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삼이론에 중철본 발간 예정입니다.

*늘 그렇듯 캐붕을 기본 옵션으로 끼고 갑니다.

*체력이 부족하여(...) 엔터 가독성 편집은 차차 기력이 닿을 때 수정을 생각중입니다...

*이후 미공개 한 챕터가 더 있습니다. (소장본에만 실릴 예정)





호수 위 백조



“같이 다니지. 오늘.”

뜻밖의 제안은 플란츠에게서 먼저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법 높은 고층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지옥과도 같은 침묵을 각오했던 칼리안으로선 퍽 의외로운 말이었다. 반사적으로 홱 돌아본 옆모습은 동요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평온했다. 저 단정한 옆얼굴만 보면 숫제 방금 순간 정적이 깨어졌던 게 사실은 저의 꿈결이지 않았나 하는 착각까지도 들 정도였다. 그 탓에 칼리안이 선뜻 어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어물거리자 답답했는지 플란츠의 고개가 서서히 이쪽을 향해 움직였다. 실제로도 느릿한 속도이기는 했지만 칼리안은 그 모습이 유독 슬로우모션처럼 머릿속에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시간을 가르고 공간을 거스르며 제게로 오는 그의 시선이 참을 수 없이 만족감을 안겨주는 듯했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독점욕. 소유욕. 그러한 것들이 제 안에 있었다는 걸 그제야 어렴풋하게 느낌이 들었다. 독점이라니. 소유라니. 누구를? 플란츠를? 속에서 반문하는 목소리는 회의에 차 있었다.

“칼리안.”

“네? 아, 네. 무슨 일이세요?”

“…됐어. 싫으면.”

“아니, 아니요! 죄송해요. 잠깐 정신이 없었어요. 좋습니다. 싫을 리가요? 저야 무조건 찬성이죠!”

어차피 저도 플란츠도 비슷한 이유로 가이드도 없이 홀로 훌쩍 자유여행을 온 참이었다. 그러한 일정에 각자 일행이 하나씩 추가된다고 해서 천지가 개벽할 일은 없었다. 외려 하늘도 옳다구나 축하해준다면 모를까. 선남과 선남이 함께 다니니 보기에 심히 좋구나 하면서.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무심코 생각을 이어가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이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플란츠에게 그대로 전달하면 역대 최고로 구겨진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마침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칼리안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면서 다른 쪽 손으로 막 나가려는 플란츠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 신속하게 1층보다 한참은 더 높은 층의 버튼을 눌렀다. 레스토랑이 있는 층이었다. 칼리안은 불만스럽게 의문을 표하는 시선과 똑바로 마주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얇은 손목은 여전히 놓지 않은 채였다.

“왜.”

“생각해보니까 아직 밥을 안 먹었어요.”

“근데.”

“같이 먹어요. 시간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아직 점심이라고는 할 수 있는 때잖아요? 잘 먹어야 오래오래 든든하게 돌아다니죠.”

플란츠는 숫제 노려보듯이 시선을 쏘아 보냈지만 칼리안은 단호했다. 그러는 동안 엘리베이터의 문은 서서히 닫히며 위로 오를 준비를 끝냈고, 플란츠는 문 위쪽의 계기판 숫자가 하나씩 커지는 걸 보고서야 하릴없이 몸에 힘을 풀었다. 하아―…. 채 막지 못한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뺀질거리며 웃기나 하는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주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까. 잠시 고민하다가 플란츠는 그냥 힘을 풀고 벽에 기대어 섰다. 칼리안은 그 모습을 모조리 지켜보며 한참 늦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라도 그의 손이 저희의 방이 있는 층 버튼을 누르려고 하면 언제든 막을 수 있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다가 무기력하게 들려 올라온 눈길과 정통으로 흠칫 마주쳤다.

“뭐.”

“아니, 아닙니다. …그, 죄송해요.”

“…뭐가.”

“억지 부려서.”

그게 억지인 건 아나 보지. 플란츠는 피식 바람 같은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기는 했어도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하염없이 위로, 위로 솟았다.

