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부의 첫 모임 날, 연습실 앞에 가만히 기대어 서 있던 차고운을 본 연보라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첫 모임 날부터 차고운만 보면 연보라의 심사가 묘하게 뒤틀렸다. 예쁘다는 말이 들려와도 더러운 인상이 앞섰고, 똑똑하다는 말이 들려도 어설프던 읽기 실력만 떠올랐다. 분명 더 잘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섯 명 중에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연보라는 차고운을 부장 선배의 낙하산 인사로 여겼다. 사람들 생각은 다 똑같다는 말처럼 다른 동기들도 차고운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했다. 떨어졌다는 한 명이 합격한 동기 중 하나와 죽마고우라는 말에, 중학교 시절 축제에서 함께 단막극을 진행했다는 말에 다들 차고운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은 파렴치한이 되어버린 데는 교문 앞에서 난동을 피운 남자의 등장도 한몫했을 것이다. 인근 학교의 교복을 입은 남자가 차고운을 부르짖으며 지나는 학생들을 붙잡은 것은, 부장 선배가 그날따라 심기가 불편했다는 것은 차고운을 둘러싼 무수한 소문에 살을 붙이기도 했다.

 

 몇 번의 모임이 진행되어도 차고운에 관한 평이 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야간 자율학습 1교시부터 2교시까지는 연극 연습 시간이었다. 이마저도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지역 연극제 때문이었고, 5월의 연극제에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습이 필요했다. 차고운은 결석이 잦은 편이었고, 어쩌다 한 번 연습에 참여하는 날이면 그 바쁘다는 ‘고 삼 수험생’ 부장 선배가 연습실을 찾아왔다.

 

 부장 선배가 차고운을 좋아한다는 묘한 소문이 돌 때, 연보라의 반 친구들이 연극부라는 이유로 다가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려 들 때, 연보라는 침묵했다. 하지만 연보라의 침묵에도 다른 동기는 미묘한 공기를 발설했고, 차고운은 ‘남자랑 여자 다 후리는 애’가 되어버렸다. 훤칠한 키에 짧게 자른 머리를 한 부장 선배는 연보라의 예상과 달리 여고에서 인기가 좋은 축에 속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 차고운은 미운털이 박히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의 시기나 질투, 동경이나 부러움을 넘어선 미움이 차고운 곁을 맴돌았다. 하필 이름이 ‘차고운’이라 별명은 ‘차가운’이 되었는데, 차고운은 이것이 익숙한지 제 별칭이 아닌 듯이 굴었다. 누군가 실수인 척 별명으로 불러도 못 들은 척하기 일쑤였지만, 눈썹 산은 꿈틀거렸다. 

 

 그런 차고운과 연보라는 딱히 얽힐 일이 없었다. 동기지만 친하지 않았고, 교실도 바로 옆 반은 아니었다. 집이 같은 방향도 아니었으며, 졸업한 중학교도 서로 달랐다. 심지어 겹치는 친구조차 없는 아이였다. 연습에서도 연보라의 상대역은 다른 동기였고, 차고운은 잦은 결석을 이유로 각색 담당이라는 허울뿐인 직함을 가졌다.

 

 한 학기가 무사히 지나는 동안 연보라에게는 절친한 친구도 생겼다. 물론 연보라 주변에 몰리는 친구 중 한 명이었지만, 연보라에게 유달리 돈독하게 느껴지는 친구였다. 연보라는 그런 친구를 언니처럼 여겼고, 점심시간 볕을 쬐며 어깨를 빌리기도 했다. 양선우와 연보라. 두 친구는 얼핏 벗보다 자매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연극제가 끝나 한결 여유로워진 유월, 한낮의 더위가 익어가는 시각에 두 사람은 구석진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부탁이 있다며 아이스크림을 선뜻 사준 양선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연보라는 하도 어이가 없어 반문했다.

 

 “차가운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응. 친해져서 나도 소개 좀 해줘.”

 

 뜨겁게 달궈진 담벼락이 서서히 식고 있었다. 팔을 뒤로 돌려 등을 털어낸 연보라는 앙상해 보이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양선우를 바라보았다. 양선우는 당최 ‘부탁’을 하지 않는 친구였다. 친구로서 이런 성격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는데, 그런 양선우의 ‘부탁’이 이런 류라니…. 연보라는 침을 삼키며 물었다. 

