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부인.”


르프로이는 페어팩스 부인의 당혹스러운 시선을 놓치지 않았기에 그녀의 두어 발짝 뒤에서 떨어져 걸었다. 비싸진 않지만 잘 다려진 옷자락이 고풍스러운 무늬가 새겨진 카페트 위를 스치는 부드러운 소리. 르프로이는 걸음마다 그의 옆얼굴로 떨어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웃음을 유지한 채 보지 못한 척했다.

 

“마사, 샌드위치와 차를… 술이 더 편하시려나.”

“아닙니다. 차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부인은 빠르게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오랫동안 고택의 사람들을 부린 여인답게 시선은 아주 빨랐고 웬만한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르프로이는 그녀가 권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황량한 벌판에 혼자 우뚝 선 웅장한 성에는 으레 밤이 빨리 찾아오곤 했다.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어둑어둑한 성 안 곳곳을 비추는 촛불이 일렁거렸다. 따뜻한 빛 속에서 르프로이는 재빨리 페어팩스 부인과 눈이 마주치자 웃어 보였다. 부드럽게 눈을 접으며 입술을 끌어올리면, 여전히 어려 보이는 그의 미소는 그가 가진 많은 것들 중 가장 필요한 무기가 되곤 했으니.


“당황스러우실 걸로 압니다.”

“그렇지 않다고는 말씀을 못 드리겠군요. 분명히 여자아이를 가르칠 여교사로 부탁했는데….”

“오기로 했던 여교사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과 제 숙부가 잘 아는 사이셨거든요. 여기 두 분의 추천장입니다. 그리고 이건 저의 졸업장이에요.”

 

페어팩스 부인은 르프로이의 손끝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몇 장의 종이를 넘겨받았다. 빠르게 글씨들을 훑던 노부인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르프로이는 때마침 하녀가 가져온 샌드위치와 차를 받았다. 역시 손끝이 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오랫동안 고립된 성에서 지낸 여인들은 함부로 남자들과 살이 닿지 않도록 했다. 그는 전염병따위는 없는데도. 르프로이는 고개를 드는 페어팩스 부인을 보며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가정교사를 하기에는 너무 좋은 조건인데요, 미스터…”

“르프로이. 톰 르프로이입니다.”

“미스터 르프로이.”

 

그녀는 잠깐 말을 머뭇거렸다. 르프로이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급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읽어보고 제가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역시 그 부분을 걱정한 모양이었는지, 페어팩스 부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런가요?”

“네. 또한 바렌스 양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법을 공부하신 분이니…”

 

페어팩스 부인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그녀가 그의 경력에 관련해 묻고 싶은 것을 파악했지만, 르프로이는 부러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하게 피어오른 불빛 아래로, 청년의 얼굴이 잠깐 과거를 떠올리려는 듯 멀어졌다.


“방은 뒤쪽을 준비했어요. 다만, 여자분이 오실 줄 알고…”

“미리 연락드리지 못한 제 불찰이니 괜찮습니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르프로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을씨년스럽게 부는 바람이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렸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을 텐데 괜찮겠느냐. 선고처럼 엄숙하게 떨어지는 그의 숙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문장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르프로이는 조용히 재판관의 가발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게 그의 대답이었다. 숙부는 가족까지 모두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돌봄을 받지 못할 터였다. 그걸로 되었다. 그는 자유였다…. 너무 늦게 얻은 자유였지만. 사랑도, 명예도, 돈도. 모두 없어진 대신 오로지 얻은 자유였고 그것으로 그는 이 손필드 저택에 처박혀 머무르기에 충분했다.

 

“미스터 로체스터는 다음 주쯤에야 오실 겁니다.”

“누구… 아. 저택의 주인이라고 하셨지요.”

“네. 오시면 늘 따분해 하셨는데, 말을 나눌 신사분이 생겨 좋아하시겠군요.”


순간적으로 노부인의 얼굴이 깊게 패인 주름을 확인한 르프로이는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겠다는 듯 웃었다. 걱정 마세요. 고동색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청년의 탐스런 뺨을 스치며 흔들렸다. 페어팩스 부인은, 갑작스레 찾아온 이 신사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얼핏 했다.



“실례합니다, 미스터 르프로이…”

“아, 고마워요.”

“소피! 이것 봐, 톰이 나에게 리본을 해줬어!”


수업은 주로 불어로 이루어졌다. 어렸을 때 불어와 독어를 배운 르프로이에게는 어렵지 않은 대화였다.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편했다. 수업을 하고 있을 때면 오가는 모든 집안의 식솔들이 소녀와 르프로이를 힐끔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는 노력도 눈에 보였다. 르프로이는 모르는 척했다.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젊고 수려한 청년의 등장은 그만으로도 저택에 낯선 긴장감을 들어앉혔고, 페어팩스 부인은 그 들뜬 바람을 없애기 위해 분주히 노력했기 때문이다. 르프로이는 애써 집안의 식솔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소녀 아델과는 친하게 지냈다. 그녀는 말이 통하는 사람은 미스터 로체스터 다음으로 그가 유일하다며 숨통이 트여 했다. 르프로이는 그녀에게 영어를 비롯해 역사, 지리, 문장 등 모든 것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일은 처음이었고 소녀가 아주 총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르프로이는 금세 그녀와 친해질 수 있었다.

 

“아델,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옷이 구겨지잖니.”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어째서 그런 격식을 차려야 해요?”

“내가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지.”

 

소피의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르프로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소피에게 가려던 아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미스터 로체스터! 소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반갑게 울렸다. 천천히 문을 더욱 밀어 연 남자의 얼굴이 그제야 르프로이의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문제의 남교사로군.”

“미스터 로체스터.”

 

르프로이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바지에는 아델의 리본에서 조금 잘라낸 분홍색 끈이 붙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르프로이의 손에서부터 얼굴까지 느리게 훑어본 로체스터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허리춤을 끌어안은 아델이 뭐라고 불어로 빠르게 종알거렸지만 그는 전혀 듣지 않는 듯했다.

 

“자, 같이 저녁을 먹을 거란다. 오늘 수업은 이만하고 방에 들어가서 준비하렴.”


로체스터의 얇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불어. 르프로이는 멋대로 수업을 중단시킨 남자를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려던 르프로이는 순간 행동을 멈췄다.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남자가 부드럽게 웃어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에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이 대롱거리며 매달렸다. 소녀는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는 빠르게 소피의 팔에 매달려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저는 수업을 끝낸 적이 없는데요.”

“저택의 주인이 왔으니 맞이할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대단하신데 한 마디 언질도 없이 오셨군요.”

 

로체스터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언사는 처음 겪는다는 듯한 언짢은 태도에 르프로이는 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는 곧바로 아델의 방으로 온 모양인지 코트에 머플러까지 한 채, 손에는 중절모를 들고 있는 차림이었다. 그는 천천히 머플러를 풀었다. 가느다랗고 흰 목이 드러났다. 르프로이는 시선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귀에서부터 어깨까지 이어진 단정한 선.


“당신도 식사에 참여하시오. 미스터…”

“르프로이. 톰 르프로이입니다.”


르프로이…. 이름을 되읊는 로체스터. 앞니로 가볍게 아랫입술을 무는 발음의 모양. 르프로이는 자신의 이름이 그런 모습을 한다는 것을 일순 깨닫는다. 머플러를 팔에 건 로체스터가 고개를 까딱였다.

 

“저녁식사에 함께하죠. 미스터 르프로이.”

“제가 감히?”

“그대가 감히.”

 

남자는 완벽하게 귀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르프로이는 무릎을 굽히며 가볍게 묵례했다. 로체스터는 말없이 그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푸른 청년의 눈이 똑바로 녹회색의, 손필드 저택의 주인의 눈을 응시했다.

 

“기꺼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미스터 로체스터.”

“그리고 내 양녀의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들어봐야 하니까.”

 

르프로이는 천천히 몸을 돌리는 로체스터를 향해 물었다.


“양녀라 함은…”


그의 몸이 느리게 멈추었다.

 

“결혼을 아직 하지 않으셨단 말인가요.”

 

돌아본 로체스터가 입술을 한쪽으로 끌어올렸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표정에 르프로이는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을 동반한 기묘한 즐거움이 더 컸다. 그것은 몇 주간 이 조용하고 추운 겨울의 저택에서 지낸 따분함에서 벗어난다는 기쁨일 것이다. 아마도.


“제법 질문이 많군요.”


그 이상일 리는 없을 것이다. 하늘거리는 셔츠깃이 남자의 우아한 목을 끌어안듯 감싸고 있었다.


“건방지게.”


르프로이는 해사한 표정으로 웃었다. 건방진 것만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의 주인이 무뚝뚝한 발걸음을 빨리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르프로이는 처음 겪는 이상한 흥분과 기대감에 휩싸이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겨울바람이 똑똑거리며 창문을 두들겨댔다.





저녁식탁은 전에 없이 화려하고 풍성하게 채워졌다. 나름대로 제법 대접을 받고 있다 여겼던 르프로이조차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미스터 로체스터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메뉴에 손을 대는 둥 마는 둥 거의 먹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그게 익숙한 모양인지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로체스터, 르프로이, 아델, 그리고 페어팩스 부인만으로 이루어진 식탁은 고요하기만 했다. 부인은 시종일관 자리가 불편한 듯 치맛자락을 인지도 하지 못한 채 매만졌고 로체스터의 시선이 몇 번을 그리 향했다. 아델이 즐겁게 무언가를 불어로 고하면, 스프를 뜨는 듯 마는 듯하던 로체스터가 짧게 영어로 답해 주었다. 그러나 그 언사는 사실 어린 소녀가 듣기엔 퍽 무심하고 냉정한 내용이었으므로(“그래, 네 드레스를 사는 데 내 주머니에서 돈이 제법 나갔지.” “네 목소리는 그렇게 듣기 좋지 않군. 노래를 잘했다고 했는데 그게 가능한 목소리일 리가 없는데.”) 통역을 바라보는 아델의 반짝이는 눈에 르프로이는 몇 번이나 순화한 문장을 들려 주었다.


