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촉이 꽤 좋은 편이었다.

여기서 누군가 마주치겠구나 하면 마주쳤고, 느낌이 좋지 않아 피해 간 곳에선 후에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정확도 80%를 자랑하는 내 직감에 감탄한 친구들은 이것저것 묻곤 했는데, 주로 성적 아니면 연애에 관련된 일이었다.

덕분에 이렇다 할 연애 경험 하나 없이, 지식 IN 태양신 뺨치는 연애 지식을 탑재할 수 있었다. 고3이 되었을 땐, 합격 여부에 대해 의논하려는 친구들로 우리 반 교실 후문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 그때 정시생임에도 불구하고 문 바로 옆, 맨 뒤 자리를 배정받은 건 전교생을 통틀어 내가 유일했을 거다.

안타깝게도 촉은 오래가진 못했다. 약발이 떨어지는 것 마냥 사라져버리더니, 도통 돌아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 덕분에 예전 같으면 3초 안에 결정하던 성격이 신중하고 우유부단하게 바뀌어버렸다. 관련된 정보 없이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나였는데, 8년 동안 집 나갔던 촉이 돌아온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쩐지 쎄하다 싶을 때 관둘걸.

 



* * *



 

“일단 이거 받으시고요.”

“감사합니다.”

 

내민 두 손 위로 ‘인수인계’ 네 글자가 적힌 두꺼운 책자와 사원증이 올려졌다. 내가 드디어 취직하는 날도 오긴 하는구나. 지방이긴 하다만, 그래도 4년제 국립대를 나왔고 토익 920점에 어지간한 자격증도 다 있었다. 아마 집안에서 밀어줄 재력과 시간만 있었다면 회계사나 세무사, 둘 중 하나에 도전해 볼 법도 했다. 아니면 증권 쪽으로 나가서, 증권맨 전정국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꽤 잘난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무슨 심즈도 아니고 취준생 중에는 나 같은 놈들이 수두룩 빽빽이었고, 덕분에 지원하는 족족 낙방이었다. 그래도 서울 가면 연봉 100~200은 더 받을 수 있을 거란 말에 무작정 상경한 지 딱 두 달 되는 시점이었다.

 

“연봉은 면접 때 들으셨을 테고... 추가로 상여금이 있어요. 떡값이랑 휴가비 같은 거요. 월차는 법이 바뀌어서 근무 한 달 이후부터 발생될 거예요.”

 

부산에서 신입은 꿈도 못 꿀 그런 액수와 괜찮은 사내 복지,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사원증까지. 어서 빨리 지친 얼굴을 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간 포션 삼아 빨고 싶었다. 귀하디귀한 이 사원증은 애물단지 마냥 바지 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고 싶기까지 했다.

 

“자리는 이쪽이에요. 여기 바로 옆자리가 정국 씨 사수가 될 김 대리님 자리고요.”

 

별생각 없는 나와 다르게, 인사 담당자는 꽤나 머쓱한 모양인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런 일이 흔한 건 아닌데, 개인 사정으로 급하게 반차 신청을 했더라고요. 아까 드린 거 보면서 기다리시면 곧 올 거예요. 점심때 맞춰 오시지 않을까 싶네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저기... 여기 있는 내용은 모두 외워야 하나요?”

“뭐, 외우면 편하기야 하겠죠.”

 

경영학 개론 전공 책 뺨치게 두툼한 두께 때문에 놀라서 물어본 건데, 아무래도 저 사람은 날 되게 성실하고 열정 가득한 신입으로 본 모양이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걸 어떻게 외우라는 건지, 원.

요란한 모닝콜 소리에 눈을 뜬 게 7시였는데, 시곗바늘은 어느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와서 한 거라고는 담당자를 기다리거나, 인사 담당자가 줄줄 읊는 말들을 바쁘게 주워 담거나, '네, 네' 하는 맞장구가 전부였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뭐 도와드릴 거 없나요? 하고 묻는 신입이 그렇게 예쁘다더니 다 틀린 말이었다. 물어볼 틈을 줘야 말이라도 붙여볼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다들 퀭한 눈을 하고도 쉴 새 없이 일하는 중이었다.

짧은 바늘은커녕, 긴 바늘마저도 세상에서 제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죽하면 고장 난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모니터 속 시간과 휴대폰 시계를 번갈아 가며 확인하기도 했다. 시간 존나 안 가네. 차라리 할 일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도 없이, 재미 하나 없는 인수 교육 자료나 휘-휘- 넘기려니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럴 거면 딴짓이라도 하게 해주지. 애꿎은 까만색 모나미 볼펜을 입에 넣고 연신 잘근잘근 씹었다. 혹 누군가가 보면 미친놈으로 착각할 것 같다는 걱정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빼긴 했지만.

