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볼! 마이 볼, 마이 볼!”

 

 

패스로 날아온 공을 받아 전속력으로 달렸다. 드리블로 상대편을 제친 영웅이 골대와 4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슛을 날렸다. 발등을 정면으로 맞고 날아간 공이 몸을 날리는 골키퍼의 손을 스치며 그대로 골망으로 돌진했다.

 

 

“아자!”

 

 

영웅이 숨을 헐떡이며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같은 편인 친구들이 영웅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지나갔다.

 

영웅의 골을 끝으로 경기는 파했다. 운동장 스탠드 옆에 자리한 시계탑이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신관 3층에 딱 하나 있는 샤워실로 모두들 우르르 몰려갔다. 영웅은 몸을 빨리 씻고 나와 교복으로 갈아입고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며 5층으로 향했다.

 

다목적실은 5층 복도 가장 끝에 있었다. 이곳은 소현 고등학교 천문학 동아리의 동아리실이다. 사실상 한 달에 한 번씩 저녁에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거나 태양의 흑점 따위를 관측하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하는 일이 없는지라 부원들의 쉼터로 쓰이는 곳이었다. 그마저도 동아리실을 쓰는 부원들이 얼마 없어 주로 오가는 사람은 부장이나 영웅이 다였다.

 

불을 켜지 않아 다목적실은 어두컴컴했지만 커튼을 열어 두어 햇빛이 환하게 들어왔는데, 바로 그 밑에 천체관측부의 부장이 누워 있었다.

 

일렬로 붙여 놓은 책상 위에 머리를 괸 채로 느른하게 누워 책을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가느다란 뿔테 안경 너머 큰 눈망울이 영웅에게로 향했다.

 

 

“불도 안 켜고 뭐 하냐?”

 

 

영웅은 핀잔을 주면서도 불을 켜지 않고 유현이 누워 있는 책상 밑에 털썩 앉았다.

 

유현이 책을 내려놓고 밑으로 손을 뻗어 영웅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졌다.

 

 

“감기 걸려.”

“이 정도로 뭘. 그리고 울 누나가 그러는데, 무식한 놈은 감기도 안 걸린대.”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말에 유현이 큭큭 웃었다. 영웅이 목에 두른 수건을 빼낸 유현은 몸을 반쯤 일으켜 영웅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부드럽게 털어 주었다. 기분 좋은 손놀림에 영웅이 눈을 감았다.

 

 

“오늘은 어땠어.”

“이겼지.”

“네가 골 넣었구나.”

“어떻게 알았어?”

“들어올 때부터 들뜬 얼굴이었잖아.”

 

 

머리를 얌전히 맡기고 있던 영웅이 혀를 내둘렀다.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넌 머리가 얼굴에 달렸잖아.”

“……야, 너 그거 말이 이상하다?”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난다는 얘기야.”

 

 

유현이 웃으면서 수건을 거뒀다. 어느새 뽀송뽀송해진 머리칼을 손으로 툭툭 매만지던 유현은 아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책상 밑에 앉아 있는 영웅의 머리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아래로 걸쳤다. 내려온 발뒤꿈치가 영웅의 가슴에 닿았다.

 

 

“단추.”

 

 

유현이 몸을 숙여 팔을 뻗었다. 위에서 내려온 손이 영웅의 셔츠 단추로 향했다. 풀린 단추 두 개가 톡, 톡 잠기는 동안 영웅은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머리칼을 간질이는 입김이 뜨겁게 와 닿았다.

 

 

“됐다.”

 

 

유현이 손을 거두자마자 영웅이 숨을 내쉬며 마른침을 삼켰다.

 

 

“참 나, 누가 학생회장 아니랄까 봐.”

 

 

목 끝까지 완전히 채워진 단추가 목을 조이는 기분에 영웅은 고개를 꺾었다. 작은 움직임에 유현의 발뒤꿈치가 가슴을 스치자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제 학생회장 아닌데. 다음 학생회장 선출됐잖아.”

“그래도 올해까진 네가 회장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도 속이 다 시원하다.”

“왜?”

“학생회 일 때문에 바쁠 일 없을 거 아니야. 뭐 좀 같이 하려고 하면 맨날 불려 가고.”

