치 없이 굴었지?”

코우지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히로는 다급히 말을 끊었다. 하지만 코우지는 히로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완전히 할 말을 잃은 채였다. 히로의 기억 속 아저씨는, 논리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을 지라도 자신이라는 답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히로는 인형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쇼핑 백 안에 없다면 어디에도 있을 리가 없었지만, 혹시 몰라 다 찾아보았지만 결국 나오지 않았다.

“어제 어디 떨어트렸을 수도 있겠다. 우리 장 되게 많이 봤잖아. 미처 못 챙기고 주차장 같은 곳에 떨어트린 거 아닐까?”

그런 것 외에는 답이 없다며 히로는 포기해버렸다. 어차피 인형은 또 살 수도 있고 한정판 쇼핑백도 남아 있으니 괜찮다고 웃었다.

“벌써 10시네? 이러다 진짜 브런치 되겠어. 난 오늘 꼭 어린이 런치 세트를 먹어야겠으니 어서 아침 먹자.”

히로는 코우지를 이끌고 부엌으로 향하였다. 부엌의 식탁 위에는 이미 코우지가 먹기 좋게 차려 놓은 샌드위치와 직접 갈아 만든 토마토 주스가 올라와 있었다.

히로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샌드위치를 한 입 집어 먹고는 웃었지만, 코우지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그저 기묘할 뿐이었다.


 

 

사진

 

 


또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이는 어제와 똑같았다. 이대로 가면 또 다섯 살짜리 히로를 보는 것일까? 오늘은 또 어떤 것을 주게 될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우두커니 있어도 아마 할 일을 마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터벅터벅, 어제와는 다르게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역시나 어딘가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풍경은 어제와는 전혀 달랐다. 좁은 골목길의 풍경이 아닌, 한적한 공원이 보였다.

나무 하나에 손을 짚고 뒤를 돌아보면, 어둠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저 밤공기와 공원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의 불빛만이 존재하였다. 이 공원 역시 코우지는 모르는 장소였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제는 성당을 향해 불현 듯 갔지만 오늘은 그저 평범한 공원 안에서 갈 방향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아도 딱히 이렇다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이제 더는 이것이 꿈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어제는 해보지 않았던 행동을 해보았다. 볼을 살짝 잡아당기면 아팠다. 약한 고통에 찔끔 생리적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현실이었다. 어제도 현실이었겠지. 그렇다면 오늘도 분명 어딘가에 히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히로가 있는 곳에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있었다.

그 때, 끼익 하고 녹 슨 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탁탁, 바닥을 발로 차는 소리도 들렸다. 코우지는 그 방향을 향해 걸었다. 나무들 사이를 조금 지나면 작은 놀이터가 나왔다. 전혀 관리 되지 않아 여기 저기 녹슬고 부서진 놀이기구만이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구석 그네에 아이가 앉아 있었다. 두 줄의 그네는 사슬이 녹이 슬어 도저히 제 역할을 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위태하였다.

아이는 바닥을 푹푹 발로 치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한 8살에서 9살 정도는 되어 보였다. 하지만 코우지는 이번에도 그가 히로라는 사실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어제 보았던 그 흐릿한 사진 속의 옷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낡은 티가 제대로 났다. 여기저기 먼지가 묻은 하늘색 셔츠는 원래 흰 색이었을 것이 자명하였다. 싸구려 바지와 같이 빨아 얼룩덜룩 물이 들어 버린 채였다. 옷 여기 저기 실밥이 풀려 있기도 하였다.

이즈음의 히로는, 이런 삶을 살고 있었구나. 말로 듣기는 했지만, 흐릿하게나마 사진도 보았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분명 어제 만난 다섯 살 배기의 히로는 잘 자라고 있었는데. 자신에게는 단 하루의 감각이었는데 그에게는 못해도 3년 이상의 감각일 터였다. 어쩌면 못 알아볼지도 몰랐다.

“안녕?”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히로는 흠칫 놀라며 그네에서 일어났다. 코우지는 이번에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 기억해?”

“...... 아저씨?”

히로는 자기 입으로 뱉어 놓고도 그 말이 차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코우지를 바라보았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 때 살던 곳이랑 전혀 다른 곳인데.”

“그거야, 나는 마법의 토끼나라에서 온 토끼 아저씨니까.”

“저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을 나이는 아닌데요?”

날카로운 반박에 코우지는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그런 이야기는 너무도 현실성 없었다. 5살짜리면 몰라도 이렇게 커버린 아이가 믿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잘 지냈어?”

코우지가 화제를 전환하자, 히로는 고개를 휙 돌리며 무시하였다.

“거짓말 하고 가신 덕분에 유치한 말만 한 2년 쯤 믿으며 살았어요.”

히로가 이렇게 반항적인 면이 있던가?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 역시 자신이 모르는 히로였다. 어딘가 모나고, 사람을 상대로 부드럽게 말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가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사이 키는 꽤 커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어설프게 다리를 굽혀야 했다. 꽤 버티기 어려운 자세일 것 같아, 대신 녹이 슬어있는 그네에 앉았다. 히로에게도 어서 앉으라는 듯 고갯짓을 하면, 히로는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얌전히 그네에 앉았다.

“아저씨는 대체 누구인데 저를 찾아와요?”

“나는 히로한테는 아저씨 아닐까? 그 외의 무언가는, 지금의 히로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아.”

많은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 어떤 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힌트를 남기면 분명 미래랑 꼬여 버릴 것만 같았다. 혹시나 여기서 실수하면 돌아갔을 때 자신의 옆에 히로가 없으면 어떡할까. 코우지는 그런 것이 걱정이었다.

공상 과학 프로그램을 보면 타임 패러독스라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죽인다면, 미래의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여기서 무언가 자신이 히로에게 그 이상 간섭한다면, 돌아갔을 때 히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고, 코우지의 옆에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적어도 꿈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는데.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그 무슨 말도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못하는 코우지를 보자 히로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더 심해졌다. 이런 동네에 산다면 정체모를 어른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자신 같이 다가오는 사람은 더욱 위험하다. 면식이 있다고 해서 결코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히로에게 경계심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를 지킬 줄 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직 지켜 줄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제대로 없는 히로가 적어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미안해. 엄청 의심스럽지?”

“솔직히 많이 의심스러워요.”

“설명하기 어려운데, 일단 나는 히로를 만나기 위해 왔어.”

자신이 말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솔직하게 말해야만 하였다. 히로의 미래는 바꾸지 않지만, 앞으로 히로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힘이 되 줄 만큼만 간섭하고 싶었다.

“아저씨는 거짓말쟁이예요.”

“맞아. 나는 거짓말쟁이야.”

“토끼 나라 출신도 아니고,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고. 그날 길을 잃은 것도 아니었죠? 길을 잃었다면서 그렇게 한적하게 나랑 이야기를 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히로가 쏘아대듯 말을 퍼부었다.

“거의 다 맞췄네. 맞아. 난 토끼나라 출신도 아니고 히로를 보러 올 수도 없었어. 길도 잃지 않았고.”

히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얼굴에 원망스러운 감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억울한 것도 같았다. 코우지는 묵묵히 히로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그리고, 왜 제 노래가 사랑받을 거라고 거짓말했어요? 그 뒤로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히로의 눈물이 표면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지 위로 뚝뚝 떨어졌다. 바지가 젖어 짙은 색으로 변해갔다. 서럽다는 듯 엉엉 우는 히로를, 코우지는 마냥 기다려주었다. 차마 그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할 수 없었다. 아직 히로는 노리즈키가의 눈에 들지 못하였고 그 전까지 사랑받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 어린아이에게는 현실이 버거워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설움은, 지금 뱉어내지 않으면 아마 그 누구에게도 뱉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버텨야 할 것이었다.

“아저씨가 많이 미안해.”

“거짓말쟁이. 바보. 사기꾼.”

히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나쁜 말을 전부 코우지에게 쏟아냈다. 그래봤자 아무런 타격도 없는 말들이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그런 말들이 최선이었다. 그렇게라도 코우지 탓을 하며 히로는 억눌러왔던 감정을 터트려왔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끝내 덧붙였다.

“왜 이제 왔어요.”

퍼부은 감정의 응어리 끝에, 히로는 숨이 벅찬 듯 헐떡이며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미 바지는 잔뜩 젖은 후였지만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들고 코우지를 바라봤다.

“아저씨. 저 정말 노래 잘 해요?”

“응. 엄청 잘해.”

“그런데 왜 반말해요?”

“존댓말이 좋아? 우리 구면이라서 말 놓았는데.”

“됐어요. 이쪽이 더 좋아요.”

히로는 픽, 토라진 소리를 내며 땅바닥을 한 번 발로 차 굴리고 일어났다.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크게 심호흡하였다.

“기분전환 할래?”