체할 것 같은 조용한 저녁식사가 끝나자마자 부인은 아델을 데리고 방으로 갔다. 로체스터가 그리 눈짓했기 때문이다. 르프로이는 냅킨으로 입술을 몇 번 누르고는 내려놓았다. 드르륵 하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자 나이프를 건성으로 바라보던 로체스터의 시선이 르프로이를 향했다. 그의 눈은 우울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엠마.”


그는 옆에 있던 하녀에게 손짓했다. 하녀는 익숙한 듯 무릎을 살짝 숙이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르프로이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로체스터에게 목례했다. 말은 그가 빨랐다.


“술을 좋아하는지.”


르프로이가 답을 하려할 때 하녀가 다시 돌아왔다. 두 개의 유리잔과 술병이 로체스터의 앞에 놓였다. 르프로이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어정쩡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로체스터가 그를 올려보았다. 마치 하나하나 오려 붙인 듯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불빛에 일렁거렸다.


“많이 좋아합니다.”

“그럼 다시 앉으시오.”

“그래서 안 마시려고 합니다만.”

 

그 말에는 잔에 술을 따르는 소리만이 돌아왔다. 르프로이는 로체스터를 바라보았다. 이미 반쯤 비워진 술병은 그가 제법 저택에서 혼자 적적한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로체스터는 채운 잔을 여전히 서 있는 르프로이에게 내밀었다. 르프로이는 잠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로체스터가 미소 지었다.


“왜, 여자라도 불러드려야 하나?”


명백히 곱고 바르게 자랐을 가정교사를 조롱하는 말이었겠지만 르프로이는 그 말에 웃었다. 오히려 받아치는 웃음에 로체스터가 잠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동안 늘 여인들과 술을 마셨으니 오늘쯤은 없이 마셔도 될 것 같군요.”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데다 훌륭한 판사의 조카라더니?”

“그럴수록 방황이 거친 법이라.”

 

다시 의자를 끌어 앉으며, 르프로이는 로체스터의 잔을 받아들었다. 가볍게 손끝이 스쳤다. 남자의 손은 차가운 편이었다. 로체스터가 제 잔에 술을 따르며 옆에 선 하녀들을 물렸다. 그녀들은 좀 불안한 얼굴을 했고, 르프로이는 다정하게 웃으며 걱정하지 말란 제스쳐를 취했다. 고개를 숙이며 나가는 하녀들을 잠깐 바라보며 식탁을 가볍게 두드리는 에드워드 로체스터의 길고 마른 손가락.


“내 양녀를 가르쳐보니 어떠하던가요, 미스터 르프로이.”

“배우는 걸 좋아하더군요. 스스럼없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 말에 그가 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르프로이는 잠깐 제 잔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마셨다. 아주 오랜만에 마시는 알콜이 목을 태우며 넘어간다. 부러 천천히 마시기 위해 입술을 가볍게 다문 채 르프로이는 잔을 내려놓았다.


“똑똑하다는 소리는 차마 하지 못하는군. 내 그럴 줄 알았지.”

“양녀로 들이셨지만 큰 애정은 없으신가 보군요.”

“그 애는 사정 때문에 내 밑으로 데려왔지만 책임감 외에는 딱히 뭔가를 가질 만큼 소중하지는 않아서.”

 

무심한 말을 서슴없이 뱉은 로체스터는 금방 잔을 비웠다. 르프로이는 그보다 빠르게 병을 들고 그의 잔에 따랐다. 로체스터가 만족한 듯 웃었다. 싸늘한 바람이 쿵, 하고 창문을 두드렸다.


“이런 내가 무정해 보입니까, 가정교사 나리?”

“애정 없는 관계는 너무도 많이 봐와서 낯설지는 않군요.”

“그래. 어떤 사연이실까.”


가벼운 노크소리 후 페어팩스 부인이 들어왔다. 안주거리가 될 만한 치즈와 핑거푸드를 담은 접시였다. 다른 하녀들이 조용히 들어와 빈 접시와 음식을 치우기 시작했다. 막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시간이 방해된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리를 꼬은 채 잔을 가볍게 흔드는 그의 팔 위로도 따뜻한 등불의 빛이 내렸다. 팔을 뻗느라 살짝 걷어진 셔츠 소매 아래로 창백한 손목이 들어왔다. 남자의 체구가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가늘고 마른 부분들이 있었다. 여자의 곡선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딱 떨어지는 직선은 아닌 오묘한 모양의 선. 르프로이는 어떤 소설을 몰래 음미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말해봐요, 미스터 르프로이.”

“어떤 것 말씀이시죠?”


로체스터는 모두가 물러간 다이닝 룸에 저와 눈을 맞추고 있는 유일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택의 주인의 눈에는 거만함과 무례함이 뒤섞여 있었으나 그것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 점이야말로 르프로이의 흥미를 돋구었다. 남자의 오만함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음을 전제로 이루어진 것일까.


“대체로 가정교사들은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더군.”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술도 들어갔으니, 어떻습니까.”

“슬픈 사연이라고 말하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듣는 눈을 하는군요.”

“그대의 슬픈 사연이 내게 슬플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니까.”


거침없이 쏟아지는 말을 들었다면 페어팩스 부인은 노심초사한 얼굴을 했을 것이다. 르프로이는 그의 말대로 재미있었다. 부인에게 저의 학력과 오게 된 사정을 들었다면 이리 대하기도 쉽지 않을 터. 아니 애초에 이 정도로 멋대로 구는 것은 신사의 도리에 어긋나는 법이었다. 제대로 된 곳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손필드 저택은 황야에 홀로 서있었고 그가 유일한 주인이자 신사였다. -이제야 이곳에 들어오게 된 톰 르프로이를 제외하면.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을 멋대로 가지고 놀려는 의도일 것이다. 르프로이는 슬쩍 웃었다.


“글쎄..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할지.”

“사연이 긴가.”

“이 먼 거리를 달려왔으니 그만큼 이야기도 쌓여있지 않겠습니까.”

“내게 모두 하려고?”


훅 찌르면 남자는 몸을 틀어 피한다. 르프로이는 복싱을 배운 적 있었다. 아주 잘하지는 못했지만 기술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었다. 오히려 터놓으면 그는 조금 겁먹은 얼굴을 했다. 진중해 보이는 얼굴은 의외로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었다. 르프로이는 턱을 괴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의 흰 얼굴은 금방 술이 들어 붉어져 있었고, 푸른 눈이 사르르 접히며 웃는 얼굴은 여전히 소년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저는 이 저택에 가정교사로 왔으니 모두 해야할 필요는 없겠지요.”

“내가 돈을 준다면?”

“돈이라. 그런 것에 제 이야기를 팔 것 같습니까, 미스터 로체스터?”

“가정교사는 대체로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라, 돈을 꺼내면 모두들 하라는대로 하더군.”

 

그러나 그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떠보려는 의도가 명백했고 르프로이는 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로체스터의 긴 손가락이 네모나게 조각난 치즈를 집어 입에 넣는 것이 느린 화면처럼 보였다. 얇은 조각이 아랫입술에 묻었고, 이내 손끝이 그것을 훑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요. 제가 처음 겪었던 여인의 이야기? 그녀의 입술이 어떤 색으로 붉었고 살결이 얼마나 희었는지에 대해?”

 

로체스터가 술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르프로이는 느긋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스듬이 뺨과 턱을 손 위에 기댄 채 가로로 길게 웃는 모양이 된 르프로이의 눈.


“돈에 그런 이야기를 모두 하려고 하다니. 그정도로 급한 모양이지.”

“그것 또한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 중 하나인지라, 섣불리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나를 가지고 농을 하는군.”

“이걸 질나쁜 장난으로 여기다니, 생각보다 정숙하시어 놀랍습니다.”

“나는 숙녀가 아니오.”

“저 또한 신사는 아니라.”


빠르게 받아친 르프로이가 술잔을 가볍게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단숨에 잔을 비우고 내려놓자, 잔을 손안에서 돌리며 바라보던 로체스터가 입을 열었다.


“집으로 들인 게 가정교사가 아니라 술을 좋아하는 난봉꾼이었나?”

“술보다 아직은 책을 좋아해 밥벌이를 하고 있죠.”


결국 로체스터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르프로이는 술이 심장을 타고 혈관을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얼굴에 피가 몰려 화끈거리고 쿵쿵거리며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제법 독한 술인데 한번에 마신 탓일 것이다. 눈앞의 로체스터가 약간 흐릿하게 맺혔다가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녹회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불친절하고 오만한 저택의 주인의 것치고는 너무 아름답다. 그러나 그에게 딱 어울렸다.

 

“재미있군. 사냥은 좋아하시오?”

“잘하지는 못합니다만.”

“겨울숲에는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자주 나타나지. 언젠가 사냥을 함께 가도록 합시다.”

 

그 말과 함께 로체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르프로이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로체스터는 만족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그치고는 제법 예를 갖춘 인사 후 다이닝 룸을 나섰다. 날씬하게 떨어지는 그의 허리를 바라보며 르프로이는 제가 로체스터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날 르프로이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10파운드를 발견했다. 르프로이는 그것을 가족에게 보내는 대신 자신의 가슴에 넣고 절대 쓰지 않았다.

 


“있죠, 톰. 그 소문 들었어요?”

“어떤 소문 말이니, 아델?”

“밤에 유령이 나타난대요.”


