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아스가르드 왕과 왕제의 결혼식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본디 결혼이란 것이 당사자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대(大)사건이기는 하지만, 아스가르드인들은 결혼식 그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결혼식은 딱히 절차랄 게 없을 정도로 간소했다. 결혼 당사자들이 초대한 하객들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하고, 서로에게 영원을 맹세하고. 하객들은 배가 터질 정도로 만찬을 즐기고. 당사자들이 자리를 뜨고 나면 그들 중 누군가는 고주망태가 되고, 춤을 추고 가벼운 게임을 즐기는, 그렇게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조금 특별한 하루. 그것이 보편적인 아스가르드의 결혼식이었다. 

선대부터 주욱 이어진, 그러한 역사가 줄줄 쓰여 있는 책을 꽤 일찍부터 탐독해 왔던 탓에 로키는 길어도 일주일 뒤면 자신의 결혼식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당히 성대한 결혼식이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지. 결혼식 경험이 없는 것은 토르 역시도 마찬가지에, 동생의 무모한 예상에 그 역시도 섣부른 동의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엎어졌다. 국정 회의 중 각료들에게 로키와 결혼식을 올리겠노라 선언한 그 날부터 둘은 도통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절차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규모부터가 문제가 되었다. 둘의 결혼식은 새 아스가르드가 돌아온 이후 최초의 경사였다. 게다가 오딘과 프리가가 결혼했던 이후, 실로 오랜만에 치르는 국혼(國婚)이 아닌가. 아스가르드 왕족의 결혼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히 치를 수 없는 국가의 행사였던 것이다. 또한 국빈의 자격으로 궁에 머무르는 이들의 숫자가 이미 꽤 되었고, 이외에도 그들이 우주 전역에 만들어 둔 친구들은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객의 규모가 얼마나 될 것 같느냐고 브룬힐데가 질문하는 대목에서, 로키는 그랜드마스터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를 초대할 생각은 결단코 없노라고 신경질을 부리고 말았다. 그러니 결혼식 만찬의 규모는 커지고, 또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은 아스가르드 전역에 축제 분위기가 가득할 터였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었다.


일단은 둘의 결혼식을 거행할 날짜를 정해야 했다. 토르의 번개에 콩 볶아먹듯 너무 빠른 것은 싫다는 로키와, 로키의 세 치 혓바닥처럼 너무 늦는 것은 싫다는 토르의 의견 차 때문에 두 사람은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결국 결과를 기다리다 지친 브룬힐데의 중재로, 간신히 날짜를 2주일 후로 정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결혼식 장소였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일 테니, 백성들을 비롯한 일반 손님들은 아스가르드 곳곳에 마련해 놓을 만찬장에서 즐기면 될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손님들(로켓을 포함한)에게까지 아무 곳으로나 가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둘은 생전의 프리가가 화사하게 꾸며 놓았던 궁 앞 정원에 국빈 만찬장을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답답해서 아스가르드 궁 안에서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로키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였다. 이외에도 예복 가봉, 결혼식 당일에 당사자들이 착용할 장신구 제작, 하객 결정 등 신경써야 하는 세세한 부분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느 정도는 궁의 충실한 시종들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긋나는 일 없이 제대로 치러내리라 각오했던 로키가 결국은 집무실의 집기들을 죄다 뒤집어엎으며 짜증을 부렸다. 너무 바쁘다고!


잠시 짬이 날 때에는, 궁에 머무르고 있는 아스가르드의 '친구'들에게 그들의 결혼 소식을 일일이 알리러 다녀야 했다(그 전에, 그냥 까마귀를 쓰자는 토르의 의견도 있었지만 로키는 사뿐히 그를 무시히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이 또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다. 로키가 가장 먼저 방문한 이는, 역시나 둘의 사정을 훤하게 알고 있는 영특한 토끼였다. 둘의 결혼식 일자와 장소를 알리러 그가 로켓의 방을 방문했을 때, 안에는 로켓 외의 다른 손님도 하나 더 와 있었다. 한층 더 키가 자란 그루트였다. 방문해야 할 곳이 하나 줄었다는 생각에 로키는 속으로 내심 기뻐했더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본론을 꺼내자 로켓은 예상 외의 반응을 보였다. 결혼식이라는 게 뭔지, 로켓은 그 개념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똑똑한 너구리는 정작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키가 하던 말을 마치자, 엉덩이를 들썩여 제 사타구니에 낀 바짓자락을 끄집어 낸 로켓이 삐딱하게 물었다.


"이미 웬만한 놈들은 다 니네가 사귀고 있는 거 알고 있잖아, 애송이. 근데 뭐 하러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하냐?"

"이런, 이런.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시종일관 건방진 토끼한테서 결혼 축하 선물을 받아내기 위해서겠지. 이왕이면 가장 비싼 것으로 말이야."

"…제기랄."


