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왔냐.”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태평한 얼굴로 마루에 누워 있는 서현이 보였다.

오늘도 또냐.

정말이지 오늘만큼은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세건은 인상을 쓰며 그의 배를 꾹 밟고 넘어갈까 고민하다가, 훌쩍 뛰어넘었다.

“와,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뛰어넘네. 하여튼 싸가지없는 인간.”

“대낮부터 방바닥에 누워서 뭐 하는 거냐. 안 밟은 게 다행이란 생각은 안 드냐?”

투덜거리는 현에게 세건은 눈을 흘기며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현은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며 느긋하게 바닥 위에 널브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냉장고를 연 세건은 차가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곤 다시 서현이 누워 있을 거실 쪽을 흘겨본다. 거실은 부엌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치밀어 오른 열이 식질 않았다. 세건은 다시 냉수를 들이켰다.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길 잃은 분노라는 걸 알고 저 녀석에겐 잘못이 없다는 걸 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세건은 마구 화를 내고, 신경질 부리고,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그가 없는 곳에서 엉엉 울고 싶었다.

신경질적으로 냉수 수도꼭지를 한계까지 열었다. 전부 할 수 없는 일이다.

괜히 집 비밀번호 알려줬어.

애초에 꽐라가 될 때까지 저 술고래와 술을 마신 게 잘못이었다.

촤아아-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세차게 싱크대를 두드려대는 물줄기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대로 얼굴을 처박을까 생각하던 찰나, 세건의 어깨너머에서 길쭉한 팔이 쭉 뻗어 나왔다. 자신보다 한 마디 정도 더 큰 투박한 손은 손쉽게 물줄기를 잠가버린 뒤, 세건의 어깨를 잡았다.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그를 돌려세운다.

세건은 고집스레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야, 한세건.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얼굴 좀 들어봐, 왜 그래.

현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건은 그 다정한 목소리가 너무 싫었다. 싫으면서도 좋았다.

“나 게이야.”

세건은 씹어 삼키듯이 그동안 제 속을 곪게 한 말을 내뱉었다.


*  *  *

 

아, 이젠 한계였다.

지루한 강의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강의실을 나오려던 찰나, 이름도 희미한 동기 녀석이 세건을 불러 세웠다.

‘야, 한세건. 나 물어볼 게 있는데. 현이 녀석 말야, 혹시 걔… 걔도 그거 아니지?’

세건은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의 뒷말을 재촉했다.

‘아, 그러니까! 서현 그 자식 혹시 너랑 같은, 그, 그쪽이냐- 이 말이지.’

동기 녀석은ㅡ이름이 현재였던가, 헌재였던가ㅡ 곤란하지만 별로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아- 그제야 세건은 그가 묻는 말의 요지를 깨달았다.

‘아니이- 무용과 이예진이가 그렇게 육탄전으로 달려들었는데 현이 자식이 밀어냈다고- 지금 이예진 완전 열 받아서 이상한 소문 내고 다니고 있거든. 그래서 혹시나 하고-’

‘아냐, 그 새끼 그쪽 아냐.’

세건은 딱 잘라 말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피식 웃으면서 자기는 나중에 딱 딸 둘만 낳아 부인과 오손도손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게 서현이었는데, 그런 녀석이 게이일 리가.

‘그 자식 소원 중 하나가 토끼 같은 마누라에 여우 같은 자식들이랑 사는 거라는 거 너네도 다 알지 않냐. 개소리를 믿고 있냐?’

‘아아, 그치, 역시? 아니, 이예진이 너랑 싸잡아ㅅ……, 아, 미안. 이건 헛소리. 여튼 알겠다.’

세건은 더욱 인상을 썼다. 결국 문제는 자신이었나.

이미 집에서도 내놓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상관없어서 신경 쓰지 않고 잘 살아왔지만……. 한편으론 그럴 만도 했다. 사지 멀쩡하고 잘난 얼굴 달고 있는 사내놈이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애들은 마다하고 소문 나쁜 동성 친구 옆에 착 달라붙어 있다면, 그게 남의 이야기였다면 세건도 한 번쯤은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석은 아냐.

