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어! 브루스, 봤어? 봤어?”

“네에. 공이... 그러니까, 날아갔네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토니의 어깨는 절망적인 각도로 축 처졌다. 배너는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한 손에 꼭 쥔 책을 놓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타워의 최상층, 실내였지만 토니는 야구모자에 운동복까지 응원할 태세를 완벽하게 갖춘 상태에서 열성적인 태도로 주먹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사십평생을 살면서 야구시즌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미국 프로야구팀이 몇 개인지도 모르는 배너에 비해서 토니는 참으로 그답게도 ‘야구’라는 공놀이에 퍽 열성적이었다. 올해의 첫 경기가 열리는 날 자비스는 아버지를 위해서 가상의 폭죽을 터뜨렸고 토니는 들고 있던 아머의 헤드 부분을 아무데나 던져버렸다. 만세! 자비스, 당장 인공위성 채널 맞추고, 잠깐잠깐, 맥주는 어딨지? 브루스! 빨리 와!

배너는 그 때 이틀간의 철야를 끝으로 신나게 자고 있었다. 토니는 배너를 깨우려다가 배너가 휘두른 팔에 얻어맞아서 코피가 났고, 경기를 보는 내내 코를 훌쩍거려야만 했다. 무의식중에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토니가 다쳤고 첫 경기를 놓쳤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시무룩해 하는 바람에ㅡ어디까지나 배너 기준에서ㅡ배너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여벌의 막대기와 장갑, 작은 공으로 하는 놀이가 토니에게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었다.

뉴욕 양키즈와 LA 다저스의 경기는 6:4, 양키즈의 승리로 끝났다. 마무리는 멋진 병살타. 토니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라 만세를 불렀다. 끝났네. 덤덤히 읽던 책에 갈피끈을 끼워두고 배너는 작게 하품을 했다.

“배고픈데, 뭐 좀 먹을래요?”

“어? 아니. 난 이거저거 먹었잖아. 팝콘이랑 맥주랑…………”

토니는 빈 맥주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테이블에 잔뜩 늘어둔 먹거리를 거의 다 먹어치운건 토니였다. 배너는 팝콘을 집어먹거나 맥주를 마시는 대신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스크린을 흘끔거렸다.

소파 등받이에 턱을 괴고 앉아서 토니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배너를 바라보았다. 햄, 치즈, 양상추를 차례로 쌓다가 마요네즈를 푹. 세상에 그깟 샌드위치 하나 만드는데도 저런 집중력과 정성을 쏟을 수가 있다니. 배너는 마지막 식빵을 덮어 꾹 누르면서 엄지손가락에 묻은 마요네즈를 혀로 핥았다. 저 집중력의 반만 좀, 어떻게 안되나.

“브루스.”

“왜요.”

“저기, 다음주에ㅡ”

“이어요.”

“뭘! 말도 다 안했는데!”

한쪽 뺨이 불룩해질 정도로 커다랗게 샌드위치를 씹어 삼키면서 배너는 단호하게 말했다. 토니가 무어라고 더 말하기 전에 반박할 요량으로 배너의 턱이 바쁘게 움직였다.

“뻔하잖아요. 다음주에 뉴욕에서 경기를 한다는데 끝내주는 자리를 구했으니 같이 가자는 얘기일텐데.”

“제발 한번만 가자. 재밌을거야.”

“사람 많은 데 못 가는 거 알면서 왜그래요.”

순식간에 샌드위치 하나를 해치우고 배너는 두 개째의 샌드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무서워하는 배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빅 가이’는 날 구했다고!”

“그 전에 할렘을 박살낸 전적이 있죠.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어떻게 한 마디를 안지냐. 토니는 구시렁거리면서 애꿎은 소파를 쥐어뜯었다.

매정하게 등을 돌리고 서서 시시한 빵쪼가리에 시간을 할애하는 애인의 등짝에 매달려 토니는 매미처럼 징징거렸다.

“한번만. 응? 딱 한번만. 브루스. 브루스으으.”

토니를 짐짝삼아 등에 매달고 배너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걸었다. 한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토니는 더욱 꼭 매달렸고 결국 항복선언을 한 건 배너였다.

“정말 딱 한번이에요.”

