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용병 생활에 익숙한 몸은 몸 여기저기를 감싼 갑주를 그리 거추장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임무 중에는 잠잘 때에도 갑주를 벗지 않은 채 잠드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 용병 일이었다. 벨레스는 숙련된 용병이었고, 그런 생활을 10년 가까이 해 왔다. 가르그 마크의 교사로 부임한 뒤에도 몸에 배인 습관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 중인 지금은 더더욱.

그러니 일과 중에는 늘 차고 다니는 갑주의 아래 위치한 피부를 본 적이 있는 이들은 드물었다.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방에 도착한 벨레스가 코트를 벗고 팔과 다리의 갑주를 천천히 풀어냈다. 갑주를 장식으로 입는 것은 아니기에 갑주로 가려진 부분의 피부는 흉터로 덮인 다른 곳의 피부보다 상대적으로 깨끗했다.  

그러니까, 아마 5년 전까지만 해도.

벨레스가 손목을 쓸어내렸다. 깨끗한 피부를 침범한 것은 어디까지나 흉터가 아닌 얼룩일 뿐이어서 촉감은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벨레스는 아주 낯선 것을 만진 듯 얼근 손을 떼어냈다. 

그것이 정확히 언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처음에는 아주 희미한 얼룩이었을 뿐이니까. 아마도 소티스가 사라진 그 무렵부터였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 전의 한 달은 제 몸은 자세히 돌볼 겨를이라고는 없었으니 그 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확실하게 그것을 인지한 것은 머리색이 바뀌고 나서도 한참 후였다. 전투로 생긴 멍이려니 생각했던 것이 사라지기는커녕 점차 뚜렷하게 어떤 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을 무렵.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드물기는 했지만 희귀하다고 할 만한 현상까지는 아니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는 용병 일을 하다 보니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 몸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운명의 상대, 라고 했던가. 자신에게 그런 상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가르그 마크에 오기 전까지는 가진 감정 자체가 있기는 한가 싶을 정도로 희박했으니까. 가르그 마크에서 꽤 밀도 높은 시간들을 보낸 뒤의 자신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반려라는 개념은 퍽 낯선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이름 자체도 문제였다. 아는 사람의 이름이었어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손목에 자리잡은 것은 완전히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어떻게 봐도 포드라식 작명은 아닌 그 이름은 처음에는 읽는 방법조차 긴가민가했다. 아직 사관학교의 선생이던 시절, 몇 번인가 낯설기 그지없는 철자를 입 안에서 굴려 보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종이에 적어 방을 나섰더랬다. 

원래대로라면 각지에서 용병 일을 한 제랄트에게 가져가 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상대는 이제 없었다. 벨레스는 마음 한구석에서 아직 지워지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한 상실감을 느끼며 다른 곳을 향했다.

“샤미아. 이거 읽을 수 있어?”

샤미아도 제법 잔뼈가 굵은 용병 출신이었다. 그러나 포드라 바깥을 꽤 다녀 본 그 전직 용병은 불행히도 서방 출신이었다. 

“흐음? 이게 뭔데? 사람 이름? 철자가……다그나다 브리기트어는 아닌데. 모르피스어? 아니면 팔미라어인가?”

“포드라식은 아니지?”

“포드라인인 당신이 나한테 묻는 것도 웃기지 않아? 뭐……포드라에서는 kh같은 철자는 쓰지 않으니 그렇겠지. 그래서. 이게 뭔데? 여신이 내린 계시라도 돼?”

벨레스의 변한 모습이 여신의 행사라는 소문은 이미 가르그 마크 전체에 퍼져 있었다. 벨레스 자신은 그런 인식이 다소 거북한 편이었지만 샤미아의 말에 바로 딱 잘라 부정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아는 소티스가 그럴 존재 같지는 않기는 했으나 어쨌든 이 현상 자체는 예로부터 여신이 짝지워진 운명이니 축복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가. 

“……그럴지도?”

벨레스의 애매한 답에 샤미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야. 그 애매한 대답은. 음? 그러고 보니, 이거 사람 이름인가?”

딱히 억지로 숨기려고 한 것도 아니다. 벨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것 같아.”

포드라에서야 여신의 축복이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포드라 바깥이라고 해서 없는 현상이 아니다. 샤미아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흐음. 꽤 의외인데. 아니 뭐, 당신이라고 꼭 그런 게 안 어울린다는 건 아니고.”

“알아. 나도 의외라고 생각하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스치지조차 않은 이름의 주인이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한들, 별로 와닿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샤미아 역시 그 점에는 동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정말 운명의 상대라면 어찌됐든 만나지 않겠어? 아니면 그냥 운명이 아니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꽤 명쾌한 해답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손목에 나타난 이름 하나 가지고 고민하고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리 운명 같은 것을 믿는 편도 아니었던 벨레스는 일단 자신의 몸에 나타난 그 변화를 적당히 잊어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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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는 상황이 퍽 급박하게 돌아갔기에 정말 그런 이름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가까운 이라면 모를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름 따위 눈 앞에 닥친 전쟁의 위기 앞에서는 머릿속에서 우선순위가 밀리기 마련이었다. 결국 그 이름은 벨레스와 함께 5년을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원래 제 몸의 일부였던 것만 같은 그것을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된 것은 어째서일까. 어쩌면 자신에게는 바로 하룻밤을 자고 만난 것 같은 클로드가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어서일지도. 