“그래? 난 나름대로 학생회 일보다 너를 우선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상한 대꾸에 말문이 막혔다. 영웅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마룻바닥을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뭐……. 그랬나.”

 

 

동그란 머리통을 뒤에서 뚫어져라 바라보던 유현이 입을 열었다.

 

 

“너도 올해 끝이네. 축구부장.”

“응.”

“마지막 시합이 20일이라 그랬나?”

“응. 리그는 11월에 다 끝났으니까 이번엔 서진고랑 친선.”

“아쉽겠네, 구영웅.”

“내년에 체대 입시반 들어가면 운동은 질리도록 할 텐데, 뭐.”

 

 

유현이 영웅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가 헤집었다가 다시 정리해 주면서 손장난을 쳤다. 손끝이 두피를 스칠 때마다 영웅은 마룻바닥을 세게 긁었다.

 

아무 말 없이, 의미 없이 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영웅이 문득 입을 뗐다.

 

 

“근데 이젠 여기 이렇게 못 있겠네.”

“왜?”

“3학년 되면 동아리 활동 거의 안 하는 걸로 봐야 하니까. 부장 자리도 물려줄 텐데 그럼 열쇠도 넘겨줄 거고.”

“음.”

“이 동아리도 망하겠다. 원래 사람 없던 거 너 본다고 애들 우르르 신청했던 거니까. 다들 관심 없어서 활동도 잘 안 했고.”

“아쉬워?”

“뭐……. 넌 안 아쉽냐?”

 

 

영웅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유현의 눈에 웃음기가 스쳤다.

 

 

“아쉽지. 앞으론 어디서 너랑 노닥거리지. 너 체대 입시반 들어가면 이럴 시간도 없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점심에 시간이 안 나겠냐. 그때 어디든 가지, 뭐.”

 

 

아무렇지 않게 답한 영웅은 허물어질 것 같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점심시간 끝 5분 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영웅이 읏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자. 다음 시간 수학인데. 아아, 싫다.”

 

 

문을 열고 나가는 영웅의 귀가 옅게 붉어져 있었다. 유현은 영웅의 뒤를 따르며 한참이나 그의 귀에 시선을 두었다.

 

 

 

 

“아자. 오늘 돈가스다.”

 

 

영웅이 콧노래를 흘리며 빈 식판을 흔들었다. 옆에 서 있던 형석이 정신 사납다며 영웅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윽. 엄살을 부리며 형석을 노려보던 영웅이 이내 배식을 받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빈자리를 찾았다.

 

여섯 명이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제일 먼저 앉은 영웅은 제 맞은편에 유현이 앉는 것을 흘긋 보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아, 나 문학 지루해 죽는 줄 알았잖아.”

“너도? 나도!”

“씨바, 목소리가 자장가야. 선생 하지 말고 자장가 불렀으면 대박 났을 텐데.”

 

 

불평을 늘어놓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있는데 식판 위에 무언가가 얹어졌다. 영웅의 식판 위에 제 몫의 돈가스 하나를 얹어 준 유현이 “그럼 그 노래는 끝까지 듣는 사람은 없겠네.”하며 대화에 섞여 들었다.

 

영웅은 간질간질한 한숨을 삼키며 식판에 얼굴을 박을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국을 퍼먹었다.

 

 

“아. 근데 나 아까 빅뉴스 들었지롱.”

 

 

형석이 음흉한 얼굴로 유현을 보았다. 유현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나를 봐?”

“신유현. 너 연희 어떤데.”

“연희? 연희가 왜.”

“짜식이. 그럴 만한 일이 있으니까 그러지. 눈치도 빠른 놈이. 알면서~”

 

 

숟가락을 놀리던 영웅의 손이 뚝 멎었다. 이내 영웅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우걱우걱 먹었다.

 

 

“글쎄. 모르겠는데.”

“자식이, 내숭 떨긴. 어떤데. 응? 진짜 어떤데.”

 

 

영웅은 숟가락을 식판 위에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반들반들한 검은 콩을 집으려고 했으나 미끌미끌한 검은 콩은 자꾸만 젓가락을 비껴 나갔다.

 

유현이 검은 콩을 집어 영웅의 숟가락 위에 올려 주며 대답했다.

 

 

“어떻긴 뭘 어때. 연희는 연희지.”

“치, 재미없는 자식. 아무튼 조만간 좋은 일 있을 거다.”

