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에게 지친 상태였다. 남자친구는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하고 싶어 했고 나는 아직 내 나이가 결혼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3년을 만났는데도 이 남자와 결혼해도 되겠다 단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어 더 망설였던 거 같다. 그렇다고 헤어지기엔 싫어할만한 이유가 (결혼을 조르는 것 말고는) 없는 거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조차 귀찮았다. 상대방이 내게 질려서 떠나주기만을 바랐다.

좋아서 사귄 건 맞는데 사귀다 보니 애정이 나날이 식었다. 상대방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새로울 것 없는 연애에 설렐만한 순수함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나의 행동에 내 오랜 연인은 지쳐버렸다.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알겠다고 했고, 그는 떠났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냥 이렇게 끝나나 보다. 3년 별거 없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를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여심을 저격하는 대사로 시청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는데 글쎄, 난 모르겠다. 어느 부분에서 설레야 하는 건지. 두근거리는 게 뭔지조차 까먹었다. 부장님에게 보고서 검사를 받으러 갈 때가 수천 배는 더 설레는 거 같다. 26살의 봄. 내 봄날은 그렇게 다 끝나버린 것 같았다.

쓰레기나 버리고 오자. 소파 주면에 널브러져 있는 맥주캔들을 비닐봉지에 주워 담았다. 쓰레빠를 끌고 터덜거리며 자취방 계단을 내려왔다. 현관 센서등이 고장 나서 주변이 깜깜했기에 계단을 밟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심장이 뛴다. 넘어질까 봐 말이다. 어이가 없어서 짧게 웃었다. 밖으로 나와 재활용 박스에 한껏 구긴 맥주캔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빌라 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각인데 주변은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괜스레 외롭다. 오랜만에 엄마한테 전화나 해볼까. 다른 지역에 사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동네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경비 아저씨가 다였다. 여기서 아는 사람이라 함은 형식적으로나마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라는 뜻인데 이사온 지 2년이 넘었음에도 경비 아저씨하고만 안면을 텄다. 그것조차 살갑지 않았고 눈이 마주치니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날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굉장히 희박했다. 게다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저음의 남자라면 난 뒤도 쳐다보지 않고 집으로 냅다 뛰어가는 것이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어제만 해도 뉴스에서 20대 여성이 귀갓길 집 앞 골목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웃기게도 고개를 돌렸다.

우뚝 서서 멍하니 쳐다보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가

"여주 누나에요?"

내 이름을 부르고,


"뒷모습이 너무 여주 누나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렀는데. 진짜 여주 누나다."

날 부르는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으니까.











"재현이???"

"네. 재현이에요."

"재현이시라고요? 그쪽이요? 재현이요? 이우주 친구 재현이요??"

"네. 맞아요. 우주 친구 재현이요. 우주는 잘 지내요? 이사 가고 한 번도 못 봤어요."

"아니.... 어떻게..."

"누나는 잘 지냈어요? 이사 가고 한 번도 못 봤잖아요."

"......"

"오랜만에 봐서 너무."

"......"

"반갑습니다."

불쑥 몸을 숙인다. 가까워지는 얼굴에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상대방이 오히려 사과를 해온다. 심장이 심하게 뛰는 탓에 숨까지 골라야 했다. 운동장을 몇 바퀴 뛰다가 멈춰 선것 같다.











재현이는 이우주, 그러니까 내 남동생의 친구였다. 내가 스무살 때 처음 재현이를 봤으니 재현이는 그때 14살 이었을 거다. 이우주와 나는 6살 터울의 남매니 말이다.

난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우주가 공부를 심하게 못하다 보니까 주말마다 부모님에게 등 떠밀려 이우주의 공부를 봐주곤 했다. 그때 우리 집에 놀러와 같이 수업을 듣던 애가 있었는데,


'우와. 여주 누나는 진짜 모르는 게 없는 거 같아요.'

걔가 바로 재현이다.

하얗고 귀엽고 예의 바른 중학생. 내 기억의 재현이는 그랬다. 또래(내가 아는 14살이라고는 이우주가 전부였지만)와 다르게 너무 착해서 오래 기억에 남았더랬다. 1년도 지나지 않아 이사를 갔는데 그 후에 이우주가 데리고 오는 남자애들이 하나같이 예의 없이 굴어서 내가 더 재현이를 그리워했다. 이우주한테 '재현이 같은 친구 좀 사귀어봐!' 하면서 혼내던 게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렇게 6년을 껑충 뛰어넘어 다시 만났다. 나는 조금 세상에 지친 얼굴을 한 것 말고는 변화가 없는데 재현이는 너무, 많이 변했다. 정말 못 알아볼 정도로.