기가 찬 로키가 즉석에서 그 말을 받아치자, 금전 감각이 예민한 너구리는 몹시도 짜증난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쓸데없이 정이 많은 이 너구리는 절대 자신과 토르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로키는 킬킬 웃었다. 그에 로켓이 저 사슴 새끼가 기어이 미쳤나? 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소용 없는 짓이었다. 그렇지만 더 깐죽댔다간 발톱을 휘두르거나 기관총을 난사할 테지. 운이 조금 더 안 좋다면 아마 가지각색의 크기를 가진 폭탄일 거고. 요즘의 자신은 피로에 절어 있었기 때문에, 그걸 피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 그러니 더 험한 소리를 듣기 전에 일어서는 편이 나을 터였다. 꼿꼿하게 등을 세운 채 방을 내서는 로키의 뒷모습을 향해, 로켓은 소리 없이 왼쪽 앞발의 세 번째 발톱을 치켜세웠고 그루트는 손을 흔들었다. 아이 엠 그루트! 그러자 너구리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저런 양아치 같은 놈한테 축하한다고 하지 마라, 그루트!


이전에 대화를 몇 번 나누어 본 적이 없어서일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다른 이들은 로켓보단 조금 더 나은 반응을 보여 주었다. 자신과 토르가 결혼식을 올릴 거라는 소식을 전하자, 피터 퀼의 표정은 대놓고 밝아졌다. 마치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자꾸 실룩거리는 입가를 애써 진정시키고,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얼굴로 로키에게 축하한다 말하는 퀼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돌아서는 로키의 등 뒤에서, 기쁨의 춤을 추는 퀼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한 줄 알았으나…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로켓이 목격하고 말았더랬다. 등신이 꼴깝을 떤다, 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켓을 향해, 퀼은 평범남에게 임자가 생기면 내가 굳이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며 콧노래를 불렀다. 정작 가모라는 전혀 그런 생각 안 하고 있었을 텐데. 로켓이 한숨을 내쉬었다.


드랙스는 몹시도 질 좋은 근육을 가진 '천사와 해적 사이에서 태어난' 전사의 반려가 그와는 상대적으로 '잘생기지 않은' 것 같아 꽤나 실망한 눈치였고, 맨티스는 아직 결혼이란 게 뭔지 잘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가모라가 하는 것을 따라 더듬이를 꿈뻑이며 로키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녀들의 축하에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로키는 혹여나 자신의 감정을 읽힐까 맨티스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역시 타인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로키가 아스가르드 궁 안을 돌아다니는 동안, 토르는 미드가르드에 들러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했다. 토니는 눈썹을 치켜 올렸고(관심이 고프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그 디바 동생이랑 결혼식이라니, 천둥 양반! 당신 진짜 양아치였네?!), 스티브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축하의 뜻을 건넸다. 나타샤와 완다, 비전 역시도 마찬가지로 토르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바튼은 조금 놀란 기색이긴 했지만 그 역시도 기뻐해 주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배너는 잠시 여행을 떠난 모양인지 자리를 비워 직접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스티븐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축하하네, 라는 짧은 말 한 마디만을 했을 뿐이었다. 늘 변하지 않는 표정의 스티븐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맥주가 계속해서 채워지는 맥줏잔을 얼마나 들이켰는지, 뉴욕 생텀을 떠날 때 즈음 토르는 너무 배가 불러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말 아쉬운 것은, 시간의 압박으로 그가 뉴욕 생텀까지는 다녀올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와칸다에까지 들를 짬은 없었다는 점이다. 와칸다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결혼 소식을 대신 전해 달라는 부탁을 스티브에게 남긴 후, 토르는 아쉬운 얼굴로 스톰브레이커를 들어올려야 했다.


그 밖에도 자신을 알고 있는 우주의 모든 이들에게 결혼 소식을 전하느라, 토르는 무척 바빴다. 물론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이 진심으로 자신과 로키의 결합을 축하하는 것은 아마 아닐 터였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는 하나, 어쨌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동생을 제 왕비로 삼는다는 데에서 오는 순간의 당혹감을 토르 앞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이들도 몇 명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예의를 아는 이들이었기에 당사자의 앞에서 이러쿵저러쿵하거나 경멸의 빛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토르도 모른 척 그들의 반응을 그냥 넘기기로 한다. 어차피 자신과 로키의 결합이 거북한 이들은, 알아서 아스가르드에 오지 않을 테니까.


그 뒤는 다시금 일, 일, 일이었다. 아홉 왕국의 지배자로서 토르가 끊임없이 위엄을 보이는 동안,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결혼식의 준비사항을 확인하는 일은 로키가 도맡아 했다. 토르였다면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연인은 그렇게 성격이 둥글둥글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누가 왕족 아니랄까봐 까다롭고 고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진행해던 일에서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보이면 그것을 수정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성격 탓에 로키가 직접 해야 하는 일들은 순식간에 배로 늘었다. 어쩌겠는가. 그러기를 며칠 밤낮을 반복한 끝에, 결국은 로키도 제게 보고되는 사항에 하나하나 트집을 잡는 데 지쳐버렸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비우고 나니 그나마 숨을 쉴 만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런 대로 자신의 취향에 맞게 구색은 갖출 수 있었다.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거면 된 거 아닌가. 늦은 밤, 제 침대 위로 지쳐 쓰러진 로키가 생각했다. 난 이 짓, 두 번은 못 하겠어. 망할!


