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소모적이고, 쓸데없는건 질색이었다. 질질끄는것도! 그런데, 왜 이다지도 마음이 흔들리는지.


"..............."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꺼내 날짜를 봤다. 내가 얼마나 병신, 상등신이냐면 헤어져야겠다, 생각만 하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말고사를 치고, 방학을 해서도! 


2달간 헤어지려고 끙끙거리며 태형의 옆을 맴돈게 떠올랐다. 말을 못해서, 차라리 편지라도 쓸까 했는데 도중에 쓰다가 다 찢어버렸다. 방학을 하고나선 더했다. 나는 날마다 태형네 집에 놀러갔다. 동네 창피해서 말도 못한다. 정국에겐 창피해서 말도 못했다. 태형네 부모님이 안계시면 물고, 빨고 다했다. 


[지민아, 모해?]

[티비봐.]

[티비보지 말구 나랑 놀자~]

[얘가 징그럽게 왜이래?]


말은 이렇게 해도 어느새 사랑스러운 눈으로 태형을 보는 내 눈을 내가 찌르고 싶었다. 하느님, 저 진짜 왜 이러나요,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고 있죠? 아무튼 어제도 나는, 헤어지려고 마음 먹었는데 헤어지긴 무슨 길게 붙어먹고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집에 갔다. 티비를 보고 있는 나를, 태형이 먼저 건들였다. 태형의 크고 차가운 손이 바로 내 티셔츠 속으로 들어와 유두를 콕콕 찔렀는데, 반항 한번 못하고 키스를 쫍쫍 했다. 그 뒤로 말해봤자 극혐이다. 아무튼 패팅까지 우리는 아주, 거의 하루 일과처럼 뽑아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짓을 할때마다 이제는 너무 현자타임이 와서 돌아버리겠더라.


[헤어져야하는데.....]


하루종일 태형과 놀고, 집에 갈때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된것마냥 시무룩한 얼굴로 집에 걸어갔다. 담배 하나를 물고 길빵을 하면서 걷는데,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봤다. 나도 길빵 나쁜거 아는데! 그것보다 전 더 나쁜짓 하고 있거든요?! 나도 몰라! 이 사람들아. 


[으아아아아악!]


화나서 가끔은 길거리를 쿵쾅쿵쾅 거리면서 집에 들어가기도 했다. 심지어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노래선물까지 받았다.


[자기양♡ 이건 내가 자기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야.]


태형은 이제 내 얼굴만 봐도 하트가 뿅뿅 담긴 눈으로 쳐다본다. 말투도 얼마나 낯간지러운지 자기야, 여보양 하며 저 혼자 좋다고 키득거린다. 거기서 싫다고, 당장 헤어지자고 하는 나쁜 자식이 어딨어! 진짜 진짜 헤어지려고 했는데 심지어, 오늘! 연탄이까지 데리고 왔다고. 크리스마스라고 빨간색 망토를 입혀서. 으으, 귀여워서 오늘도 못헤어져!


그래도 헤어지자고 말해! 얼른!


크리스마스날 헤어지는건 너무 슬픈일인데, 오늘은 진짜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왔다.


[헤....]

[.....웅?]

[.....헤...헤헤헤헤헤헤헤! 신난당! 바로 들어볼게!]


결국 헤어지자고 못하고, 그 자리에서 노래를 틀었다. 태형은 부끄러워했다. 태형은 노래도 잘했다. 감미로운 노래가 길거리에서 울려퍼졌다. 크리스마스 거리는, 시끄러웠다. 거리 한복판에서 연탄이를 안고,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 나를 사람들이 쳐다봤다. 


you sleep so happily

I wish you a good night


[자기가 자는 모습을 떠올리며 만들었어.]


젠장, 역시 김태형은 못하는게 없다. 작곡, 작사에, 잘생기기까지, 공부도 잘해.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임마. 이 완벽한 놈이 내 남자친구라니, 는 무슨. 오늘 헤어져야 하는데. 기필코, 오늘인데.


는, 무슨.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데이트만 신나게 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 못한게 미안해서 3일 밤낮을 새서 목도리 뜨개질을 해다 바쳤다. 연탄이꺼까지 해서. 태형은 그날 하루종일 울었다.