언젠가 샤미아는 이 이름이 팔미라식은 아닐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게 맞을 것이다. 

클로드. 벨레스는 그 이름을 혀끝으로 굴렸다. 5년 전에도, 지금도, 가장 많이 부르고 있는 이름은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하게 흘러나왔다. 

지금은 병영으로 쓰이고 있으나 원래 이곳은 사관학교였으며 벨레스는 그 사관학교의 교원이었다. 학생을 허투루 받지 않는 사관학교의 학생 명부는 분명 레스터의 귀족 명부에 등록된 이름이 클로드 폰 리건임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벨레스는 새삼스럽게 그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것은 확신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포드라에서의 정식 이름은 클로드가 맞을지라도, 그 남자가 태어나며 가장 처음 받은 이름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 자신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그 이름은 아마 아직 자신은 읽는 법을 모르는 이 철자와 같으리라.

물어보려면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바빠서만은 아니었다. 전쟁 중이니 한가하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선명히 새겨진 이름을 드러내는 대신 갑주 안으로 꽁꽁 숨겨 버린 것은,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화라기보다는 짜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아마도 클로드를 만나기 전의 벨레스라면 느끼지 않았을 감정이 선명하게 운명이라는 이름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만약 이게 클로드의 본명이 맞다면 괘씸한 일이 아닌가. 그 입으로 형제라고 불렀으면서, 이름 하나 진짜로 알려 주지 않는다는 건. 듣는다면 그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래도 신경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벨레스는 어느 날엔가 회의를 마치고 마구간의 말들을 돌봐 두가엤다는 시릴을 불러세웠다.

“시릴. 바쁜 건 알지만 잠시 둘만 괜찮을까.”

“응? 마구간이야 급한 것도 아니고, 별로 상관없지만요.”

“뭐야, 선생님. 지금 연하남 꼬시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시릴은 너무 어리잖아? “

클로드가 놀릴 거리를 찾은 것인지 괜히 이죽거리다가 힐다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여 우는 소리를 하며 회의장을 나섰다. 발언자가 클로드임에 어이없음을 느끼던 벨레스는 문득 또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서로의 운명의 상대. 그렇다면, 이게 클로드의 본명이 맞다면 클로드에게도 자신의 이름이 나타나 있을까. 나타났다면, 클로드도 그것을 알고 있을까. 

벨레스 자신이야 스스로 놓칠 수가 없는 곳이었지만 위치에 따라서는 본인이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이름의 주인이 클로드라는 전제 하의 이야기였지만 만약 클로드도 알고 있었다면 죄질이 더 무거웠다.

“선생님? 할 이야기란 거…….”

벨레스가 잠시 사람들이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버리자 시릴이 침묵이 불편한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신이 불러세워 놓고 말을 잇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벨레스가 바로 용건을 꺼내들었다.

“시릴. 이거 팔미라어지? 어떻게 읽는 줄 알아?”

“으음……팔미라어? 쓰지 않은 지 오래돼서 나보다는 클로드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보자.”

시릴은 성실하게도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레스가 내민 철자로 시선을 주었다. 다행히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Khalid, 라고 읽는데요……영원? 아니 불멸이던가?”

벨레스는 시릴의 입에서 발음을 따라해 보았다. 잘 되지는 않았다.

“칼라드?”

“으으음……아니, Khalid.”

철자만큼이나 낯선 발음이었다. 몇 번이나 다시 말해 줄 것을 부탁하고서야 그럭저럭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꽤나 거친 발음이었다.

“영원이라고?”

“아마 그럴 걸요……저도 팔미라어를 쓰던 건 어릴 때라 너무 어려운 단어는 잘 몰라요. 자세한 건 역시 클로드한테 물어보는 게…….”

“아니야. 이 정도만 알면 충분해. 고마워.”

시릴은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는지 하는 의문은 돌려주지 않았다. 벨레스는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시릴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며 낯선 이름을 곱씹었다. 

영원. 불멸. 포드라에서는 사람의 이름에 그런 거창한 뜻을 붙이는 경우는 좀처럼 없어 어색하게 느껴지다가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싶었다. 풍경이라는 평범한 말로 별 것 아닌 척 포장하고는 있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망을 품은 사람에게는 그런 이름이 어울릴지도 모르지. 아니, 변화를 가려오려는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려나.

그러니까, 자신에게 야망을 말해 줄 때 그 거창한 이름 정도도 같이 가르쳐 줬어도 됐잖아? 복도를 걷던 벨레스의 볼이 부풀었다. 

“응? 선생님. 기분 안 좋아 보이네. 데이트 신청이 잘 안 됐나 보지?”

바로 그 원흉이 태연하게 말을 걸어 왔다. 회의실을 나가면서 한 팔에 책을 들고 있다 싶더니 벨레스가 시릴과 대화하는 동안 서고에 책을 반납하고 온 모양이었다. 농담처럼 말을 걸었던 클로드는 자신을 향한 벨레스의 표정에 정말 짜증이 섞여 있자 놀랐다. 처음 봤을 때에 비하면 감정 표현이 놀랍도록 늘기는 했지만 적이 아닌 상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보이는 일은 거의 없던 사람인지라 저런 표정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연히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빠지고 걱정이 그 자리를 채웠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최근에 일정이 너무 빡빡했나?”

