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1999) - 한 마디로 마스터피스

나는 영화를 볼 때 해석과 감상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석은 감독이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던 의미를 추리하는 일이고, 감상은 내가 추리해낸 의미에 주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 내지 느낌이다. 

감독이 작품에 반드시 하나의 주제의식만 담아내지는 않으며, 때로는 관객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하므로 ‘해석’ 부분에서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감상’의 경우 근본적으로 개개인마다 전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굳이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게 영화의 주제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석

1. Look Closer가 가지는 중의적인 의미

장미꽃, 아메리칸 뷰티는 그들이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상을 의미한다.
댁네 장미꽃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어떻게 이렇게 피워낼 수 있었나요?

주인공 레스터의 가족은 멀리서 보면 이상적인 미국 가정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파탄 직전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세상에 느끼는 아름다움 또한 멀리서 보면 모두들 감탄을 자아내는 ‘장미꽃’이지만, 더 가까이서 보면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봉투’일지도 모른다. 후자를 욕망함에도 불구하고 홀린 듯이 전자를 따르며 그 틀 안에 자신을 끼워맞추면, 결국 이 모순은 쌓이고 커지다가 우리를 파괴한다. 그러니 Look closer, 더 가까이 보라. 그곳엔 당신이 믿던 것과 전혀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2. 레스터의 욕망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가 본 것은 장미꽃이 아니었다.

주인공 레스터는 딸의 친구 안젤라에게서 장미꽃, 다시 말해 ‘아메리칸 뷰티’를 본다. 하지만 정작 닿을 듯 닿지 않던 그 욕망이 실현되려는 순간, 그는 자신이 바라온 게 완전히 다른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앎의 계기는 소아성애라는 극단적인 일탈이었으나 ― 물론 일탈이라고도 표현하기 싫지만 ―, 그 일탈은 각성의 도구였을 뿐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진정 원한 것은 가족의 인정과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욕망에 솔직한 삶이었지, 딸과 같은 나이의 아이과 나누는 성교가 아니었다.

3. 아메리칸 뷰티, 혹은 신기루

이런 16세 아이, 아니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레스터의 시점(POV): 안젤라가 난처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눕는다. 그는 레스터의 망상 속에 존재하던, 신화에나 나올 법한 육감적인 창조물이 아니다. 그저 겁에 질린 아이에 불과하다.

완벽해 보이는 제인의 친구 안젤라는 사실 내면이 불안으로 가득찬, 허영심 강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또래 친구들에게 ‘네 불안을 내게 투영하지 마’라고 쏘아붙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작품에서 그가 ‘아메리칸 뷰티’를 상징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의미심장하지 않나. 모두가 꿈꾸는 ‘이상’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다. 껍데기를 벗기면 그곳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불안하고 보잘것없는, 한 명의 미성숙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게 이상적인 가정이라는 관념이라고 한들, 시대라고 한들 뭐가 다르겠는가.

4. 싸이코패스 혹은 정상인

비닐봉투에게서 의미를 느낀 그가 비닐봉투에게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 중 오직 리키만이 ‘아메리칸 뷰티’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세상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별종으로 그려진다. 그의 기이한 행동, 특이한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취향, 안젤라에게 보이는 싸늘한 태도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요약한다. 그는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봉투를 담은 15분짜리 영상을 지금까지 찍었던 영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상이라고 평가하지만, 그의 감상에 동의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본다. 그래서 모두가 동의하는 ‘아메리칸 뷰티’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수밖에 없다.

5. 모순이 초래하는 파멸

대령이 끔찍한 인물인 건 둘째치고 이 장면은 아름답게 연출되었으며 그게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레스터의 가족은 해피엔딩을 맞을 수도 있었다. 레스터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아내와 딸에게 사과하고, 캐롤린은 레스터에게 불륜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안젤라는 리키에 대해 심한 말을 했던 것을 후회하며 제인에게 화해를 청하고, 제인은 리키와 뉴욕으로 떠나기 전에 부모에게 언질이라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웃, 리키의 아버지인 해군 대령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미 ‘아메리칸 뷰티’에 잡아먹힌 인물이기에, 처참한 끝은 예정되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성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면서 동성애를 혐오하고, 애국심 강한 미국 군인이면서 나치 독일 접시를 수집하며, 규율과 질서를 강조하면서 자식의 방에 몰래 들어와 캠코더에 담긴 영상을 훔쳐본다. 아들을 쫓아낼 때는 ‘내 자식이 게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면서도 비참하게 울고 있다. 대본을 구해서 읽어 보면, 리키를 때리고 나서도 ‘아들의 피를 닦아주려고 하지만 주저한다’ 는 묘사를 찾을 수 있다.