코우지도 히로를 따라 일어나 크게 스트레칭을 하였다. 이 시기라면 슬슬 히로도 프리즘쇼를 알 수 있을 시기였다. 아마도 히로가 노리즈키가에 들어갔던 것이 아홉 살의 일이었다고 했으니까.

“히로, 지금은 몇 살이야?”

“그것도 몰라요? 여덟 살이요.”

그렇다면 아직 모를 수도 있었다.

“프리즘쇼라고 알아?”

“...... 텔레비전에서는 봤어요.”

“같이 해볼래?”

코우지의 뜬금없는 제안에 히로는 무슨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난치는 거죠?”

“히로 다섯 살 때도 그 말 했는데. 변한 건 없네?”

코우지는 가벼운 스트레칭을 마치고 주머니를 뒤졌다. 아마도 이 순간 필요하다면 주머니에 분명 음악을 재생할만한 무언가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MP3가 들어 있었다. 스피커도 달려 있어 큰 소리는 아니지만 둘이서는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소리도 냈다. 요즘은 쓸 일이 없어 작업실 서랍 한 구석에 넣어둔 것인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오랜만에 만지는 기계를 작동시켜 보았다.

“정말 할 생각이에요?”

“응. 히로랑 같이 프리즘쇼를 하는 게 내 꿈이었거든.”

이미 이룬 지 오래지만, 하고 속으로 덧붙였다. 마침 MP3안에는 ‘boy meets girl’이 들어 있었다. 프리즘쇼의 연습용으로 제일 무난한 곡이었다. 코우지는 히로와 마주 서서 MP3를 히로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이미 노래를 다 외우고 있으니까 히로가 들고 있어. 제대로 들어야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일 수 있겠지?”

“저는 프리즘쇼를 해본 적도 없는데요?”

“나도 처음 할 때는 해본 적 없었어.”

히로는 코우지의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꾸에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가만히 있다 크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못해도 괜찮아. 뭐, 정 못하겠으면 그냥 봐도 괜찮고. 그냥 지금은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느껴보는 거야. 막춤을 춘다고 생각해도 좋아. 히로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면 되는 거야.”

히로가 말리기도 전에 코우지는 MP3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히로와 떨어져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히로는 미처 되돌려주지도 못한 기계를 가만히 들고 있었다. 이 위치에서면 코우지에게는 반절 정도 밖에 들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유려하게 춤을 춰내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히로는 조심스럽게 자신도 노래에 맞추어 몸을 움직여 보았다.

코우지는 춤을 추다 흘긋 히로를 보았다. 엉성하고 자신 없는 춤사위, 제멋대로 움직이는 팔다리는 아마도 지금의 히로가 보면 창피하다고 손을 저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에 빠진 히로의 얼굴은 밝아져 있었다. 조금 전 제 앞에서 엉엉 울었던 아이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다.

히로가 실컷 춤을 추기를 기다리다, 슬슬 곡의 클라이맥스가 다가왔다. 지금은 프리즘 점프를 뛰어야 할 순간이었다.

코우지는 힘껏 도약하였다. 그리고 프리즘 점프를 뛰었다.

“러블리 스플래시!”

무난한 프리즘 점프로 마무리하였다. 스플래시밖에 뛰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지만, 스케이트도 없고 노래도 잘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이 정도면 선방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히로의 눈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우와. 그거 어떻게 뛰는 거예요?”

히로가 코우지에게 바짝 달려와 물었다. 실제로 프리즘 점프를 본 것은 처음이었는지 엄청 신기해하였다.

“눈이 막 반짝 거리고, 순간 다른 공간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어떻게 그런 걸 할 수 있어요?”

“프리즘쇼는 연습도 실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빛나는가. 히로의 마음도 빛나면 충분히 프리즘 점프를 뛸 수 있을 거야.”

“마음이 빛나요?”

“응. 빛나는 마음이 있으면 더 멋진 점프도 뛸 수 있어.”

순간, 히로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이처럼 멋진 것을 본 적이 없다는 듯 밝게 빛났다. 조금 전까지는 어둡기만 하던 아이의 얼굴은 어느덧 기대감이 가득 차 활짝 폈다.

“그런 빛나는 마음은 어떻게 얻어요?”

“다양한 방법이 있지. 꿈을 가지고, 동료를 얻고, 성장하다보면 저절로 얻게 돼. 노력을 열심히 하면 마음도 빛나고, 꿈도 동료도 얻을 수 있어. 히로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노력. 노력이 중요한 거죠?”

“응. 히로는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니까. 재능이 있어서 노력하다보면 분명 빛을 발할 거야.”

“저 춤 되게 이상하지 않았어요?”

자신이 생각해도 그런 허우적대는 춤사위는 부끄러웠던지 코우지에게 물었다. 코우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엄청 멋졌어. 춤 제대로 춰 본 적 한 번도 없지?”

“네. 오늘이 처음이에요.”

“처음에 그 정도로 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나도 처음에는 그냥 손만 흔들어댔는걸? 히로는 엄청 대단한 사람이야.”

“......또 거짓말 아니죠?”

“이건 거짓말 아니야. 히로의 재능에 대해서는 진심이야.”

코우지는 잘 했다는 의미로 히로의 머리를 헤집어 쓰다듬어주었다. 히로는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이 낯선 느낌에 볼이 붉어졌다.

“히로는 정말 꼭 많이 사랑받는 사람이 될 거야.”

“거짓말은 그만 하라니까요. 괜찮아요. 그래도 적어도 아저씨는 저를 좋아해주잖아요. 누군가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히로는 코우지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그 미소는 억지가 아닌 진심이었다. 히로는 지금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저 이름도 모를 어떤 아저씨 한 명이 자신을 응원해준다는 사실만으로.

“누가 좋아해준다고 무작정 믿고 따라가지 말고. 나도 믿으면 안 돼. 수상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

“수상한 사람은 자기가 수상하다고 얘기 안 해요.”

“그런 생각을 역으로 노릴 수도 있지?”

코우지의 말에 그건 미처 생각 못했다는 표정으로 잠시 멍 때리던 히로는 고개를 다시 저었다.

“그래도 아저씨는 아닐 것 같아요. 수상한 짓을 하려 했으면 처음 만났을 때 했겠죠.”

“그래. 맞아. 나는 히로에게 좋은 사람만 되고 싶어.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렇게 다가오면 무조건 경계해야 한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히로는 자신 있다는 듯 어께를 으쓱하였다. 코우지는 안심한 듯 미소 짓다 문득 너무 경계하다 노리즈키가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되어 덧붙였다.

“그래도 또 사람을 너무 경계하지는 말고. 만약 히로한테 무언가를 주거나 같이 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엄마한테 가야 한다고 말해. 알았지?”

“엄마는 바쁜데......”

히로가 눈치를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히로의 어머니가 히로에게 미처 신경을 다 쓰지 못하던 시절이었지. 뒤늦게 생각난 코우지는, 잠시 머뭇거리다 적당히 말을 골랐다.

“히로에게 중요한 일이고 좋은 일이라면 어머님도 잠시는 시간을 내 주실 거야. 히로의 미래를 위한 일일 지도 모르잖아?”

“알겠어요. 그렇게 할 게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 코우지는 마음을 놓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던 코우지의 눈에, 미끄럼틀 위에 놓인 카메라가 들어왔다. 언제부터 저런 곳에 카메라가 있었더라? 처음 놀이터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미끄럼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이 역시 익숙한 카메라였다. 마트의 경품 추첨에서 당첨되었던 그 폴라로이드 사진기였다. 아마도 안에는 필름이 단 한 장이 남아 있을 터였다.

“그게 뭐예요?”

“폴라로이드 사진기. 이걸로 찍으면 바로 사진이 나온다?”

“거짓말. 그런 카메라가 어디 있어요. 사진은 찍고 나서 사진관에 가야 받을 수 있다고 했어요.”

“이 카메라는 그럴 필요가 없어. 정말 바로 나와. 한 번 찍어 볼래?”

코우지는 히로를 데리고 가로등 밑으로 갔다. 자세를 낮추어 히로의 상반신이 잘 나올 수 있게 자리를 잡았다.

히로는 갑작스런 상황에 잔뜩 굳어있었다. 멀뚱거리며 가만히 있자, 코우지는 잠시 카메라를 내리고 히로를 보았다.

“사진 찍는다니까? 뭐라도 포즈 취해봐.”

“...... 저 살면서 사진 처음 찍어 봐요.”

히로는 푹 고개를 숙였다. 코우지는 아차, 하였다. 히로가 자신이 사진을 처음 찍은 것은 아저씨가 찍어준 폴라로이드가 처음이라고 했었는데. 당연히 이 순간이 처음인 것이다.

“앞으로는 많이 찍을 수 있을 거야. 그럼 아저씨가 히로의 맨 첫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 되는 거지?”

“그렇게 되는 셈이죠.”

