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경의 글이라 군견조의 성이 제국군 시절의 것입니다.





가시나무 숲




옛날 아주 먼 옛날, 이 세상에 마물이 있던 시절, 포레스트 힐에는 두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들은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성 밖 언덕에서 소년들이 놀고 있을 때, 포레스트 힐을 커다란 소용돌이가 덮쳤습니다. 소년들은 급히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집과 마을은 마물들의 공격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슬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습니다. 마물들에게 공격당하기 전에 도망쳐야 했습니다. 마물을 피해 숨어있는 소년들을 구조하러 온 것은 마물을 잡고 소용돌이를 제거하는 레지멘트의 대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년들은….







Prologue




에바리스트는 잠에서 깨었다. 새벽 어스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머릿속은 캄캄하지만, 불쾌한 기분은 드는 것을 보아 꿈을 꾼 모양이었다. 정자세로 누워있던 몸을 옆으로 틀었다.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 더듬거리자 휴대전화가 잡혔다. 전원을 누르자 액정 가득 밝게 빛이 터져 나온다. 에바리스트는 아직 어둠에 더 익숙한 눈을 가늘게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토요일 새벽 네 시 삼십 분. 회사도 쉬는 주말인데 꿈도 하루 정도는 휴업해주지, 하고 불만을 터뜨려 본다. 그는 최근 들어서 이 시간에 깨는 일이 잦아졌다. 기억나지 않는 꿈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으니 소용이 없었다. 새벽 사이에 온 연락 중에 급한 일은 없는 것 같다. 회사 사수인 프리드리히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와 있지만, 술기운에 신이 나 보낸 듯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외계어가 적혀있어 무시하기로 했다. 휴대 전화를 다시 침대 구석에 밀어두고 잠을 청했다. 주말이니까 조금 더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제법 참담했다. 부스스하게 붕 뜬 머리와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아 멍한 눈, 마찬가지의 이유로 창백한 얼굴까지. 입에 칫솔을 물고 머리를 만져보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아무리 온종일 집에서 뒹굴더라도 그는 성정 상 지저분한 모습은 견딜 수가 없다. 결국, 에바리스트는 온수 보일러의 전원을 눌렀다. 쏟아지는 물이 상쾌했다. 회사가 쉬는 주말이라 편한 녹색 스웨터에 면바지를 꺼내 입었다.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해서 집에서도 두툼한 옷을 입어야 했다. 나른한 몸을 이끌고 나와 냉장고를 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의 냉장고가 살뜰히 채워져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며칠 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유를 사다 놓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조차 없는 현 상황은 조금 한숨이 나왔다.


전기 포트에 물을 받아 스위치를 누르고 선반에 올려둔 식빵을 꺼내 토스터에 집어넣었다. 계란프라이라도 하나 곁들이고 싶었지만, 냉장고에는 계란도 없다. 오늘 하루는 집에서 보낼 생각이었는데 외출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프로젝트가 한창이라 다음 주에는 밤샘도 야근도 잦을 테니 방심하고 있다간 다음 주말엔 이 정도의 간단한 식사마저 무리일지도. 에바리스트는 코코아 분말을 담은 머그잔에 끓는 물을 부었다. 일견 차갑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그는 종종 진한 에스프레소나 핸드드립 커피를 마실 것 같다는 오해를 사곤 했다. 하지만 그는 쓴 커피보다 달달한 코코아를 좋아해서 코코아를 몇 상자씩 집에 쌓아놓는 남자였다. 아마 중탕하는 일이 번거롭지만 않았어도 직접 핫초코를 만들어 마셨을지도 모르겠다. 에바리스트는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고 코코아를 마셨다. 우유 대신 물에 탔더니 역시 맛이 덜했다. 매번 모자라지 않게 우유를 사두기엔 집에서 식사하는 횟수가 너무 적었다. 차라리 아침마다 작은 우유를 정기적으로 배달받으면 그날그날의 상황에 따라 회사에 들고 가거나 집에서 마시거나 하기에 편리하지 않을까.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포스트잇에 메모했다.