아델은 불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곤거리며 말했다. 소녀다운 내용에 르프로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델이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진짜라고요, 젤다가 봤다고 했어요.

 

“하얗고 치렁치렁한 잠옷에 새까만 머리, 파란색 눈을 가지고 있댔어요. 복도에서 봤대요.”

“그래? 그럼 밤에는 돌아다니지 않도록 해야겠구나.”

“톰도 조심해요.”

 

그 말에 르프로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탕 하는 빠르고 큰 소리가 울렸다. 꺅 하는 소리와 함께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르프로이는 소리의 출처를 찾기 위해 방에 난 창으로 갔다. 아델이 나도, 나도요! 하며 종종거리며 그의 곁으로 와 섰다. 소녀에게 조금 높은 위치의 창문에 아델이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르프로이는 바깥의 광경에 시선을 빼앗겨 그녀를 올려주지 못했다.


“그래, 파일럿! 더 빨리!”

 

몇 발의 총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아델이 르프로이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나도 보고싶어요, 미스터 로체스터가 총쏘는 것-. 르프로이는 멀찍이 떨어진 그의 전신을 처음 보았다. 이 추운 날씨에 그는 코트도 없이 셔츠와 바지차림으로 총을 다시 장전하고 있었다. 높은 탑에서 펼쳐진 들판을 향해 두어 발을 더 쏜 그는 흡사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으며 발을 굴렀다. 파일럿, 달려! 흥분한 그의 높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저택을 울렸지만 그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르프로이는 그를 바라보며 슬쩍 웃었다.

 

“미스터 로체스터가 뭘 하고 있어요? 사냥 중인가요?”

“아니, 심심함을 달래려고 노는 거야.”

“즐거워 보여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로체스터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르프로이는 고개를 돌려 아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쓸쓸한 사람들이 저렇게 요란한 웃음소리를 낸단다.”


영어로 중얼거린 말을 알아듣지 못한 아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르프로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수업을 계속하자, 하고 달랬다. 몇 번이나 그의 총소리와 웃음소리, 요란한 개 짖는 소리가 울렸지만 여전히 그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외로울 것이다. 열어놓은 창문틈으로 싸늘한 겨울바람이 들어왔다.




쿵. 미묘하게 가까워진 소리가 제법 갑작스럽게 울림과 동시에 르프로이는 눈을 떴다. 아직 한밤중이었고, 그가 읽다가 덮어둔 책 사이에는 아델이 준 꽃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숙해질 무렵 르프로이는 제가 잠결에 착각한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때 다시 한 번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묵직한 소리였고 불규칙적이었다. 르프로이는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눈썹을 찡그리며 귀를 기울였다. 위쪽에서 나는 건가? 아니면.. 좀 더 가까웠다. 르프로이가 잠든 층의 복도였다. 르프로이는 잠옷 차림으로 나가봐야 할 일인지에 대해서 잠깐 계산했다. 그 순간 무어라 외치는 낮은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미스터 로체스터. 르프로이는 몸을 일으키고 문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문을 연 르프로이는 처음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늘 복도에는 밝지 않도록 불을 켜두는데 촛불이 모두 꺼진 탓이었다. 어둠에 르프로이가 살짝 눈을 찡그린 순간, 쿵 하는 소리가 좀 더 멀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르프로이가 방의 등불을 가지러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미스터 르프로이.”


놀라서 몸을 확 움츠린 채 잠깐 있던 르프로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미스터 로체스터.”

“불이 꺼졌군. 잠깐만 기다려요.”


몇 번인가 탁탁거린 후에 작은 불이 일었다. 들고 있는 초에 불을 붙인 로체스터의 얼굴이 밝은 빛에 어룽졌다.


“잠을 못 이루고 있었습니까.”

“그 반대죠. 자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가..”

 

뭐라 말을 이으려던 르프로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로체스터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허벅지 아래로 늘어진 긴 잠옷용 튜닉 아래 드러난 맨다리를 훑던 르프로이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다치셨군요, 미스터 로체스터.”


저도 모르게 상처를 살피려는 르프로이를 향해 뒤로 한 발짝 물러난 로체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다쳤소.”

“하지만 그 상처-”

“안 다쳤다고 말했을 텐데.”


뭔가에 베인 듯 긴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로체스터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것은 단순히 상처뿐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르프로이는 그의 눈을 잠시간 바라보며 읽었다. 이윽고 르프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말도 말고 돌아가 다시 자요.”

“…좋은 밤 되시길.”

“그대도, 미스터 르프로이.”


그 말과 함께 몸을 돌리자 광원이 사라져 훅 어두워진다. 어른거리며 멀어지는 로체스터의 뒷모습, 절뚝거리는 뒷모습을 르프로이는 바라보았다. 복도 끝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의 얇게 다물린 입술은 절대 답을 내놓을 모양을 하고 있지 않았다. 르프로이는 포기가 빨랐다. 아니, 타이밍을 볼 줄 알았다.



“좋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페어팩스 부인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델이 미스터 로체스터! 하고 그대로 의자에서 뛰어내려 그의 허리를 안았다. 그는 자주 아침을 걸렀고, 설령 한다고 한들 르프로이를 포함한 식솔들과는 다른 곳에서 따로 식사했다. 그런 그가 불쑥 셋을 찾은 것이다. 르프로이는 셋 중에선 가장 여유로운 얼굴로 버터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목례하면 미스터 로체스터의 회녹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늦은 해를 감싼 안개의 새벽이 어울리는 색.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시는지, 미스터 르프로이.”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늘 그렇듯 아델을 가르치죠.”

“그럼 오전은 잠깐 비워두시오.”

 

그 말에 페어팩스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델은 빠르게 진행되는 두 사람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르프로이는 짐짓 고민하는 체하다가 그러겠다 대답하였다. 좋아. 제법 유쾌하게 소리낸 로체스터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페어팩스 부인의 입가가 살짝 떨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로체스터는 아델의 앞에서, 또는 식사중인 사람들 앞에서 불을 붙일 생각은 없었는지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톰, 미스터 로체스터가 뭐라고 했어요?”

 

태연히 다시 빵에 버터를 바르며 르프로이는 그의 걸음걸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다친 게 착각이었다는 듯 멀쩡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전 사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그럼 산책이라고 해두지. 어차피 둘로는 뭘 잡지도 못하는데.”


르프로이는 사냥총을 옆에 멘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로체스터가 직접 골라준 말은 순했다. 르프로이는 마차를 선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승마가 어려울 정도로 경험이 없진 않았다. 로체스터는 제법 재미있다는 얼굴로 느리게 저를 따라오는 르프로이를 돌아봤다. 몸을 틀자 헐렁한 드레스셔츠 아래로 딱 붙는 트라우저 때문에 허리선이 더욱 날씬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르프로이는 힘겹게 시선을 뗐다. 그는 흥미롭게 르프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숲은 온갖 짐승들이 다 나오는 곳이지.”

“그래 보이는군요.”

“자칫하면 아직 겨울잠에 들지 못한 사나운 곰을 만날지도.”


저를 겁주려는 건지 장난치는 건지 알 수 없다. 안개가 뾰족한 나무들의 꼭대기를 서서히 삼키고 있었다. 르프로이는 조금 속도를 올리는 로체스터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저도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쳤다. 풀과 나뭇가지를 삐걱거리며 밟는 소리.


탕,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푸드득거리며 새들이 위로 날아올랐다. 르프로이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로체스터는 연신 신난 표정으로 웃었다. 입을 벌린 그의 얼굴은 조금 아이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정말로 사냥을 하고자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저는 듣지도 못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향해 연신 총을 쏴대는 로체스터를 누군가 봤더라면 흡사 미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르프로이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시끄러운 총소리와 매캐한 탄약 냄새가 썩 달갑지는 않았다.

 

“미스터, 이만 돌아가는 게-”

“저기 뭐가 있군.”


빠르게 고삐를 쥐어 당기며 말을 튼 로체스터가 가파른 산길을 달렸다. 르프로이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쫓았다. 위험하다고 생각한 순간, 날카롭게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저만치 멀어지던 그의 몸이 둔덕 아래로 훅 사라진다.


“미스터 로체스터!”


마른 잎과 가지로 덮인 언덕 아래에 그가 바닥에 누워 있었고, 그의 곁을 말이 빙글빙글 돌았다. 르프로이는 날듯이 말에게서 뛰어내려 그에게로 달려갔다.


“괜찮습니까?”

“그렇게 심하게 넘어진 건 아닙니다.”

“그래 보여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로체스터는 멀쩡한 얼굴로 르프로이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잡는 대신 빤히 올려보는 시선에 어쩐지 목 안이 간지러워서, 르프로이는 헛기침하며 손을 좀 더 내밀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침묵. 이제와 내외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남자간에, 하는 말이 입술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그가 손을 내밀어 르프로이의 손목을 움켜쥔다. 생각보다 강한 악력에 르프로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윽.”

“미스터-”

 

그제야 르프로이의 시선이 그가 뻗고 앉은 다리로 향했다. 로체스터는 결국 일어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르프로이의 손을 놓았다. 손목을 강하게 쥐었던 손바닥의 온도가 점점이 하얗게 번진다.


“아무렇지도 않아서 꿈인가 했더니.”


로체스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말하지 않았다. 하얀 천에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르프로이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찌익 하는 번거로운 소리와 함께 르프로이가 힘주어 찢은 천 사이로 아가리를 벌린 상처가 드러난다. 대충 거즈를 가져다댄 상처는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제법 아팠을 텐데. 미간을 좁힌 르프로이가 상처에 손끝을 댔다. 아픔을 참으려는 듯 작게 앓는 소리가 입술새로 흘러나왔다. 숨결이 르프로이의 머리칼을 건드렸다.


