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ice cliché  01. 서울사는 29살 흔남 박만두


 

 저마다 만족스러운 인생을 위한 삶의 좌표는 다르다. 친누나의 좌표는 돈이고 불알친구 태형이의 좌표는 사랑, 전 여자친구였던 슬지 누나의 좌표는 외모. 첫사랑이었던 윤성 선배의 좌표는… 모르겠지만 명예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삶의 좌표는 평범함이다. 다시 말해 평범해야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족스러운 삶은 곧 행복으로 이어지니 내게 있어 평범함은 곧 행복이다.

 

나는 줄곧 평범했다. 그 말인즉슨 줄곧 행복했다. 넘치지 않지만 모자라지 않는 월급으로 우리 네 식구를 거둔 아빠의 직업은 회사원이고, 엄마는 주부. 남들 다 그렇듯 재건축을 노리고 매매한 33평 아파트에 20년을 넘게 살았고, 태권도를 잘하는 초딩에서 게임을 좋아하는 중딩으로, 섹스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고딩으로 성장했다. 키 또한 대한민국 남자 평균 키 173에서 성장이 끝났고, 공부도 그럭저럭해 서울권 4년제 대학을 입학했다. 남들 다 가는 입대 시기에 맞춰 동기들과 나란히 입대해 행정병으로 나름 편하게 군 생활도 마쳤다. 복학해선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며 썸도 좀 타고…. 물론 실패로 끝난 게 대부분이지만 여튼 썸은 썸이었다. 4학년 졸업반에선 남들과 같이 취업 준비를 했지만, 토익 880점에 컴활 1급자격증은 누구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고를 기록한다는데 이 정도면 남들 다 겪는 고통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이럴 땐 보통 두 가지 선택을 하던데, 공무원이나 공기업을 노리던가, 워킹홀리데이로 도피하던가. 나는 공부가 딱히 체질은 아니었기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다. 돼지고기 포장 공장에서 두 달, 하우스 키퍼로 한 달. 영어가 조금 늘고 나서야 카페에 취업해 8개월을 일 하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워홀이 헛수고는 아니었기에 다행히 영어 점수가 늘었고 자소서에 들어갈 내용도 나름 톡톡히 채워졌다. 여전히 자소서보단 자소설에 가까웠지만. 덕분에 엄마 친구 아들은 다 한다는 취업에 나도 성공했다. 엄마가 반상회에서 자랑할만한 대기업 마케팅부서에 입사해 70만 원짜리 정장 세트도 선물로 받고, 회사에서 집으로 꽃도 보내줬다. 스물일곱 말.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에 하반기 공채로 입사해 세후 291만원의 월급을 받고 한 달에 적금 200만 원씩 딱딱 저금해 나름 결혼자금도 모아두는 직딩의 삶은, 지나치게 평범하지만 그래서 부족 할 것도 없다.

 

스물여덟이 되어서는 소개팅 끝에 여자친구도 생겼다. 두 살 많은 누나였는데 곧 죽어도 ‘누나’ 소리를 들어야겠다는 말에 꼬박꼬박 누나라고 불렀다. 슬지 누나는 한 달에 한 번 피부과에서 물광주사며, 보톡스, 쁘띠 윤곽 같은 시술을 받는 외모에 관심 많은 30대였다. 7개월 정도 잘 만나다 나보다 괜찮은 남자가 생겨서 떠나는 누나와의 결말도 나쁘지 않았다. 짧게 만났던 애들과 달리 제대로 연애하는 기분이긴 했는데, 뭐 별수 없잖아. 이렇다 언젠간 괜찮은 여자를 또 만나겠지.

 

평범한 내게 가장 평범하지 않았던 사건은 남자였던 선배를 좋아했던 거다. 무려 첫사랑. 대학교 취업 동아리 선배였는데 뭐랄까. 모르는 게 없는 선배였다. 특히 나는 볼 줄 모르는 재무제표를 술술 해석하는 거에서 완전히 반했다. 동경이라기엔 그 선배와 있었으면 미친 듯이 떨렸기에 첫사랑이라고 명했다. 노멀라이프를 추구하는 내게 게이라는 특별한 프레임이 씌워지는 건 당연히 부담스러웠다. 내 마음이 어떤지 당연히 고민을 많이 했지. 하지만 결론은 좋아한다는 것. 다행인 건 일 년간의 첫사랑은 선배의 유학으로 종지부를 찍었다는 거다. 그리고 더 다행인 건, 그 뒤로 남자를 보고 설레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남자를 좋아했던 첫사랑은 싱거운 내 인생에 특별한 가니쉬 정도가 된 셈이다.