접시를 개수대에 두고 머그잔만 든 채 TV를 켰다. 주간에는 뉴스 전문 채널에 고정되어 있어서 오전 뉴스가 흘러나왔다. 지난밤 소식이라며 어딘가에서 일어난 화재, 강도 사건이 짧게 소개되고 정치와 사회 이슈들이 다루어진다. 최근 젊은 국회의원이 공화당의 주요 인사가 되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대부분의 보도는 그 남자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남자, 마르세우스는 대통령 자리에 있는 공화당 출신의 레드 그레이브와 정치적 노선이 같은 사람이었다. 젊고 미인인 공화당의 간판 마르세우스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청년층을 이끌어 낸다는 둥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에바리스트는 그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은 민주당이 원하는 것처럼 마르세우스를 필두로 한 공화당과 레드 그레이브의 연방정부가 시민의 삶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바리스트의 직감은 그 두 사람의 집권이 자신과 같은 소시민들 살림살이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예고하고 있었다. 몇 정치 분석가들과 정치인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현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시류를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허나 대세의 흐름을 막기란 쉽지 않다. 카메라 세례를 받는 마르세우스의 모습과 헤드라인 기사가 자막으로 흘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에바리스트는 정치에 큰 관심은 없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상황은 알아야 할 평범한 월급쟁이이기 때문에 뉴스를 보고 듣고 나름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들과는 별개로 에바리스트는 마르세우스를 매체들을 통해 접한 이후 그의 정치적 행보와 무관하게 어떤 생리적인 거리낌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 없이 불안하고 불편하고, 무언가를 잊은 것만 같은. 주말 날씨를 알리는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에바리스트는 TV 화면을 무의미하게 응시했다.



* * *



바깥은 생각보다 더 썰렁했다. 어차피 차를 타고 움직일 예정이니 하나 더 걸치고 나올까 하는 마음은 고개를 저어 털어버린다. 엘리베이터가 맨션 1층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걸어 주차장으로 나갔다. 내비게이션에 근처 할인 매장의 주소를 입력하고 그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에바리스트가 혼자 산 지 올해로 삼 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밥도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다. 어느 순간 회사 일이 바빠지면서 하루 이틀 가볍게 때우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최근에는 제대로 된 가정식을 입에 댄 적이 없을 정도로 에바리스트의 식사는 외식과 군것질에 편향되어 있었다. 반년 전부터는 슬슬 자기 자신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본가에 이야기할 만큼 철이 없지도 않았고, 인제 와서 룸메이트를 구하자니 집 안에서까지 눈치를 보는 것은 질색이었다.


마트에서 혼자 장을 보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유통기한과 가격을 꼼꼼히 따져가며 쇼핑 카트에 물건을 담았다. 탐이 나는 음식재료들이 종종 보였지만 충동적으로 구매하기에는 집에서 먹을 사람이 자신뿐이며 그 자신조차도 집에서 무언가를 먹는 일이 적다는 이유로 쉽게 카트에 무언가를 담지는 못했다.



조수석 밑에 두었던 장바구니를 양손 가득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였다. 주머니 속 전화벨이 울렸다.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전화를 꺼낼지 머뭇거리던 찰나 에바리스트의 오른손이 가벼워졌다.


“들어줄 테니 전화받아. 급한 걸지도 모르잖아?”


환하게 웃으며 그의 장바구니를 뺏어 든 이는 초면의 사내였다. 새로 이사 온 사람인가? 에바리스트는 가볍게 묵례하고 휴대 전화를 꺼냈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발신인은 베른하드였다. 베른하드는 에바리스트의 학과 선배로 그에겐 은인 같은 존재였다. 고교 시절 대학교 입학 정보를 찾다가 알게 된 선배였는데, 이후 같은 학과를 다니며 에바리스트에게 멘토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고 전 직장이 맞지 않아 힘들어할 때 지금 다니는 회사를 추천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입사한 뒤 회사에 쌍둥이 동생이 다니고 있다며 저녁 식사 때 데리고 나온 사람이 제 사수인 프리드리히였을 때는 서로 얼마나 놀랐던지 모른다.


[내일 약속 말인데….]

“아, 네.”


에바리스트는 베른하드의 말에 대답하며 남자가 들고 있는 장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전화받는 것과 별개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오래 폐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맙다는 의미로 재차 고개를 숙이는데, 남자는 장바구니를 돌려주지 않고 에바리스트의 손을 피했다.


[일이 생겨서 같이 못 갈 것 같군. 미안하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말의 내용을 머리에 입력하면서 눈앞의 남자를 상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는 그럼 어쩔 수 없죠. 하고 대답하면서 전화기를 멀찍이 떨어뜨렸다.


“저기, 이제 괜찮으니 돌려주셔도 됩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이런 일엔 익숙하니까.”