두 형제가 각자의 일에 치여 서로를 애타게 그리는 사이, 시간은 어영부영 잘도 흘러갔다. 폭풍처럼 몰려오는 일거리들을 하나하나 쳐내며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내일이 그 날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피곤해진 로키는 모든 방문을 물리친 채 제 침실에서 늦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초저녁의 별들이 밤하늘을 비집고 올라와 퐁, 퐁 빛을 내기 시작할 무렵. 무언가에 홀린 듯 스르륵 눈은 떴지만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꿈 같은 잠을 자서 정신은 제법 말짱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체는 진한 피로감을 호소했다. 제대로 잠을 자 두지 않으면 내일은 하루 종일 병든 닭처럼 죽은 눈을 하고 결혼식을 치르게 되겠지.


폭신한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채, 로키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기라도 한 듯 눈을 뜨자 기대하지 않았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환한 샹들리에 불빛에 가려 까아만 음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모든 감각이 사라지더라도 끝끝내 잊지 못할 이의 얼굴. …뭐지, 오늘 이 얼굴을 보게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조차 않았었는데.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두툼한 손바닥이 그대로 로키의 창백한 뺨을 감싸온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반대쪽 손이 로키의 어깨를 가벼이 누른다. 그에 다시금 자리에 누운 로키가 가만히 그의 이름을 입술에 담는다.


"…토르."

"많이 피곤했던 것이로구나, 로키. 이렇게 일찍부터 곤히 자고 있을 줄이야…"

"아니, 난… 괜찮아."


사실은 제 형의 얼굴을 보고 나면  그 동안 축적되어 있던 짜증을 한꺼번에 퍼부어 줄 생각이었더랬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나니, 저를 바라보는 토르의 안색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로키는 제 안의 언짢음이 다 타버린 불씨처럼 사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동생의 판판한 이마 위에 흐트러져 있던 흑단 같은 머리카락 몇 올을 쓸어넘겨 준 토르가 이내 그의 흰 이마를 부드럽게 매만진다. 찔릴 듯 날카롭게 솟은 콧등에도, 살짝 핏기가 도는 얄팍한 입술에도 차례로 짧은 입맞춤을 남기는 토르의 시선은 실로 다정했다. 그 상태로, 토르가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구나. 현실감이 들지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둘 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연인들은 그 상태로,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안온함을 잠시 만끽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토르의 두 눈은 여전히 따뜻하고 자상했지만, 그 너머에 살아 숨쉬는 붉은 욕망의 혓바닥이 넘실거리는 것을 본 것만 같아 왠지 모를 안도감에 로키가 색색 숨을 몰아쉰다. 그러고 보니 토르와 몸의 대화는 나눈지도 꽤 되었지. 무의식적으로 배꼽 근처에 살짝 힘이 들어가, 그가 길고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는 노골적인 한숨에, 토르의 눈썹이 스윽 치켜올라갔지만 딱히 어떠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만 더 참으라는 듯, 동생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조금 느려졌을 뿐.


"내일은 정말 피곤할 테니, 어서 쉬거라."

"…돌아가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로키의 물음에, 침대에서 일어선 토르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인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 앉은 로키가 많은 것이 담긴 눈으로 제 왕의 잘난 얼굴을 올려다본다. 자신의 유혹 아닌 유혹에도 토르가 새삼스럽게 담백한 태도를 보이는 게 서운해, 그는 저도 모르게 삐죽이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하하, 웃은 토르가 다정히 말한다. 


"동생아, 네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눈에 졸음이 가득하여,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거란다."

"…?"

"그리고… 나라고 해서 참는 게 쉬울 거란 생각은 말거라. 나의 하나뿐인 연인이 결혼식 전날 밤부터 시달려 당일에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응?"


그제야 슬쩍 부풀어올라 아래에서 빼꼼하니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토르의 고간을 흘긋 본 로키가 뒤늦게 몰려온 수치심에 뺨을 붉혔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동생의 낯선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하하, 웃은 토르가 그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기고 몸을 세우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로키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술을 연다.


"좋아, 형. 내일…"

"…?"

"…그럼 내일은 참지 않아도 돼, 토르. 정말로."