 

“그나저나 김 대리 괜찮겠지?”

“카더란 데 뭘. 진짜면 회사에 연락했겠지.”

“그 사람 원래 자기 얘기 잘 안 하잖아.”

“그래도 그렇지. 다른 것도 아니고 경조사를 말 안 했겠어? 심지어 장례식이면 회사에서 이것저것 보내주는 거 뻔히 다 알 텐데?”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모상이면 말했겠지.”

 

어디선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파티션을 넘어 내 귀까지 흘러들어왔다. 김 대리라는 호칭이 흔하긴 하다만, 저들이 말하는 김 대리는 내 사수일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속닥거린다는 건 뭐 굳이 묻지 않아도 뻔하다. 내가 쪼르르 가서 일러바치지 못할 걸 아니까 그런 거겠지. 직장엔 어른만 있는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더 듣고 있자니 거북하고, 그렇다고 내가 저들에게 눈치 줄 짬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헛기침을 큼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순순히 자리를 비워주자니 영 아쉬웠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이 있는 거로 추정되는 자리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전 정국입니다.”

“…아, 네네. 안녕하세요.”

 

그들은 겁먹고 제 목을 한껏 집어넣은 자라 마냥,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신입 주제에 이렇게 나올 거라 생각은 못 했던 건지, 둘 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버버 거리는 표정이 꽤나 볼만 했다.

 

“제 사수 분께서 아직 안 오셔서 그러는데요.”

“김 대리요…?”

“흡연 구역이 어디에 있나요?”

 

마음 같아서는 두 분 성함과 직급이 어떻게 되느냐 묻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직장에선 입 꾹 다물고 들어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해야 좋다는 게 형의 가르침이었다.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더니 잔뜩 긴장했던 둘의 어깨가 차츰 내려가는 게 보였다. 아마 내 표정을 보고 전달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겠지. 굳이 전달할 생각이 없긴 했다. 아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싫고, 좋지도 않은 얘기 전달하는 운반책이 될 생각도 없었다.

흡연 구역만 알려주면 될 텐데, 그들은 굳이 친절하게 강 대리와 서 대리라며 자기소개를 덧붙였다. 그래도 덕분에 아는 사람만 아는 흡연 구역을 알게 되었으니, 오늘 뒷담은 봐주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알려준 곳은 옥상도, 1층도 아닌 애매한 5층이었다. 게다가 옥상과 1층에 비해 흡연 구역이 좁은 탓에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런 덕분에 사람이 몰리지 않아서 담배 냄새와 연기가 덜하다는 게 장점인 곳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작은 아이코스 기계와 담뱃갑이 한 손에 쏙 들어왔다. 기계에 담배를 끼워 넣고 전원 버튼을 한 번 더 가볍게 누르자, 이내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담배라는 게 잠시 쉴 수는 있어도 끊을 수는 없는 거라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애초에 피우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건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나마 연초는 끊어보겠답시고 시작한 게 이 전자 담배였다. 건강은 모르겠다만, 줄 담배를 하려야 할 수 없다는 점과 냄새라도 덜 나는 거에 나름대로 만족 중이었다. 깊게 빨아들인 연기를 내뱉자, 연초만 못한 연기가 위로 솟구치다 얼마 못 가 흩어졌다.

 

“죄송하지만, 라이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등 뒤에서, 그럴 리 없겠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애당초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는 들렸지만, 맞담배 하는 모양새가 꽤나 멋쩍어서 굳이 뒤돌아 확인하진 않았다. 그저 저 사람에게선 향 피울 때 나는 냄새와 머스크 향이 뒤섞여 있다고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등을 돌리고 있으니, 당연히 연초 태우는 거로 생각한 게 분명했다.

 

“제가 연초가 아니라… 어...”

“…...”

“…...”

 

전자 담배를 보여주면 쉽사리 이해하겠거니 생각해서 돌린 고개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얼어버렸다. 꼭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돌처럼 굳어버린 많은 사람들 중 하나처럼 말이다. 참으로 허무맹랑한 소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겪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때 이후로 시간이 많이 지났고, 쉴 새 없이 색이 바뀌던 머리칼이 새까맣게 변했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라이터 없으시겠네요.”

“…김태형. 맞지.”

“네. 제가 김태형인데,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더 볼일 없다는 말투로 황급히 나가려는 김태형을 불러 세웠다. 입꼬리를 올리며 친절하게 말하는 것과 다르게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저를 왜 부르는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으면서, 김태형은 제 손목을 연신 매만졌다.