그 말에 히로는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며 코우지를 보았다. 코우지는 이 순간을 놓칠 수 없어 바로 찰칵, 사진을 찍었다.

갑작스러운 촬영에 당황한 히로는 크게 소리쳤다.

“아직 준비 안 됐는데!”

“이미 찍어버렸는걸?”

“다시 찍어줘요.”

히로는 재촬영을 요구하며 격하게 항의하였다. 하지만 코우지는 고개를 저으며 어께를 으쓱하였다.

“이 카메라는 필름이 한 장 밖에 안 들어 있었나봐. 봐. 셔터를 눌러도 아무 것도 안 나오지?”

히로의 얼굴은 표정이 확확 바뀌었다. 이제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코우지의 손에서 카메라를 가져가 셔터를 여러 번 눌러 보지만, 필름이 한 장 밖에 들어 있지 않았을 카메라는 더는 사진을 뱉어내지 못하였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히로는 카메라를 잠시 쳐다보다 다시 코우지에게 돌려주었다.

“아저씨도 찍어주고 싶었는데.”

“나?”

“네. 지금 아저씨 엄청 행복한 얼굴이거든요. 사진은 원래 행복한 순간을 담는 거라잖아요.”

“그런 건 어디서 들었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라마에서요.”

“......텔레비전, 많이 보지는 않는 편이 좋아.”

“엄마가 집에 올 때까지만 보고 있어요.”

“다행이네.”

“아저씨를 찍을 수 없다는 점은 별로 다행스럽지 않아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사진은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형상이 보이게 돈 사진을 히로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자, 선물. 히로의 첫 독사진이야.”

사진을 보면, 아직 완전히 선명해지지는 않아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잔뜩 부끄러운 표정으로 빳빳하게 서있는 히로를 볼 수 있었다. 다행히 흔들리지 않고 제대로 찍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아저씨 사진을 찍는 건데.”

아쉬운 표정으로 히로가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코우지는 한창 아쉬워하는 히로의 모습에 살짝 힌트를 주었다.

“걱정 마. 아저씨는 애인이 사진을 찍어줄 거니까.”

이번 주말에 히로와 데이트를 하며 사진을 잔뜩 찍기로 약속하였다. 분명 히로는 코우지의 사진을 수 없이 찍고 행복해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 주말 쯤에는 자신의 사진만 30장은 거뜬히 생길 터였다.

“아저씨, 애인 있어요?”

히로는 설마 코우지에게 애인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딘가 실망스러운 기색도 드러났다. 제 딴에는 숨긴다고 하지만 코우지의 눈에는 감정 동요가 그대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히로는 아저씨가 첫사랑이라고 했던가.’

“응. 있어. 엄청 사랑스럽고 잘나가는 애인이야.”

“그, 그렇구나. 분명 좋은 사람일 거예요.”

당사자는 그 애인이 미래의 자신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겠지만,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곧 결혼도 할 생각이야.”

코우지가 장난스레 뱉은 말에 히로는 조금씩 울상이 되어 갔다. 애써 참던 감정이 무색하게, 결국 사진을 손에 한껏 움켜쥔 채 저 멀리 뛰어가 버렸다.

“아저씨 바보!”

공원 저 멀리 사라지는 히로를 보며 코우지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를 상대로 장난이 너무 심했던 것일까. 그래도, 어차피 결국 저 히로는 자신을 만나 행복해질 거니까. 이런 일은 그에게 그저 작은 에피소드일 뿐이었다.

“아, 이래서 히로가 말을 피했던 건가.”

히로가 왜 사진에 대해 잘 기억 못한다고 말을 피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실연의 상처로 저 멀리 뛰어 가버린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도 꽤 부끄러운 기억일 것이었다. 그래서 코우지의 질문을 은근 슬쩍 피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진상을 알게 된 코우지는 히로가 매우 귀엽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봤다. 역시 할 일을 마친 자신에게는 돌아갈 길이 있었다. 히로와의 소중한 보금자리로.

또 어두운 길이 나타났다. 공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알 수 없는 공간 위에 서있었다. 코우지는 걷다 보면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천천히 걷다 보면,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어둡던 길에는 옆으로 간간히 스쳐 지나가는 몇 장의 사진들이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에 놓치는 것도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을 하나하나 살펴 보면 전부 히로의 기억이었다.

노리즈키 코우의 눈에 들었던 순간, 그를 의심하면서도 코우지의 말은 잊지 않고 제대로 어머니께 데리고 가는 모습. 그리고 노리즈키 가에 들어가 깔끔한 옷을 입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모습. 전부 코우지가 알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멀어진 노리즈키 진과의 사이 때문에 좀처럼 히로가 노리즈키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어느 순간부터 망가진 관계를 캐묻기에는 히로는 너무도 여렸고, 스스로도 히로에게 일부러 가르쳐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스쳐가듯 히로의 기억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는 조금 소중하였다. 코우지가 알고 싶었던 것은 히로가 얼마나 잘 지내고 있었는지, 그 뒤로 스스로도 사랑 받을 수 있다고 잘 깨닫고 있는 지였다. 물론 미래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두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더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걷다 보면, 더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 익숙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악보가 공중에 휘날렸다. 히로의 시선이 돌고, 성격 나쁜 무리들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비웃음과 함께 복도를 걸어갔다. 악보가 바닥에 가라앉고 나면 히로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악보를 줍고 있는 코우지였다.

그리고 눈앞이 단숨에 캄캄해졌다.

◇◇◇◇◇◇◇◇◇◇◇◇◇◇◇◇◇◇◇◇◇

 

“코우지. 벌써 낮 12시야. 이제 일어나야지.”

무거운 감각에 짓눌려 눈을 깜빡거리면 코우지의 위를 차지하고서 내려다보는 히로가 보였다. 어리고 여기 저기 흙투성이인 히로가 아니라, 다 크고 깔끔하게 단장을 전부 마친 히로였다.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났어? 나 일어나보니까 코우지 자고 있길래 피곤해 보여서 놔뒀는데....... 이대로 놔뒀다간 저녁에나 일어나겠다 싶어서 깨웠어. 혹시 어제 잠 못 잤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조금 피곤해서.”

코우지는 천근만근 같은 몸을 끌어 올려 침대에 앉았다. 단순히 히로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다. 깊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마치 며칠 쯤 자지 못한 사람처럼. 과거로 다녀오는 동안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가.

코우지는 마른세수를 하며 애써 정신을 차려보았다.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피곤함에 히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괜찮겠어? 어디 아픈 거면 병원 가고.”

“아니야. 그냥 깊게 잠을 못 들었나봐.”

코우지의 괜찮다는 말에도 히로는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늦게까지 못 일어난 적은 밤새 마감을 한 다음 날이 아니고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코우지답지 않게 늦잠이라니. 히로는 한숨을 푹 쉬며 코우지의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열은 없는데. 혹시 감기기운이나 몸살 기운 있어? 요즘 같은 봄은 환절기라서 감기 걸리기 쉽대.”

“그런 거 아니야. 정말 괜찮아.”

애써 몸을 펼쳐가며 전혀 이상이 없음을 어필하였다. 몸이 무겁긴 하였지만 아프다기보다는 피곤한 것이었다. 히로에게 설명할 길이 없으니 결국 아무렇지 않은 척 할 뿐이었다.

“그냥 나중에 조금 낮잠만 잘게. 걱정 끼쳐서 미안해.”

코우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조금 더 멀쩡해진 얼굴로 나오면 히로는 안방에 없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부엌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몸을 틀어 식탁으로 다가가면, 히로는 간단하게 토스트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이틀 연속 빵은 코우지라면 반대하겠지만, 그래도 내 수준에서는 이 정도까지가 만족스러운 식사밖에 안 되니까.”

히로가 구운 토스트를 보면, 코우지의 접시에는 그래도 노릇하게 구워진 것이 올라와 있었지만, 히로의 접시에는 거의 다 타버린 것이 올라와 있었다. 분명 처음에 불 조절을 잘 못해서 태워버렸을 것이다. 히로 너머로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쪽을 보면, 역시나 새카맣게 타버린 프라이팬 하나와 새로 꺼낸 프라이팬 하나가 각각 보였다. 히로는 코우지가 부엌 쪽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였다.

“아침부터 준비하느라 고생했겠다. 고마워.”

“코우지한테 매일 얻어먹기만 하다가 가끔 차리는 건데 뭘.”

히로는 식탁에 앉아. 반쯤 탄 식빵을 물어뜯었다. 타버린 식빵은 부서지듯 히로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다 써버린 식빵 봉투를 봐서는 아마 앞의 식빵은 아마도 숯덩이가 되었을 모양이었다. 한 봉지를 전부 써서 고작 4개가 나왔으니 말이다.