세상에, 이 얼마나 깜찍하고 맹랑한 대답인가. 잠시 그를 놀란 표정으로 보던 토르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번진다. 어쩌면 내일 이 시간 쯤이면 로키가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알았다, 하고 대답한 토르가 마지막으로 로키의 어깨를 밀어 부드럽게 눕히고 방을 나서자, 가물가물 몰려오기 시작한 졸음에 이내 그는 깊디 깊은 잠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


해가 떠오른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아스가르드의 아침 햇살은 몹시도 밝았다. 화창한 하늘 아래, 혼곤한 의식 속에서 꺠어나자마자 로키는 창 바깥에서 들려오는 활기찬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벌써 웃고 떠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인데, 혹시 자신과 토르의 손님들이 먼저 도착해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부스스 일어나 앉자, 흰 몸을 가리고 있는 부드러운 옷자락 위로 새카맣고 부드러운 머리카락들이 흘러내렸다. 막 잠에서 깬 참이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로키가 바닥에 두 발을 딛는 순간, 시종이 그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일어났으니 하객들을 맞기 위한 단장을 할 시간이었다. 


왕제의 시중을 들기 위해 온 시종 두어 명이 로키의 검은 머리칼에 향유를 발라 손질하여 깔끔히 빗어 넘겼다. 뒤이어 도착한 이가 이 날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예복을 침대 위에 펼쳐 두자, 잠옷을 벗은 로키가 시중을 받아 가며 눈처럼 흰 예복을 차려 입는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희고 깨끗한 옷자락에는 은실로 아름다운 자수가 놓여 있었다. 그의 얄상한 몸선에 맞춰 제작된 결혼식 복장은 검은 머리와 초록색 눈동자와 대비되어, 로키의 눈 색이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피부가 갑갑한 게 싫어, 화장은 일부러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창백한 볼과 입술만을 보기 좋게 복숭앗빛으로 물들여 놓았을 뿐이다.


예복을 다 차려 입은 로키의 몸에 녹색 망토를 둘러 주고, 신랑의 부토니에 대신 특별히 제작한 브로치로 천 자락을 고정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마친 시종들이 이내 그의 침실 문을 나섰다. 살짝 구겨진 망토의 윗부분을 당겨 주름을 편 로키가 이내 제 침실의 길고 긴 전신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박힌 녹색 눈동자가 흥미롭게 빛났다. 그의 창백한 피부만큼이나 흰 바지가 제 길다란 다리를 착 감싸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로키가 이 결혼식을 승낙한 직후, 토르는 그를 향해 어떤 드레스를 입고 싶냐는 농담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 농담을 듣자마자 차갑게 웃은 그는 곧바로 사정없이 토르의 옆구리를 향헤 단검을 찔러넣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더랬다. 우리 제멋대로인 폐하께서는 대체 왜 내가 당연히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들의 결혼식 예복에 대한 한참의 줄다리기 끝에, 토르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제 동생이 흰색의 예복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관철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래도 그 정도까진 양보할 수 있었기에, 로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자신은 예복의 색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의 결정권을 가졌으니까. 그것이 바로, 로키가 지금 입고 있는 결과물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장인들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제작된 고급스러운 화이트 컬러의 예복은 이 너른 우주에서 오직 단 한 사람, 로키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었다. 가장자리에 촘촘하게 에메랄드를 일일이 박아 만든 순은 예복 단추와, 고급스러운 녹색의 레이스 부케 모양으로 만들어진 망토 브로치는 그가 오늘 어떤 자리에 서게 될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살짝 턱을 치켜 든 로키가,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토르도 지금쯤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제 형의 모습은 과연 어떨지 궁금했지만, 관례에 따라 본격적인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당사자들은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자신의 예복이 망가지지 않도록 우아한 자세로 방 안 의자에 살짝 걸터앉은 로키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슬쩍 귀를 기울이니 어느덧 바깥에선 이미 만찬이 시작된 듯 했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 자신의 고상한 모습을 손님들에게 보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젠장, 내가 왜 그 말에 넘어가서는! 로키의 우아한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톡, 하고 두드렸다. 어차피 미드가르드의 손님들은 자신이 직접 데리러 갔다 와야 하니, 아예 자신이 하객 접대를 도맡아 하겠다는 토르의 제의를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그 당시에는 제 형의 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 기다리는 시간은 자신에게는 너무 무료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로키는 멍하니 텅 빈 벽을 바라보며 공상에 잠기려 애썼다. 그는 점심 즈음에 자신의 침실을 나설 예정이었다. 점심 때 모든 것을 치르고 나면 모두가 저녁 때까지 여유를 즐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밀려드는 지루함에 로키가 묵묵히 바깥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언뜻 잘난 체 심한 아머 양반의 밉살스러운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에 기어이 벌떡 일어선 로키가 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의 흰 구두 뒷굽이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정말,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점차 인내심의 한계가 다가오자, 다시금 의자에 앉은 로키가 잘 닦인 거울 같은 간이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기 시작한다. 톡, 톡, 토독. 그 위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던 로키의 손가락이 만들어낸 소음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던 그 순간. 똑똑, 청아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 육중한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로키는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이를 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아, 혹시… 로키 씨세요?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누구야?"