 

“왜 나 처음 보는 척해?”

 

어딘가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인 거, 내가 까먹었을까 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이 세상에 김태형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만큼이나 잘생긴 얼굴도 살면서 딱 한 번 봤는걸. 그럼에도 김태형은 단호한 어투였다. 그렇다고 곧 죽어도 잘못 봤다며 우기는 사람을 더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길바닥이었으면 모를까, 회사 첫 출근 날부터 임직원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김태형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신 입을 꾹 다무는 거로 내게 더 붙잡고 있을 의지가 없다는 걸 보였다. 내가 놔주기 무섭게 김태형은 빠른 걸음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미친놈으로 보였다면 보통 뭐 하는 놈인가 싶어서 한 번쯤 되돌아볼 법도 한데, 김태형은 정면만 바라보고 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만치 걸어가는 걸 바라보기만 할 게 아니라 어느 부서인지, 직책은 뭔지 물어볼 걸 그랬다. 등신 같은 내 태도가 답답해서 김태형이 사라진 곳을 보며 준비된 담배를 빨아들였다. 깊게. 폐 구석구석까지 연기가 닿도록, 더 깊게 들이마셨다.

 



* * *



 

“꽤 절절한 사랑이었지.”

 

남준이 형이 구두 앞굽으로 담배꽁초를 지지며 말했다. 날이 어둑한 탓에 얼핏 보면 까만색 같지만, 형이 신고 있는 건 꽤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갈색 구두였다. 형의 반질반질한 구두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알싸한 담배 향이 차가운 저녁 공기와 뒤섞여 들어왔다. 형이 피우는 담배가 멘솔 향이라서 그런 건지, 겨울이 성큼 다가온 날씨 탓에 공기가 차가워져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차갑고 알싸한 공기 내음은 과학 시간에 배운 순서대로 호흡 기관을 차례차례 지나, 종착역인 폐까지 들어섰다. 차가운 게 가슴 안쪽 이곳저곳을 제멋대로 들쑤시고 다니는 탓에 꽤 시렸다.

 

“아니거든요.”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기 무섭게, 연신 손가락으로 장난치고 있던 담배가 부러졌다. 아 살살 좀 할걸. 남준이 형이 돛대지만 너니까 특별히 준다며 내민 거였다. 형에게 돛대라는 건 어디까지나 지금 이 담뱃갑을 기준으로 한 거라, 가슴팍에 한 갑이 더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부러진 연초를 들고 있던 손을 스리슬쩍 등 뒤로 감추었다. 그리고는 대충 형이 안 보일만 한 곳으로 툭 던져버렸다. 혹여나 들킬까 싶어서 금방이라도 너스레 떨 모양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다행히도 형은 못 본 모양이었다. 남준이 형은 뿌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고 나서야 하던 말을 이어갔다.

 

“국아, 너 그때 마신 술이 얼만지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알지?”

“형이 대신 내준 술값 진즉에 다 갚았잖아요. 그리고 내가 술 먹고 진상 부린 건 밥 사고, 술 사면서 갚았는데요.”

“원금은 갚았을지 몰라도 이자가 남았잖아. 내 호의는 고리대금이야.”

 

8년 전 일이긴 하지만 형이 꽤 고생하긴 했던 터라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입이 열 개는커녕, 백 개여도 할 말 없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래도 밥이고 술이고 꽤 많이 샀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 정도로 퉁 쳐줄 순 없는 건가. 아주 약간, 치사하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남준이 형은 오른손을 정장 바지춤에 대충 쓱쓱 문질러 닦았다. 뭐가 묻어있지 않아도 꼭 흡연의 마무리는 손을 닦는 거로 마무리 지었다. 물티슈나 손수건에 닦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것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니까.

형은 내내 여미고 있던 코트를 벗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 문을 열자, 차갑고 시린 알싸한 냄새 대신 불 냄새가 훅 끼쳤다. 가게 한쪽 귀퉁이에 잡아 놓은 우리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자, 물끄러미 휴대폰만 들여다보던 윤기 형이 고개를 들었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거 봐서는 그새 담배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은 모양이다. 우리 엉덩이가 의자에 채 닿기도 전에 윤기 형은 내내 쥐고 있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잔소리했다.

 

“새끼들 빠져가지고.”

“형 요즘 세상에 그런 말 하면 꼰대 소리 들어요.”

“저 형이 그런 거 신경 쓸 사람이냐? 그리고 꼰대인 거 스스로 잘 알 텐데 뭘.”

“남준이가 옳은 소리 좀 하네.”