 

 

숟가락 위에 덩그러니 올려진 검은 콩이 서러워 보였다. 영웅은 검은 콩을 입에 넣어 깨작깨작 씹었다.

 

 

“좋겠다, 신유현. 인기 많은 놈. 부러워 죽겠네.”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도 케빈과 함께다.”

“미투. 솔로 크리스마스 만세.”

 

 

한숨을 푹 내쉬던 형석이 아무 말 없는 영웅의 팔을 툭 쳤다.

 

 

“구영웅. 넌 왜 아닌 척하냐?”

“내가 뭘.”

“넌 뭐, 누구 있냐?”

“있긴 누가 있어.”

“하긴. 뇌까지 근육으로 된 놈이.”

“내가 뭘!”

 

 

발끈하는 영웅의 입에서 밥풀이 튀었다. 에헤이! 형석이 질겁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 모습을 보며 킬킬대던 진영이 음흉한 낯으로 말했다.

 

 

“근데 구영웅. 진짜 누구 있는 것 같지 않냐?”

“왜?”

“여소 해 준다고 해도 맨날 까잖아. 여자 얘기 나와도 시큰둥하고. 예전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 봐. 좋아하는 사람 생겼지?”

 

 

아니거든, 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술이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헐.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뭐야?”

“진짜 있냐? 진짜로?”

“허얼, 이 새끼 존나 내숭 떨었네?”

 

 

형석이 영웅의 등을 퍽퍽 때렸다. 순식간에 영웅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영웅이 당황해서 입술을 달싹이다 맞은편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유현과 눈이 마주치자 침을 꼴깍 삼켰다.

 

 

“아니야. 없어.”

“이 새끼 있네! 누군데?”

“아, 없다고!”

“아, 알았어, 알았어. 밥풀 튀어, 새끼야. 모른 척해 줄게.”

 

 

진짜 없다니까. 영웅이 억울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식판 위로 얼굴을 박았다.

 

 

“저 새끼 저거 분명 짝사랑이야.”

“쟨 고백도 못 할걸? 어물어물대다가 딴 놈한테 빼앗기지.”

“야! 그러지 말고 우리가 도와줄게. 고백해라. 엉?”

 

 

없다고. 영웅이 호들갑을 떠는 친구들을 흘겨보며 돌을 씹는 듯한 얼굴로 돈가스를 질겅질겅 씹었다.

 

 

“야. 크리스마스에 고백해 버려. 아님 이브에! 이브에 고백하고 데이트를 크리스마스에 하면 되지.”

“뭣하면 우리가 대신 전해 줄까? 엉?”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고백하는 건 어때?”

 

 

마지막 말에 영웅이 돈가스를 삼키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뻣뻣하게 돌렸다. 유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매단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어, 좋네! 야. 이번 크리스마스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면 고백하는 거야. 너 같은 놈한테는 동기가 필요하지.”

“그래! 아, 이따 검색해 봐야지.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 오려나?”

 

 

영웅이 겨우 돈가스를 삼켜 넘기고선 유현을 마주 보았다.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던 영웅은 이내 입술을 혀로 축이며 눈을 내리떴다. 입 안이 까슬까슬했다. 더는 밥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칼바람이 걸어가는 그들을 에워쌌다. 영웅이 점퍼 안으로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추워.”

“오늘 얇게 입고 나왔다 했다.”

 

 

유현이 가던 길을 멈춰 섰다. 영웅도 따라 멈춰서 고개만 힐긋 돌려 유현을 보았다. 유현이 가방 안에서 목도리를 꺼내 영웅의 목에 둘러 주었다.

 

 

“왜 너 안 하고.”

“난 목도리 답답해서 안 하잖아.”

 

 

목도리에 둘둘 싸여 눈만 바깥으로 내놓은 영웅이 유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유현이 눈썹을 치켜세우자 영웅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넌……. 안 물어보냐?”

“뭘?”

“애들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막 그랬잖아.”

“으음. 있어?”

“……어.”

“그래?”

 

 

유현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영웅의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영웅은 침울한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근데 너, 고백 받으면 받아 줄 거야?”

“누구한테?”

“연희 걔 있잖아. 걔가 너한테 고백할 것 같던데.”