“미련한 겁니까, 아니면 오만한 겁니까.”

“일개 가정교사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오만한 거군요.”


르프로이는 인상을 쓰며 거즈를 뗐다.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상처의 끝에서 핏방울이 다시 피어올랐을 때, 르프로이는 짧게 로체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상처를 바라본 채 여전히 답을 주지 않을 표정으로 있었다. 약이 오른 것은 르프로이로서는 당연한 것이고, 또한 그는 놀려주고 싶은 마음도 살짝 있었다.

 

“미스터 르프로이, 지금…”


혀끝이 막 맺힌 핏방울을 빨아들인다. 사내의 살 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풀 냄새가 뒤엉켰다. 르프로이는 부러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정수리로 로체스터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혔다. 아프지 않게 입술을 가볍게 부딪쳐 피를 닦아내자 종아리가 긴장한 듯 짧게 경련했다. 이제 르프로이는 이가 간질거렸다.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상처가 커요.”


르프로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로체스터가 르프로이의 손목을 쥐고 제쪽으로 당겼다. 균형을 잃은 르프로이가 잠깐 휘청거렸다. 그의 어깨로 무너질 뻔한 것을 겨우 지탱하고 서자 로체스터가 그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다친 이유는…”


목소리는 듣기 좋았고, 그의 발음과 억양은 그가 지냈던 햄프셔와는 완전히 다른 바람이었다.


“사냥을 하다가 넘어져 돌에 찢어진 걸로 하면 될까요?”

“똑똑하군.”

“눈치도 빠르죠.”

 

르프로이가 무릎을 굽히며 장난스레 대꾸하는 말에 로체스터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르프로이는 그를 부축해 자신의 뒤에 태웠고, 손필드 저택까지 그를 데려갔다. 르프로이의 허리를 감싼 기다란 손가락. 로체스터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상처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소란스럽지 않은 뒷문을 통해 그의 방으로 향했다. 여긴 봄이 되어 꽃이 피면 아주 예쁘지. 앙상한 나뭇가지와 시든 이파리들이 붙은 뒷문을 바라보며 로체스터가 중얼거리면 르프로이의 귀 뒤에 숨결이 닿았다. 그가 그의 침대에서 누운 걸 보고서야 르프로이는 저택에서 떨어진 마을로 향해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늘 오던 다른 하인 대신 그가 직접 로체스터의 부탁을 받아 온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다친 것은 오히려 놀라운 일이 아닌 모양인지 이유도 묻지 않았다. 르프로이는 그가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깨물며 신음을 참는 것을, 문가에 서서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진통제를 받아 잠에 들 때까지.


그날 오후는 내도록 수업을 하지 못했고, 저녁에야 사람들은 로체스터의 부상을 알아차렸다. 로체스터는 저녁식사에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다쳤어요? 아델이 묻는 소리에 식사를 내오던 페어팩스 부인이 짧게 어깨를 떠는 것을 르프로이는 놓치지 않았지만 입을 열지도 않았다. 로체스터는 그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방으로 식사를 받았고 웬만하면 나오지 않으려 했다.


르프로이는 그때쯤 꿈을 꿨다. 그의 혀끝이 로체스터의 상처에 닿는 그 순간의 꿈을.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고 강렬한 감각으로 인해 그는 두어 번 새벽에 잠을 깼고, 그 중 한 번은 다시 쿵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시는 호기심이 방 밖으로 그를 이끌도록 두지 않았다. 그 순간, 날카롭고도 선홍색의 순간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의 상처가 아물 때쯤, 점심식사 후 로체스터는 르프로이를 방으로 불렀다. 오후에 아델은 페어팩스 부인을 따라 장을 구경하러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르프로이는 흔쾌히 그 부름에 응했다. 르프로이가 노크를 하자, 들어와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무거운 문을 열면, 르프로이의 방-여교사용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작은 방-과는 다른 로체스터의 방이 펼쳐졌다.


“실례합니다.”

“내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인가?”

“제대로 본 건 처음이죠.”


상처를 입은 날을 가리키는 말에 로체스터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르프로이는 고개를 살짝 숙인 다음 그의 손짓에 따라 가까이 다가갔다.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미스터 로체스터?”

“덕분에. 그날은 고마웠소.”


르프로이는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쉬는 도중이었음에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의 옷매무새를 한 번 훑는 회녹색의 눈길이 느껴졌다. 로체스터는 옆에 놓인 잔을 내밀었다. 시드르요. 르프로이는 잠깐 거절할까 했지만, 부러 그에게로 내미는 로체스터의 손끝에 닿기 위해 그의 잔을 받아들었다.


“무슨 이유로 부르셨습니까.”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단… 다리 때문에 움직이질 못하니 좀이 쑤셔서.”

“오전에 제 일이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돌볼 아이가 남아 있었군요.”

 

르프로이의 농담에 로체스터가 잔을 가져가다 말고 슬쩍 웃는다. 헐렁한 셔츠는 목 아래로 제법 깊이 파여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전체적으로 창백하고 마른 그의 몸이 드러났다. 움푹 패인 쇄골뼈에 한 번 시선을 준 르프로이는 그의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흘긋 바라본 그의 다리는 여전히 붕대에 감겨 있었지만 말마따나 많이 나은 듯했다.


“무료하군. 저택에 재미있는 소식은 없었나요, 미스터 르프로이?”

“글쎄요. 매일 돌봐주시는 페어팩스 부인이 이야기해주지 않으시던가요?”

“그녀는 너무 겁이 많아. 내가 어떤 소식을 들으면 화를 낼까 늘 두려움에 떨고 있지.”

 

물론 화를 한 번도 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덧붙이며 로체스터는 잠깐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가 눈으로도 보이는 듯했다. 서늘한 바깥 풍경.

 

“저택은 겨울맞이 준비로 한창이더군요.”

“손필드 저택의 겨울은 유명하지.”

“어떤 면에서?”

“난폭하고, 싸늘하고, 종잡을 수 없음으로.”


그 말을 하는 로체스터의 눈 속에서 르프로이는 겨울을 본다. 출처를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곳에서의 겨울은 유독 밤이 길어요.”

“방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겠군요.”

“아, 그래. 정말 견딜 수 없어.”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시나요?”

 

르프로이의 질문에 로체스터가 그를 바라보았다. 르프로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로체스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고독과 온기 중에 선택하라면 모두들 온기를 선택하겠지. 특히 그대는 더욱 그럴 것 같군.”

“글쎄요. 고독을 싫어하는 것과 온기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말이죠.”

“내가 고독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온기를 좋아하지는 않듯이.”


그 말에 로체스터가 작게 웃었다. 나직하게 퍼지는 웃음소리는 어떤 선을 단단히 세우고 그것은 벽이 된다. 르프로이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 벽에 부딪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그를 바라보았을 때 로체스터는 경계심이 들어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를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하려 들지 마시오.”

“제가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드립니다, 미스터 로체스터.”


르프로이는 어렵지 않게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고동색 정수리를 본 후에야 로체스터는 음. 하며 긍정의 표시를 드러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 르프로이는 언제 그의 깊이를 바라보려 한 적 있었냐는 듯 천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푸른 눈. 하늘은 언제라도 구름을 드리웠다가 다시 물릴 수 있다. 평화로움 뒤에 혼란이 오듯이, 로체스터는 어렴풋이 위험을 감지했다.


그러나 어째서 자신은 그를 계속해서 보고자 하는가?


“뭔가 들려줄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정말로 없소?”

“제가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어서.”

“그대만큼 흥미로운 사람은 딱히 없는 것 같았는데, 이때까지는.”

“흥미는 본인이 두고자 하는 곳에 생기기 마련이지요.”


제게서 흥미를 보셨을지도요. 가벼운 투로 스치는 말투는 그러나 여전히 로체스터를 향하고 있었다. 로체스터는 대답하는 대신 알싸한 맛이 제법 강하게 퍼지는 사과와인을 들이켰다.

 

“책.”

“책?”

“그대는 많은 책을 읽었겠지.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하지만 대체로 따분한 법학서라….”

“그것만 읽은 것은 아닐 텐데.”

 

로체스터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따금, 르프로이조차 책에서만 본 어떤 짐승을 떠올리게 하는 눈을 했다. 상처받은, 고독한, 거친…. 그런 묘사가 어울리지만 그래서 그것을 무척 두려워하는 어떤 눈. 로체스터가 재촉했다.

 

“읽었던 것 중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해봐요.”

“가장 좋아하는, 이라.”

 

르프로이는 턱을 괴고 잠깐 고민했다. 로체스터는 그런 그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얇은 입술이 유려한 선을 그리는 것을 보았을 때, 르프로이는 드문드문 돌이켰던 선명한 어떤 순간을 떠올렸다. 손끝이 저릿한 그 찰나.


르프로이가 입을 열었다.


…미덕의 요새가 이미 정복됐음을 깨달은 그는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기 시작했다.


로체스터의 시선이 그를 향하는 것을 느꼈으나, 르프로이는 눈꺼풀 뒤에 페이지가 펼쳐진 것처럼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그는 남이 맛본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도 않는 까탈스런 취향은 아니었다. 옷 사이로 드러난 백옥같이 하얗고 풍만한 젖가슴은 남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남녀는 잠시 서로의 눈을…

“그만, 그만.”

 

로체스터가 말을 끊자 르프로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지금 나를 놀리려는 거요?”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만.”

“그러면 이것이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인가요, 미스터 르프로이?”

 

그 말에 르프로이가 짧게 웃었다. 붉은 입술에 맺힌 웃음을 로체스터가 바라보았다.

 

“이것은 톰 존스의 소설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인 이유는 단순히 그뿐만은 아니지만.”


