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특성상 BGM이 자주 바뀌고 많습니다.

필수로 틀어주세요.




    

네 소원은 뭐니

세상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고 싶구나

네 소원은 뭐니

세상에서 제일 강한 전사가 되고 싶구나

네 소원은 뭐니

세상에서 제일 긴 영생을 갖고 싶구나

가능하냐고?

당연하지. 이곳 인스탄시아로 오렴.

너희의 소원을 들어줄게.


DREAM IN THE SEA





"역시 자본이 좋긴 좋아."


다소 허름하고 좁긴 해도 큰 불편은 없으니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아무리 몇 번 밖에서 잠을 자봤다고는 하지만 실내와 실외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래서 점심이 훌쩍 지난 지금도 푹신한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죽은 듯 잠을 자는 이들도 있었다. 여주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두 다리를 쭉 뻗고 있었고 그런 여주의 옆에는 무릎베개해달라고 다가왔다가 재민에게 세게 한 대 쥐어박고는 토라진 모습의 동혁도 있었다.

땡전 한 푼도 없던 그들은 델포이의 도움으로 돈을 얻어 여관에 들어올 수 있었다. 비교적 아테스보다 얼굴이 덜 알려져 있던 델포이가 신분과 이름을 감추고는 도시에서 일을 한 돈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덕이었다.


"그럼 우리의 목표는 다이아몬드네."

"나재민 너도 참 인정머리 없다. 우리는 다이아가 아니라 아테스를 돕는 게 목표지."

"기분 나쁘네? 네가 그딴 소리 하니까?"


재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동혁을 흘겼지만 동혁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재민을 쓰레기 만들기에 급급했다. 여주는 자신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둘이 시끄럽고 짜증 난다며 인상을 한껏 구기고는 자리를 피해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새근새근 잠이 든 마크가 보인다. 머릿결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그의 머리카락을 아무 생각 없이 만지작거리자 눈을 감은 마크가 몸을 뒤척였다.


"그러면 우리는 아테스랑 녹스를 도와주면 되는 거죠?"

"혹시 불만 있는 사람 있어?"

" "


도영이 이들을 둘러보았다. 자고 있는 마크와 지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의 뜻을 내보이고 있었는데 계속 마크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던 여주는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도영이 여주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여주는 본인을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여주 넌 도와주기 싫은 거야?"

"도와주고 말고 보단 서로 합의가 안 된 내용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사람을 정확하게 파악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주가 보았던 아테스는 자신감이 높았고 그러는 동시에 자존심도 강해 보였다. 높은 신분의 탓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그녀의 실력도 이유가 될 것이다.


"델포이는 오로지 '신탁'의 내용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전한 거고, 아테스는 성격상 쉽게 부탁 같은 거 할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서 돈을 번다는 게 다이아몬드를 번다는 뜻 아니었어? 그렇다는 건 아테스를 도와주고 다이아몬드를 버는 게 텐 형이 말한 예언이 아닐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곳에 넘치는 것은 다이아몬드니까 꼭 그 다이아를 벌기 위해 아테스를 도우라는 법은 없지. 그냥 그것만 챙겨서 바다 밖을 나가면 그것도 어쨌든 돈을 버는 방법이 되는 거니까."


제노의 말에 의자에 반대로 앉아 등받이 부분에 턱을 얹고 있던 인준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돈을 벌어오라는 텐의 말에 따라 아틀란티스에 도달했고 그 돈이 다이아몬드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런데 이제는 그 다이아몬드를 얻는 과정에 궁금증이 생겼다. 인준의 말처럼 쉽게 다이아몬드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몇 년을 숨어 살던 아틀란티스의 실종된 공주가 이들의 앞에 나타난 것 또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이상했다.

마치 꼭 정해진 운명처럼 말이다.


"여주 네가 싫다고 하면 우리는 그 일에서 손 떼고 다이아몬드만 챙길 거야."

""

"어쨌든 델포이가 너를 보고 말을 건 거니까 네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야지."