남자는 에바리스트가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는지 씩 웃었다. 자, 에바. 집까지 들어다 줄게. 에바리스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방금 에바라고, 에바리스트는 당황해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정리하지 않은 금발, 특이한 모양이 그려진 안대 어디를 봐도 강렬한 인상인데 자신에게는 이 남자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대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 거지? 게다가 ‘에바’는 자신의 부모님만이 부르던 애칭이었는데. 남자를 향해 무언가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들고 있던 전화기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려왔다.


[에바리스트?]

“아, 잠시 지금 옆에 사람이 있어서요. 별 일 아니에요. 베른하드. 저보다 베른하드가 더 아쉬울 것 같은데, 나중에라도 티켓팅 다시 해볼까요?”


함께 보기로 한 공연은 베른하드가 이전부터 재연을 기다리던 오페라였다. 자신은 보지 않아도 괜찮지만 베른하드는 아닐 것이다. 눈앞의 사내가 신경 쓰였지만 에바리스트는 일단 전화에 집중했다. 에바리스트의 물음에 베른하드가 낮게 웃었다. 속내가 깊은 후배였다. 자신은 정 미련이 남으면 프리드리히에게 시간을 비우라고 부탁해도 된다. 베른하드가 말했다.


[괜찮아. 친구가 시간이 된다고 하면 나 대신 둘이 다녀와.]

“네. 그럴게요. 혹시 못 보게 되면 연락 주세요. 오페라야 한두 번 더 봐도 아깝지 않으니까요.”

[그래.]


통화 종료를 누르고 에바리스트는 당면한 문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지루한 기색도 전혀 없이 저만 바라보고 있었다. 올곧게 자신만을 바라보는 눈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잡아두고 폐를 끼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까 돌려주고 가셨어도 되었습니다.”


그는 남자의 기분을 고려해 돌려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못 알아듣지는 않을 터였다. 짐을 돌려받기 위해 재차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남자가 순순히 장바구니를 돌려주었다.


“전화 통화가 길어봐야 얼마나 길다고. 난 널 더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는걸. 에바. 오랜만이야.”

그리고 넌 돌려 말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두고 가면 좋았다고 말하는 게 더 어울려. 남자가 덧붙였다.


“너 누구야.”

에바리스트가 추궁했다.


“아이자크 로스발드. 그란데니아 제국의 기사였던 에바리스트 바르트의 오랜 맹우였던 사람이지. 보고 싶었어. 이번엔 700년만인가? 아, 200년? 400년이던가? 미안, 이번엔 에바가 다시 태어나기까지 세월의 간극이 제법 되어서 헷갈리네. 너무 오래 살아서 시간 감각이 둔해지기도 했지만 말이야.”


평범하게 미친놈인가? 그란데니아 제국? 몇 년? 다시 태어나? 에바리스트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아이자크가 쫓아 걷는다. 그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급히 비밀번호를 눌러 도어락을 해제한다. 닫히는 현관문 사이로 아이자크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기, 에바! 내 말 좀!”


주말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 1



또다.


에바리스트는 팔을 눈두덩 위로 올렸다. 수면장애라도 생긴 게 아닐까. 얇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당기고 몸을 옆으로 말았다. 오늘도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깼다. 휴대 전화를 꺼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제 이상한 남자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브레이즈에게 오페라를 보러 가겠냐고 문자를 보내 두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에바리스트가 아는 브레이즈는 밤늦은 시간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사람이라 예상을 뛰어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같이 갈지 말지는 좀 일찍 답해주면 좋을 텐데. 더 눈을 붙이려던 그는 다시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어제의 남자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왠지 답답한 기분이라 베란다 문을 열었다. 가을 찬바람이 땀에 흠뻑 젖은 머리를 쨍하고 찔렀다. 잠깐 바람을 쐬었을 뿐인데 몸이 식다 못해 벌벌 떨려왔다. 바로 문을 닫고 비척비척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직 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딩동딩동. 남자의 의식을 수면 위로 잡아 올린 건 인터폰 벨 소리였다. 몸을 녹이러 이불 속에 파묻혔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던 모양이다. 머리를 털어 잠을 쫓고 양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얼굴을 꾹 눌러 문질렀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에바리스트는 인터폰 수화기를 들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810호 맞으시죠?”

“맞습니다.”


“그, 지금 810호 앞에 남자분이 있으시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 아는 분인지 확인하려고 전화했습니다.”

“집 앞에요?”

“모르는 일이십니까?”


그는 현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인종 울리는 것도 모르고 잔 걸까. 아니면,


“아니, 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바리스트가 인터폰을 내려놓고 방을 가로질렀다.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철컥,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에바!”