“글쎄.”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이 주제로 더 이상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것도 같았다.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것이 목도리로 가려져서 다행이라고 영웅은 생각했다. 기운이 쪽 빠져서 어깨가 축 처졌다.

 

칼바람이 위잉, 허공을 도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무 말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영웅의 집이 코앞이었다.

 

 

“사귈까?”

 

 

유현이 문득 물었고,

 

 

“어? 사귀게?”

 

 

영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영웅의 집이 바로 앞이었다. 유현은 멈춰 서서 영웅의 얼굴을 눈으로 하나하나 더듬었다. 영웅의 낯에 의아한 기색이 들 때쯤, 유현이 피식 웃었다.

 

 

“아니. 들어가. 내일 보자.”

“어? 어어. 잘 가.”

 

 

영웅은 얼떨결에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유현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귄다고, 만다고……?”

 

 

영웅의 멍한 중얼거림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번 주 중 가장 포근한 날씨였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몸을 쓰다 다치지 않으려면 평소보다 스트레칭을 배로 해 줘야 했다. 영웅은 몸을 열심히 풀어 주며 유현이 건네는 보리차를 받아 들었다. 따뜻하게 데워진 물을 마신 후 다시 유현에게 내밀었다.

 

 

“안 와도 되는데. 안 귀찮냐?”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근데 진짜 다들 할 거 어지간히 없는 모양이다. 난 너만 올 줄 알았는데 우리 학교 애들 꽤 왔더라.”

“응. 걔네는 정말 할 일이 없는 애들인가 보지.”

 

 

유현이 여상하게 웃으며 영웅이 벗어 둔 점퍼를 영웅의 어깨에 걸쳐 줬다.

 

 

“잠깐이라도 따뜻하게 있어.”

“응. 빨리 시작하면 좋겠다.”

“끝나고 따뜻한 거 먹으러 가자.”

“우동 먹자. 새로 생긴 데.”

“그래. 추우니까 무리하지 마.”

“어. 이제 하려나 보다.”

 

 

영웅이 점퍼를 유현의 품에 밀어 주고 운동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발목을 열심히 풀어 주며 영웅은 스탠드 쪽을 흘긋 보았다. 이쪽을 보고 있는 유현에게 손을 흔들어 준 영웅은 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동전 던지기로 영웅의 팀이 먼저 공을 가져가게 됐다. 축구부장이자 축구부의 일원으로서 마지막으로 참여하는 경기였다. 이제 3학년에 올라가면 공부도 운동도 소홀히 할 수 없고 이렇게 시간을 내서 축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씁쓸하다기보다는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축구야 대학에 가서 동아리에 들든 나이 들어 조기 축구를 하든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영웅은 오히려 유현과 같이하는 천체관측부 활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는 게 더 씁쓸하고 아쉬웠다.

 

영웅은 달리면서 스탠드 쪽을 흘긋 보았다. 별것도 아닌 경기에 유현이 집중하고 있었다. 어쩐지 유현과 눈이 마주친 듯했다. 열심히 달리자. 영웅은 코를 훌쩍이며 오가는 공을 눈으로 좇았다.

 

영웅은 운동을 좋아했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보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행위라서 좋았다. 땀을 잔뜩 흘리면 개운한 것도 좋았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이겨낼 때의 그 카타르시스도 좋았다.

 

뛰는 내내 영웅은 실실 웃었다. 친선 경기이기 때문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서인지 부원들 모두가 가벼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왕이면 이기자는 정신 때문에 설렁설렁 뛰지는 않았다.

 

유현이 자신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때문에 더 기분이 들떴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유현이 함께 하진 않더라도 봐 준다는 것이 가슴을 살랑이게 만들었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전반전이 끝이 났다. 점수가 나지 않았기에 후반전은 더 치열해질 것이었다. 쉬지 않고 움직여서인지 땀이 조금 맺혔다. 영웅은 옷을 펄럭이며 스탠드로 향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갔지?”

 

 

유현이 없었다. 화장실에 갔나. 영웅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앉아 있던 여학생들 중 한 명이 영웅의 팔을 콕 찔렀다.

 

 

“회장 오빠 찾으세요?”

“어? 어어.”

“그 오빠 어떤 언니랑 같이 가던데.”

 

 

호기심 깃든 반짝반짝한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영웅은 고맙다고 말하며 자리를 피했다.