당연히 델포이의 말을 듣고 아테스를 도와줄 계획이었던 드림은 그제야 선택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 그렇기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의 말을 꼭 들어줘야 한다는 것 또한 없었다. 이들은 큰 전투를 치르고 난 후로, 특히 여주의 몸이 회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 거슬린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어떻게 할래?"


도영의 물음에 여주가 마크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뒤척이던 마크가 아직은 잠에 잠긴 눈을 힘겹게 뜨고는 여주를 바라보다 머리 위에 있는 그녀의 손을 낚아채 커다란 자기 손에 가두고는 다시 새근거리며 잠에 빠져든 듯싶었다. 졸지에 마크에게 손이 잡힌 채로 있게 된 여주는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선택에 맡기겠다고 했지만, 당연한 건 없지만, 이들은 여주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여주가 망설이고 있는 것은 당사자의 부탁, 즉 아테스의 부탁이었다. 마하트 소녀의 경우에는 소녀가 여주에게 돌아가라고 부탁했지만 그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던 이유는 그것은 정말로 '부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솔직히 말하자면 부당하다고 말하기도 뭐 했다. 왕이라는 직위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항상 따르는 것이 피와 권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아테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어린 녹스를 데리고 열악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만든 것이 그녀의 작은아버지라서 원망이 가득하겠지만, 당시 아테스가 미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살았을 때 왕과 왕비는 수백만 명의 백성 대신 한 명의 공주를 선택했다. 왕과 왕비가 딸의 방문 앞에서 애원하고 있을 때 수백 명의 백성은 궁 앞에서 왕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3명 째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대체 범인은 언제 잡히는 겁니까?'

'간밤에 물이 넘쳐 그나마 자라고 있던 농작물이 금세 썩어버렸습니다!'

'정글에 살고 있던 야생 동물들이 간혹가다 도시로 넘어오고 있어요. 뭔가 조치를 취해주셔야 저희가 마음 놓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처럼 누군가는 현재 왕 소탄의 심장에 화살을 꽂아버리고 싶다면, 다른 누군가는 반란을 일으킨 소탄의 행동이 혁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날 것도 아니니까 생각 좀 해보고."

"그래. 천천히 생각해봐."

"빨리 생각해주면 안 될까? 나 지금 굉장히 불편하거든?"

"이동혁 네가 왜 불편해?"

"그야 거절할 거면 빨리하는 게 낫지. 우리 지금 델포이 돈으로 여기 묵고 있는 거잖아! 이건 먹튀라고!"

"…그 와중에 그런 생각까지 하는 거야?"


천러가 혀를 끌끌 차면 동혁이 멋쩍게 코를 긁적거렸다.




DREAM IN THE SEA
EP.5 전설의 도시




델포이가 챙겨준 돈으로 저녁을 사기 위해 재민, 동혁은 시장으로 향했고 천러와 지성, 마크, 인준은 아틀란티스의 밤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여관 안에는 여주, 도영, 제노만이 남은 상태였다. 여관 주인한테 빌린 신문을 읽고 있던 도영의 뒤로 가로로 길게 침대에 누워있던 여주가 팔과 다리를 의미 없이 까닥거렸다. 여주의 다리가 바닥에 앉아있던 제노의 등을 툭, 툭 규칙적으로 쳤고 그는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팔만 뒤로 뻗어내 움직이고 있던 여주의 다리를 자신의 팔로 가두었다. 다리가 묶이자 자연스럽게 팔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확실히 소탄의 이미지가 부정적이지만은 않네."

"뭔데?"


도영이 읽던 신문을 여주에게로 건넸다. 제노도 그것을 읽고 싶었지만 온통 알 수 없는 고대 언어에 단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어 금방 포기를 했다. 여주가 읽은 신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일주일 뒤면 아틀란티스에 빛이 들어오게 된 지 5년째가 되는 날이고 그 기념식을 위해 아틀란티스 백성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빛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던 똑똑한 여행객과 더불어 그런 여행객을 설득하여 자신들을 위해 빛의 시작을 알게 해준 소탄의 찬양 글이 대부분이었다.


