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고 돌아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저택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두 사람은 조용한 복도에서 손을 꼭 붙잡고 끊임없이 서로를 돌아보며 걸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와서 내일 아침이면 사람들 사이에 어두운 복도에서 들려오는 키득거리는 남녀의 숨죽인 웃음소리 괴담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둑한 복도가 너무 짧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문 앞에 도착하고 말다니 거리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릴리는 필리엔의 방에 뭘 놔두고 왔다는 핑계로 필리엔의 방까지 갔다. 릴리가 은근슬쩍 필리엔의 침대에 드러누웠으나 필리엔이 단호하게 일으켜 주고는 등을 가리라며 담요 같은 것을 하나 걸쳐주기까지 했다. 정말로 오늘 밤은 이렇게 보낼 결심을 했나보다. 

릴리는 반쯤은 심술로 필리엔에게 제 방까지 다시 데려다줄 것을 요구했다. 필리엔이 흔쾌히 수락해 별로 심술 부린 것 같지도 않아졌지만 말이다. 결국 어둑한 복도에 다시 발소리와 키득거리는 소리가 지나가게 되었다.

아, 원망스러운 문 앞에 다시 섰다. 릴리는 이 문이 얼마나 사악한지 노래라도 지어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제는 헤어져야지. 밤이 지날 때까지 이별이다. 

복도는 미약한 달빛 뿐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바짝 붙어 서 있는 상대의 낯빛을 살필 정도는 되었다. 릴리가 아쉬운 만큼이나 필리엔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방이 너무 가까운 것 같지 않아요? 이럴 거면 차라리 바로 옆방인 게 낫겠어요."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하긴 옆방이면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룰 테니 숙면을 위해 양보해야겠군요."

릴리가 깍지 껴 꽉 잡고 있는 손 말고 그 반대 손을 들어 필리엔의 턱과 뺨 그리고 입술을 간질이며 스치듯 매만졌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사랑스러워 릴리는 필리엔의 목 뒤에 손을 감고 팔을 끌어당겼다. 곧 입술이 맞닿았다. 

평소보다 살짝 부은 이유를 알기에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 감촉이 선정적으로도 느껴졌다. 깍지낀 손에 힘이 들어가며 뼈대가 솟은 손등을 긁었다. 잠시 뒤 입술이 떨어지며 몽롱하게 취한 듯한 시선이 서로를 스쳤다. 이래놓고 그냥 여기서 끝이라니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내일 또 당신 방으로 가도 될까요?"

필리엔의 목 안에서 끄응 소리가 났다. 릴리의 손이 그의 뺨을 쓸어내리곤 가슴 위에 올랐다. 필리엔의 심장이 크게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채도가 낮아진 녹색 눈동자를 릴리의 시선이 빤히 꿰었다. 필리엔이 혀로 입술을 축이고 가지런한 이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신을 위해서 안 된다고 해야 할 텐데 지나치게 황홀한 제안이라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네요."

"절 위해서라면 필리엔이 할 일은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고 내일 저녁에 보송한 몸으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능글맞은 농을 던지며 릴리가 손을 내려 필리엔의 엉덩이를 음흉히 그러쥐었다. 아, 물론 농담의 일환이다. 이전엔 필리엔의 몸이 잘 단련해 어깨와 가슴이 넓고 탄탄한 것만 눈에 들어왔는데 중서부식으로 조여 가늘게 만든 허리 아래로는 또 하체가 생각보다 살집이 있었다. 본래 타고나기를 하체가 튼실한 체형이었다. 

릴리가 근육으로 탄탄하면서도 실팍한 살집의 감촉을 손안 가득 느끼는 동안 필리엔이 릴리의 입술에 간지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필리엔이 릴리의 곧은 어깨와 등을 짜임새 굵은 숄 위에서 느리게 만졌다. 애정 가득한 손길이 릴리의 어깨를 매만졌다.

"사랑해요, 릴리."

"저도 사랑해요, 필리엔. 내일 봐요."

그렇게 마지막엔 숨결을 잔뜩 섞어 귓가에 속삭이곤 뺨에 쪽 입 맞추고 물러나자 필리엔이 뺨을 붉히곤 머쓱하고도 기쁜 얼굴로 릴리를 놓아주었다. 릴리는 미련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선 필리엔의 품에서 벗어나 문손잡이를 잡았다. 잠가두지 않은 문은 쉽게 열렸다. 

릴리는 문을 반 뼘 정도 열었다가 다시 몸을 돌려 필리엔에게 달려가 얼싸안고는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을 잠시라도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진한 키스를 마구잡이로 퍼부었다. 그리곤 영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 된 필리엔을 향해 씩 웃으며 그를 두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오늘 밤을 릴리만 아쉬워하진 않을 듯했다.




촛농이 녹아 아래로 눈물처럼 흘러내린 짧은 초는 이제 거의 꺼지기 직전이었다. 반 뼘 정도로 틈만 조금 벌리고 있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닫혔다. 문 닫히는 소리가 작게 났지만 잠든 이는 듣지 못했는지 미동도 없었다. 깊어가는 밤의 어둠과 고요 속에서 곤히 잠든 숨소리만이 느리게 이어졌다. 

손님방을 찾은 늦은 밤의 방문객은 소리를 죽이려는 듯 은밀한 동작으로 잠든 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풀썩 누웠다.

"헉! 으응?"

로라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깬 뒤 자기 옆에 누운 릴리를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로라는 눈을 껌뻑이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하다가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잠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선 꾸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으셨네요, 아가씨. 기다리다가 잠들어 버렸어요."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예?"