그곳에는 속도 없이 제게 손을 흔드는 아이자크가 있었다.


“계속 여기에 있었나?”

“뭐 그렇지. 에바, 잘 잤어?”


잠을 깨운 원흉 주제에 잘도 묻는다. 에바리스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네가 여기 죽치고 앉아있었던 덕분에 경비실의 연락을 받았다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그는 몸을 돌렸다. 잠깐, 여기 계속 앉아있었다고?


“밤 공기가 많이 찼을 텐데?”

“춥긴 했는데 괜찮아. 행군할 때보단 안 힘들었고.”


아이자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닌 척해도 몸이 뻐근했는지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고 팔을 당겨 스트레칭을 한다. 에바리스트는 팔짱을 끼며 문기둥에 몸을 기댔다. 조금 전까진 아이자크인 것만 확인하고 문을 닫을 생각이었는데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녁은?”

“안 먹었어.”

“점심은.”


머쓱하게 볼을 긁는 행동을 보고 에바리스트는 한숨을 쉬었다. 어제 그가 외출을 나갔을 때가 점심이 막 지난 시간이었고 돌아와서 저녁 식사를 했었다. 자신이 오기 전부터 이곳에서 저를 기다렸고 밤새 있었다고 하니 저녁 식사는 분명 걸렀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거슬러 올라가 점심까지 물어봤는데 그조차 건너뛰었나 보다.


“들어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에바리스트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미 던진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아이자크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 들어가도 돼? 그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여태까지 중에 최단 기록이야! 문전박대 한 달은 더 각오하고 있었는데.”


뒤따라 들어오던 아이자크의 말에 에바리스트가 울컥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 * *



“에바, 정말로 잘 잤어?”


아이자크에게 소파를 권하고 부엌에 간단한 아침 겸 점심을 만들러 들어갔을 때였다. 소파에 앉으며 아이자크가 물었다. 잘 잤느냐는 말이 그저 아침 인사라고만 생각했는데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기억나지 않는 꿈이 꺼림칙하게 남아있지만 그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지속하여 온 문제이다. 그러고 보니 새벽마다 깬 건 언제부터였더라? 한 달이 조금 넘었나?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악몽은 안 꿨어?”

에바리스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정말 걱정하고 있는 말투라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정말로 악몽을 꾸고 있노라고.


“맞구나.”

그가 소파에서 일어나 아예 부엌 조리대에 연결된 식탁에 와 앉았다. 어디부터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아이자크가 또다시 웃었다. 참 웃음이 많은 남자라고 감탄하기에는 그 웃음이 많이 지쳐 보였다. 그의 파란 눈에서 빛바랜 세월이 느껴졌다.


“올해, 아니 내년에 생일 지나면 스물여섯이지?”

“그래.”


“에바리스트 바르트, 눈의 달 23일… 그러니까 지금 달력으로 환산하면 1월 12일생. 혈액형은 A형.”

나이부터 정확한 신상 정보를 망설임 없이 줄줄 읊는다. 그리고 잠시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항상 너는 똑같은 이름과 똑같은 얼굴로 같은 날에 태어나곤 했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나면 에바리스트라는 이름도 바르트라는 성도 없을 줄 알았어. 그런데 넌 계속 같은 이름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나는 거야. 잊을 수 없는 그 얼굴로.


“그리고 그 에바리스트들은 모두 스물여섯이 되기 직전 해에 나를 만났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 깊게 물든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는 항상 날 만나기 전에 꿈을 꿨고, 그 꿈은 네가 거듭 태어날수록 흐릿해졌어. 저번이 끝일 줄 알았는데…. 아마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정도로 기억 안 나지?”


정확하게 꿈을 짚는다. 깜깜하고 기분 나쁜 기억. 깨고 나면 떠오르지는 않지만 끔찍함은 손끝에 남아 있곤 했다.


“넌 그게 어떤 꿈인지 알고 있나?”

“설마. 그건 네 꿈인 걸?”


아이자크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자크는 꿈 내용을 모르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제 진실성을 깨달아 곁에 있기를 허락받으면 종종 에바리스트들은 아이자크에게 꿈속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그건 자신과 에바의 이야기였다. 초기에는 어린 시절이나 레지멘트 대원이던 시절, 그란데니아 제국군이던 시절의 추억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사람에게 남는 것은 행복보다 괴로움이었다. 언제부턴가 에바리스트들은 악몽을 호소했다. 암살의 위협을 겪고, 방화가 일어나 번쩍거리는 그곳에서 칼을 들고 ‘남자’와 싸우고 달려오는 그림자, 울 것 같은 그림자, 폐부를 찌르는 죽을 듯한 고통. 이마저도 이젠 서서히 에바의 영혼에서 바래가기 시작했다. 영원히 새긴 기억도 영원 같은 시간엔 부질없었다.