코우지는 새로 무언가를 꺼내줄까 하다, 그래도 히로가 기껏 신경 써서 만들어준 토스트인데, 다른 요리를 꺼내 히로의 기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한 끼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그냥 자리에 앉아 히로가 구워 준 노릇노릇한 식빵을 입에 담았다.

간단한 식사는 히로가 들였을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빠르게 끝났다. 토스트를 다 먹고 히로는 코우지가 선수 치기 전에 빠르게 뒷정리를 시작하였다.

“코우지는 쉬고 있어. 오늘은 뒷정리까지 내가 다 할게.”

태운 프라이팬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자기가 전부 하겠다며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향하였다. 이번에도 모른 척 넘어가주기 위해 히로의 제안에 흔쾌히 수긍하였다.

히로가 타버린 프라이팬의 설거지에 머리를 싸매는 동안, 코우지는 피곤함을 달래기 위하여 커피를 한 잔 내렸다. 히로는 쓰다고 카페에서 파는 카라멜 라떼가 아니면 잘 마시지 않으니 대신 가볍게 아이스티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설거지가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물을 붓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고 준비만 마쳐두었다.

부엌에서 나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코우지는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려다, 어제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기가 눈에 들어왔다.

만약 저 안에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꿈이 아니었음을 또 다시 증명될 것이었다.

코우지는 천천히 다가가 사진기를 들어 올렸다. 필름 넣는 공간의 뚜껑을 열어 보면,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단 하나 남았던 필름은 오래 전의 과거에서 소모되었다.

텅 빈 카메라를 들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생각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뭐였더라. 자신은 몇 번을 더 히로를 만나러 가게 될까. 멍하니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공중을 바라보다, 갑자기 가로막힌 시야에 코우지는 흠칫 놀랐다.

“내가 누구~게!”

요즘 이런 장난을 치는 사람도 있었을까. 꽤 고전적 장난에 코우지는 웃음을 흘리며 대답하였다.

“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아, 들켰다.”

히로는 전혀 아쉽지 않은 목소리로 아쉬운 척을 하고서, 코우지의 눈에서 손을 떼어 내고 앞으로 다가왔다. 히로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턱에 대고 꽃받침을 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멍을 때리고 있어?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응. 나 정말 괜찮아. 그냥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고민이 있는 거였어? 그럼 나한테 말하지. 어디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답답해서 그런 거였구나?”

히로는 코우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고민을 다 들어주겠다며 자신 있게 말하였다.

“코우지의 고민이라면 이 애인이 전부 다 들어 줘야지. 뭘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무슨 고민인데?”

“아니야. 그런 거. 그냥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그런 걸 고민이라고 하는 거야.”

히로는 코우지의 볼을 양 손으로 쭉 늘렸다. 힘껏 늘린 덕에 코우지의 입에서는 발음이 새고 있었다.

“흐즈므. 으프.”

“뭐라고? 잘 모르겠는데~”

히로가 코우지의 말을 전혀 못 알아들은 척 딴청을 피우자, 코우지는 단번에 히로의 양손을 떼어 내고 모아 잡았다. 마치 구속된 것처럼 손이 묶인 히로는 툴툴댔다.

“옛날에는 내가 힘으로 코우지 이겼는데. 이제는 못 당하겠어.”

“그 때는 나랑 히로랑 체격 차이가 비슷했지만, 지금은 내가 더 커버렸잖아? 내가 운동 센스는 없어도, 오버레 활동을 시작하고부터는 기초 체력도 단단히 다져놨고.”

“아~ 내가 장난치면 꼼짝도 못하고 당하던 어린 코우지가 그립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싫어?”

“그럴 리가.”

히로는 묶인 손을 내려 자신과 코우지의 사이의 빈 공간을 좁혔다. 그리고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이제 놔 주세요. 안 괴롭힐게요. 사랑스러운 애인님.”

“특별히 사면해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장난은 치지 마세요?”

코우지가 히로의 손을 놓아 주면 히로는 자유로워진 팔로 코우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코우지의 품에 안겨, 그대로 다리 위를 타고 앉았다. 마주 보고 있는 채로, 히로는 찬찬히 코우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역시 코우지는 웃어야 가장 잘 생겼어.”

“히로도 웃을 때가 가장 보기 좋아.”

서로의 얼굴 감상에 집중하는 동안, 코우지는 멈출 수 없는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솔직하게 히로에게 물었다.

“히로, 아저씨 몇 번 못 만났다고 했잖아. 그럼 총 몇 번 본거야?”

“그건 갑자기 왜?”

“음, 그냥 애인의 첫사랑에 대한 궁금증으로 생각 해 줘.”

“지금 사흘 내내 그 소리인 거 알아?”

“이제 더는 안 물을게. 오늘만 봐줘.”

쫌생이. 히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분명 질투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놓고 말로만 그랬던 거라며 히로는 잔뜩 투덜거렸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지만, 사실대로 털어 놓으면 말도 안 된다고 믿지 않을 것이 뻔하였다. 코우지는 그냥 질투 많은 애인이 되기로 하였다.

“그래. 나 쫌생이니까. 어서 말 해줘.”

“총 세 번. 처음에 토끼 인형을 줬고, 두 번째는 사진을 찍어 줬어. 그리고 마지막은, 반지 케이스. 그게 다야. 그 뒤로 두 번 다시는 안 나타났으니까.”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야?”

“그건......”

히로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어제 그저 부끄러운 기억에 머뭇거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잘 모르겠네. 언제였더라?~ 아, 그보다 코우지 우리 봄 소풍 데이트 가려면 옷 쇼핑해야 하지 않을까? 요즘 데이트룩이라고 해서 커플 티처럼 대놓고는 아니고 둘이 비슷한 디자인으로 서로 약간씩만 다르게 입고 다니는 게 유행이래. 어차피 마스크 끼고 모자 낄 거니까, 이왕이면 데이트룩 입고 즐기고 싶어.”

히로는 은근슬쩍 답을 피하고 화제를 전환시켰다. 분명 무언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캐물을 수도 없었다. 히로가 대답을 피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세 번이라고 했으니 오늘 밤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굳이 히로의 입으로 듣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모른 척 넘어가주고 싶었다.

코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씻고 쇼핑 다녀올까? 저녁은 밖에서 먹고 오자. 이번에 재개장한 쇼핑몰 엄청 좋아졌어. 식당가도 퀄리티가 나름 괜찮대.”

“아, 응! 좋아!”

히로의 장단에 코우지가 맞춰주자, 히로는 다시금 편안해진 표정이 되었다. 저녁을 뭘 먹을지 벌써부터 고민하며 코우지의 볼에 쪽, 하고 뽀뽀한 뒤 일어났다.

“그럼 우리 나 안방 욕실에서 씻고 나올게. 코우지는 거실 쪽에서 씻어. 빨리 씻어야 금방 다녀오지. 아, 오늘 운전은 내가 할게. 코우지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나도 앞으로 계속 운전 연습해야 하니까.”

히로는 간단히 속옷과 타올을 챙겨 안방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코우지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하려다, 빈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제자리로 돌려 놨다. 지금은 텅 비어 있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채워질 카메라였다.



 

 

작별

 

 


 

이제 전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사흘 만에 익숙해져 있었다. 눈을 뜨면 캄캄한 곳에서 앞으로 가는 길만이 빛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하였다. 코우지는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서운하였다. 더 여러 번 기회가 있어 히로의 다른 모습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고작 세 번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이런 이상한 상황을 만든 것이 누구일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이유 없는 일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상념에 잠긴 채 길을 걸으면, 이번에는 야외가 아닌 낡은 건물의 복도로 이어졌다. 코우지는 이 건물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더는 사람이 살지 않지만, 여전히 오버레의 아지트로 쓰이고 있는, 그리고 히로가 오랜 세월동안 홀로 자신의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낡고 후줄근한 빌라였다. 정확히 히로가 사는 층이었다.

딱히 의식하지 않더라도 복도의 중간 쯤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이미 아는 집이었으니까, 무언가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도 가야할 방향이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낡고 녹슨 문을 똑똑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면,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 틈 사이로 보이는 히로는 자신이 아는 얼굴이었다.

중등부 시절의 앳된 모습은 코우지에게는 꽤 세월이 지났음에도 기억 속에 선명하였다. 이 때 쯤의 체격을 보면, 지금이 대략 언제쯤인지도 유추할 수 있었다.

“누구세요?”

“안녕......?”

코우지가 이번에 조심스럽게 인사한 이유는, 히로가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어서였다. 이 시기의 히로는 남 앞에서 쉽사리 울지 않는 아이였다. 분명 지금 집에서 울고 있다는 것은, 어디선가 눈물을 꼭 참았다가 집에 와서야 터트렸다는 뜻이었다.

“아저씨?”