 

유현인 나 따라서 혼자 왔는데. 누가 불렀지? 혼자서 골똘해 있는데 부원 한 명이 다가와서 영웅에게 이온 음료를 내밀었다.

 

 

“자.”

“아, 땡큐.”

“신유현 아까 연희가 불러서 가는 것 같던데.”

“김연희?”

“응. 둘이 사귀냐?”

 

 

음료수의 뚜껑을 따던 영웅이 뚜껑을 따다 말고 그대로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부원이 그 둘이 사귀냐며 다시 한 번 물었고, 영웅은 “몰라.”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발목을 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던 기분이 땅 밑으로 툭 처박혔다. 전화를 해 볼까. 그러나 영웅은 고개를 저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게 뭐가 큰일이라고 전화를 한단 말인가.

 

잠깐 자리를 비운 게 맞긴 맞을까. 오늘 우동은 같이 못 먹는 건가. 영웅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신유현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걸까. 영웅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뇌까지 근육이라는 소리를 듣는 자신에 비하면 김연희는 예쁘고 날씬하고 상냥하고…….

 

생각이 돌고 돌아 기분이 맨틀까지 처박힐 것 같았다. 영웅이 벌써 네 번째 한숨을 내쉴 때 후반전 준비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후반전이 시작될 때까지 유현은 오지 않았다.

 

경기는 엉망이었다. 다른 생각에 날아오는 공을 놓치기 일쑤였고 피할 수 있었던 태클에 걸려 넘어졌다. 부원들이 어디 아프냐고, 빠져서 좀 쉬겠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축구부 일원으로서 마지막 시합이었는데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자꾸 스탠드 쪽으로 시선이 가려는 걸 애써 돌렸다. 만약 아직도 유현이 자리에 없다면 정말 경기를 망칠 것만 같았다.

 

후반전은 일 대 영으로 다행히 영웅의 팀이 이김으로써 끝이 났다. 영웅은 숨을 몰아쉬며 스탠드로 향했다. 유현이 영웅에게 보리차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들고 꿀꺽꿀꺽 마신 영웅은 유현의 주변을 살폈다.

 

 

“누구 찾아?”

“아니. 아냐. 가자.”

“다리 봐 봐. 넘어졌잖아. 괜찮아?”

“별거 아니야. 상처도 안 났어. 가자.”

 

 

영웅이 몸을 부르르 떨며 점퍼를 걸쳤다. 지퍼를 끝까지 채운 영웅이 가방을 챙겼다.

 

 

“형! 뒤풀이 안 가요?”

“아. 맞다.”

 

 

잊고 있었다. 2학년들은 마지막 시합이어서 뒤풀이를 하기로 했었는데, 유현이 오면서 정말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떻게 할래?”

 

 

유현이 선택권을 주었다. 영웅이 머뭇거리며 부원들과 유현을 번갈아 보았다. 유현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매달고 영웅을 볼 뿐이었다. 그런데도 괜히 조급증이 들었다.

 

 

“야, 미안하다. 나중에 한 번 또 모이자. 먼저 갈게.”

“아, 구영웅!”

 

 

뒤에서 원성이 들려왔지만 영웅은 애써 무시하고 유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부장으로서 뒤풀이를 주도하지 못한 건 미안했지만, 지금은 이 시간이 더 소중했다.

 

 

“안 가도 되겠어?”

“나중에 모이면 되지, 뭐.”

 

 

영웅이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우동 가게 안은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안경에 김이 서려서 유현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주문을 마친 영웅이 안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안 불편하냐? 공부할 때만 쓰지.”

“아아.”

 

 

유현이 안경을 흘긋 보며 피식 웃었다.

 

 

“너 기억 안 나?”

“뭐가?”

“나 무섭게 생겼다고 어려워했잖아.”

“내가 언제 무섭다 그랬냐!”

“아니야?”

“그냥……. 좀 날카로운 느낌이 있어서 그렇지. 안경 쓰면 좀 부드러워 보이고.”

 

 

영웅이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기가 죽어 웅얼댔다. 유현이 슬그머니 미소 지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그 말 때문에 지금까지 안경 쓰는 거야?”

“난 네가 안경 쓰는 쪽을 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네가 뭘 쓰든……. 아니, 뭐.”

