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착취 6

w.김목련(@magnolia_KV)



아아악 나도 몰라! 비명을 내지른 정국이 제 손에 들린 샤프를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는 표정을 하고는 눈앞의 문제를 노려본다. 고 1, 그것도 채 1학기의 반절도 지나지 않은 시간. 왜 자신이 윤리 문제를 풀고 있어야하는 것이며 태형의 생각에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하게 김태성을 좋아하게 되어버린 자신이 또 너무도 당연한 수순으로 김태형을 좋아하게 된 이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김태형을 좋아한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국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그리고는 제가 내던져서 바닥에 황량히 버려진 샤프를 멀거니 쳐다본다. 윤기 형은 아무것도 몰라. 정국이 구겨진 얼굴을 하고는 슬금슬금 샤프를 들어 올렸다. 문제에 밑줄을 치면서 읽어나가는데도 정국의 머리통 속에는 태형이 뛰어다녔다.



김태성, 그리고 김태형. 사이좋게 제 머릿속을 한가득 채우고는 하하호호 웃음을 흘리는 형제들 덕분에 정국은 금방이라도 죽을 맛이었다. 결국 샤프를 다시 주워들어 놓고는 한 문제도 풀지 못한 정국이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고통에 신음했다.


아니, 동시에 두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말이 돼? 심지어 형제를? 두 사람은 말이 형제지 딱히 닮은 구석도 없고 다르게 생겼는데. 성격도 다르고 얼굴도 완전히 다르잖아. 근데 내가 그런 둘을 다 좋아한다고? 머리카락을 움켜쥔 정국이 으으윽 소리를 내며 노트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근데 애초에 이렇게 짧은 시간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가능한가? 좋아한다는 마음을 품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잖아. 근데 나는 태형이 형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엄청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는데. 헐, 뭐야 알고 보면 첫눈에 반했다는 뭐 그런 거야? 파드득 고개를 들어 올린 정국이 허망한 표정을 하고는 맞은편의 벽면을 노려보았다.


벽면에는 태성과 제가 찍었던 사진이 코르크판에 붙여져 있었다. 책상의 맞은편에 붙여놓고 틈틈이 보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의 옆 부분에 초록색의 명찰이 대롱대롱 달려있다. 선명하게 새겨진 김태형이라는 이름이 방안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시금 간질간질거리는 심장은 이제 김태형의 이름을 보면 자동이었다. 결국 정국은 다시금 퍽 소리가 나도록 노트에 얼굴을 파묻는다.


어떻게 첫눈에 반해? 그때 태형이 형이랑 별다른 대화를 한 것도 아닌데? 따라 들어온 김태성이 바로 차단해서 제대로 마주한 것도 아니었는데? 헉, 나는 지독한 얼빠였던 건가….



정국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태형의 얼굴을 생각했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헉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힐 정도로 잘생긴 김태형의 얼굴을. 태형의 얼굴을 가만가만 떠올리던 정국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첫눈에 반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잘생기기도 했다.


눈이나 코, 입 뭐하나 빠지는 것 없이 잘빠졌다. 심지어 얼굴형이나 몸매조차. 태형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정국은 저도 모르게 동요를 흥얼거리며 노트에 얼굴을 비볐다. 사과 같은 형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반쯤은 넋이 나간 정국이 흥얼흥얼 동요를 부르다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두 명을 좋아한다니, 그것도 형제를. 어쨌든 원점으로 돌아간 문제였다. 나는 천하의 쓰레기였던 것인가. 나도 내 맘을 모르겠어. 내 두 사랑은 한 사랑보다 깊어…. 저도 모르게 다시금 다비치의 두 사랑을 흥얼거리던 정국이 질끈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미쳐 버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라도 좀 식히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휴대폰을 들었는데….





“…어.”





내 눈이 드디어 맛이 간 게 아니라면 이건 필시 태형이 형의 전화겠지.