"아.. 재현아. 진짜 반가워. 되게 오랜만이다. 그치? 어떻게 여기서 만나지..?"

"제가 며칠 전에 이 빌라로 이사 와서 그런가 봐요."

"너 여기로 이사 왔어?"

"네. 저 5동에 살아요."

"아.. 진짜? 그렇구나."

"누나는요?"

악의 없는 눈동자가 날 바라보고 있다. 정말 단순한 궁금증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는 바로 옆이야. 6동."

"우와. 가깝다."

"그러네. 되게 가깝네."

"저 학교가 이 근처라서 여기에 자취방 잡은 거예요."

물어보지 않은 질문들에 착실히 답을 내놓는다. 그렇게까지 궁금하던 건 아니었지만 친절한 답변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학교? 아.. 너도 대학생이겠구나. 맞아. 우주도 얼마 전에 입학했거든."

"한국대학교 1학년이요. 경영학과."

검지로 1을 그리며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과한 친절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6년 만에 만난 남동생의 친구 치곤 지나치게 편한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한국대학교 경영? 너 공부 진짜 잘했나 보다. 와...."

"우와. 내가 공부 잘했나 보다. 우와..."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한다. 어이없다는 듯 웃으니 저도 따라웃는다. 길에서 주인 잃은 강아지 만난 기분도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다 쓰레빠를 신은 내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급히 고개를 들었다.


"나 이만 들어가 볼게. 라면물을 끓여놔서."

"라면물이면 엄청 급한일이네요. 보내드릴게요."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이기에 뭐야아 말꼬리까지 늘어뜨리며 웃었다. 재현이랑 대화하다 보니 자꾸 웃음이 난다. 3년 사귄 남자친구에게 차인지 겨우 일주일 지났는데 지나치게 즐거웠다. 상대방이 너무 잘생겨서 그런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다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주책이 따로 없다.

볼을 부여잡으며 대충 마지막 인사를 중얼거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재현이가 따라온다.


"어디 가?"

"그냥.. 데려다주고 싶어서."

"나?"

"네. 누나요"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친절에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거절하기 싫어서 그냥 따라오게 놔뒀다. 빌라 안까지 같이 들어와서는 센서등이 고장 난 걸 보더니 굉장히 심각한 목소리로 밤에 위험하겠다며 날 걱정했다. 폰을 꺼내 후레쉬를 켜 내 발걸음을 비춰준다. 그 행동이 귀여워서 자꾸 뒤돌아보며 웃었다. 불빛에 희미하게 비친 재현이 얼굴은 퍽이나 심각했다.


집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바로 옆동에 사는데도 말이야.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재현이가 네, 6년 전과 변함없는 예의 바른 목소리로 대답을 해온다.

그런데 영 발걸음을 돌리지 않아서... 멋쩍게 볼을 긁적이다 충동적으로 물었다.


"안... 가?"

"누나. 오랜만에 만나서 되게 이상한 부탁인 거 아는데요."

"어?"

"전화 번호 가르쳐주세요."

제 폰을 불쑥 내민다. 그게 뭐 별거냐 싶었는데 상대방 목소리가 진지해서 나도 진지한 얼굴로 폰을 받아들었다. 번호를 찍고 다시 돌려줬다.


"우와..."

신기해한다.

나는 약간 의아했다.


"연락해도 돼요?"

확인까지 한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해.. 해도 돼. 당연히. 연락이 뭐 별건가. 하하."

"우와..."

좋아한다.

나는 약간...





설렜다.

미친 거 아냐? 6살이나 어린애를. 그것도 동생 친구를. 심지어 그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주제에, 설레다니. 14살의 재현이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난 그때 스무살이었는데. 어떻게.. 그 어린애한테 설레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 이건 범죄야. 아까 버리고 온 맥주캔들을 잊어버리고 곧바로 냉장고를 열어 멀쩡한 맥주캔을 찾았다.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굉장히 외로웠던 거야. 나도 모르게 힘들어서 저 어린애한테도 설레고 그러는 거지. 아무리 유명한 드라마를 봐도 뛰지 않던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대고 얼굴이 빨개지고 그러는 거야. 그래. 맞아.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약간 알딸딸한 채로 소파에 쓰러졌는데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나. 번호 저장해주세요. 재현이에요.'