 

*


입사 2년 차. 스물아홉의 박지민은 여전히 밍숭맹숭하게 살아가고 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오늘도 맞춰둔 알람에 겨우 일어나 엄마가 만들어준 과일 주스와 아몬드 몇알로 하루를 시작했고, 부쩍 싸늘해진 날씨에 작년에 큰마음 먹고 산 카디건도 하나 챙겼다. 아빠에게 입사 선물로 받은 (나름 명품) 서류 가방을 들고 콩나물처럼 9호선 열차에 실려 신논현역에 도착했다. 회사 1층 카페에서 카페라떼를 한 잔 사고 사원증을 찍는다. 삐빅-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나며 출근을 알린다. 역시나 사무실엔 아무도 없다. ‘3000만 원을 벌고 싶으면 3억 원어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아빠의 지론에 따라 3억원 어치의 일만큼은 못하지만,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하고 30분 늦게 퇴근하는 걸로 성실함을 갈음한다. 덕분에 사내에선 꽤 의욕 있는 사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커피를 호록 마시며 사내 메신저에 접속했다. 업무 알리미에 숫자 1이 표시되어 있어 클릭하니 10시에 TF팀 상견례가 예정되어있다. 아, 잊을 뻔했네. 오늘 업무분장도 한댔지. 테스크 노트에 재빨리 일정을 적었다.

 

얼마 전 회사에서 카페 프렌차이즈 TF팀을 꾸렸다. 가공식품으로 업계 1위를 달리는 우리 회사는 작년 외식사업에도 진출했는데 이탈리안 레스토랑 프렌차이즈의 실패로 식품 업계 1위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때 TF장이었던 오경식팀장님은 거제도 공장으로 발령받고 퇴사하셨다. 철저히 실력과 결과로 인정받는 냉혹한 대기업 생리를 입사 1년 차에 깨달았다.

 

*TF팀 : Task Force의 약자로 일시적으로 특정한 사업을 위해 팀 등 조직을 만들었다가 해당 업무나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해산하는 조직 단위.

 

회장님의 지시로 두 번째 외식사업은 카페 프렌차이즈가 되고 다시 TF팀을 선발했다. 나름 능력을 인정받은 나는 막내로 차출되어 동기들의 부러움을 샀다. 회장님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사업인 만큼 대리, 과장, 차장급 모두 인사고과 1, 2위에 머무는 사람들로 구성했다. 하지만 마냥 좋은 것도 아닌 게 지난 TF팀의 사업 실패로 피바람이 한바탕 불었던 걸 떠올리면… 으. 이래서 무난한 게 제일 좋은데. 그래도 이번엔 외부에서 엄청난 팀장급 인사를 스카우트해왔으니 다들 우리 팀에 들어오고 싶어 했다. 아무래도 배울 것도 많고, 어느 정도 성공이 보장됐다고 생각하니까.

 

새로운 팀장은 소문만 무성했다. 스타벅스 본사 출신이라는 말도 있고, 우리와 경쟁기업인 P사 임원 출신이란 말도 있었다. 여러 후보를 두고 회장님과 임원진들이 결정한 사항이라 알음알음 사내에 소문이 퍼졌다. 박전무가 누구를 밀고 있네, 최전무는 누구를 추천했네 하는…. 나야 말단 사원이니 이 팀이 실패한다고 해도 가장 타격이 작지만, 과장님과 차장님은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아무래도 새로 오게 될 팀장은 이 회사에서 쭉 커온 오리지널맨도 아니고 외부 인사니까. 어떤 사람이 올지도 모르고, 누구한테 줄을 서야 할지도 모르니 두 분의 심기가 불편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크고 작은 줄타기와 정치질을 보면 아직은 알고 싶지 않은 회사 일들도 많다.

 


“박만두씨 오늘도 일찍 왔네.”

“팀장님 굿모닝입니다.”

“오늘부터 새 부서 가니까 좋아?”

“아뇨오…. 조금 겁나죠.”

