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독자 생일 기념 연성입니다.
*원작 서술 및 대사의 인용이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남는 것은 말들뿐이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것이 이야기이듯, 유중혁은 이제 김독자의 말들이 확실하게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중혁이 ‘그것’을 보기 시작한 것은 수르야와 싸운 후 자신이 기사회생을 발동하여 의식이 없는 사이 김독자가 이계의 언약을 맺어 사라지고 난 후 어느 날이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라진 별자리와 응답 없는 ‘한낮의 밀회’. 김독자가 사라진 내막을 들으며 유중혁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김독자를 또 한 번 눈앞에서 잃은 일행들은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한 사람을 잃었다고 해서 멸망한 세계의 시나리오마저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유중혁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기계적으로 시나리오를 돌파하고, 무모하게 목숨을 내던지는 김독자의 일행들을 지켜보고, 그것을 다시 ‘한낮의 밀회’에 써내려가다 그마저 할 수 없게 되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는 나날 중 하루.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다듬는 사내의 등 뒤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만나자, 유중혁.


너무나 또렷하고 생생한 목소리에 유중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믿기지 않게도, 반투명한 김독자의 모습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이마에 돋은 뿔, 새카만 날개에 가슴을 꿰뚫려 피투성이가 된 채 웃고 있는 모습은 ‘암흑성’ 시나리오의 마지막이자, 유중혁이 처음으로 김독자를 잃었던 순간이었다. 다른 이의 환영이라면 경계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파악할 새도 없이 유중혁은 그를 붙잡기 위해 무심코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그 잔상은 흩어지더니, 낱개의 자모음으로 산개했다.

…ㅅㅣㅁㅏㄴ…ㅇㅠ…

설화 파편보다 더욱 잘은 말은 분해되어 이내 날리듯 허공으로 사라졌다. 유중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조금 전까지 몇 개의 문자가 붙들려 있던 제 손을 들여다보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김독자의 말 조각’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다시 그 목소리가 들릴까 싶어 몇 번이고 칼을 휘둘렀지만 그날 밤 다시 김독자의 잔상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유중혁의 귓가에는 아직도 그 소리가 생생했음에도.

열기가 끼쳐오는 몸에 찬물을 끼얹으며 유중혁은 밤사이 자신이 목도한 것에 대해 곱씹었다. 환청과 환각인가. 그렇다 해도 놀랍지는 않았다. 유중혁은 자신이 어딘가 망가지고, 또 미쳐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굳이 동료들의 조심스러운 시선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알기도 전부터 자신은 이미 이 빌어먹을 회귀를 시작한 순간부터 망가져가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멈추어 세운 이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 해도 유중혁은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았다. 다른 일행들과 달리 비어있는 별자리를 가늠하며, 그는 언젠가 김독자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주 이따금은, 어제처럼 그 믿음마저 흔들려 견딜 수 없는 날이 있었다. 오늘이 그랬기에, 그런 날이기에 마주한 것이리라. 그리 생각한 그가 그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당신들의 설화를 계승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유중혁이 그것을 김독자의 말조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두 번째로 그것을 목도했던, 21번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괴수종을 상대했을 때였다. 흑천마도를 뽑아들기 위에 칼자루에 가져간 손을 겹치어 쥐는 희고 보드라운 손의 감촉, 나긋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는 유중혁을 속수무책으로 그 자리에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때문에 눈앞에 괴수종이 덤벼들고 있음에도 유중혁은 옆을 돌아보고 말았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저를 향해 씩 웃는 김독자의 새하얀 낯이 그때처럼 금세 이지러지고 또 흩어졌다. 그것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유중혁은 무심코 검을 뽑아야 할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ㅇㅜㄹㅣ…ㅅㅓㄹㅎㅗㅏ…ㅎㅐㅆ…

사부! 이지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에도 유중혁은 이내 흩어지기 시작한 글자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괴수종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몸으로 쇄도하기 직전, 괴수종의 정수리에 칼이 꽂히며 괴수종이 쓰러졌다. 유중혁은 그제야 자신이 괴수종을 베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중혁씨,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정희원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김독자가 사라진 뒤 더욱 무모하게 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이들에게 화를 내는 이였다. 유중혁은 대답 않고 제 손아귀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유중혁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환상이기 때문일까. 정희원도 뒤늦게 달려온 이지혜도 김독자의 환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유중혁은 달려드는 또 다른 괴수종을 향해 흑천마도를 겨누며 정희원을 곁눈질했다.


