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죽지 마, 사랑하니까






어두운 밤 독고오공은 비좁은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다향을 맡았다. 이제 곧 보겠네요. 폐하. 독고오공은 턱을 괸 채 실실 웃음을 흘렸다.


예측대로 몇 시간쯤 지나자,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바다향의 농도가 아주 짙어졌다. 돌아왔네.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제복 자켓을 걸치고 넥타이를 매는 독고오공. 그리곤 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 아이는 참 나를 닮았어. 사람을 이용할 줄 알아."


황제는 작게 웃었다. 그리곤 독고오공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독고오공은 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수만 번도 넘게 세우고 제발 좀 뒤지라며 욕을 씹었다.


"예, 폐하."


"너는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독고오공은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저보다는, 하나나 세모를 더 가까이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믿을만한 사람이 못되니까요.."


독고오공의 당돌한 말에 황제는 크게 웃었다. 그런 점이 재밌다며 독고오공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오늘은 이만하고. 가서 좀 쉬거라." 


황제에게 인사하고 궁을 나서는 독고오공. 더러운 늙은이. 독고오공은 떠오르는 기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다 한숨을 푹 쉬고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재밌으니 됐어. 충분히 갖고 놀다 버려야지. 독고오공은 휘파람을 불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황제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거리에 가득 나온 사람들. 분노가 해일처럼 빠르고 높게 세계를 잠식해갔다. 독고오공은 정부군 소집 명령을 보고 그대로 구겨 버렸다. 제가 없는걸 확인한 권세모와 차하나의 표정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뿌옇게 물드는 시야. 시위에 쓰던 최루탄이었는지 아니면 실탄에서 나온 연기인지. 거리로 나서자 벌써 바다향이 짙게 섞인 화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지금 힘 빼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빨리 끝내려는 건가. 독고오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차노을이 큭큭 웃으며 다가왔다. 흰색 황실 제복 차림. 우리 지금 혁명하러 가는 건데, 황실의 잔재를 걸치시고. 그래도 되나?


"왜? 그러는 너도 정부군 제복이면서."


"이러면 마주쳤을 때 더 짜증 날 거 같아서요."


"천재네."


물론 나도. 차노을이 독고오공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독고오공은 그런 차노을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헛웃음을 친다.


"무서워요?"


차노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다시 풀어진다. 


"겁먹은 건 네 쪽 아니고?"


풉. 그냥 해본 말이야. 차노을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곤 손에 들린 총을 독고오공에게 던진다. 


"네 친구들 보면, 쏘든지."


차노을은 그 말을 하곤 다시 연기 속으로 사라진다. 내가 누굴 쏠지 어떻게 알고. 독고오공은 제 손에 들린 총을 가만히 본다. 근데요 형, 제가 하고 싶은 건, 혁명이 아니라 ······인데요. 독고오공은 뒷머리를 긁적인다. 






거리에 나타난 정부군은 아이러니하게도 혁명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특정 귀족들의 집을 방어할 뿐이었다. 그중에는 혁명에 가담한다던 인물들의 집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고래가 사랑한 사람들이었으리라. 바꿔 말하면 그 사람들 빼고는 언제가 되든 다 죽는다는 소리였다. 혁명군과 시민들 내에서도 내부 분열이 일었다. 궁으로 곧장 직진할 것 같던 기세는 소소한 싸움에 막혀 광장을 채 벗어나지 못했다.


"나가지 마시죠."


백해일은 눈으로 문을 가로막고 선 정부군의 수가 몇인지 세었다. 다섯, 아니 여섯이구나. 혼자 할 수 있을까? 우선 총으로 앞쪽을···. 아 몰라, 일단 갈겨! 백해일은 생각을 멈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수년 전 그때처럼. 제 가문이 몰락하고 주위의 모두가 죽던 그날 옷장 안에서 도망 나오던 그날 그 시간처럼. 바닥에 난자한 피를 보던 백해일이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12살 해일아, 그래도 나 그때보단 총 좀 잘 쏘는 거 같아. 이제 조준점이 흔들리지 않아. 대일이가 보면 좋아했겠다. 


백해일은 총알이 다 떨어진 걸 확인하곤 미리 준비해둔 칼을 주워들고 광장 쪽으로 달렸다. 가문의 문장이 담긴 칼. 생각해보면 그것도 고래 짓이었지. 백해일은 고래를 마주치면 딱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왜 하필 나만, 왜 하필 나만 사랑했는지. 어째서 나만 필요했던 건지. 백해일은 그 생각만 하면서 숨이 턱 끝까지 역류하도록 달렸다.






탕, 총소리가 바로 뒤에서 울렸다. 차노을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기에 백해일이 서 있었다. 백해일은 곧바로 차노을의 손을 잡고 건물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빨리 나왔네."


"빨리 나온 거 아냐. 난 안 막던데."


차노을의 말에 백해일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뭐? 왜, 아니 그럼···. 노을아, 너···.


"걱정 마. 그전에 끝낼 거니까."


