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매일 밤 악몽을 꿨다. 자신이 생각 이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다니엘은 매일 밤 식은땀으로 베개를 적시며 일어났다. 그 악몽의 내용이란.  


꿈속에서 지훈은 그 때 그 날처럼 홀딱 벗고 침대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날처럼 제 몸을 스스로 더듬었다. 호흡이 가빠오고 지훈의 페니스는 점점 더 그 크기를 키워갔다. 


다니엘. 아... 나 좀 도와줘. 나 미칠 것 같아. 


지훈은 다니엘을 연신 불렀다. 


그래! 내가 도와줄게. 지훈아. 조금만 기다려. 


다니엘은 입꼬리를 찢어져라 올리며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벗었는데. 분명 벗었는데. 어라. 안에 옷이 또 있었다. 왜 옷 안에 옷이 또 있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벗자 벗자. 재빠르게 또 벗었다. 그런데 그 안에 또 옷이 있네. 이런 미친. 허겁지겁 또 벗었더니 또 옷이 나오고 벗으니 또 옷이다. 연신 옷을 벗으면 다시 옷이 생겨났다. 정신없이 벗다 당황한 눈으로 지훈을 바라보니 어이없다는 눈으로 저를 쏘아보던 지훈은 방향을 틀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다. 어찌나 깊숙이 안기는지 머리카락만 빼꼼 보일 정도였다. 상대 남자는 누군지 식별은 안 됐지만 저보다 키도 크고 거기도 컸다. 다니엘도 충분히 큰데 그 남자는 더 어마어마하게 커 보였다. 


지훈아. 잠만. 잠만 기다려도. 내 다 벗었다. 


얼기설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엮어 지훈에게로 보냈지만 지훈은 그 남자의 품에 안긴 채 저를 향해 그토록 다니엘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우주를 담은 듯 한 깊은 눈으로 한 번 싱긋 웃고는 그 남자에게 제 뒤를 허락했다. 




으아아아악!!!! 안 돼!! 죽어도 안 돼!!



일어나보면 온 몸은 땀이었다. 꿀 수 있는 꿈 중에 최악의 꿈이었다. 다니엘은 일어나서도 몇 번 진저리를 쳤다. 지훈의 마지막 선물인 황홀했던 그 날 밤이 절로 떠오르며 지훈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밤마다 나가는 것 같은데 어디서 새로운 사람이라도 만나서 만에 하나라도 꿈속에서의 일이 현실이 된다면.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플라토닉 사랑의 상대라도 만나면. 그게 더 문젠데. 다니엘은 하루하루 밥을 먹지 못해 초췌해져 갔고 잠을 자지 못해 핏기를 잃어갔다. 


어서 용서 받아야했다. 하지만 지훈에게 용서받는 길은 다니엘이 깨버린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일 뿐이었다. 


그래서 다니엘은 얌전히 지훈의 너그러운 용서를 기다려야 했다. 인생에 없던 일상의 루틴을 실행하면서. 


다니엘은 매일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물도 한 잔 마시기 전에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을 들어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이제는 하도 많이들어 그 단조로운 어조와 포즈의 위치, 속도 하나까지도 똑같이 따라할 수 잇게 된 다니엘이었다.


“지훈아. 나 일어났어. 운동 다녀올게.”


삐-소리가 난 뒤 다니엘은 소리샘에 음성을 남겼다.

용건만 간단히. 하지만 절대 잊지는 않았다. 


다니엘은 대충 마른세수를 하고 모자를 눌러쓰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스트레칭하고 무산소 유산소운동 교대로 40분씩. 샤워하고 집에 와서 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을 차렸다. 그 아점은 식사랄 것도 없는 메뉴인 라면이었지만. 휴대폰을 들고 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아점은 달걀 푼 라면]

[너 지금 찡그렸지. 달걀 풀었다고]

[운동하고 나선 단백질을 먹어야 해]


라면에 달걀 풀지마. 국물 비릿해진단 말이야

그럼 후추 넣으면 돼

싫어. 싫다고. 굳이 넣을 거면 풀지마. 후추 많이 넣고.


그 어느 날 지훈과 나눈 대화가 다니엘의 가슴을 후벼 팠지만 이를 앙 물고 젓가락을 식탁에 탁탁 두 번 치고 라면 냄새를 가득 들이마셨다. 아픈 가슴을 음식 냄새로라도 채우겠다는 다짐처럼. 


“지훈아. 맛있게 먹자.”


마치 제 앞에 지훈이 있듯 그렇게 인사하고 다니엘은 라면을 국물 한 모금 안 남기고 말끔하게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집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지훈의 집이었다. 벌써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간을 보낸 지 닷새 째. 다니엘은 매일 낮 지훈의 집에 갔다. 마치 의식 같은 방문이었다. 벨을 누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오늘도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묵묵부답. 다니엘은 현관문을 가볍게 똑똑 두어 번 두드렸다. 이미 응답이 없었기에 무슨 반응을 기대하고 한 두드림은 아니었다. 