르프로이는 그 책의 문장을 모두 외울 만큼 많이 읽었다. 정확히는 그 책에 그가 갖고 있는 기억을.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예전의 일이며, 르프로이의 심장은 많이 무뎌져 있었다. 지금 그에게는 당황한 얼굴을 애써 가리며 무심한 척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더욱 흥미로웠다.


“불쾌하군.”

“또 제가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나요, 미스터 로체스터?”

“이런 음담패설을 듣고 기분이 유쾌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스터 르프로이?”

“이 소설은 제가 있던 곳에서는 제법 유명했고, 귀족가의 서재에도 종종 꽂혀 있던 책이었지요. 외설적인 것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아쉬울 것입니다.”

“내겐 그저 똑같아 보일 뿐이야.”

“아니면.”

 

르프로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로체스터는 마치 책이 탁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 것처럼 작게 입가를 씰룩였다. 르프로이의 그림자가, 느지막한 오후의 로체스터의 얼굴 위로 가볍게 드리웠다. 르프로이는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미스터 로체스터께서 너무 정숙하신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숙녀가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그건 지금도 보고 있죠.”

 

르프로이의 시선이 몸을 움직인 터에 앞섬이 느슨하게 풀어헤쳐진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바라보았다. 로체스터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늘 그보다 키가 컸던 로체스터가 침대 위에 앉아, 자신을 올려보는 눈빛은 처음이었다. 긴 속눈썹이 나부끼듯 깜빡인다. 르프로이는 작게 숨을 삼켰다. 로체스터의 호흡이 느껴졌다.

 

“딸을 입양하신 신사분께서 이토록 가벼운 소설에 놀라하시니 궁금하군요.”

“무엇이?”

“손필드 저택의 긴긴 겨울밤을 어찌 혼자 보내왔는지 말입니다.”




쿵. 르프로이는 다시 커다란 소리에 눈을 떴다. 다시 감각이 예민해진 것이라 느끼기에 소리는 좀 더 가깝기도 했다. 르프로이는 잠깐 눈을 찌푸린 채 그대고 있다가, 또 울리는 쿵 소리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뛰어다니는 것처럼 소리는 빨랐다가 느려졌다가 다시 사그라지기도 했다. 르프로이는 천천히, 이번에는 등불을 들고 문을 열었다. 복도가 깜깜했다. 르프로이는 몇 번 주위를 둘러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어딘가 불안한 마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르프로이가 도착한 곳은 한 층 위에 자리한 로체스터의 방이었다. 그 앞에 섰을 때, 르프로이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매캐한 냄새가 살짝 비틀려 열린 문틈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냄새를 감지한 르프로이는 단박에 문을 열었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미스터 로체스터! 미스터 로체스터!”

 

등불을 내려놓은 르프로이가 그를 큰 소리로 부르며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방 안은 온통 주황색의 불길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깊이 잠든 듯한 로체스터의 눈은 꼭 감겨 있었다. 르프로이는 커다란 화병에 담긴 꽃을 모두 끄집어내고는 물을 벽난로 근처, 불길이 크게 번진 곳에 뿌렸다.


“일어나요, 미스터 로체스터!”

“으음…”

“로체스터!”

 

화병을 내던진 르프로이가 침대 발치에 번진 불길을 향해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두드렸다. 따닥따닥 하는 불꽃소리와 열기에 땀이 뻘뻘 흘렀다. 다시 한 번 르프로이가 큰 소리로 그를 깨웠다.

 

“에드워드!!!”

“-미스터 르프,”

“얼른 나와요!”

 

르프로이는 그의 손목을 잡았고, 로체스터는 당황스러운 눈길로 방 안의 광경을 보다가 그의 악력에 당겨지듯 일어나 몸을 옮겼다. 다행히 불길이 그의 몸에 번지지는 않았다.


로체스터가 불길이 사라진 시트를 들어 아직 불씨가 남은 곳을 덮어 눌러댔다. 르프로이는 남은 화병의 물로 곳곳에 뿌리며 불을 진압했다.


매캐한 냄새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큰 불까지는 아니었고, 로체스터의 방 안에서 시작된 화재여서 다른 곳으로 번지기 전에 르프로이와 로체스터가 모두 끌 수 있었다. 르프로이는 완전히 불이 꺼진 방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밤의 겨울바람이 안으로 들어와 르프로이의 젖은 머리칼과 그을린 뺨을 건드려댔다.

 

“미스터 르프로이.”

“이게 도대체 무슨,”


말하며 몸을 돌린 순간 다시 르프로이는 고개를 돌렸다. 긴 셔츠 아래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의 맨다리가 희게 그의 시야에 번졌다. 그가 바지를 챙겨입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르프로이는 바닥을 바라본 채 그의 다리와 날씬하게 떨어진 선을 다시 한 번 돌이켰다. 어째서?

 

“난 잠깐 가봐야겠어요.”

“어딜-”

“금방 돌아올 테니 기다려요.”

 

그러더니 상의를 벗은 채인 르프로이를 한 번 보고는, 의자에 걸쳐놓은 제 외투를 들어 건넨다. 받아들면서 손끝이 스치는 걸 로체스터는 시선을 돌려 외면했다. 르프로이가 다시 그를 부르기 전에, 로체스터는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르프로이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불이라니. 도대체 누가 낸 것일까. 그의 침실에 직접 들어와 불을 지른 것이라면, 도대체 누가? 르프로이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가 우연히 로체스터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에는 머리털이 쭈뼛 섰다.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르프로이의 마음을 불안정하게 휘저었고, 르프로이는 결국 생각에 잠식당해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누군가 르프로이의 어깨를 작게 흔드는 게 느껴졌다. 르프로이는 눈을 감은 채 그 파리하게 질리고 마른 손가락을 느꼈다. 미스터 르프로이, 미스터 르프로이. 나직하게 속삭이듯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나앉았다. 몇 번의 부름 끝에, 목소리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톰.


르프로이는 눈을 떴다. 상황을 정리하고 온 모양인지 멀쩡해 보이는 로체스터가 서 있었다.


“다 끝났나요?”

“그렇소. 돌아가 다시 자요. 내일 오전에 아델의 수업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알겠어요….”

 

몸을 일으키자 그의 외투가 툭 바닥에 떨어진다. 르프로이의 몸을 바라본 로체스터가 몸을 숙여 외투를 주웠다. 그 마르고 판판한 등. 외투를 집는 기다란 손가락. 드러난 목. 로체스터가 다시 그의 몸에 외투를 덮어주었을 때, 르프로이는 몸을 돌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로체스터는 이전부터 르프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답지않게 조용하고, 조금 머뭇거리는 투로 입을 열었다.


“방금 일은… 정말 고맙습니다. 반드시 보답하지요.”

“무엇으로요?”


르프로이는 제게서 벗어나려는 그의 손목을 쥐었다. 로체스터는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시선은 바뀌어 있다. 르프로이는 그를 올려보는 게 전혀 거리끼지 않았다. 그를 내려보는 시선은 어둠에 가리어 조금 우울한 듯, 어쩌면 겁먹은 듯 보였다. 르프로이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저는 방금 그대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미스터 로체스터.”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어째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죠.”

 

로체스터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는 언젠가 보았던 깊은 호수의 물 같았다. 잔잔하고 고요한 수면의 깊이를 알아보려 얼굴을 바짝 가져가면, 코가 닿아 물결이 일었다. 언제 그토록 잠잠했다는 듯이 파동이 일었고 결국엔 집어삼켜 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그 물에 빠져든다고 해서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요,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두 알 수 없었다. 로체스터는 깊은 물의 눈을 갖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묻진 않겠습니다. 그렇다 해서 가르쳐줄 것 같진 않군요.”

 

르프로이의 말에 로체스터는 낮게 웃었다.


“정말이지…. 당신 같이 당당한 가정교사는 처음이군.”

 

내게 자비를 베푸는 투로 말하다니, 그저 잘라버리면 저택에서 쫓겨날 뿐인 주제에. 로체스터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르프로이의 뺨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토록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웠다. 르프로이는 눈썹을 들었다 내리며 웃었다.


“어쨌든 이 일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해드리죠.”

“글쎄요.”

“왜. 마음에 들지 않을까봐? 원하는 게 뭐지?”


르프로이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아주 어두워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마 내일보다도 지금 주어지는 게 맞을 텐데요.”

 

로체스터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로체스터보다 온도가 높은 르프로이의 체온이 점점이 번졌다. 로체스터는 르프로이를 바라보았다. 르프로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공기가 바싹 마른 사이로 새벽을 알리는 어스름한 빛이 천천히 들어온다. 로체스터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르프로이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긴장한 걸지도 모른다.


곧바로 르프로이는 손에 힘을 풀어 그의 손등에, 마치 숙녀를 대하듯,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로체스터는 말없이 그가 하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르프로이는 무릎을 숙이고 그에게 인사했다.


“좋은 밤 되시길, 에드워드.”

“…그대도.”


톰. 덧붙이는 제 이름을 들으며 르프로이는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이 서려 있었다.




“손필드 저택의 긴긴 겨울밤을 어찌 혼자 보내왔는지 말입니다.”

 

그건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라고 대답하려던 차에 르프로이는 느리게, 하지만 빠져나갈 틈 없이 로체스터에게 입술을 맞췄다. 마르고 얇은 그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벌린 르프로이의 입술 너머로 젖은 숨결이 넘어왔다. 혀끝이 로체스터의 입술을 가르고 적셨다. 로체스터는 그대로 멈춘 채 르프로이의 입술을 받았다. 거부하거나, 밀어내거나, 혹은 그의 목을 끌어안지도 않았다. 르프로이는 마치 한숨처럼 가볍게 그의 입술을 덮고선 숨을 내쉬고 혀를 섞었다. 그의 키스가 얼마나 상냥했는지는 오로지 로체스터만이 알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전 사랑들만이.