 

 

 

분명 첫 끼라고 했는데 왜 테이블 위는 저녁 만찬인 것 같지. 플란츠는 벌써 몇 그릇째 잘도 해치우는 칼리안을 살짝 질린 듯이 응시했다. 스테이크는 기본이고 있는 줄도 몰랐던 온갖 고기가 화려하게도 늘어져 있는 꼴은 고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플란츠로서는 신기하기도 하고 이해가 어렵기도 했다. 반면에 플란츠의 앞에는 수프와 아스파라거스를 비롯한 채소 요리 몇 접시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본래 수프만 시키려던 것을 칼리안이 강요인 듯 설득인 듯 모를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더 주문한 것이었다. 플란츠는 막 포크를 입에 가져가려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휘어지는 그 붉은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썩 체구가 그렇게 큰 편도 아닌데. 저렇게 먹고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여기 부서진 왕궁터도 유명하대요.”

시선을 보낸 게 슬슬 일정을 계획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칼리안은 단조로운 미성으로 말을 꺼냈다. 그가 처음으로 화두에 올린 것이 하필이면 이미 지난 밤 갔던 곳이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플란츠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작게 구겼다가 폈다. 다행히 그는 재빠른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헤이시아.”

“아, 맞아요. 헤이시아. 거기는 어때요? 거리도 가깝고 제일 먼저 가기에 적당할 것 같은데.”

“가봤어.”

멈칫. 여상히 떨어진 그 말에 파스타를 크게 말아 입에 넣으려던 칼리안이 움칫 행동을 멈췄다. 그러고는 눈동자만 올려 어제와 비해 확연히 파릇해진 눈앞의 완두콩을 시야에 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홍차가 담긴 와인잔을 기울이는 것이 누가 보면 극히 평범한 말이라도 오간 양 보였다. 칼리안은 반사적으로 세게 힘을 주었던 포크를 다시 평범하게 잡아 쥐고 그 끝에 걸린 파스타를 한입 크게 입에 담았다. 천천히 진득하게 씹어 삼키는 동안에도 눈동자는 여전히 한 곳에만 꽂힌 채였다. 어쩐지 흉흉한 기색이 흘렀다. 칼리안 본인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가봤다고요…? 벌써? 아니 그럼 저는요?”

“그게 뭐.”

“…….”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칼리안은 흉흉했던 기색을 금세 가다듬고 그 대신 입만 삐죽 내밀었다. 혀로 가볍게 핥아 기름기를 없앤 입술이 플란츠는 문득 퍽 붉다고 생각했다.

“아니 뭐, 그렇다고요. 그냥, 같이 가고 싶었는데 이미 가셨다니까 저도 어쩔 수 없이 다음에 저 혼자 가 봐야죠. 그 음산한 곳에서 사색이라도 하면서 완두콩이 완두콩처럼 저 혼자 데굴데굴 굴러 가버렸다고 붙잡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놓쳐버렸네, 아이고 아이고 하면 되죠. 그게 다예요. 끝.”

“짖지.”

이어진 단호한 목소리에 칼리안은 크게 굳으며 눈만 굴려 완두콩을 바라봤다. 아주 평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라 제가 잘못 들었다고 치부하기에는 지금도 귓가에 그 한마디 목소리가 선연했다.

“…설마 그거 저한테 하신 말이세요?”

“그럼 뭐. 또 누구.”

완두콩이 하루 숙성하더니 부쩍 말이 더 짧아진 것 같은데. 칼리안은 짐짓 미간을 구기려다가 어제 검색해보았던 그의 프로필에 표기된 나이가 저보다 연상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적어도 나이 면에서는 말이 짧아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처지이니 하는 수 없이 불퉁하게 입만 내밀었다. 그래도 플란츠의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제가 혹여라도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틈틈이 신경을 기울였다. 예민한 완두콩이 제 실수로 혼자 시들어버리면 곤란했다. 뭐가 곤란하냐면, 음.