그의 모순이 그 자신과 주변인을 파괴했다. 그의 삶은 온통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으므로, 그가 가진 모순에 비교하면 레스터나 캐롤린의 것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의 아내는 그가 가진 모순 때문에 삶이 파괴되었고, 레스터 역시 그의 극단적인 수치심 때문에 살해당한다.

6. 이상적인 가정?

이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 듯.

이 영화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된 가정이 게이 가정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미국의 기독교 전통을 생각해 보면, 동성애자 가정은 이상적인 가정이라는 틀을 한참 벗어나 있음이 명백하다. 하지만 진정으로 행복해 보이는 부부는 오직 그들뿐이다. 등장인물 중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대령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임을 생각해 보면, 이 대비는 정말이지 흑백에 가까울 정도다.


감상

1. 개인의 고유성

식탁 정가운데 놓인 아메리칸 뷰티

몇 년 전에 한국을 뜨겁게 달군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나, 1999년에 개봉되어 아카데미를 휩쓴 영화 아메리칸 뷰티나, 문제의식은 같다. 그곳에는 모두들 홀린 것처럼 추구하지만 실상은 신기루에 가까운 ‘이상’이 하나 있다. 모두 그 이상을 거머쥐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은 허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 역시 전혀 다르기 때문에 노력할수록 가까워지는 것은 오히려 파멸이다. 그 모순에서 우리는 서로를 본다.

사실 우리는 저마다 너무 다른 존재다. 같은 시대, 같은 시간, 같은 나라, 같은 동네, 같은 교육을 받고도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을 가만히 앉아 생각하다 보면 가끔 온몸의 털이 곤두서기도 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빛나고 밝고 환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어떤 사람은 거부감을 느끼며 도망친다. 덧없는 상대주의를 펼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하나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은, 우리는 서로 다른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영혼은 우리를 저마다 다른 길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 대중문화와 시대정신은 이미 우리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취향과 의견, 나아가 가치관까지 지배하고 조종한다. 아니, 사실 우리 안에 영혼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다고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다. 사회가, 이 구조가 우리를 지배하지 않던가? 우리가 자라는 환경이 우리를 결정하지 않던가? 내가 가진 아주 사소한 취향 하나조차 내가 보고 듣고 만나고 함께한 것들의 총집합이 아니던가? 우리 안에 과연 ‘자유의지’라는 게 존재하는가? 호르몬과 환경의 장난이 아니라?

그래서 내 생각에, 이것은 신념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진리에는 가장 냉담한 인간조차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다르다. 당신과 나는 다른 존재다. 어쩌면 가끔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너무 다른 존재이기에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의 경험과 내 경험은 서로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을 때조차 다르다는 것을, 사실 알고 있지 않나. 입 밖으로 꺼내거나 곧이 인정하면 너무 외로워져서 그렇게 하지 않을 뿐.

내가 다른 이들과는 너무 많이 다른 존재임을, 그래서 내 욕망을 진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존중할 수 있다. 나만큼이나 특별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상대의 모습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모두가 가진 다른 영혼과 그들이 추구하는 고귀한 운명을 존중할 때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직면하지 않고 세상를 떠도는 신기루에 집착할 때, 그 모순은 나뿐만 아니라 결국 다른 사람까지 파괴하고 만다. 그렇게 규율을 중시하던 대령은 영화의 말미에 저급 살인자로 전락하지 않았나.

2. 고유성의 미학 : Look closer

영화의 줄거리와 주제 모두 ‘look closer’로 요약되니, 영화 역사상 잘 뽑힌 10대 tagline에 올려도 손색없다.

그러니 Look closer, 더 가까이 보라. 당신의 욕망은, 당신의 영혼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를지도 모르니까. 세상이 제시하는 길은 결코 나의 길이 될 수 없다. 내 고유성을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갈 때 내 안에 있는 운명은 비로소 고귀해진다. 아니, 어쩌면 ‘고귀하다’는 평가조차 주제 넘은 감상일지 모른다. 누군가 선택한 길이 지뢰밭이라면, 그 길을 절룩거리고 피흘리며 걸어가는 이에게 경의를 보낼지언정 감히 멋대로 박수칠 수는 없을 테니. 그 인간을 바라볼 때 내면에서 느껴지는 이유 모를 뜨거움을 내 멋대로 고귀함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것을 ‘Beauty(아름다움)’라고 부른다.

