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희야.
꿈에서 네가 나를 죽였다.
네 꽉 쥔 칼날이 내 가슴을 찔렀어.

네가, 나를. 우습지 않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악몽이라니.


*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꿈이었으나 황제는 그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마냥 좀처럼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무슨 영문 모를 꿈인지, 조금씩 꿈에서 깨어들어 이른 새벽에 다다를 즈음, 함께 침전에 들었던 궁녀가 소리 없이 이불을 걷어내고 베개 아래에서 단검을 꺼내어 쥐었다. 중앙국의 황제 휘연, 그가 총애하던 자희라는 여인이었는데, 검은 귀와 꼬리를 가진 그녀는 북위국에서 온 사람으로 흑黑을 중시하던 이곳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궁녀는 잠든 휘연을 내려다보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요상한 악몽에 시달리던 휘연은 함께 누웠던 자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는지 반쯤 깨어버린 상태로, 아직 눈은 채 뜨지 못하고 간밤 머릿속을 괴롭히던 악몽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꿈 때문인지 영 스산함을 떨쳐낼 수 없어, 문득 불안한 마음에 눈이 저절로 뜨이더라니……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것처럼 시야에 검을 든 자희의 번뜩 빛나는 두 눈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은 살의로 빛나고―휘익, 조금 놀랐을 텐데도 거리낌 없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단검을 내리찍는 자희를 보고 휘연이 급한 대로 몸을 틀어 피했으나 자희의 배신이 그의 왼쪽 어깨를 깊숙이 찢고 들어갔다.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할 지독한 고통에 휘연이 턱 막히는 숨을 들이쉬는 사이 놀란 자희는 내리찍은 단검을 뽑아들지도 못하고 빠르게 침대에서부터 멀어져갔다. 잠이란 잠은 죄다 달아나고 아직도 꿈인가하였으나 이 고통은 꿈의 것이 아니기에, 휘연은 오른팔을 겨우 들어 제 어깨에 박힌 단검을 빼내고 나서야 자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잠시 주춤대던 자희는,

“……네가, 어……째서,”

분노보다는 깊은 의문과 어두운 절망만이 담긴 휘연의 목소리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황제의 침전을 뛰쳐나갔다. 그러는 사이에도 휘연의 흑색 비단 침의 위로는 검붉게 피가 번져갔다. 그는 숨을 고르려는 듯 고개를 젖히고 큰 숨을 내쉬었고 그렇게 두어 번을 반복한 뒤에야 침전의 문을 향해 걸을 수 있었다. 다리를 찔린 것이 아니고 급소를 맞지도 않았기에 비틀대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묘하게 느린 걸음, 구겨진 미간. 황망하여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두 눈. 훅 번져오는 피 냄새.

그가 세 발을 내딛기도 전에 침전 밖에 있던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그리 물었으나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활짝 젖힌 문 쪽으로 느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다고. 자희와 그는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문 앞까지 길게 끌리는 걸음을 걷던 휘연은, 하염없이 자희가 사라진 복도를 주시하다 머리가 핑 돌 때가 되어서야 내관에게 말을 붙였다.

“어의를 불러오라.”

무슨 말인가 싶어 무례하게도 고개를 들어 황제의 상태를 살피던 내관은, 검디검은 비단 위로 황제가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을, 그 누른 손 틈으로 선혈이 흐르고 있음을 보았다. 헌데 휘연의 얼굴은 아픈 사람보단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연嚥

천 휘연×서 탁 :: 14000자
w. 이라(@ira1144)


많은 사람들이 황후의 자리에 당연스레 자희를 짐작했기 때문에, 자희의 도망은 궁인들의 입안에 수없이 오르내렸다. 불미스러운 일이니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둘 아님 셋만 모여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어찌 그럴 수 있냐거나, 황제께서 그녀를 아끼셨는데, 근심이 크시겠다거나, 그런 말들도 황제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가능했으며 높은 자리의 관리에게 그런 대화를 들키기라도 하면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한동안 황궁은 속닥이는 쥐새끼 무리로 들끓는 심란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가장 심란한 것은 역시 황제 본인, 천 씨 성의 휘연이었다. 이틀이 지났으나 그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여, 이틀 전에는 자신의 어깨에서 흐른 피로 엉망이 되었었던 침대를 자주 찾았다. 화가 나서였을까, 믿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피가 묻었던 것들은 모조리 가져다 태우라 명했기에 다시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의 흔적은 모두 지웠으니 남은 것은 하나. 자희뿐이었다.

‘밤은 너무도 웅장하기에, 겁이 나요. 소녀를 삼킬 것만 같사옵니다.’

자희의 음색이 휘연의 귓가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휘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들어 자기 머리칼을 헤집었다. 어찌 보면 쥐어뜯는 모습으로도 보였다. 가만 두어도 붉은 입술을 피가 밸 정도로 깨물었고, 결국에는 피맛을 본 뒤에야 힘주어 물었던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 밤 이후 잠들지 못한 눈빛은 탁해져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허둥대며 돌아다녔다. 그렇잖아도 날카로운 인상이 더욱 매섭게 보여 내관이 눈치를 보느라 쩔쩔매는 것도 모르고 휘연은 마른 얼굴을 쓸었다.