'빛을 보게 된 날, 우리는 그날을 새로운 아틀란티스의 시작이자 빛의 왕이 군림하는 시대라고 일컫는다.'


"빛의 왕…"

"우리는 단 한 번도 빛이 없는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만약 우리도 이곳에서 태어나고 처음으로 진짜 빛을 봤더라면 소탄이라는 사람이 자기 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더라도 그를 위대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그렇겠지. 왕의 덕목은 꼭 인자함일 필요는 없으니. 방법이 어떻게 됐든 간에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게 왕의 역할이고 제일 중요한 거니까."


여주가 다시 신문을 도영에게 건넸다. 그러면 도영은 읽지 못했던 부분을 마저 정독해 나갔다. 의미 없이 팔과 다리 장난을 제노 덕분에 멈춘 여주가 멍하니 허름한 여관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소탄이 아테스에게 부정적인 사람일지라도 수많은 백성에게 소탄은 빛의 왕이다. 그러니까 나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누구도 네 탓 안 하니까."


어느새 바닥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여주의 곁으로 다가와 턱을 괸 상태로 누워있는 여주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제노가 아까 여주가 마크에게 그랬듯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살살 매만졌다. 현재 자신이 가이딩에 목마른 것도 아니고 손을 잡거나 다른 신체 부위가 맞닿은 것도 아니지만 제노는 여주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배가 간지러웠다. 그래서 제노는 말을 마치자마자 견딜 수 없는 감정에 고개를 숙여 침대 위로 얼굴을 콕 박았다. 귀 끝이 붉어진 제노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여주는 단순히 그가 낯간지러운 위로를 견디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감사의 의미로 손을 뻗어 그의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그러면 제노는 이를 악물고 침대보가 주름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여주야."

"왜."

"그만 좀 해. 그러다 제노 죽겠어."


결국 보다 못한 도영이 나섰다. 일부러 시선은 신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노여서 망정이지 아마도 저 손이 재민이나 동혁에게 향해져 있었더라면 도영은 당장이라도 여주를 침대에서 끌어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끼는 제노에게도 질투심이 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쳐다보기도 싫은데 걔네가 그랬으면 진짜. 도영의 말투와 행동은 평소와 같았기에 둘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실상 도영의 속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스스로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잘만 읽고 있던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자 도영은 신문 읽는 것을 포기했다. 그와 동시에 여주가 상체를 일으킨다.


"답답해. 바람이라도 쐬고 올래."

"엄청 뜬금없는 거 알아?"

"갑자기 답답해진 걸 어쩌라고?"

"하아, 내가 어쩌자고 너를"


저세상 말버릇에 골머리가 아파왔는지 도영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숨을 고르고 있던 제노가 슬쩍 고개를 들어 같이 가도 되냐고 직접적으로 묻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그녀를 바라봤지만 혼자서 가고 싶다던 그녀는 제노의 머리를 다시 침대 위로 눌렀다. 여주는 벽에 기대 세워져 있던 자신의 칼을 챙긴 후 여관을 빠져나왔다. 해가 넘어가는 수평선은 존재하지 않지만 붉은색의 하늘은 해가 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DREAM IN THE SEA
EP.5 전설의 도시




걷다 보니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던 장소다. 여주는 그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는 잘 만났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숨어서 사는 거 맞아요?"


이미 저녁 놀음이 내려앉고 있는 해안가에 멍하니 앉아있던 델포이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주를 바라보았다. 델포이는 예의라도 차리려고 하는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여주는 됐다며 고개를 젓고는 델포이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그녀와는 다르게 편하게 두 다리를 쭉 뻗고 아무렇게나 모래 위에 앉는다.


"지내시는 곳은 어때요?"

"좋아요. 고마워요."

"다행이네요."


뚝 끊긴 대화가 다소 재미없었지만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델포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따라서 앞을 응시한다.


"델포이."

"네."