자신에 비하면 아직 어린 티가 역력한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어린 개미는 손가락으로 톡 치면 죽을지도 모르겠군. 로키가 눈을 가늘게 뜨자, 소년이 냉큼 자기 소개를 한다. 


"제대로 찾아와서 다행이네요. 저는 피터 파커예요! …아, 혹시 히어로 네임으로 소개해야 하는 건가요? 전 스파이더맨이에요!"

"…아, 피터… 그래, 꼬맹이. 길을 잃었나? 여긴 무슨 일…"

"토르의 심부름을 왔어요!"

"아하."


개미가 아니라 거미였군. 피터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고 나니 왠지 긴장이 탁 풀려버려서, 로키가 나른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혹시 날 데리러 온 건가?"

"네! 이제 나오셔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참 일찍도 부르는군. 더 기다렸다가는 얼음 기둥이 되어버렸겠어."


투덜거리며 일어선 로키가 잠시 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흰색 베일을 바라보았다. 기껏 다듬어 놓은 머리 모양이 망가질까봐 내내 쓰지 않았지만, 막상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이 제 곁에 설 당사자가 아닌 것을 보니 괜시리 약간의 심술이 일었다. 가벼운 몇 번의 손짓으로 자신의 머리에 베일을 얹은 로키가, 이내 그것을 투명하게 만든다. 즉 앞으로 마주칠 모든 이들에게는 그가 쓴 베일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딱 한 사람만 빼고는.


두 사람은 나란히 궁정 복도를 걸었다. 덤덤한 로키와는 달리, 새로운 곳에 와 신이 난 듯 피터는 사방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피터를 흘긋 본 로키가 먼저 입을 연다.


"꼬마 거미. 미드가르드에서 온 거야?"

"미드가르드…? …네! 지구에서 왔죠. 토르가 데리고 왔어요!"

"좋아, 그래. …바깥은 어때?"

"다들 엄청 즐거워해요! 스타크 씨도 그렇고, 모두들…"


환하게 웃은 피터가 코를 찡긋거리며 하던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다시 또 우주에 오게 될 거라곤 생각 안 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올 수 있게 돼서 좋아요."

"…그래?"

"네, 고맙습니다. 아스가르드는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음… 나한테 고마워할 건 없어. 그래도 즐거워보이니 다행이군."

"아,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말을 안 했네요. 결혼을 축하드려요, 로키 씨!"

"아, 음… 그래. 축하해줘서 고마워."


천 년 여를 살면서 이렇게 해맑은 생물은 처음 보았다. 진심으로 기쁜 얼굴인 피터를 바라보던 로키가 이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날이 날이어서인지, 어느덧 그의 기분은 다시금 괜찮아져 있었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피터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걷는 것도 잠시, 이내 홀을 나선 둘은 한창 만찬이 진행 중인 아스가르드 왕의 정원으로 향했다. 발을 들여놓기 전, 로키가 제가 쓴 베일에 걸어 놓은 마법을 해제하자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을 가린 하얀 레이스 베일이 휘날렸다. 사실은 토르만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할 생각이었는데, 기분이 좋아져 그만둔 그였다. 


저 멀리서, 즐거운 한때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결혼식 당사자가 나타나자, 모두의 시선이 로키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심 애타게 그리워했던 한 사람이 고개를 돌려 로키 쪽을 바라본다. 두 시선이 처음 마주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로키가 짧게 숨을 삼켰다.


"…"


어느덧 많이 자란 금발을 뒤로 멋스럽게 묶은 토르는, 그와는 대조되는 검은 예복과 붉은 망토를 차려 입고 있었다. 황금과 루비로 포인트를 주고, 붉은 망토 자락에 황금으로 아스가르드의 문양이 수놓인 그의 예복은 아스가르드 왕의 위엄을 드러내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희고 창백한 로키와는 달리, 토르는 한층 더 근엄하고 진중해 보였다. 이렇듯 서로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의 의상에서 유일하게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각자의 망토를 고정하고 있는 브로치일 것이었다. 불타는 것처럼 붉은 레이스 부케 모양의 보석 브로치는 난쟁이들의 왕이 만들어 두 형제에게 선사한 장신구였다.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색깔만 다른 이 장신구는 아스가르드의 따뜻한 햇살을 받아 아름다운 빛을 뿜었다.


밝은 금발 아래, 푸른 눈과 다갈빛 눈은 오직 단 한 사람, 로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토르의 의상에 관해서만큼은 자신의 선택이 오백 퍼센트 옳았다고 생각하며, 로키가 천천히 멈춰 있던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보다 토르의 걸음이 훨씬 더 빨랐다.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의 코앞에 서자, 손을 뻗어 로키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조심스레 벗겨낸 토르가 이내 눈부시게 웃었다.


"채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구나. 그 어느 누구보다… 아름다운 내 동생."

"…오, 형이야말로."