 

 “소개? 너 여자 좋아해?”

 

 단순한 질문에 양선우는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다물었던 입술을 작게 벌렸다. 한참을 멍하니 연보라를 보던 양선우가 입을 다물었을 때, 녹아 나온 아이스크림이 침과 섞여 입술 끝에 맺혔다.

 

 “아,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

 “나는 좋아하거든!”

 

 순진하게 씩 웃어 보이던 연보라는 왼손 엄지를 뻗어 양선우 입가를 닦아주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교복 치마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아…. 잠깐. 그런 게 아니라…. 걔랑 친해질 수 없나 해서…. 성적이나 이런 거? 걔 공부 잘한다며?”

 “웅. 근데 걔는 나랑 성적 구간이 1급수랑 한…. 4급수 수준일걸?”

 “비유도 참….”

 “생각해 봐라. 걔는 1급수지, 아주 맑아….”

 

 연보라는 양선우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휙 뺏어 들며 중얼거렸다. ‘피부마저 맑아.’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진짜 친해질 방법 없어?”

 “아, 없다니까! 친해지려면 진작 친해졌겠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를 발로 밀어두던 연보라는 코를 훌쩍였다. 

 

 “지지배들…. 담배는 엄청 피워요.”

 “가자, 누가 보면 오해한다.”

 “뭘 오해해? 으슥한 데 가서 뽀뽀나 해?”

 

 짓궂게 웃던 연보라의 배를 양선우는 꾹 밀어냈고, 연보라는 힘없이 밀려나며 멍청이처럼 깔깔거렸다. 

 

 “아! 왜? 선우 씨, 나 정도면 괜찮다. 응?”

 

 짐짓 가슴을 내밀며, 배에 힘을 꾹 주고 발성하던 연보라에게 양선우는 가운뎃손가락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가장 구석진 소각장 앞에서 벗어났다. 늘 건물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은 이제 더는 이용하지 않는 소각로만 덩그러니 남아있었고, 그 앞에 어지러이 쌓인 낡은 의자와 책상 사이로 누군가의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주기적으로 선생님들이 순찰하여도 끊이지 않는 연기가 남는 곳,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연보라와 양선우가 종종 들리는 곳이었다. 

 

 “남들이 보면 진짜 오해해.”

 

 양선우는 기지개를 켜며 건물 그림자를 벗어났다.

 

 “오해 좀 하라지.”

 

 양선우를 따라 기지개를 켜던 연보라는 의외의 인물들을 발견하고 양선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뭐해? 안 들어가?”

 “야, 쉿.”

 

 두 사람이 몸을 숨긴 낡은 계단 옆의 향나무, 향나무에서 다섯 단 아래의 계단에 누군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검은 머리꼭지만 보였고, 단순한 호기심에 세 걸음 더 걷던 연보라가 또 다른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왜? 내가 왜 싫은데?”

 

 양선우와 연보라는 서로 바짝 붙어서는 쪼그리고 앉아 귀를 기울였다. 

 

 “그냥 싫어요.”

 “야, 네가 이러면 나는 뭐가 돼?”

 “뭐요?”

 “하! 내가 너 진짜 잘 챙겨주는 거 몰라?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니야?”

 “잘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연보라는 익숙한 목소리를 알 수 있었다. 엉망진창 발성에 불분명한 발음은 ‘감사하다.’라는 말이 연기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것은 차고운이 연기를 할 때면 내는 끝이 뭉개지는 발음에 해당했다.

 

 “차가운이랑 저 선배 진짜야?”

 

 양선우의 질문에 연보라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쟤 저거 다 연기야.”

 

 분명 속삭인다 생각했는데, 차고운이 고개를 슬쩍 들고 향나무 가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야, 씨…. 너 때문에 나만 뭐가 되냐고!”

 

 차고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거라 착각한 건지, 연극부 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화들짝 놀란 연보라와 양선우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번에는 부장까지 고개를 돌렸다. 연보라는 양선우의 손을 잡은 채 재빠르게 일어났다. 부장의 성질머리와 이 상황을 미루어 보자면 지켜보았다는 것을 들켜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야! 너희 뭐야?”