 

꼰대네 뭐네 해도 윤기 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본래가 마이웨이, 독고다이 기질이 강한 사람이었다. 니들이 뭐라고 씨불이든 말든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사고방식의 사람인데 고작 이런 거에 상처받을 리가. 남준이 형이면 또 모를까.

열심히 금연 중인 사람한테 같이 피자고 하는 것만큼 쓰레기가 없다길래, 둘이 나갔다 왔더니 이건 이거대로 싫은 모양이다. 남준이 형에게서 물씬 풍기는 담배 향 때문에 꽤 힘든지, 윤기 형은 제 앞에 놓인 상추를 집어 입에 쑤셔 넣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우적우적 씹어 먹는 모양새가 꽤 웃기지만, 목덜미에까지 붙여 놓은 금연 패치가 보이는 탓에 꾹 참기로 결정했다.

이제 겨우 금연 3일 차인, 헤비스모커였던 윤기 형은 애꿎은 곱창을 뒤적거렸다. 하루 온종일 사탕이나 젤리 같은 거 입에 달고 다니기도 질렸겠다, 나름 바꾼 종목이 곱창이었다.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기발하다고 해야 할지 한참의 고민 끝에 나온 술자리였다.

 

“하루 종일 김태형만 들여다봤겠네.”

“형 같으면 집중이 되겠어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김태형이 8년 만에 나타났는데. 국아, 형은 이해한다.”

 

시큰둥한 윤기 형의 말에 남준이 형은 제 일이라도 되는 것 마냥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대꾸했다. 군대에 있을 때 헤어진 여자 친구가 잠수 탄 거, 그거 절대 아니라더니. 저렇게까지 이입하는 거 봐서는 100% 맞는 거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저렇게까지 성을 내겠어. 형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물기가 촉촉한 상추 위에 잘 익은 곱창과 순대, 그리고 당면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안으로 와앙, 밀어 넣었다.

8년 전에도 그리고 오늘 흡연실에서도 조용히 사라졌던 김태형은 또다시 마주친 건 내 자리에서였다. 정확하게는 내 바로 옆자리. 사수가 될 김 대리님이라더니, 그게 김태형이었다. 제 후임으로 누가 올지 몰랐던 건 김태형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당황한 기색도 잠시,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김태형 대리입니다.

그 뒤로는 형들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렸다. 바로 옆에 김태형이 앉아있다는 사실에 집중 못 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루 종일 들여다본 건 아니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의자까지 돌려놓고 하루 종일 뚫어지라 쳐다보고 싶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입사 첫날부터 꼬리표 달고 다니고 싶지는 않은 탓에 꾹 참아야 했다. 네가 아는 그 사람이 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한테, 뭔 핑계를 대가며 바라봐야 할지 애매하기도 했고.

 

“김태형 얼굴은 그때랑 똑같고? 형 기억나요? 옛날에 걔가 경영대 왕자님이었잖아요.”

“똑같으니까 전정국이 알아봤겠지.”

“머리 색 까맣고, 키 조금 더 컸고, 몸은 좀 더 좋아졌고. 그거 말고는 다 똑같아요. 나 하마터면 8년 전으로 돌아간 줄 알았잖아요.”

“새끼 오바 하기는.”

 

내 말에 윤기 형이 어이없다는 듯 설풋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주 조금 올라간 입꼬리는 이내 형이 들어 올린 소주잔에 의해 가려졌다. 윤기 형은 티끌 하나 없이 맑은 소주를 제 입으로 한 방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근데 김태형이 경영대 왕자님이면 저는요? 나도 입학했을 때 잘생겼다고 다들 난리였는데! 뭐야 기억 안 나요?”

“너 잘생긴 건 아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재수 없다, 국아.”

 

질색하며 대꾸하는 남준이 형을 슬쩍 흘겨봤지만, 형은 얄밉게도 노릇하게 잘 익은 곱창을 쏙 집어 먹었다. 형들의 대답을 기다리며, 이번에도 한가득 싼 쌈을 입안으로 꼬깃꼬깃 힘겹게 밀어 넣었다. 그런 모양새를 싫어하는 윤기 형의 못마땅한 눈초리가 따가웠지만,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좀 더 반대편으로 돌리며 애써 피했다. 일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퇴근 직후라 배고파 죽겠는데 어쩌겠는가. 입안을 가득 채운 쌈을 씹고 있는데, 그새 입안을 비운 남준이 형이 말을 이어갔다.

 

“김태형이 왕자면, 너는 라푼젤이었지. 그럼 전푼젤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국푼젤?”

“둘 다 싫어요.”