대답 없이 어딘가 기분이 저조한 듯한 표정으로 클로드의 동그래진 눈을 바라보던 벨레스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기습적으로 클로드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응. 피곤하네.”

“어? 어어. 미안해. 어쩔 수 없다지만 선생님한테도 너무 부담을…….”

“그러니까 사우나 가자.”

“뭐?”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좀처럼 자신의 의견이라든가 호오를 강하게 피력하지 않는 것이 벨레스라는 사람이었다. 그런 벨레스의 드물게 박력 있는 요구에 클로드의 기세가 밀렸다. 왜 하필 사우나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클로드가 보기에도 최근 벨레스의 눈치가 평소와는 달랐기에 클로드는 일단은 장단에 맞춰 주자는 심정으로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마침 시간이 늦어 이용하는 사람도 없는 사우나는 숨이 조금 막힌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대화하기에 나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긴팔이야?”

“……땀 내려고.”

굳이 긴팔을 입지 않아도 땀이 푹푹 나는 사우나 안이었지만 클로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원래 사우나에 강한 사람이기도 하니 그러려니 싶기도 했거니와 괜히 복잡해 보이는 사람을 더 건드리지 않을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래도 형제라고까지 부르는 사이인데 고민 정도는 자신한테도 말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클로드로서는 상당히 미묘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부터 벨레스 혼자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혼자서만 고민하는가 싶을 때는 그래도 혼자 고민해야 할 일인가 싶어 그저 걱정할 뿐이었는데 오늘 일은 다소 충격이었다. 시릴이 나이에 비해 진중한 녀석이기는 해도, 자신도 아니고 시릴을 따로 불러 상담할 일이 있단 말인가? 

왠지 모르게 벨레스의 일은 자신이 가장 먼저 알고 들을 거라 생각한 것은 명백한 자의식 과잉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충격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클로드가 조금 불만스러운 심정으로 땀을 훔치는 척 벨레스를 훔쳐보려는데,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눈을 돌릴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사이 벨레스의 시선이 먼저 움직였다. 그렇다고 눈을 피하는 듯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오히려 집요하게 훑는 시선에 가까웠다. 

당황……은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은 익숙지 않았지만 타인의 살피는 시선 같은 것에 당황하기에는 거쳐 온 시간이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보통 때라면 가볍게 웃으며 그렇게 내가 좋냐고 진담 섞인 농담을 할 수도 있겠지만 벨레스의 시선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힐다도 아니고 설마 진짜 그러기야 하겠느냐만서도, 농담을 잘못하면 한 대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는 건 또 클로드의 성격이 아니었다.

“뭐야? 아무리 내 몸매가 좋아도 그렇게 보면 좀 부끄러운데? 그런 시선은 단둘이 방에서 있을 때 보내 주지 않겠어?”

클로드의 말에 벨레스의 시선이 떨어졌다. 클로드의 말에 시선을 거뒀다기보다는 관찰을 끝낸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 클로드가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벨레스가 그럭저럭 기분이 풀린 것인지 피식 웃으며 농담을 받아 주었다.

“몸매라……남자 몸 보고 싶었으면 좀 더 나은 선택지도 있잖아?”

그러니까, 웃으며 저런 농담을 할 정도로는. 제법 사람 발끈하게 하는 농담이었지만 어쨌든 심각한 얼굴보다는 나았다. 클로드는 풀리려는 얼굴을 억지로 찡그리며 항변했다.

“뭐? 어디 가서 이만큼 몸 괜찮은 남자 찾기 쉽지 않거든? 봐, 그동안 제법 근육도 붙었다고.”

“여기 군대인데? 몸 좋은 사람이야 눈 돌리면 찾을 수 있을 걸. 라파엘이라든가.”

“아니 그게……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쪽은 너무……그, 카테고리가 다르지 않아? 그보다 당신 그런 쪽이 취향이었어?”

“글쎄, 어떨까.”

벨레스가 시침을 떼 봐야 클로드가 벨레스의 취향 하나 알지 못할 정도로 가깝지 못한 사이는 아니었다. 흘긋, 하고 조금 전과는 또 다른 감각으로 클로드의 몸을 스친 시선을 기민하게 잡아 낸 클로드가 키득키득 웃었다. 

“큭큭. 아닌 척 해도 내가 취향인 거 알거든? 그렇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 놓고 발뺌하려고?”

“그런 옷 입고 있어 봐야 뜨거운 시선 보낼 만큼 멋있지도 않은데.”

“뭐야. 그게 문제였어? 어디 한번 벗어 봐?”

아주 잠깐, 클로드 정도나 알아차릴 법한 짧은 침묵 후에 벨레스가 피식 웃으며 턱을 까딱했다. 

“안 말릴게. 맹주의 위엄이 어디까지 떨어질지 궁금하네.”

어라.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그거지.