저 혼자서 쭉쭉 나아가던 상념은 그 앞에서 덜컥 막혀 멈춰버렸다. 칼리안은 순식간에 떠오른 의문이 세력을 불리는 것을 퍽 한가로운 태도로 관망하였다. 그러게. 뭐가 곤란했을까. 뭐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을까. 겨우 어제 처음으로 만난데다 그저 아주 우연히 예약한 방의 층수가 겹친 게 다인 타인인데. 생겨난 의문을 붙잡고 잠시 고민해보다가 이내 도로 픽 놓아버렸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언젠가는 알아서 해답이 나와주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칼리안은 한입 크게 썬 고기를 야무지게 욱여넣으면서 제법 산뜻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좋은 것들은 적당히 뒤로 미뤄두고 지금은 보기에 좋은 것들만 먼저 보고 싶었다. 그때, 진작에 식사를 끝내고 턱을 괸 채 그러는 모습을 가만히 관망하던 플란츠가 돌연 입을 열었다.

“가자.”

“네?”

“헤이시아. 보고 싶다며.”

아. 멍청한 얼굴. 플란츠는 턱을 괸 손으로 자연스럽게 입가를 가리면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막았다.

“저야 그렇지만, 플란츠 씨는 이미 가보셨잖아요. 저는 다음에 혼자 가도 괜찮,”

“괜찮으니까. 가자고.”

칼리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숫제 후련한 양 보이기까지 하는 플란츠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렇게 매정하게 가봤다고 할 때는 언제고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데굴데굴 저만치 굴러갔던 완두콩이 저 스스로 돌아왔나. 의아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거절할 이유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칼리안은 기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어쩌면 이 기묘한 동행이 오늘뿐만 아니라 더 오래도록 지속될 지도 모르겠다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생각이 연기처럼 포근하게 주위를 감쌌다.

 

 

  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칼리안의 제안으로 헤이시아를 비롯한 고대 카이리스 왕가의 유적지를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칼리안은 느긋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온갖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아마 그 딴에는 행여라도 플란츠가 제 고집에 억지로 따라주어 기분이 안 좋을까 봐 신경 쓰는 것이겠지만, 정작 본인은 별 감흥 없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렇게 적당히 맞장구나 맞추면서 한가로이 발길만 놀리는데 돌연 칼리안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이런, 제가 너무 무심하게만 대꾸해서 결국 토라졌나. 달래는 일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는데―그리 생각하며 돌아본 눈앞에는 검은 머리 청년이 미묘한 얼굴로 서 있었다.

칼리안은 천천히 저를 돌아보는 뚱한 표정의 초록 머리 청년을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거 아세요?”

“뭐.”

“카이리스 왕가요. 개중에 어떤 왕은 폭군으로 알려졌는데, 그 사람도 플란츠 씨랑 머리 색이 같았대요.”

플란츠는 숨을 멈추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조금 전의 그를 따라 하는 것처럼 천천히 굳게 다물린 입을 열었다. 그 탓인지 이어진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차갑게 내어졌다.

“그게 뭐. 무슨 색인데.”

“네? 그야,”

“검색 결과에는 안 나왔나 보네. 내가, 색 구분을 전혀 못 한다고.”

“……아.”

그 왕이 집권하던 시대에 옆 나라의 미친 왕제(王弟)가 제 발로 그의 밑에 무릎을 굽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고. 별생각 없이 막 떠오른 것을 플란츠에게 알려주려던 칼리안은 그제야 제가 말을 잘못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 플란츠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듯했지만, 사실 칼리안이 검색해본 결과에는 방금 그가 직접 언급한 ‘그 사실’도 내용에 있었다. 가볍게 보고 넘기기는 했지만 분명 그런 이야기가 적힌 부분이 한 페이지 내에 존재했었다. 그걸 그리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되었는데. 이건 순전히 제 실책이었다. 단지 그 일화를 전해주려던 것뿐이면 굳이 ‘머리 색’을 언급하지 않아도 다른 화제로 충분히 서두를 열 수 있었을 터였다. 칼리안이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플란츠는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직전보다 덜 딱딱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나는 말을 해줘야 알아. 그게 무슨 색인지.”

“…….”

“그냥. 그렇다고. 너무 신경 쓸 건 없고.”