사랑했다.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감정이건 중요치 않았다. 그에게 있어 다신 찾을 수 없을 사랑이라 느꼈고, 놓치고 싶지 않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겼으며, 함께하는 모든 시간을 기억에 담으려 애썼다. 어깨에 검을 찔렸는데도―사실은 죽을 뻔 했는데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괴롭다.

그러나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이렇게 환청이 들리고 그녀의 생각에 잠들지 못하는 시간들도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어디에선가 끓어오르는, 전혀 다른 뜨거운 감정마저 사랑이라 칭할 수 있는가. 그의 분노는 피 묻은 것들을 내다 태운 불길보다 거세었으나 지나칠 만큼 조용했다. 휘연은 사랑하는 이에게서 배신당한 사람이 이렇게도 조용할 수 있는지를 처음 알았기에, 웃기고 어이가 없단 심정으로 기침처럼 실소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선 예전의 따뜻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인상이 날카로워도 웃을 때엔 종종 자상함을 내비치곤 하던 나날은 어디로 가고 지금의 휘연은 차갑게, 딱딱하게 굳어 칼끝이 스쳐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 이따금씩 얼굴을 구길 때에는 주변의 많은 이를 두려움에 몰아넣을 뿐이었다. 그런 얼굴을 한 그는 종종 어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하는 말을 혼잣말로 내뱉었다. 침전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자희가 도망친 뒤 한동안 황제의 명령은 그녀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자희의 출신지를 알아오라, 자희를 장기말로 사용하여 짐을 시해하려 한 배후를 철저히 밝혀내라, 무엇이든 좋으니 자희에 관련한 것은 모두 다. 짐에게로 가져오라.

그 다음은 하나도 빠짐없이 숙청하는 것. 휘연은 제게서 흐른 피보다도 많은 피를 자신의 손에 묻혔다. 그럴 때의 그의 눈은 달빛을 받은 듯 번뜩이며 빛났다. 그를 찌르던 자희의 눈빛처럼, 분노 같은 찐득한 감정으로 가득차 그 어디에서도 온정을 찾아볼 수 없는 시린 눈빛이 검보다도 날카로웠다. 그렇게 제법 많은 이의 피가 그의 흑색 비단을 더럽혔으나 휘연은, 아직 부족하다는 듯, 복수귀와 같은 얼굴을 했다.

‘북위국의 출신이라 했었지.’

*


“……허니 이와 같은 이유로 군을 이끌고 북위국에 침공할 것을 선포한다.”

방금 죽인 시체 쪽으로 검을 휙 내던지며 내뱉은 말에 조정에 모였던 대신 모두가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쩡, 하고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내자 장군 백 록훈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으며, 그 뒤를 이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입을 모아 황제의 결정을 만류하였다. 북위국의 자원적 이득을 취하며 동시에 천림天㝝교를 전파하고자 한다고, 분명 말은 그리하였으나 흑색 용포는 방금 전의 핏물조차 빠지지 않은 채였다. 황국의 황제가 무엇을 위해 전쟁을 벌이려 하는지 조정에 있는 대신들이 모를 리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정사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궁인들도 뻔히 알 것이다. 전혀 때가 아닌 시기에 정당한 이유도 없이 타국을 침공하다니, 그로 인해 피를 흘릴 군사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그러니 입을 모아 황제에게 황명을 거두어달란 간청을 올릴 수밖에.

그러나 황제가 몸을 돌려 대신들을 향해 피 튄 용포와 그 위로 광狂 서린 눈빛을 내보였을 때, 순간 대신들의 목소리가 확연히 느껴질 만큼 줄어들었다. 사나운 눈매 아래 그릇된 마음처럼 고요히 타오르는 시선이 바닥에 내던진 검에게로 향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그가 할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오늘부터 출정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그 끝에, 전혀 멀쩡한 정신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그러나 더는 반박할 수도 없는 한 마디가 이어졌다.

“하늘이 황국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


백白이 색을 잃어가며 핏물을 훤히 드러내는가 하면 흑黑은 핏물을 집어삼키면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았다. 갑작스런 전쟁에 중앙국의 백성들에게도 피해는 있었으나, 황제의 말처럼 하늘이 황국을 승리로 이끌었는지, 패한 것은 북위국이었으니 그만큼 하얗던 이들은 피로 물들어 많은 것을 빼앗겼다. 피가 낭자하기로는 휘연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수많은 군사를 이끌면서도 그들과 함께 적국의 병사를 베고 죽였다. 황제를 보필하던 백장군은 나라가 미친 수장을 두어 멸국의 화를 입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했고 확실히 그는 미쳐 있었다. 전쟁이 있기 한참 전부터, 단단히 미쳐 있었다.