클로드는 벨레스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벨레스 자신부터가 숨기려 하지 않았을지도. 아마도 조만간, 전쟁이 끝나면 벨레스에게 건넬 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벨레스의 반응은 그런, 끌리는 이성의 육체에 대한 머뭇거림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일단 그 침묵을 모른 척 농담을 이어받았다.

“그야 동맹의 위상이 하늘까지 올라갈 게 뻔하지. 아마 제국도 그 위용에 탄복해 항복할지도.”

“퍽이나 그렇겠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해서 조금 전의 반응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클로드로서는 이만하면 많이 참은 편이었다. 

“……저기,형제. 나한테 숨기는 게 뭐야?”

클로드의 말에 벨레스가 입가의 웃음을 얼핏 지우는가 싶더니 천천히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러니까, 정말로 뭔가 있기는 있다는 소리지. 

“……그러는 너야말로 나한테 숨기고 있는 게 있지 않아?”

벨레스의 표정이 퍽 심각했기에 클로드는 재빨리 제 자신을 돌이켜 봤다. 걸리는 것은……솔직히 많기는 했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들은 전부 과거의 일이었다. 적어도 벨레스를 형제라 부른 그 날 이후로 숨기는 것은 딱히 없었는데. 

“아니, 그야 내가 예전에 당신 이용하려 했다느니 하기는 했지만……그건 옛날 일이잖아? 당신이 그걸 두고 아직까지 화가 나 있을 사람은 아니고, 아니면 아무리 내가 그렇게 청렴결백한 사람은 아니라지만 지금의 형제한테까지 꿍꿍이를 감출 사람으로 보여?”

“분명 얼마 전에도 비장의 한 수는 마지막까지 감춰 두는 게 좋다던가 하면서 갑자기 원군을 데려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하핫, 깜짝 파티 같은 거였다고 할까.”

클로드의 말에 벨레스의 얼굴이 한참 더 심각해졌다.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벨레스가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 다만 작은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차라리 화를 내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어떻게 봐도 가벼이 넘기기는 어려운 말을 던져 놓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태도에 클로드도 울컥하고야 말았다. 

답지 않게 성질이 나 버린 것은 어쩌면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의 맹주라는 중책을 홀로 수행해 오며 5년 동안 풀어지지 못했던 스물세 살 청년이 형제이자 스승인 사람에게만은 모든 것을 터놓고 싶은 마음을 가져서였을지도. 혹은 그동안 쭉 벨레스의 태도를 신경쓰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하필 사우나가 너무 더웠기 때문일지도. 

아마도 그 모든 것 때문에, 클로드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제.”

당신이나 선생님 대신 형제라고 부른 것은 클로드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꽤 의도적인 것이었다. 높아진 언성이 사우나의 후덥지근한 공기에 감겨 후두둑 벨레스에게로 쏟아졌다.

“적어도 나는 생각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말할 거라면 뭘 의심하고 있는지부터 말해 주지 않겠어? 자칭 시의심 덩어리인 내가 의심하는 걸 나쁘다고 말할 처지는 안 되지만 이런 식으로 형제에게 의심받는 건 달갑지 않은데.”

벨레스의 시선이 갑자기 높아진 클로드의 얼굴을 따라 올라왔다. 곧 그 입이 열렸지만 흘러나온 말은 클로드가 기대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위험해. 앉아.”

“뭐가 위험하다는…….”

벨레스가 다시 입을 벌렸지만 클로드는 그 입에서 말이 나오기 전에 무엇이 위험한지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사우나에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열을 내며 일어서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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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것은 사우나 밖의 벤치였다. 선선한 저녁 바람에 머리가 식어서인지 자신이 꽤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자각이 찾아왔다. 사우나에서 나왔는데도 얼굴에 열이 팍 올랐다. 

그것을 본 것인지, 머리맡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클로드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신음했다.

“아아……이건 비웃어도 할 말이 없네. 본 게 선생님뿐이어서 다행인가.”

“나름대로 신선했어. 그래도 위험하니까 앞으로 사우나에서 갑자기 일어서지는 마.”

이제 와서 선생님 같은 소리를. 저녁 바람에 실려 들리는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꽤 상쾌하게 들렸다. 클로드가 얼굴에서 손을 떼고 벨레스를 바라보았다. 얼굴도 확실히 아까와 같은 심각함은 지워지고 한결 가벼워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왜 화났던 건데?”

“화낸 건 너 아니냐……고 해도 안 통하겠지?”

“내가 당신 화난 것도 못 알아볼 것 같아?”

클로드의 물음에 벨레스가 빙긋 미소지었다.

“맞아. 사실 조금 화가 났었는데. 이제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아서.”

“결국 왜인지는 안 가르쳐 주는 거야?”

“아직 완전히 풀린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풀렸단 소리지. 선생님일 때는 클로드의 온갖 의문에 비록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없을지라도 열심히 답을 해 주던 벨레스가 이렇게 의뭉스럽게 구는 것은 처음이었다. 클로드가 불만스레 입을 삐죽였다.

“그건 곤란한데. 형제가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건, 신선하긴 해도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라서.”

“지금 투정 부리는 건가?”

“이 정도는 괜찮잖아? 선생님.”