세건은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그래. 수업 잘 듣고, 현이 놈 좀 잘 설득해줘 봐. 미팅 참여하라고. 간다!’

현잰지 헌잰지 모를 동기는 세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재빨리 멀어졌다. 그런대로 괜찮았던 기분이 진창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세건을 한참 내려다보던 서현은 피식 웃어버렸다. 커다란 손으로 쓱쓱 한세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근데 그게 뭐.”

“네가 자꾸 나한테 달라붙으니까 이상한 소문 나잖아, 멍청아.”

오래 쓰다듬지는 못했다. 세건이 꽤 매운 손길로 그의 손을 쳐냈다.

아야야- 너 은근 가차 없다?

서현은 오버해서 울상을 지으며 아프다고 호소했지만, 세건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뭐.”

“네놈한테 쓸데없는 소문이 붙는다고!”

“넌 언제 그 소문들 신경 써서 피했냐. 고등학교 때, 내가 소문에 신경 쓰는 놈이었어?”

서현은 성큼 한 걸음 더 세건에게로 다가갔다. 입꼬리를 움찔하던 세건이 한 걸음 물러서려고 했다. 발꿈치가 싱크대 서랍장에 닿자 그제야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확실하게 당황해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한세건은, 역시 토끼 같다고 서현은 생각했다.


*  *  *

 

고등학생 시절, 고2 여름 방학을 코앞에 둔 이상한 시기에 전학 왔던 한세건은 그때도 그랬다. 호기심 많고 서로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남자 녀석들이 떠들어대는 ‘전학 온 사유’는 저마다 달랐다.

전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네, 아니네, 자기를 괴롭히던 놈들을 일방적으로 개 패듯이 패서 어쩔 수 없이 전학 왔네, 아니네, 선생 한 놈과 마찰이 있었네.

그 소문들은 언제나 똑같은 바탕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저 새끼 호모라던데.

확실히 한세건의 인상은 꽤나 예쁘장했고, 어딘가 홀로 노는 듯한 분위기도 있어서 괜히 건드려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긴 했다고, 현은 늘 생각했다.

호기심이 이는 것은 언제나 삶의 좋은 재료가 되어준다. 서현은 귀찮아하는 한세건을 무던히도 쫓아다니며 겨우 '친구'의 자리를 차지했다.

주변 여고 애들에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유명했던, 이성 관계에선 빼는 법 없는 서현이 그렇고 그런 소문을 단 한세건과 어울리기 시작하자 처음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세건과 어울리는 건 어울리는 거고, 여전히 서현의 옆에 여자 친구가 끊이질 않자 소문 같은 건 금세 사그라들었다. 물론 세건에 관한 소문이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그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녀석이었다. 재미있는 사이였다.

 

수능을 치자마자 서현은 그때까지 만나고 있던 여자 친구에게 화려하게 차였다. 차였다고는 해도,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을 종합하자면 그가 밀어낸 거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현은 가볍게 놀던 것을 멈추었다.

‘야, 한세건. 만약에 너랑 사귀는 사람이 너한테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고 단언하면, 그게 사실일까?’

나른한 겨울 햇볕을 쬐며 옥상에서 뒹굴던 현이 반 바퀴를 다시 빙그르르 돌아 세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세건이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너 차인 이야기도 들어줘야 하냐?’

불편한 얼굴을 한 세건은 퉁명스레 면박을 주었지만, 곧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허공을 쏘아보는 눈매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서현은 불현듯, 아주 불현듯 깨달았다.

‘그래도, 누가 뭐라든지 네 마음은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아, 어쩌면.