전장의 중심에서 말 위로 검을 휘두르던 휘연의 눈에 문득 시체 밭이 되어버린 타국의 땅이 담겼다. 모두 죽었다. 흰 빛깔을 지녔던 이들을 무수히 죽였는데도, 이곳에서는 검정을 찾는 것이 어려워 아직 원하는 이를 찾지 못하였다. 결코 빛을 잃지 못하는 휘연의 눈은 찾는 이를 향해 수없이 움직였다. 어디 있느냐, 어디 있냐고. 그리 말을 하는 것처럼. 이제는 알 수 있었고, 확신할 수 있었다. 휘연은 자희를 증오했다. 더없을 사랑 끝이 더없을 증오라니, 사랑은 어째서 이다지도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지.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탓하면서도, 그 시절과 추억을 탓하면서도 중앙국의 황제인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해선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가 벌인 일은 황국의 수장이란 권력을 쥔 채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나, 그 권력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어느 누가 사랑했던 여인을 찾아 죽이기 위해 타국을 침략하고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중앙국의 황제, 천 씨 성의 휘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껏 황제로서 살아온 중의 가장 어리석고 포악한 권력 행사였다. 결국은 북위국의 설산만큼이나 새하얀 항복의 깃발이 성벽 위 처절하게 흔들리게 될 때에서야 휘연은 제 검을 허리춤의 검집에 끼워 넣었다. 원하지 않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북위국의 자원, 종교를 전파할 수 있는 속국 하나.

무릎을 꿇어앉은 백색의 늑대들과 눈여우는 휘연을 두려워하거나, 자신들의 패배에 수치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선 흑색 갑옷의 휘연은 전혀 승리에 도취될 수 없었다. 가장 원하던 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 ……흑색의 귀와 꼬리. 휘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자리 무릎 꿇었던 패전국의 왕족들은 모두가 동시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 말하던 이들이 데려온 이는 새하얗게 망토 같은 것을 뒤집어쓴 사내였다. 멀리에서부터 체격과 걸음걸이 등으로 자희가 아님을 확신한 휘연이었으나, 그들이 그리 자신 있게 데려왔으니 궁금한 마음에 입을 열지 않았다. 곧 가까이 끌려온 이의 무릎이 강제로 꿇려져, 맞지 않는 것을 입은 듯 어색하던 흰 망토를 젖히자 그 아래 새카만 늑대의 귀가 드러났다.

서 탁. 북위국의 왕자군 중 한 명이었으나 타고나길 흑빛인 귀와 꼬리로 났으니 정계에서 취급받지 못하는, 북위국엔 있어보아야 필요도 쓸모도 없는. 그런 존재였다. 중앙국과는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국가에서 서자로 태어난 그에게 흑黑이란 저주이며 불행이리라. 그와 눈을 마주친 휘연 또한 그리 생각했다. 이제 곧 휘연이 그를 본국으로 끌고 갈 셈이었으니. ……증오하는 여인의 얼굴이 겹쳐보였던 탓이다. 자희는 개의 귀와 꼬리를 지녔고 탁은 늑대의 것임이 확연히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국에 와 만난 검정의 사내는 그녀를 대신하기에 제법 그럴싸했다. 방금 전까지 성벽 안쪽에서 전쟁에 가담했는지 피로 흠씬 젖은 옷 위로 한 겹 걸쳐놓은 흰 망토가 웃길 만큼 어울리지 않는 탁은 마주한 휘연의 두 눈에서 멀고도 가깝게 느껴지는 증오를 보았다.

“이 자를― 황국으로 데려가야겠다.”

이번에도 휘연의 옆을 지키던 백장군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그는 정계에서도 아무런 영향이 없는 자라, 그런 이를 볼모로 잡아보았자 국가에 아무런 득 될 것이 없습니다. 죽지 않은 왕족 중에는 저 자를 대신할……”
“대신할 것은 필요 없다. 이 자를 마차에 태워라.”

백장군은 조금 더 고집을 피웠다. 이것이 모두 황제 휘연을 향한 충심이었다.

“폐하,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옵소서. 대신들도 입을 모아 반대할 것이 분명합니다.”
“짐을, 막아설 생각인가?”

이번엔 검이 어느 먼 바닥이 아닌 휘연의 허리춤에 있었다. 조금만 손을 움직여도 뽑을 수 있는 거리였고, 백장군이 그를 막아선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테지만, 황제가 검을 뽑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으니. 이제 더는 그를 말릴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돌아간 이후에도 기회는 있으리라 생각했는지 백장군은 침묵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런 득 될 것 없음을 휘연도 알고 있었다. 하늘이 그의 편을 들지 않을 것도 알고 있어. 허나 그것이 다 무언가, 그는 이미 말을 타고 너무도 먼 곳까지 와버렸으니, 어깨에 남은 흉터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인데. 휙 돌아서는 휘연의 뒷모습에서 탁은 정의내릴 수 없는, 두려움과는 다른 형태의 검정을 보았다. 패전국의 왕자군은 승전국 황제의 뒤통수에 이를 아득였다. 언젠가 이 수모를 갚을 날이 오리라, 그 날을 기다리겠노라. 소리 없는 다짐을 갑옷처럼 둘렀다.

*


중앙국으로 돌아가는 길, 탁을 황제의 마차로 불러들인 휘연은 다시 마차가 출발한 이후에도 별다른 말없이 대각선에 마주앉은 그의 새하얀 망토에 시선을 두었다. 피로는 물들어도 검정에는 물들지 않겠다는 듯 고집을 피워가며 쓰고 있는 저 망토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고, 황궁에 돌아가면 저것 대신 흑의黑衣를 입히리라, 마음먹었다.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탁은 끌려올 때부터 지금껏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종종 휘연이 그의 얼굴을 주시하는데도 탁은 마차의 창문살에만 시선을 고정하였다. 같은 곳에 있으나 다른 생각을 하는 듯, 팔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휘연 또한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실은 눈이 마주하면 휘연이 먼저 피할 것이기도 하고. 한동안 그의 피 묻은 갑옷을 주시하던 휘연은 아무것도 없는 맞은편을 향해 시선을 회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미리 사과해두지.”