 

보나 마나 어느 쪽이든 결정하는 순간, 오늘부터 당분간은 그렇게 불릴 게 분명했다. 전푼젤이고 국푼젤이고, 뭐 하나 눈곱만큼이라도 더 나은 게 없었다. 태푼젤이면 좀 괜찮을 것도 같은데.

 

“근데 너 라푼젤 맞아. 아는 줄 알았는데 몰랐어? 우리가 너 라푼젤이라고 부르고 그랬는데.”

“라푼젤 그거죠? 머리 엄청 길어가지고, 성에서 머리 늘어뜨려 주는 공주님. 맞죠?”

“엉. 그거 맞아. 머리 노란 애.”

 

형들은 본인 입안에 있는 곱창이 사라질 때마다 내 물음에 대꾸해주었다. 이게 무슨 핑퐁도 아니고. 요상한 방식의 티키타카였다. 말하는 거 봐서는 남준이 형 말대로 나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남준이 형은 비워낸 소주잔을 뒤집어엎더니, 그 위에 아주 작은 상추 쪼가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제일 처음에 깐 소주의 뚜껑을 놓았다. 형은 은색 쇠젓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김태형이 소주 뚜껑, 너는 이거.”

 

쇠젓가락이 툭 건들자, 고작 그 정도 바람에 작은 상추 쪼가리가 휘날려 슝 하고 날아가 버렸다. 예상치 못한 모양새에 남준이 형은 살짝 당황한 건지, 괜한 헛기침을 했다. 어흠, 크, 큼. 와중에 연기는 또 어찌나 발연기던지. 하여간 공부랑 일 빼고 다 못하는 형이다.

 

“그리고 이 소주잔은 한지수.”

 

윤기 형이 손끝으로 소주잔을 툭 치며 말했다. 돌연 등장한 구 여친의 이름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이더라. 김태형이 돌연 사라지고 난 직후에 헤어졌으니, 자그마치 8년 만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사이 주제에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려는 건 아니지만, 간략하게 말해보자면 괜찮은 친구였다. 첫사랑은 아니지만, 첫 연애 상대였고, 더불어 내 첫 키스 상대였다. 그 뒤는 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내 눈치를 살피던 남준이 형은 눈을 흘기며 윤기 형을 바라봤지만, 형은 잔에 남아있던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을 뿐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못 잊은 탓에 흘겨본 건 아니었다. 그땐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사람인데,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거에 스스로 놀란 탓이었다.

 

“너네 3년 정도 만났지?”

“얼추… 그쯤 될걸요? 근데 형은 왜 갑자기 남의 전 여친 얘기를 꺼내고 그래요. 분위기 이거 어떡할 거예요.”

“분위기 싸해진 건 김태형 얘기 꺼낼 때부터였어, 인마.”

 

순대 곱창 몇 점을 제외하고는 싹싹 비워진 불판 위로 볶음밥이 올라왔다. 까만 앞치마를 착용한 남자 알바생은 쌍 주걱을 들고 이리저리로 밥알을 휘휘 뒤섞기 시작했다. 앳되게 생긴 알바생은 아마 기껏해야 22살 남짓 되어 보였다. 내가 딱 저 나이일 때 김태형을 만났던 거 같은데. 세상 물정 모르고 좋아 죽겠다며 덤벼들던 대학교 3학년 전정국은, 어느새 30살 신입사원 전정국이 되어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존나 징그럽다. 평생 20대일 줄로만 알았는데, 첫사랑을 호되게 치르고 나니 앞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22살 전정국과 24살 김태형이 아닌, 30살 전정국과 32살 김태형이라니. 우리 나이 먹으면 같이 실버타운 가서 원피스도 보고, 슈퍼 마리오 게임도 하면서 놀자고 했던 적은 있었다. 다만 그사이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원래 먼 미래는 낭만적으로 들려도, 가까운 미래는 그리 썩 낭만적이지 못한 법이니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 차일 만 했어. 국아, 이건 형이 너 아끼는 마음이랑은 별개다. 알지?”

 

남준이 형은 제 호의는 고리대금이니 비싸게 치러야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는 갑자기 홀랑 구 여친 편을 들었다. 내가 연애 중일 때도 걔랑 제대로 몇 마디 나눠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대답하는 대신 가자미 눈으로 형을 흘겨보자, 맞은편에서 볶음밥만 바라보던 윤기 형이 나를 대신해서 대꾸했다.

 

“김남준 또 뭘 모르는 소리 하네. 야, 전정국이 찼어. 그것도 아주 눈물 콧물 쏙 빼면서.”

피멜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