“걱정하지 마, 에바. 이제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별거 아닌 말에 마음이 가라앉고 안심이 되었다. 에바리스트는 표정을 풀었다. 안도하는 얼굴을 읽은 것일까, 아이자크의 눈꼬리가 강아지처럼 내려갔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만 괜찮다면 그가 기억을 지워도 상관없었다. 아이자크에게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것은 에바리스트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잔상이 그를 괴롭힌다면 그런 꿈 따위 없는 편이 나아. 다만 자신은 그리할 수 없다. 과거를 거울삼아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말아야 했다. 에바리스트를 눈앞에서 잃는 짓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식사를 마치고 두 남자는 거실 소파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 다 손에 따뜻한 머그잔을 하나씩 들고 있다. 에바리스트는 우선 TV의 전원을 켰다. 볼륨을 낮게 줄여 적당한 소음을 만들자 어색한 분위기가 상쇄된다. 그는 다리를 꼬고 몸을 편하게 소파에 기댔다. 의자를 거꾸로 돌려 앉아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아이자크는 머그잔의 코코아를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TV의 소음만 무의미하게 둘 사이를 흘러갔다. 뉴스 채널은 어제와 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지이잉

에바리스트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다. 브레이즈였다.


:: 시간은 있는데. ::


아이자크 소동으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녁공연. 그때까지 아이자크와 상황 정리를 끝내고 편히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을까.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다. 미안하다. 그룬왈드가 시간이 빈다고 하면 같이 가겠어?

 일부러 시간 비웠을 텐데. 다른 사람이라도 괜찮고. ::


:: 왜 하필 그 녀석이지? 어쨌든 알았다. ::


:: 정말로 미안하게 됐다. 곧 예약 확인 코드 보낼게. 메리아에게 안부 전해 줘. ::


:: 그건 싫군. ::



그가 브레이즈와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아이자크는 식은 코코아를 마시며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뉴스 보도 자료에선 어제와 마찬가지로 레드 그레이브와 마르세우스가 차례대로 등장하고 있다.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의료용이 아닌 안대는 조금 낡았다. 면티 위에 푸른 체크 남방을 걸치고 바지는 베이지색이다. 옷은 안대와 다르게 새것에 가깝다. 손목의 시계는 평범한 20대 중반 남자에게 어울리는 두툼한 것, 그리고….


“왜?”


그가 훑어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이자크가 물었다. 에바리스트는 그의 눈을 피했다. 그저 처음 만난 사람을 탐색하는 의미였지만 괜히 열렬한 시선을 보낸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런 에바리스트를 배려하듯 아이자크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마르세우스라는 저 남자, 에바와 내가 제국의 군인이던 시절에도 황궁에 있었어.”


어제 내가 짐 들어줬을 때 통화하던 베른하드도, 그 동생인 프리드리히도 우리와 알던 사이였고. 익숙한 이름이 아이자크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전화할 때 자신이 말해서 아는 거겠지만 그래도 움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항상 다들 전과 비슷한 관계로 에바의 곁에서 살아가곤 해. 이번에도 그런가? 에바, 브레이즈랑 그룬왈드는 알아? 아벨이나 레온은?”

음, 이렇게 말하면 너무 흔한 이름들처럼 느껴지나? 그룬왈드 론즈 브라우… 또 뭐더라, 아벨 타운센트던가?


에바리스트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흔한 이름이라도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정확하게 짚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만일 그의 뒷조사를 했다 하더라도 다양한 시기에 만난 사람 중에 연이 깊은 사람들만 골라서 형제다 뭐다 하는 것까지 자연스레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자신의 행적을 스토커처럼 알고 있는 것인가.


“설명해 봐. 왜 내 앞에 나타난 거고, 넌 누군지.”


결국, 에바리스트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자리를 깔아줬건만 상대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이자크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에바리스트를 찾아 헤맸고 그를 만나기 위해 살아왔다. 에바리스트는 단 한 번도 저를 알아본 적이 없었다. 항상 먼저 다가가는 이는 아이자크였다. 하지만 그것이 억울했던 적은 없었다. 아이자크가 만났던 에바는 언제나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오면서도 아이자크는 그때의 기억만은 잊지 못했다.