차노을이 백해일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백해일이 차노을을 꼭 끌어안았다. 


"다치지 마. 사라지지도 마. 알았어?"


"응."


"괜히 나대다 얻어맞지도 말고."


"야,"


"끝까지 들어. 무슨 일 있으면 꼭 같이 가. 내 옆에 있으면 괜찮을 거야. 혹시 이상한 거 같으면..."


"알았어, 알았어. 나 차노을이야. 걱정하지 마."


차노을이 백해일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오공이가 틀렸네. 겁먹은 거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차노을이 살풋 웃었다. 백해일은 차노을이 어디로 가기라도 할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사랑해."


백해일이 사랑한다는 말을 뱉자 차노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 쪽에서 폭음이 들렸다. 다시 달려 나가려는 차노을의 손목을 붙잡는 백해일. 


"꼭 니가 해야 돼, 황제."


당연하지. 차노을은 백해일의 손등에 키스했다. 


"궁 대문 앞에서 만나. 할 수 있지?"


백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노을이 씨익 웃어준다. 그리곤 광장 쪽으로 나가는 차노을과 백해일. 연기 속으로 들어가는 백해일을 보고 차노을은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나 없으면 니가 하지 뭐, 황제."






독고오공은 제 앞에 선 정부군을 보고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정부군 제복, 선명하게 써진 독고오공이라는 이름. 분명 제 옷을 봤을 텐데도 총을 겨누는 것을 보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겠지. 덜덜 떨리는 손에 들린 총을 제 손에 들린 총으로 가볍게 쳐서 떨어뜨리는 독고오공.


"같은 편 아닌가."


독고오공이 실실 웃으며 가까이 다가서자 그 사람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차하나한테 전해. 네 손으로 직접 죽여달라고."


독고오공이 말을 마치자 허겁지겁 도망가는 정부군. 뭐가 웃긴지 한참을 웃어대던 독고오공은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워 한참을 바라본다. 


그러다 고개를 들자 길가에 주저앉아 있던 소년과 눈이 마주친다. 방금 상황을 봤을 텐데 도망조차 가지 않고 눈만 깜빡이는 소년. 어딘가 익숙한, 아니 닮은 듯한 인상에 주황빛이 도는 머리칼. 독고오공은 소년에게 총을 건넨다. 그러자 제 눈앞에 내밀어진 총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는 소년.


"내 동생도 너만 했거든."


독고오공은 싱긋 웃어 보이자 소년이 총을 받아든다.


"죽지 마."


말을 마친 독고오공은 다시 궁 쪽으로 발을 옮긴다. 혼자 남은 소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명찰 하나를 꺼내 빤히 쳐다보다 바닥에 떨어뜨리곤 발로 콱 밟는다.


소년은 총을 장전한 채 신발 끈을 묶는다. 광장 반대편으로 향하는 소년. 그리고 길 위에 남은 명찰.


'백대일'


금이 간 파편 위에 선명하게 쓰인 글자. 짜고 비릿한 바닷가 내음이 휘잉 불어왔다.






창문 밖에 세상과는 달리 황궁은 고요했다.


"시끄럽네."


권세모는 창문 밖을 멍하니 내다본다. 아 오공이 보고 싶다. 하나는 지금 뭐하나? 권세모에게 중요한 것은 그뿐이었다. 죄를 짓기로 결심했고 복수해 주기로 다짐했는데 굳이 저 난장판에 끼어들어 겨우 얻은 평화를 내동댕이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권세모는 허리를 숙여 군화 끈을 묶으면서도 아무 느낌이 없다. 어쩌면 고래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를···.


"어, 저기..."


군화 끈을 묶고 다시 창밖을 내다보던 권세모가 무언가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린다. 광장에서 제일 큰 동상이 거대한 파열음을 내며 부서진다. 그 순간 권세모의 머릿속에 재생되는 까드득, 사탕의 파열음 소리. 동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그 파열음과 어그러진다. 걔를 죽인 건 고래가 아니었나? 기괴하고 선한 물음이 뇌리를 스치자 권세모는 스스로 제 뺨을 때린다. 짝···. 마찰음이 빈방을 채운다. 빨갛게 물든 뺨을 한 권세모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미안, 미안해,


"하나야."


너랑 약속했는데. 붉은 뺨 위로 눈물길이 지나간다. 권세모는 쓸데없는 생각을 한 자신을 자책했다. 하나가 싫어할 텐데. 권세모는 이명처럼 울려대는 파열음들에 귀를 막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창문에 비친 권세모의 모습을 문틈 새로 빤히 보던 차하나. 반쯤 미친 그 모습을 보고는 예쁘다, 고 생각한다. 비릿한 물 향기 어린 바람이 황궁을 가득 메웠다. 


'고래의 사랑을 담은 바람 냄새를 맡으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에 미쳐서, 사랑을 원하게 되지요.'


어떤 책 구절이 떠오르려다 이내 흐려진다. 차하나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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