“…매번 무모하게 몸을 던지는 사람에게 듣고 싶진 않군.”


아직도 제 손에는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실상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니 온기가 있는 것이 아닐 텐데도. 김독자의 목소리는, 말은 너무나 생생해서 그것이 꼭 진짜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하늘을 보면 있어야할 것이 비어있는 허공을 마주할 뿐이었다. 유중혁이 칼을 휘두르자 단칼에 괴수종 한 마리가 쓰러지고, 그는 연이어 그 뒤에 달려드는 괴수종의 눈에 칼을 꽂아넣었다. ‘우리’라고. 정말로 너와 내가 ‘우리’였다면,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가장 마지막까지 제 손 안에 남아있던 조각을 되새기면서. 설화 파편보다도 작디작은 그것, 김독자가 허공에 흘렸던 말의 부분. 유중혁은 그것을 말조각이라 부르기로 했다.

 


 

“요즘 사부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저씨…가 없어지고 나서는 계속 이상하긴 했는데 요즘 따라 뭔가 더….”

“오늘만 해도 다쳐서 공단으로 돌아오기도 했고요. 그렇게 어려운 시나리오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 자식 미친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이지혜와 유상아의 말에 한수영이 쏘아붙였다. 김독자가 ‘이계의 언약’을 맺고 사라진 후 일행들은 저마다 어디 하나씩 나사가 빠지거나 반대로 이상한 곳에 나사가 박힌 것 같이 굴기는 했다. 유중혁은 그 와중에도 시나리오를 수행할 때마다 일행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 같았지만 사실 가장 속이 곪아있는 것은 그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수련을 명목으로 밤새워 칼을 휘두르고, 허공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김독자가 남기고 갔다는 회중시계를 하염없이 들여다볼 때도 있었다. 그런 행동들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유중혁이 어딘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말로 확실히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 시계가 당신 것이었군요. 김독자의 부탁에 회중시계를 만들었다는 아일렌이 그런 말을 했을 때 유중혁의 표정이 어떠했던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긴 한데, 확실히 뭔가 다른 느낌이긴 해요.”

“저도 느꼈습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정희원이랑 이현성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한수영이 신경질적으로 자기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확실히, ‘멸살법’의 유중혁도 냉혹하고 무자비하기는 했지만 지금의 유중혁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미쳐있었지만 더욱 냉막한 느낌이 감돌았다. 물론 여전히 사내는 무뚝뚝하고 차가웠으나 그가 보이는 반응은 ‘멸살법’에서 동료를 잃었을 때와는 달랐다. 아직 닳아 사라지지 않은 인간성 때문인지, 아니면 ‘김독자’를 잃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이번의 변화도 또 그 김독자 때문이겠지. 그리고 그것을 사내는 결코 털어놓지 않을 것이었다. 누구보다 찾아 헤매면서 김독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는 남자니까.


“그래서 뭐 어쩔 건데? 그냥 새로운 병이 도졌나보지. 어차피 닦달한다고 우리한테 털어놓을 놈도 아니잖아.”


한수영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정희원의 매서운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무시했다. 김독자 개자식. 돌아오기만 해 봐. 한수영이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한수영이 자리를 뜨고도 다른 이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지만 더 이상 그 화제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유중혁의 변화는 눈에 띄거나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다들 위화감을 느끼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다들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침잠해가는 사내가 또 다시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알지 못할 뿐이었다.

 


“처치는 다 끝났어요.”

“…….”

“이번 히든시나리오는 어렵지 않다고 들었는데, 많이 다치셨네요.”

“가겠다.”