"뜬금없는 말이지만, 저는 신을 믿지 않아요."

"그러시군요."

"그래서 신탁도 내겐 믿어지지 않고."


여주의 목소리에 델포이의 시선이 아래로 잠깐 떨어진다. 고운 모래사장의 모래들이 다이아몬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을의 빛을 가득 품었다.


"설령 신탁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그건 받아들이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 아닌가요."

"…"

"갑자기 이런 말 해서 미안해요. 비난할 의도는 아니고 당신을 만났을 때 확실히 해둬야 될 것 같아서."

"괜찮아요. 충분히 이해해요."


델포이가 살풋 웃어 보였다. 참 맑은 웃음이었다.


"그거 아시나요? 신은 한 명의 신탁자만을 두어요. 그 신탁자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신을 위한 사람이 되는 거죠."

"… " 

"신탁자의 힘이 가장 강력할 때는 신을 섬기는 신전이 존재할 때예요."

"…"

"이 아틀란티스에도 신전이 존재하는데 그 신전은 오로지 포세이돈님을 위한 신전이죠."

"…"

"저는 신탁자이긴 하지만, 이 아틀란티스에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포세이돈님의 신탁자는 아니에요."


고대에는 여러 신들이 존재한다. 크게 우리는 이 신들을 도데카테온(Dodecatheon), 쉽게 말해 올림포스산에서 사는 12위의 주신이라는 뜻으로 흔히 올림포스의 12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아틀란티스는 포세이돈의 분노를 경험했지만 그래도 한 번 선택된 자신들의 신을 계속해서 믿는 것이 고대 사람들의 믿음이자 종교였다. 분노한 포세이돈에게 죄송함을 빌고, 재건할 수 있도록 기도를 올렸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은 순간 미웠던 감정을 뒤로한 채 어미가 제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다시 인간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이 도시에 존재하는 신탁자는 딱 두 명밖에 없어요. 하나는 저이고, 다른 한 분은 '오라클'님이신데 그분이 바로 포세이돈님을 직접 모시는 신탁자입니다."

"…"

"포세이돈님의 도시에서, 포세이돈님의 신탁을 듣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없어요. 오라클님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최고의 힘과 능력을 갖춘 분이세요."

"…"

"오라클님에 비하면 아직 제 신탁 능력은 미숙하고도 잘 다듬어지지 않았죠."

"…"

"오라클님처럼은 아니더라도 저도 인간을 사랑하는 제 신의 뜻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도를 올렸죠. 그런데 저는 결국 제 신에게서 도망을 쳤어요."


신을 믿지 않는 여주는 이 이야기가 신화와도 같은 허구의 이야기 같았지만 딱 하나, 델포이의 표정만큼은 감히 의심할 수 없었다. 눈앞에 마치 동경의 대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델포이는 거짓도 없는 굳건한 믿음을 가진 상태였다. 그런 델포이와 도망이라는 단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단어이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었다.


"도망?"

"신은 다수의 인간을 생각하지만 가끔씩 단 한 사람을 생각할 때가 있어요."

"…"

"신탁자들은 거의 그러한 뜻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전달을 하죠. 그게 신탁자의 일이자 사랑하는 신을 위한 소통이니까요."

"…"

"저라고 달랐겠어요? 그게 신의 말인데."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인간도 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신과 인간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들은 다른 존재이다. 델포이가 놓쳤던 부분은 이러한 점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신의 말을 아테스에게 전달한 날,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소탄이 아테스님에게 사냥을 하러 가자며 불러내셨던 그 날, 아테스님은 끝까지 가기 싫어하셨어요. 그런데 제 신은 그러셨죠. 아테스님은 그곳을 가야 한다고."


하지만 그 신탁은 결국에 아테스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좌절하는 델포이는 아테스에게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아테스는 말했다.


'델포이,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사과하지 말아요. 당신은 신의 뜻을 행했을 뿐이니까요.'


그 말을 시작으로 델포이는 결심했다. 그녀를 위해.


"저는 여전히 제 신을 사랑하고, 제 신을 존경해요."