 

 

영웅이 말을 얼버무리며 물을 들이켰다. 괜히 뻘쭘한 마음에 가게를 두리번거리는데 점원이 우동 두 그릇을 들고 왔다. 빨리 나와서 좋네. 영웅이 중얼거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영화 한 편 보고 들어갈까?”

“영화? 뭐?”

“그냥 아무거나.”

“난 좋아. 영화 오랜만에 본다. 근데 울 누나 또 나 엄청 구박하겠다. 수능 디데이 365일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싸돌아 다니냐고.”

 

 

우리 누나는 진짜 괴물이야. 한숨을 푹푹 내쉬며 영웅이 우동을 흡입했고, 유현이 하하 웃었다.

 

시간이 맞는 영화는 로맨스 코미디밖에 없었다. 남자 둘이서 로맨스 코미디를 본다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유현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영웅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우동을 먹었는데도 배가 안 차 팝콘 콤보를 사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자리를 잡고 앉은 영웅은 팝콘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천천히 먹어. 안 빼앗아 먹으니까.”

 

 

유현이 웃으면서 말했고 머쓱해진 영웅은 팝콘을 씹으며 콜라를 쪽 빨아 마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커플이거나 여자끼리 온 경우만 있었다. 남자끼리 온 건 유현과 자신밖에 없었다. 영웅은 고개를 숙이고 팝콘을 한 움큼 쥐었다. 그러자 유현이 손가락 끝으로 영웅의 손등을 죽 훑었다.

 

 

“조금씩. 흘리잖아.”

 

 

영웅이 삐걱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팝콘을 조금씩 쥐어 먹었다.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영화가 시작됐다. 배부르고 따뜻하니 잠이 올 것 같아 영웅은 눈을 부릅떴다.

 

오프닝이 조금 산만한 편이었다. 꼬이고 꼬였던 한 커플의 과거사를 읊어 주는 듯했는데, 쉽고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면 이해를 잘 못 하는 영웅의 집중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눈이 가물가물했다. 툭 감겼던 눈을 다시 부릅뜨고 스르르 감기는 눈을 부릅뜨기를 거듭하던 영웅은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영웅이 잠에 들자마자 유현이 고개를 돌렸다. 스크린의 빛이 잠든 영웅의 얼굴을 비추었다. 유현은 영웅을 응시하다 이내 영웅의 머리를 제 어깨에 닿도록 손으로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밀었다. 영웅은 유현의 어깨에 기대 잠든 채로 평온한 숨을 색, 색 내쉬었다.

 

 

 

 

“아, 돈 아깝게 자 버렸네.”

 

 

영화관을 나오면서 영웅이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많이 피곤했었나 봐.”

“아, 한판 뛰고 나니까 몸이 풀려서 그랬나 봐. 영화 재밌었어?”

“응. 괜찮더라.”

“아이씨.”

 

 

영웅이 아쉽다는 듯 입매를 찡그렸다. 다음에 DVD 빌려서 보자. 유현의 말에 영웅이 고개를 주억였다.

 

 

“내일 학교 가네. 싫다. 기말고사도 끝났는데 왜 가는 거야. 으으.”

“숙제는 했어?”

“무슨 숙제?”

“미적분. 문제 풀어오라고 했잖아.”

“아! 아아, 맞다! 아씨, 수학 진짜. 기말고사도 끝났는데 진도도 계속 나가고 숙제까지 내주고.”

 

 

영웅이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흩트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그거 나와서 풀어 보라고 시키는 것만 안 걸리면 되는 거 아니냐? 내일 며칠이지?”

“21일.”

“아, 씨. 진짜 성을 바꾸든지 해야지 3년 내내 1번이 말이 되냐?”

 

 

21일이면 1번, 11번, 21번, 31번이 나와서 문제를 풀게 될 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면서 영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아침에 푸는 거 도와줄게.”

“응. 땡큐.”

“크리스마스에.”

“응?”

“눈 온다던데. 크리스마스에.”

 

 

유현이 영웅을 돌아보며 말했다. 영웅은 그제야 예전에 급식소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영웅은 괜히 또 침울해져서 콧잔등을 찌푸렸다.

 

 

“크리스마스에……. 넌 뭐 하냐?”

“난 가족들이랑 보내지.”

“아. 너네 집 기독교지. 가족들이랑만 보내?”