흘러내렸던 눈물 자국을 급히 지우며, 히로는 문을 열어주었다. 집에 들어서면 낡은 흔적은 지금이나 이때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히로의 침대 맡에 붙은 포스터도. 아니 정확히는 저 포스터는 거의 새것이었다. 붙인 지 일주일은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직 말려있던 종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코우지와 히로의 데뷔 포스터. 포스터만 나오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해산된 유닛. 아마도 이 시기의 히로가 울 이유라면......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주스라도 마실래요?”

“아니, 괜찮아. 그보다 히로.”

“그럼 물이라도 드릴 게요.”

히로는 낡고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컵에 따라 탁자에 올려 두었다. 눈물 줄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히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코우지를 바라보았다.

“잘 지냈어요?”

“히로는?”

“저는 잘 지냈어요. 그 뒤로 정말 저를 알아 봐주는 분이 나타나서 후원도 받고, 명문 학교에 입학도 했어요. 프리즘쇼도 배워서 이제 곧 데뷔를......”

히로의 말끝이 흐려졌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다시 튀어나오려는지 방울방울 눈가에 맺혔다.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젖은 목소리로 화제를 바꾸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결혼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결혼은 무사히 하셨어요?”

“아니. 아직.”

“혹시 헤어졌어요?”

“그건 아니야. 아직 그 사람하고 잘 사귀고 있어.”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결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코우지는 속으로 생각하며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다행이네요.”

“히로는? 잘 지냈어?”

히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코우지는 히로가 스스로 입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며 조심스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몇 년 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는 그 방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녹이 슨 싱크대에, 낡은 탁자, 그리고 음료수 박스로 만든 간이침대까지.

그러다 문득 침대 위에 시선이 갔다. 이불 외에도 무언가가 있었다. 몸을 움직여 그 것을 들어 보면, 그 것의 정체는 옷이었다. 정확히는 무대복이었다. 흑백의 대조를 기반으로 한 복장은 코우지도 잘 기억하고 있는 옷이었다.

“안 돼요!”

히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코우지의 손에서 옷을 앗아갔다. 품에 껴안고 고개를 묻었다. 옷은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히로, 오늘이 며칠이더라?”

코우지의 질문에 히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무슨 공 모양으로 말 것처럼 끌어안고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달력에는 하루하루 X표시가 되어 있었고 한 날짜에 크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코우지도 아는 날짜였다.

히로와 자신이 데뷔를 발표하던 날이었다.

오늘은, 히로가 코우지를 잃은 날이었다.

 

코우지는 그저 침묵하였다. 정확히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히로도 알지 못했지만, 처참했던 그 날 밤의 히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 상황이 이제 누군가의 나쁜 장난같이 느껴졌다. 이미 코우지도 히로도 떨쳐버린 상처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 남은 흉터라서 서로 감싸주고 보듬어 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코우지는 이미 새살이 돋아 잘 나은 상처를 보듬어줄 줄만 알지, 방금 막 생긴 커다란 상처를 치료하는 법 따위는 몰랐다. 히로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되돌이표만 찍고 있었다.

그렇게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할 쯤, 고요를 깬 것은 히로였다.

“미안해요. 오랜만에 왔는데 아무 말도 안 해서.”

“괜찮아.”

“아저씨, 저 사실 오늘 데뷔하려고 했는데 무산 됐어요.”

“그랬구나.”

“같이 데뷔하려던 친구랑 싸웠어요.”

“어쩌다?”

“...... 그건 말 할 수 없어요.”

“히로가 잘못했어?”

히로는 답이 없었다. 코우지는 더 캐묻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코우지의 노래를 자신의 것으로 발표해서 싸웠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히로가 그럴 용기를 가지기엔 잃을 것이 너무도 많았다.

히로는 불안한 지 손톱을 자꾸만 물어뜯었다. 그러고 보면 다시 만났을 때, 히로가 늘 손톱을 물어뜯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애써 매니큐어도 바르고 매번 볼 때마다 ‘손톱!’하고 외쳐가며 겨우 고친 것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의 불안이 시작된 것은 이맘때였나.

코우지가 손을 뻗어 히로의 손을 내려주었다. 히로는 뒤늦게 눈치 챘는지 아차 하고 손을 얌전히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차라리 자신이 이 순간이 현실임을 몰랐더라면 히로에게 사과해보라고 말이나마 꺼내봤겠지만, 과거의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전달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잘못 말하는 순간 미래가 비틀린다. 무엇 하나 마음껏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였다.

“아저씨. 아저씨가 저는 모두한테 사랑받을 거라고 했죠?”

히로는 이미 구겨진 옷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코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코우지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를 싫어하게 된 사람도 저를 좋아하게 될 수 있어요?”

그 질문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절박함이 묻어나 있었다. 제발 그럴 수 있다고 답해주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함에 코우지는 쓰게 웃었다. 코우지는 대답을 해주는 대신, 묵묵히 히로가 구긴 옷을 탁자에 대고 바르게 폈다.

이미 주름이 잔뜩 잡힌 옷은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구겨진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따로 없었다. 코우지는 그 옷을 바르게 여러 번 펴가며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원래 이 옷을 입고 데뷔하려던 거지?”

“아저씨.”

갑자기 동문서답을 하는 코우지에 히로는 다급히 그를 불렀지만 코우지는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할 말을 묵묵히 이어나갔다.

“옷이 다 구겨져서 입을 수가 없게 되었네. 큰일이다. 이러게 구겨지면, 다시 바르게 펴기는 참 어렵지. 이렇게 몇 번을 펴려고 해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잖아.”

히로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손을 달달 떨며 제가 잔뜩 구겨놓은 옷을 손으로 여러 번이고 펼쳐 보지만, 여기저기 접히고 구겨진 자국은 겨우 손으로 지워질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펴져.”

“그럼 이 옷은 버려야 해요?”

“버리고 싶니?”

“아니오. 절대 못 버려요.”

소중한 옷이었다. 히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코우지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에게도 오늘 전까지 이 옷은 혹여나 구겨지고 더러워질까 차마 꺼내보지도 못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깨끗한 상태로 보관 되어 있는지 확인만 할 정도로 소중하였다. 히로도 분명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손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르게 펴지지 않을 거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빨고 다림질하면요? 그럼 괜찮아지죠?”

“아마, 이렇게 구겨져 버린 흔적이면 그 전에 옷이 타버리겠는데. 일상의 구김이 아니라 엄청나게 여기저기 상처 입었잖아. 자세히 보면 여기는 올이 나가 있어.”

코우지의 손가락을 따라가면 정말 살짝 나간 올이 보였다. 심지어 흰 옷은 어느덧 잔뜩 때를 타 더는 무대복으로 입기에 어려워보였다.

“방법이 없을까요? 저한테는 정말 소중한 옷인데....... 이렇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질 줄은 몰랐는데.”

아직 자라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저 옷의 최후가 마치 자신의 최후만 같아 두려움이 몰아 닥쳤다. 애써 참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많이 소중했니?”

“네. 정말 소중했어요.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정말,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아저씨를 좋아하는 그런 동경심이 아니라, 같이 있기만 해도 행복하고, 평생 같이 나아가고 싶었어요.”

목소리에 눈물이 섞여 흘러내렸다. 울음을 감당치 못하던 아이는 헐떡이며, 그리고 발음이 무뎌지며 더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데뷔를 하고 싶어?’

‘하고 싶어! 데뷔를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

그렇게 사납고 당당하게 외치던 히로였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 구는 그 뻔뻔함에 화가 치밀었었다. 자신에게 적어도 약간의 미안한 감정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어떻게 저런 식으로 나를 농락할 수 있지? 코우지는 수많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 제일 슬펐던 것은, 앞으로는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홀로 아파한다는 현실이었다. 히로에게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노래만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닥친 현실은 결국 그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코우지는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히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을 잃어 슬피 우는 히로는 낯설었다. 적어도 이렇게 약해지는 히로의 모습은 자신의 안에서 한참이 지난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이때는 그저 히로가 독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전혀 달랐다.

구슬피 울고 또 우는 히로는 그저 모두의 앞에서 참았던 것뿐이다. 사실은 많이 아파놓고 아프지 않은 척, 괜찮은 척을 하며 연기를 하였다.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는 포기한 것이었다.

“그 친구를 많이 좋아했니?”

히로는 울음이 멈추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히끅거리며 딸꾹질을 해댔다. 입만 열면 슬픔에 신음이 터져 나와 견딜 수 없어 다시 다물고 말았다. 코우지는 옷소매로 히로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주었다. 소매는 많은 눈물의 양에 금방 젖어들었다.

“아저씨도 옛날에 애인하고 싸운 적이 있었어. 엄청 크게. 애인이 아저씨한테 큰 잘못을 했거든.”