“너 TF 갔다고 냉동 팀 잊으면 안 된다. 회식하면 꼭 오고.”

“당연하죠. 안 불러 주시면 저 서운해요?”

 

입사하고 발령받은 건 냉동식품 팀이었다. 주 담당은 냉동 만두였는데 팀장님은 내 얼굴이 만두 같아서 만두 담당을 준 거라며 나를 박만두씨라고 불렀다. 한 번은 팀장급 회의에 서류를 전달하러 간 나에게 ‘박만두씨 고마워요.’라고 습관적으로 말해, 다른 팀장님들도 가끔 나를 박만두씨라고 놀렸다. 홍보실 직원은 어디서 만들었는지 박만두라는 이름이 적힌 명함도 열 장 만들어줬다. 냉동팀 분위기 진짜 좋았는데. 잘해서 TF팀으로 뽑혀간 거지만 냉동팀 사람들이랑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큰 것도 사실이다.

 

아직 TF팀 자리는 배정이 안 나 당분간은 중회의실에 업무용 노트북을 갔다 두고 일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열 시까지 할 일도 없이 냉동팀 자리에 있기가 뭐해 괜히 중회의실에서 자리를 정리했다. 공부하기 전에 책상 치우는 게 제일 신나는 것처럼 포스트잇은 어디에 둘지 연필꽂이는 어디에… 이런 사소한 걸 하며 시간을 때운다.

 


“박지민씨?”

“안녕하십니까! TF팀 사원 박지민입니다.”

“이경식 차장이에요.”

 

회의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건 TF팀에 합류한 영업부 차장님이셨다. 영업부 사원들은 다른 부서와 다르게 군기도 있고, 기가 세다는 말이 있는데 듣던 대로 외모부터가 장난 아니네…. 이경식 차장은 대형마트 판매량 매출 1위의 일등 공신으로 L사 제품 밭인 부산에서도 우리 회사 제품을 매출 1위로 만든 영업의 신이다. 술을 좋아하고 법인 카드로 룸살롱을 다니며 접대를 한다는 구설도 돌지만, 실적 하나는 따라올 사람이 없기에 회사에서 모른 척해준다는 얘기가 공공연했다. 말이라도 붙여야겠다 싶어 바인더에 서류를 끼워 넣는 이경식 차장 옆으로 다가갔다.

 

“차장님, 도와드릴까요?”

“이거 보면 뭐 알아요?”

“네?”

“씨, 여긴 탕비실도 머냐. 이건 됐으니 물이나 갖다줘요.”

“…네?”

“물.”

 

잘못 들은 건가. 물? 물을 가져다 달라고? 입사하고 처음 겪는 일이다. 수직구조가 아닌 수평적 관계가 회사의 슬로건 중 하나인데 탕비실 심부름을 시키다니. 영업부는 듣던 대로 장난 아니구나. 제대로 상견례도 하기 전 괜히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아 얼른 자리를 떴다. 아, 뭔가… 감이 안 좋다.

 

 

계속되는 잔심부름을 하다 보니 휴대폰 알림이 울린다. 20분 후면 상견례다. 흡연하러 간 건지 보이지 않는 차장님을 뒤로 하고 세미나실로 향했다. 회장님 주재로 열린 상견례여서 나 같은 말단 사원은 보기 힘든 전화령 회장을 오늘 볼 수 있다. 옷매무새 다듬고 세미나실로 들어가니 정대리님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박만ㄷ, 아 박지민씨 방가.”

“와, 정대리님 있어서 진짜 다행인 거 알죠..”

 

상온 식품 마케팅팀 정호석 대리였다. 꽤 친한 사이라 TF팀에서 유일하게 마음 둘 수 있는 상대이기도 하고, 유학파 출신으로 배울 것도 많았다. 정대리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이경식 차장 심부름 얘기를 하니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우린 앉지 못하고 열심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기 바쁘다. 나를 비롯해 사원급 파견 한 명, 대리급 두 명, 과장 한 명, 차장 한명 그리고 베일에 싸인 팀장까지. 총 일곱 명의 구성원이었다. 물론 초반엔 일곱 명 이어도 사업이 확장되면 충원되겠지만, 야심 차게 준비하는 TF팀 치곤 꽤 단출한 구성원이었다. 아까 중회의실에서 봤던 이차장님이 가장 마지막에 들어오고 파견 직원을 제외한 모든 팀원이 모였다.