솔직히.. 귀엽잖아. 설레는 건 미친 짓이지만 귀여운 건 인정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번호를 저장했다. 뭐라고 저장할까 하다가 '재현이'. 간단하게 이름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재현이는 자꾸만 내 일상에 발을 담갔다.


[재현이]

'누나. 어제 만나서 너무 좋았어요. 우리 계속 자주 봐요.'
-'응. 나도 진짜 반가웠어. 자주 보자^^'
'센서등 이제 잘 켜지죠?'
-'어떻게 알았어? 오늘 퇴근하고 보니까 고쳐져있었거든.'
'제가 경비 아저씨한테 재촉했어요.'
-'진짜?'
'선생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혹시 센서등 수리 조금만 더 빨리해주실 수 있나요? 부탁드립니다. 하면서 음료수 박스를 건넸죠.'
-'우와. 최고야. 이거 한 달 넘도록 수리 안 됐었는데!
'히히.'



[재현이]

'누나.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응. 너도 좋은 하루 돼^^'



[재현이]

'누나. 저희 학교 앞에 엄청 맛있는 수제 초콜릿 집이 있대요. 동기 여자애들이 자주 가길래 따라가서 저도 하나 샀어요. 현관문에 걸어둘 테니까 누나 먹어요.'
-'재현아. 초콜릿 고마워! 진짜 맛있다. 내가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네. 다음에 꼭 만나요. 꼭이요.'




[재현이]

'누나. 우리 같은 빌라 사는데 자주 못 보는 거 같아요. 어떻게 우연히도 못 만나는거죠?ㅠㅠ'
-'재현아. 답장 늦어서 미안해. 나 요즘 회사 일이 많아서...ㅠ..'
'아니에요! 저는 누나랑 문자 하는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영광이얔ㅋㅋ'
'누나랑 이렇게 연락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어요... 신기하다.'
-'나도 신기해. 너랑 이렇게 연락할 줄 상상도 못했어!!'
'누나. 매일 아침 몇 시에 출근해요?'
-'나? 7시에 집에서 나가. 왜?'
'아니에요. 내일 봐요!'






내일 보자는 게 무슨 말이지? 의아해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다음날.




"내일 봐요."

"재현아..!!"

"오늘 봐요."

매일 나오는 시간에 나왔는데 집 앞에서 익숙한 얼굴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얼빠진 채로 하얀 얼굴을 가만 쳐다봤다.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다. 같은 빌라 사는데도 자주 못 보니까 얼굴 보러 왔단다. 얘도 많이 외롭나. 집 떠나서 자취하면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기도 하겠지...?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부러 밝게 재현이를 맞았다.


"재현아. 오랜만이야. 다시 봐도 되게 반갑다."

악수까지 청했다. 좀 오버했던 거 같다. 재현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내 손을 맞잡았다. 한참을 내려다보면서 놓아주질 않는다. 어색하게 웃으며 잡힌 손을 쳐다보니 아쉬운 듯 손에서 힘을 뺐다.


"매일 집 앞에서 기다려도 돼요?"

조심스럽게 묻는다. 기다리는 건 네 마음이긴 한데 굳이 아침 7시에 학교에 갈 이유가 있나? 대학생, 심지어 1학년이면 매일 늦잠자는 여유도 좀 누려봐야 할 텐데. 괜히 걱정돼서 심각한 얼굴을 하니 싫어요?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온다.


"아니야. 싫은 게 아니라..  7시면 네가 힘들지 않을까...?"

"저 하나도 안 힘들어요."

"진짜?"

"힘이 나요. 막."

"아침에 일어나면 힘이 나?"

"네. 앞으로 그럴 거 같아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싱글거리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곧 버스가 도착할 거 같아서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재현이도 따라온다. 옆에서 가방을 들어준다기에 놀라서 몸을 돌렸다. 안 무거워! 별걸 다 걱정한다고 생각하며 똥강아지처럼 따라오는 재현이를 쳐다봤다.