“지훈아. 밥은 먹었어? 오늘은 별로 안 춥다. 눈은 기온이 많이 안 내려가야 온다던데 오늘 눈이 올까? 기억나? 우리 중학교 1학년 땐가? 그 때 놀이터 옆에다 물 뿌리고 얼면 또 물 뿌리고 또 얼려서 빙판길 만들어서 스케이트 타다가 경비아저씨한테 무지하게 혼났던 거? 그거 녹인다고 라이터 가지고 왔다가 죽고싶냐고 더 혼났잖아. 그 때 우리 좀 덜 떨어졌던 것 같아. 

....

지훈아.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야..원래 계획 데로라면 우리 같이 있어야하는데 나 때문에..”


다니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태연하자고 매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마음만 앞세운 자신이 모든 일을 그르쳤다 생각했기에 이제는 어른스럽게 이성적으로 해결하고 싶은데도 문득 감정이 올라와 덜컥 겁이 날 때도 있었다. 다니엘은 지훈네 현관문에 가만히 손바닥을 댔다. 차가운 한기가 꼭 지훈의 마음처럼 느껴져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다니엘이 지훈에게 빼앗은 건 신뢰였고 그렇기에 보여줘야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걸 깨달은 일주일이었기에. 


지훈아. 나 이만 갈게. 



그리고 내일 다시 올게. 




그리고 다니엘은 그 다음날 6번째 열리지 않는 문 앞에 다시 섰다. 





크리스마스는 종교를 떠나서 사람을 들뜨게 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울러 퍼지는 캐럴 송도, 스산한 공기를 뚫고 나오는 겨울의 것 같지 않은 햇살도. 다니엘이 지훈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지훈의 부모가 외출하려고 그 문을 나서는 중이었다. 


어머, 니엘아!

안녕하세요. 

지훈이 만나러 왔어? 아직도 자는지 방 문 한 번 안 열리던데. 

아..


시간은 벌써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끼니를 두 번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에 아직도 방구석에 있는 아들까지 끼고 영화관에 가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부부만 나가던 중이었다. 


“가서 깨워서 놀다 가라”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지훈의 부모는 다니엘이 들어갈 수 있게 현관문을 열어뒀다. 다니엘은 열려있는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지훈이 연 문이 아니었기에 환영받지 못할 손님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기엔 다시는 없을 기회였다. 지훈의 부모가 있을 땐 이상한 그림으로 보여질 듯 하여 방문하지 못했고 지훈의 부모가 없을 땐 절대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아직 허락되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도저히 열린 문을 뒤로 하고 집으로 올 수 없었다. 그러기에 다니엘은 지훈이 너무 그리웠다. 고작 일주일도 안 된 시간들이었지만 보기 싫어 안 보는 것과 볼 수 없어 못 보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에 다니엘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열린 문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다니엘은 지훈의 방 문에 똑똑- 두 번 노크를 하고 


“지훈아”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역시 답은 없었다. 진짜 자느라 못 들었을 수도 있고 들었지만 못 들은 척 하고 싶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괜찮았다. 이미 일주일동안 듣지 않는 지훈에게 말하는 단련이 돼 있었고 그 사이 거리가 이만큼이나 가까워져 있었다. 지훈의 동의 없이 가까워진 거리라는 게 살짝 겁이 났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어 숨을 좀 더 쉽게 내뱉을 수 있었다. 


“지훈아. 나. 오늘도 왔어. 오늘은 운이 좋다. 아줌마 아저씨 나가시면서 문 열어주셨어. 매일 현관문에서 돌아갔는데.. 그 문은 철제라 항상 차가웠거든? 그런데 네 방 문은.. 따뜻하다.”


다니엘은 어제와 같이 손바닥으로 지훈의 방 문을 가만히 만져봤다. 어제 손바닥에 닿았던 소스라치게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오늘은 적당히 시원한 온도로 올라와 있었다. 딱 서너 발 내디뎠을 뿐인데. 


“너한테 너무 미안한 게 많은데.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을게. 다만 나는. 나는 있지 지훈아.”


다니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고해성사를 하듯 느리고 묵직했지만 쳐지지 않으려고 배에 힘을 주고 한 자 한 자 진심을 담아 뱉었다. 


“나는..니가 허락해준다면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어.”


허락이란 조건을 달지 말았어야하나 잠시 후회했다. 허락 안 한다고해도 무작정 다시 쫓아다닐 생각이었으니 필요 없는 말이기도 했고 괜히 그 말 때문에 지훈이 더 쉽게 거절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사과도 받는 사람 마음의 문이 열려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거였기에. 상대방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채 실행에 옮긴 일들이 둘의 사이에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이미 뼈에 사묻힐 정도로 알게 된 다니엘이었기에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믿는다는 말과 같다는 걸 내가 너무 늦게 알았어.”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사랑한다고 말했던 다니엘이다. 