입술을 뗀 르프로이가 작게 웃었다. 젖어서 빛나는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는 로체스터를 향해 르프로이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때 로체스터의 손이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겼고, 르프로이는 그것을 어떤 신호로 여기듯 다시 그에게 끌려가 키스를 나누었다.




“미스터 르프로이.”

“미스터 로체스터?”


저를 찾아온 로체스터의 얼굴에 르프로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막 아델의 영어 수업이 끝난 직후였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휴식을 취하던 참이었다. 로체스터는 아델을 한 번 보고는 예의 표면적인 미소를 지어보인 후 손가락을 까딱여 보였다. 르프로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을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기다리렴. 아델은 기꺼이 그러겠다는 듯 로체스터에게 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고 로체스터는 대답 대신 르프로이가 제 앞에 오기까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일이죠?”

“따라와요.”


로체스터는 은밀하고 낮은 목소리로 르프로이를 앞서 걸어나갔다. 르프로이는 다소 당황한 얼굴로 아델을 한 번 돌아보고는 이내 그를 따라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진중함이 담겨 있었고, 표정 또한 진지했으며…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더 이상 르프로이는 함부로 로체스터를 어길 수 없기에까지 이른 것이 사실이었다.


“아직 아델의 수업이 안 끝났는데요.”

“아델의 수업은 내일 할 수도 있잖소.”

“지금 일은 내일 할 수 없다는 건가요?”

 

르프로이의 질문에 로체스터는 걸음을 멈추고 르프로이를 돌아보았다. 짧게 웃음을 머금은 표정을 르프로이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르프로이가 그의 곁으로 와 설 때까지 기다려준 로체스터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걸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긴 복도를 오로지 두 사람만이 걸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어떤?”


르프로이는 로체스터의 단정한 옆얼굴을 보며 가볍게 대꾸했다.


“지금 미스터 로체스터에게 키스한다면 허락해줄까… 하는.”

 

로체스터는 생각과 달리 태연한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아쉽지만 여기서는 안 되오.”

“아쉽다는 말에 주목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여기선 안 된다는 말에 주목해야 하는 건가요?”

 

르프로이는 가볍게 그의 팔꿈치를 잡는 로체스터의 얼굴을 보았다. 복도의 끝에는 계단이 있었다. 르프로이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위를 오르려 했다.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조차 되지 않았던 공간이 바로 이 성의 가장 높은 계단 꼭대기였다. 그가 만약 비밀을 말한다면 아마 그 답은 거기 있을 것이리라. 르프로이는 그것이 오늘이라 생각했고 로체스터는 그것이 당연한 착각인 양 그의 팔을 쥐고 아래로 이끌었다. 르프로이는 부드러운 손길에 로체스터를 한 번 바라보았다. 녹회색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리며 한 번 계단 위쪽을 바라보고는 다시 아래로 빠르게 돌아왔다. 거긴 길이 아니오, 이리로. 낮게 속삭이는 로체스터의 말에 르프로이는 다시 한 번 불가항력을 느끼며 그를 따라 아래로 걸었다.


“여기는…”

“얼른 올라타요.”

“하지만 미스터 로체스터, 난 아델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등을 떠미는 로체스터의 손길에 르프로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반쯤 마차 위에 오른 뒤였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저택의 앞에는 마차와 그것을 끌 말 두 마리, 그리고 마부가 대기하고 있었다. 로체스터는 르프로이의 허리를 감쌌다. 르프로이가 순간 몸을 굳혔지만 로체스터는 마치 아이를 안아올리듯 르프로이의 허리를 잡아 위로 올려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미스터 로체스터, 르프로이가 당황한 듯 막힌 목소리를 냈다.


“그 멍청한 아이는 분명히 우리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니면 페어팩스 부인이랑 놀고 있겠지. 우리가 신경쓸 바는 아니란 말이오, 미스터 르프로이.”


로체스터는 작게 신경질을 내며 르프로이에 이어 마차 위로 올랐다. 르프로이는 그에게 멋대로 저를 마차에 태운 것을 물어야 할지 아니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저를 들어올린 것을 물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젓곤 말았다. 그 모든 것을 물을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로체스터는 괴팍한 말을 한 뒤임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표정이었다. 출발해! 소리와 함께 마부가 말을 출발시켰고 덜그럭거리며 마차가 움직였다. 르프로이는 천천히 멀어지는 손필드 저택을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아주 아름다울 거야. 로체스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여길 오려고 한 거였습니까?”

“음.”


르프로이는 기가 막혀 작게 웃었고 로체스터는 턱을 괸채 르프로이를 올려보았다. 올려보았다는 것은 르프로이가 그보다 조금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하고 팔이나 제대로 벌려요, 미스터 르프로이. 남이 들으면 고압적이라 놀랄 말투였지만 르프로이는 그에게서 웃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르프로이뿐이었는지 오히려 그의 팔에 줄자를 대려던 재단사는 조금 놀란 얼굴을 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로체스터의 말이 당연히 그에게도 날아들었다. 자네는 제대로 치수나 재고. 르프로이는 허.. 웃고 말았다. 팔이 편했다면 얼굴을 가리며 웃었을 것이다.

 

“고작 옷 때문에 오늘 오전 수업을 그만두다니.”

“‘고작 옷 때문’이라고? 이곳은 손필드에서 가장 옷을 잘 만드는 곳이야. 그게 무슨 말이냐면-”

 

로체스터는 르프로이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르프로이는 로체스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재킷 안쪽에 감춰둔 종이 몇 장.


“그만큼 비싸단 뜻이지.”

“제게 갑작스레 선물이라도 하려는 맘이 들었습니까, 미스터 로체스터?”

“곧 겨울이 오고 있소, 미스터 르프로이. 비싸고 좋은 옷이 필요할 거요. 긴긴 겨울을 나려면….”


로체스터의 눈빛이 찬찬히 멀어졌다. 그는 지난한 겨울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오래된 건물의 해묵은 목재 냄새와 가느다란 선 모양으로 내린 햇살에 비친 먼지의 움직임 사이에 선 그의 모습은. 르프로이는 우뚝 선 로체스터의 얼굴을 보았다. 단정하고 금욕적인 얼굴. 기다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에드워드.”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안 되지.”


르프로이에게 대꾸한 로체스터는 가볍게 헛기침했다. 눈치가 빠른 재단사는 슬그머니 르프로이의 한쪽 소매에 핀을 둘러 꽂고는 잠깐 뭔가를 찾으려는 듯 허둥거리며 사라졌다. 불편한 자세로 양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르프로이가 마치 아이처럼 로체스터를 향해 팔을 벌렸다. 로체스터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팔 아래로 자리했다. 핀이 손목을 찌르지 않게 조심스레 로체스터의 어깨 위에 팔을 올린 르프로이가 그의 눈을 내려보았다.


“고집스러운 얼굴인데.”

“전 겨울옷을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만.”


로체스터가 르프로이의 얼굴을 올려본다. 고요한 푸른 눈. 로체스터는 자신에게로 천천히 기우는 그 하늘의 색을 보았다. 부드러운 브루넷이 이마를 스친다.


“선물이라고?”


핀을 주렁주렁 단 손목에 주의하며 르프로이가 뺨을 살짝 가져다 대었다. 로체스터는 거의 붙다시피 한 입술을 느리게 떼며 입을 열었다. 숨결이 로체스터에게서 르프로이로, 르프로이에게서 로체스터로 오갔다.


“틀려. 나는 선물 같은 걸 주지 않아, 미스터 르프로이.”

“그럼 뭐죠?”


붉은 르프로이의 입술이 로체스터의 얇은 것을 가볍게 물었다. 속삭이면 그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입술은 숨결로 축축하게 젖었다. 비스듬히 겹친 아랫입술을 르프로이가 살짝 물었다.


“따지자면 빚에 가깝지….”

“내게 당신의 빚을 온몸에 두르고 겨울을 내내 보내라는 건가요?”


르프로이의 말에 로체스터가 웃었다. 그 숨을 고스란히 삼킨 르프로이가 고개를 비틀며 입술을 빨아들였다. 젖은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로체스터는 눈을 감지도 않고 빤히 저를 관찰하는 푸른 눈을 보며 낮게 속삭였다.


“나는 이 입술보다는 내가 낸 수표를 믿으니까.”

“수표가 그대에게 이렇게 입맞춰주지는 않을 텐데.”

“도망가지도 않지.”

“내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 말에 로체스터는 천천히 몸을 뒤로 뗐다. 르프로이는 순순히 그를 내주었다.


“나는 뭐든 확실한 게 좋아. 미스터 르프로이. 그러니 싸구려 감성보단 비싼 원단으로 그대를 잡아두는 게 훨씬 효율적이란 걸 알지.”

“하지만 나를 잡아두려 하는 이유가 그 싸구려 감성으로부터 탄생함을 모르진 않을 텐데요.”


로체스터는 팔짱을 끼고 느리게 웃었다. 번들거리는 르프로이의 입술이 가늘게 벌어지며 비슷한 모양을 했다.


“역시 그대는 도가 지나치게 건방져.”

“제가 감히?”

“그대가 감히.”

“하지만 끝까지 부정하지 못하는 당신도 알죠.”


입술을 비틀어 올린 로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재단사가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들어왔다. 르프로이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말했다.


“하지만 미스터 로체스터, 아델의 겨울옷도 사야 할 겁니다.”

“그 애는 이미 옷을 많이 가지고 있어.”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울지도 모른다면서요.”


르프로이는 다시 재단사에게 팔을 내밀며 대꾸했다. 로체스터는 잠깐 멈춰선 다음 말을 뱉었다.