현은 세건의 대답에 푸하하 웃으며 다시 바닥을 뒹굴었다. 그런 현을 미친놈 보듯 쳐다보던 세건이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여 떨어져서는 다시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여자 친구는 서현에게 말했다. 나는 그놈의 잘난 네 우정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빈번히 약속을 깨고, 여자 친구가 옆에서 그렇게 같은 대학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은근히 찌르는데, 그 말은 싹 다 무시하고 친구랑 같은 대학교에 가겠다고 기를 쓰고 공부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여자의 감은 무섭다고 하던가. 웃음이 잦아들자 현은 사지를 쭉 펴고 벌러덩 드러누워 겨울 하늘을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곁에 머무르며 현은 단 한 번도 소문에 대해 세건에게 직접 묻지 않았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사실이 무엇이든 변하는 것이 없으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세건 역시 그에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인제 와서, 왜 이러는 걸까.

현은 피식 웃어버렸다.

아아, 그래.

“너 나 좋아하지.”

남의 눈길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놈이 자신에게 그런 소문이 붙었다고 이렇게 열을 내다니.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티가 나도 너무 났다.

툭 내뱉은 말에 한세건이 화등잔만 해진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았다.

 

집에서는 내놨다고 해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가족들은 세건에게 금전적으로 후했다. 금전적으로 부족함 없는 한세건은 대학교 근처 투룸에서 혼자 살았고, 옷도 언제나 센스 입게 잘 입었으며, 고지식하게 공부도 잘해서 성적 장학금을 받기까지 했다.

소문이 소문인지라 교우 관계는 좁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아니, 서현은 그 점이 늘 마음에 들었다.

“ㄴ, 내가… 내가 너를, 널 왜ㅡ!”

당황해서 시뻘건 얼굴을 한 세건이 보기 드물게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서현은 피식 웃으며 그런 세건이 더는 일어날 수 없도록 폭탄을 던졌다.

“난 좋아하는데.”

남들이 보기엔 날카롭고, 선을 긋고, 자기 혼자 유유히 사는 것 같은 한세건은 사실 예민하고, 섬세할 뿐이라는 걸 자신만 아는 것이 좋았다.

한세건이 웃는 것, 한세건이 의외로 대형견을 좋아죽어라 한다는 것, 한세건이 정말 피 터지게 공부를 하는 노력파라는 것, 뭐 하나 맡기면 열심히 해내고야 마는 완벽주의자에, 고지식한 녀석이라는 것.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일편단심이라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자신만 아는 게 좋았고, 그래서 그 녀석 자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세건아, 난 너 좋아하는데.”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느리게 깜빡깜빡 감았다 뜨던 세건은 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드득 고개를 돌려버렸다. 새빨갛게 젖은 그의 귓불과 목덜미가 보였다.

서현은 참을 수 없이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볍게 닿은 입술을 깨달은 한세건이, 풀썩 주저앉았다.

서현은 천천히 그를 따라 주저앉아 세건의 눈동자를 찾아 헤맸다.

“그래서 그런 소문 하나도 신경 안 쓰는데. 넌 싫냐?”

나랑 그렇고 그렇다는 소문나는 거.

서현은 여러모로 쇼크를 받았는지 넋이 나간 듯한 세건의 볼을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 뭐 싫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미.

세건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새하얀 치아에 눌린 아랫입술이 유난히 붉었다.

“저기, 이왕 이렇게 된 거 키스해 봐도 돼?”

“안 돼! 미친놈아!”

그 입술의 온도가 궁금해 죽을 것 같아, 넋 나간 틈을 타 스리슬쩍 작업을 걸었더니 그건 또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정신을 차린 세건이 빽 소리를 질렀다. 후다닥 일어난 세건은 재빠르게 부엌에서 도망쳤다.

달칵- 하나밖에 없는 방으로 도망간 세건이 문을 잠갔는지 문고리 잠금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서현은 느긋한,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랜 이런 식으로 일을 칠 예정은 아니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마음에 드는 전개였다.

어차피 나 좋아하면서.

도망갈 곳도 없는 공간에서 숨겠다고 용을 쓰는 게 깜찍할 지경이었다.

토끼 같은 마누라에 여우 같은 자식은 아무래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저 완고하게 고지식한 녀석을 꾀어내려면 당분간 심심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즐거움이 샘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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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받을 땐 무작정.

 짧게 갑니다.

찍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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