덮어쓴 망토 아래 탁의 귀가 쫑긋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있다는 표시처럼. 그러나 휘연은 시선을 물렸기에 그 사실을 알 수 없었고, 그가 듣든 듣지 않든 제 할 말은 하겠다는 심보로 말을 이었다.

“그대는 짐의 죄로 인해 죽을지도 몰라.”

아니…… 아마 죽을 것이다. 확신하듯 이어진 중얼거림에 어이가 없어서 탁의 시선이 저절로 휘연을 향했다. 지금껏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는 미안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러나 휘연의 눈을 마주하지는 못하였고, 그저, 어딘가 먼 곳으로 분노를 내던져버리려는 듯 하염없이 서글픈, 축축이 젖은 눈을 보았을 뿐이었다. 굳게 다문 입이며, 찡그리지 못한 눈썹 같은 것들은, 영락없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심보로 자신을 속국의 볼모로 잡아왔는지 아직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잠깐 마주했던 시선에서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엿보였던 것은……

탁의 시선이 다시 거두어질 즈음 휘연은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탁도 거의 동시에 그런 느낌에 사로잡혔다. 갑옷과 새하얀 망토 안쪽으로 묻어난 핏자국을 보니 머리가 쨍 울리는 것 같았고, 눈썹이 찌푸려지고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다행히 말 달리는 소리가 적막을 없애주었으나 중앙국에 도착하면 또 무슨 불행의 연속일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탁은 마음을 갈무리하려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하지만 내쉬는 숨에서 두려움과 겁怯, 불안은 전혀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


“싫어, 차라리 다시 피 묻은 갑옷을 입고 말지! 치워.”

탁이 주춤 뒷걸음질을 쳐 가며 인상을 썼다. 이렇게 실랑이를 한 지 꽤 시간이 지나 있었고, 내관들이 쩔쩔매며 옷을 하나하나 늘어놓는 것을 보니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 불쾌한 색을…… 중얼거리며 탁이 입고 왔던 옷 쪽으로 빠른 걸음을 내딛었다. 정말로 저런 검정을 걸치느니 흙먼지와 피로 더러워진 옷을 입겠단 의지였다. 몸을 씻고 나온 지 오래되어 물이 뚝뚝 떨어지던 머리칼도 물기를 머금고 몇 가닥씩 붙어있기만 할 뿐, 내의를 축축이 적시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 더러운 옷을 입게 둘 순 없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옮겨지는 탁의 시선. 전장에서의 차림과는 달리 엄연한 황제의 용포를 걸친 휘연이 방 앞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흑색의 비단이었으나 갑옷과는 다르게 그 구성이 화려했고 손등을 살짝 덮는 소매 위로는 금수가 놓여 있었다. 다시 내관들이 내미는 옷을 보니 제 것도 흑비단으로, 화려함은 적었으나 값싼 옷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입을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탁에게 있어 흑黑을 스스로 뒤집어쓴다는 것은 당연히 꺼려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휘연은 내관에게 찌푸린 눈짓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중앙국에 왔으니 이곳의 규율을 따라야지. 입지 않겠다 하거든 붙잡아 억지로 입히겠다.”

그 말은 억지로 입히기 전에 스스로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뜻이었으나 결국, 휘연의 말에도 제 의견을 굽히지 못한 탁은 한참이나 내의만 입은 채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내관들에게 몸을 잡혀 억지로 검정을 둘렀다. 흑의를 입은 것인지, 수치를 입은 것인지 모를 얼굴로 몸을 떠는 그를 보고 있자니―그 분노 서린 탁의 시선과 마주했을 때 일순 타인의 얼굴을 떠올렸는지, 황제의 눈빛이 바람을 마주한 촛불처럼 흔들렸다.

조금 더 자세히 살폈으면 탁의 떨림 어딘가에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있단 사실도 알아챌 수 있었겠지만, 휘연은 혀를 한 번 쯧 내차곤 몸을 돌려 사라졌다. 나풀대며 멀어져가는 휘연의 옷자락 끝을 쳐다보는 탁의 눈동자가 얼핏 금빛으로 빛나는 것 같았지만, 내관에게는 자세히 볼 권리가 없으며 황제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 차마 더 강하게 고집하지 못해 끝내는 황국의 옷을 걸친 것이 화가 났는지 의자로 향하는 걸음이 곱지 못했다.

그의 걸음은 조금씩 비틀대고 있었고, 탁 본인이 그 사실을 숨기려는 듯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이런 곳에 와서까지 하찮게 취급받고 싶지 않았다. 비록 북위국의 볼모로 잡혀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고개를 숙이거나 아첨을 떠는 행동을 하지는 않으리라.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앞길에 도사리고 있을 위험과 고난을 걱정하고 있었다.

일순의 불안한 마음에 탁은 고개를 들어 주변의 궁녀들과 내관들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멸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서. 헌데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입 하나 뻥긋하지 않았다. 언제나 날 세운 채로 긴장하고 있는 그가 타지에 억지로 끌려왔으니 지나칠 만큼 긴장하고 경계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었다. 허나 지금 와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지금은, 잠들고 싶어.