릴리는 과장된 태도로 말했다. 물론 장난이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 자세히 말하진 않겠지만 완전 환상적이었어. 필리엔이 좀 고집을 부려서 맞춰주느라 고생하는 바람에 내일이면 온몸에 근육통이 올 것 같은데도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것 같아. 하아아……. 아직도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자신의 아가씨가 대충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한 로라의 눈빛이 팍 식었다. 대단한 오해였으나 릴리의 의도대로 속은 것이다. 

로라의 눈으로 하는 욕설에도 릴리가 좋다고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세상 만물을 다 사랑하게 된 사람처럼 행복하게 풀어진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로라의 손목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이마에 쪽 입 맞추고 다시 털썩 드러누웠다. 실제로 웃겼다. 

"이런 정신으로 용케도 길 안 잃고 잘 찾아오셨네요."

로라가 해롱대는 얼굴의 릴리를 잠시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릴리가 의도한 상황인 게 아니었다면 조금 상처받았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이런 정신으로 용케도 길 안 잃고 잘 찾아오셨네요."

"응. 필리엔이 데려다줬어. 문 앞에서 아주 찐한 입맞춤도 나눴단다. 망봐줘서 고마워."

"두 분이 뭘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주인 없는 빈방에 있었을 뿐인걸요. 심지어 잠들어 있었죠. 아무튼 옷 갈아입으셔야 하니까 일어나세요. 그대로 주무실 건 아니잖아요."

"아……, 난 괜찮아. 필리엔이 옷을 터줘서 혼자 벗을 수 있게 됐거든."

릴리가 피식 웃었다. 옷에 벌레가 들어갔다고 그 난리를 쳤다니. 그때는 엄청 놀랐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여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정말로 송충이가 들어간 거라면 정말 큰일이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일어나 주섬주섬 실을 자를 가위를 챙기던 로라가 무슨 소린가 하고 릴리를 보다가 릴리가 처음 보는 숄을 두르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깨를 덮은 숄로 상체를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옷이 흐물거리는 것처럼 흐트러져 있는 게 표가 났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넘겼다. 

하지만 채근해 릴리를 일으키고 뒤로 돌려 숄을 치워낸 로라는 릴리의 꼴을 보고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철썩 치고 말았다. 릴리에게 맞지 않는 중서부식 옷을 개조하면서 아예 입혀놓고 체형에 맞게 기워버린 드레스가 등 부분이 아예 뜯겨나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로라는 거의 본인의 숨이 끊어져 가는 것처럼 헐떡이기 시작했다.

"옷이……! 옷을 대체 왜……? 차라리 가봉한 부분을 뜯었어야죠. 이게 무슨……. 혹시 곰이랑 싸우셨어요?"

"곰처럼 정열적이었지."

로라가 경악하는 와중에 릴리가 고개를 치켜들며 저런 소리나 지껄였다. 다른 걸 다 제쳐놓더라도 동부는 물론이고 중서부에서도 곰이 정열을 상징하는 동물은 아니다. 로라는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으나 릴리는 뒤돌아 있어서 그런 로라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 봤더라도 크게 신경 쓸 것 같지 않기는 했다. 

없는 양심을 찾는 헛된 노력을 진작에 때려치운 로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상 정도를 살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릴리의 등판을 살피던 로라가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혹시 그분이 거칠게……. 아가씨가 싫다는데 억지로 밀어붙였다든가 아프게 했다든가 하는 건 아니죠? 이상한 걸 시켰다든가!"

"가위는 내려놓고 말해. 음, 생각하지 못한 걸 경험하게 되긴 했는데 참을만했어. 나중엔 나쁘지 않았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필리엔이 나를 아프게 할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거니? 보통 그 반대잖아."

"그 사람도 중서부 남자잖아요. 중서부 남자는 뭘 할지 모른다고 동부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고 거의 여자나 마찬가지인데 기질이 더 더럽다고 이모부님이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남자는 남자가 안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정말로 어쩌다 옷이 이 꼴이 된 거예요?"

"아아, 우리에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자세한 얘기 말고 옷이 왜 이렇게 됐는지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아가씨."

들뜬 릴리가 정말이지 시작부터 끝까지 잡다한 이야기를 포함해서 굉장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다 늘어놓으려는 기색을 보이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로라가 재빨리 말을 끊었다. 로라가 그다지 자세하게 듣고 싶지 않은 온갖 황홀함을 떠올리며 감탄하는 척 홀로 허공을 보며 한숨을 터트린 릴리가 입을 열었다.

"어찌나 덥고 땀이 나는지 너무 더워서 아예 찢어달라고 했어. 내 남자는 말도 잘 듣지. 아주 귀여워서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안 예쁜 곳이 없다니까. 게다가 몸을 다 가리는 천가지를 걸치고 있을 때보다 옷을 다 벗기고 보니까 몸매가 아주-."

"남성에 대한 예의를 지키셔야죠, 아가씨."

릴리가 으흐흐 음흉하게 웃었다. 충분히 장난을 친 릴리가 기만을 멈추고 사실을 말했다.

"사실 네가 생각한 그런 일 없었어. 우리 그냥 밖에 다녀왔거든. 이안드의 주도로를 따라서 불을 다 피워놓는 거 알아? 야경꾼들이 해놓는 거래.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도시에 별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더라고."

"네? 밖에……. 밖에서 하셨다고요?"

"아니 얘가 사람을 뭐로 보고!"

물론 이 충실한 로라는 자신의 아가씨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었으나 릴리는 인정을 거부했다. 자신이 실제로 했던 생각을 두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며 릴리가 호들갑을 떨고는 로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제 손바닥을 쳐서 찰싹 소리를 냈다. 로라가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릴리를 뾰족하게 보았다. 속아주기엔 로라는 릴리를 너무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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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절한 곳에서 끝난 오늘 편의 포인트는 가위를 든 로라입니다(?) 필리엔은 이젠 릴리가 저러는 것에 익숙해져서 놀라지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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