아직도 생생했다. 어린 도련님이 제 손을 잡아주었던 그 날.

속이 망가져 피를 토하면서도 제 손을 먼저 잡아주었던 그 날.




# 2



어린 시절 나는 포레스트 힐에 살고 있었다. 평범한 하층민이었던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영주님의 성에 따라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성에서 하인으로 일하기 위해 영주님을 찾아간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에바를 만났다.


에바는 내 삶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에바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등져도 우리는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을 거란 신뢰가 우리 사이에는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그 믿음은 더더욱 확고해졌다.


레지멘트를 나온 우리는 끈 떨어진 연과도 같았다. 세상 어느 곳 하나 우리 발 디딜 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는 우리를 사랑했던 이들을 외면했다. 하지만 무력한 우리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에바리스트는 강해지고 싶다고 했다.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애틋한 이들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에바는 냉정하지 못했다. 나는 에바가 원한다면 그 결말이 어떻든 그를 따르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는 그란데니아 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코끝에서 피비린내가 가시는 날은 없었다. 레지멘트 시절 선배들을 따라 코어 가까이 투입되어 마물을 없애고 소용돌이 해체 작업에 도움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지만, 그때 우리의 적은 ‘마물’일 뿐이었다. 마물보다 약하다 하더라도 상대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중압감을 가져왔다. 목숨의 무게가 직접 다가와서 등골이 서늘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나는 레지멘트 훈련생이던 어린 시절에조차 에바를 위해서라면 살을 주고 뼈를 깎는, 혹은 그 이상의 동귀어진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던 아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에바의 목숨은 나에게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를 지니고 있었다. 세계의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에바의 목숨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망설임 없이 에바를 선택하리라. 그리 생각하니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제 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했을진대 에바는 끝끝내 제 앞에서 죽고 말았다.

나는 에바를 위해 세상을 살았다.

나는 에바의 맹우이자 군견이었고 그의 도구를 자처했다.

에바가 다시 한 번 행복하게 웃어주길 바라며 그의 등을 지켰다.


나는 에바를 위해 힘을 길러 강해졌다. 언제나 그의 앞을 막는 모든 것을 치워냈는데, 정작 위기의 순간에는 에바를 지켜내지 못했다. 에바의 창백한 얼굴과 제복 위로 흩뿌려진 붉은 꽃의 물결. 시야가 이지러졌다. 안 돼, 에바. 죽지 마. 내가 무엇이든 할게. 포기하지 마. 제발, 응? 반드시 널 살려낼 테니까.


엉엉 울며 에바의 시체를 끌어안던 제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나는 인간의 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을 살았다. 그리고 운명처럼 다시 태어난 에바리스트를 만났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분명 내 품에서 숨이 끊어졌을 터였다. 심지어 에바가 죽은 해에 태어난 아이의 손자가 천수를 누리고도 남았을 만큼 긴 시간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에바리스트가 맞았다. 이름도 외모도 가족관계도 무엇 하나 에바와 다른 것이 없었다. 심지어 레지멘트와 그란데니아 제국에서 알게 된 지인들도 그의 주변에 함께였다. 에바리스트의 곁에 없는 유일한 사람은 아이자크 혼자뿐이었다.


에바리스트는 매번 다른 삶을 살곤 했다. 군인이기도 했고 정치가였던 적도 있었다. 평범한 학자, 의사 등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에바리스트가 스물다섯 살이 되어야만 나는 그를 찾을 수 있게 되며, 그는 항상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 지금은 전설처럼 여겨지는 옛날이야기를 알고 있어?”

얼마나 흘렀을까, 아이자크가 말문을 열었다.

“언제의?”

“마물의 소용돌이가 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던 때.”

“글쎄.”