칼리안이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플란츠는 익숙하게 화제를 정리했다. 플란츠로서는 고양이가 괜히 의기소침해지는 게 싫어서 그랬던 건데, 더 아래로 내려가는 고개를 보니 아무래도 의도가 전혀 다르게 전해진 듯싶었다. 쯧. 플란츠는 칼리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혀를 차고는 검은 머리가 더 땅을 파고 들어가기 전에 이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달래거나 위로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인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말은 퍽 투박하게 떨어졌다.

“정말로 괜찮다고. …정 그러면, 가이드나 해주든가. 지금부터 오늘 한정으로.”

“네? 제가요?”

“아는 거 많아 보이던데. 아니었나. 아까 그 폭군이었다는 왕 얘기도 그렇고.”

“아니, 아니요! 맞아요! …그렇지만, 정말로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안 괜찮을 건 또 뭔데. 플란츠는 피식 가볍게 웃고는 멈췄던 걸음을 먼저 뗐다. 저벅저벅 빠르게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왕궁 유적지에 도착한 뒤로는 한가로이 이동하는 내내 제법 그럴듯한 관광이 이어졌다. 칼리안은 아는 것 많아 보인다는 추측에 걸맞게 눈에 닿는 곳마다 부가설명을 늘어놓았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헤이시아 궁을 보면서는 무너졌을 당시 거주했던 왕비가 광장에 레니시타 잎을 깔았다느니, 왕이 기거했다는 화려한 궁의 앞에서는 저곳이 저희가 묵고 있는 호텔이 이름을 따온 ‘카밀리아’라느니, 저쪽 궁은 체르밀이라고 불렸는데 왕세자 책봉 전 왕자들이 살았고 개중 드물게 왕위 찬탈을 노리다 탑에 갇히는 이도 있었다는 둥, 잡다하게 늘어놓는 비화들은 대개가 흥미본위의 역사저널에서나 볼 법한 것들이었다.

칼리안은 플란츠가 도중에 제지하거나 하지 않고 그런대로 흥미롭게 듣는 기색이자 흥이 났는지 기분 좋게 잘도 말들을 청산유수로 풀어내었다.

“특히 여기는 대대로 왕조가 하나뿐이어서 왕궁이 좋은 상태로 보존된 편이죠. 저쪽은 국왕 집무실이었던 아르피아, 이쪽 궁은 왕세자가 살았던 카밀론.”

“…잘 아네.”

“그런대로 관심이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모처럼 온 휴가니까 이것저것 알아봤죠. 아, 그거 아세요? 카밀리아에서 어떤 왕은 개를 키웠었대요. 그 전에는 체르밀에서 어떤 왕자가 고양이를 두 마리나 키웠다고 그러더라고요. 참 신기한 기록도 있죠?”

칼리안의 말이 끝나고도 플란츠는 잠시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 평소보다 퍽 높은 톤이 그의 기분이 나쁘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칼리안은 웃음기 띤 얼굴로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주시했다.

“카밀리아도 고양이를 키운 것 같은데.”

“네? 어, 확실히 그런 얘기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고양이도 키우고 개도 키웠나 보지. 마침 여기 있네. 고양이.”

“…….”

왕궁 유적지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들른―왕실 주최 대연회가 몇 번이고 열렸었다던 지그프리드관의 앞에서. 칼리안은 잠깐 제가 들은 게 무슨 뜻인지 가늠해보다가 한발 늦게 깨닫고는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믿기지 않게도 그건 말장난이었다. 그들이 머무는 중인 ‘호텔 카밀리아’와 왕궁 ‘카밀리아’의 이름이 같은 걸 이용했다는 건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은 어디에서 따온 말장난인지 깨닫고도 멍하니 텅 빈 머리만 굴리다가 뒤늦게 플란츠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크게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겨우 틀어막았다. 칼리안이 말실수를 했던 이후로 어딘지 모르게 그의 눈치를 봤던 분위기가 그제야 어느 정도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플란츠는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의 변화에 한참 늦게 후회가 치밀었다. 대체 제가 왜 그랬을까. 어쩌자고 뭐하러 그런 말을.

“아니,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못들은 걸로 쳐.”