“너를 위해 한 거짓말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했는데. 그건 내 사랑을, 니 믿음을 부정한 최악의 행동이었어.”


사랑과 믿음은 결국 하나였다. 


“니가 다시 나를 믿을 수 있게 한 번만 기회를 줄 수 없을까..”


다니엘은 문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콩-하고 이마를 문에 갖다 댔다. 이 문 너머에 지훈이 있다. 금방이라도 문이 열리고 지훈이 저를 보고 웃을 것 같았다. 아니. 울 것도 같다. 아니. 화를 낼 것도 같았다. 


그냥 뭐라도 해줬으면 했다. 


그렇게 10분이 20분이 30분이 갔다. 


하지만 다니엘의 기대는 그저 말 그대로 기대로 끝났다. 지훈은 결국 나오지 않았고 그랬기에 웃어줄 수도 울어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혼잣말을 하던 다니엘은 갈게. 내일 또 올게. 


그 말을 끝으로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닫혀지는 지도 모를 정도로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지훈은 침대에 널브러져있던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데고 앉았다. 문 밖에서 분명히 다니엘의 것인 음성이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요 며칠은 사실 지훈에게도 지옥이었다. 이성적인 자신의 성격상 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훈에게도 볼 수 없어 못 보는 것과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참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한 발만 내딛으면 다니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냥 돌려보낸 게 가슴이 아팠다. 다니엘의 말을 풀어보면 제게 용서를 받기위해 며칠 째 자신의 집 앞을 서성인 듯 했다. 대꾸도 없는 문 앞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에 빠져있던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 한 뼘 정도. 왠지 다니엘의 향기가 나는 것도 같았다. 너무 익숙한. 하지만 그래서 더 슬픈 파스냄새가 묻어있는 청포도향. 



지훈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휴대폰을 켜고 300개 가깝게 쌓인 다니엘의 문자를 읽어 올라갔다. 


[나 집에 도착. 니 냄새라도 맡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도 맡았어. 다니엘. 니 냄새


[이븐데 뭐했어? 나 집에서 엄마아빠랑 케이크에 초 꼽고 소원 빌었어]


나도나도. 나도 그랬어. 


[나 니가 나 용서해주게 해달라고 빌었어]


나는 말로는 울 아빠 건강 빌었는데 속으로는 너 철들게 해달라고 빌었어. 


300개가 넘는 문자를 읽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 문자의 끝에 결국 지훈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발파공법으로 해체시킨 아파트의 붕괴만큼이나 빨리 무너져버린 신뢰지만 결국 그 해체도 새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였다. 더 튼튼하고 근사한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무너뜨린 그 공간에 더 번듯한 무언가가 들어서지 않는다면 그 자리 역시 흉물스러운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였다. 


그만하면 됐다. 무엇보다 벌을 주는 사람인 자신도 아픈 이런 체벌이라면. 


왜 나는 너에게 이렇게도 나약할까. 



지훈은 다시 문을 닫고 방 문에 이마를 콩 갖다 댔다. 다니엘의 향기는 지훈에게 안정제와 같았다. 일주일간 먹먹했던 가슴이 한순간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역시 나는  너여야 하나봐. 




지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봤다. 


아. 그동안 참 못생겨졌네. 얼굴 하나 믿고 산 세월들이 무색하게. 


지훈은 차가운 물을 틀고 말끔하게 세수를 했다. 뽀득한 소리가 날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케이크를 꺼내 한 조각 덜어 수저로 한 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우유도 쪼르륵 한 컵 가득 따라 아직 입 속에 남아있는 케이크의 잔재와 함께 내려 보냈다. 그 한 조각을 말끔히 다 먹은 지훈의 입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지훈은 상처를 극복하고 사랑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타인을 용서하고 더 성숙한 사랑을 위해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성숙의 여유는 다니엘의 말대로 다니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마음먹게 했다. 


그로부터도 일주일 뒤 새해가 찾아왔고 지훈은 휴대폰을 들어 익숙한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고 벨이 한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다니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후. 훈아!]

[냉큼 뛰어와. 우리 집으로]


뚜뚜뚜


이미 전화기는 끊어져있었다. 



격변의 시절은 사람을 나락으로도 떨어지게도 하고 공중으로 부양하게도 한다. 고저의 높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헤매는 시절-청춘. 하지만 그 안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고 평행을 맞추는 연습을 통해 결국 하늘을 날게 되는 그 시절도 결국 청춘이다. 나는 게 익숙해졌을 때 우리는 문득 그 처음의 떨리는 순간을 기억하고자 하지만 아득히 멀어져버린 설렘을 우리는 그저 기억하는 척하며 추억할 뿐이다. 


그러니. 즐겨라 청춘이여.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광활한 시야를. 추락할 때의 심장이 멈출 것 같은 속도감을. 그 안에서 우리는 나는 법을 배우는 거니까.




J의 이야기는 녤윙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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