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내가 무엇을 들은거지?'




제롬은 방금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해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하아.달리아!


랭카스터 백작과 몇달동안 꿍짝꿍짝하더니 기껏 생각해낸 것이 「국왕 암살모의」였나?


어린 리차드에게 모든 이를 믿었다 했는데, 그 결과가 자신의 평생지기 친구라 믿었던 달리아에게까지 배신당하는 거라니...


"휴우...랭카스터 백작. 

내가 아무리 힘없는 왕이라도 그렇지,  은밀한 반역의 '역심'를 대놓고 이리 대놓고 말하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아?"


쥬드 아이스너는 눈이 동그래져서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더니,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는 지금 행복하십니까?"


참 인생은 신기한 것이,오래전 안느에게 했던 질문을 그에게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 도대체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폐하는 지금 불행하십니다.

이대로 가다간 오래 사시지도 못하실 것 같구요.

저는 매일 폐하를 지켜볼때마다 매순간 두렵고 조마조마합니다."



제롬은 원망이 가득찬 눈길로 쥬드를 노려 보았다.


스스로 불행하다 느껴왔지만,타인의 입을 통해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는 눈앞의 랭카스터 백작을  '1급반역 및 국왕 암살미수죄'로  밀레드 탑의 정치범감옥에 그냥 확  가둬버릴까 잠시 생각했다.


"아론의 눈을 피해 폐하께서 사랑하는 이와 평생 하고 싶으시다면, 결국 전 국민을 속이고 역사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길 뿐입니다."


"!!!!"


쥬드 아이스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에드워드5세의 「죽음」말입니다.

폐하가 죽은 것으로 처리되면, 아무도 폐하를 더 이상 찾지않을 것이고 폐하는 국왕으로서 모든 명예와 부와 권력을 버림으로서...

'자유'를 얻으십니다."


- 모든 것을 버린다?


제롬이 잠시 말이 없자, 랭카스터 백적은 망설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폐하. 역시 망설이시는군요.

국왕의 자리란 그렇게 쉽게 포기하기 힘든 자리지요.

미련이 남으신 것이라면 이대로 살다 외롭게 요절하시는 방법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토록 매일 매일 슬픈 표정으로  불행한 삶을 이어나가면서, 어느 날 입과 코에서 피를 쏟아가며 죽어가는 것이 폐하가 원하던 삶이셨나요?

'단 하루라도' 그와 같이 하고 싶으신 것 아니셨습니까?"



제롬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는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제롬은 쥬드 아이스너가  말한 '그'가 누구인지를 깨닫자, 바로 율리우스의 헤맑게 웃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심장이 찌르르 울리며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졌다.


세월이 5년이나 흘러 이제는 잊혀졌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제롬의 심장은 아니었나 보다.


8살에 바람둥이 쓰레기 율리우스를 처음볼때만 해도, 자신이 이토록 그에게 빠질 줄은 몰랐다.


"사실...몇년전부터 사교계를 출입하며 율리우스 대공을 주시해왔습니다.

그는 요즘 가관도 아닙니다.

거의 알콜중독자가 다 되어 벌써 여러 사내들에게 여기저기 차이고 실연당해 이제는 사교계출입도 안한지 오래입니다.

하도 추접하게 검은 머리 미소년만 찾으며 치근대어 어린 소년을 아들로  둔 귀부인들이 「율리우스 금족령」을 교황 성하께 요청하기도 했답니다.

폐하께서 설사 자유의 몸이 되신다 해도 그에게 가시는 것은 다시 생각해보셔야 할 겁니다."


"율이??? 그럴리가!

그는 원래 사교계에서 알아주는 인기남이쟎아.

어쩌다 그렇게..."



"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계속 취해서 '요정왕' 만 부르며 자주 혼자 울부짖어,교황청 일각에선 그가 미친것이라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제롬은 은빛의 턱수염이 드문 드문 자라난 형편없이 술에 찌든 잘생긴 쓰레기 율리우스의 모습을 상상하니 기도 안찼다.


'그토록 깔끔하고 세련된 멋장이 기사처럼 하고 다녔었는데..'


랭카스터 백작이 이 「국왕의 시해 계획」의 전모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폐하를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성대하게 국장을 치룰 겁니다.

폐하는 차갑게 식은 시체가 되어 3일동안 관에 누워 전 브리태니아 국민의 애도속에 영면에 들어 가시게 됩니다.