에바리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고대 역사 파트에서 한두 줄 언급되는 부분이라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지 않고서야 알기 힘든 이야기다. 그가 아는 것도 아주 단편적이었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괴물들은 보통 그 시절의 마물들을 기반으로 전래된 환상의 생물이라는 부분이라든지 괴물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던 시절에는 특수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부분 등등. 아이자크는 쓰게 웃었다. 덧셈과 뺄셈의 개념도 잡혀있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 미분과 적분을 설명하기 어렵듯 그 시절의 정보를 전혀 갖지 못한 에바리스트에게 제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우리라는 예감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소용돌이를 없애는 레지멘트의 대원이었던 적이 있었어. 그리고 케이오시움에 오염되어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 레지멘트를 나와 그란데니아 제국의 군인으로 살던 너는 사건에 휘말려 죽었어. 한 발 늦은 나는 네 마지막 모습을 보고 후회했어. 절대로 이런 결말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하고. 그게 전부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계속 환생하는 너를 찾아 만나고 있었어. 아마 내가 그 전부터 케이오시움에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닐까 싶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네 주변엔 우리의 첫 삶에 마주쳤던 인물들이 항상 존재했어. 그렇다면 거기에 나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지. 고민해봤어. 하지만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어.”


말하는 내내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선명한 푸른색에 사로잡혀 에바리스트는 시선을 전혀 돌릴 수 없었다. 아이자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말을 뱉어냈다.


“나는 그때 죽지 않았기 때문이야.”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의 환생을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긴 세월 계속 고민했었다. 어째서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인가를, 그리고 왜 제 맹우와 지인들이 환생하는 자리에 자신은 없는 것인가를. 오랜 고민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세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며 그 시발점은 에바리스트의 죽음이었으리라고.


“네 말을 정리하면 전생에 내가 너와 아는 사이였다는 건가?”

“말하자면. 못 믿겠다면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에바리스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살갑게 굴며 접근하는 아이자크를 경계했다. 사실 그것이 당연했다. 어느 누구라도 초면인 상대가 친한 척 하면 이상하게 느껴지겠지. 이번 에바리스트도 단칼에 자신을 뿌리치고 눈앞에서 문을 닫았지 않은가. 수번의 경험을 통해 그의 주변에 있을 지인들의 이름을 주르륵 읊은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인간적인 미안함에 집안에 들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친구들의 이름이 나오니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이자크는 에바리스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침묵했다.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경쾌한 목소리가 깊숙이 침잠한 에바리스트의 의식을 건져 올렸다.


“프리드리히.”

“아까부터 진도가 안 나가는데? 들여다봐도 딱히 어려운 코드 같지는 않단 말이지.”


고민이라도 있어? 애인? 프리드리히가 물었다.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애인 고민을 듣고 싶으시면 애인을 만들 수 있도록 칼퇴근부터 시켜주시죠. 한마디 던지고 모니터 구석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할 일도 많은데 오전 시간을 전부 날려 버리다니. 에바리스트는 혀를 찼다.


어제 아이자크는 긴장감만 팽팽하게 남겨두고 한 발 물러났다.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지만 역시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은 그 자체로서도 버거웠다. 한숨을 푹 내쉬었더니 프리드리히가 그의 등을 툭툭 쳤다.


“고민의 80퍼센트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고민이고, 나머지 20퍼센트의 고민 중에서 네가 무언가 해결할 수 있는 케이스는 고작 2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말도 있단다.”

“예?”

“고민해도 안 풀릴 일은 안 풀린다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에바리스트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직업 특성상 한 번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야근과 밤샘이 많아져 다 같이 지치고 예민해지기 쉬운데 그런 동료들 사이에서 프리드리히는 항상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다. 그리고 그의 오늘 제일 피곤해 보이는 사람 레이더에 자신이 잡힌 모양이었다. 참 좋은 사람이다. 성격도 좋고 정도 많고.


두 남자는 가까운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에바리스트는 식사량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프리드리히는 아니었다. 그래서 에바리스트는 그와 함께 나왔을 때부터 양이 제법 있는 음식점에 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가 망설임 없이 카페를 선택한 것을 보니 여유로운 척 해도 그 역시 일이 바빴던 모양이었다.


“자꾸 오류가 나는데 어디 소스가 틀린 건지 찾을 수가 없다니까. 차라리 새로 쓰고 싶을 지경이야. 하지만 그랬다가 또 다시 충돌을 일으킬까봐….”


“업데이트를 자주 하니까 코딩을 깔끔하게 하는 것보단 그때그때 편하게 덧씌우는 게 속 편하죠. 나중에 버그 잡히면 끔찍하지만.”

“저번에 C.C가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아주 누더기 옷이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했잖냐.”


프리드리히가 손을 내저었다. 지금 에바리스트와 프리드리히가 일하는 개발팀 직원들 중에는 원년 멤버가 없다시피 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았던 프로그램에 손을 대다보니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연쇄적으로 에러가 나기도 하고 여러모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C~D 구간은 좀 깔끔하잖아요.”