정국이 어색한 표정을 하고는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정국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없이 진지한 태형의 표정은 어딘지 낯설기만 하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진지하게 가라앉은 태형의 표정에 정국은 눈을 깜빡이며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김태형의 앞에는 딸기요거트 음료가 놓여 있었다. 휘휘 휘저어 분홍빛이 도는 음료가 한없이 진지한 태형의 표정이랑은 다소 언밸런스하다. 정국의 어색한 웃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태형이 가만히 웃는다. 입꼬리를 당겨 웃는 태형의 얼굴을 마주하며 정국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학교 밖에서 마주하는 김태형은 처음이라 지금 이 상황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게다가 어쩌면 자신이 김태성과 김태형, 두 형제를 나란히 좋아하는 지도 모를 이 시점에. 정국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과외형인 윤기를 속으로 씹어대기 시작했다. 괜히 사람 마음 심란해지게 무슨 그런 핵폭탄 급 발언을 던져서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정국의 일그러진 표정을 쳐다보며 태형이 컵을 들어 올린다. 빨대로 음료를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인 태형이 음료를 삼킨다. 정국은 그런 태형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정국이 입을 열 필요도 없이 김태형이 입을 열었다.





“너 김태성 좋아한다고 했지.”





…그게 지금 가장 피하고 싶은 문제인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정국은 태형의 말에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깜빡깜빡, 별다른 대답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정국을 태형은 담담히도 기다려 주었다. 잠시간의 정적에 정국은 저도 모르게 스읍 숨을 삼켰다.



그래, 좋아하지. 전정국은 김태성을 좋아한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현재까지. 전정국이 김태성을 좋아한다는 것은 굉장히 당연하고 또 타당한 논제였다. 다만 이 논제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끼어들기는 했지만. 전정국이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변수.


아니, 아니지. 확실한가? 내가 정말로 김태형을 좋아하나? 그렇지만 나는 김태성을 좋아하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형제를 나란히 좋아할 리는 없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다가 태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전정국이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가설은 확실치 않은 것이었지만 전정국이 김태성을 좋아한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었기에.





“태성이랑 잘 되게 내가 도와줄게.”

“네?”





태형의 말에 정국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태형의 얼굴을 얼빵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마치 드라마처럼 어리벙벙한 정국의 표정을 보며 태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또 이상한 것은 비단 전정국 뿐인 것 같았다.


전혀 예상을 할 수 없게 이어지는 상황과 김태형의 대사에 전정국은 마치 삐걱대는 꼭두각시처럼 굴었다. 삐걱삐걱, 소리라도 날 것만 같은 정국의 반응에도 태형은 오롯하게 정국을 쳐다본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정국이 저도 모르게 눈가를 구기고는 제 앞의 음료를 쳐다보았다. 김태성이랑 잘 되게 도와준다고, 태형이 형이.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왜?



정국의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질문들을 모조리 뱉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정국은 머릿속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서 다시금 쪽 음료를 마시는 김태형을 쳐다본다. 주말 동안 어느새 다시금 차분해진 태형의 머리카락을 보며 정국이 저도 모르게 태형을 향해서 물었다.





“왜요?”

“왜냐니.”





그야, 네가 도와주고 싶게 생겼으니까. 태형이 정국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리고 덕분에 정국은 더욱더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답변이라 정국의 속이 알쏭달쏭하다. 도와주고 싶게 생겼다고? 그건 도대체 뭐 어떻게 생긴 건데?


아니 그것보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남의 연애사업을 도와주려고 하나? 그것도 자신의 동생과 관련된 일인데? 전정국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정국은 자신의 앞에서 태연한 얼굴을 하고는 음료를 마시는 김태형을 가만히 쳐다본다.



김태형은 전정국이 당황할 법한 말만 모조리 골라서 앞에 주르륵 늘여놓는다. 그리고는 정국의 반응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툭툭 뱉어내는 것이었다. 정국은 태형과 이 카페에 마주 앉은 이후로 태형이 하는 모든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고 있는 것에 비해 김태형은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국은 고개를 들어 올려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짙은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이 아래로 차분하게 깔려 있다. 자신의 음료를 멀거니 쳐다보는 얼굴은 사람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정국의 머릿속으로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툭 떨어져 내린다.


그 선배 미친놈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잖아. 깜빡. 정국의 시야가 점멸한다. 눈앞으로 김태형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진다. 문득 태형의 얼굴 위로 태성의 얼굴이 겹친다. 환하게 웃는 김태성, 장난을 치듯 얼굴을 찡그리며 웃는 김태성, 눈가를 구기며 자신을 노려보는 김태성.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 미친 듯 소리치며 악을 쓰는 김태성.





“형 되게 이상한 거 알죠.”

“…우와, 너 되게 직설적이다.”