에드워드5세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어 장례식이 끝나면, 바로 아론이 태후가 되어 섭정후가 되고, 리차드 2세가 이제 이 브리태니아와 프랑크 제국의 황제가 됩니다."



"어떻게 ?

난 이렇게 살아있는데..."


쥬드 아이스너의 한쪽 입가가 올라갔다.


그는 양복코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초록색 유리병을 꺼냈다.


"이것이 폐하를 도울 것입니다."


그는 제론의 바로 옆까지 다가와 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폐하. 제가 륜황제로 있을 때, 어느 유명한 주술사 무당 노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이민족 출신의 황제인 저를 죽이려 모반을 꾸미다 들켜 사지가 찢겨 사형당할 위기 였죠.

이 노파는 죽은자를 살려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 무당 노파가 그런 힘이 있을리 만무했죠.

아들들이 죽어도 그 주술사는 다시 그들을 살려낼 힘이 없었습니다."


제롬은 갑자기 륜족의 주술사 이야기가 나오자  황당했다.


"그래서 그 주술사와 내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


랭카스터 백작은 한손을 가볍게 저으며 웃었다.


"이야기의 주요 포인트는 지금부터입니다.

노파가 한밤중에 저를 찾아와 아들들을 살려달라 울며 간청하더군요.

아시다시피, 륜족은 식인의 풍속이 남아있는 야만족인데다 믿을 수 없어, 저는 황제일때 이들을 할수있는 한 최대한 가혹하고 잔인하게 다뤘습니다.

예정대로 사지를 잘라 죽일 작정이었죠.

그런데..."


그는 사방 주위를 슬쩍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좀더 죽이고 말했다.


"노파가 아들들 목숨의 댓가로  죽은 이를 살리는 비결을 알려주었죠.

산 사람에게 이 약을 세 방울 먹이면 바로 사망합니다.

심장이 멎고 숨이 끊어지며 동시에 몸이 차갑게 식습니다.

이 약은 륜 족의 땅에서만 나는 귀한 약초로 산 사람을 깊은 잠에 빠뜨려 '가사'상태로 만듭니다. 정말 감쪽같습니다.

제가 제 수하 하람을 황제로 세우고 저를 사망시켜 스스로 감쪽같이 제거한 비법이었죠."


"아...."


제롬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가 들고 있는 작은 향수병 크기의 초록유리병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단점이 있습니다.

약이 독해 어린이나 병약자가 먹을 경우, 잘못하면 정말 죽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기사수련으로 단련된 건강한 성인의 몸이라 하루만에 깨어났습니다만...."


쥬드 아이스너가 제롬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폐하는 다르십니다.

아직 덜자란 십대 소년의 작은 체형인데다, 오랜 기간 앓아누워 자칫 잘못하면, 정말 제가 폐하를 죽이게 됩니다.

때문에!!  이것은 정말  '목숨'걸고 해야하는 위험하고 치명적인 계획입니다."


랭카스터 백작은 천천한 한 손가락을 들어 제롬의 작은 턱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두 눈동자가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폐하.이렇게 위험한데도 하시겠습니까?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결정은 폐하께 달렸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정말 사실일까?

그역시도 권력의 향에 취해 국왕인 나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 아닐까?'


랭카스터 백작의 하얗게 타오르는 눈을 보며 생각에 잠긴 제롬은 곧 속으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아냐.

다른 자는 몰라도 쥬드 아이스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는  륜제국 황제의 자리도 내팽겨치고 브리태니아로 달려온 쥬드경이야!

무엇보다도 쥬드는 ,이미 오랜전에도,선왕 에드워드4세께서 온갖 작위와 금은보화를 하사해도 한사코 거부하고, 오직 '부왕의 곁'에만 있게 해달라 간청했었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제롬은 초췌해져 엉망이 된 율리우스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자 가슴이 아려왔다.


어느새 제롬의 영혼은 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머리속에 어린 조카 리차드의 귀여운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제롬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주르르 흘렀다.


'아. 리차드! 사랑스런 내 조카!'


랭카스터 백작은 제롬의 생각을 다 읽고 있었다.


"폐하. 혹시 리차드 왕자님 때문에 망설이고 계시다면 걱정하지 마시라 말씀드리고 싶군요.

왜냐면 제가 리차드 전하를 항상 365일 곁에 붙어, 미천한 제 목숨 다하는 날까지 옆에서 보필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론 왕비과 달리아 경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달리아 총리는 그녀의 총명한 혜안과 선견지명으로 이 브리태니아와 리차드 국왕을 맏겨도 안심할수 있을 정도로 든든한 사람입니다.