"…"

"하지만 제 신이 한 그 신탁이 옳지 않다는 것 또한 인정하죠."


순응과 믿음이라는 동그라미 안에서 바라보았던 세상은 선을 넘어서 바라보니 동그라미가 아니라 타원이었다. 순간 여주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모든 것이 선(善)이었고 정의라고 생각했던 하얀 옷이.


"그러면 당신이 우리에게 말해준, 당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던 그 신탁은? 그 신탁은 분명히 델포이 당신이 받은 신탁의 내용이라고 했잖아요. 신에게서 도망쳤는데, 신의 신탁이 옳지 않다고 했는데 또 그 신탁으로 모든 것을 다잡겠다고요?"


신탁이 옳지 않아 도망쳐놓고 또 신탁을 입에 올리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여주의 표정에도 델포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말했듯이 신은 인간을 제 자식처럼 생각하고, 인간은 신을 부모로 생각해요. 포세이돈님이 저희를 버리지 못한 것처럼 저도 제 신에게서 도망을 쳤을 뿐, 제 신에게서 완전한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인형 같은 신탁자가 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신의 말을 듣는 일방적인 신탁자가 아니라 신의 말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지 않을 겁니다."

"…"

"신에게서 저는 불경하고 유례없는 이상한 신탁자가 될지 몰라도, 제가 천벌을 받게 되어도 저는 신이 내리는 모든 신탁을 행할 마음이 없어요."

"…"

"저는 옳지 못한 신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건 옳은 것뿐이니까요."


절망을 심어주는 옳지 못한 신탁. 희망을 심어주는 옳은 신탁. 순응의 신탁자가 아니라 목소리를 내는 신탁자가 되고 싶었다.


"너무 장황하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었던 말씀은 제게 미안하다고 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신탁자인 저 또한 제 신에게서 도망을 쳤었고 제 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데 신탁자도 아닌 당신에게까지 저의 신탁을 따라달라고 강요를 할 순 없어요. 오히려 신탁자라는 이름으로 당신에게 혼란을 드리고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부담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

"바깥세상에서 돈이 된다는 그것은 정글에 많이 있어요. 필요하신 것 같은데 안내해 드릴게요."


부는 바람에 의해 델포이의 기다란 옷이 어지럽게 휘날린다. 악의라고는 전혀 품어보지 않았을 순수하고도 맑은 미소가 여주의 한숨을 깊게 만들었다.







DREAM IN THE SEA
EP.5 전설의 도시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알면 우리가 이러고 있을까 싶네."


   얼굴에 귀찮음이 가득한 재민은 팔짱을 낀 채로 신발을 꺾어 신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갑옷을 입은 사람들의 뒤를 따라 걸으면 주변에서는 아틀란티스의 주민들이 그들을 향해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영문도 모른 채로 걷던 이들의 눈앞에 웅장함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무방비할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대리석의 궁전이 보였다. 책에서 삽화로만 존재했던 신들의 신전과도 같았다. 다이아몬드 하늘을 뚫을 기세인 높은 기둥이 반짝이다 못해 눈이 부셨다.

안내를 받아 궁전 안에 발을 들였다. 자신들보다 키가 큰 조각상들이 웅장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대의 웅장한 분위기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낀 그들은 아주 기다란 복도를 걸으며 높은 천장을 구경하고 있는데 성급한 발소리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 맞닿아 울렸다.


"여행자들이여!"


그들을 향해 달려온 중년의 남성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이름이 '소탄'이고 지금의 왕이라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는 명확한 진실이었다. 곱슬한 머리와 턱 밑에 자리 잡은 희끗희끗한 수염, 부드럽고 새하얀 옷 위로는 금으로 장식된 허리띠와 팔찌, 반지가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델포이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그런가 소탄의 이미지가 그들에게는 결코 좋지 못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푸근하고 좋은 인상이라 델포이의 말이 거짓말 같기도 했다. 맨 앞에 있다가 졸지에 소탄에게 손이 붙잡힌 천러와 지성이 당황스러운 듯 형들을 바라봤다.