“그럼?”

“아니야.”

 

 

연희랑은 잘 안 됐나. 하긴 사귀게 됐음 말을 했겠지. 어쩐지 가뿐한 마음이 들어 영웅은 히죽 웃었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거둬들였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고백할까?”

“응.”

“누군 줄 알고 고백하라고 그러냐, 너는?”

“누구든. 너면 돼.”

 

 

무슨 소리야. 내가 뭐 옴므파탈도 아니고. 되긴 뭐가 돼. 나지막한 목소리에 영웅은 불퉁한 얼굴로 걸음을 빨리 옮겼다. 다리가 긴 유현이 금방 따라잡았고, 그것이 어쩐지 더 약이 올랐지만 유현의 팔이 제 팔과 맞닿자 영웅은 주변 공기가 사르르 녹아내림을 느꼈다.

 

 

 

 

12월 25일은 평범했다. 그저 빨간 날이었고, 금요일이었으며, 12월의 하루일 뿐이었다. 늦잠을 잤고 아점을 먹었고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로 해 주는 겨울왕국을 봤다. 렛 잇 고를 부르다가 누나한테 시끄럽다고 맞았고 두 유 워너 빌더 스노우 맨, 하며 누나의 방을 노크했다가 또 처맞았다.

 

단체 채팅방은 시끄러웠으나 유현은 한마디도 없었다. 1 하나가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아예 메시지를 읽지도 않는 것 같았다.

 

설마 김연희를 만나나?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가족들과 보낸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또 약속이 잡혔는지도 모른다. 고백을 받은 게 아니라 썸을 타고 있던 건가? 그래서 말을 안 한 걸까?

 

 

“으으!”

“아, 구영웅 개새끼야, 시끄러워! 닥쳐!”

 

 

작은 소리로 앓았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욕설이 날아왔다. 머리를 쥐어뜯던 영웅이 누나의 뒤통수에다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영웅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소파에 픽 엎어졌다. 메시지라도 하나 보내 볼까. 하지만 보냈는데 1이 사라지지 않으면 비참할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았다. 하늘은 화창하기만 했고 눈이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유현 바보. 멍청이. 크리스마스에 눈 온다며? 고백하라며? 했으면 엄청 당황했을 거면서. 영웅은 쿠션에 머리를 퍽퍽 박았다.

 

영웅은 하루 종일 소파 위에서 뒹굴거렸다. 리모컨을 손에 놓지 않고 채널을 돌리다가 냉장고에서 군것질거리를 꺼내 주워 먹었다. 그러는 내내 핸드폰을 손에 놓지 않았다. 채팅방에 남아있는 1이 사라졌는지 안 사라졌는지 쉬지 않고 확인했다.

 

영웅의 어머니가 크리스마스라며 갈비찜을 해 줬다. 크리스쳔은 아니었지만 크리스마스에 감사하며 맛있게 먹었다.

 

양치질을 하면서 칫솔이 치아 하나를 닦을 때마다 채팅방을 확인했다.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울했다.

 

벌써 9시였다. 영웅은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채팅방을 확인했다.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영웅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유현과 나누었던 대화를 올려보다 키패드에 손을 가져다 댔다.

 

 

「뭐 해?」

 

 

보냈다. 끄으으, 영웅이 괴상한 소리를 흘리며 주먹을 불끈 쥘 때였다. 1이 바로 사라졌다. 헐? 영웅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곧이어 진동이 울렸다. 유현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 여보세요!”

[전화를 왜 그렇게 급하게 받아.]

 

 

웃음기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영웅이 헛기침했다.

 

 

“뭐, 뭐 해?”

[나올래?]

“어?”

[눈 온다, 영웅아. 나와.]

“어, 어? 진짜?”

[나 지금 학교야. 옥상에 있어. 기다릴게.]

“엉? 어, 일단 알았어. 갈게.”

 

 

전화가 끊기자마자 영웅은 벌떡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그러나 눈은커녕 비조차도 오지 않고 있었다. 술 마셨나? 영웅은 인상을 찌푸리며 멀뚱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옷을 챙겨 입었다.

 

학교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영웅은 집에서 나오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렸다. 유현이 학교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학교에 있지? 눈 온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두꺼운 점퍼가 무겁게 느껴져서 영웅은 달리면서 점퍼를 벗어 손에 쥐었다.