사실 제가 지난 두달동안 계속 달리아 경을 설득하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리차드 이제 겨우 6살인데.."


제롬 눈엔 아직도 강보에 싸인 아기인 리차드가 눈에 계속 밟혔다.



"왠만한 9살짜리보다 영악한데다 10살짜리 형또래보다 튼튼하고 체격도 좋습니다.


솔직히 직언을 드리자면, 리차드 2세는 아직 어린 애임에도 불구하고,숙부인  에드워드5세보다 훨씬 강합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하셔서,오히려 저는 폐하가 더 걱정됩니다.

어차피 제 운명은 평생 리차드 왕자님 옆에서 보필하는 것인데...

폐하는 그동안 홀로 너무 모든 것을 감당해오셨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돌아가시전에 폐하도 인간으로서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 제로미! 너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


지난 전 같은 말을 외쳤던 줄리앙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쥬드 아이스너는 긴 팔을 뻗어 제롬의 양 어깨를 손으로 쥐었다.


"폐하!제발 제말을 믿으십시오.

저는 어린 시절부터 폐하의 부왕과 같이 해왔습니다.

감히 단언하건데, 돌아가신 에드워드4세는 한번도 폐하가 훌륭한 왕이 되길 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그분은 폐하가 행복하길 원하셨습니다.

왕으로서의 '성공'보다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말입니다."



제롬의 두 푸른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부...부왕께서???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실망하셨던 것 아니야?

나...난 훌륭한 왕이 못되어, 항상 부왕의 기대를 저버렸었어."


쥬드 아이스너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는 당신을 후계자로 보지않고, '아들'로 보셨습니다.

아들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답니다.

폐하! 제발 제말을 믿어주세요."

.

제롬의 눈가가 그렁 그렁해지며 맑은 눈물이 아름다운 푸른  눈에서 샘솟았다.


"흐흐흑...믿을 수없어!

아버진 언제나 나를 못미더워 하시고 불신하셨어!

자신의 적정자가 하필이면  나일까 언제나 불만이셨을꺼야.

난...난 아버지를 언제나 실망시켰어!!"




제롬의 다리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랭카스터 백작이 빠르게 달려들어 제롬의 작은 몸을 부축했다.


제롬은 기운이 쭉 빠져 힘없이 말했다.


"왜...왜 난 왕으로 태어났을까?

기왕이면 샤를 형이나 줄리앙처럼 똑똑하고 강하게 태어났으면 좋쟎아!!"



- 대신 당신은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으로 태어났습니다.


쥬드 아이스너는 바로 입가에 맴도는 말을 뱉지 못하고 입술을 짖이기며 씹었다.



랭카스터 백작은 제롬을 부축하여 가까운 등받이 긴 쇼파에 비스듬이 눕혔다.



"아뭏든 저는 폐하의 답을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폐하가 결심이 서신다면 국왕의 사체는 폐하의 유고에 따라  화장하는 것으로 처리할 것입니다.

이미 검은 머리 소년 15세 하나가 바로 어제 폐렴으로 급사하여 그 어미에게 돈을 지불하고 '가짜 국왕 시체'를 준비해놨습니다."



제롬은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쥬드 아이스너는 생각보다 주도면밀했다.


" 정말 겨우 15살밖에 안된 소년의 시체를 화장시킨다고?

그 불쌍한 아이의 시신처리를 그의 부모가 허락했어?"



랭카스터 백작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요절한 어린 아들의 시체로 국장을 치룬다하니, 그 어미가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하더군요.

소년은 너무도 가난하여 홀어미가 장례를 치룰 돈도 없었답니다."


그는 제롬의 바로 앞에서 눈물범벅이 되어 눈이 퉁퉁 부운 미소년의 아름다운 얼굴을 내려다 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폐하는 국왕의 무거운 왕관을 벗어던짐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평생 가장 고귀한 생을 살아온 당신께서는 이제 진정 모든 것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없이 오직 '사랑'만으로 과연 살아가실 수 있을지 사실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에드워드5세 폐하! 당신은 정녕 모든 것을 버리고 남은 생을 살아가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에드워드5세의 이름을 버리는 그 순간, 당신은 그저 천한 이름없는 평민이 됩니다.   앞으로 당신에게 평생 배고프고 춥고 귀족들에게 멸시당하는 비참한 생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진 않거든요.

어떠한 삶을 선택하는 가는 이제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조아라 노블레스 작가. 회사원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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