그 잠깐 동안은 꼭 신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 같아. 주의를 기울이면 너도 그를 마주볼 수 있어.

그리고 너는 뭘 봤는데?

아름다움(Beauty).

이 영화는 20세기 말에 제작되었으므로, 세기말의 풍요로운 권태와 시대가 빚어낸 신기루 속에서 천천히 썩어갔던 사람들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대 역시 나름의 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말이 어떤 것이든,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 영혼이 스스로를 존중하고 또 존중받는 방향이었으면 한다. 이 영화에 묘사된 촌극이 한 시대를 지배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나? 이 세상은 당신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이토록 넘쳐나고 있는데.

The Beauty
그날은 눈이 곧 내릴 것 같은 날이었고, 공기를 맴도는 번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어. 알겠어? 저 비닐봉투가 나와 함께 춤췄어. 꼭 같이 놀아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15분 동안이나 말이야. 그날이 모든 사물 뒤에 이토록 완전한 생명이 있음을, 앞으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내가 알길 바라는 놀랍도록 자애로운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된 날이야. 비디오는 구차한 변명이지, 나도 알아. 하지만 비디오는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걸… 나는 꼭 기억해야만 해. 가끔 이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흘러넘쳐서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고, 내 심장은 곧 함락되고 만다는 걸.

한 사회가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혹은 인위적으로 형성되어 은연중에 강요될 수밖에 없지만, 개인은 언제나 그 이상에 경도되지 않을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극의 마지막 순간, 방황하던 캐롤린은 집에 돌아와 레스터의 옷가지를 끌어안으며 흐느끼고, 안젤라를 돌려보낸 레스터는 가족사진을 보며 미소짓는다. 저마다 가진 고유한 영혼이 존중받는 세상의 가능성은 바로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저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바라본 그곳에 아름다움이 없다면 어떻게 삶의 고통을 버텨낼 수 있을까.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꽤나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겠지만,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움으로 넘쳐날 때 화난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란 힘든 법이다. 때로 나는 그 모든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보고 있는 것만 같아 부담을 느낀다. 곧 내 심장은 터질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며, 그제야 나는 진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붙들으려 애쓰던 일을 멈춘다. 그러면 풍선 안에 있던 것이 터져나와 나를 비처럼 꿰뚫고 흘러내리니, 내 사소한 삶의 모든 순간들에 대해 감사함 말고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것 역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해 일어난 비극

물론 그런 세상이 쉽게 도래하지는 않으리라. 그래서 이런 풍자극이 어느 시대에나 의미있는 것이다. 어쩌면 소셜 네트워크와 인플루언서가 지배하는 21세기야말로 저 비극이 현실에 재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하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장면은 장미꽃이 아니라, 내가 느낀 주관적인 아름다움일 거라는 사실을. 레스터가 죽기 전에 본 것은 보이스카우트 시절에 바라본 별똥별, 집 앞에 쌓이는 낙엽과 할머니의 늙은 손, 그리고 딸과 아내였다. 당신은 무엇을 볼 것 같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언젠간 알게 될 테니까.

덧1. 아메리칸 뷰티는 줄거리는 막장이지만 결말에서 여운을 남기는 블랙 코미디 영화로 알려져 있는데, 내가 보기엔 희망찬 메세지를 건네는 따뜻한 영화다. 마지막에 레스터를 죽인 건, 인간의 모순이 커지다 보면 도저히 성찰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최후가 찾아온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봐라. 평생 자기 자신을 부정해온 인간이 갑자기 번쩍하는 계기가 찾아온다고 바뀌겠나? 자살이나 안 하면 다행, 그 이전에 대령처럼 사람이나 안 죽이면 다행이다.

덧2. 그런 의미에서 예술인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원치 않는 일상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찾고 싶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Be yourself, Love yourself’ 같은 메세지는 도처에 널렸지만, 이 영화처럼 날카롭게 직유한 작품은 드물다.

덧3. 다른 사람 감상은 일부러 안 찾아봤고 지금도 안 보고 있다. 누가 ‘미안하지만 사실 감독은 그런 의도 아니었는데……’ 하면 망치로 뒤통수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을 게 틀림없으니, 그냥 내가 해석한 판타지 안에서 살련다. 최근에 팩트풀니스라는 책을 읽었는데 제4단계 국가 현대인은 모두 자신의 버블 안에서 살고 있지 뭔가. 세상을 곡해하는 것보다는 영화를 곡해하는 게 여러모로 더 나으니까 이건 내 버블 안에 남겨둘 생각이다. “누가 뭐래도 이건 희망찬 메세지를 전하는 따뜻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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