붕대가 단단히 매인 것을 확인한 유중혁이 벌떡 일어나서는 성큼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로 이설화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잠시 닿았다 사라졌다. 일행 중 가장 김독자의 상실을 크게 느끼는 것 같으면서도 의연하게 굴던 사내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는 시선에는 제각기 걱정이 담겨 있었으나 사내는 그에 아랑곳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본인이 일행에게 아주 무관심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면서. 그것은 분명,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남자의 영향이리라.


―생각하지 마. 빌어먹을! 생각하지 말라고!


복도를 걸으며 유중혁은 시나리오 도중 들려왔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평소의 나긋나긋하거나 유들거리는 말씨와 달리 필사적인 목소리였다. 스스로가 죽음에 이르러야할 때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누군가의 삶을 끌어올리는 목소리. 유중혁의 눈앞에서, 누군가의 상체를 끌어안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 김독자가 제가 안고 있는 상대에게 외치고 있었다. 김독자, 나는 회귀를 거부했다. 이 세계에 남기로 결정하고, 남아있다. 그런데 왜 네놈은 사라져 버린 거지? 왜 그런 선택을 했나. 내게 시계를 주며 무슨 생각을 했지?

캬아악!

괴수종의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몸을 잡아 뜯기 위해 날아들었다. 유중혁은 그것을 팔로 막아내었다. 팔이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는 또다시 말조각들이 흩어져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보고 있었다. 생각하지 말라고? 다른 문맥에서 쓰였던 말에 유중혁이 홀로 대답했다. 결코 그러할 수 없었다. 눈을 뜨던 순간의 고양감과, 그것이 단숨에 바닥으로 추락하는 감각. 무수한 별들을 더듬던 눈과, 김독자가 이 세계선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뀌지 않는 알림까지. 유중혁은 그것을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곱씹었다. 돌아올 것이리라 믿다가도 그 믿음이 배신당할까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 그 밤들에.


―유중혁.


또다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유중혁은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말의 조각이 분해되어 흩날리는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말조각 중 가장 많은 단어였다.

 

 


유중혁은 잠이 든 김독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내려앉은 얼굴은 여느 때보다 더욱 창백했고, 물기가 남은 속눈썹이 반짝였다.


‘네가 먼저 내 멱살 잡고 다리 아래로 던졌잖아.’

‘솔직히 넌 나보고 뭐라고 말할 처진 아니잖아. 너도 회귀자면서······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이 죽을 뻔 했는지 아냐?’

‘누구보다 널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 ’범람의 재앙‘ 때는 왜 그런 거냐?’

‘너 왜 나보고 ’동료‘라고 했던 거냐? 평소엔 절대 그런 말 안 하는 놈이·····. 그래놓고 암흑성에선 나 찔러 죽이고. ·····그땐 내가 죽이라고 하긴 했지만.’


무구한 얼굴 위로 남자가 넋두리처럼 쏟아냈던 말들이 흘러가는 듯했다. 투정을 부리는 것도 같은 어조에 반해 담긴 내용은 결코 유중혁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만 지켜보며 유희거리로 삼은 이로는 여겨지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유중혁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했다. 이대로 김독자가 다시 깨어나고 별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면 그가 누구인지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까닭이었다. 깨어있는 김독자를 마주하면 그런 것들이 조금도 상관없어질 것 같았다. 유중혁이 기척을 죽여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드러난 김독자의 새하얀 목덜미에 커다란 손 그림자가 잠시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그것은 그저 지나가는 감정일 뿐이다.

그는 김독자가 제 곁에서 늘어놓은 말들을 가만가만 되새겼다. 그것들도 언젠가, 만약 그가 또 김독자를 잃는 일이 일어난다면 말조각이 되어 나타날까. 그것이 말조각이 된다면 그때야 비로소 김독자가 무슨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알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금의 자신은 아니리라. 유중혁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그것을 내려놓았다.


“김독자.”


잠든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린 유중혁은 그의 얼굴을 오래오래 내려다 보다, 날이 새기 전 공단을 벗어났다. 무수한 별들이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선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에게 ‘멸살법’에 대한 정보를 준 성좌, 메타트론의 속셈 또한 밝혀내야 했고 아직 자신이 모르고 있는 정보가 더 필요했다. 김독자가 누구인지 자신은 그 답을 알아야 했으니 김독자가 그러했듯 기약 없는 사라짐 또한 아닐 것이다.