*


궁녀 초비는 북위국의 왕자군 서 탁이 황궁에 볼모로 잡혀왔던 날부터 줄곧 그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아이였는데, 아침마다 탁의 머리를 빗겨주며 복슬거리는 검은 털빛에 감탄하곤 했다. 처음엔 불쾌해하거나 어색해하던 탁도 이제는 그녀의 감탄사를 익숙하게 넘길 수 있게 되어, 길지 않은 머리칼을 빗어 내리는 동안 줄곧 이어지는 칭찬에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다만 무덤덤해보여도 귀가 쫑긋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초비는 칭찬의 끝마다 움직이는 늑대의 검은 귀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마마, 오늘은 새벽부터 눈이 왔답니다. 옷을 따뜻하게 입으셔야 해요.”

들었던 빗을 치우고 초비가 옷을 들어다 탁상 위에 두었다. 몇 겹이나 되는 옷들이 죄 검정이었으나 탁은 처음 황궁에 발을 들였을 때와는 달리 반항하지 않았다. 그 사이 초비가 입이 닳도록 흑색의 귀와 꼬리 칭찬을 해준데다가 흑黑이 중앙국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묻지도 않았는데 줄줄 설명해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탁은 자신의 색에, 검정에 조금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을 걸칠 때에는 늘 하나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정말로 내가 불쾌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

털빛이 불결하고 위험하다 하여 본국에서는 행복을 손에 쥘 기회가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다. 왕자군이었으나 실상 대신들보다 힘이 약해 이름뿐인 왕족이었고, 그마저도 빼앗긴다면 적당한 장군 자리를 받을 미래가 눈앞에 선연했다. 그의 위치에서 바랄 수 있는 행복은 너무도 소박하고 작은 것들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어려워 내관과 궁녀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왕이 총애하지 않으니 냉기가 도는 거처에서 왕족의 것이라기엔 얇은 옷을 입으며 지내던 세월이 오래였다. 날 때부터 시작하여 잡혀오기 전까지 계속 그런 삶을 살았으니, 그중에는 형제나 다름없는 왕자와 왕자군들의 구타로 흰 피부에 멍이 들었던 날도 있었다. 탁은 아직 그 날들을 기억했고, 앞으로도 쭉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탁의 어깨 위로 두꺼운 흑비단의 외의가 걸쳐지자 초비가 가지런히 옷의 각을 맞추어 마무리해주었다. 그러는 중에 문이 열리며 내관 하나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마마, 인사드립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제 폐하……라. 탁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머리를 숙인 내관이 제 대답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해 곧 나가겠노라 대꾸하면서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이 자신이 볼모로 잡혀온 배경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었으나, 휘연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여전히 그 사내는 탁의 마음을 불편케 했다. 황제의 위엄 같은 것을 제치고 두더라도 큰 덩치에 사납게 생긴 인상, 억지로 자신을 끌고 온 일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두려운 존재였다.

하여 자신의 불편함을 알아챘는지 휘연은 종종 얼굴을 비치다가도 금세 자리를 피하곤 했다. 노려보는 듯 한 날카로운 눈매 아래 눈동자가 탁을 응시할 때엔 기죽어 떨지 않으려 부단 애를 썼기에, 그를 만나는 것이 아주 기쁘다곤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북위국을 멋대로 침략한 사람이기도 하고.

“하지만……”

탁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초비가 예? 하고 되물었다.

“……나가자.”

그러나 그는, 몸을 일으켜 휘연에게로 나설 뿐이었다.

*


‘하지만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

궁중의 생활은 눈치를 보고 기분을 살피는 것의 연속으로, 황제 휘연이 어렵게 느껴졌어도 증오와 멸시의 유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휘연은 자신을 증오하거나 멸시하지 않았다. 휘연뿐 아니라 황궁의 궁인들 대부분이 그를 더러운 것 보듯 흘겨보지 않았다. 같은 궁 생활이었으나 오히려 볼모로 잡혀온 곳에서 더 사람대접을 받게 되니 무슨 사람 신세가 이러냐고 속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이곳의 궁인들은 적응되지 않을 만큼 탁에게 호의적이었다. 마주치기만 해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마마를 뵈옵니다’ 하는데 조롱도 비하도 아닌, 격식을 차린 인사를 하루 수번이나 듣는 생활은 익숙하지 않았다. 휘연도 마찬가지였다. 온기 담긴 목소리로 말을 걸며 험하게 대하지 않는 태도. 어쩌면 그런 태도는 그가 오랫동안 바라 마지않던―

탁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휘연을 흘금 쳐다보았다. 문득 입을 열어 하고 싶은 질문이 생겼지만,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끝내 묻지는 못했다.

‘정말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사람인가?’

그 따뜻함은, 탁을 저절로 움츠리게 만들었다. 뜨겁지 않은데도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익숙하지 않아서 신경 쓰였는데 먼저 내치기는 어려웠다. 두 손으로 감싼 찻잔의 물이 아직 식지 않아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온기.

휘연이 찻물의 향기에 잠시 눈을 감았을 때, 문밖에서 내관이 입을 열었다.

“폐하, 백장군이십니다.”