슬쩍 머리를 부비며 제 편한 대로 제멋대로 호칭을 바꾸는 것이 클로드답다. 그러나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일지 모른다 해도 얄미운 것은 사실이라 벨레스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클로드 역시 진지하게 벨레스가 대답해 줄 거라 기대한 것은 아닌지 더 투덜거리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뭐,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내가 잘못한 게 맞겠지. 미안해.”

“뭔지도 모르면서 사과하는 거, 보통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거 알지?”

“알지만, 왠지 사과해야 할 것 같단 말이지. 다른 사람도 아닌 형제가 화를 낸다는 건, 그럴 만한 일이라는 소리잖아?”

자칭 시의심 덩어리라고 주장하는 주제에, 아마도 클로드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을 벨레스의 감정에 대고는 의심 없이 사과를 해 온다. 형제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클로드에게는 유일하게 의심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지. 벨레스가 그에 대고 짧은 감상을 뱉었다.

“순순하네.”

“형제한테만 특별히 보여 주는 모습이니까 아껴 달라고.”

“특별히?”

“그래. 설마 당신은 아니라고 할 건 아니지? 여기따지 왔으면 운명으로 묶인 사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니라고 하면 내 쪽에서 삐질지도 모른다?”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닐 터인데도 꼭 모든 걸 아는 것처럼 적절히 튀어나온 말에 벨레스가 결국 웃음을 흘렸다. 

“어? 지금 진심으로 웃었지. 뭐야. 잘생긴 연하남한테 이런 소리 들으니까 막 마음이 풀려?”

힐다라면 아마 재수없다며 치를 떨었겠지만 스승 비슷한 입장에서는 또 달리 보이는 법이다. 클로드의 반색하는 꼴이 썩 귀여웠던지라 벨레스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는 대신 클로드를 일으켜 등을 떠밀었다.

“그래. 웃음이 나네.”

“그렇게 말하면서 쫒아내기인가. 매정하기는.”

“사우나에서 쓰러졌으면 방에 들어가서 쉬어야지. 전략 들여다본다고 또 늦게 자지 말고.”

“이제 사감 선생님도 아닌데, 날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야? 그렇게 나한테 관심을 가져 주다니 기쁘네. 오늘 정도는 그 말에 따라 볼까.”

결국 왜 화가 났다가 풀렸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클로드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찝찝함을 느꼈지만 벨레스의 표정이 정말 나쁘지 않았기에 얌전히 물러나기로 했다. 머릿속에서는 어느 정도의 조사를 할 궁리가 있었지만 그건 또 다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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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레스는 클로드를 먼저 보낸 뒤에 등을 떠밀었던 손을 가만히 말아쥐었다. 검으로 사람의 급소를 꿰뚫는 데 익숙한 손은 옷 위로도 정확하게 제 이름이 새겨진 위치를 짚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클로드 자신도 그 존재를 몰랐을 벨레스의 이름. 

적어도 두 가지 의문 중 하나는 확실해진 셈이었다. 그러자 남은 하나도 왠지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등에 무엇을 그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 그 청년은 어쩌면 포드라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뿐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끝까지 안 알려 주면 정말 화낼 거야.”

벨레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직은 입에 익지 않은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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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저자가 그 ‘선생님’이냐? 확실히, 눈에 띄는 사람이기는 하구만.”

“외모만 눈에 띄는 건 아니라고.”

당연하다는 듯 받는 클로드의 대답에 날데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지금까지 전적만 봐도 알지.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팔이 아주 안으로 굽었구만.”

적당히 놀려 줄 셈이었지만 방향이 조금 잘못되었다. 수염을 기른 지도 오래인 이 청년은 부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사내였다.

“뭐, 그럴 만한 사람이니 당연한 거 아니겠어?”

저런 말을 당연하다는 것을 하는 것은 젊어서인지, 그만큼 확신이 있어서인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자신에게는 다소 지나간 젊음의 빛에 날데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생각보다 진심이구만.”

클로드는 습관적으로 말을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어쨌든 날데르는 자신의 가신이었고, 모든 것을 감추는 것이 익숙하다지만 이건숨겨야 할 마음도 아니었다. 

“뭐, 그렇지?”

조금 멋쩍은 얼굴로 뱉은 말을, 날데르는 더 놀리지는 않았다. 다만 이 젊은 주군의 태도에 살짝 놀랐다. 쭉 팔미라에 있던 날데르는 클로드를 자주 만난 것은 아니었으나 가끔씩 마주할 때의 클로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딘지 몰려 있던 얼굴. 동맹령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날이 서 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팔미라에 있던 시절 언뜻언뜻 보던 모습이었음에도 새삼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그 전의 청년이 팔미라에서 있던 시절과는 다른 얼굴로 웃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래저래 차별로 치여 살던 팔미라보다 포드라가 더 기꺼운 것인가 생각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유를 알고 있다. 5년 전 벨레스가 실종되었을 때부터 가끔 굳은 속내를 비치는 클로드를 보아 왔으니. 그러니까 그게 다 저 선생 덕분이었다는 소리지. 

다만 날데르로서는 그 감정의 형태를 정확히 짐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주 얼굴을 맞이하지 못하는 탓도 있었지만 애초에 자신의 주군은 그렇게 쉬운 속내를 품는 녀석이 아니었다.

