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FNAC에 책을 사러 갔다가 좀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다. 


물건을 고른 후 직원한테 인사를 하고 핸드폰에서 회원카드를 찾아보는데 직원 목소리가 안 들렸다. 그래서 직원을 쳐다봤는데 나한테 입으로 "카드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소리가 안 났다. 순간 내가 이어폰을 끼고 있나 확인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주위를 봤더니 카운터 옆에 "청각장애인입니다. 양해 부탁드려요"라는 문구가 써 있었고, 그걸 보고 순간 당황했다. 뭔가 좀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봉투 드릴까요"라고 봉투를 보여주며 물어봤다.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내며 달라고 했고, 그 사람은 봉투값까지 계산했다. 그리고 내가 신용카드 꺼내는 것을 보고 바로 카드계산기를 준비시켰다. 그렇게 돈을 내고 나오는데 그 사람한테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라는 형식적인 말과 함께 나왔다.


나와서 순간 좀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늘 장애인들을 보며 일반사람처럼 대해야 한다고 했으면서 왜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실제로는 다른 직원한테 대하는 것과 똑같이 그 직원에게 대했고 결국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조금 창피했다.


무엇보다도 어릴적 수화를 배웠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직원에게 수화를 하고 싶었지만, 내가 배운 건 한국어 수화기 때문에 불어 수화와는 달랐다. 그래서 그 사람과 보다 소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해서 안타까웠다. 이럴 때면 2007년 바칼로레아 한국어 시험에서 "언어가 다른 것처럼 수화도 언어마다 달라서 너무 아쉽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수화가 전 세계 공통언어가 될 수 있다면 매우 좋겠지만, 언어와 문화의 관계는 매우 깊어서 수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나라마다 언어마다 수화가 달랐다. 


어쨌든 이번 만남을 통해 다시 장애인들의 대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예전부터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많았지만 주로 정신장애 위주였다. 그래서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선 좀 소홀했던 것을 느꼈다. 

특히 이번 석사과정에서 휠체어를 탄 친구를 보며 이런 생각이 더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휠체어 하면 대기업 회장이나 권력 있는 사람들이 몸이 잠시 안 좋을 때 썼던 것만 기억이 났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과연 휠체어 복지가 잘 되어있나?'란 생각이 들었다. 이 프랑스 친구는 석사과정까지 하는데 정부에서 휠체어 전용 기숙사도 마련해주고, 버스도 휠체어를 위한 장비가 다 갖춰져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선진국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가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에선 얼마나 더 힘들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서울에서 보지 못 했던 휠체어,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로 무심한 건지 아니면 한국에선 혹은 서울에선 아예 안 보이는 건지 궁금해졌다. 한국 버스에서 휠체어 전용 장비를 본 적도 없고, 지하철마다 엘리베이터가 있지도 않고... 국가에서 휠체어 지급을 해주기는 할까? 물론 교통수단으로 자동차를 많이 쓰기 때문에 부모님이 차를 몰고 다니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다면 장애인은 평생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면 부모들도 더 힘들기만 할 것이다.


혼자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 내 친구를 보며, 우리랑 같이 학교를 다니고, 우리처럼 교통문제로 수업에 늦기도 하고, 저녁이 되면 같이 맥주 한 잔하고 혼자 집에 가는 걸 보면서 '이 친구는 정말 독립적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신체장애인들은 어디에 있을까?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어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이의 장애를 부모의 탓으로 돌려 부모가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짐인 것처럼 표현해서 부모도 장애인들도 사회에서 홀대 받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됐다.


프랑스에서 법대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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