그렇게 재현이는 버스 정류장까지 날 데려다주고 내가 버스에 올라타자 밖에서 버스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나는 같이 손을 흔들면서도 그런 상대방의 행동이 의아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어릴 때부터 예의가 바르다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좀 과한 거 같기도 하다. 저렇게 친절하면 사는 게 살짝 피곤하지 않을까.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쓸데없는 걱정이나 덧대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 아침마다 보니까 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친해져버렸다. 요즘은 이따금 정재현이라고 부르며 친근함을 표현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고 야식이 땡길 때는 빌라 옥상에서 돗자리를 깔고 정재현을 만나기도 했다. 아니. 만나는 게 아니라 내가 야식 안 땡겨? 재현이한테 물으면 재현이가 옥상에 돗자리를 먼저 깔아놓고 날 기다렸다.


오늘도 그랬다. 치킨 먹고 싶다니까 옥상에서 보자고 한다. 정재현은 대학생 주제에 맨날 저가 모든 돈을 내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연락하기 전에 먼저 치킨을 시켜놓았다. 집에 도착한 치킨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니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토끼 같다.


"네가 매일 사잖아. 대학생이 말이야. 직장인을 앞에 두고 말이야. 융통성 없이 이용해 먹을 줄도 모르고."

돗자리에 앉아서 치킨을 펼쳐놓았다.


"나도 돈 벌어."

"돈 벌어?"

우쭈쭈. 나도 모르게 혀가 짧아졌다. 상대방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놀린다고 생각했나? 당황해서 급하게 달랬다. 하지만 너무 서툴러서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재현아. 너 학생이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보다는 당연히 돈을 더 많이 버니까! 지금은! 나중에 너 졸업하면 뭐 모르지만..!!"

"......"

"......"

"나 과외해서 돈 많이 벌어."

"우와. 진짜? 멋있다!"

"누나 돈 쓰는 남자 되기 싫어서 그런 건데."

어떤 말을 해도 분위기가 어색해지기만을 한다. 나도 입을 다물고 어색함에 발을 담갔다. 정재현이 슬쩍 내 눈치를 살핀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무룩해있더니 돌연 밝아진 얼굴로 치킨 상자를 뜯는다.


"누나가 사준 치킨!!"

닭다리를 하나 들더니 빠르게 뜯어 오물오물 씹는다. 그게 너무 귀여웠다. 저런 동생 있으면 매일 먹을 걸 사다 받쳐도 돈이 아깝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나가 사준 치킨이 제일 맛있어."

"맛있어?"

"응."

"많이 먹어.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 사줄게."

"나도 사줄게."

왜 자꾸 저런 걸로 안 지려고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마저 귀여우니 깊게 생각하지 말자 결론 내렸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오구오구. 재현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런 마음이었다.



"부장은 요즘도 누나 짜증 나게 해?"

"아니. 저번주에 신입 들어왔는데 걔 갈군다고 나한테는 신경도 안 써. 신입 안쓰러워 죽겠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챙겨주게 돼. 밥도 매일 혼자 먹는 거야. 부장이 사원들 혼자 움직이는 거 되게 싫어하거든. 내가 억지로라도 같이 밥 먹으려고 한다니까. 일찍 들어가면 부장이 또 꼬투리 잡을까 봐 일부러 카페 가서 매일 커피 마시고 딱 맞게 회사로 돌아오고 그래."

"신입 여자야?"

"남자. 나보다 나이는 많은데.. 나도 모르게 챙겨주게 돼. 나도 신입 때 같이 일하던 선배 도움 많이 받았었거든."

"굳이 안 챙겨줘도 될 거 같은데..."

"어?"

"그렇게 도와주면 자립심을 잃게 되지 않을까?"

"그래도 어떻게 모른척해."

"내가 만약 그 신입인데 누나가 챙겨주면."

"응."

"누나한테 엄청 의지할 거 같아."

"...그, 그런가..?"

"밤에 잘 때도 누나 얼굴 생각날 거 같아."

"......"

"내일 아침에 누나 얼굴 보면 안심할 거 같고, 기분 좋을 거 같고."

"......"

"좋아할 거 같아."

"......."

"챙겨주지 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내밀어진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고 챙겨주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해버렸다. 얼떨결에 말이다. 분위기가 다시 어색해졌다. 화제 전환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학교 생활 어때?"