“거기는 예외야. 말 안 했나? 예전에 트러블 일으키고 나간 사원 있었다고. 걔가 코딩을 엉망으로 해놔서 안 그래도 복잡하던 게 멸망해버렸었단 말이야. 그냥 백섭하고 처음부터 다시 했으면 되는데 몰라, 나도 그때 내 일이 너무 정신없어서 자세히는 모르는데 리즈한테 떠넘겨진 거지. 그 인간, 포션 빨 듯 탄산수 마셔가며 일주일동안 회사에서 살면서 그 짓 해놓은 거야. 물론 우리 같은 일반인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거다. 리즈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리즈도 그때 그러고 나서 한번만 더 이런 일 시키면 스탈링 멱살 잡고 깽판부린 후에 때려치울 거라고 으름장을 놨었다니까? 프리드리히가 질색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리즈는 에바리스트와 가장 먼 자리에 앉아있는 선배 중 하나다. 별로 화도 안 내고 항상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람처럼 보였는데 엄청난 사건이 있었나보다.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토스트를 잘라 입에 넣었다.


“언제 적 얘길 하고 있어?”


그 때 두 남자의 머리 위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것은 막다른 길에서 만난 사신을 방불케 했다.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들었다. 프리드리히의 등 뒤에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한 리즈가 있었다.


“옆에 자리 없지?”

리즈는 두 사람이 대답도 하기 전에 옆자리에 합류했다. 그의 트레이에는 오늘도 탄산수가 올라가 있다.


“난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뱃속 깊은 곳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니까 적당히 해 둬.”

“에이, 그래도 전설적인 사건이었잖아.”


“그래 전설 좋지. 어디 한 번 회사 로비에 거꾸로 매달린 최초의 사원 전설을 만들어 볼까?”

“아닙니다.”


먼저 싸움을 걸지는 않아도 걸려온 싸움은 거절하지 않는다. 리즈는 제법 호전적인 남자였다. 그는 탄산수를 시원하게 들이키고 의자에 편히 기댔다.


“뭐, 그쯤 하고. 무슨 일 있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에바리스트가 얼굴 가득 의문을 비쳤다. 그러자 리즈가 프리드리히를 눈짓했다.


“저 녀석이 점심시간에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하고 나왔으면 뻔하지. 딴 짓을 얼마나 하는지 남 걱정 고민은 귀신같이 알아채요.”


무덤덤하게 답하는 리즈의 말에는 어쩐지 모를 따스함이 배여 있었다. 이전 직장에서 고생하던 그에게 베른하드가 왜 이곳을 추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에바리스트는 옅게 웃었다.


“이성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너 복수 학위 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네. 다른 하나는 문학.”


“흠…. 나는 말이다. 수식으로 딱 떨어지는 답이 나오는 그런 게 좋아. 정답과 오답이 확실하게 갈리지 않으면 피곤해. 그래서 인문계는 애초에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하지만 사람 사이의 문제는 절대로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범 답안이 있을 수야 있지. 하지만 거기까지야. 사람마다 살아온 삶도 행동방식도 다른데 같은 답을 낼 수 있겠어? 네가 말하는 이성적이란 말은 감정을 배제하고 중립적이며 공정한 결론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이성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 그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해결할 일인가보지.”


이상한 남자가 찾아와서는 드디어 찾았다며 제가 전생에 자기 친구였다고 하는데요,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왜 신고 안했어? 라고 묻는다면 변명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왜 그 때 당연하게 경찰을 부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되짚어 생각해봐도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였는데. 게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며 스치듯 가십거리로 입에 담을 법한 사건이지 않은가. 인정하기 싫지만 에바리스트는 이미 아이자크의 일을 마음 한 구석에서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바리스트는 종이컵을 만지작거렸다.


리즈는 말을 끝내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샌드위치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일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말도 잘 안하고 주변에도 관심 없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에바리스트는 그에 대한 평가를 달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맞다. 너 이미지 파일 받았으면 좀 보내. 연결할 게 있어야 맞춰서 프로그램 짜지.”


한참 에바리스트의 이야기에 조언을 해주던 터라 갑자기 리즈의 화살이 제게 날아들 줄 몰랐다. 프리드리히가 급히 커피와 함께 입 안 가득한 음식을 삼켰다.


“어? 그쪽으로 먼저 보내기로 했던 거 아니었나? 이따 들어가서 아인한테 물어볼게.”

“그럼 부탁하지.”


“네~ 맡겨주십쇼, 선배님.”

능청스러운 대답에 리즈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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