“밑의 가게에서 대충 사오도록 하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재단사가 소리없이 경악하는 얼굴을 바라본 르프로이가 웃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막 자리를 나설 때,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높고 조용조용한 음색의 목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로체스터. 격식을 차린 목소리에 안녕하세요, 숙녀분들. 하고 인사를 맞는 로체스터의 목소리가 이내 멀어졌다. 르프로이는 재단사가 허둥지둥 숙녀들에게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았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찾으세요?”

“오, 월더. 애쉬튼 양과 제 드레스를 조금 손보려고 왔어요.”

“지금 손님이 계시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숙녀분들.”

“좋아요.”


여인들은 분주히 걸음을 옮기며 안을 구경하는 듯했다. 나이 든 재단사가 눈썹을 살짝 모으며 다시 르프로이의 앞으로 와 섰다. 르프로이는 조용히 서서 자신의 손목, 어깨, 허리 등 치수를 재는 재단사를 구경할 무렵 여인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나가신 분을 보셨어요, 모드?”

“손필드 저택의 미스터 로체스터 아닌가요?”

“맞아요. 그 유명한…”


그녀들은 잠깐 말을 멈췄다. 시선을 교환하는 듯했다. 르프로이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재단사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안에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곧 잉그램 양이 다시 손필드를 방문한다는군요.”

“아. 미스터 로체스터를 잉그램 양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죠. 두 사람의 로맨스만큼 이 삭막한 손필드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겠어요?”


그 말에 르프로이가 잠깐 행동을 멈추었다.


“사실 로맨스랄 것도 없잖아요, 모드. 아직은 잉그램 양이 한창 그분께 구애중인 양상이니 말예요.”

“하지만 전 곧 그분이 잉그램 양에게 청혼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분도 싫어하는 티는 내지 않았잖아요?”

“하긴… 손필드 저택에 안주인이 너무 오랫동안 없었죠.”

“페어팩스 부인도 너무 나이가 들었고요.”

“잉그램 양도 그걸 아는지 제법 기대하는 모양이더군요.”

“그럴만도 하죠. 사실 잘 어울리는 한 쌍 아닌가요? 미스터 로체스터도 미남이신데다 잉그램 양은 말이 필요없는 미인이니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둘이 결혼한다면 아주 예쁜 부부가 될 거예요.”


여인들의 대화는 이내 새로 유행하기 시작하는 모자로 옮겨갔다. 재단사는 조심스럽게 줄자를 댔고, 르프로이는 말없이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의 눈은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나고, 여인들마저도 떠난 뒤에도 로체스터는 오지 않았다. 저택에서 사람이 도착해 그의 이름으로 값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은 한층 겨울이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도착한 르프로이가 들은 첫 번째 소식은 그가 떠났다는 것이었다.




“오, 이런. 죄송합니다, 부인.”

“괜찮습니다. 미스터 르프로이.”

 

르프로이는 작게 입술을 깨물며 페어팩스 부인이 자신의 치마 위로 흐른 차를 닦아내는 것을 보았다. 그의 미묘하게 날선 기운을 읽었는지 아델도 얌전히 발을 까딱이며 별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그는 이미 몇 번을 쓸어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흩뜨렸다. 차를 마시려다가 그가 방금 쏟았다는 것을 깨달은 르프로이가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페어팩스 부인은 이내 손을 냅킨으로 두어 번 닦고선 르프로이를 바라보았다. 르프로이는 시선을 모로 돌리며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미스터 로체스터는 항상 별말 없이 떠났다가 불쑥 돌아오곤 했으니 너무 걱정 말아요.”

“부인, 저는…”


르프로이는 말을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페어팩스 부인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청년의 눈을 가만히 살폈다. 그녀는 그가 돌아올 때 함께 가지고 왔던 비싼 옷을 기억해냈지만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아델이 삶은 달걀을 스푼으로 작게 두드리며 물었다.

 

“언제쯤 다시 오실까요? 크리스마스? 아니면 봄?”


소녀의 말에 르프로이가 저도 모르게 입을 작게 벌렸다. 페어팩스 부인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한 번 떠나시면 언제 오실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대체로 좀 긴 기간을 두시긴 하지. 하지만 이번에는 곧 돌아온다고 말씀하시긴 하셨단다. 지키실지는 모르겠지만.”

 

알다시피, 그분은 워낙 제맘대로잖아요. 페어팩스 부인이 덧붙인 말은 명백히 르프로이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필드 저택의 겨울은 너무나 싸늘해서 그분은 따뜻한 곳으로 피해 계실 때가 많았죠. 페어팩스 부인이 말하지 않은 행간은 어렴풋이 손에 잡힐 듯했다. 집어삼키는 싸늘한 추위로부터 도망가는 외로운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 먼저 일어나도 돼요?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싶은데.”

“제법 숙녀다운 말을 하는구나, 아델.”


페어팩스 부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아델이 르프로이와 페어팩스 부인에게 살짝 인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식당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놀랍도록 침묵이 내려앉았다. 르프로이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저도 일어날지 잠깐 고민했다.

 

“잠을 잘 못 잔 것 같군요, 미스터 르프로이.”

“그렇게 보였나요? 숙녀께 부족한 모습을 보이다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웃으며 받아치는 르프로이를 잠깐 바라본 페어팩스 부인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원래 없던 것은 그러려니 하지만, 있다가 없는 것을 보는 건 허전하지요. 나 역시 오랜 세월 미스터 로체스터를 모시며 그랬답니다. 괴팍하고 파악할 수 없는 분이지만서도, 그분이 떠나고 난 손필드 저택은 버려진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

 

르프로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페어팩스 부인은 제법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쾅쾅 울려대는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미스터 르프로이. 기다리는 것에.”


그 말에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페어팩스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아델을 가르치지만 여교사는 아니듯, 여기서 지내고 있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입장은 아닙니다. 저 또한 자유로운 몸이죠.”


저는 창밖을 바라보며 돌아올 날을 세는 여인과는 다르지요. 뒷말은 꺼내지 않은 르프로이가 다시 하녀가 채워준 차를 느리게 음미했다. 오랫동안 우린 차는 혀끝을 쓰게 맴돌았다. 르프로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잠을 제대로 못 잔 이유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커다란 괴한이 이 저택을 돌아다니는 듯한 소리가 나더군요.”

“그건,”

“사방의 벽, 복도, 천장에서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며 밤새 계속되었습니다. 듣지 못하셨나요?”


아마 그러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르프로이가 미소 지으며 페어팩스 부인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처럼 뒤집어진 상황에 그녀가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르프로이는 티스푼으로 볍게 차를 저었다. 그는 로체스터와의 일을 돌이켜 복도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가 그리 원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리를 들으면 로체스터와의 날카로운 입맞춤이 떠올랐다. 그것은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고 키스는 선명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몇 번이고 되살아났다. 그는 로체스터를 생각하며 흥분했다. 르프로이는 전혀 수치스럽지 않았다.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속눈썹에 맺히는 땀을 닦아내며 저와 비슷한 표정을 할 로체스터를 생각했다.


“그 소리는 마치 저만이 듣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누구도 나와보지 않았고,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미스터 르프로이, 그건…”


르프로이는 선명한 하늘색 눈을 빛내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페어팩스 부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숨겨진 말을 읽었다. 더 이상 그 소리의 출처에 대해서 보채지 않는 대신, 로체스터에 대한 말 또한 막아버린 르프로이가 의자를 가볍게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어팩스 부인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정리했다.


“그것에 대해선 제가 말씀드릴 권한이 없군요.”

“아마도 그것 또한 지금은 여길 떠나버린 분이 갖고 있겠죠.”


르프로이는 알고 있다는 듯 짧게 웃었다. 그분은 다시 돌아올 겁니다. 페어팩스 부인이 더욱 작은 목소리로 꺼낸 말을 들으며 르프로이는 식당을 나섰다. 돌아온다면 아직은 완전히 도망간 것이 아닐 테다. 그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권한, 페어팩스 부인이 한 말을 다시 읊으며 르프로이는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그런 권한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르프로이는 로체스터에게 직접 그 권한의 범위조차도 들어야만 했다. 욕심이라 해도 좋았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 갑작스레 비가 쏟아졌다. 완전히 겨울을 알리는 비라고 저택에서는 수군거렸다. 오후 수업을 쉰 르프로이는 페어팩스 부인의 요청에 따라 일손이 부족한 하인들을 도와 마른 장작이 젖지 않도록 안쪽 창고로 나르는 일을 했다. 겨울 대비가 한창인 손필드 저택의 색은 비로 인해 더욱 탁해진 느낌이 들었다. 어두컴컴해진 회색 하늘 바로 아래, 뒤로는 숲이 펼쳐진 손필드 저택의 모습이 음울하게 서 있었다. 몸이 척척하게 젖은 르프로이가 뺨과 속눈썹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톰, 얼른 들어와요!”



또랑또랑한 아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에서 마른 수건을 들고 기다리는 아델에게로 걸어가던 르프로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톰! 아델의 목소리가 비를 뚫고 희미하게 귀에 닿았다. 르프로이는 눈동자에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에 인상을 찡그렸다. 손필드 저택은 대체로 크고 아주 넓은 형태의 저택이었지만, 어쩐지 낯선 모습이었다.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르프로이는 뒤로 몇 발짝 크게 물러섰다. 저택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뭔가 깨달았다. 균형이 맞을 것처럼 보였던 저택의 한쪽은 마치 개조한 듯 뾰족하게 위로 솟아 있었다. 가늘고 길쭉한 첨탑처럼 튀어나온 작은 성은 그가 익히 봐왔던 저택의 구조와는 달랐다. 조그맣고 까만 창문이 달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작은 감옥 같았다. 개조했다면 무슨 목적으로? 르프로이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을 때, 그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고 휘청거렸다.