"수강신청 잘못해서 과제 매주 내주는 교수 걸려서 힘들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입술을 삐쭉 내민다. 귀여워서 웃음이 터졌다. 힘들다는 상대방을 앞에 두고 신나게 웃어버렸다.



"과제 매일 해야 돼?"

"응. 오늘도 과제 있어."

"진짜? 내가 괜히 불러낸 거 아냐?"

"아냐. 누나 없으면 난 과제에 깔려 죽어버렸을 거야. 누나가 나 살려준 거야."

"그래도..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거.."

"괜히 말했어..."

"어?"

"누나 나 생각해준다고 이제는 야식 먹자고 안 할 거 같애. 아.. 괜히 말했어."

제 머리를 쥐어뜯는다. 나는 또 웃음이 터졌다. 뭘 먹고 저렇게 귀엽지.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갈색 머리칼을 헝클어놓았다. 푹 숙여졌던 고개가 번쩍 들린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쟤는 강아지였으면 꼬리가 열 개는 달려있었을 거다. 그걸 붕붕 흔들며 주인에게 저를 예뻐해달라며 따라다니고 졸랐을 거야. 확신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워."

그리고 입 밖으로 속마음을 말해버렸다.


"나?"

"응. 너. 진짜 귀여워."

어느 정도냐면 내가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서 부장한테 겁나 까이다가 세상만사 다 지쳐서 집에 돌아와도 네 얼굴만 보면 하루의 악몽이 리셋되는 기분이야. 그 정도로 너 귀여워.

구구절절 설명했다. 생각해보면 재현이 만난 이후로 스트레스를 거의 안 받고 있었다. 경비 아저씨는 나한테 요즘 밝아졌다고 했고, 회사 사람들은 무슨 약을 챙겨 먹길래 혈색이 좋아졌냐며 진지하게 물어오기도 했다. 이 정도면 쟤 힐링 요정 아냐? 내가 나도 모르게 착한 일이라도 했나 왜 저런 애가 나한테 뚝 떨어진 거지. 갑자기 센치해졌다. 요즘은 콜라를 마시고도 취하는가 보다.


"나 귀여워?"

"응. 귀엽지."

"......"

대답을 않는다.

귀엽다는 말 싫어하나? 눈치를 보는데 갑자기





"여주 누나아."

애교를 떠는거야.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하고 눈을 꼭 감고 웃고 있는 정재현에게 녹다운 됐다. 복숭아 같아.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시름시름 앓았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냥 예의 바른 동생 친구였는데 지금은 팬에 가까워졌다. 데뷔했으면 분명 회사고 나발이고 다 내팽개치고 방송국 앞에 매일 찾아갔을 거야. 네가 아이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넌 여자친구 생기면."

"응."

"진짜 예쁨 받을거야. 내가 장담할게."

덕담도 마구 퍼부어줬다. 엄지까지 치켜들며 최고, 거듭 표현했다.


"나 예뻐해 줄 거야?"

"어?"

"나 예쁨 받는 거 좋아해."

무슨 말하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쁨 받는 거 좋아해? 물으니까 응, 그렇다 대답한다.

그럼.



"어유 예뻐."

예뻐해주지 뭐.

"으어어ㅓ."

손을 뻗어 말랑한 볼살을 잡아당겼다. 아파서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손길을 피하지 않는다. 하여튼, 귀여워 죽겠다.



"누나는 귀여운 남자가 이상형이야?"

대화가 온갖 장르를 넘나든다. 이번에는 내 이상형을 묻는다. 그런데 이상형에 대해서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귀여운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이상형으로는 모르겠는데... 나 지금까지 사귄 남자들 다 연상에 조금 과묵한 스타일,"

"헐."

"왜 놀라?"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다. 손으로 턱을 눌러 닫아줬다. 고개를 살짝 흔들며 내 손을 치워낸다.


"귀여운 남자 좋아하는 줄 알았잖아."

"뭐? 왜?"

"애교 돌려줘."

손을 내 앞에 뻗는다.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뭐 하는 거야. 뻗어진 손에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손뼉을 쳤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날씨가 조금 쌀쌀해진 거 같다고 집에 가자며 몸을 일으키는데 손이 잡혔다. 날 따라 일어나서는 내려다본다. 정재현이 갑자기 거대해졌다. 올려다보는데 평소에 느끼던 거보다 키가 훨씬 커 보여서 살짝 당황했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니 다른 손까지 마저 붙잡아버린다. 그렇게 붙들렸다.