그러곤 문 여는 소리가 들려 황제는 도로 눈을 떠야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엔 방금 전까지의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겨울의 눈을 다 가진 차가움만 남아있었다. 백장군이 성큼 다가와 휘연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자희의 수색에 대한 보고를 했고, 탁은 드문드문 들려오는 몇 개의 단어들로 보고의 내용을 짐작해냈다.

문득, 어젯밤 잠들기 전과 똑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


당신이 내게 주었던 다정은, 자희란 여인에게 주려했던 것의 잔여물일까.

그런 생각이 끈덕지게 내 발목을 잡는다. 처음부터, 그 여인을 닮아 나를 데려왔잖아. 나를 쳐다보던 두 눈동자가 갈 곳 잃은 증오나 분노로 괴로워하던 것을 기억한다. 흑비단을 입혀두고 황급히 나가던 걸음도, 대화 도중에 드문드문 찾아오는 정적도. 그런 것들이 모두 자희란 여인과 관련되어있음을 모를 수 없었다.

당신은 아직도 그녀를 찾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고, 나는 그녀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분노인지, 애증인지, 분노만큼이나 타오르는 애정인지 알 수 없어. 차분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주 조금의 가능성을 배재하지 못해 스스로 괴로워했다. 결국 나는 어디에서나 나로서 사랑받지 못하고, 이곳에서의 좋은 대우가, 당신의 다정이, 옛 여인의 대체품에게 주는 온정인가 싶었다.

밤이면 몇 가지 생각들이 교차되었다. 나로서 받지 못하는 온정이어도 괜찮으니, 이런 따뜻한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거나, 온전히 나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면 왜 따뜻한 빛을 보여주었냐거나,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고, 당신이 온전한 나를 바라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들. 당신은 내게 각별히 다정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 다정은 너무나 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늘 밤은 눈이 펑펑 내려 잠들지 못할 것 같아.

*


시간이 빠르게 흘러 찾아온 늦겨울의 밤에는 늘 눈이 내렸다. 영 불쾌한 꿈을 꾸다 깨어 뒤척이던 휘연은 결국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산책에 나섰다. 아직 찾지 못한 자희를 생각하자니 눈이 펑펑 내린 밤 풍경이 아까웠고, 문득 서 탁을 데려왔던 날의 일이 생각나 걸음이 저절로 탁의 침소로 향했다. 지금 시간이면 잠들어 있겠지만, 조용히 얼굴만 보다 가는 것이라면 나쁘지 않을 테다. 찬바람에 얼굴이 얼어붙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될 즈음 그는 뒤따라오던 내관을 물리고 걸음을 멈췄다. 난간에 기대앉아 눈 쌓인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탁의 인영을 발견한 탓이다.

하얗게 눈이 내리는 시야에 침의를 걸친 탁은 밤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정원을 향한 탁의 눈빛이 처음 이곳에 왔던 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해보였고, 정적 끝에 부스스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은 옆얼굴이 휘연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천천히, 놀라지 않게 발소리를 내어가며 탁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 정도 발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탁이 휘연을 발견했다. 귀를 쫑긋이며 놀란 두 눈으로 휘연과 마주하고 있자니 휘연은 옆으로 다가와 난간의 눈을 툭툭 털어내고 앉는 거다. 그러더니 방금까지 탁이 시선을 두었던 곳을 말없이 응시했다. 놀란 표정도 잠시, 휘연에게서 고개를 돌린 탁이 적막을 거두려는 듯 입을 열었다.

“밤은, 위험한 시간이란 소릴 많이 들었어.”

과거 다른 이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린 휘연의 입끝이 움찔거렸다.

“내가 살던 덴…… 다들 그렇게 생각하니까. 물론 나도 그렇지 않다고는 못 하겠고.”
“그런 것 치곤 꽤 편안한 얼굴이던데.”
“위험하긴 하지만 조금…… 좋아서. 편해.”

무슨 이유로? 물었던 그의 질문에 대한 탁의 대답을 듣고 휘연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무의식 속에 밀어두었던 현실을 자각한 것 같은. 자희가 아닌 사람을 자희를 보듯이 보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 고요한 시선이 탁에게 꽂힌 동안에도 탁은 어둠에 묻힌 눈밭만 보았다.

“혼자 새카매서 낮에는…… 눈에 잘 띄니까. 밤은 만물이 다 어두워져서, 내가 평범한 존재처럼 느껴져.”

그런 말을 하는 탁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오랜 시간 밤과 함께 지낸 사람처럼. 하얗게 내리는 눈, 어떤 불행을 되짚듯이 희미하게 번진 미소와 흑색의 소매 끝으로 드러난 예쁘게 생긴 손 같은 것들이 천천히 휘연의 시야를 지배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새삼스레 확연히 와 닿았다. 자희와 탁은 처음부터 같은 이가 아니었다. 그녀를 향해야 할 갈 곳 잃은 애증의 일부가 탁을 향한 마음으로 변모한 것도 아니었다. 짧을지도 모르는 평온이니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 좋았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휘연은 탁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상대에게도 같은 감정이 있으리라 확신하게 되었던 거다.

이전의 믿음이 깨졌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겁나지 않았다. 탁은 다를 것이란 믿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오랫동안 사랑받기를 원할 것이란 믿음. 그런 이유 없는 확신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더 잘해주고 싶어졌다. 소중히 여기고 싶고, 그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몇 번이나 알려주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탁의 손을 찾아 잡았을 때, 오래 나와 있어 차가워졌던 손이 휘연의 손을 조금 힘주어 잡았다.