[지민아, 이런거 처음받아봐. 나 너무 슬퍼 ㅠㅁㅠ]


태형은 울 때 이제, 입까지 벌리면서 앙앙 아기처럼 운다. 내가 우는것도 별로 안싫어하는걸 알게 된뒤로 더 애기같이 으앙, 하며 운다. 그럼 또 귀여워서 꽉 안아주게 된다. 시발. 병신같은 자식.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냔말야.


[나 이거 자랑할거야. 연탄이도 목도리 하구 셀카찍자!]

[....그...그래...]


그리고 그날 커플 셀카까지 야무지게 찍고 프사에 올렸다. 몇달간 나의 병신같은 일상이었다.


***


그리고 어느 날, 난 정말 헤어져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당신은 사람들이 언제 달리기가 가장 빠르다고 생각하는가. 갑자기 뜬끔없는 소리인데, 난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다. 사람들이 가장 빠르게 달릴수 있을 때는, 뒤에 미친개를 풀어놓는것. 내가 이 소리를 왜 하냐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더 돈독해졌을 때 나는 뒤를 따일뻔했다. 난생 처음으로. 심지어 태형은 하나도 안아프게 하려고 젤까지 준비했다고 했다. 그 때 딱 정신이 들었지. 헤어져야겠다. 


패팅까진 이제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자연스레 욕실로 씻으려 들어가려했는데, 태형이 새빨갛게 된 얼굴로 젤을 꺼냈을 때 나는 놀라자빠지는줄 알았다. 너무 놀래서 발로 태형이 걷어차고, 미친듯이 집 밖을 뛰어갔다.


[싫어! 난 못해!!! 으아아아아아!]


한순간에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전에 정국이 한 말이 떠올랐다.


진짜 미련한 새끼, 너 머리가 어떻게 된거 아니냐? 개 병신아니야? 전교 2등 맞아? 너 진짜 또라이냐?


너 진짜 걔 좋아하는거 아냐? 너 아주 그러다가 뒤라도 바치겠어.


지금 생각하면 전정국은 예언자다. 성적 그거 하나에 걸려서 아니, 나중엔 못헤어지고 뒤까지 바치려고 했다. 이건 아니지. 아무튼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


[자기야 마니 놀랐어? 미안해 너한테 말했어야 됐는데 너 시르면 안해두대... 갠차나.. 지미나 너무 보고시포 미안해 ㅠㅁㅠ]


태형은 하나만 알고 두가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진짜 섹스하기 싫어서 튄줄 아는건가. 그것도 맞지만, 나는 무서웠다. 나는 태형때문에 정체성이 박살나고 있었다. 나는 남자도 좋아하지않았고, 김태형도 싫어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정말 정말로 많이! 


태형은 그 뒤로 내게 끊임없는 문자를 보냈다.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헤어지려고, 여자 소개까지 받게 된 날. 전정국이 소개를 해준 그 여자. 긴머리에 청순하고, 여리여리하고 날씬하고 김태형과 다른, 아주 다른 여자를 소개받고 데이트를 한 날.


".................."


김태형을 만났다.


나는 그 날 사건이후, 며칠간 연락을 씹고 있는 상태였다. 머릿속으로 정리가 필요했다. 태형은, 


"............"


딱 여자와 밥을 먹고, 카페를 가려 거리에 나왔을 때 김태형을 만났다. 추운지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패딩을 입고, 다 가려도 너무 너무 잘생긴 김태형과. 태형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나는 그 날, 태형이 날 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차라리 욕이라도 한 바가지로 하던가. 나는 사람이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처음봤지.


"..............."


태형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먹으로 앙앙 울며 뛰쳐나갔다. 나는 너무 놀라서 거리 한복판에 쳐박혀 있기만 했다. 소개받은 여자는 계속 나를 불렀다. 지민아. 지민아. 갑자기 왜그래? 몇분간 대꾸를 하지 않았더니 여자는 신경질을 내며 사라져버렸다. 


잘된건데, 그 날부로 태형과 모든 연락이 끊겼다. 태형의 프로필 사진도 내 사진이 아니었다. 


[자기야 내가 미안해 우리 얘기 좀 해]


몇주일전 태형이 보낸 문자, 그 문자뒤로 태형은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난 얼마뒤 깨달았다. 


나는 첫사랑과 헤어졌다.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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