토니는 감정적으로 부풀어올라 배너를 꼭 껴안고 키스를 해댔다. 얼굴 여기저기에 쓸리는 수염이 따가워서 밀어내도 아랑곳없이 뺨이며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러댔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생일선물로 디즈니랜드 여행을 받은 어린애보다 즐겁고 천진해서 배너도 마주 웃어버렸다.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 가자고 졸라대는데, 어찌나 측은하고 안타까운지 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같이 가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 배너는 야구에 흥미가 없었고 야구장처럼 혼잡한 장소에서 흥분한 나머지 얼굴이 벌게진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이는 것은 그에게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것, 토니하고 실컷 즐기다 오자는 다짐이 무색해질 만큼 배너는 야구장에서 잔뜩 얼어붙고 말았다. 야구모자를 거의 콧등을 덮을만큼 눌러쓰고 선글라스까지 썼는데도 사람들은 앤소니 에드워드 스타크, 아이언맨을 어떻게든 알아보고 잔뜩 열이 올라 달려들었다. 개중에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사인해달라며 들이대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성화에 난감해진 건 토니였다. 괜찮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면도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싶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배너는 엉망으로 얼어붙는 뺨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았다. 조금 위축되고 사람들이 알아볼까 무섭긴 했지만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관람객들은 곧 토니에 대해 잊어버렸다. 더불어 토니도 배너에 대한 걱정을 절반 정도 잊어버렸다. 그 이후로 토니는 괜찮으냐고 묻는 대신

“안타! 안타!! 이런 젠장, 병신같이 그것도 못 치냐! 내가 해도 너네들보단 잘하겠다! 아, 아, 아! 저건 아니지. 심판불러! 브루스, 저거 봤어요? 저거 파울 맞지?”

토니는 배너의 팔을 붙잡아 흔들어댔고 배너는 침착하게 모르겠다고 대답해주었다. 배너의 눈에 야구라는 건 누가 공을 던지면 맞추고, 못 잡으면 안타 잡으면 아웃, 그리고 스트라이크와 볼 그 사이의 혼돈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토니에게서 신경을 끈 뒤부터는 제법 주변 분위기가 한가해지기도 했고 잔뜩 신이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토니를 구경하는 재미에 지루하지는 않았다.

중간 즈음의 휴식시간에는 맥주를 몇 모금 홀짝이면서 토니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야구 규칙을 제법 성의있게 들어줄 만큼의 여유도 되찾았다. 한창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가며 방금 전 있었던, 양심 있고 교양 있는 21세기의 지식인이자 세기의 천재로서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태가 얼마나 부당하고 파렴치한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던 토니와 더불어 짐짓 심각하게 주억거리던 배너와 토니의 왼편에 앉아있던 여자가 전광판에 잡혔다.

사람들은 토니 스타크의 얼굴에 흥분하며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는데 토니는 전광판을 보자마자 사태를 파악하고 얼굴 근육을 흉하게 구겼다. 가상의 분홍색 하트 안에 토니와 왼편의 여자가 잡혔고 배너는 애매한 경계선에 가려졌다.

“토니, 저게 뭐예요?”

왼편의 여자가 토니 너머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할거죠? 상품권은 저 주시면 안돼요? 어차피 그쪽은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그때서야 배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치던 말이 뭔지 알아들었다.

키스해! 키스해!

해버려! 오, 저 여자 운 좋은데! 기타등등.

그까짓 키스 한 번인데 토니 스타크가 재미없게 안하지는 않겠지. 만약 토니가 배너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흥에 취해서, 제법 진하게 키스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영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면서 토니는 배너의 눈치를 살폈다. 무덤덤한게 평소하고 별로 달라진 것도 없어 보여서, 역시 브루스도 이게 어린애들 장난이라는 것을 아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토니는 전광판을 향해 과장된 포즈로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 소란 속에서 토니는 여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날 전국 신문기사의 첫 면은

앤소니 에드워드 스타크, 커밍아웃하다! 야구장 이벤트. 그 남자는 누구?

로 장식됐다. 배너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서 신문을 들이미는 토니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다.

“난 당신이 이렇게 대담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맙소사, 혹시 이럴까봐 여직 안간다고 버틴거야?”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그건? 그 저돌적인—”

배너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조잘대는 토니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토니는 손바닥 안에서 웅얼거리다가, 창피해서 힘이 바짝 들어간 배너의 손목을 힘주어 떼어 냈다.

“—키스 말야.”

아주 신사답게 여성분의 어깨를 끌어안으려고 하는 토니를 헐크로 변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붙들었다. 앗 하는 사이에 입술이 닿았고 나누어 마셨던 맥주가 입 안에서 뭉그러졌다.

배너는 자기가 먼저 도망쳤다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사실 자기가 저지른 짓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 그를 이끌고 서둘러 빠져나온 건 토니였다.

“오, 브루스. 정말 그 키스는 절대로, 단언컨대 최고였어. 물론 당신하고 하는 키스는 언제나 환상적이지만.”

“제발.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고요. 그 얘기 그만해요.”

“하지만 정말 귀여웠어. 질투한거잖아, 그렇지.”

“아니에요.”

토니는 자비스까지 동원해서 자꾸만 도망가려고 하는 배너를 기어코 그 자리에 붙잡아두었다.

“아니라고 해둘게.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가면 안될까? 야구장.”

배너는 잠자코 밉살스럽게 웃는 토니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힘주어 밀어냈다.

“안가요. 두 번 다시 안가요. 아니, 못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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