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남에게 보일 일이 전혀 없는 노트에 나는 한 줄을 적어본다. 기울어진 볼펜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상처처럼 문장이 새겨진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묶어 고작 하찮은 선 몇 줄로 뭉뚱그리노라면, 혹여 너를 그리는 내 마음마저 하찮아질까 두려워진다. 흐릿한 미소, 꽃잎처럼 흩어지는 웃음소리, 곱게 접히는 눈매… 그 모든 게 황홀한 나의 그대. 네게로 향하는 모든 것들이 감히 하찮을 수 없어. 넌 내 완벽한 사랑이다. 나는 눈을 감고 우리의 추억을 더듬는다. 네가 내게 목줄을 채우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다지 노력할 필요도 없었음을.

 

단지 그대가 나의 앞에서 웃음을 지었고, 나는 그대의 웃음에서 환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치 수채화처럼. 그래, 수채화처럼 다가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흐릿하고 음울하면서도 아름다운 네가 서 있었다. 손짓 한 번이면 흩어질 듯한 몽환적인 그대가 내 세상에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거부할 새도 없이 들어와서 나를 휘어잡았지.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흘러나와서 세상을 잠기게 했다. 네가 숨을 내쉬면, 나는 네 색채 그대로 칠해지고 젖어 들고 어느새 너의 사람이 된다.

 

그대의 눈동자 속에 담긴 나를 볼 때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울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의 그 까마득한 눈동자. 나는 한 줄을 더 적어보면서 중얼거린다. 검고 깊은 눈동자. 깊게 빨아들이는 심연 속에 내가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홀린 듯 바라본 너의 얼굴 속에서 심연이 날 반겼어. 파르르 떨리는 눈을 애써 뜨고 투신할 듯 매달렸다. 내가 모르는 네 삶의 흔적이 나를 묶고 있었다. 어둠 안에 나는 흐리멍덩한 낯으로 갇혀있다. 다시 다음 줄을 적는다. 언제고 갇혀있고 싶게 만드는 너의 눈… 종이가 팔랑이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나는 더듬는다. 좁혀진 거리에 사랑이 피어났을까. 어쩌면 우리 사이에 피어났을 가련한 사랑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우리의 거리가 가장 좁혀졌을 때, 숨결이 섞일 때, 난 그대로 네게 투신하고 싶었어. 언제나 애매한 네가 두려워, 사랑해. 아니야, 널 경외해.

 

그리하여 내가 멀어지려 아무리 애써보아도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흐릿한 그대의 뒷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걸음을 한걸음 내디디면 너는 그대로 있었다. 너는 언제나 풍경처럼 서 있고, 나는 너를 향해 발을 내디딘다. 좁히고 좁혀도 멀어지는 무한의 길을 걸어 네게로 향하는 나날들. 그대의 웃는 모습이 내겐 제일 멀고도 두려운 일이다. 우리를 사이에 두고 끝도 볼 수 없게 펼쳐지는 길, 지친 나는 볼품없는 모양새로 도피를 선택했다. 수 없는 내리막을 달려 멀어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라치면 그대가 보인다. 난 다시 도망치고, 눈을 뜨면 너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멀어지고 도망치고 헐떡이며 도피의 길을 택하고야 마는데, 지구의 중심을 향해 낙하하는 사과처럼 눈을 뜨면 그대의 곁에 와있고야 마는겁니다. 

 

 나의 도피는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헤쳐나간 수많은 길을 돌고 돌아서 결국 당신의 곁으로 돌아왔다. 세상의 중심으로 향하는 일에 예외가 있을 리 없어. 나는 너의 심연에 갇혀서 이미 너의 법칙에 따르는 부산물이 되어버렸다. 나를 묶은 감정들이 목을 졸랐다. 부정할 수도 없는 진실을 토해내라고 윽박지른다. 공포에 질려서 두서없이 내뱉는 말에는 주어가 없다. 없어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주어들. 끓는 목소리로 외친다. 사랑해. 널. 사랑하고야 말았어.

 

그대, 당신이 그저 웃기만 하면 나는 바보처럼 넋을 잃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빛을 향해 다가가고야 맙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볼펜이 지나가는 길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검정 잉크가 번져가면서 네 이름 석 자를 지운다. 흐릿하게 번져버린 너의 이름 석 자가 안타까워 가슴이 뭉근하게 아파온다. 얼굴을 감싸고 내쉬는 한숨은 덧없다. 바보같이…. 잉크가 마르지 않는 비루한 손에서 나오는 이 문장이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되새겨도 되새겨도 결국은 그뿐이야. 미숙한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주제넘은 짓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런데도 네가 웃는 모습에 홀려 나는 다가간다. 비웃어도 상관이 없는 일이다. 감정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저 너머로……. 이건 필연일까?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와 함께 옅은 웃음을 흘리는 당신, 

 

 네 슬픈 미소를 사랑해. 떨리는 눈동자가 슬픔을 머금고 빛나는 모습을 가여워했다. 너는 내 품안에서도 미동도 없고, 내 애원에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럼에도,

 

뺨을 쓸어주는 보드라운 손의 열기, 

 

 그대가 내 뺨을 쓸어주면, 기적처럼 난 환희에 차고야 마는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온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심장이 뛰고야 마는 것이었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는 너를 두고서 홀로 사랑을 하는 나.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이유는,

 

깊은 눈에 담긴 미약한 애정…. 

 

 그대가 가끔 내비치는 애정이 숨 막히게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달큰한 향기에 홀려 나를 제물로 바친다. 전혀 아깝지 않아. 흐릿한 인상에, 아무리 가까워져도 멀어지는 그대여도 전혀 아깝지 않다. 이미 너의 심연에 가둬져 버려서 내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 한 방울의 애정이 내 전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요. 내 생애를 불살라서 그대를 사랑하고야 마는 까닭은 

 

찰나의 인연인 네게 보답받지 못할 사랑을 쏟는 이유는.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더 이상 날 보지 않는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의 눈동자가 나를 담아버렸기 때문에. 

내가 그대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대의 여린 등을 쓸어주고 싶은 마음이 나를 지배해서, 음울한 너의 삶을 위해 내 전부를 바치고 싶어서, 그리하여 설사 그대가 나를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가 이미 그대를 너무 사랑해버려서.

 

오직 그 뿐입니다.

 

 

눈물을 흘려야 한다면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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