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고3이 된 민윤지는 요즘 너무 힘들다. 입시의 압박때문에? 진로고민 때문에? 모두 아니다. 차라리 그런것들 때문에 힘든거였으면... 올해는 매일매일 써야지 다짐하면서 사놓고 몇 장밖에 사용하지 않은 다이어리를 넘기며 색색의 펜으로 끄적거리던 윤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지는 사랑이 너무 힘들다.







윤지가 자기의 왕자님(..)을 처음 만난건 작년가을. 낮에는 약간의 더위가 남아있고 밤에는 쌀쌀함이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5시에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도착해 후다닥 씻어버리고 자기방 침대에 누워 카톡으로 반친구와 요즘 즐겨보고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모참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는데 저녁먹으러 나오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탁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윤지와 5살 차이나는 윤지의 오빠 민윤기였다. 민윤기인것을 확인한 윤지는 힐끗 눈짓만하고 다시 시선을 식탁으로 옮기려는데 그 뒤에 뿅하고 나타난 밝은 탈색머리의 남자가 눈에 보였다. 머리가 노래서 그런지, 귀여운 얼굴때문인지, 뾰족 튀어나온 입술때문인지 초등학생때 문방구 앞에서 한참을 구경하던 병아리가 생각났다. 윤지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믿어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어요? 민윤지는 오늘부터 믿기로했다. 그동안 스쳐지나간 윤지의 최애들은 다 그룹내에서 귀염상을 담당하던 멤버들이었는데, 취향이라는거 역시 잘 변하지 않더라.


그 와중에 이제서야 민윤기와 엄마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오늘도 늦는다더니? 온김에 같이 온 친구랑 저녁먹고가."


"응. 뭐 가져갈게 있어서 잠깐 들렸어. 다시 나갈거야. 아, 이쪽은 내.... 후배."


"안녕하세요. 박지민입니다. 윤기형이랑은 같은 동아리 하고있어요."


"어머 그래. 저녁먹으려고 하는데 둘다 밥먹고가."


"지민아 배고프다며. 안불편하면 밥 먹고갈래? 시간이 애매해서 나가면 아예 늦게 먹게될거 같은데. 너 좋아하는 계란찜도 있다."





그렇게 오고가는 대화들을 듣기만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민윤지의 앞에 지민오빠가 앉아있었다. 민윤지는 급하게 숟가락에 얼굴을 비추어보며 대충 자기상태를 확인했다. 입술색이 좀 없지만 아직 앞머리도 안깠고, 마침 잠옷도 최근에 귀엽다고 산옷이었고, 세수해서 맨얼굴 이었지만 피부는 타고나서 깨끗! 전체적으로 양호하다고 짧은 시간내에 평을 마친 윤지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윤지는 한껏 수줍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진짜로 부끄러운건 맞았으니까. 지민오빠 옆에 앉아있는 민윤기는 그런 윤지의 모습이 초면이라는 듯 잔뜩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민윤지 뭐 잘못 먹었나봐? 뭐 잘못 먹었네?"


"귀여운 동생 무안하게 왜 그래요 형."




방긋 웃으면서 민윤기의 팔을 살짝 안아플 정도로 밀고는 나를 바라보면 지민오빠의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표정까지... 펄펙트. 완벽 그 자체였다. 티비에 나오는 사람들빼고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사람을 윤지는 거의 처음봤다. 현실남자는 다들 친오빠새끼(aka.민윤기) 같은줄 알았는데 오해였나보다. 근데 왜 지민오빠는 민윤기랑 친하게 지낼까? 궁금했지만 민윤지가 아직 지민오빠와 안친하기 때문에 물어볼수가 없었다. 그렇게 (윤지만) 어색한 저녁시간이 지나가고 민윤기와 지민오빠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윤지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엄마한테 뛰어가며 외쳤다.



"엄마!!!!!!!!!! 나 지민오빠 꼬셔서 결혼할래!!!!!!!!!!!!!!!!"






포부는 컸지만 민윤지가 박지민을 보기는 쉽지않았다. 생활패턴이 완전 달라서 한집에 같이 살고있는 민윤기도 보기 힘든데 어찌보면 당연한거였다. 첫눈에 반한이후로 윤지는 한번도 지민을 볼수 없었다. 하지만 지민과 결혼까지 생각한 민윤지는 큰맘을 먹고 민윤기의 페이스북 차단을 풀었다. 기본프사에 학교행사 단체사진에 태그된거 빼고는 게시물이 거의 없는 재미없는 계정이었다. 뭐, 친오빠가 페북관종인거 보다는 훨씬 바람직하지만 지민오빠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을까봐 살짝 불안해질때쯤 찾았다. 민윤기와 박지민이 함께 태그되어 있는 사진을. 윤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박지민'이라고 태그되어 있는것을 터치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띄엄띄엄 올라와있는 사진들은 하나같이 윤지의 심장을 두드렸다. 하나하나 클릭해가며 감상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윤지는 살짝 불쾌해졌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민윤기의 얼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처음보는 민윤기의 표정이 윤지의 기분을 더 이상하게 만드는데 한몫했다. 둘이 정말 친한가보다. 윤지는 사진을 확대해 지민의 얼굴을 크게 보는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뒤로 두번정도 지민오빠의 실물을 볼 기회가 있었다. 거실쇼파에 앉아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민윤기와 지민오빠가 들어왔다. 핸드폰 액정으로 비춰본 얼굴상태가 좋지 못해서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당연히 지민오빠에게 인사를 날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렇게 소중한 한번의 기회가 날아가버려서 속상한 윤지는 민윤기와 지민오빠가 나간후 윤기방으로 들어가서 화풀이를 했다. 괜히 얌전히 놓여져있는 베개에 주먹을 날리고 발로차고 난리를 치다가 진정하고는 민윤기 옷장에서 회색후드티 하나를 가져왔다. 내일 학교갈때 입고가야징.