반려로 맞이하고 싶은 것이냐 묻고 싶기도 했으나 그건 또 너무 주책맞은 아저씨 같은 발언이라.

뭐, 알아서 하겠지.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의 연애사업에 크게 관심을 두고 싶지는 않았던 날데르는 처음으로 마주한 벨레스의 인상에 만족하는 것으로 감상을 끝냈다. 지금은 전쟁 중이기도 하니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시간을 제대로 쓰는 법일 터였다. 

“거 풋풋하구만. 어쨌든, 팔미라 쪽 병력은 준비됐다. 그래도 쉬운 상대는 아닐 텐데. 알다시피 그렇게 대규모 군대는…….”

“아아, 그거야 뭐,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 정도 전력으로도 가능하다고 보니까 승부를 건 거 아니겠어?”

“그동안 저울질하면서 웅크리고 있던 녀석 답지 않은 발언이구만.”

“뭐……지금은 선생님이 있으니까.”

또 그 사람 얘기인가. 어릴 때부터 봐 온 이 청년이 이렇게 솔직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보기 싫지는 않았음에도 날데르는 일부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참, 어린 놈이 연애한다고 티내니 서러워서 살겠나. 나는 떠나야겠다. 먼저 돌아가서 군을 정비해 오도록 하지.”

“어려운 부탁인데 들어 줘서 고마워. 부탁하지.”

“일단은 네 가신 아니냐. 우리 Khalid 꼬맹이가 드디어 움직여 보겠다는데 이 정도쯤이야……응? 뭐냐, 그 표정은?”

클로드가 어딘지 떨떠름한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으로 날데르를 바라보고 있다가 날데르의 물음에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그 이름도 오랜만이다 싶어서?”

“큭큭. 그렇다 해도 왜 그렇게 낯선 표정인 거냐?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하긴 벌써 몇 년이나 포드라에서만 지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이제는 굳이 팔미라식 이름을 숨길 필요도 없지 않겠냐.”

“그건……그렇지. 그냥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이런 젠장.”

젠장? 그거 나한테 한 말은 아니지? 날데르가 눈을 끔벅거렸으나 클로드는 가신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 대신 급하게 날데르를 떠밀었다 

“그럼, 팔미라병 쪽은 부탁해. 나는 이만 선생님한테 가 볼 테니까.”

그 말만 남기고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 클로드의 뒤에 대로 날데르는 그저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역시 청춘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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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를 두고 멍청하다거나 눈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포드라 전체를 뒤져도 몇 없을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클로드가 벨레스의 속내를 읽어내지 못했던 것은 결코 멍청하거나 눈치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날데르의 말대로 잊고 있던 것에 가까웠다. 숨귀는 것을 굳이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매일같이 의식하며 살지는 않았으니까. 

굳이 변명을 더 얹자면, 분명 포드라의 귀족 명부에는 클로드 폰 리건이라는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부계에서 받은 이름과 모계에서 받은 이름의 차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누군가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은 희미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배신감을 느낄 만한 일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특히, 듣지 못한 것이 이름이라면 남들보다 더 화를 낼 만한 이유인 경우가, 이 세상에는 있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것은 짚이는 바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간의 단서들을 돌이키자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들었다. 팔미라에도 서로의 이름으로 운명이 짝지어진 이들은 몇 다리 건너 하나쯤은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 이유가 맞기를 바란 것뿐인지도 모른다. 벨레스가 들려주지 않은 이름 때문에 화가 났다는 추측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끌린 운명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로 나타나는 셈이었으니까. 물론 마음이 끌리는 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비웃어 줄 요량도 있는 장난 같은 것이었지만 마음이 향하는 바와 맞는다면 얼마든지 어울려 믿어 줄 용의가 있었다. 

“선생……아니, 벨레스!”

그리 오래지 않아 벨레스를 찾아낸 클로드가 그 이름을 불렀다. 사관학교가 무너지고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게 된 지도 오래지만 옛 금사슴반이 주축이 된 군은 아직도 벨레스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가끔 세테스 정도를 제외하면 벨레스를 이름으로 브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클로드 자신으로서도 다소 낯선 발음이었다. 그러나 벨레스는 그 호칭 자체에는 별다른 지적 없이 자연스레 몸을 돌려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다소 급하게 부른 감이 없잖아 있었던지라 벨레스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클로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국령도 아니고, 여기 리건령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도 없지. 그냥……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해 보라는 듯 응시하는 곧은 시선 앞에서, 클로드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조금 치사한 것은 아닐까 잠깐 고민했다. 어쩌면 어리광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벨레스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망설임은 있었지만, 질문은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가고야 말았다.

“당신……내 다른 이름, 알고 있지?”

클로드의 질문에 벨레스의 눈동자가 한 번 눈꺼풀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눈동자에도 목소리에도, 누구나 알아볼 만한 파문은 없었다.

“……다른 이름 같은 걸 네가 가르쳐준 적이 있던가?”

눈치 빠른 청년은 그 당연한 반문에 넘어가는 대신 행간에 숨은 외면을 민감하게 읽어냈다. 이미 거기 있을 거라고 알고 있었기에 모른 척 한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해준 적 없지만, 당신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니야?”