"이게 얼마만의 여행자들인가! 어서, 어서 안으로 들게!"


소탄이 천러와 지성을 붙들고 다시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고 다른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소탄을 따랐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성인 남성 3명이 거뜬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기다란 식탁과 온갖 음식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저절로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녁을 사러 나갔지만 갑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붙잡히다시피 끌려왔기에 아직 공복인 그들은 남몰래 침을 삼키기도 했다.

한 명씩 어깨를 손수 눌러 억지로 자리에 앉힌 소탄이 앞에 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길 권유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그 누구도 섣불리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런데 여행객들은 총 9명이라고 들었는데 한 명은 어디 있지?"

"그런 걸 묻기 전에 왜 우리가 이곳에 있는지 먼저 설명해 주는 게 순서 아닌가."


혼잣말치고는 큰 재민의 목소리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제노가 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소 건방지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소탄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아아, 미안하네."

"…"

"이 아틀란티스에 거의 8년 만에 여행객들이 찾아온 것이 너무 기쁜 경사라."


소탄은 기쁨을 넘어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경사'를 만들어 줄 여행객인가 보네요."

"…"

"진짜 목적을 말씀해 주시죠."


줄곧 아무런 말이 없던 도영이 입을 열자 소탄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두 손을 꽉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은 희열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닮았다, 닮았어.


"혹 동의를 구하지 않고 초대를 한 것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네."

"…"

"내가 그대들을 이곳에 초대한 이유는 다름 아닌 '신탁' 때문인데."

"데자뷰 같지 않아요?"


지성이 인준에게 속닥였다. 소탄은 잠시 둘에게 눈길을 준 후에 자신의 뒤에 한 발자국 떨어져 미동도 없이 서 있던 하인에게 무어라 말을 하자 그가 잠시 이 공간을 벗어났고 곧이어 한 명의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이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가득 찬다.


"…뭐, 뭐야?"


마크가 당황한 얼굴로 도영을 바라본다. 도영 또한 순간적으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내 다시 원래의 표정을 되찾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여인을 빠르게 스캔해낸다. 분명히 얼굴은 똑같지만, 걸음걸이에서 미세한 차이가 났다. 쌍둥이인가?


"우리 아틀란티스의 자랑스러운 신탁자, 오라클이네."

"오라클?"

"이 오라클은 내가 아틀란티스를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 아주 훌륭한 신탁자이지."

"도대체 결론이 뭔데요?"


앞에 있던 포크를 만지작거리던 재민이 이번에는 혼잣말이 아니라 대놓고 그에게 불쾌함을 쏟아냈다. 잔에 흔들리며 안에 있던 와인이 작게 일렁인다.


"빛의 왕이 탄생한다."

"…"

"오라클이 내게 처음으로 했던 신탁 내용이었다네. 그래서 난 실제로 빛의 왕이 되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의기양양한 소탄의 태도는 자칫 당당하고 멋있는 군주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자네들이 오기 한 달 전, 오라클이 내게 그러더군."

"…"


눈부신 왕관을 쓴 자는, 멀리서 온 손님에 의해 더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두 명의 신탁자. 두 개의 신탁. 그리고 그 신탁들이 가리키는 하나. 도영은 순간 소탄의 웃음에 온몸이 소름 돋았다. 특별한 거 없는 평범한 웃음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아까 물어봤었죠. 9명인데 다른 한 명은 어디있냐고."


닮았어. 너무 닮았어.


"걔가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무슨 말을?"


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대리석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넓은 이곳에 메아리처럼 울렸고 다른 이들은 도영의 행동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를 따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영은 자신의 앞에 있던 와인 잔을 손가락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와인 잔이 파열음을 내며 연약하게 깨져버렸다. 붉은 와인이 식탁과 바닥을 적셨다.


"좆까."

"…"

"라고요."




DREAM IN THE SEA
EP.5 전설의 도시
부제 : 왕좌의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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