이상하게 자꾸만 잠겨드는 목을 가다듬으며, 로키가 토르의 찬사에 화답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을 끌어당긴 토르가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기자, 그들의 주위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제각기 높낮이가 다른, 유쾌한 휘파람 소리도 들렸다. 그것은 퀼과 로켓의 합작품이기도 했다. 입술을 뗀 토르가 슬쩍 웃으며 물었다.


"기껏 준비하고 나왔는데, 허락도 없이 입맞춤을 했다고 화를 내진 않을 것이지?"

"틀렸어, 형. …너무 짧아서 아쉽단 생각이 드는 걸."

"물론 나도 네가 모자르다고 느낄 거라 생각했단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별들이 떠오를 오늘 밤이 남아 있지 않느냐."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에 키득키득 웃은 로키가 잠시 시선을 돌리자, 하객들의 자리 중 가장 뒤쪽에 앉아 있던 거대한 누군가가 눈에 띈다. 시퍼런 얼굴에 빨간 눈동자. 윈틀이었다.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서리 거인이 저를 향해 짧게 눈인사를 하자, 로키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툰헤임에서의 결전을 마치고 아스가르드로 돌아온 직후, 얼음을 녹였을 때 보았던 얼굴이었다. 이름이… 바름이었던가? 어쨌든 두 거인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선하고 성실한 요툰헤임의 지배자는, 결혼식에 관련하여 로키가 했던 부탁을 잊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만찬장 중앙에 마련된 버진 로드에 두 사람이 서자, 윈틀이 이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박수 소리가 잦아든다.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서리 거인의 손에는, 거대한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윈틀이 들고 있던 검을 발견한 브룬힐데가 눈을 크게 뜨자,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가모라가 설명을 구하는 듯한 표정을 한다. 그러자 목소리를 낮춘 브룬힐데가 짧게 설명한다.


"예전에 토르의 아버지인 오딘의 검이었던 성검 그람이야. 분명 없어졌다고 했었는데, 그걸 서리 거인이 갖고 있었을 줄은…"

"그렇군요. …그런데, 어째서 결혼식에 검을 가져온 거죠?"

"짐작은 가. 왜냐하면… 성검 그람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있거든."


말을 삼킨 그녀가, 이내 멍하니 서리 거인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척척 걸어나온 서리 거인이 이내 토르와 로키 곁에 도달하자, 하객들을 향해 뒤돌아 섰다. 느닷없이 결혼식 만찬 도중에 등장한 거대한 검 때문에 의아해하는 모두를 위해, 그가 막 설명을 시작할 참이었다.


"이 검의 정체가 궁금하실 겁니다. …짧게 말씀드리자면, 이 검은 아스가르드의 선대 왕이었던 오딘이 잃어버렸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성검, 그람입니다. 윗세대 서리 거인과의 전쟁 중에 요툰헤임으로 흘러 들어왔고, 지금껏 왕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죠. 이번에 여기, 로키의 부탁을 받아 직접 그람을 가지고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바로… 과거의 전쟁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초대를 받아 에시르들의 땅을 받은 첫 서리 거인이 되겠군요."


숨이 찬 듯, 잠시 하던 말을 끊은 윈틀이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스가르드 왕의 결혼식이라는 신성한 행사에 제가 그람을 가져온 이유는, 성검 그람의 또 다른 이름 때문입니다. 그람은 '진실의 검'이라 불리죠. 이 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춘 이가, 진실로 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힘을 갖고 있거든요."


말을 마친 윈틀이 엄숙한 얼굴로 제 손 안의 검을 살짝 돌렸다. 그러자 맑고 투명한 검면이 토르와 로키의 모습을 나란히 비춘다. 그가 잠시 침묵을 지키자, 모두가 고개를 길게 빼어 그람에 비춰진 것을 보려고 했다. 그것은 당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토르는 제 곁의 동생이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꾹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로키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자, 로키의 뺨 언저리가 언뜻 붉어진다. 그러기를 잠시. 모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그람의 투명한 검면에는 여전히 두 연인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어렸던 날, 한바탕 왕의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나왔던 때처럼. 두 형제는 티 없이 밝게 웃고 있었다. 이내 다시금 그람을 높게 들어올린 윈틀이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이 영광스러운 순간! 서리 거인의 왕이자, 요툰헤임의 지배자인 나 윈틀과 성검 그람은, 아스가르드의 왕과 왕제의 진실한 사랑을 증명하는 증인과 증거물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랑스러운 연인들에게, 이미르 신의 축복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금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은 토르가,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로키의 손을 꾸욱 잡았다. 이제는 두 주인공이 만찬장을 돌며 인사를 할 차례였다. 윈틀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깜찍하게 차려 입은 금발의 여자아이 하나가 고사리 같은 손에 꽃바구니를 든 채 쪼르르 달려온다. 그러더니 그들보다 몇 걸음을 앞서 걸으며, 제 손에 들려 있는 바구니에서 꽃잎을 꺼내 허공에 뿌리기 시작한다. 빨갛고 노란 꽃잎들이 공중에서 하늘하늘 내려앉아 로키의 발 앞에 떨어졌다. 언뜻 자신을 흘긋 돌아오는 아이의 생김새가 제법 똘똘해 보여, 로키는 슬쩍 웃었다. 보아하니 토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자신들을 향해 환호하는 하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로키가 낮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형, 저 아인 형이 데려온 아이야?"