히로는 훌쩍거리며 코우지를 바라보았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애써 삼키려 노력하였지만 조절하기 어려운 지 힘들어하였다. 코우지는 괜찮다며, 더 많이 울어도 된다며 히로를 다독여 주었다. 설움이 폭발한 히로는 코우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코우지는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에 애인이 엄청 미웠어. 나를 사랑한 게 아니라 나를 이용한 거구나. 나는 그 사람한테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히로가 진정할 때까지 잠시 뜸을 들였다. 사실 말을 고르고 있기도 하였다. 어디까지 히로에게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어디까지 이 여린 아이를 마지막으로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게 한참을 고르고 골라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히로도 겨우 진정하여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어. 그래서 기회를 줬어. 그 사람이 저질렀던 일이 실수였다면, 만약 다시 되돌리고 싶은 것이라면, 그런 희망을 품고 말이야.”

“......그래서요?”

“보다시피, 지금 애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어.”

코우지는 왼손을 들어 약지를 보여주었다. 히로와 맞춘 커플링이 손에 얌전히 끼워져 있었다. 최근에는 스케쥴이 없어 계속 끼고 다녔더니 익숙해져있었다. 히로의 상징인 노란 빛을 그대로 담은 토파즈가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저씨랑 아저씨 애인 얘기잖아요. 나는,”

“히로에게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꼭 잡으라는 소리야.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 말이야.”

코우지는 그렇게 말하고 탁자 위에 펼쳐진 옷을 적당히 개었다.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쇼핑백에 담았다.

“내일 세탁소 가서 세탁하고 다림질 맡겨. 아마 히로가 집에서 혼자 펴기에는 어려울 거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그런다고 흔적이 지워지지는 않는다면서요.”

“괜찮아. 흔적이 지워지지 않아도 계속 입다보면 익숙해질 거야. 곧 네가 남긴 못난 흔적 대신에 네 노력한 시간의 흔적들이 자리 잡아서 잘 보이지도 않을 거야.”

“그래도 보이면요?”

“인정해. 그리고 앞으로 옷을 더 소중히 여겨주면 되잖아. 옷에 남은 구겨진 흔적들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열심히 입어주고, 네 흔적을 남기면 되니까. 그걸로 충분해.”

쇼핑백에 잘 포장된 옷은 히로가 아침에 나갈 때 까먹지 않도록 현관 앞에 놓아두었다. 저 위치면 나갈 때 꼭 히로의 시선이 닿을 장소였다. 평소에도 히로가 잊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은 꼭 저기에 모아 두곤 했었다.

“고마워요. 아저씨는 가끔 나타나서 늘 멋진 말만 하고 가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다 거짓말도 아니었어요. 정말로 저를 알아봐주는 사람도 나타났고, 꽤 많이 사랑받을 수 있는 반짝이는 사람이 되었어요.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히로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야.”

“어쩌면 사실 아저씨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일지도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정말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아요.”

“히로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정말 믿어볼래요. 아저씨가 말한 그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라는 거, 언젠가 올까요?”

“응. 꼭 올 거야.”

나는 오래전에 이미 너를 용서했으니까. 코우지는 미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마음으로나마 전했다. 닿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자기 위안의 일부일 뿐이었다.

탁자 앞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 손을 내리면, 무언가가 집혔다. 딱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히로가 오늘 받은 것을 코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의 선물은 바로 이거야.”

코우지는 제 손에 집힌 것을 들어 히로의 앞에 놓아주었다. 빈 반지케이스였다. 레드벨벳으로 감싸진 꽤 고급스러운 케이스였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케이스 안에 들어있던 반지는 각각 제 손과 히로의 손에 잘 끼워져 있었으니 무언가가 들어 있을 리가 없었다.

히로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건, 반지 케이스 아니에요?”

“맞아. 반지 케이스야.”

“이런 걸 저한테 왜 줘요?”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 히로는 코우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자신이라도 이런 걸 받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아저씨는 애인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반지를 뺄 일이 없거든. 그래서 반지 케이스가 필요 없어졌어.”

“지금 그래서 저한테 버리는 거예요?”

“버리는 게 아니라 필요할 것 같아서 주는 거야.”

“이런 걸 어디다 써요.”

히로는 퉁명스레 반지 케이스를 탁자에 내려두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 살펴보아도 별다를 게 없었다.

“예전에 주신 토끼 인형이나 사진은 엄청 의미 있는 선물이었는데. 이번 선물은 완전 잡동사니네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네. 안 들어요. 게다가 아저씨가 애인과 잘 사귀고 있다는 증거라니. 저 사실 아저씨 엄청 좋아했다구요.”

“그래서 두 번째 만났을 때 애인 소리에 저 멀리 도망갔고?”

코우지가 정곡을 찌르자 히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래도 울음을 멈추고,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직 넘길 고난이 많을 테지만, 잠시라도 웃어줄 수 있다니 안심되었다.

“어차피 착각이었으니까 상관없어요. 원래 어린 애들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동경을 사랑으로 착각하니까요.”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

“텔레비전에서요.”

역시 아이들에게 텔레비전은 자제시키는 편이 좋았다.

“그럼 나는 히로 첫사랑은 아닌 걸로?”

“당연하죠! 제 첫사랑은 무조건 코우지예요!”

히로가 제 입으로 외쳐놓고 잠시 멈칫하였다. 코우지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 내려앉은 표정이었다. 코우지는 급히 화제를 돌려 히로가 적어도 오늘은 더는 그 생각으로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나중에 첫사랑이 잘 이뤄질 수 있는 부적으로 생각해줘.”

“이미 끝났는데요. 뭘.”

히로가 쓰게 웃었다. 코우지는 히로의 양 볼을 쭉 늘려 흔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용서 받고 고백도 해야지.”

“그게 가능해요?”

“나는 용서하고 고백도 받았어.”

“아저씨 애인 완전 철면피네요.”

사실은 자신이 고백을 한 쪽이었지만, 히로도 거의 동시에 좋아한다고 말했으니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누가 더 빨랐는지에 대해 한 1시간 정도 열띠게 토의한 끝에 결국 코우지가 먼저 고백한 것으로 판명 났을 뿐이었다. 히로는 조금 분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코우지가 먼저 고백한 것으로 합의 보았다.

“응. 내 허니가 조금 당당한 면이 있지.”

“애인을 허니라고 불러요?”

히로의 질문에 코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코우지는 다시 히로의 볼을 쭉 늘렸다 놨다. 히로는 얼얼해진 볼에 얼굴을 찌푸리며 크게 항의하였다.

“이번에는 왜 늘려요. 아프단 말이에요.”

“복수야. 복수.”

히로가 낮에 제 볼을 한참 잡아 당겨 늘리고는 놔주지를 않았다. 그것을 잊지 않은 코우지는 확실히 과거의 히로에게 복수해주었다. 조금 치사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줘야 하지 않나 스스로와 합의를 보았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런 게 있어.”

히로는 당기는 볼을 매만지며 반지 케이스를 가져다 박스 안에 넣었다. 그 안은 언뜻 보면 인형이 들어 있었다. 그 옆의 책으로는 살며시 삐져나온 폴라로이드 사진의 일부가 보였다.

코우지는 현관을 향해 돌아보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현관을 열면 저 너머로 다시 길이 이어져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할 일이 전부 끝났다. 그리고 히로의 말대로라면 오늘은 마지막 날이었다. 아저씨로서 히로를 만나는 마지막 날.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히로. 오늘이 마지막이야.”

“네?”

히로는 못 알아들은 듯 반문하였다. 코우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였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아마 나는 더 볼 수 없을 거야.”

“아저씨 이제 안 와요?”

“응.”

“그렇구나. 지금까지는 헤어질 때 그런 말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봐요.”

“별로 서운해 보이지는 않네?”

“조금 아쉽기는 한데, 아저씨는 저를 보러 오지 않아도 어디선가 저를 계속 좋아해줄 거잖아요.”

“믿음이 대단한데?”

코우지는 히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꽤 자라서 더는 숙여야 할 정도가 아니었다.

“아저씨 덕에 우울한 순간마다 웃을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나야말로. 히로의 전부를 알려줘서 고마워.”

정말, 많이 고마웠다. 자신이 알지 못하였던 히로의 지나간 시간들을 경험 할 수 있었던 지난 사흘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아마 히로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이 더 많다고 했지만, 사실 코우지가 받은 것이 훨씬 많았다. 점점 커가는 히로의 모습도, 절대 볼 수 없는 지나간 과거의 미소들도. 그리고 히로가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게 조언해줄 기회도. 전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것들이었다.

“잘 지내고. 밥도 잘 챙겨 먹어.”

“노력할게요.”

“그리고, 음. 나중에 사랑이 이뤄지면 꼭 아저씨가 첫사랑 아니라고 알려 줘. 히로를 사랑하는 사람이 듣는다면 엄청 기뻐할 거야.”

“제가 아저씨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해요?”

“응.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뭐든 숨기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알았어요. 꼭 아저씨가 제 첫사랑이 아니라고 해명할게요.”

“응. 그럼 잘 있어.”