 

“윤과장, 팀장 얘기 좀 들은 거 없어?”

“최전무님라인 이라는데요? P사 쪽 사람 아닙니까?”

“박전무가 가만있겠어? 이거 잘 되면 임원 계약 연장 확정인데. 야 누구 라인 타야 하냐? 스타벅스 쪽 아니면 P사 둘 중 하난데.”

“그런데 P사는 임원 출신인데… 팀장급으로 올까요?”

“얌마, 우리 TF팀장이 그냥 팀장이냐? 대박치면 계열사 대표 자리에 앉는 게 떼 놓은 당상인데.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야 한단 말야. 말이 TF지 성공만 시켜봐라, 우리 고속 승진이야 새꺄.”

“저 차장님만 믿고 갑니다.”

“나이 든 꼰대는 잘만 구슬리면 편하게 갈 수 있어. 한번 해보자고.”

 

차장님과 과장님은 꽤 친해 보였고 둘이 나누는 대화는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나도, 정대리님도 이대리님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스타벅스 본사나 경쟁사 임원 출신의 팀장이라. 이경식 차장은 자기도 꼰대면서 누굴 꼰대라고 하는 건지. 나도 모르게 입이 삐죽 나온다. 탕비실 심부름 시켰을 때부터 인상이 별로였는데, 지금 말하는 걸 들으니 더 싫어진다. 저 사람이랑 어떻게 같이 일할지 막막하다.

 

벌컥 문이 열리고 회장실 비서가 들어온다. 그 뒤로 최태준 전무, 박희성 전무가 이어 들어왔다. 거들먹거리며 얘기를 나누는 이경식 차장이 제일 빠르게 일어나 구십도로 인사한다. 아휴, 꼴 보기 싫어.

 

뒤이어 처음 보는 남자 비서와 전화령 회장이 들어온다. 오 포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앉지.”

 

허스키한 한 마디에 모두가 착석했다.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전화령 회장이 목소리를 가다듬곤 입을 연다.

 

“기대가 큽니다. TF팀의 성과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걸로 믿습니다. 본 TF팀은 본사에서 가장 인정받는 인물들로 구성된 팀입니다. 자부심을 갖고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전회장의 카리스마 때문도 있지만 새로운 팀장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특별히 뵙기 어려운 분을 팀장으로 모셨습니다. 늙은 사람 말이 길어봐야 꼰대 소리만 들으니 팀장 소개부터 하죠.”

 

아직 팀장은 오지 않았는데, 문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하지만 닫힌 문을 열리지 않고 남자 수행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회장 비서는 얼굴 보고 뽑는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여비서도 연예인급인데, 저 남자 수행비서도 배우급 외모다.

 

아직 팀장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소개를 한다는 걸 보니 PPT정도의 약식 소개인가? 남자 수행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리 쪽을 바라본다.

 


“반갑습니다. 전정국입니다. 좋은 결과 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헐, 비서가 아니었어? 놀란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스타벅스 쪽 사람이라는 둥, P사 임원 출신이라는 등 온갖 얘기를 늘어놓던 이경식 차장의 입이 떡 벌어진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당연히 수행비서라고 생각한 나도, 정대리님도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다들 전팀장 외모에 놀랐나 봅니다. 넋이 나가 있는 걸 보면.”

 

회장님의 한 마디에 차장님과 과장님이 벌떡 일어났다. 나도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남자 비서, 아 아니 전정국 팀장은 우리가 앉은 쪽으로 걸어온다. 큰 눈에 우뚝 솟은 코와 까만 머리, 날카로워 보이는 눈썹이 꽤 차가운 인상이다. 전정국 팀장은 이경식 차장부터 순서대로 악수를 건넸다. 떨떠름한 표정의 이경식 차장이 고개 숙이며 악수한다. 놀란 표정의 윤상현 과장도, 이종필 대리와 정호석 대리도 조금 어색하게 악수를 주고받았다. 손을 바지에 슥 문질러 닦고 내 차례를 기다린다. 별것도 아닌 악수에 긴장이 된다. 몸에 꼭 맞는 수트를 차려입은 전정국 팀장이 내 앞에 섰다. 큰 손을 내 허리와 가슴 사이쯤에다 건넨다.

