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역시나 침대 위였다. 하루는 내내 잠만 잤던 것 같다. 눈을 떠보니 그를 반기는 것은창밖으로 양껏 들어오는 햇빛이 아닌 자욱하게 비치는 달빛이었던 까닭이다. 이불 속은 믿을 수 없을만큼 편안하고 따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오늘은 좀 쉴까.’ 문득 아무개는 생각한다. 그건 단순한 꿈이었겠지. 분명히 어떤 남자에게 떠 받혀진 채로 잠들었었다. 그것도 한강물에 빠지기 직전 공중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은 물론이고, 있어서도 안될 일이다. 자신이 죽어버리면 이제 가족의 부양은 누구도 책임져줄 수 없다.


부시시거리는 고개를 힘겹게 들고 일어났다. 깨질듯한 두통이 한번에 파도처럼 몰려왔다. …’잠깐’이 대목에서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전날의 기억이 전부 꿈이라고 한다면 저녁녘에 술을 마신것도 분명 꿈이었을 터였다. 지금 자신에게서 두통이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 어제 술을 마셨다는 것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곧…


  “일어났네?”

 청량한 목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그 태연한 목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개의 관자놀이를 더욱 징징 울리게 만들었다. 그 남자- 자칭 파란머리 천사라던 그 남자가 당연한듯이 그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듯이 그의 집 현관에 발을 들이며,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편의점에서 사온듯한 도시락을 내밀었다.


  “아, 해장국이 좋았으려나?”

 

아직 비몽사몽해 있는 나를 보며 남자가 말했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간밤에 본 말끔한 양복은 온데간데 없고, 분명 아무개가 언젠가 사둔 옷가지들 중 하나를 대충 몸에 걸치고 있었다. 너무도 당당한 그의 행색은 도리어 아무개로 하여금 상황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인지 알 겨를도 없게 만들었다. 망부석 처럼 굳어있는 아무개를 보고선 남자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얼른 먹어 곧 출근할 시간이니까.”

“…..잠깐만!”


 남자가 무슨일이냐는 듯이 쇠구슬 같은 눈을 깜빡였다.


“네가 왜 지금 우리집에 있는거야? 아니…. 그것보다 어제 일들은 전부 꿈 아니었어?”

 당황해하면서 횡설수설하는 아무개를 보고는 남자가 쯔쯧 하고 혀를 내두른다. 그러고는 아무개의 벌이와는 완전히 딴판인 단칸방의 헤진 바닥을 집고 일어나며 도시락의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참 한심한 녀석이라고 쏘아붙이는 듯한 눈초리가 아무개를 스쳐서 가볍게 아래를 향했다.


“일단 먹어. 그래야 뭘 하던가 말던가 하지. 지금 너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냐?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오늘은 좀 바쁜몸이니까 빨리빨리 하라고.”


 그렇게 말한 남자는 도시락을 꺼낸 비닐봉투에서 숙취해소제를 한병 꺼내들어 아무개의 눈앞에 들이 밀었다. 아무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지경으로 꼬여버린 건지는 물론이고 그 순간 퍼득 떠오른 생각 하나가 더욱 그의 사고를 방해했다.


“…버지…….”

 아무개가 중얼거리자 남자가 도리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뭐라는거야? 말을 할거면 제대로 해! 앵앵거리지 말고.”


그리고 뒤이은 아무개의 행동에 남자는 드디어 밥을 한 숟갈 퍼서 들러올린 손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은 떨어트리다 시피 플라스틱으로 된 일회용 숟가락을 손에서 놓았다. 그 순간 아무개가 남자의 멱살을 완전히 움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무개가 뱉을 다음 대사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생각하기도 괴로운 것을 굳이 제 입으로 말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개의 눈을 똑바로 마주본 채 말했다.


“죽었어.”

                                                           /  /  /  /  /  /  /  /  /  /  /  /  /  /  /  /  /  /



 왜? 어째서? 몇십년….아니 평생동안을 헌신만 하면서 살아오신 분들이다. 이렇게 아무런 유희도 누려보지 못하고 그냥 죽어버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세상에는 공기를 제 코와 입으로 들이마신 그 순간부터 그 모든 순간이 끝나갈 때 까지 희희낙락 먹고노는 사람들도 이렇게나 많이 널려있는데 평생은 남을위해 다 바치신 분들이 이런 허무한 끝을 맞이하다니. 불공평하기 그지없다. 만약 신이라는게 있다면 이것은 분명 그의 실수이리라. 아무개는 생각한다. 그리고 또 따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샌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눈치챈다.


그런 그의 밑에 깔린 남자가 방금 전까지 잔뜩 수축되어있던 온몸의 근육을 살짝 풀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무 억울해 하지 마. 시간이란 원래 그런거야. 그 누구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순 없지. 세상이 불공평한게 아니야. 세상에 불만을 가져서도 안돼고. 세상은 언제나 평등해.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고, 누구에게나 시간을 주지. 그 안에서 어떤 불공정한 일이 일어나든, 그건 오롯이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한 일이야. 물론 그 시간이라는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냐도 신은 전부 본인들에게 맏겼어. 너희 부모님은 결코 억울한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신게 아니야. 행복했을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당당하게 본인이 선택한 갈림길들을 지나서 본인의 인생을 걸어가신거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러면서도 네가 그걸 억울하다 아니다 왈가왈부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


 아무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남자가 말한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리고 그것들을 부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차 어쩔 수 없이 일고있기에 흘릴 수 있는 눈물이 한방울 더, 뺨을 타고 흘렀다. 멍해있는 아무개를 밀쳐내고 남자가 일어난다. 아무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정신 차려. 시간도 늦어가지곤 빨리 한숟가락이라도 먹고 출발해야 돼.”

“………”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아직 붉어진 눈시울과 두 뺨이 촉촉히 젖어있다. 감정의 심한 기복은 없었다. 그저 눈에서 자꾸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가 흐트러진 난방을 다시 정돈하고는 벽장에서 대충 꺼낸 청자켓 한벌을 아무개에게 휙 던졌다.


“…..넌 봤을거 아니야. 두분의 마지막 표정.”


 편안히 침대에서 잠들 듯 돌아가신 두 분의 마지막 표정이 생생하게 머릿속을 지나간다. 손을 맞잡고 떨어질 생각을 않던 그 여윈 손들도 기억났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너…. 정체가 뭐야?”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입술에 까지 닿아서 살짝 짠맛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남자는 대답했다.


“피노키오의 꿈속에 찾아온 파란머리 천사지.”


 전날 밤에도 한번 들었던 그의 통명성은 이것으로 벌써 2번째다. 그는 도대체 무엇인지. 아무개는 도처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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