“자희에게……”

아는 이름이 들려 탁이 맞잡은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주었던 사랑을, 거두어서. 그대에게 주고 싶다. 줄 수만 있다면.”

깊고 깊은 아쉬움, 진심이 담긴 목소리.

*


가까이 앉은 휘연과 탁 사이의 공기가 적막으로 고요할 때, 문득 탁의 볼 위로 눈물이 한 줄기 툭. 그 눈물은 주변을 장식하는 흰 눈과는 다르게 뜨거운 흔적이었고,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닌데도 그의 조용한 울음이 당황스러웠는지 휘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뭔가 실수를 했던가 되짚는 듯 시선이 갈피를 못 잡는 걸 보고 탁이 프흐 웃음을 터트렸다.

“혹시 짐이 그대에게,”

실수라도 했느냐고, 그렇게 묻는 말에 탁은 잡았던 손을 슬쩍 빼내더니 흐르던 눈물을 닦아냈다. 당황한 휘연과는 달리 그는 어딘가 모르게 기뻐 보였고, 놀라느라 이제야 알아챈 휘연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빠졌던 손을 다시 슬금 찾아다 잡는 거다. 또렷해진 시야에 탁이 다시금 휘연을 담았다. 눈 쌓인 정원만큼이나 흰 피부는 밤의 어둠에 가려져도 희게 보여서, 흑색 눈동자가 유독 돋보였다. 그 두 눈동자에 자신을 향한 걱정이라거나, 당황한 기색이 보이는 걸 느끼자니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벅차는 숨을 천천히 고르는 동안 저도 모르는 새, 검은 늑대 꼬리가 기분 좋은 양 흔들렸다.

탁은 천천히, 말을 몇 번 삼켰다가 내뱉었다.

“그냥…… 기뻐서. 다행이다, 싶어서.”

그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했는지 차게 부는 겨울바람을 걱정하며 휘연이 탁을 가까이 끌어안았다. 두 팔을 벌린 탁이 휘연의 품에 안겨서는 입끝을 화악 들어 웃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제야. 사랑하는 사람이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안심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고 벅찬 마음 때문인지 달까지 밝아 보였다. 다정한 시선도, 따스한 품도 편안히 말을 거는 목소리도 옛 여인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되었다. 이것이면 돼. 처음인 다정이, 화상을 입을 만큼 따스한 온기가 타인을 향한 마음의 잔여물이 아니란 사실만으로도 탁은 기뻤다. ―그 이상으로, 서로가 같은 마음이란 게, 사랑받는다는 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생긴다는 게 목끝까지 열이 오를 만큼 가슴을 벅차게 했다. 그건 휘연도 마찬가지였다.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자길 끌어안고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이 사랑스런 사람은 소중하고 귀해 한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그가 자신의 온도에, 이 따스함에 익숙해질 수 있기를 바래서, 자꾸만 품에 안고,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데도 더 많은 온정을 주고 싶은 이 마음은.

흑색 머리칼을 몇 번 쓰담던 휘연이 부드러이 탁의 어깨를 잡아 떼어내자 여전히 웃음기를 담뿍 머금은 탁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다 고갤 들어 조심스레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휘연의 입술에 일순의 따스함을 남기는 거다. 온정을, 휘연에게서 받았던 것을 따라하듯이. 그 짧은 입맞춤에서 확실한 감정을 느낀 휘연은 벅차듯 행복한 마음을 당장 표현해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탁의 귓가에 수번이나 밀어를 속삭였다. 연모한다, 은애한다, 자희에게 주었던 마음보다도 더 많은 것을 그대에게 주겠다, 그런 말들을.

바람이 차게 불어도, 손을 놓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괜찮을 것 같았다.

*


한 해가 지나 낙엽이 지던 그 날 오전엔 장안에 역병이 돌기 시작해 정사에 파묻힐 만큼이나 많은 상소가 올라왔고, 오후엔 두 마리의 까마귀가 편전 앞에 떨어져 죽었으니 대신들이 불길한 징조라며 앞 다투어 황제의 알현을 청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쉴 틈조차 주지 않고 편전을 드나드는 대신들 때문에 휘연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허나 그도 좋지 않은 꿈을 꾸었기에 아침부터 탁을 곁에 두었고, 모쪼록 자신의 착각이기를 소원했다. 그런데 청명해야 할 가을의 하늘에 짙게 구름이 끼어 낮인데도 저녁인 양 날이 어두웠다. 어스름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대신들이 물러나 편전의 공기도 조금 차분해졌으니 휘연은 이마를 짚었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겨우 숨을 돌리게 되어 목이 탔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 북위국에 정찰을 보냈던 상랑에게서 아무런 소식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눈을 번쩍 떴다. 북위국의 철 생산량이 보고된 것과는 다르단 말에 상황을 알아보라고 상랑 장군을 보냈던 참이었다. 휘연의 낯빛이 차츰 어두워졌다.

“―폐하.”