클로드의 녹색 눈이 벨레스와 빤히 시선을 맞춰 왔다.하는 꼴을 보면 벨레스가 화가 났던 이유를 알아 와서 이러는 것이 분명한데, 그런 주제에 잔망스럽게 구는 것이 얄미울 법도 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벨레스는 곧 자신이 이 청년에게 퍽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야 말했다. 

“클로드. 너도 치사하게 군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긴 했는데. 그래도 벨레스, 당신이 확인해 주는 걸 듣고 싶어서.”

질책하는 목소리를 내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도 웃음기가 같이 섞여 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벨레스는 누가 봐도 화를 내는 것 같지는 않은 목소리로 어정쩡하게 말했다.

“형제라고 하는 걸 넘어서 이제 이름도 막 부르네.”

“응. 그러니까 당신도 그래도 된다 이 말씀이지. 어때?”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질까. 반쯤 한숨을 마시고 싶은 기분도 들어 숨을 크게 들이쉰 벨레스는, 그것을 다시 숨으로 뱉는 대신 거친 발음을 섞어 내었다. 

“……Khalid.”

그 순간 클로드의 얼굴 위로 스킨 감정은 지나치게 여러 가지가 섞인 채 빠르게 지나가 버려 벨레스로서는 모두 읽어낼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어지러운 감정 가장 위쪽에 기쁨에 속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제 만족해? 동맹의 맹주가 이렇게 겁쟁이인 줄은 몰랐네.”

클로드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얘기였던지라 클로드의 얼굴 위로 멋쩍은 미소가 씩 지나갔다 그러나 붉어진 볼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입은 제멋대로 잘도 나불거렸다.

“글쎄. 정말 겁쟁이면 이렇게 당신한테 정면으로 물어보지도 않지 않았을까?”

“그래서, 잘 했다고?”

“그건……아니지만. 미안.”

순순히 돌아온 사과에 벨레스는 더 화를 낼 이유를 잃고 그냥 웃었다. 그 웃음에 클로드의 얼굴이 따라서 확 퍼졌다. 상대를 조금쯤 놀릴 만한 여유까지도 함께 돌아왔다.

“……팔미라어를 할 줄 모르는 것 치고는 발음이 정확한데? 혹시 나 안 듣는 데서 많이 불러 봤어?”

“글쎄. 어떤 것 같아?”

“큭큭. 당신은 나랑 달라서 거짓말 잘 못 하거든. 들으면 뻔히 알지. 많이 불러 봤구나?”

“그러는 너는 거짓말을 잘 해서 ‘형제’한테 오늘까지도 진짜 이름 하나 가르쳐 주지 않았고?”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지만, 클로드는 벨레스가 어느 얼굴에 약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구긴 클로드가 불쌍한 목소리를 냈다.

“잘했다고는 하지 않겠지만……당신이 없는 동안에 포드라에서 몇 년을 살았다고 생각해? 나도 잊고 있었다고. 여기 포드라에서는 클로드가 진짜 이름이고.”

“5년 전에는…….”

“하하……우리 너무 멀리까지 되짚어가지는 말지?”

아직 의심이 더 크던 시절의 일을 재빠르게 덮어 버린 클로드가 벨레스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을 잡는다 해서 맥박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보다 높은 체온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유난히 이상하던 날의 벨레스를 떠올려 보면 어디를 확인해야 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클로드는 순순히 잡혀 준 벨레스의 양 손목 갑주 아래로 손을 감싸며 물었다.

“어느 쪽?”

“……오른쪽.”

벨레스의 대답에 클로드는 망설이지 않고 갑주의 잠금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간 갑주 아래로 드러난 것은 과연 클로드 자신의 이름이었다. 아니, 클로드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나. 그보다 먼저 받은 자신의 ‘최초의’이름이 그 곳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짐작하고 있던 사실임에도 눈앞에서 드러나는 것은 또 감회가 다르다. 

벨레스를 만난 것이 운명이라느니 기적이라느니 입을 놀린 적도 많았다. 그러나 정말 운명이 맞다는 듯 또렷하게 드러난 이름에 클로드는 심장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무게를 삼키며 또 굳이 웃어 버린 것은 어째서였는지. 

“……하하. 거봐. 내가 우리는 운명이라고 했잖아.”

클로드의 너스레에도 벨레스는 쉽게 넘어가는 대신 슬쩍 손을 빼내고 어디 한번 변명해 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네가 말하던 운명이라는 거랑 이건 좀 다르지 않아? 팔미라에서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지. 벨레스에게는 한 번도 그런 식의 마음을 전한 적이 없었다. 이름보다도 형제라는 호칭이 더 익숙했다. 하지만…….

“심술부리는 거지?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당신도 알고 있잖아?”

“응. 하지만 너도 굳이 네 이름을 나한테 확인받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다. 이런 식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 않은가. 흐름이 괜찮다면 올라타야겠지. 클로드가 벨레스가 빠져나간 손으로 머쓱하게 목을 쓸어내렸다.

“일단은 전쟁이 끝나고 말하려 했는데…….”

쿡.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벨레스가 즐겁다는 듯 말을 붙였다.

“그 말. 용병들 사이에서는 금기어였어. 그런 말 하는 녀석일수록 일찍 죽는다고.”