코우지는 히로에게 인사를 마치고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와 문을 닫으면, 그대로 단숨에 어둠 속에 갇혔다. 뒤를 돌아봐도 더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걷다보면, 히로의 시간들이 보였다. 다시 데뷔를 준비하고, 코우지와 재회하고, 상처받은 마음에 조금 못되게 굴지만 다시금 주어진 기회에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셋이서 데뷔를 하고, 프리즘 킹이 되고. 반대 편을 돌아보면 히로와 코우지가 한창 연애를 막 시작한 초기의 모습도 보였다. 연애를 하기 전까지는 손도 잡고 껴안아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무엇 하나 어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첫 키스가지는 반년이 더 걸렸던 것까지 적나라하게 보였다. 코우지는 조금 부끄러워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더 걷다보면 히로와 연인으로서 이어나간 첫 추억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이미 아는 기억들이라 그럴까, 스쳐 지나가는 속도는 똑같은데 더 눈에 달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끝에 도착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어둠 속에서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흰 빛 아래였다. 눈을 깜빡이면.

 

◇◇◇◇◇◇◇◇◇◇◇◇◇◇◇◇◇◇◇◇◇

 

아침이었다. 해가 쨍쨍하게 창밖에서 비추고 있었다. 곁을 보면 히로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코우지의 품에서 달디 단 아침잠을 자고 있다. 히로를 품에 안고서 그대로 머리카락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히로의 체향이 훅 들어와 코를 간지럽혔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혼자서 견뎌내 가면서 스스로를 보호했던 히로가 장했다.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결국은 반성도 하고, 정말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지금 자신의 곁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그리고 코우지가 과거의 히로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면, 히로가 잘 버텨줬을까. 제대로 모든 순간을 이겨내고 제 곁에 있어주었을까.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히로가 혼자서 겪기엔 매 순간순간들이 쉽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이런 경험이 사소한 일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히로에게는 그 사소한 순간을 넘길 수 있을 만큼 의지할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까.

히로를 꼭 끌어안고 있으면 품에서 꼼지락거려 온다. 코우지는 히로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럼 아직 깨지도 않은 히로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포근하게 달라붙어 온다. 코우지는 잠시 감상에 젖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벌써 10시였다.

10시.

큰일이었다.

“히로 일어나! 지각이야!”

이불을 거의 집어 던지다시피 하며 히로를 일으켜 세웠다. 히로가 눈을 비비며 비몽사몽으로 코우지에게 물었다.

“10시? 그게 왜......?”

“히로, 11시 반에 화보 촬영 미팅 있다고 했잖아!”

“응. 금요일 11시 반. 오늘이 금요일...... 금요일?!”

히로가 눈을 번쩍 떴다. 이제야 자신이 늦잠을 잤다는 것을 깨닫고 허겁지겁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코우지! 나 옷 좀 준비해줘! 픽업해줄 수 있지?”

“알았어. 오늘 만이야. 어서 씻고 나와!”

히로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코우지는 오늘 히로가 입을 옷을 골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서 회사까지 차로 빠르면 1시간정도 걸리니, 30분 만에 준비를 마쳐야 했다.

히로가 챙겨야 할 짐을 다 챙기고 나니 마침 욕실에서 그가 나왔다. 코우지는 바로 히로의 곁으로 달려가 드라이기를 켜 머리카락을 말려주기 시작하였다. 히로는 코우지의 손길을 받으며, 급하게 얼굴에 스킨과 로션을 발랐다.

그렇게 코우지의 도움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는 딱 10시 25분이었다. 코우지도 히로가 옷을 입는 동안 빠르게 세수를 마치고 모자를 눌러 썼다. 어차피 자신은 사람을 만나지는 않을 것이니 대충 나가도 괜찮을 몰골이기만 하면 되었다.

“아, 맞다. 반지 빼야 해.”

히로는 자신의 왼손 약지에 잘 끼워져 있던 커플링을 잠시 빼두기 위해 화장대의 서랍 문을 열었다. 하지만 항상 같은 장소에 두었던 커플링 케이스가 보이지를 않았다.

“어, 코우지 케이스 못 봤어? 매일 여기 뒀는데.”

“어, 어? 글쎄. 못 봤는데.”

“반지 그냥 두면 잃어버릴 것 같은데......”

히로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무언가 생각난 듯 거실로 향하였다. 그리고 인형 옆에 놓아두었던 낡은 반지 케이스에 자신의 반지를 꽂아 두었다.

“역시 딱 맞네. 이제 가자.”

그 사이 10시 30분이 되었다. 둘은 급하게 집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였다. 차에 타고, 주차장을 빠져 나와서야 히로는 한 숨 돌리며 차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아, 정말 깜짝 놀랐네. 어제 알람 맞추고 잔다고 해놓고 그만 까먹었어. 요즘 계속 쉬었잖아.”

“그러게 알람 제대로 맞춰 놓으라고 했지.”

코우지의 쓴 잔소리에 히로는 군말 없이 ‘죄송합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래도 지각을 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 안심되었다. 잔소리를 조금 듣기는 했어도, 결국 자신을 이렇게 챙겨주는 애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히로는 코우지에게 윙크를 하고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 밤 새 온 연락들을 살폈다.

그 때, 띵동. 메시지 도착음이 울렸다. 히로의 휴대폰은 아니었다.

“응? 코우지 휴대폰 같은데.”

“확인 좀 부탁해.”

운전을 맡은 코우지를 대신하여 휴대폰 비밀번호인 히로의 생일을 입력하면, 택배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 우리 폴라로이드 사진기 필름 주문한 거 도착했나봐. 내가 지각만 안 했으면 코우지가 직접 받았을 텐데.”

“그러게 왜 늦잠을 잤어.”

“미안해~ 그래도 코우지 덕에 지각은 면했네. 고마워요, 달링.”

“고마우면 앞으로는 잘 챙겨.”

“이런 잔소리 많은 애인을 둬서 큰일이야. 아저씨는 엄청 배포도 크고 애인한테 다정한 사람이었는데.”

히로가 이번에는 먼저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코우지는 괜스레 긴장되었다.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한 것은 아니겠지? 히로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지 슬쩍 떠보았다.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

“응. 좋지. 말했잖아. 내 인생을 이끌어준 사람이라고. 엄청 좋아했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해준 조언도 결국 내 인생에서 엄청 큰 도움이 되었거든.”

“좋은 사람이네.”

코우지가 그렇게 짤막하게 말을 끝내자, 히로는 슬쩍 코우지를 쳐다보았다. 코우지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히로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빨간 불에 맞닥뜨려 차는 신호에 맞추어 잠시 멈추었다.

“내 첫사랑 아저씨 아니야.”

“응?”

“다 거짓말이었다고. 아저씨가 첫사랑 아니야.”

코우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과거의 히로한테 전부 들었으니까. 자신의 첫사랑은 아저씨가 아니라 코우지라고.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코우지인줄은 꿈에도 모른 채 당당하게 말했었다.

“왜 거짓말했어?”

“그 편이 코우지의 관심을 끌기에 더 좋잖아.”

“실제로 성공했네. 나 엄청 신경 쓰고 있었는걸.”

“원래는 말 안 해주고 싶었는데. 어젯밤에 꿈에서 아저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거든. 사랑하는 사람한테 꼭 첫사랑이 자기가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아저씨 아니었으면 계속 속일 생각이었는데.”

히로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조금 더 숨길 걸 그랬나?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신호가 바뀌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고개를 슬쩍 돌려보면 차창에 히로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옅게 비치고 있었다.

“그럼 히로 첫사랑은 누군데?”

이미 알면서 코우지는 일부러 집요하게 캐물었다. 히로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코우지가 되물어도 히로는 절대 입을 열지 않고 그대로 목적지까지 향하였다.

조금 속도를 낸 결과 11시 20분에 회사 앞에 도달하였다. 10분이나 단축시킨 것은 베테랑 운전자인 코우지의 솜씨덕분이었다.

히로가 조수석에서 내리자, 코우지는 차창을 내려 히로에게 당부하였다. 다행히 뒤에 오는 차가 없어 잠시 말을 나눌 정도는 되었다.

“오늘 몇 시쯤 끝나?”

“한 오후 5시?”

“그럼 나 수산시장 다녀올게. 오늘 저녁 초밥 괜찮아?”

“좋아. 난 계란말이 초밥 좋아하니까, 계란도 많이 사와?”

“알았어. 그럼 수산시장 다녀왔다가 히로 데리러 올게.”

코우지는 할 말을 마치고 차창을 올리려 하였다. 그 때, 히로가 잠시 코우지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

“응? 왜. 히로?”

히로는 잠시 서있다 한마디만 남겨놓고 멀리 도망가 버렸다.

“당연히 코우지 말고 누가 있어.”

코우지는 잠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다, 히로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서야 의미를 이해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알고 있었어.”