정국이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눈가를 구기며 태형을 향해서 말한다. 그리고 그런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환한 얼굴을 하고는 웃는다. 태형의 말에도 정국은 그저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앞에 있는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은 빨대를 이용해 음료를 휘휘 젓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앉은 정국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분홍색의 음료가 태형의 손에 쥔 빨대에 의해 휘휘 뒤섞였다. 마치 자신의 속을 죄다 헤집어 놓은 것처럼, 음료는 너무도 쉽게 김태형의 손안에서 섞여든다. 정국은 아무런 말 없이 태형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리고 태형 역시 그런 정국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 도와줘서 형이 얻는 게 뭔데요?”





정국의 표정에서 의아함이 한가득 묻어 나온다. 그리고 태형은 그런 정국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전정국은 그저 가만가만 웃는 태형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김태형의 속을 알 수 없던 날이 있었던가. 짧다면 굉장히 짧은 시간을 안 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처럼 속이 가늠되지 않았던 적은 없었는데. 정국의 눈동자가 태형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김태형의 깊은 눈동자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목 안이 껄끄러워진 정국이 빨대를 이용해 홀짝 음료를 삼킨다. 그리고 태형은 그런 정국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입꼬리를 당겨서 웃는다. 그것도 엄청 환한 얼굴을 하고는.





“얻는 건 없는데. 그냥 재미있으려고 하는 거야.”





김태형의 말에 정국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구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태형을 저도 모르게 노려본다. 달그락, 컵 안에 담긴 얼음이 녹으며 잘게 무너진다. 일그러진 정국의 표정에도 태형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별다를 것 없는 얼굴을 하고는 전정국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폼이 그렇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삼키며 태형을 향해서 묻는다.


제 감정이 형한테는 그냥 재미에 불과한 거예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가만가만 눈을 깜빡였다. 전정국은 김태형이 저런 표정으로 눈을 깜빡일 때면 속이 뒤틀렸다. 분명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데 영원에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김태형의 눈동자는 차분한 색을 하고는 침전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어, 정국아. 태형의 붉은 입술이 만들어 내는 음절은 무겁기만 하다. 정국은 잠시 자신의 앞에 있는 태형을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김태형을 쳐다보고 있는데 이내 태형이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야, 그리고 너는 네 주위에 나만큼 김태성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너 그렇게 어리숙하게 굴면 죽었다 깨어나도, 일백 번을 고쳐서 태어나도 김태성 못 꼬셔, 알아? 솔직히 나쯤 되니까 이런 제안하는 거야, 너 김태성 꼬시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따박따박 쏘아대는 태형의 말에 정국은 저도 모르게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의 그 차분한 분위기는 어디로 홀랑 내버렸는지 어느새 평소의 김태형이 되어버린 눈앞의 이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순식간에 급변한 태형의 태도에 정국은 저도 모르게 평소처럼 휩쓸려가는 중이었다. 김태형은 마치 파도처럼 전정국의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 버린다. 정국은 눈을 깜빡이며 태형의 말에 저도 모르게 맹한 목소리를 흘리는 중이었다.



네, 네? 아아, 네. 정국의 고개가 태형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끌려 위아래로 움직인다. 예스맨이 따로 없다. 그리고 그런 정국의 반응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태형이 휙 자신의 에코백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낸다. 팔락대는 종이가 정국과 태형의 사이에 놓였다. 정국은 자신의 앞에 탁 소리를 내며 놓인 종이를 당황스러운 낯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이어서 에코백을 뒤적여 볼펜을 꺼낸다. 딸깍 소리가 나도록 볼펜을 누른 태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는 종이의 아랫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한다. 휘리릭 휘갈겨 서명을 끝낸 태형이 정국의 앞으로 야심찬 표정을 하고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정국은 그런 태형의 손끝과 볼펜, 그리고 계약서라고 쓰인 종이를 번갈아 들여다본다, 그 와중에 동글동글 귀여운 태형의 사인에 시선이 가는 자신은 미친놈이 틀림이 없다. 정국은 태형의 사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렇게 또 멍하니 있다가는 김태형에게 휩쓸려 갈 자신이 불 보듯 훤하다.





“이게 뭔데요?”

“우리 계약서. 내가 너 도와준다는 내용이야.”