“잠시, 잠깐만요! 플란츠 씨!”

당장이고 얼른 이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청아하게 쏟아지는 웃음소리가 그보다 한발 빨랐다. 칼리안은 반사적으로 플란츠의 소매 끝부터 붙잡고는 아예 배까지 잡고 크게 웃었다. 잡힌 게 거슬리는지 빼려는 힘이 느껴졌으나 그보다도 붙잡은 쪽의 힘이 더 셌기에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칼리안은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맺힌 눈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쳤다.

“하하, 그러네요. 고양이도 키웠네. 그럼 개는…… 형님이신가?”

형님이라니. 갑작스러운 호칭에 동글동글 완두콩 같은 플란츠의 낯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보고 칼리안은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영 기분이 나빴는지 혼자 훌쩍 가버리려는 플란츠를 급히 뒤쫓아갔다. 방심한 사이 어찌나 쏙 빠져나갔는지 손 틈에서 소맷자락이 사라진 줄도 몰랐다. 그 와중에도 귀 끝은 여전히 붉은 게 꼭 끄트머리만 겨우 익은 토마토 같기도 하고.

“어디.”

“네?”

“어디 갈 거냐고.”

무뚝뚝하게 떨어지는 말은 마디마디마다 기묘한 울림을 안겨주는 듯했다. 칼리안은 플란츠의 옆에 나란히 서면서 길고 고운 그의 손을 제 손안에 가볍게 감았다가 풀었다. 그런 뒤엔 이쪽을 돌아보는 뚱한 얼굴을 향해 샐쭉하게 웃었다.

“아, 음. 여기 근처에 호수가 있대요. 가볼래요?”

“…그러든가.”

이다음 가야 할 곳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제법 가까이에 있는 호수까지 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플란츠는 안전을 위해 세워놓았을 난간에 의지하고 기댄 채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수면을, 그 고요한 모습을 눈에 담았다. 볼 때마다 항상―비록 제가 색깔은 볼 수 없더라도 이 빛마저 못 보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반짝이며 일렁이는, 지켜보는 모든 걸 다 포용해줄 것만 같은 저 모습마저 제게 허락되지 않는다면 무심한 하늘이 너무하지 않은가. 심심하기 그지없는 적막하고 캄캄한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상상하며 살아가라고. 일말의 빛조차 들지 않는 암흑은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오지 않은 과거를 생각하며 지레 우울해지는 건 취미가 아니었다.

쓸데없는 공상이나 죽이며 혼자 그렇게 서 있는데, 별안간 훌쩍 어딘가로 사라졌던 칼리안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힐긋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잡힌 그는 양손에 소프트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든 채였다. 저걸 사러 갔던 건가. 하기야 이곳 전체가 관광지로 유명했으니 저런 가게쯤 하나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플란츠는 느긋하게 뒤돌아 이번에는 난간에 등가를 기대고 섰다.

“어떤 거로 드릴까요?”

“…하도 많이 짖어대서 뭘 까먹은 모양인데.”

플란츠는 별생각 없이 가볍게 들어온 물음에 덩달아 시큰둥하니 감흥 없는 얼굴로 답을 돌려주었다.

“네?”

“무슨 맛인데. 말로 해.”

“…아.”

아까도 했던 실수를 또 해버렸다. 칼리안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차마 시선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렸다. 플란츠는 그런 칼리안을 보며 픽 웃고는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것을 가볍게 휙 빼앗아갔다. 별로 이제는 딱히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괜히 심각하게 삽질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칼리안은 제가 백번을 괜찮다고 해도 백한 번을 그럴 수는 없다고 사과할 이였다. 말해봐야 말짱 도루묵이라면 그냥 번거로울 것 없이 처음부터 행동으로 옮기는 편이 나았다.

플란츠는 얼빠진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빼앗아 든 아이스크림을 가볍게 한입 물었다.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꽤 고급스러웠다.

“딸기 맛이네. 고마워.”

“…….”