그렇게 지금이 되었다. 다이어리에 윤지가 세워둔 지민오빠와의 결혼계획을 적었지만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윤기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민윤기에게 말해서 도움을 받는건 죽어도 싫었다. 아니, 이미 죽어있는 상태여도 싫었다. 분명 그 얄미운 표정과 목소리로 놀리면서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을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는 뜻밖에 찾아오는 것이다.


고3이 된 윤지는 앞으로는 정말 공부 열심히 할테니까 그전에 한번 시원하게 놀아줘야 한다는 이유로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 몇명과 주말에 강촌에가서 1박2일로 놀기로했다. 원래 친구들과 다같이 서울에서 출발하기로 했지만 중간에 계획이 살짝 꼬여서 윤지 혼자 가게 생겼는데,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이 사실을 알게된 민윤기가 차를 태워준다고 그랬다.(민윤기는 가끔씩 아빠차를 끌고다닌다.) 그것도 지민오빠와 함께! 둘은 무슨일로 강촌에 가냐고 민윤기에게 물었는데 동아리엠티를 간다고 그랬던가, 사실 지민오빠와 함께 간다는 사실에 민윤기의 대답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당일날. 4월초였기 때문에 날이 덜풀려서 아직 추운날씨에 따뜻하게 입을지, 그냥 예쁘게 입을지 잠바와 코트중에서 고민하다가 머리속에 스쳐지나가는 지민오빠의 웃는 얼굴에 코트를 선택하고 밖에 나가자 이미 지민오빠가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뒷문을 열고 차에 올라타니 지민오빠가 웃으면서 말을 건냈다.




"윤지야 오랜만이다. 친구들이랑 놀러가는거야?"


"ㄴ네... 오빠는 민윤기, 아니 윤기오빠랑 왜 둘이서만 같이 가는거에요?"


"아.. 그게...."


"야 민윤지. 운전하는 사람은 난데 나는 안보이냐?"


"보이겠냐?"


"윤지 너무 멋있다. 윤기형 동아리에서는 나름 무서운 선밴데."


"으.. 혹시 꼰대짓하는거 아니에요? 민윤기가 지민오빠 괴롭히면 저한테 말하세요."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출발하면서 지민오빠가 건내준 음료수를 다 마셔버렸더니 민윤지는 화장실이 가고싶어졌다.




"오빠.. 나 화장실 가고싶은데. 휴게소 나오면 들렸다가자."


"니 그거 다 마실때부터 알아봤다."




그렇게 휴게소에 들려서 한층 가벼운몸, 상쾌해진 기분으로 화장실에서 나온 윤지가 주차해둔 차쪽으로 가까워지는 발걸음을 멈췄다. 까맣게 썬팅이 되어있는 차 창문을 통해 보이는 둘의 모습 때문이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둘은 마주보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다가 지민오빠가 민윤기의 허여멀건 볼을 쓰다듬더니, 민윤기가 자기 볼을 쓰다듬는 지민오빠의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둘이 마주보고 웃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민윤지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시작도 못해본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울컥이는 감정을 참으며 윤지는 일부러 기척을 크게 내며 차에 가까이갔다. 차에 올라타니 얇게 입어서 춥겠다며 걱정해주는 지민오빠의 목소리가 눈물나게 다정했다. 민윤지는 강촌에 가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기위해 미리 잠을 자두겠다는 핑계로 눈을감았다.





장소까지 데려다준 민윤기와 지민오빠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멀어지는 차의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친구들과 합류한 민윤지는 평소보다 훨씬 하이텐션으로 미친듯이 놀았다. 밤에는 다른 친구가 어떻게 구해온 술도 마셨다. 처음 마셔보는 술이었다. 주량도 모른채로 술을 마구 마셔대다가 한명이 잠들어 버리는 것으로 한참하던 술게임이 끝이났다.


한명은 화장실에 갔고, 다른 한명은 바람좀 쐐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다른 한명은 따라 나갔다. 민윤지까지 다섯명이서 놀러온거라 지금 이자리에는 윤지 혼자였다. 떠들썩하던 공간이 조용해지고 멍해지는 기분에 윤지는 어두워진 창밖을 한번 쳐다보고는 쭈그러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눈물이 났다.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조용히 흐르기만 하던 눈물은 점점 거세져 몸의 떨림을 가져왔고 윤지는 엉엉 목놓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화장실을 다녀온 친구가 울고있는 윤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후다닥 다가와서 윤지를 달랬다. 왜 우냐고 묻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몰라, 그냥 눈물이 나. 술버릇인가봐. 대학가서도 술 많이 마시면 안되겠다.







고야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