"음… 어떨 거 같으냐, 동생아?"

"…그냥 말해주지 그래? 수수께끼 같은 건 별로 재미 없어."


씨익 웃은 토르가 갑자기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살그마니 녹색의 망토 자락을 들추고 들어와 느긋하게 그의 허리를 쓰다듬는다. 몸에 딱 맞게 디자인된 예복 위를 쓸고 지나가는 뜨거운 체온에 로키가 움찔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뺀 토르가 장난스레 그에게 속삭인다.


"발할라에서 헤임달이 우릴 배웅해며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헤임달? …아."


그래, 분명히 그랬었지. 자신의 능력을 물려주고자 하는 이가 있다고. 때가 되면 헤임달과 똑같은 능력을 갖게 될 거라고. 놀란 얼굴로, 로키가 토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토르. 그럼 저 애가, 바로 그…?"

"그래. 네가 그 아이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로키. 솔베이그라고 하지."

"흐응."

"벌써 헤임달과 비슷한 눈동자를 갖기 시작한 것 같더군. 앞으로 저 아이는 발키리에게 훈련을 받게 될 거다."

"이런, 고생길이 열렸네."

"그 또한 저 아이의 운명인 것이지. 그걸 견뎌내는지, 아니면 실패하는지도 아이의 몫이고. 하지만 헤임달이 언급한 아이인 만큼… 잘 해내지 않겠느냐?"

"…아마도?"

"자, 우린 이만 가자꾸나. 로키. 바깥의 백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이내 서로를 마주 본 둘이, 씨익 웃는다. 그러는 중에도 여전히 솔베이그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 끝에서 뿌려진 꽃잎들은 아스가르드의 왕과 왕제의 앞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


아스가르드 전역에 마련되어 있는 만찬장을 다 도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던 해가 어느덧 많이 지평선 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하도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아 귀가 멍할 정도였지만, 로키는 입가가 떨릴 정도로 웃으며 그에 화답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숨기지 못한 피로 어린 얼굴을 눈치 챈 토르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대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정스레 제 연인을 챙기는 왕의 모습에 몇몇 짓궂은 이들이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아스가르드 왕의 정원으로 돌아왔을 때, 로키는 조금 기진맥진해 있었다. 조금 쉬고 싶은데, 라는 생각을 했을 무렵, 로키의 몸을 가볍게 끌어당긴 토르가 말 없이 그를 푹신한 의자 위에 앉혔다. 동생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토르의 눈빛이 짙었다.


"뭐라도 좀 마시겠느냐, 동생아. 힘들어 보이는구나."

"조금… 지쳤을 뿐이야. 그래도 다들 아직 자기들의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군."


로키의 농담 같은 진담에, 큰 소리로 껄껄 웃은 토르가 이내 그에게 노오란 액체가 담겨 있는 잔 하나를 내민다. 주스겠거니 싶어, 안의 내용물을 꿀꺽, 삼킨 로키가 이내 눈을 가늘게 뜬다.


"형, 이거 주스 아니었어? …근데, 익숙한 맛이 나네."

"네 피로가 풀리는 데 도움이 될 거다, 로키. 오늘을 위해 담가두었던 꿀술이지. 예전에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가 몇 모금씩 맛볼 수 있게 주시지 않았느냐."

"…그래, 기억나."


프리가의 꿀술. 요정들만이 담글 수 있다던 그 술은 달큼하니 혀애 사르르 감기는 맛이었다. 내내 긴장되어 있던 몸이 조금 풀어지는 기분이 들어, 로키가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잔을 끝까지 다 비우고 나서야 토르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서자, 토르가 그를 다시금 정원의 중앙으로 이끈다. 바야흐로 길고 길었던 결혼식의 막바지였다. 한창 이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이들이 두 사람을 맞았다. 아스가르드의 독주를 맛 본 대다수의 영웅들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킬킬거리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던 이들이, 토르가 로키의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하자 환호성을 지른다. 이미 제대로 만취한 것 같은 피터 퀼의 함성은 그 중에서 가장 컸다.


"평범남! 너어, 진… 짜, 엄청 평범해 보였는데! 오늘은 좀! 멋지다! 잘 살아, 인마!"