벌써 네 번째 부름이었다. 휘연의 귓가에 겨우 그 목소리가 닿아 탁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탁이 정인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그냥 편하게 불러도 괜찮다. 대신들은 다 물러갔으니.”
“그럼…… 휘연아. 무슨 생각 했어. 계속 불렀는데 대답도 없고.”

글쎄, 하고 운을 띄웠던 휘연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온기가 감도는 맞잡은 손에 시선을 두고 대답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

빈 말이어도 다 괜찮을 거란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


시월의 마지막 밤은 유독 길었다. 겨우 한산해진 편전에 백장군이 뛰어 들어오면서 소란이 시작되었다. 내관이 황제에게 보고를 올리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편전에 들이닥쳤으니 무례했다 할 수도 있으나, 그만큼 화급을 다투는 일이었다. 휘연은 백장군이 입을 열기도 전에 보고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북위국…… 북위국의 반란입니다, 장안의 역병도 움직임을 편히 하려는 계략이었습니다……!”

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뜬 두 눈동자에 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종종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나타나는 그 금안을 근래에는 보기 드물었음에도 불구하고 휘연은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놀란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그는 숨을 크게 내쉬며 여러 장군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을 불러 반란군을 잠재울 것을 명했다.

명했으나, 북위국의 군사력이 예상보다도 막강해졌음은 휘연마저 짐작할 수 없었을 테다.

성문이 뚫렸다. 밤이 무색하게 궁 안 곳곳이 불에 타올랐다. 수많은 병사들이 돌바닥에 피를 쏟아가며 죽어나갔다. 역병을 해결하기 위해 궁밖에 어느 정도의 병력을 내보낸 탓에 전적으로 중앙국이 불리한 전쟁이었다. 반역은 한 순간에 이루어졌으나 모두가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여 따로 황제의 명이 없을 때에도 병사들이 긴장하고 있었는데, 역병이 돌아 궁밖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잠시 느슨해진 것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모든 원인은 휘연이었다.

하늘이 황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라고, 죽어가는 병사들은 생각했다.

사람이 죽어나가고, 시체가 쓰러진다. 손에서 검을 놓치고 방패가 쓸모없어질 만큼 병력이 줄어들어 북위국 군사의 시체와 중앙국 군사의 시체가 뒤섞여 편전 앞에 까마귀 사체처럼 널렸고, 황국의 병력이 바닥났는데도 북위국은 후발대를 보냈는지 몰려드는 발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탁의 검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고, 휘연의 갑옷 틈에 피가 고여 들었다.

“그 때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네가 나의 죄로 인해, 죽을 것이라는 말.”
“후회하고 있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와 다르게 휘연의 눈은 아직 빛을 담은 채 번뜩였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고, 그렇기에 검을 쥐는 탁을 더 말리지 못했으니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놓을 수 없다. 아니, 서 탁만큼은 놓을 수 없어.

몰려드는 군사들 속에 정인을 놓칠까 겁이 난 휘연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그 순간 크게 휘두른 창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아직 조금 더 싸울 수 있다. 조금 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에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하나, 둘, 셋, 일곱과 여덟, ……서른. 그렇게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적군들의 목을 베어 쓰러트린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땅바닥에 고꾸라지는―저 흑색 머리칼은, 저 옷자락은. 눈마저 마주하지 못하고 등을 내보인 정인을 향해,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은.

*


나의 사랑은 검정인가 보다

증오와 분노만큼이나 까맣게

너를 삼켜버렸다


*


목구멍이 꽉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소리를 질러야 하는데 지를 수 없어. 손을 뻗었으나 소매조차 닿지 못하고, 달려가려니 다리가 휘청여 한 번 주저앉았다 일어나 내달린다. 바람이 차고 숨이 뜨겁다. 돌아오는 겨울의 첫 눈을 함께 맞으려 하였는데. 아직 안 된다, 아직 너를 잃을 수 없어.

탁아. 탁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시체를 밀치고 달려가 너를 품에 안는다. 입술 새로 터져 나오는 피를, 검에 찔려 돌바닥으로 주르륵 떨어지는 피를, 너를, 너의 것이었던 선홍색 피를 놓칠까 두려워 손 위로 받아내려 하는데 무정하게도 흘러 떨어진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너를 죽게 해서는 안 되었는데. 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죄라는 죄는 모조리 나에게 있거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아니, 뛰어오는 발소리가 멀찌감치 들리는 것 같다). 채 감지 못한 네 두 눈이 나와 마주하는데, 왜 입술이 움직이지 않나. 나를 보고 방긋 웃어주어야 할 텐데. 너는, 너는 어째서.

왜 그 말을 내뱉었는지. 네가 죽을 것이란 말을, 겁도 없이 왜.

끌어안은 너에게로, 땅 위로 그림자가 졌다. 사람의 인영. 돌아보아야 했으나― 심장을 찌르는 날붙이의 감각. 살이 찢어지는, 피가 올라오는 고통.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뒤를, 돌아, 보면.

결코 용서하지 못할, 증오, 증오하는, 증오하는 여인이. 그 뒤로, 스러지는 늦가을 밤하늘의 새하얀.

“……탁아,”

보여? 하늘. 올해의 첫 눈이 내려. 일찍이네. 다행이다. 무슨 소원 빌었어? 나는……


*본 소설의 저작권은 저자 이라(@ira1144)에게 있으며 상업적 이용과 2차 가공을 금지합니다.




녀녀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