“톰!”


비틀거리던 르프로이가 쾅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감과 동시에 컹컹거리는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진다. 꺅하는 작은 비명소리와 함께 르프로이의 옆으로 크고 까만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몸을 돌린 르프로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파일럿?”

 

그것은 로체스터가 아주 아끼던 개였다. 르프로이는 자박자박하는 걸음소리를 들었다. 빗줄기가 퍼붓듯 거세져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았다. 습하고 묵직한 발걸음, 그리고 개가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에 르프로이는 억지로 힘을 줘 이미 젖을대로 젖은 소매로 얼굴을 닦아냈다. 어쩌면, 하는 그의 기대가 푸른 눈동자 속에서 반짝이며 빛났다.


“오, 너로구나. 개는 생각보다 오래 사는군….”


르프로이의 표정이 작게 굳었다. 까만 장우산을 펼친 남자는 제법 덩치가 큰 개를 익숙하게 쓰다듬었다. 개는 남자의 허벅지에 주둥이를 대고 킁킁거리며 반가운 시늉을 했다. 르프로이가 몸을 일으켰다. 엉망이 된 옷과 이미 차갑게 식은 몸에 오한이 들었다. 분명히 감기에 걸릴 것이다. 르프로이는 목을 가다듬고 목소릴 냈다.


“누구십니까?”


남자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그의 시선이 르프로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는다. 르프로이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그제야 남자가 그쪽으로 다가왔다.


“차림을 보아하니 저택의 하인은 아닌 모양이군요. 미스터 로체스터는 계십니까?”

“누구신지 물었습니다만.”


르프로이는 멋대로 목덜미에 붙는 셔츠깃을 떨쳐내며 딱딱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글쎄…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르프로이는 그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더 낮추었다. 그때 저택의 입구쪽에서 우산을 쓴 페어팩스 부인이 빠르게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치맛자락이 온통 흙탕물에 젖는데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황급하게 두 남자를 향해 달리듯 다가왔다.


“미스터 메이슨.”

“아, 페어팩스 부인. 오랜만입니다.”


페어팩스 부인이 난감한 얼굴로 잠깐 르프로이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지만 입을 열지도 않았다.


“지금 미스터 로체스터는 저택을 비우셨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심이…”

“이렇게 비가 오는데 말인가요? 비가 그칠 때까지만 저택에서 신세를 좀 져도 되겠습니까, 부인?”


부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떨렸다. 르프로이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로체스터의 개는 아직도 활기차게 남자, 메이슨의 근처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르프로이는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페어팩스 부인이 몸을 돌리며 먼저 저택으로 그를 안내했다. 르프로이는 다시 한 번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랗게 아가리를 벌린 괴물 같은 빗속의 손필드 저택이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술을 좀 합니까?”

“낯선 사람과는 하지 않지요.”

 

젖은 몸을 닦고 다시 응접실로 나갔을 때-그는 그래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페어팩스 부인 및 몇몇 하녀들이 너무나 불안한 얼굴을 했으므로 보호차원으로 나선 것이었다-메이슨은 제가 들고온 것인지 비싸 보이는 와인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르프로이는 재채기를 겨우 삼키며 거리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메이슨이 눈치를 채고 그에게 고갯짓을 했다.


“앉아요. 불안하게 왜 서 있고 그래요.”

“비가 곧 멎을 것 같아서, 배웅해 드리려고 합니다.”

“내가 보기엔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메이슨과 르프로이의 눈이 허공에서 잠깐 부딪쳤다. 르프로이는 시선을 물리지 않았고, 이윽고 피식 웃으며 메이슨이 다시 빈 잔을 채웠다. 그 또한 굳이 르프로이에게 술을 권하지는 않았다. 르프로이는 닫힌 문 너머로 페어팩스 부인이 불안하게 그 앞을 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남자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사람들의 반응으로 봐서는 어쨌든 로체스터를 자주 찾은 인물일 터였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무슨 일로 미스터 로체스터를 찾으십니까?”

“당신은 여기 가정교사로 왔다고 들었는데. 개인 비서가 아니라.”

“하지만 주인이 없는 저택에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을 맞을 의무가 있는 저택의 몇 안 되는 남자이기도 하지요.”

“불청객이라고?”


남자는 갑작스럽게 큰 웃음을 터뜨렸다. 종종거리는 페어팩스 부인의 발걸음이 뚝 멎는 것이 들렸다. 르프로이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남자를 노려보았고, 남자는 그것이 아주 우스운 말이라는 듯 한참을 웃었다. 오로지 이 저택에서 웃을 수 있는 권리란 그에게만 주어진 듯이. 남자는 로체스터와도 아주 달랐다.


“내가 불청객이라면 누가 이곳의 정당한 방문객인지 의문스럽군.”

“…미스터 로체스터는 저택을 잠깐 비우셨습니다.”

“아, 그래. 또 어딘가 불쑥 떠났겠죠. 그는 마치 방랑벽이라도 있는 것마냥 저택에 붙어있질 못하니까 말이야.”


르프로이는 어딘가 불편한 감정의 근원을 찾았다. 그는 마치 에드워드 로체스터를 매우 잘 아는 듯 굴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이는 아델이라는 여자애로 알고 있는데, 남자 가정교사라니?”


르프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을 읽은 메이슨이 무릎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킥 웃었다.


“내게는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여교사라도 불렀을 경우엔 얼굴을 살펴보려 했는데 말이야.”

“신붓감이라도 찾으신다면, 제가 그리 아름답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군요.”

“오, 나는 이미 결혼한 몸이오. 안타깝게도.. 아주 안타깝게도.”


메이슨 가의 자녀들은 모두 결혼해서 집을 떠났지.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여교사를 보려 한 이유는 미스터 로체스터 때문이지.”


르프로이는 맥을 잡지 못하고 순간 의아한 표정을 내비쳤다. 그제야 메이슨이 재미있다는 얼굴을 했다. 르프로이는 그에게 무엇인가 물으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기침이 다시 한 번 가슴안에서 풀썩거리며 날뛰었다. 금세 몸이 차갑게 식었다. 시야가 조금 어질거렸다.


“이유가 듣고 싶소?”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로 물을 땐, 어쩐지 전혀 궁금하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은 욕구가 들지요.”

“내가 그런 얼굴을 했다고? 그럴 리가.”


메이슨은 씩 웃었다. 르프로이는 빠르게 몸안의 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을 한다면 미스터 로체스터가 날 찾아와 죽이려 들지도 모르지.”

“그 말을 굳이 해가며 그의 비밀을 과시하는 건 신사로서 그다지 현명한 처사가 아니군요, 미스터 메이슨.”

“비밀이라. 단어를 잘 썼군. 당신은 비밀이 있습니까, 미스터 르프로이?”


르프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마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곧 온몸으로 퍼질 것이다. 그는 그렇게 몸이 허약한 편은 아니었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과 쌓여온 근심이 병을 일으킨 것일 테다. 그렇다면 그의 병은 단순한 감기가 아닐 것이요, 나을 수 있는 방법은 달리 없었다. 비밀을 가진 이가 돌아올 때까지.


“비밀이란 마치 아름답고 은밀한 것처럼 들리지만…”


메이슨의 목소리에 르프로이는 어쩐지 그가 옷장 깊은 곳에 숨겨둔 겨울옷을 떠올렸다. 로체스터의 서명이 적힌 수표와 맞바꾼 그의 빚. 선명하게 살아나는 감각이 있었다. 입술, 맞닿은 체온,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


“아주 끔찍하고 또 괴로운 것이기도 하지.”


르프로이는 참지 못하고 기침을 토했다. 쿨럭이는 그의 수그린 등을 보던 메이슨의 얼굴은 어딘가 표정이 없어 섬뜩한 기분을 주었다. 메이슨이 낮게 웃었다.


“당신은 에드워드 로체스터가 단순히 손필드의 겨울을 싫어해 저택을 떠나는 것 같소?”


르프로이는 실례의 표시로 가볍게 묵례한 다음 그의 말에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더욱 기분이 나빠진 탓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메이슨은 빗소리가 거센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그는 이 저택의 비밀을 두려워해 도망가는 것뿐이야.”


비밀이란 모름지기 겨울보다 사납고 차가우며, 밤보다 어둡고 기니까 말이오. 메이슨은 르프로이의 얼굴을 보았다. 기침을 참고 있는 르프로이의 얼굴이 조금 괴롭게 물들었다. 푸른색 눈이 메이슨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잠깐 그 시선을 받았다. 입을 열려고 할 쯤, 르프로이가 방금까지 기침을 하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비가 멎었군요, 미스터 메이슨.”


메이슨은 창밖을 보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르프로이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몸을 돌린다. 비틀거리지도 않는 그 꼿꼿한 자세를 바라보며 메이슨은 와인을 한 잔 더 따랐다. 그리고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산을 집어들었다. 어차피 그는 로체스터가 없는 손필드 저택에는 볼 일이 없었다. 전혀 없었다….


문을 나선 르프로이는 몇 발짝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벽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졌다. 서성거리던 페어팩스 부인이 놀라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가물거리는 시야로 보였다. 입술이 하얘지도록 꽉 깨문 르프로이가 곧 저를 부축하러 오는 하인들을 보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정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지만 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비밀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는 로체스터의 모든 비밀을 원하는가? 곧 시야가 흐려졌다. 눈 아래가 뜨거웠다. 르프로이는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에 무엇이든 움키려 했다. 허우적거리는 그의 허리를 누군가 안았다. 르프로이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기침처럼 터져나오려는 이름을 뱉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이름 자체가 비밀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손필드 저택의 겨울이 매서운 비바람으로 몰려와 르프로이의 정신을 아득하게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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