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스듬히 벤치에 앉아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째로 더운 날씨가, 둘째로 또 더운 날씨가, 셋째로 이 거지 같이 더운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증이 난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등이 축축해지며 셔츠가 땀으로 물든다. 이런 날은 집구석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며 수박이나 퍼먹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숨쉬기도 어려운 대낮에 매미 울음소리 거창한 땡볕 아래 벤치에 앉아있는 것은, 고집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벤치에 앉으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빌리려고 했던 책이 간발의 차이로 누군지 알 수 없는 머저리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 도서관까지 간 게 아까워 그다지 읽고 싶지도 않은 다른 책을 고르고 골라 들고 나왔더니 도서 카드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읽지도 않은 책을 다시 책장을 찾아 꽂으며 생각했다. 세상은 썩었다. 근본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라고.

목덜미가 타는 고통을 느끼며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벤치가 거기에 있었다. 조금의 그늘도 없이, 그늘 비슷한 것도 없이 그야말로 뜨거운 햇빛 아래 눈부신 자태를 빛내는 중이었다. 보기만 해도 삼겹살집 불판 같이 달아오른 벤치의 위엄이 느껴졌다. 벤치는 가늠키 어려운 열기를 보이지 않는 아지랑이처럼 피워 올렸다. 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냥 가려고?”

도발했다.

“넌 벤치에 앉을 배짱도 없는 놈이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침도 한 번 뱉었다. 담배도 한 대 꺼내 물고서는, 기꺼이 이 빌어먹을 피조물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끄트머리에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은 게 아니라 등판을 완전히 대고서 깊숙이 몸을 파묻은 것이다. 앉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열기가 허벅지부터 시작해 엉덩이를 거쳐 등을 타고 오른 뒤 정수리 중간에 도달했다. 만약 내 머리 꼭대기에 종이 달려있다면 종소리가 울렸을 터였다.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런 내색 없이 라이터를 꺼내 찰칵, 찰칵 하고 여유롭게 불을 붙였다.

연기를 마셨다.

연기를 넘겼다.

연기를 뿜었다.

세 가지 동작에 걸린 시간은 2초, 하지만 체감 시간은 20년 정도였다. 기분은 담배를 80보루 정도 피운 기분인데 담배는 아직도 장엄하리만치 길게 남아있었다. 팔이 축축해졌다. 물을 끼얹은 것처럼 등이 젖었다. 가슴을 타고 흐른 땀이 새는 수도꼭지처럼 옆구리에서 뚝뚝 떨어졌다. 머리카락은 열을 받다 못해 조만간 발화할 것 같았다. 얼굴도 번들번들해져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을 타고 땀이 흘렀다. 어떻게 보면 우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땀이 꼭 눈물처럼 났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진짜 눈물이 섞여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 상태로 앉아있자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시선을 던지고 갔다. 축구공을 들고 가던 애들이 수상쩍은 눈초리를 보내왔다.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다. 그 어린 것들의 견해에 일부분 동의하는 바는 있으나, 이 날씨에 공을 차겠다고 꾸역꾸역 학교 운동장을 가는 놈들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양산을 쓰고 가던 곱상한 아주머니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왔다. 나 역시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 공격을 상쇄시켰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남자로서의, 아니,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이 빌어먹을 쉼터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느긋한 사내를 연기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아니었다. 나는 간절히 운을 원했다. 구름이나 방사능 오염으로 거대화 된 새 같은 것이 잠시나마 태양을 가려주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새 같은 건 어디 가서 다 뒈진 듯했다. 하긴 생각해보면 나는 예전부터 운이 좋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나에게는 운이란 게 아예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할 터였다.

처음으로 사람을 때린 건 열다섯 살 때였는데 상대는 주정뱅이였다. 길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기에 두들겨 팼더니 사실 놈은 경찰이었다. 낮에는 경찰, 밤에는 주정뱅이의 삶을 영위하는 슈퍼히어로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건 열여섯 살 때였는데 죽였더니 다음날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또 죽였다. 놈은 또 돌아다녔다. 나는 다시 놈을 죽였고 놈은 또다시 살아서 움직였다. 완전히 화가 나서 다시는 살아날 수 없게 토막을 낸 뒤 망치로 일일이 두드려서 완전히 반죽을 만들어버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놈이 다섯 쌍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처음으로 섹스를 한 건 열아홉 살 때였는데 콘돔이 찢어졌다. 재빨리 나가 새로 콘돔을 사왔더니 그 사이 여자가 목을 매달고 자살해있었다. 그 여자의 개도 죽어있었다. 그 여자의 아버지도 죽었다고 연락이 왔고 그 여자의 옛날 애인과 사촌과 옆집 사는 아저씨도 죽었다. 아무튼 나는 섹스를 못했다. 그 후로 계속 못했다. 나는 이게 모두 운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벤치에 앉아 이러한 것들을 되새기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언제 끝나는 거지. 날이 저물어야 끝나는 건가? 하지만 벤치는 처음에 나에게 ‘앉을 배짱도 없는 놈’이라고 했다. 거기에 따르면 나는 이미 벤치에 앉았으니 이미 이긴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 지체할 것이 없다. 나는 벤치에 앉았고, 제법 긴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 재론의 여지없이 나의 승리다. 배짱을 증명했다. 벤치의 시답잖은 프라이드를 박살내버린 것이다.

내 이름은 됐어. 챔피언이라고 불러라.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벤치에서 일어섰다. 내가 앉은 자리, 내 몸이 닿아있던 자리가 땀으로 흥건해있었다. 역사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뿌듯한 기분으로 새 담배를 꺼내 문 채 기지개를 켰다.

그때,

“벤치를 이겼군, 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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