"귀여운 남자 좋아하는 줄 알고 귀여운 척했잖아."

"......."

"과묵한 남자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하루 종일 입 벙끗도 안 했을 거야."

"......."

"나 지금 당장 과묵해질 테니까."

"......."

"나 좋아해 줘."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대답도 안 했다. 사실 그 고백은 뜬금없지 않았다. 정재현은 내 옆에서 항상 대형견마냥 꼬리를 흔들어내며 저 좀 봐달라고 낑낑거리던 애였으니까. 아... 언제부터 였을까. 난 알았는데도 왜 재현이가 내 곁을 맴도는 걸 마냥 내버려 뒀을까. 외로워서? 그래도 이건 아냐. 쟤는.. 내 동생 친구.. 아.. 복잡해. 머리가 터질 거 같아.


집 앞에 도착해서 도어락을 여는데 날 따라온 정재현에게 붙잡혔다. 비밀번호를 누르지 못 했다. 재현이는 아무 말도 않다가 그저 누나.. 날 한 번 불렀을 뿐이다.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저런 목소리일 거다. 마음이 쓰라려서 내가 먼저 몸을 돌렸다. 재현이를 마주 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누나 미안해.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난.."

"......"

"그런데 누나 그만 좋아하는 건 못해."

"재현아.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몰래 좋아하도록 노력해볼게. 그러니까 다시는 보지 말자 이런 말은 제발 하지 마. 응?"

"재현아. 우리는.. 넌 내 동생 친구고. 나는 지금.. 그냥 모르겠어. 너 왜 나 좋아해?"

다시 보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애를 앞에 두고 내 이기심부터 채웠다. 왜 좋아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재현이가 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결심한 듯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고, 입을 열었다.


"우리형이 공부를 되게 잘했어. 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칭찬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 그러다 보니 저절로 공부에 흥미가 떨어지더라. 중학교 올라와서는 교과서 한 번 제대로 펴본 적이 없었어. 그러다 누나를 만났어. 누나는 매일 날 칭찬하는 거야. 재현아. 열심히 했네. 수고했어.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어깨도 두드려주고. 난 집에 가면 그날 누나가 나한테 해준 말 다 적었어. 보고 또 보면서 머리에 새기는 거야. 힘들때마다 꺼내 보려고. 그때는 내가 누나를 좋아한다고 생각 못했어. 그냥 난 세상에 누나 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아무도 슬플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다였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 누나 다시 보니까."

"......."

"몇 년 동안 나도 모르게 속에 숨겨놨던 마음이 멋대로 튀어나오려고 했어. 좋아했어요. 이렇게."

"......"

"그래서 누나 좋아해."

차분한 설명이었다. 직설적이면서도 배려심이 넘쳤다. 난 그냥 얼떨떨했다. 현실을 부정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넌 우주 친구고... 우주는 나랑 6살이나 차이.."

"우주 친구 아냐. 이사 간 뒤로 연락도 제대로 한적 없어. 다시 만나서 나 아는척하면 내가 무시할게. 지금 당장 전화해서 절교하자고 말할까?"

"......."

"누나."

"......"

"누나아."

내 손을 잡고 살짝 흔든다. 떼쓰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왜 그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누군갈 사귈 거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게 나보다 6살이나 어린 연하일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해본 적이....


"연하 싫어해?"

"응?"

"개명할까? 정재현오빠로."

"...뭐야아."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순식간에 기분이 풀렸다. 인상까지 쓰며 정재현의 어깨를 밀었다. 진지한 얼굴로 다시 내 손을 잡아온다. 내 한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누나. 저랑 사귀어주세요. 제발요."

"......"

"저 누나 아니면 평생 연애 못할 거 같아요."

"......"

"네?"

난 고백에서 애원이 먹힐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만약 나에게 그런 식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있으면 찌질함에 치를 떨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 잘 들을게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재현이 굳었다. 곧이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런데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마구 젓는 거다.

나를 다시 쳐다보고. 놀라서 뒷걸음질 치더니 소리를 지르려고 하기에 이번에는 내가 급하게 정재현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치면 안돼."

고개를 끄덕인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뚫어져라 바라본다.

왠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연애를 하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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