 

 연극부 부장이 천천히 걸어 올라오자, 연보라는 양선우의 손을 당긴 채로 소각장까지 내달렸다. 한참을 달려서 돌아보는 등 너머에는 짙푸른 향나무만 빼곡히 보였다. 양선우와 함께 소각장을 지나 급식실 옆 창문까지 뛰는 동안, 두 사람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뭐야…. 너 알고 있었지?”

 

 연보라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던 양선우를 보고, 연보라는 검지를 세워 양선우의 입술에 가져갔다. 

 

 “야, 우리 아무것도 못 들은 거고, 못 본 거야. 괜히 저런데 휘말리면 골치 아파. 선우야, 언니는 목표가 있다. 이 험난한 3년을 무사히 넘기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만나고 사는 거…. 그거 언니 소박한 꿈이니까 협조 좀 해.”

 

 연보라의 말에 양선우는 미간을 찌푸렸고, 이제야 숨을 고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럼 나 음료수 사줘.”

 “그래.”

 

 연보라는 교복 치마 주머니에 구겨 넣어둔 천원을 꺼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중앙 계단 뒤편의 자판기로 향했다. 빨간 자판기에서 나는 뜨거운 열기에 땀을 훔쳐내던 연보라는 잘 들어가지 않는 지폐를 쫙쫙 펼친 뒤, 다시 넣었다. 야속한 자판기가 뱉어내는 지폐를 가만히 보던 양선우가 허리를 숙이고 다시 지폐를 투입하던 때, 연보라는 중앙 현관으로 들어오던 차고운과 눈이 마주쳤다. 교사 전용이니 이용하지 말라 못 박은 곳을 겁 없이 드나드는 차고운을 보던 연보라는 시선을 피했다. 보나 마나 부장 선배는 담배를 피우러 갔겠지…. 혀를 쯧 하고 찬 연보라는 양선우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지폐에 시선을 집중했다. 

 

 차고운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애써 모르는 척하던 연보라는 희미하던 향기가 한층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소음이 멀어진 복도에는 차고운의 발소리만 들리고, 꽤 흘린 땀 냄새보다는 샴푸 향기가 진해져 있었다. 차고운이 가까이 왔음을 인지한 연보라는 양선우 허리춤에서 손을 떼고, 이제 막 나온 음료수 캔을 집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쥐새끼.”

 

 곁을 스치던 차고운의 짧은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연보라는 이제 막 튀어나온 음료수 캔을 떨어뜨리지 않았을 거고, 슬리퍼 밖으로 나와 있는 차고운의 발가락도 무사했을 것이다. 하필이면 ‘뚱뚱이 캔’을 뽑았고, 차고운의 발끝이 낮은 계단을 벗어나 있어 허공에 자리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차고운이 발을 감싸는 동안, 화들짝 놀란 연보라가 차고운의 발을 쥐었다. 차고운은 욕을 뱉으며 발버둥을 쳤고, 연보라는 다리 사이로 보이는 차고운의 속옷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일부러지?”

 “아닌데?”

 “미친년.”

 “뭐?”

 

 실랑이하려던 연보라는 차고운의 속옷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들었고, 두 사람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양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양호실!”

 

 양선우의 외마디를 듣고 벌떡 일어선 연보라는 차고운의 겨드랑이 아래 손을 넣어 들어 올렸고, 발버둥 치던 차고운은 몸에 힘이 쭉 빠져서는 그대로 일어섰다. 양호실까지 차고운을 바래다준 양선우와 연보라는 양호실 문밖에 서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복도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뜨거웠고, 데워진 공기에 호흡마저 힘들었다. 한창인 볕을 피하지 않은 채 벽에 등을 기댄 연보라는 벽 너머에서 들리는 작은 신음을 들으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자기 발을 꼼지락거리던 연보라는 올여름이 유독 무더울 것이라는 뉴스가 떠올랐다.





 

GL 차곡차곡 담는 중 / e-Book: ‘밤과 밤’, ‘친구 사이에’, ‘첫사랑’, ‘사랑이 스미는 중’, ‘옆에 누워요’, ‘물 만난 언니’ / 포스타입 오리지널: ‘옆집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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