―그만 이 손 놓고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걸음을 옮기는 유중혁의 등 뒤로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아주 오랜만에 나타난 말조각이 거기에 있었다. 김독자가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그가 김독자의 곁을 떠나기 때문인 것일까. 당당하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테니 동료로 삼으라던 정장차림의 남자는 그때도 여전히 창백하리만치 희었다. 그 말을 끝맺어갈수록 김독자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을 줄 알았던 이의 눈이 빛나던 순간.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중혁이 그를 다리 아래로 집어던졌을 때였다.

유중혁이 또다시 무심코 그 말조각을 잡아채었다. …ㅇㅣㅅㅗㄴ…ㄱㅗㄲㅓㅈㅕ… 그것이 꼭 지금의 상황에 대고 하는 말 같아서 이런 상황에서도 실소가 흘렀다. 사내는 다시 얼굴을 굳히고 이내 가루가 되어 날리는 글자들을 뒤에 내버려둔 채 공단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성마대전이 시작되기 26일 전의 일이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이번 회차보다 더 나아질 거란 생각은 하지 마라.”


사내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계획은 완벽했고, 실제로 그들은 온전한 김독자를 되찾을 기회를 얻었다. 다시는 회귀자로 살지 않겠다 결심했던 유중혁이었으나 그 말을 번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나리오가 끝난 제게 답을 주어야 할 이가, 제 일부만을 남겨놓고 벽 너머에 남아버린 탓이었다. 김독자가 제 곁에 남겨둔 절반의 김독자 역시도 김독자임을 알았다. 설령 남겨둔 것이 일할이든, 구할이든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벽 너머에 남은 이가 얼마만큼의 김독자인지도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 것이다. 유중혁이 원하는 것은 그저 김독자가 온전히 제 곁에 있는 것이었고, 그가 자신이 시나리오가 끝난 후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정말 과욕이었나? 정말로 결말을 망쳐버린 것이었던가. 무수한 세계선으로 흩어지고 간신히 숨만 붙은 작고 어린 몸을 내려다보며 유중혁은 그 생각을 무수히 곱씹다 ‘회귀’ 성흔이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다. 미쳐버린 것은 유중혁만이 아니었다. ‘다시’ 김독자를 구해낼 방법을 말하는 일행들은 다들 어딘가 고장난 것 같았다. 마치 과거 ‘회귀자’였던 자신과 같았다. 하지만 회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유중혁만큼 잘 아는 이는 없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깊은 통찰에서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그저 무심결에 내뱉어버리고 만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으니 그의 일부, 그의 생각이나 다름없는 말이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 말은 본디 자신의 것이 아니지 않았던가.


―유중혁, 정신 차려라. 몇 번을 반복하면 나아질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 생각에 답을 주듯, 김독자가 빙긋 웃으며 유중혁의 코앞에 다가와 속삭였다. 그 당시의 김독자는 이런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김독자의 말조각이 맞나? 아니면, 이미 유중혁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자신의 말조각인가. 확실한 것은, 오늘 제 앞에 나타난 이것만은 실패를 자책하는 스스로가 그려낸 김독자였다. 유중혁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이런 식으로, 또 한 번 김독자의 말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통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나는 회귀자가 아니다.”


그 말을 내뱉고도, 유중혁은 또 한 번 숨을 멈추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말조각은 사라지고 없었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김독자의 병실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잦게 여러 차례 떠올랐다. 병실에 도달한 사내는 붙박인 듯 서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마른 듯했고, 앞머리가 길어 눈을 살짝 가렸지만 여전히 그 사이로 보이는 눈은 별과 같았으며 뺨이 하얗게 빛나는 양은 낯익은 얼굴 그대로였다. 김독자가 살며시 눈을 접자 속눈썹이 나부끼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안녕, 유중혁.”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은 김독자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품안에서 선명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번에 들은 말은 조각이 되어 흩어지지 않고 그의 품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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