“팔미라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기는 한데……뭐, 괜히 미뤄 뒀다가 비명횡사하기는 싫으니 지금 말해 둘까. 별로 멋은 없지만.”

무슨 말을 할 지 들어 보겠다는 듯 벨레스가 고개를 까딱인다. 무슨 말이 나올 지 뻔히 알면서, 그 말을 시킨 것마저 자신이면서도 식사 메뉴라도 듣는 듯 여상한 표정인 것이 벨레스다웠다. 그런 벨레스를 향해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공기에 밀도가 있는 듯 입 밖으로 말을 밀어내는 것은 혀 하나로 동맹의 균형을 지켜 온 맹주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입술을 떠난 목소리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퍼져 벨레스에게 가 닿았다.

“나는, 당신이 내 반려가 되어 줬으면 해. 벨레스.”

클로드의 스승이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동료이며 클로드에게 형제라 불리는 이는 그 깔끔한 고백에 한참 전부터 물고 있던 미소를 얼굴 전체로 퍼뜨렸다. 

“청혼치고는 이것저것 빠진 게 많은 것 같지만, 좋아.”

“……그건……원래는 이런 식으로 할 생각은 아니었거든. 나는 때와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라서.”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니. 그래서 고백했잖아? 그리고 분위기 얘기를 하자면, 고백 다음에는…….”

클로드가 허락이라도 구하는 듯 천천히 벨레스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벨레스는 그 느긋한 접근을 기다리는 대신 먼저 발끝을 들었다. 

“…….”

제대로 된 키스라고 하기에는 짧게 섞이고 지나간 입맞춤의 흔적을 더듬듯 클로드가 혀로 입술을 쓸었다. 낯설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부끄러움은 섞이지 않은 미소가 그 입술에 희미하게 걸렸다. 

“선생님. 내 이름, 다시 한 번 불러 줄래?”

“……Khalid.”

“큭큭. 클로드도 뭐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당신 입으로 그 이름 들으니까 좋단 말이지. 진작 한 번만 불러 줬어도 좋았잖아? 알고 있었으면서.”

“흥.”

잊고 있었다는 변명만으로는 넘어가 주지 않겠다는 듯 벨레스가 뒤늦게 코웃음을 쳤지만 클로드는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불평 몇 번 정도야, 지은 죄가 있으니 얼마든지 들어 주지. 자신이 아는 벨레스는 그 이상으로 화를 낼 사람도 아니었다. 클로드로서는 새삼스러운 의문을 떠올릴 만한 마음의 여유도 있었다.

“그런데, 당신한테 내 이름이 있다는 건, 나한테도 있다는 소리인데.”

한쪽이 늦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클로드는 그런 의심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확실하게 인연의 끈이 이어져 있는데 아직까지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어딘가에…….

“그건 몰랐을 수밖에.”

벨레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망토 아래로 손을 쑥 집어넣는 바람에 클로드가 흠칫 놀랐다. 망토 안이라고 해도 상의를 두껍게 껴입고 있으니 딱히 맨살이 닿은 것은 아니지만 손을 등 뒤로 돌려넣은 탓에 거의 끌어안는 듯한 자세였다. 

하기야, 이제 와서는 상관없으려나. 클로드가 한순간 몸에 들어갔던 힘을 풀건 말건 벨레스는 거침없이 클로드의 등을 더듬어 기억에 있는 결을 찾았다. 날개뼈의 선이 갈라지는 언저리.

“윽, 선생님.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이거 성추행…….”

“……이쯤에.”

벨레스의 손끝이 옷 위로 클로드의 등을 긁었다. 그야 그런 곳에 있으면 스스로는 알 방도가 없지. 그렇다고 해도 굳이 이런 식으로 알려 줄 필요는 없을 텐데. 클로드는 소름이 돋는 감각을 감추기 위해 몸을 물리며 투덜거렸다.

“그야 안 보이겠지만, 당신은 언제 그렇게 내 속살을 들여다본 거야? 의외로 손이 빠른 타입이었나? 이거 부끄러운데.”

“그런 말을 하려면 부끄러운 표정이라도 짓고 말하지 않겠어?”

“이런. 들켰네.”

태연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손이 닿은 곳에서 열이 올랐다. 벨레스와 밀착해 있는 탓도 있겠지만, 서로의 이름이 가까워지면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 때문이 클 것이다. 그 증거로, 정면으로 보이는 벨레스의 얼굴보다도, 등 쪽의 옷 너머로 느껴지는 손목 쪽의 열기가 훨씬 강렬했다.

운명의 인연을 이런 증거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썩 멋진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클로드는 괜히 억울해졌다.

“이건 너무한데. 당신만 그렇게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니 말이야. 당신도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게 있으니 이건 비긴 걸로 하면 어때?”

“나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는 네가 말하는 거니 불안한데.”

“선생님……원래 이렇게 안 지는 성격이었나.”

“제자한테서도 배울 점이 있는 법이라서. 그래도 이번에는 거래에 응해 줄까.”

“부디.”

그렇게 말한 클로드가 거래에 대한 뇌물이라도 된다는 듯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보다 몸이 붙은 채 겹쳐진 입술은, 조금 전처럼 쉽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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