김태형의 말에 전정국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등학생이, 그것도 돈 문제도 아닌 연애 문제로 계약서까지 쓴다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지만 어쩐지 굉장히 진지한 표정의 태형을 보니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다. 결국 정국은 느리게 시선을 내리깔고 태형이 내민 계약서를 쳐다본다.






계약서


김태형은 전정국의 연애를 최선을 다해서 돕는다. 또한 전정국은 그런 김태형에게 최선을 다해 응한다. 계약은 전정국이 성공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까지 유효하다. 본 계약의 세부사항은 아래와 같다.


1. 전정국은 김태형의 연락을 씹지 않는다.

2. 전정국은 김태형을 피하지 않는다.

3. 전정국은 매주 일요일 김태형과 최소 3시간의 만남을 갖는다.

4. 전정국은 김태형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한다.







…이게 뭐야. 정국이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태형을 향해서 고개를 들어 올린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는데 어째서인지 자신의 앞에 있는 태형은 생글생글 웃으며 당당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지만 전정국은 알았다. 지금 김태형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김태형 한정 호구가 되어 휩쓸려갈 것이라는 걸. 결국 정국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는 입을 연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형이 절 도와준다는 내용인데요?”

“어느 모로 보나 내가 널 돕는다는 내용 아니야?”





태형이 동그랗게 뜬 눈을 하고는 정국을 향해서 말했다. 그리고 정국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태형 덕분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나하나 문장을 곱씹고 또 곱씹어도 딱히 김태형이 전정국을 돕는 내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예계약이라면 또 모를까.


정국은 숫자 1을 제 손으로 콕 집으며 태형을 쳐다보았다. 이거 뭐예요. 정국의 말에 태형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 계약서를 향한다. 그리고는 아아, 하고 아무렇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너의 연애코치 같은 건데, 네가 내 연락을 씹거나 무시하면 안 되잖아.”





태형의 말에 정국은 잠시 알쏭달쏭한 표정을 하고는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태형을 쳐다보았다. 태형은 정국의 표정을 보더니 눈을 마구 반짝이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고는 정국의 앞으로 쑥 제 얼굴을 들이밀더니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이거 사실 가만히 보면 하나하나 다 당연한 거야.”





내가 김태성이 좋아하는 타입에 대해 알려주고 너를 도와주려면 기본적으로 함께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긴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히 네 시간도 할애해 줘야지. 야, 솔직히 나처럼 김태성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거 같니 정국아? 너 진짜 이거 봉 잡은 거라니까. 너 나 아니면 김태성이랑 연애는 꿈도 못 꿀 걸, 김태성 취향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너?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떠드는 태형의 입술을 가만히 쳐다보던 정국은 이내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어,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김태형의 휘황찬란한 말발에 현혹된 것인지 자신의 앞에는 사인이 된 계약서가 덜렁 놓여 있었다.



김태형의 눈가가 환하게 휘어진다. 세상 해맑은 얼굴을 한 태형이 정국의 앞에 놓인 계약서를 홀랑 집어갔다. 그리고는 착착 야무지게 접어서 다시금 자신의 에코백에 쏙 집어넣는다. 어느새 마지막 모금만이 남은 음료를 쭉 들이켠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때까지 정국은 자신의 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뭐야, 나 언제 사인한 거야? 제 주인의 속마음도 모르고 가볍게 움직인 제 손이 이토록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자신의 앞에 앉은 정국을 내려다보며 환한 얼굴을 하고는 웃는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정국아.”

“아니, 잠깐. 잠깐만요, 형.”





태형은 정국의 말에도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이 휙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김태형의 스니커즈가 타박타박 가벼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정국은 태형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본다. 태형의 선이 곧은 어깨와 마른 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돌연 휙 고개를 돌린 태형이 정국을 쳐다보았다.


까만색의 머리카락이 정국의 앞에서 팔락 나부낀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태형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태형은 그런 정국을 향해서 어딘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툭 흘렸다.





“근데 넌 내 머리를 보고 아무런 생각도 안 들어?”

“네? 아, 잘 어울려요.”





전정국이 뱉어낸 목소리에 태형의 입꼬리가 가볍게 말려 올라간다. 예쁘게 휘어지는 김태형의 눈을 보며 정국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심장이 쿵쿵 빠른 속도로 뛴다. 김태형 한정 호구 전정국은 알게 모르게 또다시 김태형에게 휩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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