 

“박지민씨. 반갑습니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악수를 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게 인사하니 묵례로 답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열한 시 반에 중회의실에서 뵙겠습니다. 정식 사무실은 아니지만, 바로 업무 할 수 있게 세팅은 끝내 두시죠.”

 

전정국 팀장이 할 말을 마쳤다는 듯 회장님을 쳐다보니 전화령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행한 두 전무는 입도 뻥긋 안 했다. 고작해야 내 또래로 보이는데, 저렇게 어린 나이에 팀장이라니. 회장님과 전정국 팀장이 나가고 뒤이어 임원진도 세미나실을 나갔다. 이 공간에 알 수 없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나이 어린 팀장에 대한 놀람이기도 했고, 어림에도 불구하고 기죽지 않는 당당함에 기선을 제압당한 것 같기도 하다.

 

“전정국? 야 너 들어봤어?”

“아뇨.? 첨 듣는데요. 무지 어려 보이던데.”

 

아니나 다를까 이경식 차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숨을 팍 쉰다.

 

“애송이가 뭘 안다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악수를 먼저 청하고 할 일을 지시하니 퍽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야 박지민이.”

 

박지민씨도 아닌 박지민이. 순간 욱- 했지만 참고 이경식 차장을 쳐다봤다.

 

“뭐 하는 앤지 검색 좀 해보지.”

“네?”

“아 요즘에 인터넷 치면 다 나오잖아. 검색 좀 해보라고.”

 

이경식 차장에 말에 핸드폰을 꺼냈다. 정대리님과 이대리님도 고맙게 같이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을 움직인다. 네이버에 전정국 이름 세 글자를 치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정국 (27세)

 

서울대 경영학 학사

2016 CN 푸드빌 주최 한식 챌린지 대상 ‘바비고, BaBiGO’

2017 한식의 세계화 - 코리안 푸드 페스티벌 대상 ‘점플링 덤플링’

2018 세종시 카페거리 커피스트리트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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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채식주의자를 위한 푸드 테라피 ‘비긴-비겐-비건’ 발행

 

스물일곱. 무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전정국 팀장의 화려한 이력이 수도 없이 나와 있다. 각종 식음료 프로젝트나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대단했다. 우리 회사에서 주최한 대회에서도 대상을 탔구나. 2016년 한식 챌린지 대상 작품으로 기획된 ‘BaBiGO’는 내가 맡은 냉동팀의 소브랜드 명이기도 했다.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전정국 팀장이라니. 2016년이면 전정국 팀장의 나이가 고작 스물셋 이었을 때다. 내가 열심히 군대 행정실에서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을 때. 이 사람은 군대도 안 다녀왔나? 혹시 외국인?

 

이대리님이 검색한 휴대폰 화면을 이경식 차장에게 건네자 화면을 살펴본 이차장과 윤과장 모두 말이 없다. 사실 이 정도 이력이면 회장님 말처럼 모시기 힘들었다는 말이 과찬은 아니었다.

 

전정국 팀장의 이력과 성과는 열 페이지도 넘게 찾을 수 있지만, 그의 나이를 제외한 출신지 등 사적인 것에 대해선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엄청난 집안의 금수저가 아닐까 싶어 네이버에도, 구글에도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질 않아 포기했다.

 

“수상이 단 줄 아나. 기업은 현장인데. 머리로 낸 아이디어보다 발로 뛰는 게 성패를 좌우한다고.”

 

볼멘소리를 내뱉는 차장이 세미나실을 나선다. 열한 시 반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대기업 팀장 자리를 꿰찬 전정국. 어떤 인생을 살면 저 나이에 지금의 위치에 갈 수 있지?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학업을 시작하는 우리의 어린시절은 비슷했을 텐데, 20년이 지난 후의 인생이 이렇게 다르려면 애초에 근본적인 시작점 부터가 다른 게 분명하다. 나 같은 33평 우성아파트에 20년 넘게 살고 있는 흔남이 아닌 드라마 속 도련님의 인생을 살아왔을…. 하지만 하루에 몇 시간 자지 못하는 워커홀릭의 피곤한 인생일 가능성 큰 삶. 가진 돈이 많아도 쓸 시간이 없는 그런 삶.

 


스물일곱의 전정국 팀장.

내가 지금껏 알고 지낸 사람 중 가장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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