 

학교 앞에 도착한 영웅은 허리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굳게 닫힌 교문을 흔들어 보았으나 잠겨 있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웅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얘가 담을 넘었나. 반듯한 학생회장 성유현 님께서 이 밤중에 담을 넘어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담이 낮아 넘기가 힘든 건 아니었다. 영웅은 코끝을 손으로 훑고선 담을 넘었다.

 

학교 뒤에는 산이 있었고 학교 근처에서 그나마 불을 밝히고 있는 건 편의점밖에 없었다. 학교는 조명이 전부 꺼진 상태로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영웅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핸드폰의 플래시를 켰다.

 

유현이 말한 곳은 신관의 옥상일 것이다. 신관 옥상에 망원경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건물의 문은 열려 있었다. 밖보다 안이 더 무서웠다.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복도에 눈을 돌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영웅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옥상 문은 쉽게 열렸다. 평소에는 잠겨 있지만 천체관측부 부장인 유현에게는 옥상의 열쇠가 있어 언제든지 올라올 수 있었다. 사실 전교 1등 학생회장 신유현 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옥상에 올라갈 때마다 허락을 구해 열쇠를 받아 가야 했을 것이다.

 

유현은 문을 등지고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유현이 영웅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왔어?”

“야. 너 여기서 뭐 해?”

 

 

영웅은 얼떨떨한 얼굴로 유현에게 다가갔다. 영웅이 다가오자 유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추운데 왜 벗었어.”

“아, 뛰어오느라.”

“천천히 오지.”

 

 

유현이 영웅이 손에 쥔 점퍼를 가져가 영웅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영웅이 눈을 흘긋 들어 유현의 낯을 살피고는 물었다.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너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를?”

“응.”

“……너 오늘 좀 이상한 것 같다.”

 

 

영웅이 이마를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유현은 그저 가느다란 미소로 영웅을 대할 뿐이었다.

 

 

“아, 그리고 눈이 오긴 뭘 와. 하나도 안 오는데.”

“눈, 보여 줄까?”

“눈이 안 왔는데 뭘 보여 줘.”

 

 

유현이 영웅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가 영웅을 망원경 앞으로 데려왔다.

 

 

“봐 봐.”

“갑자기 무슨…….”

 

 

영웅이 유현을 이상하다는 듯 흘겨보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유현에 결국 렌즈에 눈을 가까이 댔다.

 

 

“와…….”

 

 

영웅의 입에서 이내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하늘이 맑은 데다가 주위가 어두워서 그런지 별이 유난히 많이, 그리고 밝게 보였다.

 

 

“눈 내리는 것 같지 않아?”

 

 

곁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 정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정면으로 올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함박눈이 펑펑, 까지는 아니었지만 고요하게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빛을 머금은 눈이었다. 빛이 흐린 별은 눈이 내리는 것 같았고, 선명한 별은 별빛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눈이 와도 이보다 예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구영웅.”

 

 

작지만 이 고요한 공간을 휘어잡는 힘 있는 목소리는 둔중한 울림을 만들어 내며 영웅의 귀를 사로잡았다. 영웅은 렌즈에서 천천히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 유현을 보았다.

 

 

“눈이 오고 있잖아.”

 

 

은근한 재촉이자 부드러운 구슬림이었다. 가느다란 테에, 얇은 안경알 너머로 날카로운 듯 아닌 듯 큰 눈망울이 영웅을 직시하고 있었다.

 

깜빡, 깜빡. 눈꺼풀이 닫히고 속눈썹이 내려앉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만 같은 정적 속에서 영웅은 정말 홀린 듯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신유현.”

“응.”

“있잖아.”

“응.”

“내가 너를……. 좋아, 읏.”

 

 

유현이 그대로 손을 뻗어 영웅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겼다. 어깨에 걸쳐진 점퍼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채 끝맺지 못한 말은 맞물린 입술 사이로 흩뿌려졌다. 빳빳하게 굳은 채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유현을 보던 영웅은 입 안을 부드럽게 유영하는 촉촉한 혀에 이내 눈을 감았다.

 

포근한 함박눈이 뺨 위로 톡, 톡 내려앉았다. 별빛이 그렇게 그들에게 녹아들고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BL 작가 선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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