칼리안은 멍하니 그 모습을 홀린 사람처럼 보았다. 그 순간 왠지 좀 더운 듯한 느낌이 뒤늦게 신경 쓰였다. 특별히 여기까지 달려왔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울림은 분명 낯설었지만 그만큼 명확한 뜻을 전해주기도 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어쩐지 조금 덥게 느껴지는 이 현상의 이름은 더 볼 것도 없이 하나밖에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다음 행동은 섬광처럼 금방 이어졌다. 칼리안은 드물게도 거리낌 없이 충동에 몸을 실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 파도를 놓치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만 막무가내로 그리 믿었다.

“그럼. 이쪽 것도 드셔보실래요?”

“…….”

그리 말하고는 제가 먼저 아이스크림을 핥는다. 그 노골적인 시선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플란츠는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는 손에 순간적으로 살짝 힘이 들어갔다. 바스락, 콘이 손끝에서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직후 저벅, 칼리안이 한 발 앞으로 다가오는 소리도 났다. 그의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이 무슨 색인지 저로서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플란츠는 문득 그게 빨간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빨강은 정열, 사랑의 색이라고 귀가 닳도록 여러 번을 들어봤기에.

실로 단순한 이유였으나 가끔은 단순한 논리가 세상을 구하기도 하는 법이었다. 플란츠는 그것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쩌면 저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직감인 듯 예감인 듯 모를 생각이 들었다. 틀에 박힌 저의 무채색 세계에 붉고 탐스러운 것 하나 추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서히 간격을 좁혀오는 칼리안을 보면서 온갖 공상들이 나타났다가 휘발되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생각을 담당하는 기능에 에러라도 뜬 듯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겨우 어제 처음 보았을 따름인 이에게 이토록 거짓말같이 마음이 끌릴 리가.

“…….”

“…….”

이윽고 아주 조심스럽게, 살포시 입술이 맞닿았다. 입술 사이로 느껴진 맛은 아주 묽은 데다 뭉개지기까지 해서 오렌지인지 레몬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어쨌거나 둘 다 ‘붉은색’은 아니라고 알고 있으니 제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었다. 저도 모르게 의지를 배반한 입꼬리가 저 혼자 위로 말려 올라갔다. 검은 청년이 움칫 떠는 게 맞닿은 입술 너머로 여실히 느껴졌다. 플란츠는 그게 조금 더 웃음이 났다. 저돌적으로 먼저 유혹할 때는 언제고.

그새 조금 녹은 아이스크림이 제 손가락을 타고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끈적끈적한 찝찝함은 느낄 새도 없었다. 생각보다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외려 그런대로 유쾌하고 좋기까지 했다. 머지않아 얌전히 맞붙어만 있던 입술이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천천히 고개를 든 칼리안은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가 퍽 웃긴 얼굴이었다. 플란츠는 보란 듯이 손가락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가볍게 핥으면서 침착하게 정적을 깨트렸다.

“세상은 원래부터 약자에게 한없이 불친절했어. 소수인 나보다 다수인 너를 기준으로 맞추는 게 당연히 훨씬 더 편하니까.”

“…그래서요.”

그제야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칼리안은 영 괴로운 듯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일렁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무슨 색으로 빛나고 있는지 저로서는 영영 볼 수 없다는 게 이제 와서 불현듯 조금 억울해졌다.

“그러니까. 좋을 대로 편하게 해.”

그가 그렇게 알려주는 것들로 저는 비로소 평범한 척할 수 있다. 호수를 유영하는 백조라도 일견 우아한 모습과 달리 물 아래에서는 힘차게 발장구를 쳐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그러니 저의 이 서툰 헤엄을.

“네가 도와주면 되잖아.”

“옆에서?”

“…옆에서.”

“아아, 그런 말은 제가 먼저 멋지게 하고 싶었는데.”

칼리안은 반쯤 소리치듯이 그리 말하고는 불시에 플란츠의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영 머쓱한지 언뜻 어색함이 느껴지는 기색으로도 그 얼굴에 스며든 웃음은 무척이나 달콤하게 보였다. 분명, 제가 남들처럼 그저 평범히 색을 볼 수 있었더라면, 그가 두른 색이 바로 ‘사랑’이었으리라.




판소처돌이 | 중독 유진른 문대른 | 리버스×

랑요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