 

 


 

 

인연

 

 


 

햇빛이 참으로 맑은 날씨였다. 봄소풍을 가기 적당한 날씨에 히로는 마스크를 잠시 벗고 햇볕을 만끽하였다.

“엄청 포근하다. 딱 낮잠 자기 좋은 날씨야. 물론 봄소풍 하기에는 더더욱 좋은 날씨고.”

“이제 조금 있으면 사람들 많은 장소니까 어서 마스크 써.”

코우지는 히로가 벗은 마스크를 다시 입에 씌워주었다. 히로는 툴툴거리며 코우지에게 대꾸하였다.

“나도 알아. 잠깐 햇볕만 쐬려고 벗은 거야.”

차 트렁크를 열어 각자 맡은 짐을 꺼냈다. 히로의 손에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돗자리가. 코우지의 손에는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손이 무거운 코우지를 대신해 히로가 차 트렁크를 다시 닫았다. 주차장은 아직 한산하여 여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둘만의 야외 데이트는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작년에는 겨우 잡았던 봄소풍 날 하필 비가 오는 바람에 집에서 보냈다. 여름에는 휴가를 갈 엄두도 못 내었다. 마스크나 모자를 쓰기에는 너무 더웠고, 견디더라도 주변에서 이상하게 보니 결국 실내데이트가 한계였다. 가을은 한창 오버레의 활동으로 바빠 데이트는 꿈도 못 꾸었고, 겨울은 히로가 추위를 너무 많이 타 집에서 꼼짝없이 묶여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제대로 나들이를 다녀온 지도 1년이 훌쩍 넘었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2년에 가까워질 지경이었다.

“우리 너무 야외 데이트가 어려워.”

“그 대신 실내에서 이것저것 다 하잖아?”

히로가 살짝 야릇한 표정으로 코우지의 허리를 쿡 찔렀다. 양손에 도시락이 가득 들린 코우지는 팔을 들어 반격하기에는 짐이 너무 무거웠다. 히로는 그것을 알고 마스크를 살짝 내려, 혀를 내밀어 ‘메롱.’하고는 저 멀리 혼자 뛰어 가버렸다.

히로가 달려간 곳으로 따라 가다보면, 히로는 명당이라고 불릴 법한 좋은 자리에 이미 돗자리를 깔아두고 있었다. 어떻게 단번에 명당을 알아보는 것인지, 히로는 이런 면에서는 귀신같이 눈치가 빨랐다.

“일찍 나와 봤자 피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명당을 차지할 수 있는 점은 매우 좋네.”

“내 말 듣기를 잘 했지?”

히로가 깐 돗자리 위에 각각 사방으로 짐을 올려 적당히 고정시켰다. 그리 강하지 않은 봄바람을 막기에는 적당한 무게였다.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돗자리 위에 앉았다.

딱 가장 예쁜 벚꽃나무 아래였기에,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벚꽃 잎이 살랑살랑 코에 내려앉았다. 오히려 바로 아래는 바람이 불어도 크게 꽃잎이 바닥으로 쌓이지 않아 경치를 구경하기에 적당하였다.

“우리 일단 사진부터 찍자.”

히로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어 바로 자세를 잡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탈칵. 필름이 남아 있을 리 없는 카메라는 빈 셔터 소리만 내며 아무것도 내뱉지 않았다.

“응? 여기 필름 하나 남아 있지 않았어?”

“아, 그거 내가 실수로 카메라 눌러서 찍히는 바람에 버렸어.”

코우지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둘러대고 챙겨온 폴라로이드를 다시 카메라 안에 채워 넣었다.

“요즘 며칠 계속 이상해. 인형도 없어지고, 반지케이스도 없어졌고. 카메라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다 아저씨가 준 선물하고만 관련 있네. 뭔가 홀린 기분이야.”

“기분 탓이겠지. 인형은 블랙박스 확인해보니까 우리가 정말 흘린 거 맞더라. 지나가던 아이가 주운 것 같기에 그냥 내버려 뒀어.”

“그래? 그래도 쓰레기로 버려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반지케이스는 어디 쓰레기통에 들어간 거 아닐까? 우리 대청소 하던 날, 내가 너무 열심히 청소를 했잖아? 그 때 없어졌을 지도?”

코우지는 이런저런 변명을 둘러대며 히로의 의심을 없앴다. 물론 솔직하게 자신이 아저씨라고 밝힐 수도 있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저씨’는 히로에게 꽤나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런 추억은 그대로 남겨두는 편이 더 나았다.

“그런가. 그래도 셋 다 아저씨가 주고 가서 다행이야. 아, 없어질 거 미리 알았던 걸까? 인형도, 사진 1장도, 반지 케이스도!”

“뭐야.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아저씨는 다 알았거든? 내가 조금만 연습하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 것도, 내가 반짝이는 사람이란 것도. 그리고 코우지랑 내가 결국은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을 거란 사실도.”

히로는 부드럽게 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벚꽃 잎이 하나 둘씩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봄에 내리는 눈과도 같아 보였다. 산뜻한 눈이 히로의 코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필름 다 채워 넣었어.”

“그럼 빨리 사진 찍자.”

“좋아. 히로가 찍어”

히로는 코우지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가져와, 적당한 각도로 자세를 잡았다. 히로는 늘 SNS에 셀카를 올리다보니 딱히 집중하지 않아도 구도를 정확히 잡을 수 있었다.

“코우지 셋 하면 웃어야 해? 하나, 둘, 셋.”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지이잉-하고 카메라에서 사진이 나왔다. 코우지는 사진을 검지와 엄지로 잡고 흔들어 댔다.

“나 방금 눈 감은 것 같은데.”

“뭐야. 내가 타이밍 맞추라고 했잖아.”

“너무 빨랐어. 하나~ 둘 ~ 셋~ 이렇게 말 해야지. 그렇게 빠르면 들을 새도 없겠어.”

사진을 열심히 흔들자 조금씩 형상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코우지가 사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손을 멈춘 순간.

봄바람답지 않은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벚꽃 잎이 우수수 폭설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사진도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아, 사진!”

코우지가 급히 신발을 구겨 신고 사진을 잡으러 저 멀리 뛰어갔다. 히로는 그 모습이 우스운 지 키득거리며 카메라를 손에 들고 찰칵, 한 장 찍어 남겼다.

“아저씨 사진 드디어 찍었네요.”

카메라에서 나온 사진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코우지는 어디까지 사진을 찾으러 간 것인지 시야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아저씨 얼굴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났던 이유가 있었어.”

그저께 꿈, 히로는 기억 저 편에 묻어두었던 마지막 만남을 꿈으로 다시 마주하였다. 흩뿌였던 얼굴은 이번에 명확하게 남았다. 입도, 몸도 그 때와 같은 말과 행동을 할 뿐 제 속마음은 전혀 튀어나오지를 않았다. 그렇지만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까먹을까.

사진은 이내 작게 멀어져가는 코우지의 형상을 드러내보였다.

“둘러 댈 거면 잘 좀 둘러대든가. 인형을 떨어트렸다, 사진을 실수로 찍었다. 반지케이스는 뭐? 버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는 척이라도 해보지.”

히로는 투덜거리며 도시락 통을 살짝 열었다. 맨 아래 칸에는 코우지가 디저트로 준비해 온 맛있는 체리파이가 들어 있었다. 절대로 점심 먹기 전에 개시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벌써 군침이 돌았다. 한 조각 정도 맛보는 것은 적당히 속아 준 대가로 받을만하지 않냐며, 히로는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 하였다.

체리파이 한 조각을 몰래 입안에 넣으면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벚꽃과도 매우 잘 어울리는 단 내였다.





후기

 

후기가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문화라고 들었지만, 제가 100페이지를 생각하고 글을 썼는데 페이지가 애매하게 남아서 후기를 한 장 써보려고 합니다.

후기의 의례대로 저는 이 원고를 마감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합니다. 교류회라고 목표를 크게 잡았더니 뒤늦게 후회를 하네요.

이번 소설은 예전에 꼭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어디선가 이야기한 플롯을 구체화하였습니다. 조금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이렇게 조금이라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코우히로를 써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코우히로 교류회를 열어주신 주최자분들께 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행사가 열린다는 사실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해서 뭐라 말씀 드리기가 어렵네요. 열심히 주최해주신 코우히로를 사랑하는 주최님 꼭 앞으로도 코우히로 함께 해주세요. 그리고 교류회 참가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늘 탐라나 탐라 너머로 좋은 코우히로 보여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마지막 한 페이지를 축전으로 그려달라는 제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부탁을 드려주신 낭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100페이지를 채웠어요. 귀여운 어린 히로들을 만난 코우지를 모두 감상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표지에 들어간 히로의 어린 시절 사진을 단 1시간 만에 마감해주신 트친님 조대님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덕분에 히로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어요. 허락해주셔서 교류회 끝나고 고화질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공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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