"…"


이미 아스가르드산 술의 숙취를 맛본 적이 있었기에, 제 잔을 적당히 홀짝거리며 토르와 로키를 바라보고 있던 로켓이 그를 바라보며 뜨악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퀼이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키의 우아한 손가락이 토르의 눈가를 쓸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보아 왔던, 맑은 호수처럼 푸른 눈. 미드가르드에서 보았던, 더위가 가시고 난 후의 낙엽처럼 따스한 금갈색의 눈. 서로 다른 빛깔의 두 눈이 모두, 오직 자신 하나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심장까지 얼려버릴 듯한 시련과, 집요하게 목을 죄어오는 죽음을 넘어서. 그는 자신에게로 왔다. 토르 오딘슨은, 제 것이었다. 문득 눈앞의 그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애정이 차올라, 눈가에 고이려 하는 투명한 무언가를 애써 감추며 로키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로키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토르가 동생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는다. 그러자 봄의 새싹을 닮은 녹색 눈동자가 스르륵, 긴 속눈썹에 살며시 가려진다. 행복한 두 연인의 앞날을 축복하는 소리, 놀리는 소리, 하늘이 찢어질 듯한 박수 소리.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쓰다듬듯, 다정하게 로키의 입 안을 유영하는 혀는 부드럽고도 따스했다. 영원의 입맞춤을 나누는 두 사람을 비추는 햇살은 몹시도 눈이 부셨다.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나고, 제 입술을 삼켰던 체온이 떨어져나가자 로키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늘 그렇듯 저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형의 얼굴이었다. 오늘도, 내일도, 일주일 후도, 한달 후도, 1년 후도, 10년 후도. 그리고 천 년 후에도. 토르는 이렇게 나를 보며 웃어 줄까. 그런 로키의 질문에 응답이라도 하듯, 토르가 낮은 음성으로 저를 부른다.


"로키."

"…그래, 형."

"내 사랑하는 동생."

"…그래, 그것도 알아."

"발할라에서 우리를 굽어 보고 계실, 아스가르드의 모든 선조들께 맹세하마. 나, 아스가르드의 왕이자 아홉 왕국의 지배자이며, 천둥의 신이자 미드가르드의 수호자인, 토르 오딘슨의 모든 것들은, 언제나 너를 위해 존재하고 너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갈 것임을. 그리고… 영광스럽게 발할라로 떠나가게 될 그 날 이후로도, 너를 향한 마음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임을. 내 기꺼이 네 앞에 무릎을 꿇고, 이리 맹세하마."


그의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은 토르가, 천천히 로키의 창백한 손등을 들어올려 그 위에 입을 맞춘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로키는 멍하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던 자신의 마음이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처럼 말랑거리는 기분이 들어, 다시금 눈가가 시큰해지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제 눈물을 참으려 애쓰던 로키가, 결국은 포기하고 토르를 내려다본다. 사르르,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그가 울음을 참느라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가는 멍청이야."

"나도 알고 있단다, 동생아."

다시금 몸을 일으킨 토르가 대답하자, 로키의 눈꼬리에서 기어이 투명한 무언가가 또옥, 하고 떨어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행복의 눈물이었다. 촉촉해진 눈가가 채 마르기 전, 토르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로키가 자신을 향한 연인의 맹세에 화답한다.


"나, 로키… 아스가르드의 왕제이자, 요툰헤임의 정당한 왕이었으나 이제는 자격을 갖춘 자에게 옥좌를 물려준 자이며, 장난의 신. 이 모든 이름들이 지고 있는 권위와 영광, 그리고 살아 숨쉬는 내 숨결의 의의까지도… 이 순간, 오직 단 한 사람에게만 바칠 것임을… 맹세해. 나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자격이 있는… 오직 단 한 사람. 토르… 나의 형."


저를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토르를 마주한 로키의 창백한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그를 조금 더 생기 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늘 냉소적이었던 녹색 눈동자에 깃든 평안은, 그들의 약속을 지켜보기 위해 자리한 이들 모두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것이었다. 로키가 말을 마치자, 토르의 팔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를 끌어안았다.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포옹이었다. 불안, 고독, 증오, 괴로움. 그 모든 감정들이, 사랑하는 이의 포옹 한 번에 스르르 녹아 사라진다. 됐다. 이것으로, 자신은 됐다. 지금 당장 발할라로 떠나야만 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랬다. 로키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은 토르가,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울음을 삼키며 속삭였다.


"사랑한다, 로키."

"…나도, 마찬가지야. 언제나, 늘… 사랑하고 있어. 토르…"


토르의 숨결이 느껴지는 자신의 어깨 부분이 축축했다. 기어이 백성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왕이라니. 그 역시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서도, 로키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가만히 손을 뻗어 붉은 망토 속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로키가 생각했다. 사실 내 모든 건… 전부터,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모두 다, 형 거였어. 토르. 토르. 사랑하는 나의 폐하, 나만의 왕. 사랑하는… 나의 형.


- THE END-


--------------------------------------------------------------------------

후기 겸 소장본 공지는 내일 올라올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ALL THAT YOU를 봐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라알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